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디모데전서 1장: 바른 교훈 - 6장: 자족하는 생활

영국신사77 2020. 4. 15. 19:04


디모데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8월 22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바른 교훈

2장: 기도와 선행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6장: 자족하는 생활

서론

디모데전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본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하였다(Stromata, 2. 11; 3. 6). 터툴리안도 본서를 인용하면서 바울의 진술이라고 말하였다(On Prescription against Heresies, 25).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만일 바울이 주후 62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에베소 부근에서 약 1년간 일하고 그 후 서바나에서 약 2년간 일하였다면, 그는 마게도냐로 돌아오는 길에 어디에서 본 서신을 썼을 것이다(딤전 1:3).

디모데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목회 교훈이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와 디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목회서신’으로 불린다. 그것은 이 서신들이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특히 이 서신들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좋은 일꾼, 충실한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서신들은 목회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많은 진리와 교훈을 준다.

디모데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바른 교훈, 거짓 교사를 책망할 것

2장, 기도, 여성의 단장과 역할 제한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그 아내들의 자격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일들

6장, 자족하는 생활

1장: 바른 교훈

1-2절, 문안

[1절] 우리 구주 하나님과.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이사야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11).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자주 표현하지만, 그를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만, 그것들은 참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에스겔 7:19는 환난 날에 금과 은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며 인간은 죄의 결과로 온갖 불행한 일들과 사망과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죄와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다른 그 어떤 이도 우리를 죄에서 건져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바울은 예수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증거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께서 재림하실 때 악인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되어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골 1:28)이시며 ‘복스러운 소망’이시다(딛 2:13).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주 예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늙고 병들고 쇠약한 시간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거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신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인데(롬 1:1) 하나님께서 ‘너는 사도가 되어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순종하였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한 것처럼(사 6:8),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를 따른 것처럼(마 4:19-20), 바울도 그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엡 2:8).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다.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혹은 단순히 믿음 안에서 아들처럼 여겼다는 뜻일 것이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하다.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영적 가족관계는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3:33, 35). 교회는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의 모임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날마다 부족과 실수를 씻음 받고 신앙생활을 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간다. ‘평안’은 죄씻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며 또 거기에 더하여 주시는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 또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사도 바울의 축복의 기도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복이며 우리 모두가 항상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바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자. 둘째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 안에서 영적인 한 가족임을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3-11절, 다른 교훈을 경계함

[3-4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계획]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다. 여기에 어떤 사람들은 교사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했던 자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른 교훈은 금지되어야 했다. 세상에서는 별별 말들이 많아도, 교회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교훈에 있다.

교회는 교훈의 통일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의 일치를 말한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과의 일치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만 바른 교훈의 기준이다.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객관성 있는 바른 해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즉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의 말씀이다. 그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니고 사실이다. 족보는 육신적 혈통을 말한다. 그것이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으나, 진리와 생명의 보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르지만, 진리 사상으로 말하면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였고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 사상의 계대(繼代)이다. 사실상, 육신적 족보는 헛되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는 성경적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사도들의 참 계승자이다.

사도 바울은 신화나 족보 이야기 같은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죄인들을 향한 그의 구원계획을 가리킨다. 그 계획이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진행됨을 말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의 충만과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이다. 참된 교훈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한다. 그러나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믿음을 위하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다. 변론은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한다. 그런 변론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으며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5-7절]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경계의 목적’ 즉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다.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하고 죄를 씻음 받은 마음을 가리킨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힌다. 그러나 회개와 죄씻음을 통해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고 또 계속 씻음 받음으로 깨끗해진다.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킨다. 양심은 고의적 범죄로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진실한 순종생활로 선한 양심을 간직해야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모양만이 아니고 작을지라도 진실하게 믿기 시작한 믿음을 가리킨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참 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웃사랑은 도덕법의 완성이다. 구원받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와 교훈의 목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말에 빠져 있다. 그들은 바른 말에서 떠나 허탄한 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고 잘못된 교사들이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다.

[8-11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법 있게 쓴다’는 말은 ‘정당하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저 율법교사들처럼 허무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 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 진리에 맞게 그것을 적용한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다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의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롬 3:20). 바울은 15가지의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불법한 자 즉 율법을 거슬러 행하는 자, 복종치 않는 자 즉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망령된 자 즉 세속적인 자,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 즉 부모를 구타할 뿐 아니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즉 동성애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즉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죄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는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이다. 그러나 불건전한 율법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했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충돌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서 또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의를 통해 왔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을 따라 섬긴다.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구원의 목표가 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을 잘못 사용하지 말고, 법 있게 즉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율법주의도 잘못이지만, 율법폐기론 즉 반율법주의도 잘못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고, 반율법주의는 도덕법이 여전히 성도가 지켜야 할 생활 규칙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법이 가르치는 대로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감사하며 오직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12-17절,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

[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暴行者)[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불신앙 중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바울은 과거에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불신앙 중에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하였다.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주의 긍휼과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주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주셨다. 구원의 은혜는 구원에 이를 참된 믿음과 또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며 그가 거룩한 직분까지 받았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가졌었다. 주께서는 충성된 마음을 좋게 여기시는 것 같다. 주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신 후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는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충성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직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자기의 직분을 잘 이해하고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전적으로 받을 만한](KJV, NASB, NIV)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신실한 말씀이요 사람들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씀이다. 그것은 온 세계에 심히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유대인 청년이었던 역사적 인물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 곧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신적인 구주를 약속하였다(사 9:6; 미 5:2). 바로 그 약속된 신적 구주께서 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셔서 예언대로(사 53:5) 그 몸에 찔림과 상함의 고난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가 예수를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쳤기 때문이었다. 모든 죄가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죄 중에도 큰 죄이다. 하나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대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큰 죄이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때문에’라는 말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라는 뜻 같다. 구주 예수께서 죄인의 우두머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주께서 그에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죄인의 괴수 같은 큰 죄인이 주의 긍휼을 입어 구원받았으므로,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다. 어떤 크고 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17절] 만세의[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전통사본)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자 곧 통치자이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가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그는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썩지 않으신다. 모든 피조물은 다 죽고 썩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보이지 않으신다. 그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존재 세계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홀로 하나이시다.’ 세상에는 한 하나님께서 계시다. 다른 신들은 모두 헛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 가짜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다. 그의 지혜는 무한하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열거한 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송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만세의 왕, 영원하신 왕,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썩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나 홀로 하나이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며 순종하자. 예수님 믿는 자들은 철학자들이다. 철학은 우주와 인간의 근원과 의미, 죽음과 그 너머 등에 대해 질문하지만, 참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믿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 참된 대답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진 자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주 예수를 세상에 보내주셨다. 그는 죄인의 괴수 바울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구원과 새 삶을 주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복음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는 오늘 우리도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여러 가지 직분을 주셨다.

18-20절, 선한 싸움을 싸우라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KJV, NASB, NIV).

‘그것들로’라는 말은 그가 전에 그에게 주었던 예언들이라는 뜻이다. ‘예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교훈들을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 교회를 위한 싸움이다. 우리의 몸에 있는 죄악성(갈 5:17)은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며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이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도 싸운다.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도 받는다(요 16:33; 딤후 3:12). 더욱이, 사탄과 악령들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대적한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으로 무장해야 한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검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마 4:4, 7, 10).

[19-20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 싸움에 지면 불신앙과 죄에 떨어진다. 이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 그것은 개인적 배교와 변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 복음 신앙, 성경적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말씀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음으로써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다. 이렇게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인신 공격이 아니다. 이미 시행된 권징을 알리며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 출교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지만, 교회 밖은 사탄의 세계이다. 요한일서 5: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지만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보이며 권징을 집행한 자가 그 자신임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당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주신 영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이 권위를 가지고 권징을 시행하게 된다.

권징의 목적은 그들로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징계를 받다’는 원어(파이듀도시)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는 뜻일 것이다(KJV, NASB, NIV). 그들은 바른 진리를 비난하고 참된 믿음을 비방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좁은 길보다 포용주의를 좋아하고 타협적인 길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제명 출교의 권징을 통해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오늘날 우리는 참 믿음에서 떠난 배교와 변절을 본받지 말고 그런 죄악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적인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이겨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워 이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잘 지켜야 한다. 특히 이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착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 곧 성경적 믿음을 지켜야 한다.

2장: 기도와 선행

1-8절, 기도에 대한 교훈

[1-2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앞장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에 연결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측면들을 표현한다. 특히 ‘도고’라는 원어(엔튜크시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이든지 모르는 이든지 간에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우리는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즉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 국회의원들, 법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과 그들의 바르고 선한 직무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기도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셨다(렘 29:7). 사람이 돈만 있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나라가 경제성장만 되면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건과 도덕성이 중요하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 받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될 때, 그들을 통해 양심적인 정치, 도덕적인 정치, 의롭고 선한 정치가 나오게 되며 그때 나라가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

[3-4절] [이는](전통사본)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것임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사람이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의로 판단하시되, 그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겔 33:11). 그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구원의 의지는 아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는 제한적이다. 그는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 그 선택된 수는 확실하고 고정되어 있고 불변적이다. 그는 그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들만 구원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5절] [이는]1)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예수이심이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공통적으로 밝히 계시된 진리이다(출 20:3; 신 6:4; 사 43:10-11; 44:24; 46:9; 고전 8:6; 엡 4:6).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뿐이시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증거하였다(행 4:12).

[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속전’(贖錢)이라는 원어(안티뤼트론)는 ‘대속물’과 같은 뜻으로 죗값을 의미한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토 말튀리온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원어는 ‘정한 때에 증거될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시는 때 곧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실이 단지 암시적으로, 예표적으로, 예언적으로 증거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실제로 지불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는 표현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께서는 택한 자들의 죗값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과 충돌되는 생각이다. 성경은 선택과 예정의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요 6:39, 44; 롬 9:10-18; 엡 1:4-5, 11).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택한 자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이제 악인들을 위한 지옥 형벌이 남아 있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결국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서 영생에 이를 자들이 적을 것이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서 멸망에 이를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그러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은 제한적 의미로 본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에서 ‘모든’은 항상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이 아니라, 제한적 의미의 ‘모든’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무슨 소식을 모두에게 전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의미하지 않고 제한적인 모두를 의미한다.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사용하는 ‘모든’이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의 ‘모든’이 아니고 제한적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의 ‘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어렵다. 4절의 ‘모든 사람’도 대략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4:15이나 5:20과 디모데후서 1:15의 ‘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이 세상 사람 모두를 가리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표현했을 때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표현했다고 본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 오직 그들만 구원받을 것이다.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贖錢)이 되셨다는 복음 진리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대속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전파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선포자, 설교자라는 뜻이다. 특히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이 진리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8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즉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거나 죄를 품고 기도하면(사 1:15; 59:2)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또 우리는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나라의 지도자들, 곧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우리의 기도나 전도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 마리아도 목사도 그 누구도 죄인들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우리나라의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9-15절, 여자들에 대한 교훈

[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성도는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아담한’이라는 원어(코스미오스)는 ‘단정한’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음란하거나 혹은 호화로운 복장과 대조될 것이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움과 대조된다. ‘정절’이라는 원어(소프로쉬네 )는 ‘사려 깊음, 신중함’을 뜻한다. 그것은 경솔하게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단정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데 있다. 잠언 11:22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그 본문에서 ‘삼간다’는 말도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바울은 여성도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치 말라고 교훈한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또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실, 외적인 단장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을 지나치게 단장하는,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태도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성도의 단장은 선행으로 하는 단장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성의 단장이며 인격성의 단장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선한 인격이 되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힘쓰는 것이 성도의 참된 단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현실뿐이며 육신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적 단장, 육신적 단장만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의 헛된 것으로 자신을 단장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아는 사람답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11-12절] 여자는 일절[일체] 순종함으로 종용히[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조용]할지니라.

‘일체 순종함’이라는 원어(파세 휘포타게)는 ‘모든 순종, 완전한 순종’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24에서 아내들이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엡 6:24). 순종은 여자의 아름다운 덕목이다. 여자가 순종치 않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물론 남편이 그 의무를 다해야 하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편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이지만, 여자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한다.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순종을 나타내는 방식을 보인다. ‘조용히’라는 말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순종은 조용히 행해져야 한다. 말이 많으면 불평과 불만의 말이 나오기 쉽고 그것은 순종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순종은 자신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과 순종은 다르다. 토론하고 변론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고 순종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성도들은 범사에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남자를’이라는 말은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에 다 연결된다.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의 직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성도들이 목사와 장로의 직분에서 제외됨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를 통해 전해진 교훈, 즉 하나님의 명백하고 영속적인 뜻이다. 여성도들은 교회에서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

성인 여성도들을 위한 권찰들이나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사들은 목사와 당회의 감독 아래 있는 보조자들이므로 이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이런 목회의 협력자들은 목사의 성경적 교훈과 당회의 바른 치리의 권위를 거슬러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에게 주신 권위요 교인들이 지켜야 할 질서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의 교훈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는 교회와 교단들이 있고 여자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들로 구성된 총회가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은 어떤 이유와 변명을 든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기는 죄악된 일이다.

[13-14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 번 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를 먼저 지으셨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그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 창조의 질서와 여자 창조의 목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 하지 말고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한다고 본다.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 때문에 왔다.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고, 그 열매를 자기 남편에게도 줌으로 남자도 범죄케 되었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여자는 결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자가 먼저 범죄하고 또 남자를 범죄케 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는 것 같다. 즉 여자는 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이 더욱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해산은 여자의 의무이며 특권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매우 복된 일이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가리킬 것이다. 여자는 창조의 질서상 그리고 범죄의 책임상 남자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할 위치에 있지만, 여자가 만일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한다면 그 해산함으로 그의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훌륭한 자녀들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남자들을 길러낸다. 이 사실은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증거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을 믿는 여자들은 머리나 장신구들로의 외모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을 힘써야 한다. 그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신중함으로 또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둘째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며, 남녀 성인들이 모인 교회에서 여자가 성경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 즉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이다.

셋째로, 여자는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여자가 자녀를 출산하여 키우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훌륭한 남자의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1-7절, 감독의 자격

[1절]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감독’은 ‘장로’와 동일한 직분이며(행 20:17, 28; 딛 1:5, 7) 목사와 치리 장로를 다 포함한다(딤전 5:17).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교인들을 돌아보며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것이 목회이다. 목회는 목사가 장로들과 더불어 교인들을 돌아보며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하며 심방에 힘써야 한다.

목사와 장로의 직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교회들은 목사를 청빙할 때나 장로들을 세울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2절부터 7절은 감독 즉 장로의 자격 요건에 대해 16가지를 말한다. ‘얻으려 한다’(오레고)는 말은 ‘열망하다’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교회의 일을 열망할 것이다. 또 감독직, 곧 목사와 장로의 직분을 열망하는 자는 선한 일을 사모할 것이다. 성화의 목표는 선한 인격과 삶이기 때문이다.

[2절]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원문에는 데이라는 말이 맨 앞에 나온다. 그것은 “[감독은] 이러 이러한 자이어야 한다(must be)”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는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첫째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여러 요건들을 포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사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인격적이고 생활적인 면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격적 성숙함이다. 흠 잡을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남을 잘 인도할 수 있다.

감독은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은, 결혼이 장로의 자격이라는 뜻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계시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하나님의 뜻과 결혼 서약에 충실한 인격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부관계가 좋은 것은 좋은 인격자의 모습이다.

감독은 또한 절제하며 근신해야 한다. ‘절제하다’는 원어(네팔레오스)는 ‘(술을) 절제한다, 맑은 정신을 가진다’는 뜻이며,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로온)는 ‘자제심이 있다’는 뜻이다. 장로는 술을 절제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며 자제심이 있어야 한다.

감독은 또한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라야 한다. ‘아담하다’는 원어(코스미오스)는 ‘단정하다 품행이 좋다’는 뜻이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원어(필로크세노스)는 ‘나그네들에게 후하다’는 뜻이다. 나그네들에게 후한 사람은 좋은 인격이다.

감독은 또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감독은 교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 자이므로 가르치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성경을 많이 읽고 잘 배우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디도서 1:9는, 장로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3절]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전통사본) 오직 관용하며[온유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감독은 또한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술을 즐기면 술 취하기 쉽고 술 취하면 건전한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바울은 술 취하는 것이 방탕한 일이며(엡 5:18), 그런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다른 곳에서 말했다(고전 6:10).

감독은 또한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 구타는 부당한 폭력을 가리킨다. 부모가 자녀에게 벌을 주는 것은 구타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부당한 폭력과 학대는 악한 일이다.

감독은 또한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더러운 이익은 뇌물이나 탈세 등처럼 불의하고 불법한 방법으로 얻는 물질적 이익을 말한다. 적은 소득이 의(義)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 성도는 정당한 방식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감독은 또한 관용해야 한다. ‘관용하다’는 원어(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하다, 친절하다, 예의 있다, 관용하다’는 뜻이다. 온유함과 친절함은 예수님의 성품이며 성도가 갖추어야 할 좋은 덕이다.

감독은 또한 다투지 않아야 한다. 다툼은 교만과 욕심과 시기와 오해에서 나온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다투지 않는다. 디모데후서 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물론, 진리 문제에 관해서는 선한 싸움이 필요하다.

감독은 또한 돈을 사랑치 말아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겨서는 안 된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부하려 하는 자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딤전 6:9-10).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

[4-5절]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감독은 또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 ‘단정함’이라는 원어(셈노테스)는 ‘품위, 엄숙함, 진지함’이라는 뜻이다. 십계명 중 인간 관계의 첫 계명은 부모 공경에 관한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바로 된 가정의 모습이다. 집은 사람의 일차적 인격 훈련장이다. 집은 작은 교회와 같다. 사람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복종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자격이 부족하다. 목사와 장로는 먼저 가정 목회를 잘해야 교회 목회도 잘할 수 있다.

[6절]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감독은 또한 새로 입교한 자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 입교한 자’라는 말은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연륜이 필요하다. 신앙 인격은 최소한 몇 년 간의 단련이 필요할 것이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는 것은 그가 교만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만은 매우 무서운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를 정죄하는 죄악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치명적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망한다(잠 16:18). 신앙 훈련은 겸손 훈련이다. 성화(聖化)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과정이다. 성숙한 신자는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인다. 겸손은 성도에게 가장 귀한 덕이다. 그러나 겸손한 인격은 몇 년 간의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7절]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감독은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 ‘외인’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 곧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감독은 그 인격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믿지 않는 주위의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그는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다”라는 증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신이나 그가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마귀의 올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감독 곧 목사와 장로의 자격 요건에 대해 16가지를 열거하였다. 그것은 목사와 장로가 되려 하는 자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목표와 교훈이 된다.

첫째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인격의 성숙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 즉 성화의 목표는 온전함이다.

둘째로, 감독은 한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어야 한다.

셋째로, 감독은 술을 절제하고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

넷째로, 감독은 말과 행위에 자제심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다섯째로, 감독은 품행이 단정하고 좋아 존경할 만 해야 한다.

여섯째로, 감독은 나그네들을 후하게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일곱째로, 감독은 성경말씀을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여덟째로, 감독은 실수와 방탕의 원인인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

아홉째로, 감독은 말과 행위가 거칠어 남을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

열째로, 감독은 정당하지 않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열한째로, 감독은 온유하고 친절하고 관용해야 한다.

열두째로, 감독은 다투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또 사사로운 욕심과 남에 대한 시기와 오해를 버려야 한다.

열셋째로, 감독은 특히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열넷째로,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믿는 가정들의 연합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자격이 없다.

열다섯째로, 감독은 새로 입교한 자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 입교한 자는 교만하기 쉽다. 감독은 수년 간 신앙 훈련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

열여섯째로, 감독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좋은 증거를 얻은 자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감독, 즉 목사와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직분이므로 그 자격이 엄격하였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본문에 증거된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8-13절, 집사의 자격

[8절]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집사’는 재정 지출의 일을 하고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직분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었으나(행 2:41, 4:4) 단지 일곱 명의 집사들을 세웠다(행 6:3). 그들의 협력으로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專務)할 수 있었다. 8절부터 10절까지와 12절은 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7가지를 말한다.

집사는 우선 단정해야 한다. ‘단정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존경할 만하다, 품위가 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을 추천하였다(행 6:3). 집사는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평판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집사는 또한 일구이언(一口二言), 즉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직과 진실은 성도의 기본적 덕목이다. 성도의 말은 한결같아야 한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말이 진실하고 덕스럽지 않고서는 책임 있는 일꾼이 될 수 없다.

집사는 또한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술에 인박이면 술 취하게 된다. 술 취함은 그에게서 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빼앗아가고 그로 하여금 실수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함을 엄격히 금하였고,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일이며(엡 5:18)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죄라고 정죄하였다(고전 6:10; 갈 5:21).

집사는 또한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건전한 인격은 돈 관계에서 깨끗하다. 돈 계산이 흐리거나, 돈을 꾸고 갚지 않는 자는 인격에 큰 결함이 있는 자이다. 특히, 집사직은 헌금을 계산하고 지출을 처리하는 일을 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돈 문제에 있어서 깨끗한 자가 아니면 안 된다. 도적질은 큰 죄악이며 인격의 큰 결함이다.

[9절]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깨끗한 양심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죄씻음과 함께 생긴다. 믿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 믿음은 자기 자신만 아는 것이다. 물론 그 믿음은 그의 인품과 행실로 나타날 것이다. 모든 성도는 이러한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10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사도 바울은 교회가 집사 후보자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한다. 사람은 겉보기와 속이 다를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은 외모로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험해보면 알 수 있다. 집사로 세우기 전에 교회는 먼저 그 후보자들에게 임시로 이런 저런 일들을 맡겨보고 그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서리집사’직의 이유이었을 것이다. 그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여 그들의 신앙사상의 건전함과 도덕성과 인격의 덕스러움이 확인되면, 교회는 그들을 집사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11절]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본문의 ‘여자들’이라는 원어(귀나이케스)는 ‘아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로서 장로들과 집사들의 아내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직분자의 직무 수행에는 남자들의 믿음과 인격성뿐 아니라, 아내들의 헌신과 덕스러운 협조가 매우 필요하다.

우선, 아내들은 단정해야 한다. ‘단정하다’는 말은 8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경할 만하다, 품위가 있다’는 뜻이다. 직분자는 본인이든지 아내든지 존경할 만한 자, 품위가 있는 자이어야 한다.

그들은 또한 참소하지 말아야 한다. 참소하는 것은 남을 악하고 거짓되게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인격의 모습이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생활에서 말의 부덕함은 직분자의 자격을 상실할 중대한 문제이다.

그들은 또한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는 2절에서 설명한 대로 ‘(술을) 절제한다, 맑은 정신을 가진다’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술을 절제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남편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 충성은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충성은 믿을 만함이다. 교회봉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필요로 한다.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그런데 남자들의 충성은 아내들의 이해와 협력이 없이는 어렵다. 아내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충성스러울 때 남자들은 더욱 힘있게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사도 바울은 집사의 자격 요건을 다시 말한다. 집사는 또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것은 결혼이 집사의 자격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고 집사가 남편으로서 오직 한 아내에게 마음을 두고 그를 사랑해야 함을 말한다. 부부관계의 순결과 사랑은 좋은 인격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음란은 큰 죄악이다.

집사는 또한 자녀들과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은 바른 교훈과 자신의 모범으로 가능한 일이다. 성경말씀으로 자녀들을 교훈하고 경건하고 선한 모범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집사가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서 존경을 받는 자라면, 그는 좋은 신자요 좋은 인격자일 것이다.

[13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지위’라는 원어(밧모스)는 ‘등급’이라는 뜻이다. 집사직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등급을 얻는다. 즉 그들은 주 안에서 더욱 인정받는 자들이 된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 영적 성장은 믿음의 성장이다.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만, 진실한 봉사를 통해 큰 담력을 얻은 자들은 더욱 그러할 수 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좋은 지위와 담력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7가지를 열거한다. 그것은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에게 생활과 봉사의 목표와 교훈이 된다. 첫째로, 집사는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집사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늘 진실한 말만 해야 한다. 셋째로,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집사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돈 사랑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다섯째로,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여섯째로,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일곱째로, 집사는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

또 본문은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서도 4가지를 열거한다. 첫째로, 감독과 집사의 아내는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남을 악하고 거짓되이 비난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술을 절제하고 맑은 정신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넷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남편뿐 아니라, 아내도 좋은 인격이어야 한다. 집사직을 잘하면 아름다운 지위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

14-16절, 경건의 비밀

[14-15절]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단체와 같이 운영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진리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집, 곧 그가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집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또 이 집은 하나님께서 계신 집이다. 고린도전서 3:16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성도 개개인 속에도, 또 회중 전체 속에도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뜻과 의향과 기호와 방침대로 운영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과 방침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는 교인들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수단에 불과하지 성경의 진리와 독립된 인간들의 의견와 뜻을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모으신 모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죄와 파멸에서 불러내신 구주이시고 우리를 만세 전에 그의 백성, 그의 양,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때가 되어 구원하셨다.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과 임무를 보인다. 기둥은 집을 버티는 역할을 한다. 터는 집의 기초이다. 기둥과 터는 집에 매우 필수적이다. 터와 기둥이 약해지면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교회가 약해지면 하나님의 진리가 약하게 증거될 것이다. 교회가 흔들리면 하나님의 진리가 흔들릴 것이다. 교회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진리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하며 진리를 철저하게 보수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인 신구약성경 66권의 말씀을 조금도 양보하거나 가감하지 말고 다 믿고 소망하며 실천해야 하며 또 다 충실하게 선포하며 가르쳐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교회가 아닐 것이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참된 말씀을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계속 양보한다면, 마침내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배교적인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하나님께서는]2)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교회가 지키고 전파해야 할 진리는 ‘경건의 비밀’이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귀한 진리들은 참 종교의 내용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할 내용을 이치에 맞게 제시하는 종교이다. 그 진리의 내용들은 크고 놀라우며 사람들에게 논쟁의 여지가 없다. 경건의 비밀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구약성경의 중심이요 우리 종교의 중심이다. 그가 모든 질문의 해답이시요 그 안에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다. 그는 과연 우리의 지혜요 의(義)요 구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가장 큰 신비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시다.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예수, 교회가 보존하고 전파하는 진리의 내용인 예수, 위대한 경건의 비밀의 내용인 예수께서는 신적 인격이시다. 그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영으로’라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성령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NIV). 그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그의 무죄하심과 의로우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의 죽음과 부활이 천사들에게 증거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베드로의 증거대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는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다. 그의 탄생 때에도, 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때에도, 그의 부활 때에도, 또 그의 승천 때에도 천사들이 나타나 수종들었다. 그의 재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만국에서 전파되셨다. 천사들에게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증거될 복음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벌써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증거하였다(골 1:24).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그는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 그는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시고 온 인류의 구주,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주로 믿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대 민족만을 차별적으로 사랑하시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온 세계에 활짝 열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영혼들을 각 민족, 각 나라에서 수없이 많이 구원해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셨다. 부활하신 그는 40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데서 천사들의 증거를 받으면서 하늘로 올리셨다(행 1:9-1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은 (1) 그가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과, (2) 그가 지금도 그의 신성(神性)으로, 성령을 통하여 땅 위에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과, (3) 그가 장차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과, (4)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약속대로 성도들을 부활시키며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해준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독교의 진리들의 일부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나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며 친히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이며 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경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다스리시는 교회이다.

둘째로, 교회가 소유한 경건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이다. 온 세상에 전파되신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영광 중에 올리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특히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진리들을 세상 끝날까지 굳게 지키고 믿고 실천하며 가감 없이, 주저함 없이 온 세상 만민에게 증거해야 한다.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1-5절, 귀신의 가르침

[1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경건의 비밀과 반대되는 것은 배교(背敎) 곧 진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을 받아 그의 뜻을 전한 자들이었다. 사도들의 교훈은 성령의 교훈이다. 그러나 사도시대 말기에 이미 배교의 징조가 나타났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하였다(요일 2:18).

배교자들이 따르는 교훈은 ‘미혹케 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이다. 세상에는 항상 악령들의 활동이 있어왔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하여 아담을 넘어지게 한 자는 바로 사탄이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은 사탄이다(엡 2:2).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자가 사탄이다(고후 4:4). 이단은 미혹의 영들의 활동이다.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과 철학과 종교는 귀신들의 교훈이다. 어떤 이들이 귀신들의 가르침들을 좇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기적을 의존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건전한 성경 교훈에 근거해야 한다.

[2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성도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1:5, 19) 범사에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양심이 화인 맞는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더 심한 상태이다. 이런 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고,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분간치 못하게 될 것이다. 양심이 마비된 자는 외식하며 거짓말한다.

이단자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외식은 이중적인 것을 말한다.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것,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척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순종하는 척하는 것, 하나님 없는 세속적 삶을 살면서 경건한 척하는 것, 돈과 쾌락을 크게 여기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척하는 것, 진리를 대항하며 대적하면서 겉으로 진리 안에 거하는 척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자들은 악령들 곧 귀신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을 저버린 자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은 진실하며 진실한 말을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양심으로 진실하게 믿어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지만, 악령은 사람을 거짓되고 불신앙적이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한다.

[3-5절]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사도 바울은 귀신들의 가르침의 한 예로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이런 것이 금욕주의이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일들이며 결코 죄가 아니다. 먹는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선하다(창 1:31). 율법 아래서는 정결, 부정결의 음식이 구별되었으나 복음 아래서는 그 구별이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음식물은 진리를 믿는 자들과 아는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므로 다 거룩해지고 먹을 만한 것이 된다.

금욕주의는 잘못된 교훈이다. 그것은 구원의 길도, 성화의 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대되는 불건전한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 절제는 좋은 덕이지만, 금욕주의는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감사함으로 먹고 마시며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극기와 금욕은 죄악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골 2:21-23).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몸의 욕심과 죄성을 죽일 수 있다(갈 5:16).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또 남을 자라게 하지도 못한다. 성도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 안에서 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 믿고 행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귀신들의 가르침들이 항상 있어 왔다. 말세에 배교의 시대에는 그것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것들은 성경 진리에서 떠났거나 성경 진리와 다른 잘못된 사상과 철학과 종교들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책인 성경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감치 말고 오직 성경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과 양심에 화인 맞아 외식하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이방 종교와 철학,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각종 이단종파들, 특히 천주교회, 자유주의 신학,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금욕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몸의 죄성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적 교리들과 성경적 생활 교훈 안에 거해야 한다.

6-10절, 경건 훈련

[6절]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리라].

디모데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가르침이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분별력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는 지식을 가지고 한다면, 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이며 또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망령된’이라는 말(베벨로스)은 ‘속된, 세상적인’이라는 뜻이다. ‘허탄한’이라는 원어(그라오데스)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말하는’이라는 뜻을 가진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의 사건들은 신화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속되고 어리석은 신화적 이야기들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재미와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일지라도,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신앙에 아무 유익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경건은 곧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한다’는 원어(귐나죠)는 ‘훈련한다’는 뜻이다. 경건은 훈련이 필요하다. 경건생활은 성도에게 당연한 생활이며 또 진실한 성도라면 다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성도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없다. 아무리 성도라 하더라도, 경건의 훈련을 힘쓰지 않으면 세상 사람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성경 읽기, 기도 생활, 가정예배,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 예배 시간에 늦지 않는 것, 십일조 생활, 수요일 밤과 금요일 밤 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 권찰이나 교사나 찬양대 봉사하기, 전도하기 등은 다 훈련을 통해 더 잘 하게 되는 것이다.

[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유익하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빨리 걷기나 달리기나 등산 등을 한다. 신체적 훈련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생활에 국한되고 이 세상의 생활 조차도 때로는 보장되지 못한다. 건강 관리를 잘 하던 사람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무서운 질병에 침입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금생의 약속’은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사회적 평안 등을 가리킨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건강의 복, 사업의 복, 사회적 안정의 복을 약속하였다. 잠언 3:7-8,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건강(KJV, NIV), 치료(BDB, NASB)]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생의 약속은 영생 복락을 가리킨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우리가 경건 생활에 힘쓰면 미래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베드로후서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9절]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전적으로] 받을 만하도다.

이것은 1:15에도 나왔던 표현이다. 그 뜻은, “미쁘다, 이 말이여, 전적으로 받을 만하도다”이다. 경건이 중요하고 복되다는 말은 전적으로 받을 만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영생이요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복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근본적 진리를 의심치 말고 더디 믿지 말고 전적으로 받아서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경건 훈련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훈련이다.

[10절] [이는]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盡力)하는[모욕을 당하는](전통본문)3)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를 위하여’는 ‘경건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도록 하는 이 일을 위해 수고하고 모욕도 당하였다. 그것은 그와 그의 일행들이 그들의 소망을 돈이나 육신의 쾌락 같은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오늘 우리도 구원하셨고 양육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 훈련을 힘쓰자. 그것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경건한 삶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영생을 보장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돈이나 육신의 쾌락 같은 이 세상의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구주 하나님께만 두자. 세상적인 것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일시적이며 하나님만 영원하시다.

11-16절, 자기 훈련

[11절]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이것들’은 본 서신의 앞에서 가르친 내용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특히 바로 앞에서 말한 금욕주의의 미혹을 받지 말고 참된 경건 훈련에 힘쓰라는 교훈을 포함한다. 본 서신에 주신 하나님의 교훈들은 디모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디모데는 그 진리들을 또 다른 성도들에게 명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다.

특히 ‘명하라’는 말은 이 진리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임을 잘 보인다. 사도의 가르침이 인간적 권위를 가진 말이라면 명령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는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명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명령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12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전통사본)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젊은이는 보통 지식과 인격에 부족이 없지 않겠지만, 젊은 말씀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편에서 자기 훈련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로, 말씀 사역자는 말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말은 사람이 가장 실수가 많은 영역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1-2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교역자는 말에 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말씀 사역자는 행실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생명은 삶이다. 참된 신앙은 의롭고 선한 행위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17, 26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말씀 사역자는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이다. 십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네 마음과 네 성품과 네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또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말씀 사역자는 이 일에 본을 보여야 한다.

넷째로, 말씀 사역자는 심령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심령’이라는 말은 생각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말씀 사역자는 생각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말씀 사역자는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성도의 기본적 덕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 믿음은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해 강해진다. 말씀 사역자는 믿음이 견고한 자이어야 한다.

여섯째로, 말씀 사역자는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정절’이라는 말은 순결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이성 관계에 있어서 단정함을 뜻한다. 말씀 사역자는 이 점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통해 받는 모든 교훈에 신임성을 두고 그것을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착념하다’는 말은 ‘집중하다, 전념하다’는 뜻이다. 디모데는 아직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지 않을지라도 그의 현재의 상태에서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전념해야 했다.

우선, 그는 성경을 읽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공적으로 읽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자신을 위해 또 교인들을 위해 유익한 일이다. 또 그는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권하고 가르쳐야 한다. ‘권하는 것’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르치는 것’은 성경말씀을 해석하며 그 중요한 교훈을 설명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14절]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소홀히 여기지] 말라.

‘장로의 회’는 오늘날의 노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가 말씀 사역자로 안수를 받을 때 특별한 은사를 그에게 주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각 사역자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신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이에게는 해외선교의 은사를, 해외선교도 어떤 이에게는 이슬람 지역의 사명을, 어떤 이에게는 공산권 지역의 사명을, 어떤 이에게는 국내의 농어촌 사역이나 장애인 사역이나 군인교회 사역 등을 각각 주신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사명을 따라 각각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모든 일’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것과, 성경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말씀 사역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 즉 지식의 진보, 분별력의 진보, 인격의 진보, 생활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참된 일꾼은 성화와 직무 수행에 진보를 나타내야 한다.

[16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 자신을 삼가라’는 것은 말씀 사역자의 자기 훈련을 말한다. 이것은 넓게는 모든 성도의 자기 훈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또 ‘가르침을 삼가라’는 것은 말씀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이 그의 가르침임을 보인다. 가르침도 단지 가르치는 방법보다 가르치는 내용이 중요하다. ‘이 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앞에서 한 교훈들이 한 번 실천하고 중단될 것이 아니고 계속 실천되어야 할 것임을 보인다.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말씀 사역자의 자기 훈련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것이라고 뜻이다.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느니라.” 말씀사역의 결실은 결국 사역자의 자기 훈련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역자의 자기 훈련이 없다면 영혼 구원의 일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말씀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는 말로만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고 인격과 삶으로 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말씀 사역자는 개인적으로 또 공적으로 성경 읽기와 연구와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그는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자가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

셋째로, 말씀 사역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 즉 지식과 분별력과 인격과 사역의 열매에 있어서 진보를 다른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그는 전심전력하여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1-8절, 참 과부를 공경하라

[1-2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교훈하며 권면할 때 예절과 덕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나이 많은 성도들에게는 꾸짖지 말고 자기의 아버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성도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이 하고, 나이든 여성도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이 하고, 젊은 여성도들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 특히 교회 봉사자들은 젊은 여성도들에 대해 깨끗하고 덕스럽게 처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사람을 사람다워지게 하는 것이지, 사람으로 비상식적이고 예절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예절 있고 덕스러운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말씀 사역자들은 더더욱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예절 있게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

[3절]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敬待)하라.

‘경대(敬待)하다’는 원어(티마오)는 ‘공경하다, 존경하다’는 뜻이다. ‘참 과부’는 나이가 60세가 넘은 과부로서 그를 돌아볼 자녀나 친척이 없고 평소에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들을 섬기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등의 선한 일들을 행한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딤전 5:9-10). 본문은 교회가 그런 자를 공경하고 그가 물질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유세베인)[공경하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부모나 조부모를 공경하며 보답하기를 배우게 해야 하였다. 효도는 제5계명이 가르친 중요한 덕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한 보답이며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일이다. 자녀들은 마땅히 집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는 의와 선을 실천해야 한다.

[5-6절]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과부들도 두 종류가 있었다. 한 종류는 과부로서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이었다. 이런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외롭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늘 교제함으로 은혜 풍성한 삶을 사는 자이었다. 만일 그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하나님과 천국을 사모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과부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사는 자’이다. 그의 처지는 그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남편이 없는 것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할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을 최선용할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이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한다. 그는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한 자이다.

[7절]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위의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교훈이 된다. 구원받은 우리는 육신에 치우쳐 세상의 헛된 쾌락을 구하며 살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며 천국을 소망하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할 자들이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소망을 저버리고 이 세상에만 치우쳐 산다면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도무지 모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그런 세상적이고 쾌락적인 헛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8절]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것도 중요한 교훈이다. 본절은 신앙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더 잘 증거한다. 사람이 자기 가족과 친척을 돌아보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다. 어떤 자녀나 손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외로운 부모님이나 어떤 가족이나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이다. 그런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본문은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차적으로 자기 가족을 사랑하고 돌아볼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이런 의무와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진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해야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노인들이나 청년들이나 어린아이들 등 모든 연령층의 교인들을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다 한 가족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마 12:50).

둘째로, 교회는 참 과부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들은 나이가 많으나 돌볼 자녀가 없고 평소 선행의 증거가 있는 자를 가리켰다고 본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 가족들과 친족들을 돌아보아야 하며 자녀들이나 손자, 손녀들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악한 자이다.

9-16절, 과부에 대한 규례

[9-10절]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본문은 초대교회가 구제해야 할 과부들의 명부를 작성하였음을 보인다.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적어도 세 가지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하였다. 첫째로, 그는 나이가 60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 60세라는 나이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공급하기 어렵고 또 그들이 재혼할 만하지도 않은 나이를 가리킨 것 같다. 둘째로, 그는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이어야 했다. ‘한 남편의 아내’라는 말은 합법적이지 않게 이혼하고 재혼한 자를 제외하는 말일 것이다. 60세가 되기까지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라면 그는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한 자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그는 여러 가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이어야 하였다. 본문은 선한 행실의 예로 자녀들을 양육한 일이나 나그네들을 대접한 것이나 성도들의 발을 씻긴 것, 즉 섬기는 일이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한 일 등을 들었다.

[11-15절]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고 말한다. 교회는 그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결혼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욕으로 배반한다’는 원어(카타스트레니아오)는 ‘음탕하게 된다, 정욕적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젊은 과부가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들 중에 그런 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보인다.

그런 자들은 처음 믿음, 곧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었을 때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하며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에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첫 신앙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 일에 성실하지 않고 게을러 일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며 해서는 안 될 남을 비난하는 말이나 한다. 이런 자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꾼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참으로 믿고 구원받은 자는 세상적으로 음란하고 정욕적이게 살 수 없다. 세상적으로 음란하고 정욕적인 자는 회개하고 죄를 청산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여 이제부터 그만을 믿고 섬기며 따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또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말에 덕을 세워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지 말고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할 수 있으면 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돌보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정욕적인 죄를 범치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 된다. 남편이나 아내의 사별로 인한 재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정당한 일이다. 성도는 정욕의 죄를 범하는 것보다 재혼하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는데도 스스로 독신(獨身)을 서약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다.

15절에 ‘사단에게 돌아갔다’는 원어(엑세트라페산 오피소 투 사타나)는 ‘사탄을 따라 치우쳤다’는 뜻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는 자는 사탄뿐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혹 사탄의 시험을 잠시 받을 수 있을지라도 결코 사탄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건져 자기의 품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사탄을 따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며 진리의 바른 길에서 치우쳐 나간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가룟 유다처럼, 이미 사탄을 따라 바른 길에서 치우쳐 나간 자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여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절]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반복하여 말하기를, 믿는 성도에게 과부 친척이 있으면 그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 과부 곧 아무에게서도 물질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돌아보며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나아기 60세가 넘어야 하며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자녀를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들을 섬기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 등의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하였다. 그런 자를 교회가 구제하였다고 본다.

둘째로, 젊은 과부는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 정욕에 이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처음 믿은 대로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지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정욕적이게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셋째로,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는 과부는 교회로 짐지게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자기 가족과 친척을 돌아보아야 한다.

17-25절, 목사와 장로에 대한 교훈

[17-18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는]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하였음이니라].

교인들은 감독들, 즉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해야 하며 잘 다스리는 자들을 배나 존경해야 하고,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그러해야 한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란 목사들을 가리킨다. 목사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들에게 적절한 생활비를 제공해야 한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복음의 일꾼들을 물질적으로 공급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이라는 말(헤 그라페)는 단수명사로 여러 개의 책들로 구성된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함을 보인다. 구약 39권의 책들과 신약 27권의 책들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들이며 그 66권의 책들은 한 권의 성경으로 간주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일렀으되’라는 원어(레게이 헤 그라페)는 ‘성경이 말하되’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성경을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이다. 실상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성경이 말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이 말씀은 물론 일차적으로 문자적 의미를 가진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복음 사역자들에게 적용한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들 중 누가복음에 나온다. 누가복음 10:7,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말하며 인용한 것은 그가 디모데전서를 쓸 당시 이미 복음서들이 성경으로 인정된 것을 보이는 것 같다.

[19절]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목사와 장로는 가장 중요한 직분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아야 했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송사는 경솔히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신중하게 또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0절] 범죄한 자들(투스 하마르타논타스)[계속 범죄하는 자들, 죄 가운데 있는 자들](현재분사)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계속 범죄하는 자들 혹은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문맥상 장로들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꼭 그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현재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다른 이들에게 그 죄가 전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개적으로 책망하여 회개하게 해야 했다. 만일 그가 그 책망을 인신공격이나 인격모독으로 생각하여 불쾌하게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책망받는 죄를 즉시 통회하며 고쳐야 할 것이다.

[21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천사들 가운데는 타락한 천사들도 있지만 택하심을 받은 선하고 거룩한 천사들도 있다. 거룩한 천사들은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의 일을 받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말하고 행해야 한다. 주의 종들은 아무 일에도 편견이 없어야 하고 편벽되지 않게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같이, 주의 일꾼들은 공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범사에 공명정대하며 공평해야 하며, 모든 불의와 불공정을 버려야 한다. 교회에서 재판할 때에는 바르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원고와 피고가 다 충분히 발언할 기회를 얻어야 할 것이다. 잠언 18:17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한다.

[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안수’는 안수받는 자를 구별하며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그를 축복하는 행위이다. 안수할 때 안수하는 자는 안수받는 자에게 심령을 쏟는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심장한 행위가 경솔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안수는 경솔히 행해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라”는 말씀(메데 코이노네이 하마르티아이스 알로트리아이스)은 ‘다른 이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뜻이다. 죄는 전염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시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자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죄에 참여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친한 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범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말씀은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 적용해야 할 교훈이다. 이 세상에는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이단사설들이 많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악된 풍조들과 일들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이미 법적으로 깨끗케 되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23절]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 아마 위병은, 사도 바울의 몸의 가시처럼(고후 12:7), 만성적 질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이었을 것이다. 성도에게 고난은 결코 불행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와 복이 된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며 더욱 주님만 믿고 의지하게 되며 더욱 성결해지며 더욱 천국 곧 영생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24-25절]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사람들의 죄는 먼저 혹은 나중에 드러나 심판에 나아간다.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전 12:14)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심판자로 오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은밀한 구제나 무익한 말 한 마디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다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4; 12:3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감독으로 세움 받은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하며 특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며 성경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을 더욱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목사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목사는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고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또 다른 이의 죄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그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6장: 자족하는 생활

1-2절, 종들에 대한 교훈

[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은 종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의 위치는 ‘자기 주인에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다. ‘공경한다’는 말은 주인을 돕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종의 위치이다. 물론 주인은 종들을 공의로 다스리고 그들을 사랑하며 배려해야 한다. 믿는 성도가 된 종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주인들에게 잘해야 한다. 만일 그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인을 존경하고 그를 도우며 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 노예제도의 개선은 오랜 세월을 요했다. 그러나 사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본문은 오늘날 직장에서나 어떤 조직체에서도 적용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며 그의 지시를 즐거움으로 순종하는 것이 옳다.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믿는 성도인 종은 자기 주인이 믿는 성도일 경우 그를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욱 잘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영역에서 믿는 형제들 간에 말과 행동에 있어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직장에서나 어떤 조직에서도 적용된다. 직장에서나 어떤 조직에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존중하고 도우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하며,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며 배려를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3-10절, 자족하는 마음

[3-5절]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전통본문).4)

본문은 ‘바른 말’과 ‘다른 교훈’을 대조시킨다. ‘바른’이라는 원어(휘기아이논)는 ‘건전한’이라는 뜻이다. 바른 말은 건전하고 유익한 말이다.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원어(테 카트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경건에 일치하는 교훈’이라는 뜻일 것이다(KJV, NASB). 바른 말은 주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나 경건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사상은 바르고 경건한 교훈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에 생각을 두지 않는 자는 교만하며 무지하고 싸움을 일으킨다. 그는 변론하고 언쟁하고 투기하고 분쟁하고 훼방하고 다툰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그는 생각과 마음이 부패하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이다. 결국 싸움은 사람의 욕심에서 발생한다. 야고보도 증거하기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하였다(약 4:1-2).

전통본문은 5절 끝에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첨가하였다. 교제의 문제는 중요하다. 악은 누룩처럼 번진다. 악을 용인하며 악한 자들과 자꾸 교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에 물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땅의 것을 탐하는 자들과 교제치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한 자들은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6-8절]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분명히]5)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지족(知足)한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정상적인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 바울은 이미 4: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증거하였었다. 경건을 물질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악하고 헛된 일이지만, 자족하는 참 경건은 큰 유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라는 경건한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성도가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가 출생 시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고 별세 시 역시 분명히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 묻힐 때에 세상에서 모았던 재물을 가져갈 수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이며 백년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가진 자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고 덜 가진 자나 가난한 자가 믿음에 부요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관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탐심을 품지 말고 기본적인 의식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생활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도의 생활은 경건하며 자족하는 생활로 요약된다. 경건과 자족--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이다.

[9절]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욕망]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경건하고 자족하는 삶과 대조하여, 이 세상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 많다. 부하려는 마음 즉 무엇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 탐심이다. 이런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부하려는 욕심, 즉 탐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10절] [이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모든] 악의 뿌리가 되나니[됨이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하려 하는 자들이 파멸케 되는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탐심과 돈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야고보서 1:15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크고 작은 죄악들이 돈 때문에 일어난다. 공직자 부정부패도, 청소년 윤락행위도, 어린 소녀의 유괴와 살해사건도 다 돈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드는지!

특히 성도가 돈을 사랑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된다. 탐심은 돈을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즉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마 6:24).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떠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주실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코 부하려 하거나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파멸에 이른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며 우리로 참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사랑하거나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가까이 하고 복종해야 한다.

11-16절, 네 가지 명령

[11-12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그 곁에 두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 그의 일에 쓰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신 33:1; 왕상 17:24; 왕하 4:7, 9, 25). 모든 성도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드셨고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엡 2:10; 벧전 2:9).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가지의 명령을 교훈으로 주었다.

첫째로,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한다. ‘이것들’이란 경건과 자족함 대신에 돈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돈 사랑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둘째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말한다. 성도는 모든 죄를 버리고 범사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성도는 또한 경건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만 순종해야 하며 또 성경을 읽고 거기에 증거된 그의 모든 진리들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꽃이요 열매이다. 또한 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온유한 것이다(고전 13:4).

셋째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와 같고, 성도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한 풍조와 사탄의 시험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 불신앙은 큰 원수이다. 싸움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그 길에는 때때로 실패와 낙심과 두려움과 회개의 눈물도 있으나 승리의 기쁨도 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넷째로, “영생을 취하라”고 말한다. 영생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영생의 소망은 복음 진리의 핵심이다(요 3:16; 딛 1:1-3). 우리 모두는 믿음을 잘 지켜 약속된 영생을 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4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들과 생명 자체의 근원이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셨고 죽은 자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밝히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숙히 명하였다. 디모데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온전하게 위의 네 가지 명령들을 지켜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해야 한다.

[15-16절]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마지막 대사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성경에서 그의 재림은 그의 오심 혹은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때 역사의 완성이 있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런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시다. ‘능하신 자’라는 원어(뒤나스테스)는 ‘주권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서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실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는 존재 혹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누구에 의하여 생명을 얻으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계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아계시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것이 그의 거룩이며 그의 영광이다. 그는 이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르시다. 그는 이 피조세계를 초월해 저 하늘 높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그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유한적(有限的)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또한 그의 도덕성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무한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곧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사람은 그의 초월하시고 완전하신 영광 앞에 감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신 자이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요 4:24). 이 세상에서 물질들은 대체로 볼 수 있다. 물론, 공기나 전기나 전파같이 볼 수 없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영은 전기나 전파같이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무한하시고 완전한 영이시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에게 참된 복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돈 사랑하는 마음을 피하고 버리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 대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즉 성도다운 경건함과 지식과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대적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져서 범죄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과 기도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요 우리의 소망인 영생을 반드시 취해야 한다.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의 죄를 다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의 복되고 영원한 삶을 다 받아 누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요 복된 소망이다.

17-21절, 정함이 없는 재물

[17-18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전통본문)6)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본문은 부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가난은 사람을 겸비케 만드는 유익이 있고 부요는 사람을 교만케 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를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잠 30:8).

둘째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한다. ‘정함이 없는’이라는 원어(아델로테스)는 ‘불확실함’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재물은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잠언 23: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한다. 화재나 붕괴의 대형사고나 암이나 뇌졸증 같은 중병에 걸리면 수천만원, 수억원을 하루아침에 날릴 수 있다. 재물은 참으로 허무하고 불확실하다.

셋째로, 오직 소망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신다. ‘모든 것’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포함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시 23:1).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다 시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다.

넷째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며(엡 2:10; 딛 2:14)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무엇이 선한 일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가지 선한 일은 전도와 구제의 일이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일, 즉 전도와 구제의 일에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잠언 21:26은 의인은 아끼지 않고 구제한다고 말한다. ‘동정하는’이라는 말(코이노니코스)는 ‘후한, 너그러운’이라는 뜻이다(BDAG).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우리는 선한 일에 부요하고 서로 나눠주며 어려운 사람을 향해 너그러워야 한다.

[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영원한]7)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성도의 선한 행실은 장래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마 7:24-25). 반면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약 2:17, 26). 믿음은 선행이 동반되면 그 진실함이 증거되며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선행을 통해 그 사실이 확실해지는 것이다(벧후 1:10-11).

[20절]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그의 서신들 속에 기록된 교훈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길, 바른 길이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도,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참 지식은 하나님과 그를 뜻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모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지식은 망령되고 헛된 말과 변론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러한 말과 변론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유익케 하는 바른 지식, 곧 성경적 교훈의 지식을 붙잡아야 한다.

[21절]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너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8)

교회 안에는 잘못된 지식과 이단사설을 좇는 자들 즉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 있다. 우리가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생각하면,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고 사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참된 믿음, 곧 성경적 믿음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질적 부요는 사람을 교만케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정함이 없고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헛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기쁨과 생명과 소망이 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만일 물질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후한 자가 되어야 한다.

미주

1) Byz D latt syr 등에 있음.

2) Byz vgms Ignatius 등이 그러함.

3) Byz itd vg syrp copsa bo arm 등이 그러함.

4) Byz vgmss syrp arm Irenaeuslat Cyprian 등에 있음.

5) Byz vg syrp 등에 있음.

6) Byz itd vgcl syrp copbo-ms eth 등에 있음.

7) Byz vgms copbo-ms 등이 그러함.

8) Byz (D* 048vid itd) vgcl, ww, (st) syrp copbo-mss armms (ms) eth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