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골로새서 1-4장[옥중서신]

영국신사77 2020. 4. 15. 18:59


골로새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2장: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하심

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4장: 그리스도의 일꾼들

서론

골로새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23; 4:18). 바울의 용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반론은 설득력이 없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본 서신을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골로새 교회다. 골로새는 라오디게아 동남쪽 약 15km 지점에 있었다.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이 세 도시는 바울의 전도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전도한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골로새와 그 주위 도시들은 에바브라를 통해 말씀을 받았던 것 같다(골 1:7; 4:12-13). 그런데 그 교회에 유대교적 혹은 율법주의적 요소와 금욕적 요소와 사색적 요소를 가진 이단이 침투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 교회를 위해 본 서신을 썼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60년경일 것이다. 두기고(엡 6:21; 골 4:7),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아킵보 등에 대한 언급(골 4:10, 12, 17; 몬 23-24)은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거의 같은 해에 로마 감옥에서 기록되었음을 보인다. 기록된 순서는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순일 것이다.

골로새서의 특징적 주제는 그리스도의 완전충족하심이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사역의 완전충족함을 증거한다.

골로새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2장, 그리스도의 완전충족하심 (거짓된 사상들에 대한 반박)

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4장, 그리스도의 일꾼들

1장: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1-8절, 문안과 감사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1)으로부터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그의 직분에 대한 소명감이 분명하였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 가운데 그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에 대한 소명감과 사명감이 분명해야 겸손하게 그리고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다.

‘성도’는 매우 존귀한 이름이다.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단번에 거룩해졌다. 그것이 구원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의 존귀한 이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며 천국의 백성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다. 실상,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는 혈육관계보다 더 의미가 있다. 믿음 안에서의 형제 자매는 육신의 형제 자매보다 더 친밀하다. 육신의 형제는 100년간의 관계이지만, 믿음의 형제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안’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다. 은혜는 죄씻음과 구원의 복이요, 평안은 그 구원에 뒤따르며 동반되는 복이다. 평안은 마음의 평안뿐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평화도 포함한다. 은혜와 평안은 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하며 문안하며 또 그것을 누리는 것은 매우 귀한 특권이다.

[3-5절]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기도할 때마다’라는 원어(판토테 프로수코메노이)는 ‘항상 기도하면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였다.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귀한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도 교회를 위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그리고 특히 목사와 교역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세상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들이다. 성도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신의 구원과 미래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첫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구원의 생명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큰 보화이다. 그런데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신 자들만 가질 수 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귀한 믿음이 있었다.

둘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이 참 교회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고, 바른 교리 사상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배교의 시대에 배교에 따라가거나 배교와 타협지 않고 잘못된 연합운동에 참여치 않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참 교회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또한 바른 말씀을 실천하는 것, 특히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모든 교인들이 겸손히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일치 단합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셋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가진 소망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성도들의 소망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 쌓아둔 것들, 즉 천국과 부활과 영생 등 영광스러운 내용이다(롬 8:18).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는 원어는 ‘복음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는 뜻으로 소망의 내용이 복음 진리 안에 제시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과 영생은 바로 구원이 의미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내용을 의미한다.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복음이 진리의 말씀임을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곳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고 하나님의 주신 복음 안에만 있다. 그 내용이 구원 소식이고,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자들이다.

[6절]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전통사본에는 없음).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리킨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미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의 열매들이다. ‘깨닫다’는 원어(에피기노스코)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다, 바르게 인식하다’는 뜻이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고 믿을 때 온다. 참된 지식은 믿음에 필수적 요소이다. 참된 깨달음과 지식이 없이는 참 믿음이 건립될 수 없다. 믿음은 참되고 견고한 지식 위에 세워지지, 바른 지식 없는 막연한 감정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7-8절]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에바브라는 바울 일행과 ‘함께 종된’ 자, 곧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에게서 복음을 배웠다.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가 있었고, 복음을 듣고 배우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는 데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새 생명의 일을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다. 에바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이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믿었고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였다. 사랑은 참된 복음 신앙의 증거이며 말씀 순종의 표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받아 누리자. 그것은 큰 복이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물질적 필요의 공급, 사회적 평안을 누린다. 우리는 이 복을 더욱 사모하며 누리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간직된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또 그것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욱 견고하며 풍성케 되기를 기도하자.

9-14절, 바울의 기도

[9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받고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첫 번째 내용은 그들이 모든 영적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구한 것이었다. ‘아는 것’이라는 원어(에피그노시스)는 ‘정확한 지식’을 가리킨다고 한다(Thayer).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그 일에 대해 알아야 잘 할 수 있다. 무슨 기계를 사용하려면, 먼저 그 설명서를 읽어보고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일도 그러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가 죄인들을 위해 어떤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구주 예수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하나님과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신앙생활 전반이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후 왜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 이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되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말했고, 또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하나님의 모든 뜻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했다(행 20:20, 27).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으려면, 영적인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 곧 충만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충만하게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10절]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두 번째 내용은 그들이 주께 합당히 행하기를 원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될 때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행위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이다. 지식은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지식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기보다 그 지식을 통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가치가 있다.

우리가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에게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합당하게 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실 것이며, 우리가 계속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진노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범사에 또한 온전히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한두 번이나 또는 부분적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범사에 그리고 온전히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그의 명령은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악은 피조물에게서 나왔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선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의 요지는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 믿어 구원받으라는 것과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후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 5:16). 성경은 선행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특히 디도서에서 강조되었다(딛 1:8, 16; 2:3, 7, 14; 3:1, 8, 14).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은 처음 내용에 대한 보충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좀 필요한 일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이 있다. 우리는 특히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7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확실하게, 더 깊이 아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점점 자라서 충만한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교훈했다.

[11절]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세 번째 내용은 그들이 능력 있는 자가 되고 오래 참는 자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능력은 그의 영광이다. 그는 역사상 종종 그의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다. 비록 그가 사도들의 시대 이후에 계속 기적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우리는 이해하지만, 그의 능력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 능력이 바로 우리의 힘의 원천이시다. 사도 바울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 곧 그의 전능(全能)으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능력 있는 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의 뜻을 행하려면,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육신적 힘뿐 아니라, 정신적 힘, 영적인 힘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큰 고난을 당하셨다. 사도 바울도 많은 환난을 당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고난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잘 이기고 주의 뜻을 행하려면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이다.

능력의 유익은 참음에서 나타난다. 힘이 있는 자만이 잘 참을 수 있다. 그런 힘이 없는 자는 조금 참다가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것이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대로 믿고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소망하고 인내하며 선을 행할 것이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네 번째 내용은 그들이 그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일로 표현하였다. 어둠은 무지와 부도덕과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의 세상과 장래의 지옥의 모습이다. 그러나 빛은 지식과 거룩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와 장래의 천국의 모습이다.

성도의 기업은 천국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5:34에 보면, 주께서는 의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 현재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4에서 그 기업을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표현하였다. 천국은 땅 위의 몇 억 원, 아니 몇 백억 원의 유산보다도 귀하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라고 표현한 것은 성도의 기업을 우리만 얻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얻고 우리도 그 중의 한 부분을 얻게 될 것을 보인다. 과연, 요한계시록 7:9에 보면, 구원을 얻는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 속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되어 있다. 구원 얻는 자들의 수가 많을 것이다.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천국의 한 부분을 얻게 될 것이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으므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법적으로나 위법적으로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합당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법적으로 의롭고 정당하였다.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흑암의 권세’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가리킨다.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며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후 4:4). 사탄은 지금 공중에 권세를 잡고 있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다(엡 2:2). 죄와 죽음과 사탄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권세’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탄은 애굽 왕 바로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의 사랑의 아들의’(투 휘우 테스 아가페스 아우투)라는 말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혹은 ‘그의 사랑의 표시로 주신 아들’(요 3:16; 요일 4:9, 10; 롬 5:8)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의 아들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나타낸다. 다니엘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로마 나라 때에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가까움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마 4:17),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미 제자들 가운데 임하였음을 말씀하셨다(눅 17:20-21). 그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9에는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다.

‘건져내사’라는 말(에루사토)과 ‘옮기셨으니’라는 말(메테스테센)은 단순과거시제로서 그 사실이 단번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실임을 나타낸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중생(重生), 곧 거듭남은 반복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진실히 믿은 자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 곧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이었다.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죗값을 지불하고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개념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를 죄책과 형벌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구속(救贖) 혹은 속죄는 죄사함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사함을 가리킨다. 복음은 죄사함의 방법을 제시하는 소식이다. ‘얻었다’는 말(에코멘)은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사함의 구원을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처럼 구원은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본문의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점점 더 알고 충만한 지식에 이르기를 기도하자. 신앙생활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믿고 바로 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하자. 신앙생활은 지식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 선한 행위가 뒤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그것은 선한 일들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기를 위해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어떠한 고난에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도하자. 신앙생활에는 지식과 행위가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고난 중에 낙심하며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어떤 고난에도 참고 견딜 수 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음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 즉 의와 지식과 기쁨의 세계로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가 없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허무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장차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다.

15-18절, 그리스도의 뛰어나심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우리를 죄에서 구속(救贖)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바울은 15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열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요 4:24)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지만(딤전 6: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전통본문)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히브리서 1:3, “이[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형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 낳으심과 창조는 비슷하지만 동일하지 않다. 성경에서 창조도 낳으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 영혼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낳으심으로 표현된다(요 1:13; 약 1:18).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창조는 질적 차이를 만든다. 창조주는 무한하시지만, 피조물은 유한하다. 그러나 낳음은 동질적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은 다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신 것이 아니고 나신 것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9:6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요한복음 1:1에서 ‘하나님’으로, 요한일서 5:20에서 ‘참 하나님’으로, 디도서 2:13에서 ‘크신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유한자가 아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 무한자에게서 나신 무한자, 영원자에게서 나신 영원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아들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때는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 곧 영원 세계에서의 일이라고 보인다.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에게’(엔 아우토) 창조되었다는 원어는,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디 아우투) 창조되었다는 원어도 이와 비슷하게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에 의해 혹은 그를 통해 창조된 세계는, 하늘에 있는 것들 곧 하늘과 천사들과 해와 달과 별들과, 땅에 있는 것들 곧 땅과 바다들과 호수들과 강들과 식물들, 새들, 물고기들, 동물들, 사람들도 포함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들 곧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 곧 영의 세계 또는 천사의 세계도 포함한다.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라는 말은 천사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다니엘서는 세상 위정자들 배후에 천사들이 있음을 증거하였다(단 10:13, 20, 21).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만물의 창조의 목적이시다. 만물이 다 ‘그를 위하여’(에이스 아우톤) 창조되었다.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의 목적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증거하셨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창조 목적이 그러하다면, 다른 모든 것들의 목적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절]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그리스도]이 계시니라[계셨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영원 전에]니라.”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만물의 보존자이시다.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초월해 계실 뿐 아니라, 우주 안에 충만하시다(렘 23:24). 이와 같이,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보존자이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고 그는 우리를 붙드신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고,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 15:4-5). 그는 우리 곁에 계신다.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가 계시며(마 18:20)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마 28:20).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며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유기적, 생명적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명령적, 순종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 곧 우두머리, 주님, 통치자이시다.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대항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곧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순종하며 영광을 돌린다.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이시다. ‘근본’이라는 원어(아르케)가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며, 요한계시록 3:14에서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 )라고 표현될 때 그것이 그가 창조물의 근원이심을 보이지만, ‘근본’이라는 원어는 또한 ‘주권자’라는 뜻도 가진다(BDAG). 본절에서는 문맥상 주권자라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요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아홉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영광스런 부활을 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열매이시다(고전 15:20). 아직 아무도 그와 같이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치 못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나 나사로의 부활도 죽은 몸의 회생(回生)에 불과하였지 그런 영광스런 부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의 부활체를 입으셨다. 장차 그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빌 3:21).

열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 ‘으뜸이 되다’는 원어(프로튜오)는 ‘탁월함을 가지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물 가운데서 뛰어나신 분이 누구이신가? 그는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빌립보서 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시고 먼저 계시다. 그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붙드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창조물의 목적이시며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또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 가운데서 뛰어나신 주권자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비한 인격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오직 그를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자.

둘째로, 우리는 창조의 목적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며 오직 그를 위해서만 살자.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며, 우리 위하여 죽으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주권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성하자. 그는 우리의 주(主)이시며 왕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절대복종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19-23절,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

[19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모든 충만’이라는 말은 ‘신성(神性)의 충만’을 가리킨다.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속성들 중의 한두 가지를 가지셨거나 하나님과 비슷한 모양 정도가 아니셨고,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신 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요 1:1; 요일 5:20).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신적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다.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요 화목의 십자가이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레위기 17:11의 말씀대로, 사람의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표현하셨다(마 26:28). 또 히브리서 9:22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화목의 대상은 만물이며, 그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창 3:17),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 세계는 지금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고(롬 8:20-22),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비인격적 생물의 세계나 물질 세계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화목하다’는 원어(아포카탈랏소)가 ‘원상 회복시키다’는 뜻을 가지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죄의 결과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의 결과는 온 우주에 미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5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만물’이라는 말이 타락한 천사들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좁은 길로 가는 자들보다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고 그 결말은 멸망이라고 가르치셨고, 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들, 곧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7:13-14; 25:41). 영생의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있을 것은 확실하다.

[21-22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곧 화목 사역의 일차적 대상은 사람들이었다. 그 화목 사역은 특히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켰고 사람과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화목케 되었다.

화목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엡 1:4-5). 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가 이루신 십자가 사역의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되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법적 의(義)이다. 구원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다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미 이루신 것이다. 물론, 법적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헛된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죄의 도구가 아니고 의의 도구로, 세상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3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증거는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목 사역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하다.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견고히 서고 복음 안에서 주신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믿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된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생긴다. 복음 전파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은 이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증거한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누구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깨닫고 구원받게 될 것이다. 신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요 20:30-31).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는 사람을 하나님과 불화(不和)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화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사람의 가장 큰 불행이다. 복음은 화목의 메시지이다.

둘째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한 증거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믿은 자는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고 중생(重生)하였고 하나님과 화목하였다. 믿음은 곧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불신앙은 곧 사망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셋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곧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을 때, 세상의 헛된 것들 곧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권세와 명예 등을 위해 살아 왔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헛되고 죄악되며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였고 또 현재의 모든 죄악된 성질과 습관을 고백하였고 미워하였다. 또 우리는 구주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천국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계명에 순복하여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4-29절,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이 받는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뻐하며 즐거이 받고 있었다. 주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바울은 그것을 실천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전하며 거기에 무엇을 첨가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의 속죄적 고난이 남았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의 몸된 교회는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도 당해야 할 것이다(행 14:22; 계 6:11).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 것은 그가 당시에 벌써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과연 그는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자기의 당하는 고난을 자세히 간증하였다.

[25-27절]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오이코노미아)[직무, 사명]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와 사명을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들의 구원이 구약시대에는 감취었던 바이었으나 이제 밝히 증거되고 있다는 뜻에서, 복음이 ‘비밀’이라고 표현되었다.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으나, 지금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거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또 바울은 이 비밀을 ‘비밀의 영광’이라고 표현했고,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영광스러운 구원임을 나타낸다. 승천하신 주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마 24:30), 그때 죽었던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고전 15:42-44; 빌 3:20-21)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계 21, 22장).

[28-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役事)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본문은 목회의 핵심과 목회의 목적을 보인다. 목회의 핵심은 설교이며, 설교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힘쓴다. 또 목회의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세운다’는 원어(파리스테미)는 ‘드린다’는 뜻이다. 목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완전한 자를 만든다’는 말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다 포함한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그는 법적으로 완전한 자가 된다. 그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10, 14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온전케 되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聖化)의 진리이다. 성화는, 칭의와 더불어, 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고 교회를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다. 성경과 교회는 일차적으로 칭의의 복음을 위해 주어졌지만 또한 성화를 위해서도 주어졌다. 칭의는 성도에게 자유와 평안과 담대함을 주지만, 성화는 그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를 더해준다. 성도는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롬 6:22).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버릴 것이다(마 3:8-10).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29절의 ‘역사(役事)를 따라’라는 원어(카타 텐 에네르게이안)는 ‘힘을 따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말(코피오 아고니조메노스)은 ‘애쓰며 수고한다’는 뜻이다. 본절은 목회의 힘과 수고에 대해 말한다. 목회의 힘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목회자는 그 힘을 힘입어 설교하며 목회한다. 그러나 목회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애쓰고 수고함으로 된다. 목회도 성실한 노력에만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마 25:14-30)나 므나 비유(눅 19:11-27)는 복음의 일꾼들이 게으르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2-13).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해졌고 완전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 내용이며 칭의(稱義)의 진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이유요 자유의 근거요 담대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또한 실제로도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들은 지식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진리이다.

둘째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성실하게 애쓰며 수고하자.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로와 힘과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주 안에 사는 자들은 결코 낙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게으르거나 불성실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애쓰며 수고해야 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성실하게 자기의 맡은 직무를 다 감당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신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 되심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장차 때가 되면 영광 중에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다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며 영광스러운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복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때 우리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볼 것이다.

2장: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하심

1-5절, 그리스도를 깨달으라

[1절]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바쳐진 일꾼으로서 자기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든지 모르는 자들이든지 간에 그들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고자 애썼다. 교회의 봉사자들과 복음의 일꾼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열심을 다해 힘써야 할 것이다.

[2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비밀을](전통본문)2) 깨닫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힘쓴 목표는 우선 성도들로 말미암아 마음에 위안을 얻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원만하게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참 사랑의 연합은 참된 교회의 모습임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그런데 그 사랑의 연합은 참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만한 이해’라는 원어(테스 플레로포리아스 테스 쉬네세오스)는 직역하면 ‘이해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말로서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라는 뜻이라고 본다. 본문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깨닫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충만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부터가 신비 중의 신비이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사실도 신비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 세상에서 처음 이루어진 신비한 사건이었다. 그의 신비한 부활체는 장차 모든 성도들이 입게 될 부활체와 같았다. 또 그의 몸된 교회도 신비한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은 비밀스런 사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사실도 비밀스러운 일이다.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비밀이었다.

[3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누가복음 2:40의 증거대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릴 때에도 지혜가 충족하셨다. 이사야 11:2는 메시아에게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의 영이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온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장차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

[4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당시에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려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함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것에 더하여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려는 합리주의자나 신비 체험을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는 속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충족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확신함으로 우리를 흔들어 넘어지게 하려는 자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5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규모’라는 원어(탁시스)는 ‘질서 또는 질서 있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질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교인들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신앙 훈련이 잘 된 것을 뜻한다. 또 ‘믿음의 굳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그를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확신은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잘 훈련된 신앙생활을 하고 그들의 믿음이 견고한 것을 보며 기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들을 깨닫자. 그 비밀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그의 신성(神性), 그의 속죄사역과 부활, 그리고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온 세상의 회복과 영원한 천국의 영광 등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참으로 놀랍고 복된 진리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며 내용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 분 한 분으로 우리의 구원이 충족함을 깨닫고 또 모든 속이는 말들을 조심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속죄사역에 무엇을 더하려는 시도들은 다 잘못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우리는 그 진리 안에 거하며 또 모든 잘못된 말들을 분별하고 경계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질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잘 훈련된 인격과 삶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저버리는 온갖 오류를 조심하고 바른 믿음에 굳게 서서 순종하자.

6-7절,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원어(파렐라베테 톤 크리스톤 예순 톤 퀴리온)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였으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구주와 그리스도 곧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의 대답과 같다(마 16:16). 바울은 로마서 10:9-10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다. 요한복음 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여기에 교회의 기초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지식과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는 세상적 교제의 단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의 단체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세 가지 내용을 권면하였다. 첫째로, 그는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면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환난이 닥칠 때 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마 13:21).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교훈을 받은 대로’ 즉 성경말씀을 통해 될 수 있다. 다윗은 시편 19:7-8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하였다. 누가는 누가복음 1:1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페리 톤 페플레로포레메논)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확정된(fully established), 지극히 확신하는(most surely believed) 사실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또 누가는 그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는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하였다(눅 1:4).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하여 주신 것이 성경이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연구함으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면했다. 우리가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백성의 특권을 단번에 은혜로 주셨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깨닫고 놀라며 감격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미 골로새서 1:3-5에서 그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인하여 즉 그들의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증거하였고, 또 1:12에서는 그들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에베소서 1장에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의 찬송의 제목, 찬송의 이유, 우리의 헌신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여 그의 존귀한 자녀로 삼으신 이 놀라운 구원, 그의 크신 은혜와 긍휼 때문에 우리는 찬송과 감사를 넘치게 그에게 돌리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식적 예배보다 실제적 삶을 원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귀하고 중요하지만, 그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헌신이란 정상적 신앙생활,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로, 우리는 구주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의 당연한 결과이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순종의 삶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삶이다.

8-15절, 세상의 철학을 주의하라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의 교훈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며 그의 구속(救贖) 사역은 완전하므로 우리가 그 분만 따르고 오직 그의 진리와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인 철학들을 따르는 이단들이 있었다. ‘초등학문’이라는 원어(스토이케이아)는 ‘초보적 원리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철학들이나 종교들의 초보적 원리들을 가리킨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말은 이 세상의 철학들이 결국 헛된 속임수임을 암시한다. 인간의 철학들이 참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결국 헛된 속임수이다. ‘노략할까’라는 말은 이 세상의 철학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보다 오히려 빼앗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보다 오히려 해를 입힌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에는 철학들, 사상들, 종교들이 많지만, 그것들은 결국 다 헛된 속임수들이요 실상 우리를 노략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항상 굳게 서야 한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 세상의 철학들과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일부분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고 신성의 모든 충만, 곧 충만하신 신성이 거하신다.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와 같은 것도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는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이 세상에 유일한 진리이다.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충만하여졌으니’라는 원어(페플레로메노이, 완료분사)는 ‘완전하여졌으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적으로, 실질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히브리서에는 예수님 믿는 성도들이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히 10:14)고 말하였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의 머리이시다. 그는 영의 세계에서도 머리이시다. ‘정사와 권세’는 이 세상 정치가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육신의 죄의 몸](전통사본)3)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죄의 몸을 벗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악된 옛 자아 곧 옛 사람을 벗어버린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것이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라는 법적 구원이었다. 구약의 할례는 성결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결을 얻은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였다.

[12-13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죄사함의 은혜 곧 참된 성결은 세례 의식으로 상징되었다. 세례는 죄씻음의 뜻을 가지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확증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법적인 완전은 결국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와 부활을 가리킨다. 사죄 곧 죄사함을 받은 무죄(無罪) 상태는 의(義)의 상태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새 생명인 것이다.

[14-15절] 우리를 거스리고[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율법 조문들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율법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의(義)를 입혀 주셨으므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폐지된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다’(6:14), 또는 ‘율법에서 벗어났다’(7:6)고 말했고, 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였다(8: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율법을 폐하시는 법적 조치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해 죄인들에게 권세를 부렸던 악령들의 세력들도 폐하셨다. ‘정사와 권세’는 악령들을 가리키며, ‘벗어버렸다’는 말은 악령들의 세력을 폐하셨다는 뜻이다.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사죄의 사실을 악령들 앞에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벌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오히려 죄와 악령들을 이기는 사건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죽음으로 승리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인간의 철학들을 주의하자.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진리가 아니고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속임수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철학들과 종교들을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의 충만함이 있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비슷하신 자이시거나 하나님처럼 간주되신 자가 아니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유일하신 구주이시며 완전하신 구주이시다.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은 만세 전에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 충족하였다. 우리는 그의 완전한 신성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속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또 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은 완전하다. 이것이 법적인 구원이다. 또 이 법적인 구원에 근거하여 우리는 율법의 속박과 공포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천국의 약속과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새 생명을 얻었다.

16-23절, 의식법에 얽매이지 말라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것은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에 대한 법이나 피에 대한 법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레 11장; 17장). 월삭은 초하룻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원어(삽바톤, 복수명사)[안식일들]는 ‘제7일 안식일’을 가리킬 수 있으나(BDAG; 눅 4:16; 행 13:14; 16:13 등), 또한 연중 절기들의 안식일들(무교절에 2번, 맥추절 1번, 나팔절 1번, 속죄일 1번, 초막절에 2번 등 모두 7번)을 가리킬 수 있다. 본문은 의식법 문제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어떤 연약한 자들이 고기 먹는 것을 거리끼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음식 자체가 깨끗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 단지 거리낌으로 먹는 자에게는 깨끗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는 “이런 것[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말하며(9:10) 신약 아래서 다 폐지된다고 말했다(10:9).

[17절]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구약의 의식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었고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이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루어졌다. 물론 인류의 구원과 이 세상의 회복은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의 결과로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법의 내용이 그러하므로 신약 성도들은 이 법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 않다.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우리는 이제 단지 주께서 약속하신 재림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8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교훈에 대해 말한다.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의 강조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 ‘일부러 겸손함’이라는 말은 문맥상 자기 몸의 학대 곧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을 가리킨다. ‘그 본 것을 의지하여’라는 문구는 전통사본에는 ‘그 보지 못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되어 있다.4)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거짓 교사들이 그 보지도 못한 것들을 헛되이 자랑하고 과장하며 금욕과 고행과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상을 빼앗기는 것’ 곧 구원의 상실과 신앙생활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골로새 교인들은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멀리하고 배척해야 했다.

[19절]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일이다. 성도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온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자란다. 에베소서 4:15-16,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참된 영적 성장과 성화, 거룩하고 선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그 안에 계속적으로 거함으로써 많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요 15:5).

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는 말씀은 성도와 교회의 영적 성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성화는 단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3:6-7에서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였다.

[20-22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이나 의식법들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들을 강조해 이런 저런 것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였다. ‘의문(儀文)에 순종한다’는 말(도그마티제스데)은 ‘의식법의 규례들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 구약의 의식법을 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교훈은 다 멸망할 것이며, 그것들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불과하다.

[23절]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의식법의 강조나 금욕주의는 참된 경건과 성결의 삶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자의적(自意的, self-imposed) 숭배’라는 말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자기에게 부과한 경배의 행위를 가리킨다.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함’은 금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 것들은 그럴 듯한 모양과 말일 뿐이지, ‘육체’(사르크스)[곧 몸의 죄성]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참된 성화에에 아무런 유익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는 구원받은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과 또 성령의 도우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식법들이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음을 알자. 구약의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정결 부정결의 음식법, 절기들에 대한 규례 등 소위 의식법들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며, 비록 그것들에 담긴 도덕적 교훈은 신약시대에도 유효하지만, 의식법 자체로서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금욕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무엇을 먹고 안 먹는 것, 무엇을 만지고 안 만지는 것 등의 외적 규례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1-5에서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것을 경계하였다.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를 이루는 길도 아니다. 금욕주의는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사람은 비록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 뜻과 계명대로 살기에 무능한 자이다. 금욕주의는 중세 시대에 수도원 같은 곳에서 실천되었으나 오히려 참된 구원의 길을 어지럽히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욕주의를 경계하고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성화는 금욕주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몸의 죄성]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오셔서 내주(內住)하신다. 우리는 무지하고 약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시시때때로 깨달음을 주시고 또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신다.

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1-4절, 위엣것을 찾으라

[1-2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본문은 우리의 주된 관심에 대해 말한다. ‘찾는다’는 원어(제테오)는 ‘얻기 위해 애쓴다, 열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는 원어(프로네오)는 ‘마음을 둔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이 세상 살 동안 무엇에 생각과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람의 인격은 그가 무엇을 얻기 위해 애쓰고 무엇에 마음을 두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우리의 인격과 삶에 직접 관계된다. 본문은 위엣것을 찾고 생각하며, 땅엣것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주된 관심과 삶의 목표를 위엣것에 두고 땅엣것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위엣것’이란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9). 또 그는 전도의 일이 자신의 사명이며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38; 요 4:34). 또 성경에는 우리의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살전 4:3). 그러므로 우리가 위엣것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는 데 두고 천국에 두고 믿음의 일, 구원의 일, 전도하는 일,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땅엣것’이란 세상 일, 육신의 일, 의식주에 관한 일, 직장 일, 세상 나라의 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일, 돈, 건강, 쾌락, 명예, 권세 등이다. 땅엣것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이고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더럽혀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경은 모든 세상의 일을 죄악되다고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다 선하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도에게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그것들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거나 그것들을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엣것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고 위엣것을 찾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이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이다(엡 2:6). 우리가 죽은 것은 우리의 죄악된 옛 자아(自我)가 죄와 세상과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우리가 다시 산 것은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다시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주된 관심을 땅의 것들에게 두지 말고 하늘의 것들에 두어야 한다.

[3-4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며 우리의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빌립보서 3:20-21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하며, 요한일서 3:2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그와 함께 다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땅엣것들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고 위엣것들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 땅엣것들은 이 세상의 헛된 일들과 죄악된 일들을 가리키며, 위엣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과 그의 일에 관한 것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행하고 이 세상의 죄악 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즐기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시적이며 허무하고 많은 경우 죄악으로 더럽혀 있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고 그것들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실상, 이 세상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며 허무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심을 하나님께 두며 천국에 두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두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두어야 한다.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일이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일이며 성화를 이루는 일이며 전도하는 일이며 교회의 일들이다. 이것들은 가치 있는 선한 열매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관심을 두고 힘써야 한다.

5-11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5-6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不淨)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근거함을 나타낸다. ‘땅에 있는 지체’는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 몸의 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에 열거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다. 단순히 몸의 학대인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은 성화를 위한 바른 방법이 아니다(골 2:18-23).

‘음란’은 정당하지 않은 모든 성행위를 가리킨다. 성(性)은 정상적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부정’(不淨)은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더러운 것을 가리킨다.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도 정당치 않은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의 말들은 주로 성적인 죄악에 관계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음란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텔레비젼이나 인터넷 등을 통한 음란물들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성도들은 세상의 음란한 풍조들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은 남녀관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여성도들의 옷차림도 단정해야 한다(딤전 2:9). 미니 스커트나 앞이 파진 옷이나 소매가 없는 옷이나 옆이 갈라진 치마나 딱 들러붙는 바지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탐심’은 주로 물질에 관한 말이다. 탐심은 이미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 물질을 최고 가치로 두는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탐심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환경여건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은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5) 임하느니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가리킨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성도는 이런 죄악들을 회개했지만, 회개치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음란과 탐심의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다.

[7-8절]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忿)과 [노(怒)와](원문)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우리도 과거에 음란과 탐심 가운데 살았을 지라도 이제는 예수님 믿고 죄씻음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옛 죄악성들을 다 죽이고 그 행위들을 다 벗어버려야 한다. 본문은 우리가 버려야 할 죄악들을 또 열거한다. “곧 분과 노와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리키고 ‘훼방’은 말로 남을 비방하는 것을 가리킨다. ‘부끄러운 말’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롤로기아)는 더러운 욕설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9-10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이는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입었음이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위에 열거한 악들에 더하여 ‘거짓말’은 매우 나쁜 악이다. 거짓말은 마귀가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일 때에 사용한 것이다. 마귀의 근본적 특징은 거짓과 속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특징은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이 버릇이 되지 않도록 사소한 일에서부터 진실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자는 미워하시며 진실한 자를 사랑하신다.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었던 옛 자아를 가리킨다. ‘새 사람’은 구원받은 새 자아를 가리킨다. 그 새 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이다. 구원의 두 요소는 지식과 도덕성이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 즉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이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악을 떠나고 서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1절]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거기’는 ‘새 사람의 세계’를 가리킨다. 거기는 이방인이나 유대인,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와 의(義)가 충족하며 그 외에 무엇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의 충족한 원인이시요 조건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이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계시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시다는 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 곧 육신의 죄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음란을 버리고 성결함을 구해야 하며, 탐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분노를 버리고 온유함을 품어야 하고, 악의를 버리고 선의(善意)를 품어야 하며, 훼방을 버리고 덕스러운 말을 하며, 더러운 욕설을 버리고 좋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버리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우리의 하나님을 욕할 것이다.

12절, 긍휼과 겸손과 오래 참음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즉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단번에 입혀주신 후에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시고 격려하신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에 대해 말한다. 선택의 가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있다. 천하 만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특별한 복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거기에 선택의 가치가 있다.

선택의 목적과 증거는 거룩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 죄로부터 건져내시고 그 죄들을 씻어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셨다(엡 1:4). 성도(聖徒)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여진 자들이다(고전 1:2). 그러므로 사람이 죄와 불신앙 가운데 사는 것은 버려두신 증거이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선택받은 증거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을 열거한다. 먼저 ‘긍휼과 자비’를 말한다. ‘긍휼’이라는 원어(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무)는 ‘긍휼의 심정’이라는 말이다. ‘긍휼과 자비’는 비슷한 뜻이다. 긍휼과 자비는 멸시, 학대, 악행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다.

죄의 결과들을 보면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평화롭고 안전하고 사랑이 넘치고 건강해야 할 사람들에게 죄로 인하여 고생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많다. 거기에는 미움과 싸움이 있고, 위협과 폭행이 있고, 인신 매매와 집단 따돌림이 있고, 배신과 이혼이 있고, 비참한 전쟁들이 있다. 또 가뭄, 홍수, 태풍, 폭설, 지진, 화산, 해일 등 자연 재해들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고 만다. 죄의 값은 큰 불행이다. 긍휼과 자비는 이런 불행스런 일들을 안고 사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이것은 그의 백성이 본받아야 할 심정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또 이웃을 향해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죄 때문에 저주받은 이 지구 위에서 죄의 결과로 고생과 불행을 안고 살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은 또 ‘겸손과 온유’를 말한다. 겸손과 온유는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진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덕이다. 겸손과 온유는 교만, 높은 마음, 자랑, 과장, 이웃에 대한 멸시와 거친 말과 마음에 반대되는 말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며(딤전 3:6) 멸망의 선봉이다(잠 16:18).

교만은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긴 어리석은 죄악이다.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 때 겸손해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표현하였다(창 18:27). 더욱이,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죄와 부족이 많다. 완전히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마음에는 악과 거짓이 있어서 때때로 그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높이거나 자기 지혜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야 한다. 죄와 부족을 많이 가진 인간은 그렇게 존귀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다(사 41:14).

겸손과 온유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눅 2:21) 인간 부모에게 복종하셨고(눅 2:51)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눅 2:41-42). 그는 30세쯤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17).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30여년 동안 사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상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겸손의 최고의 예이다.

겸손과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성도와 교회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겸손과 온유를 본받아야 한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요, 겸손은 그리스도의 덕이다. 모세는 겸손하고 온유하였다(민 12:3). 신명기 17장에 보면, 왕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곁에 두고 늘 읽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신 17:18-20).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의 중한 직분을 가질수록 겸손과 온유로 단장되어야 한다.

본문은 또 ‘오래 참음’을 말한다. 오래 참음은 조급함과 반대된다. 조급한 자는 자기 마음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는 절제심이 적고 쉽게 성을 내고 오해와 잘못된 판단을 잘하게 된다. 그러나 오래 참는 자는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는 비록 자기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바른 생각과 깨달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여유를 가진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상대방의 잘못은 아마 과거의 나의 잘못이었고 또 미래의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생각한다면,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고 격노할 것은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첫 번째 성격이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했다(13:4). 우리가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잘못으로 인해 상한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고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오래 참는 것이다. 그것이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노하기를 더디하셨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오래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긍휼과 자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죄의 결과인 고생과 불행을 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파선하여 침몰하는 배와 같고 인류는 그 배에 탄 자들과 같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겸손과 온유이다. 우리는 피조물인 인생, 특히 죄인인 인생에게 합당치 않은 교만과 높은 마음을 다 버리고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는 가운데 겸손과 온유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우리 주 예수께서는 친히 겸손과 온유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오래 참음이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는 상대방의 부족을 볼 때도 오래 참을 수 있다. 또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오래 참을 수 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연약한 이웃들을 향해 오래 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3-15절, 용서, 사랑, 평강

[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그리스도]6)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혐의’라는 원어(몸페)는 ‘불평거리, 원망거리’를 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그것을 없었던 것처럼 간주해 주는 행위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는 자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17).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한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잘못은 잘못이고 악은 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과 오래 참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자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고 불완전하여 이런 저런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많은 죄, 많은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셨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의 죄가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을 때 그는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친 이웃의 작은 죄에 대해 우리는 더 잘 용서해야 마땅하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8:21-35에서 우리가 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비유로 말씀해주셨다. 그 비유에서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용서는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그 빚을 탕감받은 것과 같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의 죄는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과 같다고 하셨다. 1만 달란트와 1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므로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다.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한 데나리온을 약 10만원으로 보면,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며, 1백 데나리온은 약 1,000만원에 해당한다. 6조원과 1,000만원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인 것이다.

지옥 갈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우리가 우리 동료의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과는 이런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용서를 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너무 합당한 일이다. 더욱이,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크고 작은 많은 실수와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계속 용서해주시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의 잘못을 한두 번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주 예수의 교훈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2) 용서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용서는 사랑의 첫걸음이요 기초이다. 용서 없이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부족이 많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로 표현되었듯이, 우리의 사랑도 이웃을 위한 용서로 표현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증거된 대로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뜻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단지 봉사의 정신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나 어떤 이들이 흉내내듯이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라는 뜻이 아니고, 서로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참된 사랑의 교제의 모임을 이루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의 중요성과 완전성은 아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주께서는 사람의 생활 규칙인 십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하셨었다(마 22:37-40). 그 첫 번째 내용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두 번째 내용는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또 그는 제자들의 생활 지침을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표현하셨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했다(롬 13:8-10). 또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성격에 대해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하였다(4-5절).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이다. ‘온전하게 매는’이라는 원어(텔레이오테토스)는 ‘완전함의’라는 뜻이다. 사랑이 완전함의 띠라는 말은, 사랑 자체가 완전한 덕이라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을 통해 완전한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만이 교회가 내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다(벧전 4:8).

[15절] 그리스도의[하나님의]7)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주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말씀은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염려하며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심지어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즉시 우리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케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였다.

우리 개인의 마음의 평안은 서로간의 화평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이 마음으로 평안을 누릴 뿐만 아니라, 또 모든 성도가 한 몸이 되고 모든 교회가 사랑의 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이미 한 몸이며 또 사랑과 화평 안에서 그 한 몸 됨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와 거짓이 혼합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린도후서 6:14-16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했다. 특히, 요한계시록 18:2는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곧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특징이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즉 혼합주의적 세계일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자유주의 이단을 포용하는 일이나, 또 교회 연합의 기치 아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혼합, 개신교와 천주교의 혼합, 심지어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혼합의 경향을 띠는 것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미혹의 영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과 믿음 안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성경을 배우고 확신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또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배우고 확신하기를 힘써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나 서로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대신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른 생각과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서로를 향해서도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용서와 사랑과 평강과 감사 등을 교훈하며, 이 덕목들은 서로 다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본받아 서로의 실수와 부족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사랑의 표현이요 증거이다. 또 우리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평안과 화평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신다. 그것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부터 오는 평안이다. 또 이런 평안을 가진 자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화평하기를 힘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을 순종하는 자들은 싸우거나 분열하지 않고 그 대신 서로 화목할 것이며,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 대신 감사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들에게는 용서와 사랑과 평안과 감사가 있어야 한다.

16-17절, 말씀 충만, 피차 권면, 찬양과 감사

[16-17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계실 때 하신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을 다 포함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네 권의 복음서들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다. 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 속에’라는 말은 ‘너희 마음 속에, 즉 너희 생각과 기억과 사상 속에’라는 뜻이다. 목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요한복음 15:7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실 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딤후 3:16) 성경에는 불필요한 말씀들이 없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가르치고 배우기를 힘쓰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들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할 수 있다. 시편 1:2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고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며 새벽 전에 바라고 묵상한다고 말하였다(127, 97, 147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17:11-12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충만함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이다. 시편 119:98-100,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이 지혜를 가진 자는 남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말씀의 충만함과 지혜를 얻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은 교회 생활에 중요한 요소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라는 구절은 원문에서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번역할 수 있다(NASB).

본문은 찬송을 통해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찬송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말씀은 얼른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예언적 시와 찬미를 기억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구약 시편들에는 이렇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의도가 있다. ‘시’는 구약 시편을 가리키고, ‘찬미’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시들을, 또 ‘영적 노래들’은 기타 회개와 간증과 권면의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찬송가의 노래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용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믿음에 유익을 주는 내용들이다.

또 우리는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주’라고 되어 있다.8) 우리의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뿐 아니라,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계시록 5:13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하였다.

‘마음에’라는 말(엔 테 카르디아)은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목소리로만 해서는 안 되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함을 보인다. 참된 찬송은 마음의 찬송이다.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이 되지 못한다. ‘감사함으로’라는 말(엔 카리티)은 ‘은혜로’ 혹은 ‘감사함으로’라는 뜻이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관한 것이며, 또 그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참으로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다.

찬송은 성도들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시 22:3). 시편은 우리가 ‘새 노래’ 곧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며(시 96, 98편),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시 150:6). 히브리서 13:15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목표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시 96:9) 하나님께 찬양하며, 지극히 선한 방법으로(빌 1:10), 아름답고 조화롭고 질서 있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과 그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도 찬송도 올리며 선한 봉사의 일도 행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와 생명이시며 기쁨과 힘이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속 사역을 이루시고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자.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자.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위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이들의 믿음을 위해야 한다. 또 하나님께 올리는 시와 찬미와 영적 노래들은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이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범사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하자.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항상 찬송하며 감사하자.

18-19절, 남편과 아내의 의무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의 의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 안에서 마땅하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께 하듯하라고 말한다. 남편의 위치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비유되었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교훈한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아내와 남편의 위치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딤전 2:11-13).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를 만드신 다음, 그를 돕는 자를 만들기 위해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 여자는 남편을 돕도록 창조되었다. 거기에 결혼의 심오하고 복된 뜻이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요 질서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녀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풍조에 근거하여 성경의 교훈에 도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교훈은 한 시대에 제한되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신약의 사도들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다(살후 2:15).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복을 누림에 있어서는 남녀나 사회 신분이나 민족의 차별이 있을 수 없지만, 가정과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역할과 직분의 구별은 성경에 분명히 증거된 바이다.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의 의무는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가지셨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남편이 자기 아내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괴롭게 하다’는 원어(피크라이노)는 ‘가혹하게 하다’는 뜻이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고전 13:4).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말과 행위로 학대해서는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가장 귀한 몸의 일부분, 곧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진 자이다. 그는 남편이 사랑의 품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학대하고 자기 행복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자기 행복을 위하는 지혜로운 일이다.

성경의 교훈은 여성이 학대를 당하고 인격적 취급을 받지 못하던 동양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는 다르다. 남존여비 사상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섬기라는 사상이지만, 성경의 교훈은 쌍방적이다.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교훈하지만, 또한 동시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실제로 아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남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을 느끼며 산다. 아내 사랑은 아내의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만들고 그것은 곧 남편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이어진다. 부부가 싸우면 사랑이 식어지고 행복도 사라지지만, 서로 사랑하면 가정은 피곤한 세상 생활에서 안식처가 될 것이다. 부부 사랑은 결국 가정의 행복이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괴롭게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명령일 뿐 아니라, 또 자신에게도 행복이 될 것이다.

20-21절, 부모와 자녀의 의무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의 의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부모 순종은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구약 역사에서 믿음의 인물인 에스더는 자기를 길러준 친척 모르드개에게 항상 순종하였고 왕후가 된 후에도 그러하였다. 주께서도 그 모친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다(눅 2:51).

부모를 멸시하고 그들의 말을 순종치 않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였다. 신명기 21:18-21은,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그 부모가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성읍 장로들에게 고발하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임으로 그들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교훈하였다.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부모의 의무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않는 것이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아버지에게 있음을 보인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것은 교훈을 전제한 것이다. 무관심하면 격노케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에게 교훈하려고 할 때 그를 격노케 해서는 안 된다. 격노케 한다는 것은 성질을 나게 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보통 부당한 명령이나 처분에서 일어난다. 부모의 정당한 명령과 처분에 화를 내는 것은 불순종이다. 그러나 부모라고 해서 자녀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리하게 또 감정적으로 대하면 자녀들의 마음이 상하며 그것은 자녀 교육에 유익보다 해가 될 것이다.

자녀들은 마음이 상하면 낙심하고 의욕을 잃고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자포자기하기 쉽고 반항적이게 되고 심지어 자살 충동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감정을 상하게 하는 교훈은 유익보다는 해가 된다. 자녀 교육은 사리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며 자녀를 격노케 하고 낙심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는 책망하고 또 필요하다면 체벌하는 것이 성경적이다(잠 13:24; 20:30; 22:15; 23:13-14; 29:15). 그러나 그때에도 무엇이 잘못이며 왜 잘못인지 자녀에게 충분히 이해시킨 뒤 매를 들어야지 감정적으로 자녀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본문의 교훈은 부모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사랑의 심정으로 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들 때에도, 그것이 미운 감정의 매가 아니고 눈물어린 사랑의 매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효과가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자녀들은 범사에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의 교훈에 순종해야 하고, 또 부모는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고 사랑으로 훈계하며 양육해야 한다. 우리는 다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복과 평안과 기쁨을 누릴 것이지만 그 복과 평안과 기쁨을 이 땅 위에서 가정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누려야 한다.

3:22-4:1, 주인과 종의 의무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하나님을]9)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성경은 주인과 종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을 노예제도라고 한다면,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노예제도 자체는 악이 아니다. 옛 시대에는 경건한 성도들의 가정에 종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종들이 있었고(창 12:16), 욥에게도 종들이 있었다(욥 1:3). 사람이 빚을 많이 졌을 때나,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 흔히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노예제도는 그 자체보다, 종들에 대해 주인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보인다.

인류 역사상 노예제도에 많은 폐해가 있었다. 특히, 종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학대가 많았다. 그러나 성경의 노예제도는 달랐다. 성경에는 종들에 대한 많은 배려가 있었다. 물론 종은 종이므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고 자유와 권리의 많은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위해 안식년이라는 법을 주셔서 히브리 종은 6년간 일한 후에 제7년에는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출 21:2). 또 여종을 취한 주인은 평생 그에게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을 끊지 못하게 하셨다(출 21:10). 또 종의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아주게 하셨다(출 21:26). 잠언 12:10은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한다. 짐승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하물며 종들에게 잔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옛날 같은 노예제도는 없지만, 새로운 형태의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계약관계이다. 직장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들 간에는 약속된 복종 관계가 있다. 그것은 강제적 노예제도는 아니지만, 새로운 형태의 주종 관계이다. 그러므로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이 구절의 교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고용주와 피고용인과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본문은 종들이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 즉 죄 짓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은 합리적인 일일 수도 있으나 때때로 무리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육신의 상전들’이라는 말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대조된다. 우리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상에서 종들에게는 육신의 주인이 있다. 그들은 그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잘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순종에는 말대꾸나 말대답이 합당치 않고 ‘예’만 필요하다. 종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시정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꼭 필요한 말이 있으면, 기회를 보아서 겸손한 태도로 주인에게 조언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래서 나쁜 종은 주인이 볼 때에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 보지 않으면,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종은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 일에 충실한 종이다. 주인이 안 보는 데서도 잘해야 참으로 잘하는 것이다. 성도는 직장에서 이런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윗사람이 보는데서만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말고, 그가 보든지 안 보든지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주를 두려워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판단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성실함’이라는 원어(하플로테스 aJplovth")는 ‘단순함’이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할 지 이것저것을 계산하지 않고, 꾀를 부리지 않고, 주어진 임무, 맡겨진 직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성실함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성도는 성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한다.

[23-25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종들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합리적인 일이나 무리한 일이나, 죄짓는 일만 빼놓고는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순종하듯이, 종들은 주인에게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그 이유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 때문이다. ‘유업의 상’은 천국의 기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고용인은 고용인대로, 피고용인은 피고용인대로,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일반 성도는 일반 성도대로, 우리는 세상의 직업이나 교회의 직분과 직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또 그 결과로 우리는 장차 영광스런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때 그곳에서 우리가 땅 위에서 우리의 처한 현실에서 의롭고 선하게 일한 대로 하나님께 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비록 그것을 은밀히 행했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4장: 그리스도의 일꾼들

[1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 즉 주인들은 오늘날 고용주들과 직장에서 윗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고용주들이나 직장의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행해야 한다.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을 대할 때 불공평하고 편파적인 마음을 버리고 바르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평가할 때, 고향이나 학교 등 자신과의 친분관계를 고려하지 말고 오직 그들의 인품과 실력과 성실성을 따라 평가해야 하고, 또 그들의 일한 대가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

고용주들이나 직장의 윗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 계신 참 주인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에게, 또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피고용인들과 직장의 아랫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고용인들과 직장의 윗사람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듯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천국에서 주님께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

한편, 고용주들이나 직장의 윗사람들은 피고용자들과 직장의 아랫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행하지 말고 의와 공평을 행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2-6절, 기도, 지혜, 말에 대한 교훈

[2절]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내용, 죄에 대한 고백의 내용, 또 여러 가지 간구의 내용이 포함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이며 또 신앙 생활의 힘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의 영혼이 힘을 잃고 쇠약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성도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일이다. 특히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태도이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나온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이며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를 항상 힘써야 한다.

[3-4절]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말씀의 문](원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서신들에서도 이런 교훈을 하였다. 에베소서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 전도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가? 그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특히 전도와 목회 사역에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기도보다 더 힘있는 후원은 없다. 그것은 물질적 후원이나 말의 격려보다 더 큰 후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많은 기도의 후원을 요청한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최대의 후원은 그들을 위한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후원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야 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의 대속 사역의 의미를 가리킨다. 또 그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구주가 되신다는 것도 포함된다.

바울은 전도의 내용을 ‘마땅히 할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전도자가 전해야 할 내용은 사도시대로부터 분명하였다. 그것은 또한 가감할 수 없는, 확정된 내용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1:8-9에서 그가 전한 복음, 곧 그들이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이 교회가 마땅히 전해야 할 말씀이다.

바울은 이 복음 진리 때문에 옥에 갇힌 바 되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은 반감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6:26).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고, 또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다(딤후 3:12).

[5절]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최선용하라].

‘외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불신자에 대해 지혜롭게 행해야 하며 특히 세월을 아낌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성도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락이나 취미 생활에 너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돈을 버는 것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돈을 버는 일에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먹고 살 정도만 되면, 신앙생활에 힘쓰는 것이 참된 행복인 줄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가정예배, 전도, 교회 봉사가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특히 불신자들을 향해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단순한 교제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교제해야 한다. 전도는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전도의 목표가 없는 교제는 참된 이웃 사랑이 없는 일이다.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간을 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우리는 소금으로 적절히 간을 하듯이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싱거운 말이나 짠 말을 피해야 한다.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는 농담이나 웃기는 말, 허탄한 말, 거짓말은 싱거운 말이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 너무 직선적인 말은 짠 말일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고 선한 말, 상대방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항상 우리의 말을 가다듬으면, 우리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 것이다.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약 3: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자는 항상 기도하기를 힘쓴다. 또 우리는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매우 귀한 일이다. 또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는 지혜롭게 행하고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우리는 황금같이 귀한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소금으로 적절히 간을 하듯이 항상 은혜로운 말을 하고,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아 선하고 유익한 말을 해야 한다.

7-18, 그리스도의 일꾼들

[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본절은 두기고에 대해 소개한다. 첫째로, 그는 사랑받는 형제이었다. ‘사랑받는 형제’라는 명칭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이며 성도들의 관계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임을 보이는 아름다운 명칭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이어야 한다.

둘째로, 두기고는 ‘신실한 일꾼’이었다. ‘일꾼’이라는 원어(디아코노스)는 ‘집사’와 같은 말로서 ‘봉사자,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신실한’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충성된’이라는 뜻으로 봉사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봉사자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어야 한다.

셋째로, 두기고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었다. ‘함께 된 종’이라는 말(쉰둘로스)은 주 예수께 복종함을 나타내는 겸손한 명칭이다. 교회 직분자들은 주 안에서 함께 된 종들이다.

[8절]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그로 너희 사정을 알게 하고](전통본문)10)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에 보낸 목적은, 첫째 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둘째 그들을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로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위로한다, 격려한다, 권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교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해야 한다. 그들이 때때로 교인들의 위로를 통해 힘을 얻기도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교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두기고와 함께 오네시모를 보내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전에는 도망친 종, 무익한 종이었으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도 바울에게 매우 필요한 수종자가 되었고 유익한 동역자가 된 자이었다(몬 11, 12, 15). 바울은 그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증거하였다. 무시와 천대를 받을 종이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가 된 것이다.

[10-11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사촌]11)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아리스다고는 특별히 바울과 함께 갇힌 일꾼이었다. 그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이었다. 그는 전에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하던 중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행 13:13; 15:37-38), 후에 바울의 인정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를 영접해야 하였다. 그 다음, 유스도라 하는 예수가 언급되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 이렇게 세 사람은 다 할례당 곧 순수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만’(후토이 모노이) 즉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바울의 동역자(同役者)들은 이와 같이 제한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였던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직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동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독립 운동의 동지들보다, 6.25전쟁의 전우들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의 동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복음 사역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위로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쳐진 복음의 일꾼들에게, 생각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함께 수고하는 자들을 가지는 것보다 더 나은 기쁨과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페플레로메노이)[온전하게](전통본문)12) 서기를 구하나니.

에바브라는 서신 초두에 증거된 대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준 일꾼이었다(1:7).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된다. ‘종’이라는 말(둘로스)은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하였다. 이것은 특히 복음의 일꾼들의 일차적 사명이다. 담임목사와 장로들은 온 교회를 위해, 부교역자들은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권찰들은 구역 식구들을 위해, 교사들은 반 학생들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부분적 깨달음과 지식, 부분적 믿음과 생활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 믿음과 생활을 가져야 함을 보인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에 잘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해야 한다. 주께서 교회에 목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심이다(엡 4:12). 목사들의 첫 번째 임무는 모든 성경을 강론함으로써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다.

[13-15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그의]13)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교인들을 위해서도 많이 수고함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가 그들에게 문안한다고 말한다. 그런 후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요청한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눔바와 그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눔바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이름일 것이다. ‘그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교회 건물이 없이 가정집에서 모인 교회가 있었던 것을 증거한다.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본문은 성경 읽기의 의무를 가르친다. 성경, 특히 사도들의 서신들은 우리가 읽어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며 의로운 인격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된 선물이다. 여기에 말한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는 바울이 그곳에 보낸, 그러나 지금은 분실된 한 서신을 가리키든지, 혹은 에베소서 같은 그의 서신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한 지역 교회에 보내진 것이었지만, 모든 교회들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통해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의 풍성함을 얻는다.

[17-18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라”고 권면하였다. 아킵보는 주 안에서 직분을 받았다.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을 주신다. 로마서 12:5-8,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아킵보는 주 안에서 받은 직분, 곧 주께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을 잘 감당하고 완수해야 한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도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또 주께서 주시는 지혜와 충성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충성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고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많이 수고하고 감옥에 함께 갇히기도 한 모범적 사역자들에 대해 말한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교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온전히 서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며 주께서 주신 직분을 충성되이 완수해야 한다. 한편, 교인들은 주께서 세우신 말씀의 사역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들을 믿고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신구약 66권의 성경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사랑하고 믿고 확신하고 소망하며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미주

1) Byz א A C vgcl (copbo) armmss 등이 그러함.

2) Byz (vg) syrp (copsa-mss bo) 등이 그러함.

3) Byz syr 등에 있음.

4) Byz C vg arm eth Origengr-ms lat 1/3 등이 그러함.

5) Byz א A C itd vg syrp copbo arm eth 등에 있음.

6) Byz C syrp copsa bo eth Clement 등이 그러함.

7) Byz vgmss 등이 그러함.

8) Byz vgmss copbo-mss 등이 그러함.

9) Byz p46 itd vgcl 등이 그러함.

10) Byz p46 C vg syrp copsa-mss bo 등이 그러함.

11) 아넵시오스 ajneyio;"라는 말은 ‘사촌’이라는 뜻이다(BDAG, NASB).

12) Byz p46 syr 등이 그러함.

13) Byz D syrp 등이 그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