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디모데후서 1-4장

영국신사77 2020. 4. 15. 19:05


디모데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진리 보수

2장: 좋은 일군

3장: 고통하는 시대

4장: 전도자의 직무

서론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터툴리안은 본 서신을 사도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O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xxv). 본서의 저작 연대는 주후 67년 이른 가을이나 68년 봄경일 것이다.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갇힌 때와는 상황이 달라 보인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고(딤후 4:6; 빌 1:25) 그의 주위에는 동료들이 거의 없었다(딤후 4:10-11; 골 4:10, 14). 그는 로마 감옥에 2차 투옥된 후 로마 황제 네로가 죽기 전 즉 주후 68년 6월 이전에 사형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전에 이 서신을 썼던 것 같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다. 신약성경을 수집한 초대교회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구원의 복음을 해설한 로마서를 맨 처음에 두었고,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거의 끝부분에 두었다. 그것은 이 세 개의 서신들이 일차적으로 일반 성도들에게보다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디모데후서의 특징적 주제도 목회 교훈이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후시대의 모든 목사들에게 앞으로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고난을 각오하며 진리를 보수하고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고 유언적으로 교훈한다.

디모데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진리 보수

2장, 좋은 일꾼

3장, 고통의 시대, 성경의 유익

4장, 전도자의 직무

1장: 진리 보수

1-5절, 문안과 사랑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뜻이나 주위 사람들의 뜻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대로 그의 원하시는 자들을 일꾼으로 부르시고 세우신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그의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다(막 3:1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라는 말은 복음의 중심 내용을 드러낸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약속이다(요 3:16).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이다. 그는 독신이었고 디모데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있었으나(고전 7:7; 행 16:1), 디모데는 영적으로 바울의 ‘사랑하는 아들’과 같았다.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더 친밀하고 값지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바울의 서신의 초두에서 항상 듣는 이 기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고 또 날마다 성화의 과정을 걷는다. 또 이 구원의 은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참 평안과 몸의 건강, 또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주신다.

[3-5절]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에피포데오)[간절히 원함](KJV, NASB, NIV)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은 밤낮 기도하는 중에 항상 디모데를 생각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바울은 디모데의 진실한 눈물을 생각하며 그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를 봄으로 그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원했다. 디모데의 눈물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증거했다. 그는 진실한 믿음의 청년이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며 회개의 눈물이며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전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런 참된 믿음이 있었고 그 동일한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도 있었다. 경건한 자녀는 경건한 가정에서 나온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중요하다.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대에 경건하고 거룩한 어머니들이 많이 필요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사모하며 그것을 누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며 그의 평안 중에 산다.

둘째로, 우리들도 바울과 디모데 같은 아름다운 동역자 관계, 성도 관계를 사모하며 이루어 가자. 모든 일을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은혜로 주신 눈물 있는 진실한 믿음을 본받자. 우리는 감사와 회개와 전도의 눈물을 가지자.

넷째로, 우리의 가정은 디모데가 자란 가정 같은 경건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하고 또 우리는 디모데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본받아 자녀들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6-11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6-8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심령임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복음을 위해 함께](NASB, NIV) 고난을 받으라.

사도들의 안수는 특별한 은사를 동반했던 것 같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사마리아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었다(행 8:17).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도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에게 주어졌다. 디모데는 그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해야 하였다. 그 은사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필요한 사명감과 열심과 충성심 등을 동반한 은사이었을 것이다.

디모데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심령을 주지 않으셨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자들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으로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며 특히 고난 중에서 그러하심을 보인다.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도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막 8:38). 주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성경 역사상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고난을 받았었다(히 11:36-37).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본문은 복음이 주는 구원의 근거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신 거룩한 부르심은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행하신 선택에 근거한 것이며 그 내용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있었다.

[10절]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났고,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로 확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의 확실함과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확증하였다.

[11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이방인들의](전통본문)1)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열매를 맺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이방인들의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것을 증거하였다. 특히 그는 이방인들의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 그가 쓴 13권 혹은 14권의 서신이 없었다면 신약성경은 크게 부족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필요 적절한 인물로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고 연구하고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신학적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혼란할수록 우리는 사도들의 교훈인 신약성경을 더욱 연구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과 영생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죽음과 부활로 확증되었고 사도들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으므로, 오늘날 구원받는 자마다 신약성경을 통해 구원받는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이 식어지지 않고 시시때때로 불일듯하게 되기를 기도하자.

넷째로, 특히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또 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종들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자. 우리는 항상 영적 전쟁과 같은 현실에서 오직 마귀에 작전과 꾀에 넘어져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또 어떤 환경여건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고난도 받아야 한다.

12-18절, 바른 말씀을 지키자

[12절]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를 인하여’는 앞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위해 전파자와 이방인들의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일 때문에’라는 뜻이다. 바울이 옥에 갇혀 당하는 고난은 복음 전도자로서 받는 고난이었다. 그가 전도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고난의 길이다. 사탄은 영혼 구원의 일을 가장 미워한다. 악한 자들도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복음이 세상의 악을 정죄하기 때문에, 악한 세상은 복음의 전파를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자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의뢰한 자를 알고 그가 자기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키실 수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뢰한 자란 모든 성도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또 바울이 의탁한 것이란 자기의 영혼과 생명 그리고 그가 사명으로 받아 힘쓰는 복음 사역과 그가 세운 교회들일 것이다. ‘그 날까지’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를 가리킬 것이다.

바울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 즉 바울이 현재 당하고 있는 부당한 고난까지도 보시고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결코 자기 백성과 사랑하는 종들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또한 전능하시므로 그의 참된 종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오직 그의 명령을 지키고 그 외의 일들은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바른 말들의 본 혹은 개요를]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 바른 말들의 본[혹은 개요]을 지키라”고 말한다. ‘지키라’는 원어(에케)는 ‘가지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주를 믿고 사랑함으로써 바른 말씀들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바른 말들을 지켜야 그것들을 바르게 잘 전할 수 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바른 말씀들을 굳게 지켜야 한다.

또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복음 전파의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전도의 직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에게 주신 전도자의 직무를 디모데는 끝까지 지키고 완수해야 했다. 그 직무의 수행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성령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시며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이다(요 14:16-17).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엡 1:13; 고전 12:13). 로마서 8:9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그 명칭 그대로 거룩한 영이시다. 그는 우리 속에서 거룩한 정신과 거룩한 마음을 주신다. 또 그는 ‘위로자, 격려자’이시다(요 14:16).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주신 직무를 행하게 하신다(겔 36:27). 디모데의 복음 전도의 직무도 디모데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잘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 즉 그의 전도자의 직무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완수하라고 교훈하는 것이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모든 사람’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모든’이라는 말은 때때로 제한적 의미나 대략적 의미로 사용된다. 아시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하였고 그를 버렸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을 버린 대표적 인물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다. 그들은 유명한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이와 같이 평탄치 않았다. 그가 곳곳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한두 사람이 바울을 버려도 인간적으로 괴로웠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했을 때 바울의 괴로움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셨던 바이었다. 요한복음 6:66-68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은 그의 입장이 강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부드러운 말을 좋아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이 만드는 성향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온전히 따르기보다 적당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또 그들은 악한 자들과 정면으로 싸우기보다 적절히 타협하고 절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대항하고 진노케 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든지 반대하든지 간에, 주의 참된 종들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옛날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악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잘못된 점들을 고치는 개혁을 단행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느헤미야 13:1, 3,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비록 반대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바른 교훈과 행동을 따라주었다. 우리는 오늘날도 이런 지도자들과 이런 개혁과 부흥이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16-18절]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얼마나 많이]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바울에게는 고난만 있은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위로도 있었다. 그것은 오네시보로의 집을 통해 받은 위로이었다.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내신 위로와 격려이었다. 우선, 그는 바울을 자주 유쾌케 하였다. 바울은 고난 중에 자주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바울을 기쁘게 하였고 그를 격려하였다. 또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믿음이 있는 성도이었다. 세상 친구들은 사람이 부유하고 평안할 때는 많으나 그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그를 떠나간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이다. 진정한 친구는 적다. 바울에게도 그러했다. 그가 옥에 갇히게 되고 사형을 받을 가능성이 많아졌을 때 소수의 친구들만 그의 곁에 있게 되었다. 오네시보로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었다.

또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을 때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아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바울을 수소문하여 찾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마침내 그를 만났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날마다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했을 바울에게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큰 위로이었을 것이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많이 섬겼었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얼마큼’이라는 원어(호사 o{sa)는 ‘얼마나 많이’라는 뜻이다. 오네시보로는 아마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오네시보로는 여러 일들에서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바울을 도왔고 섬겼다. 그것은 바울이 주의 종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소자(小子)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곧 그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주의 말씀을 지켰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말세에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의 바른 말씀을 보수하고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만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같이 참된 교회를 버리는 자가 되지 말고, 도리어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오네시보로같이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장: 좋은 일꾼

1-13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1-2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복음 사역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나 많은 사람이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고 진실한 일꾼들이 부족하므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디모데는 더욱 굳게 서서 말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해서 강해야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의(義)를 굳세게 믿고 의지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 마귀의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하였다. 그가 바울에게 들은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 등에 관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에 담긴 내용들이다. 위의 사실들은 ‘많은 증인 앞에서’ 확증된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였다. 그 사실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들이다.

기독교는 꾸며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예수님은 꾸며진 인물이 아니다. 만일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지 않으셨고 기적들을 행하지 않으셨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지 않으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고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해 증거되고 확증된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충성된 사람들’이란 진실하게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충성된 자는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나 환경여건에 따라 변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항상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믿을 만한 자이다. 디모데는 자기가 받은 복음을 이런 충성된 자들에게 전수해야 하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며 계승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참된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이다. 교회는 이런 계승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에 전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받고 배워 자신이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잘 가르칠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경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실천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충실히 가르칠 자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3-4절] [그러므로](전통사본)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전통사본에는 없음)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 중에서 고전분투하면서 전도의 일을 하였듯이, 디모데도 이제 고난을 감당하며 일할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전도는 전쟁에, 그리고 전도자는 군인에 비유할 수 있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도 사역을 방해하며 전도자들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전도와 교회 사역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일이다. 전도자들은 군인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훈련이 있으면 언제나 참여해야 하고 비상이 걸리면 언제나 출동해야 한다. 군인은 언제나 출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군인은 몸이 피곤하다거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고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군인은 그를 부른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 그들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국민들은 평안히 생활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물론 전도자들이 자기 집을 내버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6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교한다. 선수들은 규칙들을 지키며 경기를 해야 한다. 달리기 선수들은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축구 선수들은 공을 손으로 치거나 상대방 선수의 발을 걸거나 차거나 하는 등의 반칙을 해서는 안 된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선수들은 반드시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한다. 바울은 또 복음 사역자들을 농부들에 비교한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공급해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하게 수고하고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부들이 이런 수고를 했을 때 곡식을 거두는 기쁨과 복을 누릴 것이다.

[7-9절]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해야 하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해주신 규칙대로 행동해야 하고, 또 부지런함과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계시로 받은 복음에서 증거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도 증거된 바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는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고 그의 죄 없으신 인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고난받는 그의 모든 제자들의 본이 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이 고난 가운데서 일하지만, 그 결말은 복된 승리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을 받았고 죄수로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의 복음은 갇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망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은 삼 백년이 되지 않아서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동안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동굴에서 신앙을 지켜 왔다. 과거에 일본 군국주의의 기독교 핍박이나 그 후 공산주의의 기독교 탄압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 없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자유의 복음이며 아무도 그 자유의 복음을 매어둘 수 없었고 또 앞으로도 매어둘 수 없을 것이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은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그를 믿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한다. 구원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그것은 의(義)와 선과 진실이 충만한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세계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며(벧후 3:13),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의 일들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11-13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지만 이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2-33). 우리의 믿음은 보잘것없고 우리의 마음은 약하지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진실하시며 신실하시고 언제나 믿을 만하시다. 그는 결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또 굳게 믿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로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의 결과로 택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구원은 영원하며 영광스럽다.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주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일할 때 고난을 각오하고 맡은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풍조와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적 사도적 복음 진리와 교훈들의 계대(繼代)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는 시시때때로 충성된 청년들을 불러 성경의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신학 교육의 일이다. 그것이 참된 제자 훈련이다.

셋째로,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시인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함께 살고 함께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다.

14-19절,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

[14절]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주](전통본문)2)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복음의 일꾼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수고하며 인내할 것을 기억해야 하고 또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일꾼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고 결국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말다툼은 마귀가 기뻐할 뿐이다.

[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은 1:13에 말한 ‘바른 말’ 곧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가리키며, 2:2에 언급한 ‘내게 들은 바’이며, 2:8에 말한 ‘나의 복음’이며, 2:9에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이며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옳게 분변한다’는 원어(오르도토메오)는 ‘바르게 해석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전달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근거 없이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어떤 본문을 성경 다른 곳의 명백한 진리와 충돌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읽게 되지만, 우리가 점점 성경을 알면 알수록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고, 각 문장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또 앞뒤의 문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불명확한 부분들은 명확한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설함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자기 임무를 다 하는 일꾼이다. 일꾼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된’이라는 원어(도키몬)는 ‘시험된, 증명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바른 말씀의 봉사자가 되는 데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어 다른 이들과 어린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도 교훈이 된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16-17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망령된’이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불경건한, 가치 없는’(Thayer, BDAG)이라는 뜻이다. ‘헛된 말’이라는 원어(케노포니아)는 ‘헛된 변론’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그리고 때때로 교회 안에도 망령되고 헛된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불경건하고 가치 없고 헛된 논쟁들이 그러하다. 주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보수하고 바르게 해석하며 속되고 헛된 말들, 불경건하고 무가치한 논쟁들은 피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왜냐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독한 창질’이라는 원어(강가이나)는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암과 비슷하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바로 이러한 무서운 병과 같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조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몸을 버리게 된다. 이단이 그러하다. 교회가 이단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단자들의 이름인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했다. 오늘날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비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이단자들을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절]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불경건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그릇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오류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과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허물어졌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 . .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3)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바르트는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니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얼마나 더 불신앙적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대교단들과 우리나라의 몇몇 대교단들이 이런 이단적 사상들을 배격하지 않고 용납하였고, 그래서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개신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변질되고 부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배교의 큰 죄악이요 교회의 불성실이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는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이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과 이단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복음 진리 곧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을 말한다고 본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열거한 진리들은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이며 이런 진리들은 다시 닦여져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택한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이단사설들이 많은 세상에서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바른 진리를 믿고 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다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이다.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성도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는 참 성도의 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불의는 도덕적 악뿐 아니라, 비진리와 이단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리적, 윤리적 악에서 떠나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불경건한 이단사설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각종 이단종파들과,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확신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진리들을 다 믿고 교리적 이단사설들과 윤리적 죄악들로부터 떠날 것이다.

20-26절, 귀히 쓰는 그릇

[20-21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큰 집’ 곧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쓰레기통이나 오물통 등으로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주의 종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 이단사설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교리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모든 이단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사상, 바른 교리 사상을 가져야 주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소유한 종이다. 그런 종은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이다.

[22절]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들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 죄악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시험은 가까이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비록 집주인은 진실을 알지 못하고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치 않으려 애쓴 경건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와 그의 하는 일에 복을 주셨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은 참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모든 미움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며 또 다른 이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자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참된 교회이다.

참된 교회는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여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의는 모든 죄와 불의와 악에 반대되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는 성경적 행위이다. 그것은 세상 표준이나 세상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와 다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을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모든 윤리적 선을 포함하는 가장 고상한 덕이며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이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또 우리는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교만한 마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마 11:29). 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특히 주께서 귀히 쓰는 그릇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그릇들을 교회에서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23-24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주의 종들이 소유해야 할 덕들이 있고 반대로 버려야 할 악들이 있다. 주의 종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용어나 명칭이나 표현상 문제로 다투는 말다툼이나 중요성이 없는 지엽적 문제로 다투는 것이나 불경건한 변론들을 말할 것이다. 그런 변론은 어리석은 변론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이런 성품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성품이다. 지도자가 이런 성품이 없고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이었다. 민수기 12:3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한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눈물과 더불어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25-26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징계한다’는 말은 ‘교훈한다, 교정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교훈하고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혹시 그들이 회개하여 진리를 알게 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들도 회개하여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26절은 다시 번역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원문, KJV, NASB, NIV). 우리는 다 과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오직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고 믿고 오직 그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신학이 바로 그 말씀이라고 믿는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적 욕망의 죄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에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특히 다투지 말고 온유함으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온유함으로 그들을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특히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과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모든 성도들이 힘써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성화의 목표이다.

3장: 고통하는 시대

1-5절, 고통하는 시대

[1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주의 종들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주의 종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런 때가 닥칠 때 우리는 그런 풍조를 거스르지 못하고 영향을 받거나 낙심하게 될 것이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 ‘고통하다’는 원어(칼레포스)는 ‘다루기 어렵다, 위험하다’는 뜻을 가진다. ‘때’라는 원어(카이로이)는 ‘때들, 시대들’이라는 뜻이다. 장차 우리가 대처하기 어렵고 위험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시대가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종종 있을 것을 암시한다. 과거에 이런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2-5절] [이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부인할 것임이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본문은 앞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2절부터 5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 이유로서 19가지의 내용을 언급한다.

첫째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사람들의 이목(耳目)과 사회의 여론 때문에 이기적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의 하나는 이기심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함이 없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배려함이 없을 것이다.

둘째로,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이다. 그것이 탐심이다. 이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의 또 하나의 요소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딤전 6:10). 돈 사랑, 그것이 말세의 특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은 자긍할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고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고 자기를 내세울 것이다.

넷째로, 사람들은 교만할 것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자기를 크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교만하여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크게 여길 것이다.

다섯째로, 사람들은 훼방할 것이다. ‘훼방하는’이라는 원어(블라스패모스)는 ‘남을 악하게 비난하는, 몹시 욕하는’이라는 뜻이다(Thayer). 선한 사람은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주려 할 것이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남을 악하게, 모욕적이게 비난할 것이다.

여섯째로, 사람들은 부모를 거역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지만, 말세에는 사람들이 악하여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할 것이다.

일곱째로, 사람들은 감사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말세에는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여덟째로,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죄와 불경건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깨끗하고 정결함을 말한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죄악된 일을 좋아할 것이다.

아홉째로, 사람들은 무정할 것이다. 무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인정이 없음을 말한다.

열째로,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하려 하지 않고 악한 보복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열한째로, 사람들은 참소할 것이다. ‘참소하는’이라는 원어(디아볼로스)는 ‘남을 중상하는, 거짓말로 비난하는’이라는 뜻이다(Thayer). 말세에 사람들은 남을 중상하고 거짓말로 비난할 것이다.

열두째로, 사람들은 절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술의 절제뿐 아니라, 말이나 감정이나 오락의 절제 등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열셋째로, 사람들은 사나울 것이다. 악한 자의 특징은 사나움이다. 그것은 온유하고 양순한 성품과 반대이다. 그것은 노아 홍수 심판 때의 세상 사람들의 강포한 모습과 같을 것이다(창 6:11, 13).

열넷째로,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이다. 그러나 사회가 심히 타락하면 사람들이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다.

열다섯째로, 사람들은 배반하여 팔 것이다. 그것은 의리를 깨뜨리고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을 말한다. 배신은 일반적으로 악한 일이다. 특히 가룟 유다처럼 의로운 선생을 배신하는 것은 큰 악이다.

열여섯째로, 사람들은 조급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모든 일을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겠지만, 지혜 없고 어리석은 자는 조급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열일곱째로, 사람들은 자고(自高)할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곧 교만이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또 남에게 무례한 말을 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

열여덟째로, 사람들은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쾌락이 다 나쁜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이 있지만(전 5:18), 사람들은 경건 생활을 위해서보다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쓸 것이다.

열아홉째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름이나 교회 다니는 모양이나 교회의 직분은 가지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정한다. 정말 진지하게 믿고 기도하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적 무신론자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열아홉 가지 내용들을 열거한 후에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교훈했다. ‘돌아서라’는 말은 ‘그들을 피하라, 그들과의 교제를 끊으라,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참된 성도가 아니므로 우리의 교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가 악에 감염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운동은 숫자 운동이나 재력 운동이 아니다. 진리 운동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내고 그들로 하여금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게 훈련시키며 오직 천국에만 소망을 두게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숫자가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고 재정이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다. 땅 위의 참된 교회가 항상 외적 영광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남을 악하게 비난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으며 거룩하지 않으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거짓말로 남을 비난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신을 높이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다. 이런 시대가 벌써 왔다.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오늘 시대를 분별하며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6-12절, 바울의 간증

[6-7절]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메데포테)[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 중에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들은 죄를 중히 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죄는 누적된 무거운 짐이었다. 또 그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된 자들이었다. 죄악된 행위는 죄악된 욕심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면 그 마음부터 깨끗해야 한다. 또 그 여자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죄를 버리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교훈이므로, 참된 회개가 없이는 아무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고 죄사함과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8-9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생각]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임이니라.

얀네와 얌브레는 유대 전통에 출애굽 당시 모세를 대적했던 인물로 알려졌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했던 자들도 그들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저들을 세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진리, 곧 사람이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진리를 대적했다. 둘째로, 그들은 생각이 부패한 자들이었다. 사람의 부패는 그 생각의 부패에서 시작된다. 생각의 변화가 없이는 참된 회개도, 믿음도 없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생각의 변화가 참으로 중요하다. 셋째로,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믿을 것이나, 버려두신 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 믿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다. 저 악한 자들이 이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고 생각이 부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은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다.

[10-11절] [그러나]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나의 교훈’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가리킨다. ‘행실’은 그의 복음에 합한 행실을 가리킨다. ‘의향’은 그의 행위의 목적을 말하며,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며, ‘사랑’은 주의 계명의 요점이며, ‘인내’는 사랑의 덕이다. 고난 중에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들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기록된 핍박과 고난의 일들이다. 그는 그 도시들에서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다”고 말한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며 그가 당한 고난을 다 보았다. 그는 바울과 함께 가까이 활동하면서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가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오래 참고 인내했는지, 또 그가 어떤 핍박과 고난들을 받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모든 것들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가 순교해야 할 때가 되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세상의 모든 일을 통치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는 바울을 많은 핍박과 고난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 건져주셨다.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 자신이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진실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사실이었다. 한국교회도 일제 시대와 공산 정권 하에서 그러했다. 성도를 위한 핍박이 다 끝난 것은 아니고 아직도 남아 있다. 진실한 성도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면서 믿음과 충성으로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여성도들은 본문에 언급된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죄를 중히 졌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렸고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다. 여성도들은 어리석은 여자처럼 되지 말고 죄를 버리고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대적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바울 당시에도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생각이 부패되었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교회에서는 때때로 이런 자들이 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것을 믿고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바른 교훈, 바른 행실, 바른 의향, 믿음, 오래 참음, 사랑, 인내, 핍박과 고난의 견딤을 본받아야 한다. 아니,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핍박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주님의 위로와 보호와 구원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르자.

13-17절, 성경의 효능

[13-14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이 세상은 악하며 속이며 속는 세상이며 그런 성질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 이런 세상일수록 하나님의 종들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한다. 디모데는 이미 배웠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먼저 잘 배우고 그 배운 진리를 확신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이 세상 풍조와 해이해지고 세속화된 교회의 풍조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 성경적 신앙을 붙들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디모데는 하나님과 성경의 바른 진리를 배웠던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했다. 좋은 선생은 좋은 지식을 줄 것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잘 전달한 선생들이었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들의 교훈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지식, 믿음, 분별력, 입장, 인격, 삶을 기억하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은 진리를 보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기 위해서 그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듯이, 오늘날도 바른 진리를 배운 자들은 그 진리를 가르쳐준 자를 기억하는 것이 그 진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는 데 도움이 될 두 가지 지식은, 첫째 그가 누구에게서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배웠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며, 둘째 그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알았던 성경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특히,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일이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은 성경 대신에 세속적인 오락에 빠져 있다.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영어, 피아노, 태권도를 가르칠 줄 알아도 성경 읽기를 가르칠 줄 모른다.

성경은 두 가지 중요한 유익을 준다. 첫째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유익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구원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날 교회들은 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교리적으로 빈약해지는 것 같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며 웃기고 울리는 감동적인 말들, 즉 허탄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딤후 4:3-4). 이것은 교회의 세속화의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고 강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엑세르티스메노스)[온전히 준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한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39권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도의 시와 간증과 고백인 시편이나, 남녀간의 사랑의 시처럼 보이는 아가서나,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는 에스더서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어 된’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성경의 신적 원천과 신적 권위를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말씀이며, 성경의 사상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상이다. 또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각 책의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주요한 사상들에 있어서만 영감된 것이 아니고 그 모든 부분들, 예를 들어 그 역사적 사실들, 인명, 지명, 숫자까지도 영감되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성경의 각 단어들까지도 영감되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16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네 씨’라는 말이 복수명사가 아니고 단수명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임을 증거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 성경은 유익한 책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이란 교리적 내용과 행위적 내용을 다 포함한다. 신앙생활에는 교리적 사상과 행위와 삶이 다 중요하다. ‘책망’은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의 오류나 행위적 잘못을 다 가리킨다. ‘바르게 함’은 잘못의 교정이다. 우리는 성경의 책망을 통해 사상적, 행위적 결함을 고치게 된다. ‘의로 교육함’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한 성경의 목표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으나, 우리의 인격과 삶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히 준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두 번째 유익이 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게 하는 유익이 있다. 구원의 목표는 우리로 선한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며 성경은 이 일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지식과 인격의 훈련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 완전 성화 상태인 천국에서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성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진리의 진리 됨, 새 생명의 생명 됨을 증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된 의로운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선한 일들 중 첫 번째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다. 전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다. 그것은 죄인을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영광스런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을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행함으로써 교리-사상적인 온전함과 행위-윤리적인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인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원하신다. 선한 일 중의 첫 번째는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준비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죄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전도의 일과 그 외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 일들에 쓰임 받을 것이다.

4장: 설교자의 직무

1-5절, 설교자의 직무와 고충

[1-2절] [그러므로 내가](전통사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나타나실 때에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 앞에서](전통사본)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온전히]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설교와 전도의 직무를 엄숙히 명한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부분에서 성경의 유익에 관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구원받은 자로 의로운 인격자가 되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게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맡기신 일차적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일을 엄숙히 명한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재림하신 주 예수께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 형벌을 당할 것이다. 디모데가 전해야 할 말씀은 일차적으로 복음 진리이며 또 ‘바른 교훈’ 곧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니고 선포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견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토론할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선포하면 된다. 설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목사들이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다. ‘항상 힘쓰다’는 원어(에피스테미)는 ‘준비하다, 집중하다’는 뜻이다(Thayer, BDAG).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즉시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많은 죄인들이 지옥 곧 영원한 멸망의 불못을 향해 가고 있다. 또 구원받은 영혼들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듣고 배워야 한다.

‘온전히 오래 참으라’는 말은 설교 사역이 어려운 일임을 암시한다. 영혼들의 구원과 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죄성과 인격의 결함은 매우 느리게 변화되는 것 같다.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기도 하며 또 믿는 자들의 연약한 모습들을 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설교자를 낙망케 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과 경책함과 경계함과 권면함을 포함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며 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 그러나 전도와 양육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에 대한 책망과 경계도 필요하고 권면도 필요하다.

[3절]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우크 아넥손타이)[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좇을 것임이니라].

목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하기를 힘써야 할 이유는 고통하는 때,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어렵고 힘든 날들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물론 역사상 교회들이 부흥하는 때도 있었으나, 교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고 속화되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을 것이다. 바른 교훈은 역사적 기독교, 즉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바른 교훈, 신구약 성경책에 밝히 계시된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이 옛신앙이다. 그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 즉 생활교훈으로 구성된다. 바른 교리의 요점은 속죄의 복음 진리이다. 이것을 좀더 체계적으로 진술한 것이 신학이다. 옛날부터 믿어온 기독교 신앙은 바른 신학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무엇이며 특히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가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지,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내세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바른 윤리는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등의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이런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이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 곧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말들의 주제는 천적(天的)이거나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다. 그런 소원은 육신적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킬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바른 교훈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 대신 헛된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허탄한 이야기’라는 원어(투스 뮈두스)는 ‘신화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이것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무가치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화들이나 과장된 간증들도 이런 유와 가깝다. 우리는 헛된 말들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시대에도 목사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은 네 마디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명령어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것이다. 목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깨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그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변질되기 쉬울 것이다.

두 번째 명령어는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고난을 각오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은 목사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주의 참된 종들이 고난을 각오하고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세 번째 명령어는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것이고, 네 번째 명령어는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목사의 일차적 직무는 설교이다. 또 설교의 일차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주께서 교회에 맡기신 최대의 과제이다. 물론, 설교는 복음을 전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전도와 교훈과 책망과 경계와 권면, 즉 설교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어려운 시대를 당하였을지라도, 목사들은 이 설교의 직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변질시키거나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에 맞춰 절충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타협 없이 충실히 선포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설교자의 직무와 고충을 증거한다. 설교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설교자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의무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일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온전히 오래 참고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한다. 우리는 담임목사가 이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다. 오늘 시대는 교회와 교인들이 성경의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사모하기보다 육신적 흥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다. 교회가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 같다. 오늘 시대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저버리는 배교와, 그 배교를 책망하지 않고 용납하는 타협과, 또 진리와 비진리가 뒤섞이고 은사주의가 만연한 혼돈의 시대이다. 청년들은 믿음이 없고 바른 교리와 거룩한 삶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참된 목사들은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현재 상태는 어떠하며 미래의 방향은 어떠한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행하여 성경의 바른 교훈만을 충실히 계속 선포하고 가르치고 믿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6-8절, 사명의 길

[6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유언적 서신이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 로마 옥에 갇혀서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이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보인다. ‘관제’(灌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제사 방식을 말한다. ‘부음이 된다’는 말은 ‘부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암시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붓고 있었다.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다. 전도자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바울의 순교의 죽음은 그가 전파했던 복음을 확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쳐진 복음이다.

‘떠날 기약’이라는 말은 죽을 때를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고 있다. 죽음은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성도의 영혼은 거기서 임시로 거하다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와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의 사명의 생애를 세 마디로 표현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성도의 생애가 싸움의 생애임을 보인다. 그러나 그 싸움은 선한 싸움이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이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악성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와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엡 6:12). 전도와 설교는 큰 싸움이다. 바른 말씀의 전파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사명의 길은 싸움의 길이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도, 진리를 보수하는 것도 싸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싸움이든지 싸움은 언제나 힘들고 피곤해지고 지치기 쉽다. 영적 싸움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과 목사의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말은 바울이 어떻게 사명의 길에 충성했는지를 증거한다. 바울의 ‘달려갈 길’이란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의 일, 곧 전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하였다. 사도행전 20:24에 보면,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다 마쳤다. 사명자는 중간에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명의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달려야 한다.

“내가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의 귀중함을 증거한다. 지킬 것 중에 지킬 것은 믿음이다.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생명이며 보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지켰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순수한 성경적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한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의(義)를 가리킨다고 본다. 성경 다른 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과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께서는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바울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장차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다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서 인류가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나뉠 때, 바울은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받을 의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의가 아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한 것을 말한다. 성도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롬 10:4)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1-22). 이 의는 바울에게만 주실 복이 아니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주실 복이다. 성도는 예수님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덕목이다. 모든 믿는 자는 마지막 심판날에 의를 얻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속의 죄성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마귀의 시험과 싸우는 싸움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달려갈 길을 잘 마치자.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자로서의 일평생의 삶이 있고 또 교회의 직분과 사명이 있다. 우리는 신자로서와 직분자로서 우리의 달려갈 길을 잘 마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잘 지키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영생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한다.

넷째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날에 주실 의를 사모하자.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마지막 날에 그 의를 확인받을 것이다.

9-22절, 복음 사역의 어려움들

[9-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갔음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자기에게로 오기를 요청했다. 그 이유는 동역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복음 사역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부족일 것이다. 데마는 골로새서 4:14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안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갔다. 그에게는 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고 그에게서 세상적 소망이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생각에, 바울은 속이는 자요 그가 전하는 복음은 속임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우리는 그들이 그곳으로 간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 바울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바울 곁에 있지 않다. 옥에 갇혀 부자유스럽고 나이 많은 사도 바울 곁에 그를 도울 수종자가 없었다.

[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누가는 의사로서(골 4:14) 바울과 더불어 전도 활동에 참여했고 지금도 바울 곁에 있고 아마 의술로도 그를 도왔을 것이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어졌고,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었다.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곁에 필요한 동역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 20절 이하에도 몇 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중요한 일꾼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마가는 바울의 처음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함께 있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강하게 거절하였었다. 이런 신념 때문에 바울은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했었다(행 15:36-41).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마음이 약했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다.

복음 사역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충성된 일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도 바울에게 동역자가 부족했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디모데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누가도 있었다. 또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다.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동역자의 부족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춥고 배고프며 기타 육신적 고통이 있는 곳이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21절).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노 사도가 밤의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추위는 복음 사역의 어려움의 한 면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 일에 힘썼고 성경말씀을 읽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디모데에게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하였다. 그 책은 물론 성경책이다. 원문에는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들, 즉 여러 개의 두루마리들을 의미한다. ‘가죽 종이’라는 원어(멤브라나)는 양피지 즉 양의 가죽을 말려서 만든 종이를 가리킨다. 바울은 배고픔과 추위가 있는 옥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평안할 때, 건강할 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더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는가?

[14-15절]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복음 사역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이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20에 언급된 인물 즉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인 그 알렉산더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인이었던 것 같다. 직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처럼,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처럼, 그는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다. ‘해를 많이 보였다’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이다.

또 그는 바울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무시했고 그와 변론했고 그의 말씀을 심히 대적했었다. 이런 자들이 구약교회 안에도, 신약교회 안에도 있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파하였던 예수님에게도, 바울에게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회 사역에 때때로 대적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복음 사역에는 항상 그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진실한 성도는 이런 자를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가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다. 주의하면 된다. 우리는 이런 자들과 동류가 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과 사귀면 시험에 들기 쉽고 신앙에 유익 대신에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현세에서도 그들의 악을 보응하신다. 그것은 악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일이 너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뿐 아니라, 또한 때때로 외로이 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변명할 때 그의 편에 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사역의 걸음인가! 이것이 진실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때때로 가야 했던 길이다. 노아가 이 길을 갔고 엘리야도 갔고 다니엘도 갔고 바울도 갔다. 우리도 가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다. 바울은 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었던 사람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긍휼과 사랑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눅 23:34).

[17절]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적자가 있었고 또 사람들의 지지나 격려는 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이 있었으나, 주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강건케 하셨다. 목사의 용기와 힘은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있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것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복음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이다. 주께서 목사들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 택한 백성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사자의 입’이라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무서운 악의 세력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하신다’는 원어(소죠)는 ‘구원한다’는 뜻 외에 ‘지킨다’는 뜻도 있다. 이 경우는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지킨다’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KJV). 주께서는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주의 신실한 모든 종들과 자녀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만 신실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주’는 대부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시고 일하시며 신적 영광을 받으시는 참된 하나님이시다.

[19-2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가족]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오네시보로의 가족 등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는 동역자들이었다(롬 16:3-4; 딤후 1:16-18). 또 바울은 에라스도, 드로비모, 으불로,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교회들의 모범적인 봉사자들이었던 것 같다. 특히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는 원어(트로피몬 데 아펠리폰 엔 밀레토 아스데눈타)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었다. 사도들이 다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 말기에 그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말기에 주께서 병고침의 은사를 점차 거두어 가신 증거인 것 같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기적이 사도시대 이후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다니엘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이 거두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말씀을 정리해본다. 복음 사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동역자의 부족이 그 첫째의 어려움이다. 본문에서 ‘추위’로 표현된 육체적 고난, 감옥에 갇힘, 의식주의 궁핍 등이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대적자가 있고 교인들이 참된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 또 하나의 어려움이다. 복음 사역에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 때때로 이런 유의 어려움이 있다. 참된 교제를 나눌 대상이 없음, 의식주의 궁핍,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 등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는 디모데, 누가, 마가 같은 몇 명의 동역자가 있었다. 또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일에 힘썼고 성경 읽기에 힘쓰고자 하였다. 더욱이, 사람들은 그를 버렸을지라도, 주께서는 그를 도우셨고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끝날까지 그를 지키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여 변절하지 말고, 바울과 디모데처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되고 충성된 동역자가 되자. 또 마가처럼 처음에는 연약했을지라도, 나중에 복음 사역에 유익한 일꾼이 되자. 우리는 구리장색 알렉산더같이 참된 사역자를 대적하지 말고 또 그런 자를 동조하지도 말자. 우리는 어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쓰자.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심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자.

미주

1) Byz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2) Byz A itd vg syr(p) copsa-mss bo-pt 등이 그러함.

3) 교회교의학, 4권, 1부, 335, 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