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공동서신 ·계시록 강해·김효성목사

베드로후서 1-3장

영국신사77 2020. 4. 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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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8월 29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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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신앙의 성숙

2장: 거짓 교사들

3장: 주의 날

서론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3:1,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유다서 17-18절은 본 서신을 인용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베드로전서와의 문체의 차이는 그가 베드로전서에서 실루아노를 대서자로 사용한 것과 달리 본서에서 그 자신이 썼거나 다른 대서자를 사용한 것에 기인할 것이다. 베드로후서가 사도 베드로가 쓰지 않은 가짜 서신(僞書)일 수 없음에 대하여, 룸비(Lumby)는 말하기를,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위조자가 고의적으로 그런 사도의 이름을 가지며 또 자기가 주장할 수도 없는 체험을 내세운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문제이다”라고 하였다.1)

본서의 저작 연대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후 즉 주후 66년 내지 67년경일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특징적 주제는 이단에 대한 경고이다. 본서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을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베드로후서는 장차 나타날 거짓 교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비해, 유다서는 당시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에 대해 말한다.

베드로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신앙의 성숙

2장, 거짓 교사들

3장, 주의 날

1장: 신앙의 성숙

1-4절, 구원의 내용과 목적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이다. ‘사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사명을 주셔서 보내신 자를 가리킨다. 그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돌아보는 것이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원어는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NASB).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과 속성들, 그가 행하신 신적 사역들, 그가 받으시는 신적 영광 등에서 증거된다. 예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요 1:1; 20:28),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으로 불리셨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시다.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代贖)의 의(義)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또 그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고전 1:30). ‘의를 힘입어’라는 말은 ‘의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때문에 시작되었고 또 견고케 된다(롬 3:24; 고전 6:1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의를 믿는 것이다. 여기에 구원과 영생이 있다.

베드로는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다. 세상의 금은 보화로는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예수님을 믿는 참된 믿음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막 16:16; 요 3:16).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매우 값진 것이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은 참 믿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남녀노소, 빈부귀천,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움을 증거한다. 성도의 보배로운 믿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공통적인 믿음이다. 디도서 1:4, “같은[공통적] 믿음(common faith)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식을 강조한다(벧후 1:6; 3:16).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은혜이며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고 마음의 참 평안을 얻었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적 여유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누린다(잠 3:7-10; 마 6:33). 이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3절] 그의 신기한(데이오스)[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죄로 인해 죽었던 영혼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경건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그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다. 그의 구원의 사역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덕으로써’라는 말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곧 그의 긍휼과 사랑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구주 하나님을 앎으로써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었다.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절에 말한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말을 가리킨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내용, 즉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런 구원을 약속하셨다. 디도서 1:1-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神)의 성품’이라는 원어(데이아 퓌시스)는 ‘신적인 성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죄책(罪責) 즉 죄인이라는 신분과 법적 책임을 회복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죄성(罪性)을 극복하는 것을 포함한다. 죄책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즉시 회복되지만, 죄성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 비록 매우 더디지만 점진적으로 극복된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되었으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셔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義)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보배로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셨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안을 더 많이 누리기를 기도하자. 성도의 성화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동반하며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더 풍성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그것은 영광스런 몸의 부활과 영광스런 천국에서의 영원하고 복된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금은 보화와 비교할 수 없고 그런 것들로 살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보배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예수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5-11절, 더욱 힘쓰라

[5-7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더욱 힘써’라는 원어는 ‘모든 부지런함과 열심을 보여’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다음 일곱 가지를 더하는 일에 모든 부지런함과 열심을 보여야 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4:1에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더욱 힘쓰라고 교훈한 그 일곱 가지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는 덕이다. 덕은 선한 성품을 가리킨다. 믿음에는 선한 성품이 필요하다. 믿음이 선한 성품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든지 아니면 심히 부족하고 결함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선한 성품, 즉 덕스러운 성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는 지식이다. 우리의 믿음은 덕뿐 아니라, 지식도 필요하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자는 성경책을 시시때때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써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이 풍성해져야 한다.

셋째는 절제이다. 절제는 지식에 있어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또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해주시지 않은 것을 지나치게 상상하거나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4:6,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또 절제는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는 즐거움, 결혼의 즐거움 등 삶의 즐거움을 주셨다. 성경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며(전 2:24; 3:13; 5:18; 8:15) 또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다(전 9:9). 그러나 우리는 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육신적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넷째는 인내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말세에 대 환난의 시대에 믿음과 인내를 가져야 한다(계 13:10).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도 인내가 필요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13:4, 7).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기다릴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다섯째는 경건이다. 경건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알고 항상 그를 의식하며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태도이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고 그와 동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모든 신자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여섯째는 형제 우애 혹은 친절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8에서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19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를 원하신다.

일곱째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아가페)은 ‘형제 우애’라는 말(필라델피아)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 즉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마 5:44; 18:22).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8-9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만일 우리에게 위와 같은 내용들이 있으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에 있어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내세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고 하나님께서 그의 옛 죄들을 깨끗케 해주셨음을 잊어버린 자와 같다.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는]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아니할 것임이니라].

사도 베드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다시 강조한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얻은 증거는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가 이것을 행하면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참된 믿음의 증표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자라고 강해진다. 성도의 승리의 비결은 계속 순종하기를 힘쓰는 데 있다.

[11절] [이는]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주실 것임이니라].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소유하면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즉 영광의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실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행실의 열매가 있는 사람은 그 확신을 간직할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순종 생활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성도가 범죄하면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처럼, 그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며(시 51:12) 구원의 확신을 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 믿는 자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기를 더욱 힘써야 한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하는 이런 덕목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자는 소경과 같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과거의 모든 죄들을 다 용서하셨음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선한 행위는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주께서는 행함이 없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셨다(마 7:24-27).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을 안다고 말했다(살전 1:2-4).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과 택하심을 선한 행위로 확증해야 한다.

셋째로,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의 선한 행실들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그들 속에 죄성이 남아 있고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 살지만 실족하지 않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종하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12-21절,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가지 증거

[12-15]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사도 베드로는 서신을 받는 자들이 이미 복음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위에 섰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믿어 보려고 하는 자들 외에는 많은 신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복음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항상 기억하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해 이 서신을 쓴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요 21:18-19) 자신이 장막을 벗어날 시간 곧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성도들을 교훈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적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죽은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때 이 진리가 생각나게(3번) 하려고 죽기 전에 힘써 교훈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 있다. 여기에 좋은 책들이나 설교 녹화물들이 필요한 이유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좋은 책들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늘 기억하며 교훈을 얻고 은혜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이다.

[16-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사도 베드로는 특히 하나님의 복음 진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강림하심 즉 그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해 말한다. 그는 예수께서 본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요 17:5) 사람으로 내려오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소유한 분이심을 증거한다(요 1:14).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이다.

베드로는 이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에 관한 진리가 ‘공교히 만든 이야기’ 즉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들이 그의 크신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했다. 그것은 마태복음 17장이나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대로(막 9장; 눅 9장) 그와 다른 두 제자들이 주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주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음성으로 그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하신 내용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음성으로 그를 증거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예수님에 대한 한 중요한 증거이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적 영광에 대한 목격자이었던 사도 베드로의 증언이다.

[19-21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注意)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전통본문)2)말한 것임이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를 말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것은 그가 친히 보았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한다. 성경은 사람의 그 어떤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은 어두운 곳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밤에 불빛이 없다면 길 가는 자나 길을 찾는 자는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 것인가? 죄로 인해 어두워진 세상에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특히 그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의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달을 때까지 성경을 가까이 하며 읽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자세히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이 주관적으로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해석해야 할 책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자가 알아야 할 매우 기본적인 일이다. 성경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방법은 첫째, 문법적으로 해석하고 둘째,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이해하면서 해석하고 셋째,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곧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받고 기록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을 항상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책들로 남아 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교훈이다. 사도들은 우리 곁에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책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책들을 남겨두신 것은 우리로 그들의 교훈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하심이다.

둘째로, 우리는 특히 사도들의 증언인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믿고 확신하자. 그들의 증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친히 본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친히 보았고 또 그가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 음성으로 그에 대해 증거하신 것을 들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에 대한 목격자들이며 증인들이었다.

셋째로, 우리는 그들의 증언들보다 더 확실한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믿고 확신하자. 성경은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였고 그의 보내시는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였다. 구약성경은 모세가 그것의 처음 다섯 권을 쓴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책으로 인정되었다. 구약성경의 권위는 확고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은 그 성경이 증거하는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깨달을 수 있다. 메시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다(사 9:6).

2장: 거짓 교사들

1-9절, 거짓 교사들의 교훈과 결말

[1-3절]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구약교회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종종 나타났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사탄은 모든 거짓말들의 근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 . . [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와 같이, 신약교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에 대한 말씀과 복음 진리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참과 거짓, 진리와 이단의 구별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이 없음이니라].” 여기의 빛은 지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예언되었고 이 예언은 역사상 성취되었다. 주께서도 그의 재림 직전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4).

거짓 교사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단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다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구원 대신 멸망을 준다. 왜냐하면 이단의 본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곳에는 멸망만 있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4:1-3,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고백]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바울은 이단들이 결국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며(고후 11:3-4), 실상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라고 말했다(고후 11:13-15).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음란함이다. 본장의 뒷부분에도 이런 특징이 계속 언급되어 있다. 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14절, “음심(淫心)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18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이단들의 이런 부도덕함으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음란함은 인간의 양심에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한다는 자들이 거룩과 의(義)를 저버리고 음란함에 빠진다면 구원의 진리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단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운동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탐심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특히 돈과 물질적 부요를 사랑할 것이다. 이단들은 세상의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말을 지어내며 거짓말도 한다. 그들은 진리의 사람들이 아니다.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이 받을 심판과 멸망은 옛날부터 지체하지 않고 잠자지 않는다.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의 결말은 멸망이며 그들의 멸망은 임박하다. 마태복음 25:41,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들의 멸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어두움의 사슬에 묶어]3)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신약교회에 나타날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에서도 증거된다.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신 사실이다. 4-5절에 ‘용서하다’는 원어(페이도마이 feivdomai)는 ‘아끼다, 용서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들을 아끼거나 용서하지 않으시고 어두움의 사슬로 묶어 지옥에 던져 넣으셨다. 범죄한 천사들 중 일부는 지금도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어두운 지옥에 갇히어 있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도 아끼거나 용서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5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두 번째 증거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사실이다.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디카이오쉬네스 케뤽카)이었다. 음란하고 강포한 그 시대에 노아는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의 거룩을 지킨 자이었음에 틀림없었고 또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순종한 자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義)를 말과 행실로 증거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불경건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멸망시키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도 멸망시키실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한 성도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뒤집어엎어 정죄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세 번째 증거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유황불비를 내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 성들을 다 엎어 멸하셨다(창 19:24-25). 이 사건은 후세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이 된다.

[7-9절]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소돔 성과 고모라 성의 성 도덕은 극도로 문란해져 공공연히 동성애가 행해졌다. 의로운 롯은 그들 가운데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 이런 악은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 있다. 현대 사회는 음란한 사회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노아처럼, 롯처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의 영혼들은 지옥에 던지우고 수감되어 마지막 심판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며 거짓 교사들의 결말도 그러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들여오는 자들이다. 우리는 오직 신구약성경으로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개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내용이 개혁신학이며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복음이라고 본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을 늘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의 특징인 음란과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2절,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3절,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세상이 성적으로 문란할지라도 우리는 음란을 경계하고 거룩하며 절제해야 하고, 이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를 따를지라도 우리는 탐심을 경계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이 받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특히 지옥 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유황불 심판은 역사적 사건들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자이심을 증거한다. 심판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세상은 결국 불경건과 음란과 방탕으로 멸망할 것이다. 지옥은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형벌의 장소이다. 그러나 경건하고 거룩한 성도들은 멸망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22절, 거짓 교사들의 특징들

[10-13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톨메테스)[건방지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거슬러]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불의의 보응을 받으며](전통본문)4) 낮에 연락(宴樂)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宴會)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宴樂)하며.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좀더 말한다. 첫 번째는 음란이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했다. 음란이 더러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부부관계를 벗어나 몸으로 짓는 죄이기 때문이다. 음란의 죄는 자기 몸을 더럽히고 결국 가정을 불행케 만든다.

두 번째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합법적 권위를 가진 직분자들을 세우셨다. 그들이 목사와 장로들이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멸시했고 그들을 비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교인들이 목사들과 장로들을 전혀 비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과 장로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과 실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을 비평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아니, 그들을 자주 비평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평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며 그의 사랑하시는 종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교훈을 받고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교회에 덕과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비난은 교회를 건설하는 대신 그것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에 대한 비난은 매우,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저 거짓 교사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난하는 송사를 하지 않았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이만큼 조심스런 일이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의 비난은 이치에 맞는 정당한 비평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짐승과 같으며 멸망 중에 멸망을 당하고 불의의 보응을 받을 자들이라고 다시 언급된다. 거짓 교사들의 행위는 또 육체적 쾌락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는 낮에 육신적 쾌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먹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거룩한 교회 안에서 점과 흠이다. 그들은 교사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 마귀의 종들이며 세상적인 사람들이었다.

[14-16절] 음심(淫心)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저버리고 곁길로 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음란함을 다시 말한다.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 즉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유혹했다. 음란한 세상 속에서 또 거짓 교사들의 음란한 유혹에 대항하여, 성도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 또 성경 교훈대로(고전 7:1-5)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의 세 번째 특징은 물질적 탐욕이었다. 그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른 길을 저버리고 곁길로 간 자들이었으며 마치 옛날 불의한 선물을 사랑하여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시킴을 받아 말로 책망하였던 선지자 발람의 길을 좇는 자들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물질적 탐심과 세상적 명예심을 따라 간 발람의 행위를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는 저 거짓 교사들을 ‘저주의 자식’이라고 말함으로 그들의 결말이 어떠할 것을 다시 한 번 더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17-19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영원히]5)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참으로]6)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저희가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저희 자신이 부패의 종들이니](원문, KJV, NASB)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거짓 교사들은 ‘물 없는 샘’과 같아서 그 속에 생명수 같은 진리의 말씀이 없다. 그들은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에 불과하다. 그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영원히 예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킨다고 본다. 거짓 교사들의 음란함의 특징이 또 언급된다. 그들은 허영의 부풀린 말을 하면서 미혹한 데 행하는 자들에게서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그들 자신이 부패한 종들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 사람이 반복해서 범죄하면 죄의 종이 되고 그러면 결국 멸망의 종이 될 것이다.

[20-22절]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사람이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더러움 가운데 떨어져 산다면, 그의 형편은 주를 알기 전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거짓 교사들은 바로 그런 자들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고(잠 26:11) 돼지가 씻은 후에 더러운 구덩이에 누운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알고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다시는 죄악된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음란치 말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였고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졌다. 데살로니가전서 4:3-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둘째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은 교만하고 건방지고 자신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하고 비난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셋째로, 우리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은 탐욕을 가졌다.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돈을 사랑한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3장: 주의 날

1-13절, 주의 날

[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사도 베드로가 두 개의 편지를 쓴 목적은 성도들의 진실하고 순진한 마음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었다.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며,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은 신약성경을 가리킨다. 그가 쓰고 있는 서신도 그 중에 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나타나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항상 읽고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그의 진리와 교훈이 풍성히 거하여 우리가 그것을 믿고 소망하며 위로를 받고 행함으로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에게 영광이 되기를 원하신다.

[3-4절]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말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불신앙적인 목사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재림의 진리를 비웃고 조롱할 것이다. 앞장에서 말한 대로, 정욕적 삶과 음란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조상들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말한다. 예언된 종말적 대변혁의 징조들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고 공공연히 부인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불신앙과 이단을 전파하는 사탄의 종들이다.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일어났던 배교 운동들의 은밀한 사령탑, 즉 가장 우두머리에는 사탄이 있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적 사상들을 분별하고 대항해야 한다.

[5-7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그의]7)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을 두 가지 점에서 반박한다. 첫째로, 그는 하늘과 땅이 옛적부터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그의 말씀으로 다 창조하셨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이라는 말은 ‘땅이 물에서부터 또 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으로 창세기 1:9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사도 베드로는 옛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가리킨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에 강포가 가득함으로 40일 동안 홍수를 일으켜 멸할 것을 선언하셨다(창 6:13, 17). 그는 그의 말씀대로 홍수 심판으로 세상을 벌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현재의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서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을 믿는다면, 미래의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 불신앙적 교사들은 이 모든 사실을 고의로 잊으려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경고를 의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매튜 풀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사람은 시간에 종속되고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모든 일들이 현재이며 시간의 길고 짧음도 없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아니 창세 이후의 수천년이 단 하루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지연됨을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하심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표현도 우리에게 짧은 시간도 하나님께는 길게 느껴지실 수 있음을 보인다.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의 재림이 더딘 것 같음은 실상 더딘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넓게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았거나 살고 있거나 장차 출생할 모든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8)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스토이케이아)[원소들]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전통사본).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더딘 것 같지만 밤에 도적같이 갑자기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타 없어질 것이다.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이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 버릴 것이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에는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도 포함될 것이 분명하다.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불타 버리리라’는 말(카타카에세타이)이다.

[11-12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베드로는 계속하여 주의 재림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땅의 원소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불에 타서 풀어질 것이라고 증거한다. 주의 재림의 날은 한마디로 심판의 날이다. 죄와 저주로 더러워진 현재의 세상은 다 불타 버릴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사실 앞에서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라고 물으면서 중요한 교훈을 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라는 원어(복수형)는 강조하는 뜻을 가진다고 본다.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더욱 온전히,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또 날마다 하나님만 소망하며 주야로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또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다른 하나의 일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1:1, 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천국은 의(義)의 거하는 세계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 죄악된 일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장차 오는 세상인 천국은 의인들만 거하는 세상, 죄가 없고 의(義)만 가득한 세상이다. 거기에는 죄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죄의 더러움과 저주와 허무함이 없는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항상 성경책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교훈을 받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성경을 늘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나는 불신앙적 이단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경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용납하고 있다. 또 많은 보수적 교회들과 목사들이 자유주의 교회들과 목사들과 거리낌 없이 교제하고 협력하고 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천주교회를 용납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배교와 타협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앙적인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바라며 또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을 믿고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님 자신과 사도들에 의해 밝히 증거된 진리이며 소망이다. 주의 재림의 날은 더딘 것이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그가 만세 전에 택하신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마침내 밤에 도적같이 갑자기 올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도 성경의 근본 교리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죄악된 세상은 다 불타 버리고 새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며 죄인들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교훈과 약속과 경고를 다 믿고 또 두려워해야 한다.

넷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11-12절). 우리는 장차 멸망할 이 세상에 속한 자들처럼 살지 말고, 복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천국에 속한 자들답게 거룩하고 경건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늘 깨어 있는 자들처럼 살아야 한다.

14-18절, 온전함을 위해 힘쓰라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사도 베드로는 본장에서 본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거듭 불렀다(1, 8, 14, 17절).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보인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또 성도들은 주의 종들을 사랑하며 그 입에서 나오는 바른 교훈을 성심으로 받고 믿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앞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의 천국을 생각할 때 우리가 마땅히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것은 우리가 불타 없어질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가 없고 오직 의(義)만 가득한 천국에 속한 자답게 거룩하고 의롭고 흠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천국은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이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죄 없는 상태,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함, 즉 도덕적 완전의 상태는 하나님의 구원 목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도덕적 완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도덕적 완전은 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헤기아스메노이스, 완료분사)[거룩하여졌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과거시제).”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분사).”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완료시제).”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죄가 많고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도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전한 거룩의 상태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도덕적 완전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완전 성화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이어야 한다. 물론,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나 우리 자신도 완전 성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 “더욱 많이 힘쓰라.” 베드로후서 1:5, 10, “더욱 힘써.” 3:14,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 . . 나타나기를 힘쓰라.”

[15-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 회개치 않은 택한 자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9절).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바로 아직 회개치 않은 택자들의 구원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곧 오시는 것도 기다리는 바이지만, 그가 지체하시는 것도 회개할 영혼들을 위함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바울을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표현하면서 사도 바울도 이런 일들 곧 주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과 천국에 관해 그의 서신들에서 썼음을 말한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짐을 암시한다. ‘그 모든 편지에도’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신들이 그 당시에 많이 알려졌고 수집되어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다른 성경과 같이’라는 표현은 그가 바울 서신들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인다. 여기에 사도들의 글들의 권위가 있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말씀 전파의 특별한 임무와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글들은 신적 권위의 책으로 간주되었다.

단지, 베드로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들의 어떤 어려운 부분들을 잘못 해석함으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억지로 푼다’는 원어(스트레블로오)는 ‘왜곡시키다, 변개시키다’는 뜻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복음 진리와 다른 것을 말하고 정로(正路)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은 멸망할 큰 죄가 된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은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뜻을 잘 파악하고, 모든 성경을 거기에 조화시켜 해석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아멘.]10)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이단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고 확신함에서 이탈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것을 권면하였다. 우리는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그 지식 안에서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였다(엡 4:13-1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앞에서 흠 없는 온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온전함을 우리의 구원의 목표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이루셨다. 우리는 예수님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다. 그러나 이 법적인 의와 거룩은 우리의 성실한 노력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완전 성화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택자들의 구원이 될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딘 것이 아니고 택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지체되는 것임을 알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권위를 알고 또 성경을 왜곡시키는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귀히 여겨야 하고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여 바르고 온전한 지식과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미주

1) Expositer's Bible, VI, 675; 디이슨, 신약개론, 422쪽에서 재인용함.

2) Byz א A vg copsa-mss 등이 그러함.

3) Byz p72 vg copbo arm 등이 그러함.

4) Byz A C vg copsa bo 등이 그러함.

5) Byz A C copbo-ms 등에 있음.

6) Byz א* C arm 등이 그러함.

7) Byz א C syr 등이 그러함.

8) Byz C vgmss 등에 있음.

9) Byz A vgcl copbo eth 등이 그러함.

10) Byz p72 א A C vg copsa bo arm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