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Ⅲ.그리스도의 뛰어난 능력 11:1-13:19
1.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능력 11:1-40
2.그리스도를 바라는 소망의 능력 12:1-29
Ⅳ.축복과 끝맺음 1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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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차례
11장: 믿음의 선조들[믿음]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주께서 주시는 징계,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14)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15)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포르네)[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16)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13절, 믿음의 경주와 징계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17)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달리기 경주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리기에 임하듯이,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아내와 자녀들 등 가정에 대한 염려를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음란, 거짓과 탐욕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6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그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
[2절] 믿음의 주(아르케곤)[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완성자](KJV, NASB, NIV)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온전케 하실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모범을 보이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비난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고 벌거벗기어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와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그런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고 달려야 한다.
[3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의 위선과 부족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지만, 그때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를 생각하며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해지거나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또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5).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엡 6:4; 딤후 3:16).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사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6-8절]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9-10절] 또(에이타)[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1-13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그러나 교훈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삶은 또한 ‘평안’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의 평강한 열매 즉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성도의 삶은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구원받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의 시작자와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친히 고난 중에 오래 참으신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징계를 달게 받고 잘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는 참 아들의 표이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즉 징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에 참여케 된다. 징계는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성화를 이루고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고 잘 참아야 한다.
14-29절, 화목과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또 거룩한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갈 5:20).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목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하여졌다(고전 1:30; 히 10:10, 14). 그러나 이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님을 뵈올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것인가?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뵈올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5-17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베벨로스)[불경건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표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교회에 그런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불평, 원망을 가진 자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힌다. 셋째로, 우리는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행은 사람에게 있는 대표적 죄악이다.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자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과 바꾸려는 자가 그러하다.
[18-21절]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의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시내산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 백성과 달리, 우리는 시내산 대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평안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였다.
본문은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계 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0이 말한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요 건축자이신 성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다. ‘천만’이라는 말(뮈리아스)은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들이 다 천국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하게 나타내신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죄성이 없는 온전케 된 영들이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다.
[25-27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랄룬타)[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 바른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 1:4) 나라이다.
[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감사하자](NASB, NIV, Thayer, BDAG).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진동치 않을 나라인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말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혹시 마음에 상한 것이 있으면 속히 풀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삶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둘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원망, 불평의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셋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떤 큰 징벌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그가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진지하게 읽고 듣고 받고 믿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필라델피아)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포이킬로스)[다양한] 다른(크세노스)[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오네이디스모스)[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 때로부터 교회에 목사들과 장로들을 세우셨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되었음을 보인다.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기록했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에 이런 유의 서신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또 초대교회의 증거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신약성경의 정경을 선언한 칼타고 회의는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그가 다른 서신들과 달리 이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또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이다. 찬송은 우리의 입술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이다.
둘째로, 우리는 선행과 구제를 힘써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행과 구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셋째로,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물론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마치 자신이 결산할 자인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 직무를 다해야 하지만, 교인들은 그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이 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해야 한다. 선행과 순종이 단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미주
1) Byz syr 등에 있음.
2) 골로새서 1:15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하였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말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특별한 관계, 즉 아버지와의 영원적인 관계를 가리켰다.
3) ‘다시’라는 말이 ‘들어오다’라는 말에 관계되는지(NASB), 아니면 ‘또 다시’라는 뜻으로 5절 중반의 ‘또 다시’처럼 단지 성경구절의 반복된 인용을 가리키는지(KJV, NIV) 확실치 않다. 후자라면,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하겠지만, 전자라면, 주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 같다.
4)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으나 헬라어 70인역에는 있음.
5) ‘천사보다’라는 말의 원문(메엘로힘)은 ‘하나님보다’이다. ‘천사들보다’라는 본문은 고대 70인 헬라어역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보다 결코 조금 못한 존재는 아니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질적 차이는 무한하다. 또 문맥적으로 만일 시편 저자가 ‘하나님보다’라는 뜻으로 말하려고 했다면, 그는 ‘하나님보다’라는 3인칭보다는 ‘당신보다’라는 2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6) ‘붙들어 준다’는 원어(에피람바노)는 ‘붙잡다’는 뜻 외에 ‘본질을 취한다’(it, vg, syr, Calvin, KJV 등), ‘돕는다’(Thayer, BDAG; NASB, NIV 등)는 뜻도 가지고 있다.
7) Byz C vgmss syr copbo 등이 그러함.
8) 여기에 말한 ‘금향로’(크뤼순 뒤미아테리온)는 성소에 있었던 금으로 싼 분향단(출 30:1; 헬라어로 뒤시아스테리온 뒤미아마토스)을 가리키지 않고 금향로(대하 26:19, 뒤미아테리온)를 가리켰다고 본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이 1년 1차씩 사용했던 금향로는 지성소에 보관되었다고 말했다(Josephus, Antiquities, 3. 7). 솔로몬 성전에서 금향단의 위치는 분명치 않다. 열왕기상 6:22, ‘내소[지성소]에 속한 단’이라는 원어(함미즈베아크 아쉐르 랏데비르)는 ‘내소를 향한 단’이라는 뜻 같다.
9) Byz א Clement Origen 등이 그러함. ‘나의 갇힘들’이라는 말은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보이는 것 같다.
10) Byz vgms syr 등에 있음.
11) Byz p13 vgmss copbo eth 등이 그러함.
12) 본장에서는 ‘믿음’(2회), ‘믿음으로’(20회), ‘믿음을 좇는’ 혹은 ‘믿음을 따라’(2회)라는 단어나 구절이 24회나 나온다.
13) Byz syr 등이 그러함.
14)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는 원어(네네크로메누 nenekrwmevnou)는 완료수동태 분사, 남성소유격으로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15)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예를 들면, ‘더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 ‘더 좋은 제물’(9:23),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 등이다.
16) 이사야의 승천과 순교자 저스틴의 트리포와의 대화(A Dictionary of the Bible, ed. James Hastings, II, 486).
17) 원문에서 1, 2절에 중심적인 말(주동사)은 ‘경주하자’이며 ‘벗어버리고’ ‘바라보자’는 말들은 분사 형태이다.
18) Byz C vgmss syr Clement 등이 그러함.
19) Byz syrc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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