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데살로니가전서 1-5장

영국신사77 2020. 4. 15. 19:00


데살로니가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7년 12월 28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재림의 소망

2장: 재림 때의 영광

3장: 재림을 위한 준비

4장: 재림의 위로

5장: 재림의 갑작스러움

서론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2:18). 이레니우스는 처음으로 본서를 언급하였고, 터툴리안도 본서를 인용하며 사도의 저작이라고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처음으로 본서를 사도 바울의 저작으로 언급하였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50년 혹은 51년경일 것이며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본 서신을 썼던 것 같다(살전 3:6; 행 18:5).

데살로니가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종말론 서신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재림의 소망

2장, 재림 때의 영광

3장, 재림을 위한 준비(사랑과 거룩함)

4장, 재림의 위로

5장, 재림의 돌연성, 여러 가지 권면들

1장: 재림의 소망

1-10절, 바울의 기도와 감사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전통본문)1)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를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바울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회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성도들의 영적인 주소를 보인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을 가리키며 그것은 구원의 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엡 2:8) 성화를 이룬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도 성화도 영생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또 ‘평안’은 구원의 결과이다. 이 단어는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화까지 포함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다.

[2-3절]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은 중간에 넣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 . . 소망의 인내’라고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이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사람 앞에 보이는 외식적인 일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루어진 진실한 일이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 ‘역사’라는 말(에르곤)은 ‘행위’라는 뜻이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그것은 행위가 없는 믿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표현했다(약 2:17). 참된 믿음은 행위가 있는 믿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또한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의 요약은 사랑이다. 십계명의 요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3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하기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랑에는 수고가 뒤따른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또 형제들을 위해 수고하며 선을 베풀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었다. 우리의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스럽게 변화되며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광스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오래 참을 수 있다. 이 세상의 헛된 소망도 사람들에게 참는 마음을 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소망이랴!

[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가리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소식이다(요 3:16). ‘형제들’이라는 말은 신약 교회 안에서 높고 낮은 자가 없음을 보이는 사랑의 명칭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임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선택하지 않으셨고 그 가운데서 얼마를 선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나머지를 죄 가운데 버려두셨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는’이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를 보인다. 그 증거는 그들의 진실한 믿음 생활이었다. 우선,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일하지 않으시고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불신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를 살리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다. 성령께서는 능력으로 일하셨고 사도 바울에게 큰 확신을 주셔서 복음을 증거케 하셨다. 전도자가 믿지 않는 내용을 남에게 믿게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바울이 큰 확신을 가지고 증거한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결실을 가져왔다.

[6-8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道)[말씀]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이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너희 믿음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없음이니라].

‘많은 환난’은 처음 믿는 자들에게 믿음의 큰 방해거리이었을 것이다. 마귀는 환난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구원이 단지 현세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삶을 주는 것이므로, 구원받는 자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기쁨으로 받게 하심을 보인다. 또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일과 순종 생활과 또 전도하는 일에서도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 구원은 변화이다. 그것은 생각과 가치관과 인생관의 변화, 행동과 인격과 삶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될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주의 말씀이 그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의 소식이 각처에 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 일행이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자이었듯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동일한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진실한 성도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은 주위에 널리 퍼져나갔다.

[9-10절]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각처의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대해 증거하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 무지요 죄악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근본적 지식이요 의(義)이다. 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지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우리의 근본적 믿음은 바로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섬기는 데 있다. 그것이 영생이 된다(요 17:3).

다른 하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재림하심을 믿고 소망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들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장차 온 세상을 멸망시키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건지실 것을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재림, 마지막 심판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기본적 내용들이다. 우리도 이 기본적인 내용들에 대해 의심치 말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가지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해 말하고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교훈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육신적, 물질적 이유가 아니고 영적, 신앙적 이유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선택의 증표를 가지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 중에도 성령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증표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소문은 주위에 확실히 알려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어떤 증표를 가지고 있는가? 믿음과 순종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가?

셋째로, 우리는 확실한 신앙을 가지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확실한 신앙의 내용은, 첫째,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고, 둘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었고, 셋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렸다. 우리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자.

2장: 재림 때의 영광

1-12절, 바울의 말씀 사역

[1-2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가에서도 유대인의 강한 반대를 받았었다(행 16-17장). 그러나 그는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을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했다. ‘힘입어’라는 원어(파레시아조마이)는 ‘담대함을 가진다’는 뜻이다.

[3-5절] [이는] 우리의 권면은 간사(플라네)[거짓]에서나 부정(不淨)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속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는]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증거하심이니라].

사도 바울 일행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말한 이유는 그들의 권면이 거짓이나 부정(不淨)이나 속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의 권면이 순수하지 않았다면, 평안할 때는 혹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환난 중에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환난 중에 담대히 거짓을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바울 일행이 복음을 담대히 말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환난 중에 할 말이 없었겠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자유로이 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은 현실의 어려운 환경을 거슬러 담대히 일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일행이 거짓이나 불결한 동기에서 일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다는 증거는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알고 있듯이 바울 일행이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고 더러운 이익을 구하여 탐심의 탈을 쓰고 거짓되이 행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들이 알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도 증거하실 수 있는 바이었다.

[6-8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바울 일행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사도이므로 존중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든지 다른 이들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 세상의 것이 섞이지 않은 그들의 순수함을 보인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가 아니므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의 상급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나타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공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삯군은 복음을 빙자하여 단지 이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 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뜻과 영혼 구원의 일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바울 일행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영혼들을 위해 온유한 심령으로 자기들의 목숨까지 즐거이 줄 마음으로 일하였다. 그들은 유모가 어린아이들을 기르는 것과 같이 유순한 자들이 되었고 영혼들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단지 말로만이 아니고 목숨까지도 주기를 즐거워하는 심정으로 일하였다. 여기에 복음 사역자들에게 필요하고도 중요한 또 하나의 면모가 있다.

[9-10절] [이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전파하였음이니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사도 바울은 한번 더 자신의 복음 증거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애쓴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말씀 전파의 사역이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그의 말씀 전파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도의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누를 끼쳤을 것이고 일하지 않고 편안히 섬김을 받는 자가 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시 간추려 말하기를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의 말씀 전파의 사역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고 흠 없이 행한 사역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증인이요 하나님께서도 증인이 되신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말씀 전파의 사역에 대해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뒤에 올 교회의 많은 말씀 사역자들과 봉사자들이 본받을 만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사에 거룩하게 행하고 정정당당하고 흠 없이 행하는 봉사자들이 되어야 한다.

[11-12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말씀 전파의 사역의 목적을 증거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함으로 그들을 부르셔서 자기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복음사역의 목적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믿음 중심, 의와 선과 진실 중심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 사역자들은 거짓이나 부정(不淨)이나 속임으로 일하거나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일하지 말아야 하고, 또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나 아첨하는 자들이나 탐욕을 품는 자들이나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며 삯군들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검소하고 절제한다.

둘째로, 복음 사역자들은 유모같이, 아비같이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심정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일해야 하고,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해야 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이 행해야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일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친 자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복음 사역의 목표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며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게 하고, 또한 천국 백성답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행하며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13-20절, 성도의 표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인해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 진리 곧 오늘날 신약성경에 밝히 기록된 복음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반복하여 증거한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일행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받았으며, 그들이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또 그것이 옳다고 증거하였다. ‘진실로 그러하다’는 말은 그가 전한 복음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들이 그것을 그렇게 받은 것이 옳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에 범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지 못하는 곳에는 구원과 영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받는 심령마다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신약의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이 모든 말씀들이 오늘날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셨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들이 아니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다. 예레미야 23:28-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夢事)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이 사람의 심령을 뜨겁게 하시고 방망이같이 완고한 마음을 부서뜨리신다. 히브리서 4: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했다.

[14절] [이는]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되었음이니] [이는]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 역사한 증거는 그들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말씀은 교회들의 위치가 지역적으로는 유대 지방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영적 주소이다. 교회들은 또한 ‘하나님의 교회들’이다. 그것은 지상 교회들의 참된 소속을 보인다. 모든 교회들은 어느 나라, 어느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속하며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교회들에게 최고의,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이다.

[15-16절] 유대인은 주 예수와 [그들 자신의]2)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죄악은 참으로 컸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을 죽였고 사도 바울 일행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했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도 바울 일행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항한 매우 큰 죄악이었다. 그들은 죄악을 항상 채우는 자들이 되었고 그러므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끝까지 임하게 되었다.

[17-18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곳으로 가려고 한두 번 시도하기도 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진실한 다른 성도들을 보기를 원한다. 특히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들은 그들을 통하여 구원받고 양육받은 성도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제, 즉 참된 교회의 교제는 이 땅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제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기쁘게 누릴 교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바울 일행의 길을 막았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의 방해와 시험들을 경험한다. 우리가 장차 사탄과 악령들을 이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때때로 우리의 삶과 봉사의 일들 속에 사탄의 방해와 시험들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사탄의 방해와 시험들을 염려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일에는 고난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진실히 충성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다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작정하신 열매가 다 맺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19-20절] [이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아니냐 함이니라.] [이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기쁨임이니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 원한 이유는 그들이 바울에게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일을 말한다. 지금 교회들은 지상에서 여러 가지 싸움 속에 있고 불완전하지만,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복음의 결실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 진실한 성도들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영광과 기쁨이 될 것이다. 물론, 실제 순종함이 없는 이름만 가진 교인들, 진심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목사들의 근심거리요 교회의 수치거리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 비록 실수들은 있어도 중심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목사들의 기쁨과 면류관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복음, 지금 신약성경에 밝히 기록된 내용과, 오늘날 참된 목사들을 통해 전해지는 성경적 설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자. 성경적 복음 지식과 믿음은 성도들에게 매우 기본적이고 그들이 구원받은 중요한 표가 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굳게 붙들자.

둘째로, 우리는 많은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키자. 초대교회는 많은 환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지켰다. 성경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많은 환난 중에 믿음을 지키고 위로를 얻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를 만들자. 교회의 안팎에는 많은 환난과 마귀의 시험이 있으나, 참된 성도들 간에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 또 성도들 상호간에 아름다움 교제가 있고 사모함과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 교회의 표이다.

3장: 재림을 위한 준비

[1-4절]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이요 우리의 동역자](전통사본)3)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해 [너희를]4)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는]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앎이니라]. [이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앎이니라].

바울은 교인들이 환난 중에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어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게 하였다.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이요 우리의 동역자’라고 표현했다. 바울에게는 그를 도와 성도들의 믿음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좋은 동역자가 있었다. 그는 그를 통해 그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 그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였다. 목사의 일차적 사명은 교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5-7절]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우리의](원문)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결신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기만 하지 않고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과 보존을 위해 힘썼다. 사탄이 그들을 시험해 믿음을 잃게 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믿음을 잃는다면 그의 전도 사역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교인들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사의 임무이다. 감사하게도, 바울의 염려는 염려에 불과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과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었고 또 항상 바울 일행을 기억하고 간절히 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울 일행에게 위로가 되었다. 성도들의 믿음의 소식보다 목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8-10절] 그러므로[이는](원문, 영어성경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 것임이니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 안에 굳게 섰으므로 바울 일행은 살 것 같았다. 약해졌던 그의 심정은 새 힘을 얻었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존되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음을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로 보답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히 12:2) 우리를 환난 중에서도 지키신다(시 91편). 그러므로 성도 개인이나 성도들을 위해 세움받은 목사들은 자신과 교회의 믿음의 보존을 위해 물론 성실히 힘써야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기를 주야로 심히 간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목사의 사명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목사를 교회에 보내시고 세우신다. 목사는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이 먼저 믿음에 굳게 서고 온전해야 하며, 또 성경말씀의 충만함을 얻어 교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가 이 일을 위해 충성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11-1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길을 인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게 해주실 것을 기원하였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계획해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잠 16:1, 9).

또 바울은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기원하였다. 우리의 성화는 주께서 도우시며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5절).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의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말했다(8:13-14).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이었다(요 13:34). 또 우리의 사랑은 주 안에서 성도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원수에게까지도 미쳐야 한다(마 5:44).

바울은 또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원하였다. 주의 재림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행위들에 대한 심판도 있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믿음에 굳게 서며 온전케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환난과 시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도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에는 ‘너희 믿음’이라는 표현이 5번이나 나온다(2, 5, 6, 7, 10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도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믿음의 굳건함을 위해 목사들을 세우셨고(2, 10절) 또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9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목사들의 성경적 설교들을 귀중히 여기고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사랑의 풍성함이 있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주의 교훈대로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불법이 성행하므로 사랑이 식어지기 쉬운 말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주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며 원수까지 사랑하자.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거룩함에 흠이 없어야 한다. 죄는 온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우리의 거룩함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는 한마디로 우리의 거룩함이다. 우리는 날마다 거룩함에 흠이 없는 생활, 곧 도덕적 완전을 목표로 삼고 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해야 한다.

4장: 재림의 위로

1-12절, 성도의 본분

[1-2절]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이는]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앎이니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권면하였는데,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 예수께서 주신 구원 안에서’라는 뜻과 같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사도 바울에게서 교훈을 받았다.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교훈들은 오늘날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어진 말씀이다. 바울은 이제 그들이 그 교훈대로 행하기를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지만, 인간편에서도 성실히 힘써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 베드로후서 1:10에서 사도 베드로도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더욱 힘쓰라고 권면한 까닭은 그들이 주 예수께서 그들을 통해 주신 명령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교훈과 명령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교훈들과 명령들을 힘써 행해야 한다.

[3-4절] [이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성도들이 마땅히 행할 바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바를 더욱 많이 힘써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죄가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로부터의 거룩함은 모든 문제의 대답이다. ‘곧 음란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거룩함이 무엇보다 음란, 곧 성적 부도덕을 버리는 것임을 보인다. 미혼자들과 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살아야 하고, 결혼한 자들은 바른 부부관계를 지켜야 한다. 바른 부부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거룩하지 못하고 불결한 음란의 죄악이다.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이라는 원어(토 헤아우투 스큐오스 크타스다이)는 ‘자신의 그릇을 취할 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결혼을 가리킨다고 본다(Thayer, BDAG, 박윤선). 그러나 ‘그릇’이라는 말의 성경의 용법에 따라5) ‘자신의 몸을 다스릴 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크리소스톰, 칼빈, NIV).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안다’는 말은 음란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부부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도는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음란의 죄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부부의 관계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지켜야 한다.

[5-6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성도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대조된다. 이방인들은 색욕을 좇아 음행을 행하지만, 성도들은 부정당하고 과도한 욕망을 통제하고 죄악된 욕망을 버리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해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아름다운 관계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유지해야 한다.

‘분수를 넘어서’라는 말은 ‘탈선’과 ‘외도(外道)’를 가리킨다. ‘형제를 해한다’는 말은 문맥상 성적인 탈선과 외도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이런 잘못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주께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무섭다. 경건한 다윗이 자기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음죄와 살인죄 때문에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웠다. 다윗의 집에는 오빠가 이복 여동생을 강간하고, 동생이 이복형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는 일이 일어났었다(삼하 11장 이하). 범죄로 인해 다윗이 치룬 대가 즉 그가 받은 훈련은 매우 혹독하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7-8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하심임이니라.]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그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요한일서 4:13에도 나오는데, 성령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심을 보이며, 또한 성령께서 ‘거룩한 영’이심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거룩한 생각과 거룩한 감정과 거룩한 의지를 주신다. 그는 우리의 거룩한 정신과 마음의 원천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란과 불결에 대해 보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 우리를 부정(不淨)케 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거룩케 하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향,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거룩함이지, 죄와 부정(不淨)과 불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멸시하고 거부하고 저버린다면, 우리는 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며 그 잘못은 크다. 여기에 사람의 죄의 심각성이 있다. 죄는, 비록 인간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 성격상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명예에 대한 도전이며 침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9-10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라는 원어는 한 단어인데(데오디닥토스), 그것은 형제 사랑의 교훈이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율법에도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새 계명에도 있고 또 성령께서 사도들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심에도 있음을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날 성령의 감동 속에 하는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다. 성경의 주요 교훈은 사랑이며 그 대상은 제한이 없다. 우리는 몇몇 사람만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온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들이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도 모든 성도들을 대하여 또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11-12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삼가며 조용한 생활을 해야 한다.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또 우리는 손으로 자기 일을 해야 한다.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의 형제니라.” 사람은 범죄한 이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도록 작정되었다(창 3:19). 잠언 10:4-5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고 말한다. 성도가 손으로 자기 일을 하며 살 때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바르고 단정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또 궁핍함도 없을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은 세상에서도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결코 게으르거나 낭비하는 생활을 하지 말고, 또 버는 것보다 적게 쓰며 노후를 위해 지혜롭게 저축도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하며 더욱 많이 힘써야 한다. 성화(聖化) 즉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우리의 거룩한 행실과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인간편에서의 성실한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더욱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음란을 버리고 부부관계를 거룩하게 유지해야 한다. 미혼자들과 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자신을 절제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결혼한 자들은 부부관계를 저버리고 외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참으로 무섭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형제 사랑함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해야 하며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조용히 손으로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는 자가 되자. 성도는 자기의 직업에 관한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또 물질 생활에서 낭비하지도 말고 절약하며 구제하며 저축하며 살아야 한다.

13-18절, 자는 자들에 관하여

[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묘사한다. 죽은 자를 자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죽은 자가 자는 자와 모습이 비슷하며 자는 자가 잠을 깨듯이 죽은 자도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영혼의 불멸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기 때문에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와 마지막 부활의 진리는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할 진리이며 소망의 내용이다. ‘소망 없는 다른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내세(來世)나 부활이나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고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슬퍼할 뿐이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믿는 가족이나 다른 성도들의 죽음 앞에서 너무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이별이니까 슬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참된 안식을 누리는 기쁘고 복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14절] [이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오실 것임이니라].

우리가 다른 성도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를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믿음의 기본적 내용임을 나타낸다. 모든 성도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며 믿고 있다. 고린도전서 15:3-4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로마서 10:9의 말씀대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받는다. 또 고린도전서 15:14, 17의 증거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라는 원문(디아 투 예수)은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뜻으로 ‘자는 자들’에 걸리기보다 ‘데리고 오시리라’에 걸린다고 본다(RSV). 죽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죄씻음과 새 생명 주심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을 그의 재림 때에 그로 말미암아 함께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키실 것이다.

[15절] [이는]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못할 것임이니라].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데려오신다고 말하는 이유를 보인다. 본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 데살로니가전, 후서에는 26회나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신약성경 전체에는 약 667회 사용되었다고 한다.6)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주 예수님의 재림의 진리는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강조된 진리이다. 거의 매 장마다 재림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다. 본문 15, 16절 외에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16절] [이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일어날 것임이니라].

본문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주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말한 이유를 다시 말한다. ‘주께서 . . . 친히’라는 원어(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는 이 세상에 오셨던 주님, 곧 사람으로 태어나 약 30년간 사시고 기적들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바로 그 주님 자신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강조한다.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 곧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을 증거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1:11의 증거와 같다. 거기에 보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은밀한 사건이 아니고 시끄럽고 떠들썩한 사건일 것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밀한 공중 재림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없다.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일이 있을 주의 재림 사건은,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은밀한 사건이 아니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사건일 것이다.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날 첫 번째 일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사람들의 죽은 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17-18절]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두 번째 일은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이다.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죽은 성도들은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되어 다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휴거’(rapture)라고 부른다. ‘영접하게’라는 원어(아판테시스)는 ‘만나게’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24:30-31을 보면, 주께서는 “그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재림의 주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영광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은 아무 부족이 없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주님을 모신 곳이 곧 천국이다.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주님의 재림과 영광스런 부활은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이다. 성도들은 이 진리와 소망으로 인하여 동료나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 위로를 받는다. 로마서 12:12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소망 중에 서로 위로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도 믿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의 증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며 그들의 부활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또 죽은 자들의 부활도 믿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주께서 그들을 데려오실 것을 알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안식과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 영혼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과 함께 지상에 내려올 것이며 그들의 몸과 결합할 것이다. 재림하시는 주께서는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의 영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산 자들의 변화를 믿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님 자신이 증거한 바요 사도들이 증거한 바이며 신약성경의 확실하고 기본적인 교리이다. 주의 재림 때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먼저 부활할 것이며 그때에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다같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소망이며 위로이다.

5장: 재림의 갑작스러움

1-11절, 재림의 갑작스러움

[1-2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아크리보스)[정확히, 충분히] 앎이라.

‘때와 시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키며 그때는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해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날’은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날’로 자주 언급된 날이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온다는 표현은 주님 자신의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재림의 갑작스러움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4: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3절] [이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못할 것임이니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안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재림 직전의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시면서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마 24:37-38; 눅 17:26-28). 그때 멸망이 홀연히 임하게 될 것이다. 그 멸망의 갑작스러움은 마치 잉태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을 것이다. 홀연히 임하는 그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지금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의 죽음도 예상할 수 없이 오며, 주 예수의 재림도 갑작스럽게 올 것이다.

[4-6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형제들아’라는 말은 본 서신에서만 14회나 나온다(1:4; 2:1, 9, 14, 17; 3:7; 4:1, 10, 13; 5:1, 4, 12, 14, 25). 이것은 매우 친근한 호칭이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마태복음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며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

본문은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만, 어두움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주의 재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안일하게 살다가 갑자기 멸망을 당하지만, 빛의 자녀들은 준비하며 살다가 재림을 맞이할 것이다.

본문은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낮의 아들과 밤의 아들을 서로 대조시킨다. 어둠의 아들과 밤의 아들은 세상을 가리키며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가리킨다. 밤은 안 좋다. 밝은 것이 좋다. 범죄자들은 밤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밤이 좋아서가 아니고 자기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빛에 속한다.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이나 밤의 아들이 아니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가리키고, 빛은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그런데 빛의 아들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영적으로 잔다는 말은 죄를 짓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깨어 근신한다는 것은 정상적 신앙생활, 곧 죄짓지 않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고 진실하고 선하게 사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깨어 근신해야 한다. 우리는 정상적 신앙생활을 힘써야 한다.

[7-10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것임이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본문은 깨어 근신하는 생활을 믿음, 사랑, 소망의 생활로 묘사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정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게 될 것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구원받은 자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도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게 하려는 데 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큰 복이다. ‘깨든지 자든지’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나 비유적인 의미(육신적 생명과 죽음)가 다 가능하다.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은 항상 주 안에 거하며 주와 함께 사는 것이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피차 권면하라’는 원어(파라칼레이테 알렐루스)는 4장 끝에 ‘서로 위로하라’는 말과 동일하다. ‘피차 덕을 세우라’는 말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어 서로를 건립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성도는 자신의 신앙 성장에만 힘쓸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힘써야 한다.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은 이 교훈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바임을 보인다. 그것은 그의 교훈이 그들의 현재 행위를 인정하면서 준 교훈임을 나타낸다. 이 말씀도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도 다른 이들을 권면할 때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선한 행위를 무시하지 말고 인정하면서 권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갑작스러움을 바르게 이해하고 늘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도적같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이후의 어느 순간에라도 오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여러 가지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그가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그가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주의 재림은 멸망받는 자들에게는 홀연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그 날을 맞을 것이며 그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주의 재림은 빛의 자녀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어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깨어 있는 삶이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 곧 정상적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들은 주 예수의 재림을 사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함으로 피차 덕을 세워야 한다.

12-15절, 교회 생활

[12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라는 말은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직임을 보인다. 직분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며 또 수고할 때 그 직분의 의미가 있다. 수고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직분이 영광이 아니고 부끄러움일 뿐이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다스리며 권하는 것은 치리권과 교훈권에 해당한다. ‘권한다’는 원어(누데테오)는 ‘훈계한다’는 뜻으로 일반적 권면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닌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의 말씀 진리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주 안에서’ 교인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다. 성경에 계시된 주의 진리와 주께 대한 바른 믿음을 떠나서는 목사와 장로들의 권위는 없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성경적 교훈과 믿음 안에서만 권위가 있다.

[13절]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라는 원어(디아 토 에르곤 아우톤)는 ‘그들의 일 때문에’라는 뜻이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곧 말씀을 사랑함이며 그것이 교역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보인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의 복음을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전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막 1:38). 또 그는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전도하라고 부탁하셨다(마 28:19-20).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말씀 사역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말씀의 일꾼들을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 목사들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태도이다(마 10:40; 25:40, 45).

본문은 또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씀한다. 갈라디아서는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 등의 육신의 죄악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했고(5:19-21), 에베소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훈했다(4:2-3). 교회는 분쟁하지 말고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고 일치단합해야 한다.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우리는 서로 돌아봄으로써 다른 성도를 인격적으로 성숙케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우선, 우리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해야 한다. ‘규모 없는’이라는 원어(아탁토스)는 ‘무질서한, 복종치 않는’이라는 뜻이다(BDAG). 교회에는 성경의 교훈을 복종치 않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이 있다. ‘권계한다’(누데테오)는 원어는 ‘훈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해야 한다.

또 우리는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해야 한다. ‘마음이 약한’이라는 원어(올리고프쉬코스)는 ‘낙심된’이라는 의미이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낙심하는 자들이 있다. 마음이 약하면 낙심하기 쉽다. 우리는 낙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또 우리는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힘이 없는’이라는 원어(아스데노스 ajsqenhv")는 ‘약한’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몸의 연약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의 연약도 가리킬 수 있다. ‘붙든다’는 원어(안테코마이)는 ‘꼭 붙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몸이 약한 자들이나 마음이 약한 자들을 꼭 붙들어주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인격의 성장과 성화(聖化)는 매우 더디고 불완전하다. 또 사람은 다 자기 형편과 처지가 다르고 자기 속에 자기만 아는 약점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지 못하면, 우리의 인간 관계는 잘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하여 오래 참아야 한다.

[15절]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으로 보복하지 말아야 하고 성도 상호간에게나 모든 사람에게와 불신자들에게도 항상 선을 행해야 한다.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0, 44).

분문은 교회생활에 필요한 교훈들을 준다. 첫째로, 성도들은 그들의 목사와 장로들을 그 직분과 사역 때문에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

둘째로, 교인들은 서로 화목하며 일치단합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규모 없는 자들, 즉 사도들을 통해 주신 성경의 교훈들을 복종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권계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마음이 약하거나 낙심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고 힘이 없고 심신으로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주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한다. 사람은 다 자기 형편과 처지가 다르고 자기 속에 자기만 아는 약점들이 있다.

여섯째로,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16-18절,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16절]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슬픔과 대조된다. 인간의 슬픔과 슬픈 일들은 죄의 결과이며, 기쁨은 죄사함과 구원의 결과이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어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성도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도의 기쁨이 그의 환경이나 육신의 조건 때문이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건강할 때뿐 아니라 아플 때도,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또 평안할 때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기뻐해야 한다.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 잠언 3:6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교훈한다.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감사할 때 감사의 기도를, 자신의 실수와 연약을 깨달을 때 고백의 기도를, 또 무엇이 필요할 때 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특히 성도의 믿음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낙망치 않고 간구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믿음이 있는 자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성도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때때로 힘든 일이지만, 성도에게 기도는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복된 특권이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을 얻고 특히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하며 응답을 받는다.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도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주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이 세상과 온 우주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을 안다.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환난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죄악된 일을 다 버리고 거룩하게 하고 높은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그렇게 감사해야 한다.

본문은 이런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큰 복과 특권이다.

본문은 이와 같이 성도의 복된 특권의 삶에 대해 교훈한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된 특권을 마음껏 누려야 하겠다.

19-28절, 말씀, 선, 거룩, 기도

[19절]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억누르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은 성경말씀에 합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은 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성경의 일반적인 진리와 교훈 안에서 각각 소신껏 행해야 한다. 로마서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우리는 때때로 많은 변론 후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기도 한다(행 15장). 그러나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죄와 의,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은 우리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또 성령의 생각은 항상 질서 있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자기 형편과 처지에 맞지 않는 과분한 생각과, 공동체의 화평과 일치를 고려치 않는 무질서한 생각과, 남의 의견들을 잘 듣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독선적 생각 등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고 육신의 생각이라고 본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20절]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사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 예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교훈적 내용이다. 예언은 물론 장래 일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교훈적 내용이든지 장래 일에 대한 것이든지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성도가 그것을 멸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었다.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사도들을 통해 주신 예언들은 신약성경에 충족하게 기록되었다.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교훈과 예언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적 교훈, 성경적 예언, 성경적 교리, 성경적 설교를 멸시치 말고 존중하고 믿고 받고 행하고자 힘써야 한다.

[21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지혜로운 자는 사람들의 말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을 검토하고 판단하고 분별해야 한다. 잠언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오늘날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가 많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선과 악, 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 정통 교리와 이단을 분별해야 하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 곧 선과 의와 진리와 정통 교리만을 붙잡아야 한다.

[22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라는 원어(아포 판토스 에이두스 포네루)는 ‘모든 형태의 악’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단의 악, 타협의 악, 세속주의의 악, 불결의 악, 미움의 악, 시기의 악, 분열의 악, 거짓의 악, 불충성의 악, 나태의 악 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악한 생각도, 악한 말도, 악한 행위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음란한 옷차림의 악, 육감적이고 광란적인 세상 음악의 악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악, 모든 종류의 악을 버려야 한다.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평안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평안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다(롬 14:17). 죄는 불안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평안과 행복을 가져온다. ‘너희’라는 말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너희’를 가리킨다. 사람을 거룩케 하시는 일 즉 사람을 구원시키시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고 이루시는 일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을 온전히 거룩케 하시기를 기원했다. 법적인 거룩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이미 이루어졌으나(히 10:10), 실제적 거룩도 필요하다. 우리 속에는 아직 죄성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은 성화 과정이다. 우리는 몸이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어 죄성이 전혀 없는 완전 성화의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고후 7:1).

바울은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영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몸도 가진 존재이다. 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죄가 나쁜 것이다. ‘영과 혼’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같은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영과 혼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다른 말이며 구별 없이 사용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죄 없는 영육의 존재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며 우리의 생활 목표이다.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를 영생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시작하신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빌 1:6). 하나님의 구원은 중도에 실패하는 구원이 아니다. 그는 죄인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모든 죄를 법적으로 깨끗케 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을 실제적으로도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인격자들이 되게 하신다. 구원의 목표인 완전 성화는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과 변화로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완전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힘써야 한다.

[25절]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복음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기도가 매우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성도들의 열심 있는 기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담임목사와 그의 협력자들을 위해, 그들의 설교와 그 외의 여러 사역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6절]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므로 시시때때로 서로 문안해야 한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라는 말은 ‘거룩한 사랑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의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문안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슬픔과 고난이 많으므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위로하며 격려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야 할 것이다.

[27-28절]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거룩한]7)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8)

성도들은 성경말씀을 읽어야 하고 성경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의 의무이다. 성도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성도답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들이 흠과 점 없는 온전한 삶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확고하기를 원하며 거룩한 삶을 이루기를 사모할진대,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듣고 배우며 믿고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나 들을 때 바른 해석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감동을 멸시하거나 억제하지 말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악을 버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 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자가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요점은 사랑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주실 줄 알고 늘 기도하고 의지하며 힘쓰자. 우리가 성실히 행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당연한 의무이지만,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넷째로, 모든 성도는 목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과 목회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우리는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문안해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의 제자들로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문안하고 격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의 실제적 성화와 온전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의 의무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자.

미주

1) Byz א A vgmss (copbo) 등에 있음.

2) Byz syrp Tertullian 등에 있음.

3) Byz syrp eth 등에 있음.

4) Byz vgms syrp 등에 있음.

5) ‘소년들의 그릇’(삼상 21:5), ‘택한 그릇’(행 9:15),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롬 9:22, 23), ‘질그릇’(고후 4:7), ‘귀히 쓰는 그릇’(딤후 2:21) 등.

6) J. B. Smith, Greek-English Concordance to the NT, p. 210.

7) Byz A vg syrp copbo arm 등에 있음.

8) Byz א A vg syrp copbo arm eth geo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