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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6>-<7>/인천상륙작전, 첩보·양동 전략으로 대성공의 길 열었다

영국신사77 2020. 5. 3. 10:50

낙동강 방어선에 몰려온 북 2만1000명… 8200명의 사투로 막아내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6>

입력 : 2020-04-24 00:05
6·25전쟁 발발 40여일 만에 낙동강까지 내려온 북한군에 맞서 국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하고 있는 모습.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 
8월 1일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 바로 칠곡·왜관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 배수의 진인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칠곡은 왜관뿐 아니라 다부동 전투와 가산전투, 수암산전투, 유학산전투, 328고지전투, 
369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그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곳이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다부동은 대구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뚫리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그해 8월 15일 부산에서 통일기념식을 갖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여의치 않자 이날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1950년 8월 주인이 15차례나 뒤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낙동강 328고지.

적은 수중교를 가설해 낙동강을 넘어왔다. 동시에 주력부대를 다부동 일대에 집결시켰다. 전세는 아군에게 극히 불리했다. 병력 규모만 따져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북한군은 2만1000여명의 병력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대구 점령을 노렸다. 국군과 미군은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200여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가장 치열했던 328고지 전투
뺏고 뺏기는 전투는 8월의 날씨만큼 뜨거웠다. 다부동 일대의 주요 고지에선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8월 13일부터 12일간 전투가 벌어진 328고지에서는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했다.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전우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죽은 전우를 땅에 묻을 시간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더 끔찍한 것은, 고지 전체가 바위산이기 때문에 호를 파기 어려워 병사들의 시신을 방호막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등중사였던 황대형 노병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박형수 노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다부동 그 지역에 328고지라고 있어요. 거기에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와서 교두보를 확보했어요. 이제 제트기가 와서 네이팜 탄을 쏘고 뒤에서 미군 155㎜ 포가 사흘을 내리퍼부었어요. 푸른 산이 빨갛게 될 정도로 다 타버렸어요. 상부에서 328고지를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려와서 공격을 시작했는데 탄알이 비 오듯 떨어지는 거예요.”

류형석의 ‘낙동강’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328고지 정상 주변에 2,000여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328고지는 더 이상 인간 세계가 아니었다. 검게 탄 시체,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땅바닥에 널려 있고, 나뭇가지에도 걸려 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의 신음과 비명과 절규, 염천의 열기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시신의 배가 ‘펑’하고 터질 때는 수류탄이 날아온 줄 착각하고 또 한 번 놀랜다.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리고, 악취가 진동하여 숨을 쉴 수가 없다.”

낙동강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낸 워커 주한 미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영웅 워커 사령관은 전황이 불리한데도 다음과 같은 사수 훈령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이 먼저 부산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맥아더 원수가 보내기로 한 증원 병력이 먼저 도착하느냐가 문제이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철수나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분의 희생이 있었다. 이 땅의 자유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김재동 목사



인천상륙작전, 첩보·양동 전략으로 대성공의 길 열었다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7>

입력 : 2020-05-01 00:04/수정 : 2020-05-01 00:04
인천 옹진군 영흥면에 있는 해군영흥도전적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그해 8월 24일부터 영흥도에서 진행된 대북 첩보작전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배경에는 55일간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외에 중요한 작전이 하나 더 있었다. 엑스레이 첩보작전이다.

1950년 9월 15일로 예정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북한군의 배치 현황과 방어진지, 보급선, 해로에 매설한 기뢰 여부, 상륙지점의 지형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엑스레이’(X-RAY)라는 이름의 대북 첩보작전을 당시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에게 지시한다.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자신을 포함해 비밀리에 선발한 요원까지 총 17명으로 작전에 나섰다. 첩보부대 요원은 김순기 중위, 장정택 임병래 소위와 정성원 박원풍 차성환 한유만 홍시욱 하사관 등 모두 미혼의 총각들이었다. 기밀 유지를 위한 조치였다.

이 때문에 파혼당한 대원도 있었다. 장정택 소위다. 결혼식과 신혼살림을 함께 준비하던 예비신랑이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니 약혼자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파혼당했다.

8월 18일 0시 부산항을 출발한 비밀 첩보부대는 24일 인천의 관문인 영흥도에 잠입했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한 정보분석 임무는 장정택 소위팀이 맡았다. 인천 등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은 김순기 중위팀과 임병래 소위팀 등 3개 팀이 이 작전에 나섰다. 북한군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해 인천 시내로 잠입하거나 월미도의 해안 방어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작업 인부로 가장했다.

인천·수원 등을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첩보대원들이 통행증 문제를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9월 1일 영흥도에 은밀히 상륙한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 클라크 해군 대위가 이끄는 팀을 통해 극동군사령부로 송신됐다.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개시가 임박함에 따라 ‘모든 임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먼저 11명의 첩보대원들이 영흥도를 떠난다. 하지만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6명의 해군 첩보대원은 14일 대부도에서 온 북한군 1개 대대의 기습을 받는다.

이들은 영흥도 의용대원 30여명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 둘은 나머지 대원들의 탈출을 돕다 북한군에 포위됐다.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포로가 되면 작전이 탄로 날 것으로 판단한 두 사람은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당시 이들의 죽음을 먼발치에서 목격한 임승렬의 진술이다. “처음 진두리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10여리를 후퇴해 십리포쪽으로 갔는데, 적은 개미 떼처럼 쫓아옵디다. 민간인인 나와 몇 사람은 숲속에 숨었는데,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판단했던가 봐요. 홍병조는 소총으로 추격해오는 적을 사살하다가 총구를 가슴에 대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합디다. 임 소위도 45구경 권총으로 적 3명을 거꾸러뜨리고 권총을 이마에 대고 자결하고요. 이렇게 두 분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자결하는 것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에서 똑바로 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두 분은 자결 직전에 모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칩디다.”

엑스레이 작전의 성공 뒤에는 8월 20~21일 영흥도 상륙작전과정에서 6명의 전사, 엑스레이 작전 수행 중인 9월 14일 북한군의 추격과정에서 대한청년단방위대원 14명 전사,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 자결 등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5일에는 엑스레이 작전을 도왔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영흥도 주민이 50여명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9월 14일 경북 영덕 장사리 해안에서 전개된 장사상륙작전 장면.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이는 북한군을 속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전이 한참일 때 학도병들은 낙동강 전선으로 모여들었다. 학생 신분으로 소총만 받고 겨우 4~5일간 총 쏘는 기초훈련만 받고 참전한 학도병들은 전국에서 3만명이나 됐다.

이들은 많은 전투에서 군을 도우며 큰 공을 세웠지만, 희생도 많았다. 그중 희생이 가장 많았던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날인 9월 14일 경북 영덕 장사리 해안에서 벌어진 장사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은 772명이었다.

적은 장사리 해안에 2개 사단을 배치하고 집중적인 방어에 들어갔다. 아군의 기만전술에 적은 완전히 속았다. 이 작전으로 학도병 772명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나머지도 소수의 생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실종됐다. 작전당일 동해안에 심한 파도가 몰려와 절반가량은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실종됐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 피 흘려 싸운 수많은 무명용사의 희생으로 이뤄낸 기적이다. 나라를 위해 피 흘려 싸우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김재동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5641&code=231111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