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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Proverbs) 23장 23장: 물질, 자녀 징계, 술-31장 르무엘 왕의 잠언 [현자들의 잠언, 아굴, 르우엘]

영국신사77 2020. 4. 15. 09:39

23장: 물질, 자녀 징계, 술

1-8절, 탐식, 재물, 악인의 대접

[1-3절]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그 진찬(珍饌)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네 앞에 있는 자’라는 구절을 영어성경들은 ‘네 앞에 있는 것’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그것은 앞에 차려진 식탁을 가리킨다. ‘진찬(珍饌)’은 ‘맛 좋은 음식’을 가리킨다. ‘간사하게 베푼’이라는 원어(케자빔)는 ‘속이는’이라는 뜻이다(NASB, NIV).

본문은, 관원이 베푼 진수성찬을 조심하고 그것을 탐하지 말고 네 목에 칼을 두라고 교훈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간사하게 베푼 식물, 즉 속이는 식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순수한 대접이 아니고 나쁜 의도를 가진 계산적인 대접이며 시험과 올무가 될 식탁이며 흠 잡힐 빌미가 될 식탁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대접받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악인이 베푸는 대접은 피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한 자의 대접을 받으면 악한 일에 동참하기 쉽고 한번 대접을 받으면 그 후에는 악한 자를 끊거나 물리치기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대접을 주고받아야 한다. 순수한 대접이란 존경이나 사랑을 가지고 베푸는 대접이다. 그것은 나사로의 형제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며 대접한 것과 같은 것이다(요 12:2). 또 주께서는 자기를 식사에 청한 어떤 사람에게 교훈하시기를,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청하라고 하셨다(눅 14:12-13).

[4-5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애쓰다’는 원어(야가)는 ‘수고하다, 피곤케 하다’는 뜻이고, ‘버리다’는 원어(카달)는 ‘끊어버리다’는 뜻이다. 성도는 부자 되려고 피곤하게 수고하거나 애쓰지 말아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지혜도 끊어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딤전 6:9-10).

성도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돈 버는 지혜를 버려야 할 이유는 돈이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또 내가 죽으면 그것은 남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시편 39:6,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야고보서 4: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또 그의 공급하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6-8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하지 아니함이라.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악한 눈’은 악한 마음을 반영하는 눈이다. 그것은 상대를 미워하고 약점을 잡고 해치려 하며 인색한 눈이다. 모세의 율법은 제7년 면제년이 가깝다고 가난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꾸어주지 않는 행위에 대해 경고하였다(신 15:9). 잠언 28:22도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고 말하였다.

성도가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더러 먹고 마시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입술의 말뿐이며 그 마음은 우리의 흠을 잡고 우리에게 시험과 올무를 놓으려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마 12:35). 악한 자의 대접은 진심이 아니다.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며 속이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의 대접을 조심해야 한다. 이미 1-3절에서도 관원이 간사하게 베푼 진찬을 탐하지 말고 네 목에 칼을 두라고 교훈하였었다. 악한 자의 대접은 나쁜 의도를 가진 대접이므로 거기에 빠지면 해를 당케 될 것이다. 우리는 악한 자의 대접을 좋아하지 말고 그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남의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말고 남을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남을 대접할 때는 선한 눈으로, 진심과 사랑과 겸손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음식 대접을 받을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속이는 음식일지 모르므로 그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대접할 때는 아무 조건 없이,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야 하지만, 부자가 되려고 피곤하게 수고하며 애쓰지 말고 돈 많이 버는 지혜도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돈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만 믿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 풍성한 식탁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의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대접할 때에는 진심과 사랑과 겸손으로 대접해야 한다.

9-14절, 미련한 자, 옛 지계석, 교훈, 징계

[9절]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가 너의 지혜로운 말 혹은 ‘너의 말의 지혜’(원문, KJV, NASB)를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 26:16에는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고 말했는데, 미련한 자도 그러하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자신의 미련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소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다. 소에게 성경이나 종교의 경전을 읽어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련한 자는 깨닫는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6). 하나님의 진리의 자세한 내용을 미련한 자에게 말해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진리를 무시하고 비방하고 모욕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마 11:15 전통본문; 13:9, 43 전통본문; 눅 8:8; 14:35). 미련한 자들에게는 먼저 심령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며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성을 가진 부족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무지함과 미련함을 깨닫는 자이다. 시편 73편의 저자는 “[내가]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라”고 고백하였었다(시 73:22).

[10-11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救贖者)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寃)을 펴시리라.

본문은,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지계석’은 ‘경계’ ‘경계 표시’를 말한다. ‘외로운 자식’(예소밈 םי������וֹת������)이라는 원어는 ‘고아들’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옛 경계 표시를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치 말라고 말한다. 사람이 옛 경계 표시를 옮기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불의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적 이익 때문에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자기 양심을 더럽히는 악한 일이다.

본문은, 이는 그들의 구속자(救贖者)께서 강하시며 너를 대적하사 그 원(寃)을 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들의 구속자(救贖者)이사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다. 그는 의와 진실을 기뻐하시고 불의와 거짓을 미워하시며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는 억울한 일 당하는 고아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억울케 하는 자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성도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불의와 불법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돈을 벌고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또 돈을 사용해야 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3[전통본문], 8). 그것은 성도의 물질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교훈한다.

[12절] 훈계에 착심(着心)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훈계’라는 원어(무사르)는 ‘교훈, 훈계, 징계’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교훈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한다. ‘지식의 말씀’은 진리의 지식의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식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바른 삶에 대해 가르쳐준다. 그것은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해 가르쳐준다. 잠언 1:7-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하였다.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증거하였다(딤후 3:16-17).

‘착심(着心)하다’는 말은 ‘마음을 가져오다, 마음을 두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음을 가져와야 한다. 입술로나 겉모양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귀를 기울이는 것도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마음이 없고 다른 생각을 하면, 바른 말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들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13-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쉐올) [hell(KJV), Sheol(NASB), death(NIV)]에서 구원하리라.

본문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고 말한다. ‘훈계’는 교훈과 징계를 포함한다. 어른들에게도 훈계가 필요하지만, 아이에겐 더욱 필요하다. 어릴수록 교훈이 필요하고 매가 필요하다. 신명기 6:4-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또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陰府)[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징계는 참된 자녀 사랑이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9:18,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자유방임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은 것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自請)하였으나 금하지 않은 죄 때문이었다(삼상 3:13).

교훈과 징계는 자녀를 바른 사람 만드는 데 유익하다. 매는 그의 영혼을 음부(陰府) 곧 지옥에서 건져낼 것이다.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했고. 잠언 29:15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미련한 자들에게 성경 진리의 지식을 다 말해줄 필요가 없고 단지 하나님과 인간의 죄에 대한 기초적인 진리들을 말해주면 될 것이다. 미련한 자들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이 죄악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고 고아와 과부의 밭을 침범하지 말자. 우리는 남의 재산을 빼앗지 말고 불의의 이익을 탐하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항상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훈계에 마음을 두고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계와 지식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우리의 귀를 기울이자. 그 말씀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필요하면 체벌도 함으로 그 영혼들을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매의 유익을 알고 자녀들이 잘못 행할 때 매 들기를 싫어하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5-19절, 지혜, 정직, 하나님 경외, 정로(正路)

[15-16절]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본문은 경건한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지혜롭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마음이 지혜로우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깨닫고 그의 계명대로 행한다. 반면에, 마음이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신임하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며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의 입술이 정직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마음에 지혜가 있으면 입술이 정직을 말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든 것을 입으로 말한다. 마음이 미련하면 미련한 것, 곧 불의하고 거짓된 것을 말할 것이나, 마음이 지혜로우면 지혜로운 것, 곧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을 좋아하고 말하고 전파하고 행할 것이다.

본문은, 그러면 “내 마음이 즐겁고 유쾌하리라”고 말한다. 자녀들이 지혜롭게, 정직하게 살면, 부모에게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또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삼서 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것은 목사의 기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다.

[17-18절]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죄인의 물질적 부요와 세상적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을 크게 여기는 자이며 세상 사랑과 세상 욕심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며 그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고 의이며, 참된 평안과 행복과 승리의 길이다.

본문은 그렇게 할 때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사람은 장래가 있어야 한다. 현재 좋은 것만으로는 안 된다. 현재 좋은 것 같아도, 내일 망하는 자들이 있고, 또 마지막 날 지옥 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주께서 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호화롭게 살았지만, 죽은 후에 지옥, 고통의 장소에 던지웠다(눅 16:19-23).

그러나 현재 환경적으로, 세상적으로 나쁜 것 같아도 내일 잘 되는 자들이 있다. 다윗이나 모르드개가 그러하였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현재 불행하게 죽는 것 같아도 장차 영생할 자들이 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했고, 주의 이름 때문에 죽은 순교자들이 그러하다. 주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2). 성도들의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지니라.

“너는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과, 그것에 근거한 경건하고 바른 교훈을 들으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혜를 얻는다. 성경은 항상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대조시킨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이지만,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과 계명을 거역하고 죄만 짓는 자이다. 모든 사람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이 둘 중에 하나이다.

본문은,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혜를 얻고, 또 지혜를 얻어야 우리의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 수 있다.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 잠언 23:7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의 됨됨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활동 곧 지정의(知情意)의 활동이다. 사람의 마음이 곧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마음에서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정로로’라는 원어(베데렉)는 ‘그 길로’라는 뜻이다. ‘그 길’은 인생의 바른 길(正路)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길이다. 세상에는 정로가 아닌 길들이 많다. 사사 시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다(삿 21:25). 그러나 성경만이 인생의 정로를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딤후 3:16-17).

우리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되고 입술로 정직을 말하는 자가 되자. 이것이 부모에게, 또 하나님과 목사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죄인들의 물질적 부요와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의 명하신 계명들을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약속하신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자.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어 우리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하자. 인생의 정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성경적 생활을 하자.

20-25절, 탐식, 부모 청종, 진리, 의인

[20-21절]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이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본문은,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친구는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그러므로 술을 즐겨하는 자와 사귀면 술 마시는 것을 배우고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성도는 술 취함을 경계해야 한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며(엡 5:18)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10). 그러므로 장로의 자격 중에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이 포함되고 집사의 자격 중에도 술에 인박이지 않은 것이 포함된다(딤전 3:3, 8). 또 고기를 탐하는 자와 사귀어도 나쁜 영향을 받는다.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먹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이지만, 사람은 일하기 위해 적당하게 먹어야지, 먹는 것 자체에 너무 빠져서는 안 된다.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어느 정도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8). 또 잠도 너무 많이 자는 것은 게으른 일이므로 그런 자와도 친근히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잠도 적당하게 자고 부지런하게 사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본문은, “이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술을 즐겨하는 자나 고기를 탐하는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런 삶이 무절제하고 낭비적이고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또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게으른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게으름도 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십계명에 명시된,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레위기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부모를 공경하는 것 속에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부모 공경의 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 관계의 법들 중에 가장 첫째 되는 법이다. 이 법을 잘 지켜야 다른 법들도 잘 지킬 수 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이 법은 사회의 기본적 질서를 지키는 법이다. 가정은 사람의 마음과 인격을 단련시키는 훈련장이며, 가정에서 잘 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도 잘 할 수 있다.

신약성경도 여전히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구약의 율법은 자기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 또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를 정죄하며 반드시 죽이라고 엄히 명하였다(출 21:15, 17; 신 21:18-21; 잠 30:17).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바른 것을 말하고 자기 자녀가 바른 사람 되고 좋은 사람 되기를 원하며 교훈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죄 지으라는 말 외에는 부모의 교훈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한다. 또 어머니가 늙고 힘이 없고 정신이 흐려졌다고 해서 그를 경히 여겨서는 안 된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수고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

[23절]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본문은, “진리를 사라”고 말한다. ‘산다’는 원어(카나)는 ‘얻는다, 산다’는 뜻이다. 잠언 4: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사람은 진리를 어떻게 사며 얻는가?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킨다. 사람이 진리를 얻는 것은 돈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그러나 참된 회개와 믿음과 기도와 간구로 얻는다.

잠언 2:1-6,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본문은 하나님의 진리를 산 후에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와 명철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 즉 육신적 쾌락이나 세상 권세나 명예와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편 19:10은 “[하나님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72, 127은,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금과 은이나 진주보다 낫고, 그것은 또한 장수(長壽)와 부귀(富貴)와 평강의 길이며 또 영생의 길이다(잠 3:13-18).

[24-25절]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이다. 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이며 선물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말씀의 교훈대로 잘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했다(엡 6:4).

부모는 자녀들을 의롭고 지혜롭게 잘 양육할 때 그 자녀들로 인해 크게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대로 살며 죄 짓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안의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 자녀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말하며, 잠언 15:20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미련하고 악한 자녀는 부모에게 슬픔과 고통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녀는 하나님의 징벌과 재앙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라”고 말하였고, 잠언 17:25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이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교훈한 것이다.

우리는 술을 즐기고 고기를 탐하고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와 사귀지 말고 또 그런 삶을 본받지 말고, 바르게, 절제 있게, 부지런하게 살자.

사람은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님, 특히 늙으신 부모님을 경히 여기지 말고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와 지혜를 사되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와 믿음으로, 기도와 간구로 사자. 그러나 산 후에는 그것을 세상의 것들과 바꾸지 말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지혜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부모님도 기쁘게 하자.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그들로 복된 자녀가 되게 하자.

26-35절, 경건, 금주(禁酒)

[26-28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그는 강도같이 매복하며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강도같이’(KB, NASB, NIV)라는 원어(케케세프)13)는 ‘먹이감을 위해’(BDB, KJV)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궤사한 자’라는 원어(보게딤)는 ‘배신적이게, 불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음행의 죄를 경계하라고 교훈한다. 부부의 거룩한 관계를 벗어난 음행의 죄는 인간의 죄악들 중에 큰 죄악이다.

본문은 음녀가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며 먹이감을 위해 매복하여 사람을 넘어뜨리며 배신적이게, 불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한다고 말한다. 음녀는 의도적으로 이성을 유혹하는 여인이다. 그는 사람이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좁은 함정 같다. 음행하는 자는 배우자와 가정에 또 사회에서 불신실한 자이다.

음행을 피하는 대책은 무엇인가? 본문은 그 대책으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경적 교훈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해야 한다.1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길과 교훈을 눈으로 즐거워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음행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시편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잠언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언 6:23-24,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음행은 음행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도 지혜이다. 잠언 5:7-8,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또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의 관계도 잘 지켜야 한다. 잠언 5:18-21,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살피시느니라(원문).”

[29-35절]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15)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본문은 술의 폐해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술 취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근심과 분쟁과 원망과 까닭 없는 창상과 붉은 눈이 있다. ‘술에 잠긴 자’라는 말은 ‘술을 오래 마시는 자’라는 뜻이다. 술은 뱀같이 물며 독사같이 쏠 것이기 때문에 보지도 말아야 한다. 또 술 취하는 자들의 눈에는 괴이한 것(자로스, ‘이상한 여자들’[KJV])이 보일 것이요 그들의 마음은 망령된 것[패역한 것]을 발할 것이며 그들은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다. 또 사람이 그를 때리거나 상하게 하여도 아픈 감각이 없을 것이다.

술의 폐해들은 크다. 술은 슬픔과 재앙, 분쟁과 원망과 상처 등을 가져오고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며 눈에 이상한 여자들이 보이고 마음에 패역한 것들을 말하게 만든다. 또 마음은 허황하게 되고 감각이 없어지며 비정상적이고 비인격적이고 불성실한 자가 된다. 오늘날 음주는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교통사고의 주범이 되었다. 술취함은 방탕한 것이며(엡 5:18) 특히 술 취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전 6:10; 갈 5:2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감독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을 들었고 집사의 자격으로도 술에 인박이지 않는 것을 들었다(딤전 3:3, 8).

음행은 큰 죄이며 거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음행을 피하는 대책은 경건한 삶이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두며 그의 모든 교훈을 즐거워하며 힘써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음행에 넘어질 수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지혜이며 또 결혼과 부부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술의 여러 가지 육체적, 경제적, 도덕적 폐해들을 알고, 특히 술취함은 방탕함이며 천국에 못 들어갈 큰 죄악임을 알고, 술을 멀리하고 쳐다보지도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와 능력을 얻고 맑은 정신으로, 절제 있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24장: 의인, 결혼 준비, 게으름

1-6절, 악인, 집, 전쟁

[1-2절] 너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그들과]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해를 끼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들에게 형통함을 허용하신다. 그들은 건강하고 물질적 부요를 누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번창하고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사람이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까닭은 외적인 것, 세상적인 것, 즉 건강과 물질과 세상적인 성공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상 허무한 것들이다. 전도서 1:2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다섯 번이나 헛되다는 말을 사용하여 증거했다.

성도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는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해를 끼침이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속으로 강포한 마음을 품고 계획하고 강포한 말과 행동을 하며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의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고 조만간 심판하시며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적인, 물질적인, 세상적인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실상 다 헛된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가치를 두고 경건함과 의로움과 선함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시편 15:1-5는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의롭고 정직하게 행하며 진실을 말하며 남을 비방하거나 악을 행치 않는 자라고 말했다.

[3-4절]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이 집은 물질적인 집이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다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건축자가 집을 지을 때에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명철하며 지식 있는 설계자와 건축자가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잘 지을 수 있고 집의 내부구조도 적절하게 배치하여 각종 좋은 것들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을 건립하는 데도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유다서 20,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자신의 삶을 견고히 세우며 지식이 있는 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가정의 건립도 그렇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가정을 세울 때 가정은 든든히 세워지고 복된 자녀들도 얻을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고린도전서 3:9, 16,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나 이 성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립되는 과정에 있다(엡 2:21-22). 교회의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엡 4:12). 모든 교우들은 믿음과 지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 에베소서 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 .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5-6절]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NASB).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이 있다. 싸움은 육신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 법이다. 전쟁의 역사는 무기의 발달의 역사이다. 전쟁은 지식과 지혜의 싸움이다. 돈을 버는 것도 옛날과 같이 단순히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늘날의 농촌은 비닐 하우스나 각종 농사 방법을 개발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나 텔레비젼 등의 기술을 통해 경제적 큰 소득을 얻고 있다. 또 젊은이들은 단순한 노동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이나 전문적 기술을 가짐으로 물질적 유여함을 누리려 한다.

본문은 “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고 말한다.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작전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다윗 시대에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은 그의 모사인 아히도벨보다 다윗편의 모사인 후새의 지혜로 인해 실패했다(삼하 17-18장). 잠언 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우리는 전쟁뿐 아니라 세상의 일에서나 신앙생활에서도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며, 또 거기에서 힘과 용기가 나온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악인들의 악 자체를 미워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가치를 두고 또 경건과 도덕성에 가치를 두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집을 건축하자. 물질적인 집도, 개인의 삶도, 가정도 그렇게 하고, 특히 교회를 그렇게 세워가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함으로 지혜와 지식을 얻고 힘과 용기를 얻어, 일상생활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하자.

7-10절, 지혜, 악, 미련, 낙담

[7절]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함으로 얻는 지혜는 미련한 자가 깨닫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고상한 덕이다. 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 미련한 자는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차원의 것만 이해하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영적, 천적(天的), 내세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미련한 자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한다. 옛 시대에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곳이며 법정으로도 사용되었다. 신명기 21:19에 보면,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처벌할 때 그 부모는 그를 잡아서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지혜자는 사람들 앞에서나 법정에서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주장과 변론과 반박을 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이든지 양심적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혜와 용기와 담력이 없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말은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반박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경우와 이치에 맞지 않고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은 경건한 자에게는 더욱 반박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성경 교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

[8-9절]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는 사특한 자라고 불린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바아르 메짐모스)는 ‘음모의 사람’ 즉 음모자라는 뜻이다(BDB, NASB, NIV). 또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이다. ‘생각’이라는 원어(짐마)도 ‘음모’라는 뜻이다. 미련한 자의 음모는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려는 계획이다. 그것은 죄악되다. 우리는 그런 악한 생각이나 계획을 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또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는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는 ‘조롱하는 자’라는 뜻이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 그런 거만한 사람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행위와 태도가 이성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지 남을 조롱하면 안 된다. 또한 양심적으로도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다 그만그만하지 특히 선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자신이 대단히 선한 것처럼 생각하고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더욱이, 성경말씀에 의거해도, 그것은 바르지 못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겸손히 상대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의 계명은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며 살라는 것이다.

[10절]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환난날은 어려운 일이 닥친 날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중한 병에 걸렸다거나, 부모님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 등 사랑하는 가족이 중한 병에 걸렸거나 죽었거나, 또는 실직, 부도, 파산 등 경제 파탄이 생겼거나, 또는 지진, 기근, 전쟁, 대형사고의 경우 등을 가리킨다.

‘낙담하다’는 원어(라파)는 ‘느슨하다, 기운이 없다’는 뜻이다. 평소에 건강하고 활달하던 사람도 환난날에는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리고 식욕이 없어지고 일할 의욕도, 심지어 살 의욕도 없어지기 쉽다. 만일 우리가 환난날에 낙담하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성을 보이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다 연약한 존재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일시적으로는 낙심하였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는 것을 싫어하고 고기 먹기를 원하여 울었을 때, 모세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들을 잉태하여 낳았습니까? 제 책임이 너무 무거워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즉시 나를 죽여 저로 이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2, 15).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이룬 다음날 왕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였다(왕상 19:4). 사람은 누구나 심신이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으로 힘을 얻는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를 의지함으로 평안과 담대함을 얻었다. 시편 3:3-6,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그의 은혜로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그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무엇을 주장하고 변론할 때, 이성에 맞고 양심에 맞고 성경에 맞는 지혜롭고 합당한 말을 담대히 하자.

우리는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 즉 악한 음모자가 되지 말고, 미련하고 악한 계획을 품는 자가 되지 말고, 또 남을 조롱하는 자도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힘과 위로로 삼자. 특히 어려운 문제가 우리에게 닥친 환난날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힘을 얻자.

11-16절, 구원, 꿀, 의인

[11-12절]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문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육을 당하게 된 자들을 외면치 말고 구원하라는 교훈이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교훈과 같다. 강도 만나 죽게 된 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고 시간과 돈을 사용하였다(눅 10:30-3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큰 계명이다(마 22:39).

본문은 오늘날 적어도 두 가지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북한에는 지금도 이삼십만 명 이상이 정치범수용소들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고 있다고 하며,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며 그들에게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고 자유와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학대하는 공포정치로 유지되고 있는 북한의 독재정권이 속히 무너지고 변화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입을 열어 전도해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다. 또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헌신해야 한다.

[13-14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꿀은 벌들이 꽃의 꿀을 모은 것이다. 그것은 무기질을 포함한 설탕 성분으로서 아주 뛰어난 에너지 식품이다. 그것은 입에 달고 몸에도 힘이 되므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식품이다. 본문은 꿀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지혜가 꿀과 같다고 말한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님 자신이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며,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는 꿀과 같이 우리 마음에 즐거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 시편 73편 저자는 하나님께 대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고 고백했고(시 73:25), 시편 84편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말했다(시 84:1).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고(시 19:10-11),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즐거움과 위로라고 말하며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하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4, 50, 92, 103). 잠언 3:17은 지혜의 길이 곧 즐거움과 평강의 길이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또 우리가 지혜를 얻으면 정녕히 우리의 장래가 있고 우리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지혜는 확실히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디모데전서 4:8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15-16절]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엎드러짐이니라].

본문은 악한 자에게 의인의 집을 엿보거나 그의 쉬는 처소를 헐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도,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슥 7:10-11).

악한 자는 교만과 욕심과 시기심 때문에 의인을 해치려 한다. 겸손한 사람은 선의의 경쟁은 하나 시기심을 품고 남을 미워하고 해치려 하지는 않는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때 그것 때문에 동생을 미워하며 시기했고 마침내 들에서 그를 쳐죽였었다(창 4:3-8).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남에 대해 확실한 근거도 없이 비방하고 비난하는 것도 매우 악한 일이다.

의인을 해치려는 것이 소용없는 까닭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들도 때때로 넘어진다. 그는 자신의 부족과 실수와 하나님의 징계로, 혹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 가운데 넘어진다.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또 그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시편 37:24도, “저는[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말했다. 선지자 미가는 미가 7:8에서,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의인을 해치려는 것은 소용없다. 그러나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질 것이다.

우리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구원하자.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영혼 구원의 전도에 사명감을 갖고 힘쓰자.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자.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자. 또 그 말씀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의롭게만 살자. 특히 미움과 시기와 남을 비방함을 조심하자. 또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17-22절, 원수, 행악자, 반역자

[17-18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원수는 사람을 악하게 비난하고 괴롭히고 해치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자이며 그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하며 호소하기도 하는 자이다. 사람은 교만과 욕심, 시기심과 미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된다. 사울 왕과 압살롬 같은 이는 다윗과 원수이었고, 에돔, 암몬, 모압, 애굽, 앗수르 나라 등은 이스라엘과 원수이었다.

원수는 때때로 넘어지고 엎드러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에 대해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악한 원수는 엎드러질 것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거나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는 행위로 그들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족과 실수와 범죄함이 많았고 또 많다.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도 간음하고 살인하는 큰 죄를 범하였었다. 성도의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과 재앙 당함을 기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높은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의 진노를 옮기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심을 감사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높은 마음이나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오늘까지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20절]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행악자는 남에게 악을 행하고 해를 끼치는 자를 말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행악자가 득의(得意)한다는 말은 악을 행하는 자가 그의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의 하는 일이 잘 풀려 형통하다는 말이다. 악한 자가 돈도 잘 벌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그의 자녀들도 건강하고 번창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그 악인은 기뻐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성도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거나 또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도가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기면, 그는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현실을 보고 현실을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성도는 영적, 도덕적 가치, 즉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물질적, 현세적 가치와 복보다 더 크게 여기는 자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성경 진리를 아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다.

그러므로 행악자가 현세에서 혹 형통한 것 같아도, 성도는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는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장래’는 후손의 복을 포함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내세(來世)의 복 곧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행악자에게는 복된 내세가 없다. 또 악인의 등불 곧 그의 기쁨과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아서 그칠 것이다. 잠언 13:9도,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한다. 행악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결코 복되지 않다.

[21-22절]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의 왕을 경외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화산과 지진과 폭풍과 홍수를 주관하시며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 복과 화를 주관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겨야 한다.

또 한 나라의 왕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나라의 백성에게는 기본적 의무이다. 왕은 한 나라에 세움을 받은 최고의 통치자이다. 제5계명의 정신은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학교에서 선생을 존경하고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하고 사회에서 통치자들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질서이며 순리이며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나 단체나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또 우리는 반역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 ‘반역자’라는 원어(쇼님)는 ‘변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했다가 변한 변절자들이다. 우리가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로 본문은,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고 말한다. ‘이 두 자의 멸망’(피드 쉐네헴)에서 ‘이 두 자’는 하나님과 왕을 가리키며 ‘이 두 자의 멸망’은 ‘이 두 자로부터 오는 재앙’이라는 뜻인 것 같다(NASB, NIV).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를 벌하실 것이며 왕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반역자와 사귀면, 우리는 같은 재앙과 큰 해를 당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남을 해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원수가 엎드러질 때 기뻐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감사하며 오직 의와 선을 행하자.

우리는 행악자의 득의(得意)와 형통을 부러워 말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경외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고, 또 세상 나라의 통치자를 반역하는 자, 즉 변절자가 되지 말고 또 그런 자들과 사귀다가 함께 하나님의 재앙을 받지 말자.

23-34절, 공정한 재판, 집 세움, 게으름

[23-26절]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지혜로운 자들에게 속하는 것들](KJV)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는 (그의) 입술에 입맞추리라](KJV, NASB).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아는 사이니까, 고향 사람이니까, 선후배니까 배려하여 재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출애굽기 23:2-3은,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하며, 또 잠언 18:5는,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사람들도 불의한 재판을 미워한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이 있어서 사물의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악인을 옳다 하면 사람들의 저주와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를 책망하면 기쁨과 복을 얻을 것이다. 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할 것이지만, 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할 것이다(잠 28:4).

26절은 앞의 구절에 연결되어 ‘[그의] 입술’은 바른 말로 대답하며 악인을 견책하는 자의 입술을 가리키는 것 같다. 본문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27절]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요즘에는 가정에서 안의 일과 밖의 일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안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남편은 ‘바깥양반’이고, 아내는 ‘집사람’이다. 바깥일은 농사, 목축, 공장, 장사, 직장, 회사 등의 일을 다 포함한다.

본문은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집을 세우라고 말한다. 집을 세우는 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가정을 세우려면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집을 세우려면, 먼저 안정적 직장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얼마큼 저축한 후에 해야 한다.

물론,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자세한 구상과 설계를 하고, 거기에 드는 충분한 비용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자재들과 건축기술자들과 일꾼들을 확보하고 지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는 것도 비슷하다. 결혼하려는 사람은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먼저 준비해야 한다. 그는 성숙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과 건강한 몸을 준비해야 하고, 또 얼마간의 물질도 준비해야 한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치밀한 계획과 순서 없이 즉흥적으로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을 고칠 때, 먼저 새 장판으로 바꾸고, 그 다음에 벽지를 뜯고 새것으로 바르고, 그 다음 싱크대도 고치고, 그 다음에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한다면, 그는 일을 완전히 거꾸로 하는 자일 것이다. 그는 먼저 낡은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고, 그 다음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하고, 그 다음 새 벽지를 바르고, 그 다음 싱크대를 고치고, 그 다음 새 장판을 깔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에는 순서가 있고 준비가 필요하다.

[28-29절]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증인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증거를 해야 한다. 까닭 없이, 즉 정당한 이유, 타당한 이유가 없이, 부당하게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증거를 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것은 제9계명을 어기는 거짓 증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신임성을 손상시키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하는 일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성도들은 서로 지체가 되므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며(엡 4:25), 항상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행한 악에 대해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공적 형벌은 필요하지만, 사사로운 보복은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17, 20,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30-34절] 내가 증왕(曾往)에[이전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같은 부류에 둔다. 게으름은 곧 미련함이요, 부지런함은 곧 지혜이다.

게으름의 표시는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게으른 농사꾼의 밭과 포도원에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표현된다. 이와 같이, 게으른 학생, 게으른 주부, 게으른 직장인, 게으른 성도, 게으른 직분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그의 게으름의 흔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게으름의 한 표는 잠을 많이 자는 것이며, 그 결과는 물질적 궁핍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또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잠언 31장에 묘사되었다(잠 31:13, 15, 27).

세상 일도,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디모데전서 4:15, “이 모든 일[경건 훈련]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는 재판할 때 사람의 낯을 보지 말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선과 악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을 칭찬하고 악을 책망해야 한다. 우리는 악을 행한 자에게 바른 말로 책망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인정도 받고 사람들의 사랑도 입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 후에 해야 한다. 집을 짓는 일도, 사업을 하는 일도 그러하다. 특히 젊은이가 가정을 세우려 할 때에 그는 상당한 준비를 한 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까닭 없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개인적 보복을 하지 말고 끝까지 선만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의 일, 학교 공부, 직장의 일뿐 아니라, 또한 믿는 일, 즉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

25장: 말, 충성, 온유, 원수 사랑, 별거

1-7절, 왕의 영광, 악인 제거, 교만

[1-3절]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필사(筆寫)한]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잠언 30-31장을 제외한 잠언의 대부분의 내용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내용이며, 25장부터 29장까지는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필사(筆寫)한 것이다. 솔로몬은 잠언 3천 개를 썼다(왕상 4:3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없다. 신명기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나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이다. 일을 계획하고 행하며 그것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로마서 12:8,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니라].” 나라 일들을 힘써 살피는 왕은 훌륭한 왕이다. 물론 왕의 깊은 마음을 백성이 다 알지 못한다.

[4-5절]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位)가 의(義)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불순물이 섞인 은에서 찌끼를 제거하면 은장색이 쓸 만한 순은(純銀)이 나오듯이, 왕의 신하들 중에 악한 자를 제거하면 그 왕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설 것이다. 악한 자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 비양심적인 자, 아첨하는 자, 남을 해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가 왕에게 약간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참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실상 그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자이다. 그는 결국 왕의 나라를 어지럽히며 평안을 무너뜨리고 왕의 명예도 땅에 떨어뜨릴 것이다.

왕의 왕위는 악인들이 제거되고 의인들이 세워짐으로써 견고하게 된다. 잠언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왕의 보좌와 나라는 공의로 굳게 서며 평안을 누릴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의(義)는 내용적으로는 인자함과 사랑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왕은 백성에게 인자함과 사랑을 실천하여 나라 안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나라와 그 왕위는 견고해지고 평안을 누릴 것이다.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伸寃)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교회도 비슷하다. 교회에서도 악인들이 징계를 받고 의롭고 선한 자들이 세움을 받을 때 교회는 평안 가운데 든든히 세워질 것이다.

[6-7절]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大人)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왕은 겸손한 신하를 사랑하고 신임할 것이다. 왕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귀한 사람이 오면 상석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무리에게 자신을 높이지 말고 낮추라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눅 14:8-11).

주께서는 겸손에 대해 자주 교훈하셨다. 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0: 26-27),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마 23:12). 또 사도 바울도 교인들에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교훈하였고(롬 12:10), 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빌 2: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옥 갈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다. 또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또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독생자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알지 못하므로 오직 그를 의지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잘 계획하고 행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면 그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해질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어야 한다. 또 우리는 교회에서 믿음이 없고 악한 자들을 징계하고 의롭고 선한 자들을 세움으로 교회를 견고하고 평안케 해야 한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크게 여기거나 자신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서 모든 진실한 성도들을 다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8-12절, 다툼, 경우에 합당한 말, 책망

[8절] 너는 급거히[성급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수치]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우리는 성급히 나서서 이웃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을 잘 파악하고 판단하기 전에 성급히 나서면 수치를 당할 것이다.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수치]을 당하느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또 원고의 말이 옳은 것 같으나 피고가 와서 밝히는 경우도 있다. 잠언 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사람이 성급히 나서서 다투면 실수하기 쉬운 까닭은 사람이 누구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식과 이해력은 한계가 있고 사람의 기억력과 판단력도 그러하다. 말의 표현력도 불완전하다. 또 사람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기 쉽다. 사람이 감정이 앞서면 사리판단력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화가 났을 때는 조금 참는 것이 좋다. 그래야 실수를 안 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또 우리는 노하기도 더디 해야 한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야고보서 1:19-20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하였다.

[9-10절]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남의 은밀한 일’(NASB, NIV)이라는 원문(소드 아케르)은 “은밀한 일을 남에게”(KJV)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것은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액센트에 맞고(소드에 분리액센트가 찍혀 있고, 아케르에는 연결액센트가 찍혀 있음) 또 문맥에도 맞는 것 같다.

사람이 이웃과 가급적 안 다투는 것이 좋으나 부득이 다툴 경우가 있다. 어떤 오해가 있을 때나, 억울하게 비난을 받았을 때나, 또 물질적 손실을 당했을 때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 관계된 문제만 변론해야지, 그가 다투다가 알게 되었거나 평소에 알고 있던 상대의 은밀한 일을 남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사적인 문제를 남에게 누설하는 것은 인격의 결함이며 그런 사람은 인격적이지 못하다는 비난과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남의 비밀을 또 다른 사람에게 누설치 않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와 덕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이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고 또 남의 비밀을 누설치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11절]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상황에 적절하게 말해진 말’을 가리킨다. 그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말이나 동문서답같이 엉뚱한 말이나 주제나 핵심에서 벗어난 말은 아무 가치가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사리나 이치에 맞고 이성과 양심에 맞고 더욱이 성경에 맞는 말이다. 또 그것은 회중에게 말할 때에는 말하는 때의 상황과 듣는 회중의 눈높이에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아로새긴 은쟁반’이라는 원어(마스키요스 카세프)는 ‘은으로 만든 전시물, 은으로 만든 조각상’(BDB, KB)이라는 뜻으로 영어성경은 ‘은 그림’(KJV) 또는 ‘은으로 만든 틀’(settings of silver)(NASB, NIV)이라고 번역하였다.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는 매우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이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할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바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잠언 15:23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적절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잠언 10:20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였다. 신약성경에도 비슷한 교훈이 있다.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하였다.

[12절]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슬기로운 자 곧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이다. 슬기로운 자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과 조언을 주며 필요한 경우는 책망도 준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다. 물론, 듣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이라도 그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러나 좀 부족한 전도자나 설교자의 교훈이라도 듣는 자에게는 유익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이들의 권면과 충고를 듣는다.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한다.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에게서도 무엇을 배울 것이다.

‘금고리’는 ‘금 귀걸이’(KJV, NASB, NIV) 같은 것을 말한다. 정금 장식은 금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이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슬기로운 자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고 오히려 사모해야 할 것이다.

잠언 1:8-9는, 부모의 훈계는 자녀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요 목에 금사슬이 된다고 말한다. 또 잠언 3:22는, 지혜의 말씀은 영혼의 생명이 되며 목에 장식이 된다고 말하고, 잠언 4:9는, 지혜는 그것을 얻은 자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두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잠언 27:5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잠언 27:9는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툼을 가급적 피해야 하지만, 부득이 다툴 때는 성급히 나서서 다투지 말자.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자.

우리는 이웃과 다툴 때 그때 관계된 문제만 변론하는 것이 옳다. 감정이 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남에게 감추고 싶은 부족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우리는 상황에 부적절한 말을 삼가고, 경우에 합당한 말,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을 하자.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지혜자의 교훈과 책망을 잘 듣자. 또 친구에게 좋은 충고와 책망을 해줄 수 있는 지혜자가 되자.

13-16절, 충성, 거짓 자랑, 인내, 꿀

[13절]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원문에는 ‘얼음 냉수 같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얼음 냉수’라는 원어(친낫 쉘렉)는 ‘눈(雪)의 차가움’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오늘날 말로 하면 얼음을 띄운 물이나 물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뺀 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추수하는 날은 추수하느라고 땀 흘리고 덥고 목마른 날이다. 그때 얼음 냉수는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 것인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주인에게 이러하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그 주인의 마음을 얼음 냉수같이 시원케 할 것이다. ‘충성된’이라는 말(네에만)은 ‘변함 없는, 믿을 만한’이라는 뜻이다. 충성이란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하기 위해 변함 없이, 계속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용두사미(龍頭蛇尾) 즉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조석변이(朝夕變移) 즉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작심삼일(作心三日) 즉 결심한 것이 3일밖에 못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충성이 아니다.

충성된 사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과 봉사자들, 목사, 장로, 권사, 교사 등에게 적용될 것이다. 보낸 자와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회와 회중을 통해 일꾼들을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영혼 구원의 전도와 목회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신약교회의 최대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일꾼들로 부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주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14절]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라는 원문(이쉬 밋할렐 베맛탓 솨케르)은 ‘거짓된 은사(gift)를 자랑하는 자’ (KJV)라는 말이거나 ‘선물을 거짓되이 자랑하는 자’(NASB)라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지 않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자이거나 남에게 선물을 준다고 거짓말로 자랑하는 자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 즉 성령의 은사는 남에게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지도 않으신 은사를 받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허위 광고, 과장 광고와 같다. 그것은 거짓이며 허풍이다. 그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다. 그것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바람도 불지만, 비올 듯한 모양만 있고 비를 뿌리지 않는 것과 같다.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거짓 교사들을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고 묘사했다(유 12).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허풍을 분별해야 한다.

또 남에게 선물을 주지도 않으면서 선물을 줄 것처럼 거짓말하는 것도 악한 일, 불신실한 일이다. 우리는 무슨 선한 일이든지 조용히, 은밀히 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나 남에게 구제할 때 자랑하거나 선전하거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고 교훈하셨다(마 6:1-6). 메시아께서는 다투지도 않으시고 외치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리라고 예언되었다(마 12:19).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생활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야단스럽고 떠들석하게 자기를 선전하며 하지 말고 조용히, 은밀히, 겸손히 해야 할 것이다.

[15절]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그 말을 용납한다’는 원어(예푸테)는 ‘설득 당한다’(be per- suaded)는 뜻이다. 관원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했으나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때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포기하면 일이 그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인내가 필요하고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자존심과 감정을 버리고 상한 마음을 버리고 참고 인내하며 자신의 정직하고 정당한 소원을 계속 간청하면 마침내 관원이 설득 당하여 그의 말을 받아줄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하신 불의한 재판관과 한 과부의 비유의 내용이기도 하다. 한 과부가 낙심치 않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절히 탄원해 응답받은 것처럼, 오래 참고 관원에게 간청하면 좋은 응답을 얻을 것이다.

본문은 또,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유순한 말이 뼈같이 딱딱한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뜻이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성질을 내는 과격한 말은 상대방을 노하게 만들며 마음을 더 닫게 만든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은 상대방의 노를 쉬게 하며 닫힌 마음도 조금씩 열 것이다. 물은 가장 약한 물질이지만, 못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고 딱딱한 바윗돌도 깎아서 둥글게 만든다. 유순한 말도 이와 같다. 온유는 성도의 덕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덕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 .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16절]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4:13에서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고 말했으나, 본문은 꿀을 과식하면 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제에 대한 교훈이라고 본다.

꿀뿐 아니라, 모든 맛있는 음식이 다 그러하고 세상의 모든 즐거운 일들이 다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을 절제 있게 사용해야 한다. 절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덕의 하나이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관해 전했다(행 24:25). 절제는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 . .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실상,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무하다(전 1:2). 그러므로 시편 39편은 모든 사람이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표현하며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라고 말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을 다 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6:12-13).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임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느니라”고 말한다(요일 2:15-17).

물론, 금욕주의가 대안은 아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중에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허무한 세상 속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교훈하였다(전 2:24; 5:18; 9:9). 바울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딤전 4:1-5).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자가 되어 그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끝까지 완수함으로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자.

거짓 은사를 자랑하거나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다. 우리는 세상 일이나 신앙생활이나, 기도도 구제도 허풍으로나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면서 하지 말고 조용하게 착실히 하자.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게나 감정적으로 행하지 말고 범사에 참고 인내하며 온유한 말, 유순한 말로 자기 의견을 말하며 주장하자.

우리는 꿀을 적당히 먹고 과식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의 즐거움을 적당히 누리며 지나치지 말고 절제의 덕을 가지자.

17-20절, 이웃 왕래, 거짓 증거, 불신실, 동감

[17절]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는 원문(호카르 라글레카 밉베스 레에카)은 “네 발을 네 이웃의 집으로부터 드물게 하라”는 뜻이다.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드물게 하는 것이 지혜자의 처신이라는 말이다.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남에 대한 말도 하기 쉽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또 사람마다 개인의 시간계획이 있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사람에게 30분 혹은 1시간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큰 일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게 행동하지 말고 남을 생각하고 예의를 가져야 한다. 남의 시간을 필요로 할 때에는 먼저 정중히 양해를 구해야 하고 전화도 꼭 필요한 경우,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이웃 사랑의 원리에 맞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한다(고전 13:4-5).

그러나 상대방의 구원을 위한 접촉이나 방문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상대방의 영혼 구원은 가장 귀한 일이므로 그 일을 위해서 접촉하고 방문하는 것은 우리가 기회를 잡아 힘써야 할 귀한 일이다.

본문은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일 없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이웃에게 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지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흠 없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18절]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그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로 비난하고 해치는 자는 그 이웃을 방망이로 때리고 날카로운 칼로 베고 뽀족한 화살로 쏘아 찔러 죽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0: 16). 거짓말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뱀을 통해 거짓말로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를 범죄케 하였고 아담과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창 3장). 주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말은 마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남을 치는 거짓 증거는 교만과 미움에서 나온다. 교만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만들며, 미움은 남을 해치고 죽이게 한다. 미움과 살인은 멸망의 죄악이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했다(요일 3:15).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와 살인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8,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 증거는 매우 큰 죄악이다.

[19절]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違骨)된 발 같으니라.

‘진실치 못한 자’라는 원어(보게드)는 ‘배신자, 불신실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양심적으로, 진리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입장을 바꾸고 관계를 변하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부요하고 형통할 때는 친근히 하다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즉 물질적 어려움이 있고 환경적 재난이 닥칠 때에는 등을 돌리는 자이다.

환난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齒](쉔 로아)[나쁜 이](NASB, NIV)와 위골(違骨)된 발(레겔 무아뎃)[뒤뚝거리는(tottering) 발](BDB) 같다. 이나 발은 몸에 꼭 필요한 지체이지만, 부러진 이 혹은 나쁜 이는 음식을 씹는 기능을 잘 못하는 이이며 뒤뚝거리는 발은 걷는 기능을 잘 못하는 발이다. 그것들은 쓸모 없고 오히려 통증이 있어서 고통과 짐이 되는 지체들이다. 이와 같이, 환난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며 오히려 마음에 고통과 짐이 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 의리를 지키고 변함 없이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엔 거짓이 없고(롬 12:9), 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실상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간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요 2:24).

[20절]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추운 날에는 옷을 더 입어야지 옷을 벗으면 더 추울 것이다. 또한 소다 위에 초를 붓는 것은 서로 맞지 않는 두 물질을 잘못 섞는 것이며 그것은 소다를 녹여 그것을 쓸모 없고 효능이 없게 만든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고 은밀히 그를 위해 기도하든지 혹은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 그에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가짐이요 사랑의 마음가짐이다. 경건한 욥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말했다(욥 30:25). 사도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하며(고전 12:26),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5-16).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體恤)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8).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고,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한 자가 되자.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되고 부담을 주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이웃을 미워하거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특히 이웃에 대해 거짓된 말로 증거하지 말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서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자. 이웃과 생각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자.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자. 그것이 겸손하고 온유하며 사랑이 있는 성도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21-24절, 원수 사랑, 참소하는 혀, 다투는 여인

[21-22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원수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내용을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전통본문). 누가복음 6:27-28,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교훈하기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롬 12:20-21).

핀 숯을 머리에 놓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핀 숯이 쇠를 달구듯이 그의 선행이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고 변화시킴을 뜻할지도 모른다. 원수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상대에게 악을 행했는데 상대는 자기에게 선을 행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가 그래도 변하지 않으면 그가 원수에게 한 선행이 도리어 그의 머리에 놓여진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이 된다는 뜻도 포함할 것이다.

본문은,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사랑의 선행에 대해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일으킨다’는 원어(테콜렐)는 ‘가져온다’는 뜻이라고 한다(BDB).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이 그런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몰아낸다’(drive away)고 번역하였고 주후 170년경에 번역된 헬라어 구약성경인 시마쿠스역이나 라틴어 벌게이트역이나 어떤 유대인 학자들(아벤 에즈라, 죠셉 킴치)의 지지를 가진다(카일-델리취). ‘참소하는 혀’라는 원어(레숀 사세르)는 ‘은밀한 혀’라는 말로 ‘은밀히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혀’라는 뜻이라고 본다(BDB).

한글 본문은, 북풍이 비를 일으키듯이, 은밀하게 남을 헐뜯는 혀가 비난당하는 당사자나 바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분노케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혹은, 본문의 뜻이,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북풍이 비를 몰아내듯이, 노한 얼굴은 남을 헐뜯는 혀를 몰아내느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팔레스틴 땅의 북풍은 보통 비가 없는 바람이라고 한다. 팔레스틴 땅에는 보통 서풍이나 남서풍이 비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은밀히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듣지 않고 그 앞에서 화를 내면 그는 다시 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3:11은,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이 참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다투는 여인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람은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하고 다툰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불만도 없고 다툼도 없을 것이다.

여성의 가치는 경건과 선함과 온유함 등의 덕성에 있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경건함이 여성의 귀한 덕임을 증거한 것이다. 또 잠언 12:4는, “어진[덕스러운]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하며, 디모데전서 2:9-10은,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덕스러움과 선행을 여성의 아름다움과 가치로 증거한 것이다. 또 베드로전서 3:4는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성경은 검소함, 절제, 근면의 덕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상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 사람의 인격은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며, 영혼은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결혼의 행복은 가정의 평안과 사랑에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우리는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끝까지 선을 베풀며 선으로 악을 이기자. 이것이 하나님께서 본을 보이신 바요 우리에게 교훈하신 선한 삶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우리에게 와서 은밀히 남을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화를 내어 쫓아내는 것이 좋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외모보다 내면성, 인격성에 두자. 모든 성도들 특히 여성도들은 경건과 선함과 온유함의 덕을 갖추도록 힘쓰자.

25-28절, 좋은 기별, 의인의 굴복, 영예, 마음 제어

[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갈 형편이 못 되었던 시골 가정의 한 학생이 서울에 올라와 몇 년 동안 자취하며 학원에서 칠판 지우고 지우개 털고 청소하고 고생하면서 어깨 너머로 공부하듯 틈틈이 공부하여, 서울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드릴 때, 아들의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부모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모든 사람은 목마른 자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다(사 55:1). 주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6). 모든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목말라 있고 또 의와 영생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천국 복음은 먼 땅에서 오는 가장 좋은 기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소식이며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다(딤전 1:15).

하나님의 복음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생수와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요 4:10, 14).

[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우물이나 샘은 먹는 물이다. 의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잠언 10:11은,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말한다. 물이 흐리어짐과 더러워짐은 물을 못 먹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의인이 의를 지키지 못하고 악인의 위협과 핍박 앞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일이 있다. 경건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죽음의 위험 때문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었다. 사도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었다. 그것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크게 실망시킬 만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은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다.

사람들은 의인의 말과 행위를 통해 의가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악이 득세할 때 슬퍼하고 탄식한다.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에스겔은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고 지적했다(겔 34:18).

우리는 고난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켜야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사자굴의 위협과 풀무불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다(단 3장, 6장).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1). 환난날에 필요한 것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다(계 13:10).

[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꿀은 달고 맛있는 좋은 음식이다. 성경은 지혜를 꿀에 비유하였다. 잠언 24:13-14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 . .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고 하였다. 또 다윗이나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표현하였다(시 19:10; 119:103).

본문은 영예를 꿀에 비유한다. 영예는 좋은 것이며, 불명예나 수치는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2:1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라고 했고, 전도서 7:1도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했다. 로마서 2:7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갚으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꿀을 적당히 먹어야 한다고 교훈했다. 잠언 25:16은,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절제를 교훈한 것이다. 음식뿐 아니라, 영예도 그러하다. 영예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들은 영예를 위해 외식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며 세상적 사랑이다. 전도서 1:2는 “[세상의 일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말하였고, 또 요한일서 2:15-17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다.

[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마음’이라는 원어(루아크)는 ‘영’이라는 뜻이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 등 영의 활동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과 마음을 제어하고 다스린다는 말은 절제를 가리킨다. 자신을 절제하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이다. 그는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이다. 이사야 26:3은,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않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다.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은 외부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와 같다. 그는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과 세상의 악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벽 곧 바른 우주관, 인생관, 가치관이 필요하고 경건과 의의 생활규칙이 필요하다. 또 경건과 의를 실천할 힘과, 불경건과 죄를 버릴 힘이 필요하며, 끊을 것은 끊고 피할 것은 피하고 힘쓸 것은 힘쓰는 결단력과 절제가 필요하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고전 6:12; 10:23), 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다(고전 9:25).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23)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덕성이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복음은 영적으로 목마른 모든 죄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쁘고 복된 구원의 소식이다. 우리는 이 복음을 널리 전하자.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다. 우리는 악인 앞에 굴복하지 말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키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신앙의 본을 보이자. 순교도 각오하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예와 영광은 좋은 것이지만, 세상 명예와 영광을 구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하지 말자.

우리는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자.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의와 선을 행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자.

26장: 미련한 자, 게으른 자

1-3절, 미련한 자의 영예, 까닭 없는 저주, 막대기

[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

팔레스틴 땅은 여름이 곡식을 추수하는 때이다. 여름에 눈이 오면 곡식을 추수하고 타작하는 데 큰 지장이 될 것이며 채소들은 다 얼어버릴 것이다. 비는 씨를 뿌리거나 곡식이 익는 데 유익한 초겨울과 초봄에 와야 적당하다. 그러므로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은 적당치 않고 오히려 지장이 된다.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같이,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그의 계명대로 살지 않는 자이다. 그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거짓되며 악하다. 영예를 준다는 것은 교회의 직분과 사회의 직위를 주는 것을 말한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적당치 않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함으로 그 직분을 어그러뜨린다. 그는 그 직분과 직위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져서 더 큰 잘못을 범한다. 그는 그 영예를 남용하고 악용한다.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심히 노하여 그와 그의 민족 유다 민족을 다 멸하려고 계획하였고(에 3:5-6), 또 집뜰에 50규빗 되는 나무를 세워 그를 그 나무에 달아 죽이려고 계획하였다(에 5:14). 초대 교회 때에도,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주의 종들을 대접지 않고 악한 말로 비방하고 대접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았다(요삼 9-10).

[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저주는 상대에게 재앙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악인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공의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정당성이 있다. 시편의 많은 저주의 시들이 그러하다. 시편 6:6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또 시편 7:16은 악한 자의 잔해(殘害)[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까닭 없는 저주 즉 정당성이 없는 저주가 있다.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자에게 재앙을 기원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며 그는 불의하고 부당한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이방인 선지자 발람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다(신 23:5). 또 시므이는 왕 다윗을 저주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 까닭에 선으로 자기에게 갚으실 것이라고 말했다(삼하 16:12).

정당한 저주가 있다 해도, 주께서는 신약 성도들에게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사랑하며 그를 축복하라고 교훈하셨다. 누가복음 6:27-28,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고, 악을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오직 악한 자에게 끝까지 선을 베풀라고 교훈한다(롬 12:14, 19-20). 그것은 우리가 지옥 갈 큰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3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재갈은 말을 어거하기 위하여 입에 가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킨다. 말이나 나귀 같은 이성 없는 짐승에게는 재갈과 굴레와 채찍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그것들을 제어하고 순종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 다르며 사람은 말로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고 권면하고 책망도 한다. 사람은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상대가 마음을 닫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자기의 마음과 뜻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닫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미련함이 조끔씩 있다. 미련한 자는 무지와 고집, 교만과 완고함이 있다.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미련한 아이에게 부모의 매가 필요하듯이, 미련한 자에게는 채찍이나 매나 막대기가 필요하다. 잠언 10:13,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8:6, “그[미련한 자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언 19:29,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미련한 어른들의 등에 필요한 막대기는 하나님의 징계를 가리킨다.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히브리서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32:9는,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미련한 자가 영예를 얻으면 그 영예를 오히려 남용하고 악용하여 범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예를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까닭 없는 저주를 하지도 말고 또 두려워하지도 말자.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자.

우리는 미련함의 악과 그 결과를 깨달아 미련함과 교만과 고집과 완고함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혜와 온유함과 겸손함을 가지자.

4-6절, 미련한 자에 대한 대답

[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알지 못하고 행치 않는 자이다. 즉 그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이다. 그런 자는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고 세속적이다. 그런 자는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돈을 자랑하고 집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미모를 자랑하고 세상 권세를 자랑한다. 지식 있는 자는 자신의 출신 학교를 자랑하고 그런 사람은 이성을 최고로 생각하고 과학을 최고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흔히 “뭐니뭐니 해도 세상에서는 건강이 최고다!” “돈이 최고다!” “과학이 최고다!” 등의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미련한 자의 말에 응하여 “물론, 그렇죠” 하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런 것을 다 불경건한 말이며 헛된 말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말한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편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40:6, 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5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우리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잠잠해야 할 때가 있겠으나, 하나님의 진리에 관계될 때, 또는 침묵하면 상대가 오히려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길 수 있을 때 말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침묵하실 때도 있었지만, 필요한 때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그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에 대해 비난하고 금하였을 때,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다(눅 13:15-16). 또 유대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율법대로 돌로 칠 것인가를 질문하였을 때, 그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7). 이것은 그들의 말로써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신 사건이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고 또 정죄하지만, 정작 자신도 정죄를 당할 만한 부족한 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그는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묻자,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되물으셨다(마 21:23-25). 그럼으로써 그는 그들의 질문하는 입을 막으셨다.

[6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자(者)는]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누구 편에 기별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는 편지나 전화, 혹은 문자나 이메일이 있어서 전하는 일이 쉽지만, 예전에는 사람을 직접 보내어 전하게 하였다. 전달자의 임무는 자기를 보내는 자의 마음과 뜻을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자는 자기의 발이 베임 같다. 발이 베임과 같다는 말은 전할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보내는 자의 전하는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고 변질되고 왜곡되어 그를 보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는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 등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야 할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稱義)의 복음이요 또 구원받은 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하고 온전케 되게 하는 성화(聖化)의 교훈이다. 목사와 교사 등 말씀의 봉사자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롭고 충성된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딤후 4:3-5).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충실한 전달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따라 바른 교리를 믿지 않는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이 세상의 육신의 건강과 병 고침이나 물질적 부요함의 복을 가르치는 설교를 하고, 내세에 대한 간절한 소망보다 현세에 대한 관심만을 전하며, 또 요즈음에는 예화가 가득하고 유머가 있는 재미있는 설교를 함으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은 다 실패하는 사역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일에 해가 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말에 대해 응하여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의 말의 불경건함과 부도덕함과 헛됨을 분별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말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해야 할 때에 침묵하지 말고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지혜롭게, 바르게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미련한 목사나 교사, 성도가 되지 말고, 지혜롭고 충성된 자가 되자. 또 지혜롭고 충성된 말씀의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자.

7-9절, 미련한 자의 잠언과 영예

[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다리는 걷는 기능을 하는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다리가 튼튼한 자가 건강한 자라고 한다. 사람은 적당한 영양섭취와 충분한 운동으로 다리를 건강케 해야 한다. 저는 자는 다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 다리가 제 구실을 못하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힘없이 달려 있는 저는 다리와 같다. 입은 음식을 먹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특히 말을 하는 기관이다. 잠언은 교훈적이고 유익한 말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별 교훈이 되지 못하고 별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미련한 자는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의 규칙으로 주신 그의 계명을 알지 못하므로, 그의 잠언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자는 그 입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바르고 유익한 교훈과 충고, 위로와 격려, 그리고 때로는 책망도 준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며, 잠언 12:18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하며, 잠언 15:4는 “온량한[건전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러운 말을 하라고 교훈한다. 에베소서 4:29,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물매’는 투석구(投石具) 즉 돌을 멀리 정확하게 던지는 기구이다.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과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지에서 사용한 무기의 하나로서 2미터 정도의 가죽끈의 중간을 넓게 하고 거기에 돌을 싸서 끈의 양끝을 모아 잡고 돌리다가 한쪽 끝을 놓아 돌을 날리는 도구이다. 앗수르인은 발 앞에 계란 모양의 돌을 쌓아 놓고 쏘았으며 애굽인은 목에다 돌을 담은 그물을 걸고 쏘았다고 한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물매를 사용하였다(삼상 17:40). 당시 목자들은 양을 해치러 오는 짐승을 막는 도구로 물매를 썼던 것 같다. 성경은 베냐민 사람들 중에 물매를 던져 정확하게 맞히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증거한다(삿 20:16; 대상 12:2).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의와 선을 행치 않는 자, 거짓되고 악한 자, 비양심적인 자이다. 영예를 준다는 말은 직분을 주고 중요한 책임을 맡긴다는 뜻이다. 직분은 일을 하기 위해 주는 것이며 일을 위해 필요하다. 돌을 물매에 맨다는 말은 돌을 날려보낼 수 없음을 말한다. 즉 물매가 물매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 곧 그의 교만과 악함과 거짓됨 때문에 그의 영예 즉 그의 직분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을 어그러뜨리고 해를 끼친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열왕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직무를 위해 무익한 미련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술 취한 자는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 제 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이 술 취하면 실수하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말한다(엡 5:18).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바른 정신을 가진 자는 가시나무를 불쏘시개로나 쓸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한 자는 그것을 지팡이인 줄 알고 잡음으로 자기 손을 상할 것이다. 그의 손은 베이고 찔리고 찢길 것이다. 또 그가 그것을 사용하여 남을 치면 남에게도 같은 해를 줄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남의 몸을 베고 찌르고 찢어 큰 상처를 입힐 것이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이 이와 같다. 잠언은 교훈의 말을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을 말로 나타낸다. 그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말을 하며, 그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럽고 건설적인 말이 아니고, 남에게 해를 주고 마음의 상함을 주는 말이 될 것이다.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말하며, 잠언 15:4는 “패역한 혀는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미련한 자가 그렇다. 야고보서 3:8-9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자의 혀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1은,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하며, 에베소서 4:29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저는 자의 다리가 힘없게 달려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유익이 없는 말을 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자.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 역할도 못하는 미련한 직분자, 봉사자가 되지 말고 지혜롭고 충성된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선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자.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주고 마음의 상함을 주는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고 우리 입에 보초를 세워 악한 말을 버리고 선하고 덕스럽고 은혜로운 말만 하자.

10-12절, 미련한 자

[10절]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성경에서 번역하기 어려운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그 뜻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장인’이라는 원어(라브)는 ‘크신 자[하나님]’(KJV), ‘장인(匠人)’(게세니우스), 혹은 ‘궁인(弓人, 활 쏘는 자)’(NASB, NIV) 등으로 번역된다. 또 ‘만들지라도’라는 원어(메콜렐)는 ‘만드는 자’(BDB, KJV) 또는 ‘상하게 하는 자’(KB, NASB, NIV)라고 번역된다. ‘지나가는 자’라는 원어(오베림)는 ‘범죄자’(KJV) 또는 ‘지나가는 자’(NASB, NIV)라고 번역된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모든 것을 만드신 크신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도 보응하시고 범죄자들도 보응하시리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히브리어 학자 게세니우스는,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드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범죄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는 뜻으로 번역했다(한글개역과 비슷함).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모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궁인(弓人)처럼, 미련한 자를 고용하거나 지나가는 자를 고용하는 자가 그러하리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어느 번역이 바른 번역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근래의 영어성경들이 문맥상 적절해 보인다. 본절은 미련한 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같이 별 유익이 없거나 범죄자를 고용하는 것같이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일에 적합한 자를 잘 심사하여 고용해야지, 아무나 고용해서는 그 일을 잘할 수 없고 더욱이 미련한 자에게 일을 맡기면 오히려 심신의 고통과 해를 당할 것이다.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개는 음식이 나쁘든지 속이 안 좋든지 하면 토할 것이다. 또 토한 것은 위액과 섞여서 냄새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할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훈련된 개가 아니면, 개는 얼마 후 배가 고프면 그것을 또 먹는다. 개들은 지혜가 없어 욕구와 충동을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다 그러하다. 짐승은 지혜와 생각이 없고 도덕성이 없다.

미련한 자는 이와 비슷하게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미련한 것이 무엇인가? 불경건한 것이나 우상숭배 같은 것이 미련한 것이다. 또 부도덕한 것, 즉 남을 비방하는 것이나 음란한 것이나 거짓된 것이 미련한 것이다. 또 헛된 것들, 즉 돈을 사랑함, 세상을 사랑함, 명예를 사랑함, 사치와 허영, 과도한 쇼핑, 지나친 외모 치장 등이 미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욕구가 있고 정당치 않은 욕구가 있다.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는 정당하고 또 결혼도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이지만, 음란이나 알코올 중독, 탐욕과 사치와 허영 등 무엇이든지 절제치 못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행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늘 거역했다(신 9:7, 24).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또’ 혹은 ‘다시’ 범죄하였다고 증거하였다(삿 3:13; 4:1; 6:1; 10:6; 13:1). 시편 78:17, 40-41,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참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섭리자로 바로 아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죄인이며 의(義)와 사랑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바로 아는 것이다. 거기서 참된 겸손이 나온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한 자의 모습이다. 그것이 곧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의 현인도 “네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많이 배운 이들은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실상 우리의 아는 것이란 지극히 작은 분량에 불과하다. 지구는 우주에서 작은 점에 불과하며, 인간은 그 지구에서 작은 점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의 작은 부분도 잘 모르고 있다. 인생은, 마치 유명한 폐암 전문의가 자신이 폐암에 걸린 줄 모르고 있다가 폐암으로 죽는 것과 같다. 사람은 심히 무지하고 죄악되고 연약하다.

본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며,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줄 모르며,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와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3-4, 6).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궁인처럼 해가 된다. 우리는 미련한 자, 곧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악한 자가 되지 말자. 또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미련한 자를 등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먹듯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사람 속에는 죄성이 있고 우리 속에도 그것이 남아 있다. 죄성이 미련함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뿐이다.

자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미련한 자보다 더 못한 자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3-16절, 게으른 자

[13절]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언 22:13도 비슷한 내용이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지혜가 없는 자이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이다. 게으른 자는 길이나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핑계를 댄다. 그는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겁을 내며 핑계를 지어내며, 해야 할 선한 일을 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자는 보통 깊은 숲 속에 있지 길이나 거리에 있지 않다.

세상의 일에는 항상 예기치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설령 위험이 있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사람이 교통사고의 위험 때문에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많은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성도가 하는 일에는 악한 자들의 방해가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항상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난과 위험을 각오하고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격려하셨다(수 1:6-9). 잠언 28:1은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말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다(사 41:10).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말하며(롬 8:35) 또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3). 또 그는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교훈했다(엡 6:10-11). 성도는 주 안에서 담대히 일해야 한다.

[14절] 문짝이 돌쩌귀[경첩, 힌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뒹구적거리느니라].

단잠은 좋은 것이며 하루에 약 7-8시간의 적당한 수면은 보약이라고 한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누워 잤다고 시편에서 말하였다(시 3:5; 4:8). 솔로몬은 시편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말했다(시 127:2).

그러나 지나친 잠은 게으름의 표시이며 그런 자는 가난해진다. 잠언 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자기의 할 일에 충실한 자는 지나치게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할 일이 많은 세상인데 게으르게 잠만 잘 수가 없을 것이다. 야곱은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때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말했다(창 31:40).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묘사되었다(13, 15, 27절).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을 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고 자지 못한 때도 많았다고 말했다(고후 6:4-5; 11:27).

[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19:24과 같은 말씀이다. ‘그릇’이라는 원어(찰라카스)는 ‘품, 겨드랑이’(헬라어 70인역, 아퀼라역, 심마쿠스역, 유대인 주석가 Kimchi, KJV) 혹은 ‘그릇’(BDB, KB, NASB, NIV)을 의미한다. 본문은, 게으른 자가 그 손을 품에 넣고 입으로 올리기도 괴로워한다는 뜻이든지,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는 뜻이다. 게으른 자는 손끝도 까딱하기를 싫어하고 숟가락질, 젓가락질도 힘들어한다. 그것은 게으름의 극치이다.

그러나 성도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해야 한다. 근면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2:24는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고(롬 12:11), 또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 세월을 아끼라고 교훈하였다(엡 4:28; 5:16).

[16절] 게으른 자는 선히(타암)[사려 깊게,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게으른 자는 또한 교만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히 순종하지 않는다. 잠언 3:7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한다.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8:2는,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26:12는,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의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선한 일을 행하자. 또 우리는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는 게으른 자가 되지 말자. 또 우리는 손으로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고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되자. 또 우리는 게으르면서도 교만하여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고 남의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말을 듣지 않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17-20절, 간섭, 속임, 말쟁이

[17절]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우리는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다툼, 우리와 상관이 없는 다툼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툼에 간섭하는 사람은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다. 사람이 개의 귀를 잡으면 개에게 물릴 것이다. 사람이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리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특히 남의 다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은 복잡하다. 여러 가지 이해 관계뿐 아니라, 심리적 문제, 감정적 문제가 얽혀 있기 마련이다. 또 사람은 생각보다 거짓되고 악하며 자기 합리화에 명수이다. 인간은 매우 외식적이고 가증하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시시비비를 가리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는 냉철한 이성과 선한 양심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법관들은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들어보고 여러 증인들의 증언들과 여러 증거들의 사실 여부와 그 신빙성을 검토하고 여러 정황을 확인하고 추론하고 이런저런 요소들을 다 검토한 후, 최종적 판결을 내린다.

그러므로 잠언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했다(잠 18:17). 또 주께서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확증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16). 또 사도 바울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말했다(딤전 5:19).

[18-19절]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남에게 횃불을 던지거나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미친 사람일 것이다. 미쳤다는 말은 이성과 양심이 그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는 상식에도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예의가 없는 자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그러하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속이는 것은 큰 악이다. 속이는 자는 건전한 인격자가 아니다. 거짓은 마귀의 죄악이다. 또 우리는 남을 불쾌하게 만들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농담도 삼가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5:4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교훈했다.

성도는 정상적인 인격자, 건전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인격자는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다. 성도는 남에게 악을 행치 말고 오히려 남을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며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도 참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성도는 사랑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성경은 가르쳤다(고전 13:4-6). 또 성경은 성도의 성숙한 덕을 절제하며 근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딤전 3:2). 그것은 자제심과 건전한 정신을 가리킨다.

[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말쟁이는 말수가 많은 자, 수다쟁이를 가리킨다. 그는 이 집 저 집 다니거나 전화나 SNS (페이스북, 트윗터) 등의 도구로 남의 말도 잘하는 자이며 말의 실수가 많은 자이다. 그는 자기가 들은 말을 가감하여 남에게 전하기도 하며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거나 잘못된 해석이나 상상과 추론을 더하여 말을 왜곡시킬 수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말쟁이는 사람들 간에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을 많이 교훈하였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 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6:28,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8:8,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언 26:22도 같음. 야고보서 1:19,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을 간섭하지 말자.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자. 그가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고 보응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또 이성과 양심을 따라 오직 바르게, 선하게,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우리는 말쟁이가 되지 말고 말을 더디 하고 신중히 하자. 우리는 말에 온전한 자가 되고(약 3:2) 말로 남에게 유익과 덕을 끼치는 자가 되자.

21-23절, 다툼, 남의 말, 악한 마음

[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거나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면 불이 더욱 잘 탄다.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말다툼을 더 일으킨다. 잠언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다툼은 몸의 죄성과 세상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 .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야고보서 3:14-15,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하나님의 뜻은 선함과 온유함과 화평이다.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해야 한다. 로마서 12:9-10,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에베소서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디모데전서 3:3,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야고보서 3:17-18,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주로 남의 흠과 부족, 실수와 잘못을 말하는 것, 남을 비난하는 것, 남을 깎아 내리는 것, 수군거리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 말들은, 대체로 확인할 수 없는 말, 불확실하고 헛된 말이 많고 거짓된 말도 많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두루 다니며 남을 비방한다고 책망하였다(렘 9:4).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쓴 편지에서 초대 교회에 유대인들 중에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렸다고 말하였다(딛 1:10-11).

남에 대한 말, 특히 남의 약점을 흉보는 말은 별식 즉 맛있는 특별한 음식 같아서 사람의 기억 속에 잘 기억된다. 이만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나쁜 말은 잊어버릴수록 좋은데 도리어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인격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람과도 멀리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1),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레 19:16)고 명령하셨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마 7:1, 3).

[23절]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온유한’이라는 원어(돌레킴)는 ‘열렬한’이라는 뜻이다(KJV, BDB, NASB, NIV). ‘열렬한 입술’이라는 말은 마음이 없이, 마음과 다르게, 남을 위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듯한 말을 열렬히 하는 입술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부와 아첨이요 속과 겉이 다른 것 즉 외식이다. 사람이 말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지만, 실상 거룩하고 선한 행함이 없다면, 그는 이런 자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土器)와 같다. ‘낮은 은’이라는 원어(케세프 시김)는 ‘은 찌꺼기’를 가리킨다(BDB). 은 찌꺼기를 입힌 토기란 진짜 은그릇이 아니고 은으로 도금한 그릇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렇게 가치가 있지 않다. 외식자의 열심은 무가치하다.

물론 사람에게 말은 중요하다. 자기 의사를 말로 잘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장점이다. 또 사람은 악한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선하지 못하고 악하다면 그는 위선자에 불과하다. 겉보기에는 고상한 것 같으나 실상 천박한 인격에 불과하다. 사람은 외모나 말보다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말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을 보신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의 마음은 본래 심히 부패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다”(렘 17:9).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3-24). 구원은 마음의 거룩한 변화이다.

우리는 다툼을 좋아하지 말고, 위로부터 난, 성령의 지혜를 따라 화평을 도모하자. 또 우리는 남의 말 하기, 즉 남의 흠과 부족을 비방하는 말 하기를 좋아하지 말자. 또 우리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말자. 또 우리는 아름다운 말이나 외모의 치장을 중시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마음을 버리고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자.

24-28절, 미운 감정, 함정을 팜, 거짓말과 아첨

[24-26절] 감정(憾情) 있는 자(소네)[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거짓]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거짓으로] 그 감정[미움]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미워하는 자 곧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거짓을 품는다. 그는 말로는 그럴 듯하게 꾸미고 마음 속에는 악을 품는다. 말로는 악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나 마음으로는 미움과 악심을 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선하고 좋아 보이지만, 그 마음 속에는 미움, 시기, 질투, 중상모략, 교만, 난폭함, 거짓, 탐욕 등 많은 악이 있다. 다윗은, 시편 55편에서,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고 말하고(21절), 시편 62편에서는, “[저희가]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말한다(4절). 우리는 악한 자들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악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들이 거짓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들의 악은 모든 사람 앞에, 공공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은 다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선하고 진실하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으면 즉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뉘우치고 고쳐야 한다.

[27절]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악한 자는 이웃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파고 돌을 굴린다. 이런 악은 사람의 미움과 악의와 이기적 욕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그 악행대로 갚으신다. 남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파는 자는 자신이 거기에 빠질 것이요, 남을 해치려고 돌을 언덕 위로 굴려 올리는 자는 도리어 그 돌에 자신이 치여 다칠 것이다.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이 비슷한 해를 당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께서는 함정은 함정으로, 돌은 돌로 보응하실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이런 진리를 증거한다. 시편 7:15는,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라고 말하며, 시편 9:15-16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한다. 또 시편 10:2는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말하며, 시편 57:6은,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것이다. 시편 23:4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91:1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해하려는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28절] 거짓말하는 자[혀](KJV, NASB, NIV)는 자기의[그것이]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거짓말하는 혀는 그것이 해한 자를 미워한다. 거짓말은 남에게 해를 준다.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이 가득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라고 하셨다(렘 9:3-6, 8).

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다. 로마서 12:9는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혹시 자신에게 손해가 되어도 진실을 말해야 하며 때때로 그에게 충고도 하고 책망도 해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참된 사랑이다.

또 아첨하는 입도 남에게 패망을 일으킨다. 아첨은 상대방의 부족이나 잘못을 부당하게 칭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지만,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상대방을 패망하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자는 결코 아첨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말하기 거북한 때에는 침묵할 수도 있겠으나 필요한 경우는 충고나 책망을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악과 거짓과 위선을 버리자. 또 원수들의 선한 말을 믿지 말자. 우리는 오직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자.

우리는 이웃에게 함정을 파거나 돌을 굴리는 악을 행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살피시고 공의로 보응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그러나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는 말자.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고 아첨도 하지 말자.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답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항상 사랑과 진실을 품고 행하자.

27장: 면책, 충고, 목양

1-3절, 자랑, 칭찬, 분노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통해서도 보고 느끼는 바이다. 세상에는 날마다 질병, 폭력, 살인, 강도, 사기, 교통 사고, 실직, 화재, 홍수, 지진, 해일, 전쟁 등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으니까 살고 있는 것이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전도서 9:12는,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말한다. 재앙은 갑작스럽게 닥친다. 주께서는 한 어리석은 농부가 풍년을 맞아 곡간을 넓히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2:16-20).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미래의 평안을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윗은, “내 시대[시간들]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31:15).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교훈하였다(약 4:14-16).

[2절]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

칭찬은 사람의 덕과 인품, 능력, 행위와 업적을 인정하여 높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자랑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그것은 명예를 구하는 교만한 욕심이다. 잠언 25:27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말할 때, 하늘에서 “느부갓네살 왕아, 나라의 위(位)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는 소리가 있었고 그 일이 이루어졌다(단 4:30-31).

거짓 교사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칭찬하는 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베드로후서 2: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유다서 16, “이 사람들은 . .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지혜자는 그 지혜를, 용사는 그 용맹을,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자(仁慈)와 공의를 세상에 행하는 자이심을 깨달은 것을 자랑하라고 말했다(렘 9:23-24). 주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1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 또 자기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하였다(엡 3:8).

[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함이 없고 그의 진리와 교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자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사리분별력이 없다.

미련한 자는 노하기를 잘한다. 잠언 12:16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람이 쉽게 화를 내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기 쉽다. 또 미련한 자는 모든 일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화를 낸다. 또 그는 절제심이 없다. 그는 자기의 노를 자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보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즉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 분노를 가라앉히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와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하고 법과 경우와 원칙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지혜자는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책망을 들을 때라도 오래 참고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칠 기회로 삼는다. 그러므로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2:16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4:29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야고보서 1:19-20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자. 그것은 헛되고 불신앙적인 자랑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 안에서 그의 뜻만 행하자.

우리는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랑하는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명예를 추구하는 교만한 욕심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자.

우리는 쉽게 노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범사에 오래 참자. 또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고치기를 힘쓰자.

4-7절, 투기, 면책, 배부른 자

[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분노는 상대방이 자기를 해롭게 하였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까닭 없는 분노는 미움에서 생기고 살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까닭 없는 분노를 정죄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전통본문). 요한일서 3:15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다.

투기, 즉 시기, 질투는 분노보다 더 나쁜 것이다. 투기는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해서 생기는 미움의 감정이며 정당성이 없는 경쟁심이다. 그런 것이 왜 더 나쁜가? 첫째, 그 이유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투기는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정당성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여 마침내 그를 살해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둘째, 투기는 대체로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투기하는 자는 미움의 감정을 숨기고 악을 도모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 상대를 미워하고 해치려 한다. 투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다. 요셉의 형들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요셉을 미워하였고 그를 죽이려 하였고 그를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았다.

셋째, 투기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식어진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된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이 망하거나 죽어야 만족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가 그러하였다. 그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도 그러하였다. 그들의 감정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5절]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며, 남이 잘못을 해도 상관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형제를 미워하고 남을 해치기도 할 것이다. 아부하는 것도 참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형제로 회개치 못하게 만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잘못을 오래 참고 그에게 권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 것이다. 특히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면책은 상대의 면전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고 바른 사람이 되게 한다. 책망을 잘 받은 자는 평안과 형통함을 얻을 것이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것이 매우 악한 일이라고 면책했을 때 다윗은 즉시 회개하였다(삼하 12:7-13). 또 바울은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면책하였다(갈 2:11).

그러나 면책은 어려운 일이다. 면책하는 자는 상대방에게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는데, 그 일로 인해 그는 옥에 갇혔고 마침내 목베임을 당하였다(마 14:1-12).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바른 말씀을 전한 까닭에 핍박을 받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마 21:35-36; 23:37).

면책을 할 때 주의할 점도 있다. 우리는 면책을 할 때 겸손과 온유로 해야 하며, 또 너무 감정적이지 않게 상대방을 정말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6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친구’는 ‘좋아하는 자’라는 뜻이다. ‘통책’이라는 원어(페차)는 ‘상처’라는 뜻이다(BDB, KJV, NASB). 친구가 책망함으로 마음에 받은 상처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이다. 사람은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할 수 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며 큰 사랑이고, 또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잠언 25:12는,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한다. 또 전도서 7:5는,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의인의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한다. 시편 141:5는,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원수는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입맞추는 문안 인사뿐 아니라, 칭찬의 말, 아첨의 말도 하며 또 그런 일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은 좋지 않다. 악인은 진리를 따라, 혹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이익을 따라 언제나 변한다. 잠언 26:24-25는, “감정 있는 자[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고 말한다. 가룟 유다는 3년이나 주님을 따랐으나 어느날 은 30에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께서 잡히시던 밤 그를 잡으려 파송된 무리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와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어 그가 예수임을 알려주었다(마 26:47-49).

[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원문에는 ‘자(者)’라는 말이 ‘영혼’이라는 단어(네페쉬)이다. 육신의 양식도 그러하지만, 영혼의 양식도 그러하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한다. 꿀은 가장 단 음식이지만, 배가 부른 자는 그것도 별로 먹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반찬 투정만 할 것이다. 그러나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은 몇 끼만 굶기면 잘 먹을 것이다. 장염으로 몇 끼 굶고 링거 주사만 맞던 아이가 죽을 먹도록 허락되니까 얼마나 잘 먹는지, 자기 것을 다 먹고 동생 것까지 먹으려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논산훈련소의 훈련병들에게 밥은 꿀맛이다. 반찬이 좋아서가 아니고 고된 훈련 후 배가 고파서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탈출하고 남한에 들어온 자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그들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심지어 쥐도 잡아먹고 지렁이도 말려서 먹었다고 한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은 부족한 설교자의 설교라도 비평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달게 듣는다. 또 사모하는 자마다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잠언 2:4-5,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태복음 5:3, 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분은 잔인하고 노(怒)는 홍수 같으나, 시기와 질투는 그것보다 더 심하다. 우리는 분노를 자제해야 하고 그래야 좋은 인격이 된다. 우리는 특히 시기를 버리자. 시기는 큰 죄악이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고전 13:4).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또 친구의 통책(痛責)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권면하되, 필요한 경우 사랑과 온유의 마음으로 책망도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런 책망을 싫어하지 말고 잘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좋은 친구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우리는 영적으로 배부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와 그의 은혜와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자.

8-10절, 안정, 충고, 이웃 사랑

[8절] 본향(메코모)[그의 장소(KJV), 그의 거처(BDB)]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새의 보금자리는 새 집인데, 거기에 어미새가 있고 먹을것이 있고 잠자리가 있고 비교적 안전함이 있는 집을 가리킨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면 떠돌이새가 되고 먹을것이 부족하고 어미새의 보호가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사나운 새나 짐승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다.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이 그와 같다. ‘본향’이라는 원어는 ‘그의 장소,’ ‘그의 거처,’ ‘그의 집’(NASB, NIV)이라는 뜻이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집을 떠나면 모든 게 불편하며 고생이다. 고향을 떠나면 위험하며 불편하다. 조국을 떠나 해외 이민을 가면 외롭고 서러울 때가 많다. 이와 같이 교인이 본 교회를 떠나면 평안치 못하고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마귀의 시험과 죄에 빠지기 쉽다. 참된 목사와 진실하고 좋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복되다.

사람이 왜 집을 떠나는가? 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둘째 아들은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갔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의 제자들의 무리를 떠나갔다.

세상의 욕심을 가진 자들이나 혹은 명예심이나 직분에 대한 욕심이 충족되지 않는 자들은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참된 믿음이 없거나 마귀의 시험에 빠진 자들이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를 욕하며 떠나간다. 요한일서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다 범죄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영적 낭패이다.

[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그의 친구의 즐거움은 진심의 충고로부터 나오느니라](KJV, NIV).

기름과 향은 향유와 향품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냄새가 좋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좋은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지만, 나쁜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며 심한 경우는 구토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답다. ‘충성된 권고’라는 원어(메아찻 나페쉬)는 ‘영혼의 충고 즉 진심의 충고로부터’라는 뜻이다.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충고받는 자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 때로는 권면과 책망을 하는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상대방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피차 권면하라고 교훈한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2-13,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친구나 이웃과의 좋은 관계에서 살아야 된다. 친구나 이웃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또는 책망할 수 있으나, 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본문은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버린다는 말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하고 그를 배신하고 비방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9:18).

본문은 또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교훈한다. 환난 날은 경제적 큰 곤란을 당했거나 가정에 큰 걱정거리가 생겼을 경우 등을 가리킬 것이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그에게 누를 끼치고 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또 본문은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고 말한다. 가까운 이웃이란 거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까운 이웃을 가리킬 것이다. 특히 신앙 안에서의 친구는 가족관계보다 더 가깝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가 원수처럼 여기는 다윗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서 진실한 신앙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귀한 친구이시다. 또 예수님 믿는 교우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주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또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육의 안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안정된 가정과 국가가 있고, 특히 바른 교훈과 사랑이 있는 교회가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친구에게 진심의 충고를 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하고 책망도 하여 그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되자.

우리는 이웃에게 무관심하거나 배신하거나 비난하거나 악을 행치 말고, 주 안에서 서로 돌아보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좋은 친구가 되자.

11-16절, 지혜, 재앙, 보증, 축복, 다툼

[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매우 중요한 소원은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 즉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 지혜를 얻는 것이 복이다. 잠언 3:13-14,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언 4:7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이것은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다 적용되는 진리이다.

본문은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말한다.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복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은 기쁠 수밖에 없다. 사도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말했다(요삼 4).

본문은 또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고 말한다. ‘나를 비방하는 자’는 문맥상 자녀 문제로 비방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 교육을 잘못시켰다거나 자녀 양육의 의무를 다 못했다거나 자녀에게 좋은 본을 보이지 못했다고 비방하든지,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비방하는 것 등을 말한다.

본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는 말은 우리의 자녀가 지혜를 얻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고 선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함께하심과 복을 얻음을 우리가 증거함으로써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겠다는 뜻이라고 본다.

[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잠언 22:3도 거의 비슷하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 ‘재앙’은 사나운 짐승이나 무서운 전염병이나 폭도들이나 핍박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여러 해 동안 도망 다녔다. 선지자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왕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으로 도피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피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사도 바울도 때때로 핍박을 인해 도피했다. 그가 처음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를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을 때,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다(행 9:23-25).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재앙을 보고도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그러나 신자가 진리를 위해, 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순교를 각오하며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전도의 일이나 기타 하나님의 일들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기를 중단치 않았다(행 5:41-42). 핍박을 두려워해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겁하고 불충성된 자가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4:5,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

잠언 20:16도 거의 같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는 ‘낯선 자, 모르는 자, 외인’을 가리키며, ‘외인들’이라는 원어(노크리야)는 ‘낯선 여자, 즉 음녀’를 가리킨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여자 혹은 음녀를 위해 보증이 되면, 그 옷을 빼앗기고 그 몸도 볼모 잡힌다, 즉 상대방의 종이 된다고 말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보증은 우리에게 육체적, 물질적 큰 손실과 낭패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것도 지혜의 조언이다.

성경은 우리가 남의 빚의 보증이 되는 일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며 금한다. 잠언 6: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맹세하며]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그러므로 구제할 마음과 힘이 있지 않다면, 또 보증한 금액을 갚을 능력이 있지 않다면, 남의 보증이 되는 것은, 선한 행동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영웅심에 불과할 것이다.

[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이른 아침에 혹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큰 소리로 그의 이웃 혹은 그의 친구(레아)(KJV, NASB)를 축복하는 것은 진심의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저주처럼 여겨진다. 참된 사랑과 축복은 무례하게 표현되지 않고 예절 있게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그를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다(사 29:13). 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고전 13:5) 진심의 말과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요일 3:18).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축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해 한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119:147,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예수께서는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막 1:35). 그러나 반대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다윗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불러 그를 붙들고 입을 맞추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그것은 후에 그가 아버지를 대항해 반역을 일으키려는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최후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창세기 17: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했는지 아니면 악하게 행했는지 평가하며 기록하였다. 우리는 사람 앞에 살지 말고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크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15-16절]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문은 다투는 아내에 대해 말한다. 아내는 보통 불만 때문에 다투며 불만은 욕심에서 생긴다. 욕심이 있으면 자족함이 없고 불만하고 다투게 된다. 사람은 시기, 질투, 교만, 남을 멸시함 때문에도 다투는데, 이것도 이기심이나 명예를 구하는 욕심이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단장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을 것이다.

여인의 다툼은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 그 다툼은 계속적이고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바람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우리가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고 그것을 통제하기 어렵듯이, 여인의 다툼도 그러하다. 또 그것은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과 같다.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면 다 새어나가듯이 다투는 여인을 제재하거나 막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면 다투는 여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심령의 변화와, 성품과 습관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불만과 욕심을 버리고 시기 질투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사랑으로 단장하기 전에는 다툼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동과 간섭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것밖에 없다. 그러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별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언의 몇 구절은,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이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잠 21:9, 19; 25:24).

우리의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부모의 마음은 기쁨을 얻을 것이며 비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른이이든지 아이이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얻자.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에게 주신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우리는 재앙을 피해야 할 때는 피하자. 그러나 진리와 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는 핍박을 각오하며 순교의 정신으로 나아가자.

다른 사람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육신적, 경제적 큰 해를 입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 보증을 서지 말자. 특히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위해 또 갚을 힘도 없으면서 보증을 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자.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된다. 우리는 경박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자. 또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자.

다투는 아내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며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다. 우리는 다투는 인격이 되지 말자. 우리는 부득이 진리의 싸움을 싸울 때가 있겠으나, 평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살아가자.

17-19절, 교제의 유익, 충성, 마음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은 철을 날카롭게 한다. 쇠망치는 칼날을 때려 날카롭게 만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얼굴로 나타난다. 사람은 친구와의 교제와 대화를 통하여 그의 생각이나 지혜나 식견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더 나아지며 또 그의 침체된 마음이나 둔해지고 비활동적이었던 마음이 힘을 얻고 활동적이게 될 수 있다. 본문은 성도의 교제의 유익을 말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의 교제의 유익에 대해 여러 구절에서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전도서 4:10- 12,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동역자 빌레몬을 통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고(몬 7),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를 통해 위로를 얻었고(골 4:11), 오네시보로도 그를 자주 유쾌하게 하였다(딤후 1:16).

[18절]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무화과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영양공급을 잘 받도록 물과 비료를 주고 가지를 적절히 쳐주고 또 병충해에 걸리지 않도록 벌레를 잡고 필요하면 약을 치고 또 도적이나 개구쟁이 아이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을 것이다. 농부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그는 수고의 대가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을 것이다. ‘시종한다’는 말은 ‘시중들다, 수종들다, 수행하다’는 뜻이다. 주인 곁에서 그를 보호하고 충실히, 지혜롭게, 부지런하게 그를 돕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런 종은 영화를 얻을 것이다. 주인은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고 그를 존중하고 그에게 좋은 상을 주고 또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을 수종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노아처럼(창 6:22), 아브라함처럼(창 22:12), 모세처럼(출 40:16), 여호수아와 갈렙처럼(민 14:24)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존중하시고 귀한 직분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더욱 많이 내려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1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이단과 불의]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증거하였다.

[19절]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원문을 직역하면, “물에 비친 얼굴이 자기 얼굴이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속하느니라”이다. 영어성경들은 ‘속한다’는 말(라)을 ‘비추이다’(reflect)라고 번역했다(NASB, NIV). 물이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우리 자신의 얼굴이지 남의 얼굴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의 마음이며,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됨됨이, 곧 사람의 인격은 그의 마음에 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인격을 드러내며 증거한다. 잠언 23:7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됨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을 가진 자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온 인류는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출생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마음에서 온갖 죄악들이 나온다(마 15:19). 그러므로 심령의 변화가 필요하다. 구원은 심령의 변화이다. 중생(重生)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2-24). 성화는 심령의 계속적 변화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날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롬 12:2). 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잠 4:23).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성도의 교제는 많은 유익이 있다. 물론 불평이나 하고 남을 험담하는 악한 교제도 있으나, 서로 권면하고 위로 격려하는 참 교제는 유익하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가 그 열매를 먹듯이, 자기 주인을 수행하는 자는 영광을 얻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고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순종함으로써 그의 영광에 참여하자.

물에 비친 얼굴이 자기 얼굴이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속한다. 마음은 곧 우리의 인격이다. 우리는 본래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구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잘 지키자.

20-22절, 눈의 만족, 칭찬, 미련한 자

[20절] 음부(陰府, 스올)와 유명(幽冥, destruction)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음부’(陰府)라는 원어(스올)는 ‘무덤’이나 ‘지옥’을 가리킨다. ‘유명’(幽冥)이라는 원어(아밧도; 아밧돈과 같은 말)는 ‘멸망 혹은 멸망의 장소’라는 뜻이다(BDB). 무덤과 지옥은 만족함이 없다. 아담 이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묻혔지만 무덤은 여전히 넉넉하고 지옥도 그러하다. 그것들의 수용량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의 눈은 만족이 없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욕심을 반영한다. 전도서 1:8은,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요한일서 2:16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즉 눈으로 보는 욕심]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돈으로 사는 좋은 것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금괘, 금은패물들, 다이아 반지, 진주목걸이, 육신의 쾌락, 여색(女色) 등이 그러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육신의 눈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9:25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를 포함한다(갈 5:23). 또 우리에게 자족함이 필요하다. 잠언 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6:8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증거하였다(빌 4:11).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도가니(crucible)와 풀무(furnace)는 원석을 제련하는 도구이다. 그것은 금과 은을 찌끼와 분리시켜 순금과 순은을 만든다. 이와 같이,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어떤 사람은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높인다. 그는 하나님께 돌릴 감사와 영광을 가로채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 왕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추켜세울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주의 사자가 곧 쳐서 벌레가 먹어 죽었다(행 12:22-23). 그러나 어떤 사람은 칭찬받을 때 자신의 부족과 연약한 점들을 먼저 생각하고 또 그 칭찬을 사양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만 돌린다.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고(고전 15:10),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하였다(엡 3:8).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시련하신다. 잠언 17:3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평안은 사람을 해이하고 탈선하게 만들고,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히 순종하게 만든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롬 5:3-4). 하나님께서는 특히 주의 종들에게 많은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단련시키고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 없이 다니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고생을 당하였고(고전 4:11-13), 또 ‘육체의 가시’를 갖고 있었다(고후 12:7). 이와 같이 칭찬도 사람을 단련시킨다.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에서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가리킨다. 곡물은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껍데기인 겨와 알갱이가 분리된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절구에 찧듯이 고난을 당해도 잘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는다.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사람은 심히 부패되어 있어서 그 죄성은 잘 제거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범죄와 실패의 역사이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러하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반복해서 실패하였다(시 78:17, 40-4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그의 기적을 보고도 열 번이나 그를 시험하였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민 14:22).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를 증거한다. 그 책에는 “또” “다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3:12; 4:1; 6:1; 10:6; 13: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미련한 자의 미련을 벗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성령의 중생(重生)시키시는 역사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음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단번에 죄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 속에 오신 성령의 도우심, 즉 그의 감동과 격려, 책망과 위로를 통해 조금씩 거룩해지며 죄성(罪性)을 극복한다.

사람이 범죄한 이후, 무덤은 끝없이 사람을 수용하며 지옥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사람의 눈과 마음의 욕심은 만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가 필요하며, 또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 칭찬은 사람은 교만케 한다. 우리는 남을 칭찬하는 것을 매우 조심하고, 우리 자신도 칭찬받기를 좋아하지 말고, 또 칭찬받을 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자.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죄성과 미련은 참으로 뿌리깊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며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자.

23-27절, 생업에의 근면과 유익

[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농사와 목축은 아담 때로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일이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쳤다. 양떼와 소떼를 치는 목축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적 생업이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에게 자기들의 생업이 목축이라고 소개하였다(창 46:32). 네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은 각자 자신의 생업과 직업에 충실하라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은 자기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사람이 땀 흘려 일하며 자기의 생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야곱은 20년 동안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칠 때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말했는데(창 31:38-40),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된다. 바울도 이런 점에서 본이 되었는데,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했다(행 20:34-35).

게으른 것은 악한 일이다.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했다. 잠언 6:6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했다. 신약성경도 게으르지 말고 근면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했고(살전 4:11), 또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교훈하였다(살후 3:10-12). 또 그는 에베소서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교훈했다(엡 4:28).

우리는 세상의 일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이나 봉사생활에 있어서도 부지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우리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이나 가정적으로 기도하는 일이나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 드리는 일이나 전도와 성경공부와 찬양과 봉사 등의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한다.

[24절]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잠언은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했다(잠 23:5). 사업가는 사기나 사고로 파산하기도 한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도 그러하다. 우리는 한때 권력과 영광을 누렸던 자들이 후에 감옥에 들어가고 수치를 당하는 일을 보아왔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되다(전 1:2).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이사야서를 인용했다(벧전 1:24). 또 사람이 놀고 먹기나 하고 게으르고 불성실하면 이 세상에서도 재물이 줄어들고 가난과 궁핍이 찾아오며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25절]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사람이 그것을 다스리며 누리게 하셨다. 땅의 풀들과 채소들, 나무 열매들, 물고기들과 가축들은 다 사람에게 먹을 양식이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그들이 기르는 소와 양의 먹이를 준비할 수 있고 농사와 목축을 통해 자신들을 위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게으르면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없고 의식주에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한다.

[26-27절]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사람이 목축을 잘 하면 거기에서 옷도 생기고 밭을 사는 값도 생긴다. 생업에 부지런한 것은 각자에게 유익이 된다. 자기의 직업에 부지런한 사람은 먹을 양식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입을 옷이나 농사지을 땅이나 거처할 집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게으름은 가난의 원인이지만, 근면은 물질적 안정과 부요의 원인이 된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과 환경적 평안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병을 주시고 농작물에게 가뭄이나 홍수를 주시고 가축들에게 유행병을 주시면 모든 수고가 복이 되지 못하고 불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물질적 복을 주실 때에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을 전제하고, 그럴 때 물질적 유여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잠언 21:5도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각자의 생업에 마음을 두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게 일하자. 게으르면서 음식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 물질적 소득과 여유를 얻고 그것으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땅의 헛된 일보다 천국의 영원한 일을 많이 하는 자가 되자.

28장: 의인, 악인 칭찬, 경책, 구제

1-4절, 담대함, 학대, 악인 칭찬

[1절]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선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그것은 그의 양심의 불안과 가책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이다. 또 악인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그들을 치셔서 그들이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그들을 미워하는 자가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6:17).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사 48:22). 악인에게는 마음의 평안도, 몸의 평안도, 환경적 평안도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은 일리가 있다. 도둑은 밤에 편히 잠을 못 잔다. 악인은 늘 불안한 법이다.

그러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그것은 양심의 평안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도우시고 지키시고 갚아주실 것을 믿고 또 그것을 체험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시 3:5-6). 그래서 주의 사도들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전도했고 순교의 자리에도 나아갔다(행 4-5장). 우리가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함을 얻는다(요일 3:21).

[2절]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나라에 죄가 있으면 주관자, 즉 교만하여 대장 노릇하려는 자들, 소위 뱃사공이 많아진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 속에는 교만이 있고 거기에서 불순종의 죄가 나오며 그 결과는 무질서와 분쟁과 분열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0-21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의가 있으면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계명에 순종하며 사회의 질서를 지킨다. 사람이 부족하고 불완전해서 갈등이 있기도 하나 토론하고 논쟁한 후에 평안을 찾을 것이다(행 15장, 예루살렘 총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이다(갈 5:22-23).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단합해야 한다(엡 4:1-3).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유순하다(약 3:17). 우리는 다 이런 지혜와 덕을 사모해야 한다.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함으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이다. 이런 사람이 사회의 참 지도자이며 또 교회에 합당한 직분자이다. 그런 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 나라는 질서가 유지되고 의의 길로 진행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형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29:14는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한다.

[3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가난한 자는 보통 자신이 가난해 보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사정을 더 잘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도 가난한 자이면서도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인정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인격이 매우 나쁜 사람이며 아마 인격 형성이 매우 잘못된 사람이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와 같다.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것은 폭우를 동반한다. 그런 폭풍우가 지나가면 농작물이나 집들이 크게 손상된다.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학대하다니 얼마나 나쁜 마음인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선하고 착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한다. 그러므로 잠언 12:10은,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다.

의인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는다. 의인은 도리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선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자들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므로 잠언 14:31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하고, 잠언 29:7은,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한다.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율법을 버린 자는 율법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중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는 자이며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런 자는 악인을 칭찬한다. 악인은 율법을 어기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는 자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한 자를 칭찬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일인데, 율법을 버린 자는 그를 칭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2에서 “저희가 이 같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고 말했다(렘 23: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 평안을 선포하였고,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렘 23:17; 겔 13:22).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대적한다’는 원어(이스가루)는 ‘다툰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존중하고 지키는 자이다. 그는 악인과 동감하지 않고 악을 칭찬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의견 충돌이 있고 그와 다툰다. 그는 악인에게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것이며 마침내 그와의 교제를 끊을 것이다.

우리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이 되자.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의와 선을 행하자.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래 지속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를 얻어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자.

우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인정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선대하자.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고 악인을 칭찬하지 말자. 악인에게 권면하고 책망하고 필요할 때 교제를 끊어야 한다.

5-8절, 공의, 온전함, 지혜, 고리 대금

[5절]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게 사는 자이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한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는 공의를 저버린 자이므로 심령이 어두워 공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깨닫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것,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119:18).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자신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7:17). 또 그는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 또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 14:26; 16:13). 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27에서, 모든 신자 속에 계신 기름부음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했다.

실상,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시편 34:8, 10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시편 107:9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6절]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히’라는 원어(베숨모)는 ‘온전하게, 순전하게, 흠 없이’라는 뜻이다. 온전하게, 흠 없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정직하게, 도덕적으로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곡히 행하는’이라는 원어(익케쉬)는 ‘바른 길로 가지 않고 비뚤어지게 행하는, 사악하게 행하는’이라는 뜻이다.

흠 없이, 온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악하게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에 있지 않다(눅 12:15).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던 부자는 거지 나사로보다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죽어 지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멸시하고 압제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7).

사람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질적 부요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사랑이다. 또 사람은 물질에 관해서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8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의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백성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16-33).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 지침은 오직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절]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율법은 사람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다. 그것을 지킨다는 말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것을 보수하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다. ‘지혜롭다’는 원어(메빈)는 ‘명철하다, 총명하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란 하나님의 뜻과 인생의 정로(正路)를 깨닫고 분별하며, 또 평강과 행복의 길, 불행과 멸망을 피하는 길을 깨닫고 분별하는 자이다.

‘탐식자’라는 원어(졸렐림)는 ‘탐식자, 낭비하는 자, 방탕한 자’라는 뜻이다. 돈을 벌 줄 모르고 돈을 쓰기만 잘하는 자, 사치하고 연락하며 허랑방탕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들과 사귀는 자는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5:33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한다. 탐식자와 사귀는 자는 그의 아버지에게 수치와 마음의 고통을 드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탐식자 친구 때문에 악한 영향을 받아 악해져 탐식자가 되고 낭비하는 자가 되고 방탕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근면하게 사는 것이다. 근면은 사람의 정로(正路)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명하셨다(출 20:9). 사도 바울도 신자들에게 “종용하여[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했다(살후 3:10). 성도는 또한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음식도 먹을 만큼 만들어 먹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본문은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치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중한 변리로’라는 원어(베네쉐크 우베사르비스)는 ‘고리대금과 변리로’라는 뜻이다(BDB, KJV). 고리대금은 보통 가난한 자들을 상대하여 돈을 빌려주고 너무 많은 이자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재산을 늘이는 정당한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리대금을 금하셨다. 레위기 25:36-37, “너는 그에게 이식[고리대금](KJV)을 취하지 말라,” “너는 그에게 이식[고리대금]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빌려주지] 말라.” 재산을 늘이는 정당한 방식은 각자의 직업에서 근면하게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고리대금으로 자기의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인들에게 주신다. 욥은, “[악인이]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욥 27:16-17). 잠언 13:22도, “선인(善人)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고 말하였다. 악인들은 망할 것이며 그 재산은 결국 의인들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성도들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신명기 15장은,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에 대해 반드시 손을 펴서 그의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그에게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7-11절). 에베소서 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고 그 공의를 마음에 새기고 힘써 행하는 자가 되자.

온전하게, 흠 없이 행하는 가난한 자는 악하게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 우리는 악하게 행하며 물질적 부요를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정직하게, 선하게, 온전하게, 흠 없이 살아가자.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또 탐식하거나 낭비하거나 방탕한 자의 친구가 되지 말고, 근면하고 절제 있게 살아가자.

우리는 고리대금으로 재산을 늘이는 자가 되지 말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정당하게 돈을 벌고 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가 되자.

9-12절, 율법 청종, 온전함, 명철, 의인

[9절]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롬 10:17)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데, 그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니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겠는가?

사람이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잠언 1:24-28은,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며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잠언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사무엘상 15:22-23,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주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마 11:15; 13:9, 43; 눅 8:8; 14:35).

[10절]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도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가 하는 행위와 같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공의의 징벌과 보응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공의의 벌로 갚으신다.

본문은 “[그러나]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성실한 자’라는 원어(테미밈 םי������י������������)는 ‘완전한 자들, 온전한 자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의 뜻을 순종하며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남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그들은 결코 남을 악한 길로 이끌지 않고 오직 선한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고(창 17:1)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노아는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순전하고[완전하고] 정직한 자이었다(욥 1:1).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인격적 온전함이다.

성실한 자는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복 주신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道)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욥이 그러하였다.

[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 사람은 돈이 많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주위에 아첨하는 친구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일을 거든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부자]를 살펴 아느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가 다 명철한 자는 아니다. 가난해도 어리석은 자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많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다고 말했다(약 2:5).

명철한 가난한 자는 부자를 살펴보고 그가 물질적 부요가 전부인 줄 알고 교만하고 허무한 자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모든 육체가 풀이요 그의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사 40:6).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 외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전 1: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실상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요 6:27).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 소망해야 한다. 잠언 23:4-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했고, 디모데전서 6:17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교훈한다.

[12절] 의인이 득의(得意)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득의하다’는 원어(알라츠)는 ‘(뜻을 이루어) 기뻐하다’는 뜻이다(BDB, KJV).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교훈을 행하는 자마다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인들이 잘 되고 높임을 받고 다스리면 그 나라와 백성에게 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경건하고 정직한 다윗이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에는 큰 영광이 있었다. 에스더서에 보면, 경건하고 의로운 모르드개가 악한 하만을 대신해 높임을 받았을 때, 수산성은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였고 유다인들에게는 영광과 기쁨이 있었다(에 8:15-16).

그러나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숨는다. 잠언 28:28도,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고 말한다. ‘일어난다’는 말은 세력을 잡는 것을 뜻한다. 악인이 세력을 잡을 때 아첨꾼이나 기회주의자들은 나설 것이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는다. 그것은 악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게, 합리적이지 않게, 자기 이권을 따라, 자기 감정을 따라 말하며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 시대는 어두운 시대이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모친 악한 여자 아달랴는 그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왕의 씨들을 다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다. 그때에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고모의 도움으로 성전에서 숨기어 자랐다. 독재 권력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같은 이가 통치하면 선한 사람들은 숨을 것이다.

율법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하다. 우리는 율법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 책망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남에게 악을 행치 말고 오직 그를 선한 길로만 인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또 돈이 많아도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의 계명만 힘써 행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며, 또 의인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13-16절, 자복, 경외, 악한 관원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다. 죄를 짓고도 안 지었다고 속여 말하며 자신의 범죄를 감추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은밀한 일을 다 보시고 심판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전 12:14). 사람은 죄를 지으면 결코 복되지 않다. 여리고 성 정복 시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kg 정도와 600g쯤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그의 장막의 땅 속에 감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아간과 그 가족은 처형을 당케 하셨다(수 7장).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실제로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 단지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자가 있고 회개치 않고 용서를 받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죄의 용서와 기도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았을 때 즉시 회개하였고 죄의 용서를 받았다(삼하 12:7, 13). 또 그는 시편 32편에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말하였다(시 32:3, 5). 또 삭개오도 회개할 때 구원을 받았고(눅 19:8-9), 십자가상의 한 강도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때 그 날 낙원에 들어감을 얻었다(눅 23:41-42). 요한일서 1:9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14절]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항상 경외하는 자 곧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되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나 들을 때에 겸손과 두려움으로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간혹이나 주일에만이 아니고 날마다, 시간마다,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렸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지으려고 애썼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여전히 날마다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다니엘도 이방 나라에서 왕의 인정과 높임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진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란 마음이 높고 닫혀 있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자이다. 그는 재앙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에 빠지게 하셔서 그 높은 마음을 낮추시고 그 완고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롯의 사위들은 경건한 장인 가까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결국 소돔성 사람들과 함께 유황불비에 멸망을 당하였고, 예루살렘 거민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다 멸망을 당하였다.

[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주린’이라는 원어(쇼케크)는 ‘배회하는’(BDB, KJV), ‘돌진하는’(rushing)(NASB)이라는 뜻이다. 부르짖는 사자나 먹이를 덮치려고 배회하거나 돌진하는 곰은 참으로 무서운 짐승이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권력자와 관리들이 그와 같다.

선한 통치자는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그들을 공평하게 다스리겠지만, 악한 통치자는 부자에게는 아첨하고 너그럽게 대하나 가난한 자는 무시하고 압제하고 강탈하고 억울하게 만들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만드셨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신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다 보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악한 통치자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부자들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이시요 보호자이시다. 시편 68:5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눈물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며, 압제하는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했던 아합을 전쟁에서 죽게 하셨고 그 아들 70명을 하루아침에 몰살(沒殺)케 하셨다.

[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무지한 치리자’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직무와 또 자신의 부족을 알지 못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는 선함과 친절, 긍휼과 인정이 없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권위만 내세우고 자기 감정대로 행하며 남을 부당히 취급하며 압제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또 사랑은 온유하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고전 13:4-5).

‘탐욕’이라는 원어(베차)는 ‘불의한 이익’이라는 뜻이다. 탐심에서 다툼이 생긴다. 우리는 탐욕을 미워해야 하고 정당한 소득으로 살며 자족해야 한다. 이런 자는 불만이 없고 항상 절제하며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했다(행 24:25). 권세자는 탐욕을 품고 사치하는 삶을 살기 쉽기 때문에 그런 주제를 강조했을 것이다.

‘장수한다’는 말은 ‘그의 날들을 연장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심령에 평안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탐욕은 불만을 낳으나 자족함은 감사와 평안을 낳을 것이다. 자족하며 사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도 몸의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그런 통치자의 나라는 평안하며 그의 통치 기간도 오랠 것이다.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29:14는,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한다. 또 그런 경건한 의인들은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기려 하지 말고 자복하며 버리자. 열심히 회개하자. 몸이 더러워지면 씻을 줄 알면서 더러운 죄는 왜 회개치 않으랴!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말씀을 힘써 행하자.

우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압제하는 악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인자하게 대하며 특히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우리는 무지한 치리자처럼 포학하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고, 선함과 친절, 자족과 절제로, 또 감사함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복된 삶이다.

17-20절, 피흘림, 온전함, 토지 경작, 충성

[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를 정죄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며 하나님의 인격적, 도덕적 형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살인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이며 그의 가장 존귀한 창조물을 짓밟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살인 자체뿐 아니라, 마음의 미움, 시기와 질투, 입술의 독한 말, 거짓된 비방, 중상모략 등도 심히 악한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살인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하였다(요일 3:15).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한다(KJV, 한글개역). 이 번역은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그런 자는] 죽을 때까지 도피자가 되리라”고 번역했다(NASB, NIV). 살인자는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악을 보복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를 막지 말지니라”고 말한다(KJV, 한글개역). ‘막는다’는 원어(타마크)는 ‘붙들다’(grasp)(BDB, KB), ‘지지하다’(support) (NASB, NIV)는 뜻을 가진 말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반드시 임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전에도 그의 공의를 드러내시며 악의 확산을 막으시기 때문이다.

[18절]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성실히’라는 원어(타밈)는 ‘온전하게, 정직하게(uprightly) (KJV), 흠 없게(NASB, NIV)’라는 뜻이다. 성실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경건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전한 자이었다(욥 1:1).

성실히 행하는 자, 즉 온전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은 특히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즉 질병이나 궁핍이나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선한 인도하심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힘과 지혜,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며 원수들의 공격이나 예기치 못한 위험한 일을 막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질 것이다. 사곡히 행하는 것은 항상 부정적이고 비뚤어지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성격과 인격의 결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오랫동안 그냥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곧, 머잖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순수하게, 순진하게, 단순하게, 무슨 일이나 가급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조심하고 살피고 시험하고 확인해보아야 하며 그것이 지혜이지만, 그러나 너무 부정적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편 32:2는, “마음에 간사(奸詐)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나다나엘에 대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좋게 평가하셨다(요 1:47).

[19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잠언 12:11에도 비슷하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수고를 하는 자, 즉 자기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먹을것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 거둘 것이다. 많이 수고하면 수확이 많을 것이고 적게 수고하면 수확이 적을 것이다. 시편 128:1-2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복은 근면한 자에게 주어진다.

사람이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사람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었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출 20:9).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11은,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을 것이다. ‘방탕한 것’이라는 원어(레킴)는 ‘헛된 것들’(BDB, NASB), ‘허랑방탕한 것들’을 가리킨다(삿 9:4). 방탕을 좇는 자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헛된 것들을 구하며 방탕하게 사는 자이다. 그런 자는 크게 궁핍할 것이다. 허랑방탕하여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탕진하였던 탕자는 흉년이 오자 돼지 쥐엄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졌었다(눅 15:13).

[20절]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충성된 자’는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하고 거짓이 없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한 자, 진실하고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런 자를 장려한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실 것이다. 그는 심령의 평안과 기쁨, 몸의 건강, 물질의 여유, 아내와 자녀들 등 가족의 복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바이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읍에서와 들에서의 복, 자녀의 복, 토지 소산의 복, 우양(牛羊)의 복 즉 사업의 복, 떡반죽 그릇의 복 즉 음식의 복, 또 들어와도 받고 나가도 받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6).

그러나 속히 부유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짧은 시간에 부자 되려고 하는 자이다. 사람이 짧은 시간에 부자가 되려 하기 때문에, 부정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돈을 모으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명 순종의 의(義)보다 이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원하는 욕심 때문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형벌을 면하다’는 원어(닉카)는 ‘깨끗하다, 죄 없다, 형벌을 면하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정하신 의로운 생활규칙인 계명을 어기는 자마다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정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악을 행치 말고, 남을 미워하지도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오직 의와 선만 행하자.

우리는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너무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게 보지 말고, 가급적 순진하게, 또 정직하고 온전하게 생각하며 말하며 행동하자.

우리는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처럼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놀고 먹고 즐기거나 헛된 것들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정당하고 불법한 방법으로 속히 부자 되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음과 순종과 의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24절, 불공정, 욕심, 경책, 도적질

[21절]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사람의 낯을 보아준다는 말은 상대의 얼굴 때문에 공정하지 않게 판단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무슨 일이나 바르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의(義)는 의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하고 악은 악이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라”고 말씀하셨다(레 19:15). 잠언의 여러 구절들은 공의로운 판단을 교훈한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4:23,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유다 왕 아사는 모친이 우상숭배를 하므로 징벌하여 태후의 위(位)를 폐하기까지 했다(왕상 15:13). 그것은 의로운 일이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는 원문은 “그러나 사람은 한 조각 떡 때문에 범법하는도다”(NIV)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말씀은 사람이 작은 이익 때문에 공정치 않은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판사가 권력자의 압력이나 이권 제안이나 부자들의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의 이익을 초월해야 하고 항상 공명정대하게 살아야 한다.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한 것이 낫다(잠 16:8).

[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악한 눈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자의 눈이다. 그런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 그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려는 욕심을 가진 자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잠언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한다. 왜 악한 눈이 있는 자에게 빈궁이 임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 악한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대비치 못하다가 큰 낭패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불의하고 거짓되게 얻은 재물은 그에게 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화가 된다.

선악의 문제는 결국, 눈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지식의 문제요 가치관의 문제이다. 우리는 선한 마음과 선한 눈, 즉 바른 지식과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마태복음 6:19-34에 보면, 주께서는 몇 가지 요점들을 교훈하셨다. (1)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2)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4) 탐심은 눈을 어둡게 한다. (5) 사람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6) 음식과 옷을 염려하지 말라. (7)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23절]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떠도는 풍문과 추측으로가 아니고, 사실에 근거하고 성경적, 이성적 판단으로 상대의 부족이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은 그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책망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책망을 듣는 자는 당장에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만, 책망은 결과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적받고 책망받는 내용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지고 자신에게 부족과 잘못이 있다고 깨달으면 고치게 될 것이다. 친구의 책망은 자신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상대방을 책망하는 것은 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 듣기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23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교훈하며,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고, 또 잠언 19:20은,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 혀로 아첨하는 말은 당장에는 듣기 좋고 기분이 좋을 수 있으나, 우리의 잘못이나 부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도리어 우리가 옳다고 착각에 빠지게 만들며 우리로 교만케 만든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나라의 간신배들은 아첨하는 말을 잘한 자들이다. 그래서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를 책망하는 자는 우리의 좋은 친구일 것이다.

[24절]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도적질하다’는 원어(가잘)는 ‘강탈하다’는 뜻이다(KJV, NASB, NIV). 본문은 부모의 물건, 즉 부모의 토지나 집이나 보물이나 현금을 강제로 빼앗고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를 정죄한다. 부모의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모의 소유와 자녀의 소유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준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은 자녀의 것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의 것을 취하는 것은 도적질이다.

본문은,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고도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라고 말한다. ‘멸망케 하는 자’라는 원어(이쉬 마쉐키스)는 ‘(도덕적으로) 부패시키는 자’(BDB), ‘파괴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다. 그는 부모에게 악을 행하고 부모를 해치는 자, 부모의 인격과 재산과 행복을 파괴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인이며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고(출 20:12) 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명하셨다(레 19:3). 사도 바울은 “(자녀나 손자들로)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가르쳤다(딤전 5:4). 불효는 큰 죄악이다.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는 것은 불효 이상의 죄악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포함한다. 부모 공경의 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관계의 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경건은 윤리의 기초이며 가정 윤리는 사회 윤리의 시작이다. 가정 윤리가 바로 서야 사회 윤리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는 범사에 공정한 판단을 하고 작은 이익 때문에 범죄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욕심을 버리자. 욕심은 사람을 시험에 빠지고 범죄하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자. 그것이 복된 삶이다.

우리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려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선한 마음과 선한 눈을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구제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상대방을 잘못에 더욱 빠지게 만드는 아첨의 말을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사랑으로 충고하고 필요할 때는 책망도 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부모의 물건, 즉 토지나 집이나 물건이나 현금 등을 강탈하는 악을 범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25-28절, 탐심, 자기 신뢰, 구제, 악인

[25절]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기름지게 되다(KJV), 형통하다(NASB, NIV)] 되느니라.

‘탐하는 자’라 원어(레카브)는 ‘교만한 자’ 혹은 ‘탐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교만한 자’(KJV), ‘거만한 자’(NASB), 또는 ‘탐하는 자’(NIV)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잠언 21:4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에서는 ‘교만한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두 가지 뜻이 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거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다툰다. 그러므로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했고, 야고보서 4:1-2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사랑과 온유, 겸손과 절제에서는 화합과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교만과 미움과 욕심에서는 다툼과 분쟁만 일어난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 교만하고 탐욕적인 자는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의지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이다. 그는 비록 교만과 탐심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풍족하게 되고 형통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음식과 옷]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다(렘 17:9).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믿는 자는 무지하여 죄악된 일에 빠지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고 자기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시키며 자기 욕심을 따르며 가식으로 위장한다. 심지어 경건하고 바른 생각과 소원을 품은 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죽을 때까지 그를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나 여종 앞에서 그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세나 기타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경말씀의 교훈대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이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도 건강의 회복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 건강의 길이다(잠 3:7-8). 그는 실직해도 다시 취직할 길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궁핍이 없을 것이다(마 6:33). 그는 경제 파탄을 당해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원수의 핍박이 심해도 보호를 받을 것이며, 위험한 길을 만나도 피할 길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이다(시 91:1, 3). 노아는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는 중에서도 그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욥은 큰 재앙에서 승리하였고, 다윗도 극심한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되었고,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구원을 얻었다.

[27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명령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 거하는 가난한 형제에게 반드시 구제하라고 명하였다(신 15:7-10). 또 주께서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교훈하셨다(눅 12:33).

의인은 구제에 힘쓰는 자들이다. 시편 37:21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10에서 증거하기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하였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15:10은,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했다. 시편 37:25-26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말했다. 잠언 11:25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했고,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빌려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고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을 것이다.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께서는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구제하지 않은 자들이 장차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는 두려운 말씀을 하셨다. 야고보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하였다(약 4:17).

[28절]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고 남의 소유를 강탈한다. 악인이 일어난다는 말은 악인이 윗사람의 인정을 얻고 세력을 얻고 사회에서 공직에 등용되고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고 활동하며 활개치는 것을 말한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 잠언 28:12도,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고 말했다. 아모스 5:13은,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양심과 양식이 있고 어느 정도 도덕성이 있다. 사람이 숨는 이유는 악인과 어울림으로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기 싫고 또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싫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악인이 멸망하면 다른 악인이 그것을 천벌 곧 하나님의 징벌로 느껴 회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실 때, 사람들은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시 58:11). 그러므로 이사야 26:9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고 말한다.

또 악인이 멸망하면 숨었던 의인들이 나타나고 등용되고 활동하게 됨으로써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역대상 12:22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공의로 통치할 때 사람들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함으로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나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겸손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되자. 그런 자에게 참 평안이 있고 영육의 풍족함이 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말씀만 순종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하겠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으나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을 것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복되다. 그러나 구제치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며, 또 세상은 악해질지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진실한 의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자.

29장: 의인, 왕, 자녀징계

1-4절, 완고함, 의인, 지혜, 공의

[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자주 책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냐면 사람이 지적을 받고 책망을 들을 때 잘못을 고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이 곧은 사람, 즉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의 교만과 완고함을 나타낸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악에 악을 더하는 일이며 자신의 심히 죄악됨을 증거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그러했다. 신명기 9장은 그들의 광야 생활을 증거하기를, 목이 곧고 항상 거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속히 떠났다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마침내 징벌하실 것이다. 욥기 21:13은, “[악인이]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갑자기] 음부[지옥]에 내려가느니라”고 말한다. ‘피하지 못한다’는 원문(엔 마르페)은 ‘회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 멸망에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병에 걸렸으면 낫지 못하며, 파산하였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을 때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즉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한다(계 3:19).

[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할 것이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사는 자들이다. 우리나라에 정치계, 법조계, 교육계, 경제계, 예술계 등 사회의 각계각층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성이 있는 의인들이 많이 등용되고 많이 활약해야 하겠다. 그러나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 직분자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순종하는 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원하신다(엡 5:26-27).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거기에 불의와 불법이 없고 악과 거짓이 없고 싸움과 분열이 없고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인격적 교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 사회에서는 그런 이상적 교제를 기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교회만큼은 그런 교제가 실현되어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넘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할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자이다. 그는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거짓되며 탐욕적이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남을 해친다. 이 세상에는 이런 자들이 때때로 지도자들이 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자들이 직분을 얻고 권세를 행사하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외식하며 탐욕적이었고 부정과 불법이 가득하였다(마 23:25, 28).

그러나 그런 때에 그 백성들은 탄식할 것이다. 경건과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이성과 양심에 반대되는 일들이 많아지고 의인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또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하였다고 느끼기 때문에, 백성들은 탄식할 것이다.

[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창녀]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하느니라.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녀는 아버지를 즐겁게 할 것이다. 경건한 아버지는 자녀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고 또 그가 도덕적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녀가 경건하고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하게 살면,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도 들어 있으므로 자녀가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하면 그가 복될 것이므로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기[창녀]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할 것이다. 창기는 돈을 위해 자기 몸을 파는 자이다. 그러므로 창기를 사귀면 재산을 탕진할 것이다. 잠언 6:25-26은,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창기를 사귀는 자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부모를 섬길 경제적 힘도 잃고 때로는 부모의 재산까지도 탕진할 것이다.

성도들은 지혜를 얻어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아내로 만족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3-5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말하였고, 베드로전서 2:11은,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다.

[4절]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은 공의로 다스리는 것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이며,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만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왕이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면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교만하면 그의 계명을 거역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탐심을 가진다. 불의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결국 나라를 쇠약케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불의를 제거하고 공의를 세우면 나라가 잘 될 것이다. 공의는 가정과 사회를 견고케 하여 서로 돕고 돌아보는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이 되게 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라에 복을 주셔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킨다.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라는 원어(이쉬 테루모스)는 ‘기부금의 사람,’ 즉 기부금을 강요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BDB). 기부금의 규모가 커지고 불순한 뜻이 담기면 뇌물이 된다. 왕이 뇌물 받기를 좋아하면 신하들은 왕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자기들도 뇌물 받기를 좋아하게 되며, 그러면 그 나라는 뇌물 왕국이 되고 도덕적 해이가 심하고 부정부패가 많은 혼란한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또 그런 나라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고 지도자들이나 백성이 사치하고 연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가 패망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고 책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겸손히 달게 받고 힘써 회개하고 고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고, 또 우리나라에, 또 먼저 우리 교회에, 의로운 자들과 의로운 직분자들이 많아지기를 위해 기도하자.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한다.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자. 결혼을 존귀하게 여기며,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치 말고 절제 있게 살자.

우리는 계명대로 사는 공의의 사람이 되고, 또 우리나라가 통치자들이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고 뇌물을 구하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자.

5-8절, 아첨, 악인의 범죄, 의인, 모만

[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아첨하다’는 원어(칼라크)는 ‘부드러운 말을 하다’는 뜻이다. 아첨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부정직하거나 지나친 칭찬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 곧 그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칭찬이라도 사람을 교만케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했다. 하물며, 부정직하고 지나친 아첨의 말은 상대방을 교만케 만들고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자신의 부족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그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된 입맞춤은 행동으로 하는 아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27:6은 말하기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는 물론 이웃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아첨하는 말로 하지 말고 진실한 말로 해야 한다. 또 필요한 때는 충고와 책망도 해야 한다. 잠언 28:23은,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1, 14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교훈하였고, 히브리서 3:13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교훈하였다.

[6절]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악인은 악을 행하며 범죄하지만 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올무나 덫은 새나 짐승을 잡는 도구이다. 올무가 된다는 것은 속박을 당하고 종이 되고 결국 죽는 것을 말한다.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 즉 스스로 죄의 종, 마귀의 종, 슬픔과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하고, 사망의 종, 멸망의 종, 지옥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4). 사도 바울은 우리가 과거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종이었다고 말하였다(롬 6:16). 애굽 왕 바로는 강퍅한 마음으로 범죄하다가 장자까지 죽는 재앙을 당했고 결국 죽었다. 주 예수를 판 가룟 유다는 목매어 창자가 터져 죽었다.

그러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의인은 범죄해도 즉시 회개하고 돌이킨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과 책망을 들었을 때 즉시 회개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째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회개한 의인은 또한 노래하고 기뻐한다. 의의 길에는 기쁨과 평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며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 17).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다(고후 8:2).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시련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였다(벧전 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웃 사랑과 구제를 포함한다. 가난한 자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억울한 사정이 많겠지만, 의인은 그들의 사정을 알아준다. 그는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하지 않고, 성경적, 이성적, 양심적으로 공명정대하게 하며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동정하고 돕는 것이다.

의로운 욥은 말하기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 주었다”고 하였다(욥 29:15-16). 시편 37:26은, “저는[의인이]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표현했다. 주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주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굶주리거나 헐벗거나 나그네 되거나 병들거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다고 칭찬하시며 천국으로 영접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마 25:35-40).

그러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다.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그는 공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이웃 사랑과 구제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교만과 욕심이 있고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며 파괴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멸망이다. 잠언 28:27은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했다. 주께서도 마지막 날에 악인들이 주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굶주리거나 헐벗거나 나그네 되거나 병들거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되며 지옥의 형벌이 선언될 것을 말씀하셨다(마 25:42-45).

[8절] 모만(侮慢)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모만한’이라는 원어는 ‘조롱하는’이라는 뜻이다. 모만한 자는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한다. 교만한 자는 명예심 즉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을 가진 자이다. 거기에서는 다툼만 나온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교회 안에서도 교만한 자들이 있으면 다툼이 있고 무질서와 혼란이 있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 하고 다투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 또 빌립보서 2:3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결코 악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오래 참는다. 슬기롭고 온유 겸손하고 오래 참는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15:18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를 하며 다수결 원칙을 택한다. 그것은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줌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거기에는 겸손과 인내와 양보심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할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었을 때, 기드온은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며 겸손히 대답함으로써 그들의 노를 풀었었다(삿 8:1-3).

칭찬, 특히 아첨 즉 부정직하고 지나친 칭찬이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인 줄 알고, 우리는 아첨하는 자가 되지 말자.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의 길만 걸어가고 또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으로 항상 기뻐하자.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함으로 의인으로 살고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사정을 알아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조롱하는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해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우리는 남을 조롱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또 그런 자가 있으면 책망해야 하고 오직 온유와 겸손과 인내심을 가진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9-12절, 다툼, 피 흘림, 노함, 거짓말

[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이지만,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고 악하고 거짓되게 사는 자이다. 그는 불효하고 남을 미워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라는 구절은 원문에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라고 되어 있다. 만일 여기의 ‘그가’ 지혜로운 자를 가리킨다면, 이 구절은 “그가 노하여 미련한 자를 책망하든지 아니면 웃으며 말하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를 무시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다툼은 그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여기의 ‘그가’ 미련한 자를 가리킨다면(NASB, NIV), 이 구절은 “그가 감정을 드러내면서 노하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비웃든지”라는 뜻일 것이다. 미련한 자는 말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다툼은 그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와 다투면, 미련한 자가 변하여 미련함을 버리고 지혜를 얻기 전에는 그 다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일을 계획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동원했고 형식적인 재판을 했다.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압박하여 예수를 정죄하게 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결심을 교묘하게 실행하려 할 뿐이었다.

[10절]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정직한 자들은 그의 생명을 염려하느니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원문은 ‘피의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명시된 대로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악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며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기도 한다. ‘온전한 자’라는 원어(탐)는 ‘흠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성심으로 순종하는 성도를 가리킨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온전한 자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너무 다르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악됨이 더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움은 마귀적 성품이다. 미움은 곧 살인이다. 요한일서 3:15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천국을 확신하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마 10:28).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는 구절(NIV)은 “그러나 정직한 자들은 그의 생명을 염려하느니라”(NASB)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정직한 자들’(원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의 생명’이라는 말은 ‘온전한 자의 생명’을 가리킨다고 본다. ‘찾는다’는 원어(바카쉬)는 보통은 죽이려고 찾는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경건한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지키려고 애썼고(삼상 19-20장), 경건한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굴에 숨겨 보호하였다(왕상 18:3-4).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의 목숨을 지키려 애썼다(롬 16:4).

[1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낸다. ‘그 노를 다’라는 원문(콜 루코)은 ‘그의 모든 영(심령)’이라는 말이다. 원어에 ‘영’이라는 단어(루아크)는 ‘심령, 의향, 기분, 감정, 노(怒)’라는 뜻도 있다(BDB). 영어성경들은 ‘생각’(mind)(KJV), ‘기분’(temper)(NASB), ‘노’ (anger)(NIV) 등으로 번역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심령을 다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심령과 기분과 감정을 다 드러낸다. ‘다 드러낸다’는 말은 필요한 때가 아닌 때에 조심 없이 자기 감정을 다 드러낸다는 뜻이다. 사람의 감정이 항상 선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원치 않는 나쁜 감정, 남을 미워하는 감정, 괜히 짜증스러운 감정이 생길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모든 감정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다 덕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 드러낼 필요가 없다.

특히 화가 났을 때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노를 억제한다고 말한 것이다. 잠언 12:16도,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6:32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생각, 의향과 기분, 감정, 특히 노한 감정을 억제한다. 그는 꼭 필요한 때에 그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하였다.

[12절]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信聽)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통치자가 거짓말을 들어주면 그를 섬기는 측근들은 악을 포용하고 점점 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겉으로는 선한 척하지만, 실상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많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분별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진실이 있는 나라, 도덕성을 중시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멸망기의 이스라엘은 거짓이 만연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궤휼[거짓]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렘 9:4-6).

그러나 거짓은 마귀의 죄악이며(창 3장; 요 8:44) 제9계명에 정죄된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신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거짓말은 지옥 갈 죄악이다(계 21:8).

윤리의 기본은 의와 사랑과 진실이며, 의와 사랑은 진실에 기초해서 권장되어야 한다. 진실이 존중되는 사회는 악을 제재하고 징벌할 수 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롬 12:9).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하였다(엡 4:25).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고 또 미련한 자와 다투면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는 줄 알고 미련한 자와 다투지 말아야 한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나 정직한 자는 그의 생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정직하고 온전한 자가 되고 형제를 미워하고 해하려 하지 말고 그의 생명을 아끼고 지키고 보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 우리는 자신의 심령과 기분과 감정, 특히 노한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때에만 나타내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통치자가 거짓말을 들어주면 그의 신하들은 다 악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들이 거짓말을 들어주면 제직들은 악하게 될 것이다.

13-16절, 가난한 자, 왕, 꾸지람, 악인

[13절] 가난한 자와 포학[국한문 성경은 ‘포악’(暴惡)]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포학한 자’라는 원어(테카킴)는 ‘압제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본문에서 포학한 자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섞여 산다’는 원어(니프가쇼)는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BDB).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와 압제하는 포학한 부자가 섞여 살고 있고 서로 오며 가며 만난다.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성과 재산 정도가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다 만드셨다. 잠언 22:2는,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하고, 또 욥기 31:15도,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셨다. ‘빛’은 생명을 가리켰다고 본다. 산 사람은 눈에 빛이 있고 죽은 사람은 그 눈에 빛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이성과 지식도 주셨다. 그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치 않으시고 각양의 좋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셨다(마 5:45; 약 1:17).

그러므로 부자나 권세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하며, 잠언 17:5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한다. 사람은 남을 멸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조물주의 뜻이다.

[14절]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伸寃)하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옛 시대에 왕은 통치자이며 동시에 재판관이었다. ‘성실히 신원한다’는 원어(쇼페트 베에메스)는 ‘진리로(혹은 진실하게) 재판한다’는 뜻이다. 진리의 재판, 진실한 재판은 법과 이성과 양심에 따라 공의롭고 공정하게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좋은 왕은 가난한 자를 진실하게 재판한다. 가난한 자들은 사회적 약자이며 그들은 때때로 부자나 권세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다. 물론 성경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말했지만(출 23:3), 가난한 자들이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일을 당한다든지 해를 당하지 않도록, 왕은 바른 재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왕이 가난한 자를 진실하게, 공정하게 재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잠언 20:28은,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고 말하고,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하였다. 

어떻게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는가? 왕이 법에 충실하면 그 나라는 질서 있는 나라가 되고 안정을 얻을 것이다. 또 백성들은 그 왕을 지지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왕이 이성과 양심에 맞게 공의롭게 재판하면 백성은 그것을 기뻐하고 그 왕을 지지하고 따를 것이다. 또 무엇보다, 하늘에 계신 공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런 왕과 그런 나라를 복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왕이 의로우면 나라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평안하였고, 왕이 악하면 반역과 사회적 혼란이 그치지 않았다.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채찍’(쉐벳)은 ‘매’를 가리킨다. 본문은 자녀 교육의 방식에 대해 체벌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자녀에게 왜 체벌이 필요한가? 그것은 인간 본성이 어리석고 교만하고 악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주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각양의 죄악들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그러므로 교훈이 필요하고 책망과 매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어른에게도 책망의 교훈이 필요하고 징계의 고난이 필요하다. 시편 119:67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매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언 13:24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다. 또 잠언 23:13-14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자식을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이 어미를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임의로 하게 버려둔다는 것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게 내버려둔다는 뜻이다.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본성대로 살게 버려두면 범죄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징벌을 받게 되며, 그것은 부모에게 고통과 수치가 될 것이다.

[16절]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천국은 의인만 있는 곳이며 지옥은 악인만 있는 곳이지만, 세상은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고 있는 곳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그를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 ‘죄’라는 원어(페솨)는 ‘법을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악인이 많아지면,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 많고,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욕이 많은 사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성실히 지키는 사회는 의와 도덕성이 있는 사회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법을 지킴이 없는 사회는 의와 도덕성이 없는 사회이다. 노아 시대가 그러했다. 그때에 사람들은 음란하였고(창 6:2) 강포하였다(창 6:11, 13). 소돔과 고모라 시대도 그러했다. 그때에 사람들은 매우 음란하였고(창 19:4- 7) 또 교만하였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았다(겔 16:49-50).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 일곱 족속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매우 음란하였다(레 18장). 하나님께서는 그런 시대들에 그 악한 자들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시고 징벌하셨다.

본문은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망할 것이다. 시편 1:6,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멸망을 볼 것이다. 시편 37:34,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시편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시편 91: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망함을 성도에게 보이시는 까닭은, 성도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와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의 통치를 확신시키시기 위해서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증거케 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명과 지식을 주신 줄 깨닫고, 남을 무시하지 말고 특히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자.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법과 이성과 양심에 따라 통치하도록 기도하며, 또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징계로 잘 교육하자. 또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좋은 자녀가 되자.

우리는 우리 교회가 의인들의 모임이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바른 교훈과 훈련 받기를 힘쓰자. 또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17-20절, 징계, 묵시, 종, 말에 조급함

[17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본문은 “네 자식을 징계하라”고 말한다. ‘징계하라’는 원어(얏세르)는 ‘징계하라, 바로 잡으라’는 뜻이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필요할 때는 매도 때리고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성경을 통해 자녀 징계에 대해 많이 강조하셨다.

잠언 12: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본문은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면 자녀가 부모를 평안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자녀가 악하게 살면 부모에게 근심과 고통이 될 것이나, 자녀가 징계를 받고 바른 인격, 선한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부모의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징계를 통해 좋은 인격이 된 자녀는 부모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줄 것이다. 자녀가 잘 되지 못하면 부모에게 슬픔과 근심이 될 것이지만, 자녀가 잘 되면 부모에게 평안과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말했다. 또 잠언 23:24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고 말했고, 잠언 17:25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하였다.

[18절]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라는 원어(카존)는 ‘보여진 것, 이상(異像, vision)’이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적 설교나 성경적 교훈을 가리킨다. 묵시, 곧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성경적 설교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게 될 것이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경건과 도덕성이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뜻한다. 사사 시대가 그러했다.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한 강론도, 실행도 없었다고 보인다.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각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 것이었다(삿 17:6; 21:25). 그 결과, 이스라엘 사회는 우상숭배와 음란 풍조가 많았다(삿 17-19장).

사무엘이 어린 때에도 그러하였다. 사무엘상 3:1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像, 카존)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한다. 그때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았고 아버지 엘리도 그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고 그들의 행위를 금하지 않았다(삼상 2:22, 25, 29; 3:13, 14).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도 배교적인 시대가 있었다. 엘리야나 미가야의 시대가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없고 성경적 설교가 없다면, 그 시대는 얼마나 더 어두울까!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되다.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법이다. 신명기 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1:1-3; 시 119:1).

[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종은 왜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않는가? 그 까닭은 인간의 본성 속에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고집을 부리고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본문은 종에게 적당한 책망과 벌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요나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도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배를 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센 풍랑을 예비하셨고 결국 요나는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지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종만 징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그러하다. 아이들의 속에도 교만과 부모를 무시함과 제 생각과 고집이 있다. 그러므로 책망과 매가 필요하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는 본성이 교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 생각과 고집을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매가 필요하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면 좋은 종은 어떤 자인가? 우선 겸손하고, 주인을 존중하고, 제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어떤 좋은 생각이 있을 때는 기회를 보아서 겸손히 제안하고,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하여 온전히 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이다. 좋은 성도도 그러하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0절]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언어는 마음의 표현이다. 언어의 조급함은 마음의 조급함을 나타낸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이 미련한 자보다 더 못한 까닭은 어떤 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말하지 않고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하기 전에 말부터 먼저 나오므로 실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상대가 마음이 상할지 어떨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또 잠언 18:13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9:2는,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7:27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한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 그가 부모를 평안케 하고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징계함으로 잘 교육하고 우리 자신도 부모님께 평안과 기쁨을 드리는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고 또 성경적 설교를 귀히 여기고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지키는 복된 자가 되자.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제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좋은 종이 되자.

언어에 조급한 사람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언어에 조급한 사람이 되지 말고 범사에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 중에 한번 더, 깊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

21-24절, 종, 노, 교만, 도적의 짝

[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곱게 양육한다’는 원어(파나크)는 ‘지나치게 떠받들다, 제멋대로 하게 하다’(pamper)는 뜻이다(BDB, NASB, NIV). ‘자식인 체하다’는 원어(이예 마논)는 ‘감사하지 않는다’(BDB) 혹은 ‘아들이 된다’(Langenscheidt, KJV, NASB)는 뜻이라고 한다.

종은 주인을 섬기는 자이다. 그는 신분과 의무, 즉 종이라는 신분과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본문은 종을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하게 버려두면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고 감사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교만해져서 자기 신분과 의무를 잊어버리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주인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본문은 종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 종은 너무 잘해주거나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무시하는 말이나 무리한 지시나 부당한 책망을 하지 말아야 하며 또 필요한 경우 그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업무에 관한 한, 주인은 그를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며 주인은 그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점검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며 또는 책망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알고 우리의 임무를 다해야 하고 다한 후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겸손히 말해야 한다(눅 17:10).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계 2: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절히 훈련시키실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고 칭찬과 격려도 하시지만, 징계도 하실 것이다.

[22절]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14:17은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 어리석은 일들 중의 하나가 다툼이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킬 것이다. 잠언 15:18도,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은 감정적 존재이므로 때때로 노하며 그럴 때 상대방이 그 노를 받아주지 않으면 쉽게 다툼이 될 것이다.

또 분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을 것이다. 사람이 분노하면 남을 욕하고 비방하기 쉽고 미워하고 살인까지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셨을 때 회당에 있는 자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었다(눅 4:28-29).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형제에게 [까닭 없이](전통사본)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갈라디아서 5:20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의 죄악의 목록 중에 두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를 더디 하고 버리고 서로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잠언 14:29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말하고,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4:31-32는,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또 야고보서 1:19-20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교훈한다.

[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사람은 교만하면 낮아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징벌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3:34는, “진실로 그는[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신다”고 말한다. 잠언 11:2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말하고, 잠언 16:18과 18:12는 사람이 교만하면 멸망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또 시편 18:27은, “[주께서]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고 말하고, 이사야 2:12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징벌하실 것이며, 또한 사람들도 교만한 자를 멀리 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그를 존귀케 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3:34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잠언 15:33과 18:12는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케 된다는 뜻이다. 베드로전서 5:6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한다. 또 사람들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족과 결점이 많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자이다.

[24절]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直告)하지 아니하느니라.

‘짝하는 자’라는 원어(콜레크)는 ‘함께 나누는 자,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이다. 직접 도적질하는 자뿐 아니라, 도적질하는 일을 돕는 자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같은 책임을 지고 같은 벌을 받아야 할 자이다. 도적질뿐 아니라, 다른 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의 죄를 돕는 것은 그 죄를 짓는 것과 같이 나쁜 일이다.

도적과 짝하는 자, 도적과 함께 도적질한 물건을 나누는 자는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자이다. 도적질은 십계명의 제8계명을 범한 죄악이다(출 20:15). 도적질이나 도적질을 도운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벌을 받을 일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의를 행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지만, 죄를 짓는 것은 결국 자기 영혼을 해롭게 한다. 불의한 돈은 자신에게 화가 된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가난한 의인이 부요한 악인보다 낫다.

본문은,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직고한다’는 원어(나가드)는 ‘말하다, 알리다’는 뜻이다. 맹세함을 듣는다는 것은 도적에 대해 아는 바를 고백하라고 맹세시키는 말을 듣거나, 도적이나 그를 도운 자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도적질한 자에 대해서나 자신이 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는다. 그는 도적이나 그와 관계된 자신의 죄행(罪行)에 대해 솔직하게 증언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든지, 혹은 “나는 모른다”고 거짓말한다. 그는 더러운 욕심 때문에 양심이 불량하고 더러워져 있고 무디어져 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지혜롭게 잘 다루고, 아랫사람은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좋은 종과 같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툼을 일으키지 않고 범죄하지 않도록 분노를 더디 해야 하고 또 성경 교훈대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존심도 일종의 교만이니 그것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도적과 짝하지도 말고 항상 양심을 깨끗이 지키고 적은 것이라도 정직하게 버는 소득만 취해야 한다.

25-27절, 사람의 두려움, 참 주권자, 미움을 받음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사람의 두려움은 올무가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은 상대의 기분 상함과 미움이 자기에게 신체적, 물질적 손해가 되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이 될까봐 그를 두려워하고 겁낸다. 그러나 사람의 두려움은 올무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할 때 정직하게 살 수 있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범죄하고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불신앙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지옥에 던지울 자들의 목록에 포함시켰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나, 실상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이며 단지 죽음만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범사에 온유와 겸손과 선함으로 처신해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담대함을 가지고 산다. 다윗은 시편 3:6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하였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와 시험과 고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다. 다윗은 시편 23:4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주시고 위로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또 그는 시편 25:15에서,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했다. 잠언 18:10도,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26절]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사람의 판단(KJV), 사람의 공의(NASB, NIV)]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주권자’는 통치 권력을 가진 왕이나 통치자를 가리킨다. 주권자가 무슨 일이든지 해줄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친근히 하려 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이나 시장 등 권력자들에게 은혜를 구하며 그들을 친근히 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일의 작정’이라는 원어(미슈파트 이쉬)는 ‘사람의 판단’(KJV), 혹은 ‘사람의 공의’(NASB)라는 뜻이다. ‘사람의 판단’이라는 말은 그가 도움을 줄지 여부에 대한 주권자의 판단을 가리키며, ‘사람의 공의’라는 말은 간청한 사람의 일에 대한 공의로운 처리를 가리킬 것이다. 주권자가 그의 도움을 구하는 자에 대해 판단하고 도움을 주는 여부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한 자의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경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홀로 다스리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진다(마 10:29). 그러므로 잠언 21:1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6:1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11은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그러므로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교훈하였다.

[27절]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불의한 자는 악인에게는 사랑을 받을지 모르지만, 의인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의인은 악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01편에서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01:3, 5). 우리가 의인이라면 우리는 불의한 자를 인정하거나 돕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정직한 자는 의인에게는 인정을 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악인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악인은 그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해치려 한다. 가인은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마침내 들에서 그를 쳐죽였다. 다니엘의 악한 동료들은 경건하고 의로운 다니엘을 미워하여 죽일 공모(共謀)를 하였다. 타락한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십자가에 죽이기를 공모(共謀)하였다.

악인이 의인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악인이 어두움을 좋아하고 빛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요 3:20). 또 의인 때문에 자신의 악함이 드러나고 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체면이 떨어지기 때문이다(요 7:7). 또 의인이 하나님의 복 받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다(마 27:18; 요 12:19). 또 사탄이 악한 자를 충동하여 의인을 미워하게 하고 의인을 낙망시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범죄하도록 활동하기 때문이다(눅 22:3; 요 13:29).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악인의 미움과 핍박과 시험을 이길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육신의 죽음을 겁내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자.

우리는 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우리는 불의와 악을 미워하고 의롭게만 살자. 혹 악인의 미움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바르게만 행하자.

30장: 아굴의 잠언

1-9절, 무지, 하나님의 말씀, 두 가지 소원

[1-4절]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야게의 아들 아굴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핫맛사)(the prophecy, the oracle)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掌中)[손에]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세운]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아굴은 경건한 선지자이며 이디엘과 우갈은 그의 제자들이었다고 보인다. 성경은 인간 저자가 중요치 않고,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굴은 자신이 짐승같이 무지하고 사람의 총명과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만(잠 26:12),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아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가 하늘에 계심, 바람과 비를 주관하심, 온 땅을 건립하심, 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신비한 세계에서 산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1:27), 사도 바울도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우리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조금 알 뿐이다.

[5-6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순전하다’는 원어(체루파)는 ‘제련되다, 순결하다’는 뜻이다. 시편 12:6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말한다. 시편 18:30도,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고 말한다. ‘정미하다’는 말은 ‘순전하다’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오류가 없다. 다윗은 시편 19:7-8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 곧 성경이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다고 성경의 네 가지 성격을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이시다. 방패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방패라고 말씀하셨다(창 15:1).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방패라고 말했다(시 18:2).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죄, 불신앙과 의심, 낙심과 절망을 막아주신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인간의 생각과 말을 더해서는 안 된다. 만일 누구든지 성경에 무엇을 더하면, 인간의 말을 섞는 것이며 성경을 변질시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또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 말씀처럼 말하며 의와 진리가 아닌 것을 의와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 그는 거짓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실 때부터 “너희는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신 4:2; 12:32), 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도 그것을 엄히 말씀하셨다(계 22:18-19).

[7-9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 아굴은 자신이 요긴하다고 깨달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그가 죽기 전에 주시기를 구하였다. 그 첫 번째 소원은 허탄과 거짓말을 그에게서 멀리하게 해주시라는 것이다. 우상숭배이든지 거짓말이든지 하나님께서는 헛되고 거짓된 것을 다 미워하신다. 잠언은 하나님께서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고 말했다(잠 6:16-19). 사도 바울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5).

아굴의 두 번째 소원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것이다. 사람은 부해질 때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기 쉽다. 그러므로 신명기 8:12-14는,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가난해도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아굴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지혜롭게 기도한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셨고(마 6: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8에서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무지함, 특히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무지함을 깨닫고 겸손히 인정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자.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임을 알고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가감하지 말고 다 믿자. 믿음은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그는 방패가 되신다.

우리도 두 가지 요긴한 소원, 즉 허탄과 거짓을 멀리하고 진리의 사람, 진실의 사람이 되고, 또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늘 기도하자.

10-12절, 비방, 부모 저주, 더러움

[10절]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라솬)[거짓되이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다윗은 시편 15:3에서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의 자격에 그 혀로 참소치 않고 그 이웃을 훼방치 않는 것을 포함했고, 시편 101:5에서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교훈하셨다(마 7:1, 3).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9-30에서 죄악들의 목록에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포함했고, 에베소서 4:31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했고, 디모데전서 3:11에서는 장로나 집사의 아내의 자격으로 참소하지 말 것을 말하였고, 디모데후서 3:2-3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풍조의 특징들 중에 훼방하며 참소하는 것을 포함했다.

우리는 남에 대한 거짓된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참된 비난도 다른 이에게 안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종에 대하여 그의 주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그를 매우 해치는 것이다. 우리는 실상 남의 형편과 상황을 정확히 잘 모른다. 또 모든 일을 판단하실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고전 4:4) 우리는 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일 뿐이다(약 4:11).

종의 잘못이 있으면 그에게 직접 충고하는 것이 좋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도르)[세대, 한 부류의 사람들]가 있느니라

불효하는 세대가 있다.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다. 혹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잘 기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낳으셨다는 이유만으로도 공경해야 할 것이다. 또 그것은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부모 공경은 인간 윤리의 기본이며 사회 윤리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출애굽기 20:12,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레위기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저주하며 축복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악한 자이다. 성경은 부모를 저주하는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악으로 정죄한다. 출애굽기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0: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잠언 20: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기쁨과 행복]이 유암(幽暗)[어두움= 슬픔과 불행]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12절]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도르)[세대, 한 부류의 사람들]가 있느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1:45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더러운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말하였고(엡 5:3) 또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했다(살전 4:3).

그러나 세상에 아주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不淨)함을 깨달았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고(사 6:5), 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사 64:6).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했고(렘 17:9),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로소이다”라고 고백했고(눅 5:8),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사람은 자신의 죄와 더러움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는다. 그러나 위선자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을 회개하고 씻음 받지도 못한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 또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마 23:25, 28).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인데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능력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딤후 3:2, 5). 오늘날이 그런 때가 아닌가?

우리는 남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거짓되이 비방하지 말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직접 그에게 충고하든지,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시대 풍조와 구별하여 부모 공경의 계명을 실천하고, 또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자.

우리는 죄에 민감하고 자신을 깨끗이 하자. 더러운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고 악은 어떤 형태와 모양이라도 버리자(엡 4:13; 살전 5:22).

13-16절, 교만, 착취, 탐욕

[13절]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도르)[세대, 한 부류의 사람들]가 있느니라.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는 교만한 세대를 가리킨다. 다윗은 시편 101:5에서 눈이 높은 자들과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같은 부류에 두며 그들을 용납지 않겠다고 증거했다. 눈이 높고 교만한 세대가 있다. 디모데후서 3:2, 4에 예언된 말세에 올 고통하는 시대의 특징들 중에 자긍하며 교만하며 자고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미워하신다. 잠언 6:17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 중 교만한 눈을 첫째로 들었다. 잠언 16:5도,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다윗은 시편 131:1에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교훈하였다(빌 2:5-8).

[14절] 앞니는 장검(長劍) 같고 어금니는 군도(軍刀)[군인의 칼]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도르)[세대, 한 부류의 사람들]가 있느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삼키는 세대, 즉 그들을 짓밟고 착취하는 악한 세대가 있다. 노아의 시대는 사람들이 강포하였다(창 6:11, 13). 구약시대의 어떤 왕들과 방백들과 예수님 당시의 어떤 서기관들도 그러하였다. 에스겔 22:27,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利)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마가복음 12:40, “저희[서기관들]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그들은 사랑도 인정도 동정심도 없었다. 신약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며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돈을 사랑하고 무정하고 사나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딤후 3:2-3). 우리는 말세에 노아 시대의 모습과 구약시대나 예수님 당시의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동정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신명기 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가난한 형제에게] 구제할 것이요.” 이사야 1:17, “[너희는]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해 신원(伸寃)하라.”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15-16절]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주세요 주세요]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陰府)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거머리는 사람의 피부에 딱 붙어서 끈질기게 피를 빨아먹으려 한다. 그것은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다음 몇 가지도 이와 비슷하게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첫째, 음부 즉 무덤 혹은 지옥이 그러하다. 무덤은 끝없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고, 지옥은 바닥이 끝없이 깊은 무저갱(無底坑)이다.

둘째, 아이 배지 못하는 태가 그러하다. 그는 자녀의 잉태와 출산을 사모하고(창 30:1) 아이를 낳기까지 만족이 없을 것이다.

셋째,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 그러하다. 땅은 많은 물을 자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것은 끝없이 물을 받아들인다.

넷째, 족하다 하지 않는 불이 그러하다. 불은 무엇이든지 다 태운다. 대형산불은 온 산림과 산에 있는 사찰이나 집들을 다 태운다.

인간의 욕심과 탐심은 이와 비슷하다. 사람의 물질욕은 끝이 없고 정욕과 명예욕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절제와 극기와 자족의 삶을 교훈한다. 갈라디아서 5:23-24,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빌립보서 4:11-12,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디모데전서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눈이 심히 높은 것 곧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고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한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도리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돕고 구제하자.

우리는 끝없는 욕심과 탐심, 즉 물질욕, 정욕, 명예욕을 버리고 경계하자. 우리는 범사에 절제하며 자신을 부정하고 자족하는 자가 되자.

17-23절, 부모 조롱, 은밀한 악, 부정 행위

[17절]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눈을 지목한 까닭은 눈이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선한 자는 선한 눈을, 악한 자는 악한 눈을 가진다. 교만한 자는 교만한 눈을 가지며(잠 6:17) 음란한 자는 음란한 마음이 드러나는 눈을 가진다(벧후 2:14). 부모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는 그런 눈을 가진다.

부모를 조롱하며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나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다. 부모를 경멸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미련한 일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출애굽기 21:15, 17,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된 일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레위기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잠언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것은 부모들도, 자녀들도 유념해야 할 진리이다.

[18-20절]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즉 놀랍고 알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자취’라고 번역된 원어(데레크)는 ‘길’(KJV, NASB, NIV)이라는 단어이다. 기이하여 잘 알 수 없는 것 서넛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길,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 바다의 배의 길, 남자가 여자(알마)와 함께한 자취, 특히 음녀의 자취 등이다. 그것은 잠깐 있다가 지워지거나 없어지는 것이거나 혹은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본 잠언의 저자 아굴은 특히 음녀의 자취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모든 죄가 대개 은밀하지만, 특히 음란죄가 그러하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음행은 은밀하게 행해지는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은밀히 행하는 악을 징벌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고린도전서 4:5,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성도의 생활은 그러므로 빛의 생활이다. 에베소서 5:8-9, 11,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主母)를 이은 것이니라.

세상으로 깜짝 놀라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것 서넛이 있는데, 첫째는 종이 왕이 된 것이다. 종은 보통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고 덕과 통솔력이 부족할 것인데, 그러나 그가 왕이 되었으니 그것은 무자격자가 권력을 잡은 것과 같다.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는 아마 불의하고 부정한 방식으로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 경우는 나라의 장래가 매우 걱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라를 바르게 잘 다스릴 지혜와 힘이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이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치 않는 자이다. 그는 악하고 게으르며,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자가 우연으로든지 혹은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든지 적잖은 소득을 얻고 배부르게 먹은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뜨린 기이한 일이다.

셋째는 꺼림을 받는 여자가 시집간 것이다. ‘꺼림을 받는다’는 원어(세누아 האָוּנ������)는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외모가 나빠서나 성격이 나빠서나 도덕적 흠이 있어서 미움을 받아 결혼하지 못하던 여자가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다 깜짝 놀랄 것이다.

넷째는 여종이 여주인을 이은 것 혹은 밀어낸 것이다. 그 여종은 여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을 터인데, 아마 부정한 방법으로 여주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이것은 그 일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아버지를 조롱하며 어머니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다. 우리는 부모를 멸시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자.

음녀의 죄는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을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는 은밀한 죄를 범치 말자. 우리는 은밀한 죄를 범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고, 오직 빛의 자녀답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자.

세상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이나 돈이나 지위를 얻는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치 않은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거나 돈을 벌려 하거나 높아지려 하지 말고 심판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자.

24-33절, 지혜, 담대함, 교만

[24-28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세마미스)(BDB)이니라.

잠언 저자는 성령의 감동 안에서 땅에 작지만 아주 지혜로운 것 넷을 든다. 그것은 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 등이다.

개미는 힘이 없는 곤충이지만, 여름에도 놀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한다.

사반이라는 원어(솨판)는 오소리나 바위 너구리(BDB, NASB) 또는 토끼(KB, KJV, NIV) 종류라고 한다. 그것은 작고 약한 짐승이지만,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어려운 일을 해내고 거기서 산다.

메뚜기는 작은 곤충이나, 임금이 없어도 떼를 지어 나아가며 단결심이 있고 질서를 지키며 분쟁과 다툼과 분열이 없다.

도마뱀(LXX, Targ, Vg)은 사람의 손에 잡힐 만한 약한 짐승이지만, 아주 재빠르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크고 좋은 왕궁에 거처한다.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등은 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적 지혜가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세상적으로 천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받들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7-28,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29-31절]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자르지르 모스나임)[사냥개 혹은 전마(戰馬)](BDB)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멜레크 알쿰 암모)[군대를 거느린 왕](NASB, NIV)이니라.

잠언 저자는 또 성령의 감동으로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넷을 든다. 그것은 사자, 사냥개, 숫염소, 왕 등이다.

사자는 짐승들 중 가장 강하며 동물들의 왕이라고 불린다. 특히 수사자는 위풍당당하며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용기와 담대함의 표상이다. 잠언 28:1,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사냥개도 위엄 있고 당당하며 겁이 없다. 숫염소도 위풍 있고 당당하게 걷는다. 군대를 거느린 왕도 위풍당당하다.

위의 네 가지는, 낙심치 않고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담대함, 앞장서 문제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투지 등 지도자와 봉사자의 덕을 교훈하는 것 같다. 이런 용기와 담대함과 선한 투지와 충성은 건전한 생각과 지식, 건전한 판단과 확신, 그리고 의로운 삶에서 나올 것이다.

여호수아 1:7, 9,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32-33절]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또 악한 일을 도모하는 것은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계획하는 것, 즉 의도적인 악이며 아주 나쁜 것이다. 이런 일을 한 자는 그 손으로 입을 막아야 한다. 즉 그는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만하거나 악한 마음은 교만한 말이나 남을 비방하는 악한 말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이가 이미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교만하고 악한 마음과 말에서 다툼이 생긴다. 성도는 악한 마음과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고 서로 화목하여야 한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에베소서 4:29, 31-32,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 3:16-18,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비록 연약하고 천할지라도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선한 일을 힘쓰자.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용기와 담대함, 선한 투지와 충성을 가지자. 이런 덕은 바르고 건전한 신앙 지식과 확신과 의로운 삶에서 나온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또 그런 말도 하지 말자. 거기에서는 다툼만 생긴다. 우리는 오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다른 성도들과 이웃들과 화목하며 살자.


31장: 르무엘 왕의 잠언

1-9절, 절제, 술 취함, 공의

[1-3절] 르무엘 왕의 말씀한 바 곧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

르무엘 왕은 솔로몬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서원 기도를 한 경건한 어머니이었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이었다. 그는 자기가 서원하여 낳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으로 교훈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 1:11)와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딤후 1:5)처럼, 경건한 아들에게는 경건한 어머니가 있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교훈 중 하나는,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라는 것이었다. 정력을 여자들에게 다 소모하지 말고,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 즉 남의 나라들을 정복하는 일에 힘쓰지 말라는 뜻이다. 율법도, 왕이 말이나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도 많이 쌓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신 17:17).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셨고(요 6:27),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요일 2:15- 16). 또 사도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하였다(고전 9:25). 우리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선용해야 한다. 절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덕이며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4-7절]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艱困)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포도주와 술은 왕에게 합당치 않다. 술이 왕에게 합당치 않은 까닭은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 즉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왕의 직무들 중에는 재판의 직무가 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실수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왕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공정한 재판을 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도록 술을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가 술을 멀리하라고 교훈한다. 잠언 23:31은,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5:18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또 성경은 교회 직분자들이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디모데전서 3:3,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디모데전서 3:8, “[집사도]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디도서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 . .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성경은 심지어 나이든 일반 여성도들도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교훈한다(딛 2:3). 술은 고통당하는 자들과 마음이 괴로운 자들에게 잠시 그 고통을 잊게 하는 유익은 있다.

[8-9절]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伸寃)할지니라.

벙어리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변호자가 필요한 자이다. ‘고독한 자’라는 원어(콜 베네 칼로프)는 ‘모든 죽어가는 자(BDB), 불행한 자(NASB), 궁핍한 자(NIV)’라고 번역된다. ‘간곤한 자’라는 원어(아니)는 ‘고통당하는 자,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본문은 세상적인 조건들, 즉 사회적 신분, 재산 정도, 학력 등 따라 판결하지 말고 불의와 불법이 없게, 억울함이 없게, 법대로, 공의롭게,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교훈이다. 그것이 왕과 재판관의 임무이다.

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까닭은 자기의 이익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주의, 육신주의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내세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성도는 권력자나 부자 앞에 아부하지 말아야 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의롭게 살면 우리는 현세에도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과 물질적 여유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공의로운 삶을 이미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23:6-8,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 . .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 . .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레위기 19:15, 35-36,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왕은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고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바른 교훈을 주는 경건한 부모가 되고, 또 우리의 힘과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범사에 절제하는 자가 되자.

왕은 공정한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술을 마시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는 주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 술을 금해야 한다. 완전금주는 좋은 전통이다. 술 취함은 천국가지 못할 큰 죄이다(고전 6:10; 갈 5:21).

왕은 벙어리나 죽어가는 자나 궁핍한 자의 소송에서 공의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진리 중심으로만 살고, 가난하고 병약한 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공의롭고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10-19절, 현숙한 여인

[10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언의 마지막 부분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이다. 잠언은 이 말씀으로 마친다. ‘현숙한 여인’이라는 원어(에쉣 카일)는 ‘덕스러운 여인’(virtuous woman)(KJV), ‘훌륭한 아내’(excellent wife) (NASB), ‘고상한 인격의 아내’(NIV) 등으로 번역된다. 구약에 244회나 사용된 히브리어 카일은 ‘힘’이라는 단어인데, 본문에서는 육신의 힘뿐 아니라, 내면적, 인격적 힘, 즉 지혜와 덕성, 사리분별력, 판단력, 현실 대처 능력, 민첩함 등을 포함한다고 보인다.

‘진주’라는 원어(페니님)는 ‘산호’(coral)(BDB, KB)라는 뜻이며 ‘보석’(NASB), ‘루비(홍옥)’(KJV, NIV) 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길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돌이 아니고, 귀한 것, 즉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현숙한 여인의 가치는 진주나 보석보다 더 낫다. 잠언 12:4는, “어진 여인(에쉣 카일)[현숙한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라고 말한다. 진주나 보석은 사람이 노력하면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그 기준은 외모나 돈이나 가문에 있지 않고 내면성, 인격성, 경건과 지혜와 도덕성에 있다. 물론 사람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발견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자기 아내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19:14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말하였다.

[11-12절]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솰랄)[소득]이 핍절치[부족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현숙한 여인은 몸도 건강한 여자를 가리키겠지만, 내면적 지혜와 덕성이 있는 여자를 가리킨다. 현숙한 여인은 경건과 지혜와 덕성을 갖춘 유능한 여인이다. 본문은 그의 장점을 몇 가지 말한다.

첫째로, 그 남편의 마음이 그를 믿는다. 즉 그 남편이 그를 신뢰하고 믿는다. 그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신뢰받는 아내이다. 남편은 그의 인격, 그의 지혜, 그의 능력을 신임하고, 조금이라도 그를 의심하거나 불신임하지 않는다. 모든 아내들이 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

둘째로, 그 남편의 소득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집에 돈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아내가 게으르지 않고 돈을 낭비하지도 않으므로 그가 돈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또 그가 직장에서 부정한 돈에 유혹받을 필요도 없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족이 없이 살 것이다.

셋째로, 그는 남편에게 선을 행한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즉 평생토록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않는다. 그는 남편에게 유익을 주는 자, 좋은 내조자, 좋은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자를 위하여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셨다(창 2:18). 사도 바울은 디도서 2:4-5에서, “저들[나이든 여자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13-19절]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베케페츠)[즐거이] 손으로 일하며 상고[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간품하여[살피며]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솜뭉치[섬유를 붙드는 막대]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물렛가락]을 잡으며.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즐거이, 부지런히 일하는 자이다. 옛날부터 여성들은 천을 짜고 실을 만들고 옷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또 그는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온다. 그는 부지런해서 값싸고 좋은, 신선한 음식재료들을 멀리 가서 가져온다. 그것은 여성들이 도매시장에 가서 값싸고 신선한 음식재료를 사오는 것과 같다. 또 그는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긴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며 새벽밥을 지으며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며 충실하게 산다.

또 그는 땅이나 밭을 구입할 때 먼저 잘 살피고 사며 또 남의 신세를 지거나 빚을 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저축한 것으로 포도원도 만든다. 또 그는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한다.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일하는 자이다. 그는 일을 많이 해서 허리가 튼튼하고 팔도 강한 여자이다. 또 그는 자기의 장사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을 실 감는 막대(물렛가락, 방추, 굴대)에 두고 손으로 섬유 붙드는 막대를 잡는다(원문 순서). 그는 편안하게 생활하는 자가 아니고 밤늦게까지 직접 손으로 일하여 천을 짜고 실을 만들고 부지런하게 장사할 물건을 준비하고 챙긴다.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귀하다. 현숙한 여인은 경건과 지혜와 덕성, 사리분별력, 판단력, 현실 대처 능력, 민첩함 등을 갖춘 유능한 여인이다. 우리는 참된 경건과 지혜와 덕성을 갖춘 좋은 사람이 되려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고, 또 우리 자녀의 배우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주는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남에게 선을 베풀고 악을 행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 하고 엿새 동안 힘써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건강에도, 경제에도, 신앙생활에도 좋고 유익하다.

20-25절, 현숙한 여인 (계속)

[20-22절] 그는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그 집 사람들[집안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집안 사람들]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마르밧딤)[침대보들, 덮개들]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숙한 여인은 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민다. 그는 이기적이지 않고 선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구제한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그 집안 사람들에게 다 홍색 옷, 아마 따뜻한 겨울옷을 입게 하였으므로 겨울에 눈이 와도 그들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집안 사람들, 즉 그의 가족들과 일꾼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고 보살피는 자이다. 그는 춥고 눈이 오는 겨울철을 위해서 잘 대비한다. 오늘날도 부지런한 주부들은 가족들을 위해 따뜻한 겨울옷들을 미리 미리 준비할 것이다. 또 선한 사람들은 자기 집안 일을 하는 일꾼들도 돌아보며 그들도 추운 겨울을 잘 지내도록 배려할 것이다.

또 그는 자기를 위하여 침대보들이나 덮개들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옷을 입는다. 그는 남을 돌아보고 배려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일한다. 자색옷은 아름다운 옷을 가리킬 것이다. 게으른 자는 대체로 그의 주위 환경이 지저분하고 어수선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자는 그의 주위 환경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함으로써 그와 그 동행하는 자들의 쓸 것을 감당하였고(행 20:34), 또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성도들에게 교훈했다(엡 4:28).

[23절]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는 것은 성읍의 문제를 의논하거나 사람들의 재판사건을 평결하는 데 참여한다는 뜻이다. 옛 시대에 성문 앞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재판하는 장소이었다. 신명기 21:19에 보면, 불순종하는 아들은 성문에서 성읍 장로들에게 벌을 받아야 했다. 현숙한 아내는 남편이 사회 활동을 원만하게 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는 남편의 사회 활동을 위해 내조 역할을 잘 하는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남편은 직장이나 사회 활동들 등 바깥일들을 주로 하고, 아내는 자녀 출산과 양육, 집안 살림에 관계된 일들을 주로 한다. 잠언 24:27,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시편 128: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 디도서 2:5,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아내가 집안 일을 잘 하지 못하면 남편이 집안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겨 바깥일 즉 직장의 일이나 사회 활동에 부족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아내가 집안 일을 잘 하면 남편을 위한 좋은 내조자가 되어 남편이 바깥일에 전념하여 자기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일이 무엇이든지, 무슨 직업, 무슨 직장이든지 비슷할 것이다.

교역자의 경우도 그러하다. 어떤 사모는 시장 본 후 남편에게 자동차로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는 이가 있고, 동창회 끝난 후 남편 보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 이도 있고, 남편을 잘 챙기지 않고 밖으로 바쁘게 나돌아 다니다가 남편이 병에 걸린 경우도 보았다. 그러나 좋은 사모는 남편의 건강과 사역에 지장이 될까봐 범사에 조심할 것이다.

[24-25절]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현숙한 여인은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에게 맡긴다. 그는 손으로 일해 이익을 얻는다. 사람이 근면하고 절약하면 가난을 면하고 돈의 여유를 가질 것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 그는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는다. 그는 힘이 있는 자이다. 그는 몸의 힘도 있지만, 또한 지혜와 덕성, 또 생활의 능력이 있는 자이다. 또 그는 인격의 품위가 있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자이다. 그는 인격과 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본이 되며 존경을 받는다. 룻기 3:11에 보면, 베들레헴 성읍 백성은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 룻이 경건하고 착하고 현숙한 여자인 줄 다 알았다.

현숙한 여인은 또 후일을 웃는다. 세상에는 현재 웃지만 후일에 우는 자가 있고, 현재 수고하지만 후일에 웃는 자가 있다.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개미는 여름 동안에 먹을것을 예비한다(잠 6:8). 잠언 10:5는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라고 말한다(잠 10:5).

특히 경건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영생의 복을 준비한다. 하나님 앞에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시 16:11). 잠언 14:32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면 장래에 자기를 위해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딤전 6:17-19).

우리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또 자기 집안 사람들도 돌아보자. 또 우리는 자신의 일도 충실히, 부지런히 하자.

현숙한 아내는 그 남편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로 만든다. 우리는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각자 맡겨진 직무에 충실하자.

우리는 경건하고 선하고 근면하고 검소 절약하게 삶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이 땅에서의 후일과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자.

26-31절, 현숙한 여인 (3)

[26절]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현숙한 여인은 입을 열어 지혜의 말을 한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말을 하고 미련한 자는 미련한 말을 하며, 선한 자는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악한 말을 한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잠언이 증거하는 대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이다.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운 자이며 다른 이에게도 지혜의 말을 한다.

현숙한 여인은 또 인애의 법을 말한다. 20절도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민다”고 말했었다. 하나님의 뜻은 인애와 사랑이다. 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고(레 19:18), 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다(호 6:6). 또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주 예수께서도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5-40).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23). 그는 믿음과 서로 사랑함이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임을 말한 것이다.

[27절]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또 현숙한 여인은 집안 일들을 잘 보살피는 자이다. 13-14절은 그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온다고 말했었고, 15절도 그가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먹을것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긴다고 말했다. 또 18절도 그는 밤에 등불을 끄지 않는다고 말했고, 24절도 그가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긴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 일들을 부지런히 하는 여인이다. 디도서 2:4-5는 젊은 여자들이 그 가족을 사랑하고 집안 일을 하라고 말한다.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하고, 데살로니가후서 3:10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했다.

[28-29절]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사례하다’는 원어(와예앗쉐루하)는 ‘[그리고] 그를 복되다고 부른다’는 뜻이고, ‘덕행 있다’는 원어(아사 카일)는 ‘능력 있게 행한다, 덕스럽게 행한다’는 뜻이다. 현숙한 여인은 가족들에 대한 주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는다. 사람의 인격의 좋고 나쁨은 그의 가족들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식구들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확실히 좋은 인격자일 것이다. 성도는 가정에서부터 인정받는 자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했다(딤전 5:8). 또 베드로는 여성도들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도 순복함으로써 그 남편이 자기 아내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보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벧전 3:1-2).

[30절] 고운 것(켄)[은혜, 우아함(elegance)](BDB)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본문은 여성의 외적인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헛되고 거짓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치는 외모에 있지 않고, 그의 경건과 도덕성과 인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1:22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2:4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했다.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할 때 선한 인격이 형성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자가 된다. 잠언 16:6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선하고 좋은 인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5:16-17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보통]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31절]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그 손의 열매, 즉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하고 인자하며 부지런하게 행한 결과는 복으로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건강과 평안과 물질적 여유를 가질 것이다. 시편 128:1-2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하였다. 그런 사람은 교회의 교우들과 그를 아는 이웃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지혜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의 말을 하고 인애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일에 근면하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아야 하고 또 가족들이나 교우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너무 중시하는 시대 풍조를 반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경건한 삶을 살고 또 성경의 교훈대로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미주

1) 박윤선, 구약주석: 잠언 (상) (서울: 영음사, 1985), 12-13쪽.

2) 위의 책, 13-14쪽.

3) ‘지혜 없는 자’로 8번(7:7; 9:4, 16; 10:13; 11:12; 12:11; 17:18; 24:30), ‘무지한 자’로 2번(6:32; 15:21), ‘지식이 없으므로’라고 1회(10:21) 번역되었다.

4) artificer(기술가, 장인)(BDB), master workman(명인)(NASB, LXX, Syr, Vg), craftsman(장인)(NIV).

5) 보통 히브리어 동사의 재귀형은 니팔형이나 힛파엘형이지만.

6) KB, Langenscheidt; Gesenius의 문법책, p. 150; Matthew Poole.

7) ‘등에 매’(NASB, NIV, KB)라는 번역은 가아와 (교만)라는 원문을 임의로 게오(등)라고 고쳐 읽은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추측일 뿐이다.

8) ‘앞을’이라는 원어(민네겟 레)는 ‘앞으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BDB), 여기서는 ‘. . . 의 앞으로부터’라는 뜻 같다(KJV, NASB).

9)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수리아역은 “미련한 자의 마음에는 그것이 알려지지 아니하니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다르다. 근래의 한 영어성경은 “미련한 자의 속에서는 그것이 알려지느니라” (NASB)고 번역하지만, 문맥적으로는 옛날 영어번역(KJV)이 나은 것 같다.

10) 이 말은 주로 ‘지혜 없는 자’라고 번역되었는데, 잠언에서 11번 사용되었다: 잠 6:32; 7:7; 9:4, 16; 10:13, 21; 11:12; 12:11; 15:21; 17:18; 24:30.

11) 왕상 15:19; 왕하 16:8; 잠 6:35; 21:14 등.

12) ‘죽으리라’는 원어는 유마스[죽임을 당하리라](Syr, Vg)라고 쓰여 있으나(케팁), 전통적인 마소라 학자들은 야무스)[죽으리라] (Targ)라고 읽었다(케레). 그러나 쓰여진(케팁) 대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13) 베케세프라고 된 사본들도 매우 많다고 함(BHS).

14) 유대교 학자들은 ‘즐거워해야 한다’는 원어(티르체나)를 ‘지켜야 한다’(팃초르나)로 읽으라고 제안했지만(케레)(LXX, Syr, Targ, Vg; KJV, NIV), 쓰여진 대로(케팁), ‘기뻐해야 한다’(티르체나)로 읽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NASB).

15) 31절의 ‘잔’이라는 원어는 유대교 학자들이 제안하는 읽기(코스)이며 고대 역본들의 지지를 가지지만(LXX, Syr, Targ, Vg; KJV, NASB, NIV), 히브리어 본문에는 원래 포도주 부대(키스)라고 써 있다(케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