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Ⅰ.뛰어나신 그리스도 1:1-4;16
1.선지자들보다 1:1-4;16
2.천사보다 1:1-4;16
3.모세보다 3:1-6
4.믿음의 최고 목표이신 그리스도 3:7-4;16
Ⅱ.그리스도의 뛰어나신 제사장직 5:1-10:39
1.그의 자격 5:1-10
2.경고 -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라 5:11-6:20
3.제사장의 계열에서 7:1-13
4.제사장의 사역에서 9:1-10
5.경고-그리스도를 경외하라 10:19-10:39
Ⅲ.그리스도의 뛰어난 능력 11:1-13:19
1.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능력
2.그리스도를 바라는 소망의 능력
3.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능력
Ⅳ.축복과 끝맺음 1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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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다]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큰 구원,구원의 창시자]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4장: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변절을 경계하다]
6장: 확실한 소망[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7장: 더 좋은 소망[멜기세덱]
8장: 더 나은 직분[새 언약의 대제사장]
9장: 영원한 단번 속죄[손으로 지은 성소와 온전한 성소,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소망을 굳게 잡으라]
11장: 믿음의 선조들[믿음]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주께서 주시는 징계,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서론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본서는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6)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고(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들(목회서신 전에) 중에 포함시켰고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4 (빌 2:9), 2:2 (갈 3:19), 2:10 (롬 11:36), 7:18 (롬 8:3),
7:27 (엡 5:2), 10:33 (고전 4:9), 11:13 (엡 2:19), 12:22 (갈 4:25-26),
13:5 (딤전 3:3; 6: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지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이었고,
저작 연대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4, 13; 9:4-5, 9; 10:1, 8, 11; 13: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서 8:13,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4; 6:9; 7:7, 19, 22; 8:6, 6; 9:23; 10:34; 11:16, 35, 40; 12: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린도후서 3:9, 1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구약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말한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 어떤 내용의 추가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교훈과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신약 계시의 내용이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상징(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약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난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에서는 상징적으로 또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이 신약 계시에서는 실체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계시하기를 원하신 만큼, 또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였다.
[2-3절] . .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1)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은 신약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 . .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보인다.
[4-5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이라는 원어(톤 프로토토콘)2)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3)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KJV, NIV).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선한 천사는 죄가 없고 거룩하므로 죄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4)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들과 달리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신다.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 특히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자들의 구원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을 들으셨고,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내용과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는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신약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분히 다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신약성경을 넘어서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고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는 것은 극히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로, 우리는 신약계시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의 신적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죄 없는 새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것이 그가 하신 가장 큰 일이었다. 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의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은 바람 같고 불꽃같이 사용되지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소망하며 찬송하자.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3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프로세코)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요 3:36).
이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면으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휘페르 판토스)[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의 내용인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5)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이라는 원어(브라퀴)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과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디 호 타 판타)[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말은
인간 예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온전한 구주가 되셨음을 말한다.
[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6)
예수께서 성도들과 같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은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함이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로,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로, 그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셨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증거되어 있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힐라스코마이)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로, 그것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주가 되셨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로,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도’로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요 4:34)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빌 2:8).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가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리셨다(계 1:5; 3:14).
[3-4절]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가운데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쓴 자이었다. 그는 선지자들 중에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시다. 본문은 모세와 주 예수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을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음을 알듯이, 우주 만물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 놀라운 우주를 물질이 우연히 발전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다. 집은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데라폰)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에피)는 ‘위에서’라는 단어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본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나 선지서들뿐 아니라, 시가서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는 것을 증거한다(딤후 3:16).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7)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페이라조)이나 ‘증험한다’는 말(도키마조)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들이나 두려운 징계들이나 긍휼의 구원들이나,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생활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아서 몸 속에 놔두면 해롭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는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모든 성도는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격노케 하였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던 것이다.
[17-19절]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었다.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과 안식을 가리켰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천국의 예표이었다.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를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존숭하며 그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자이시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며 충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존숭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굳게 믿고 순종하며 또 피차 권면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신음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출되었으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하고 또 피차 권면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눅 23:43). 또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에 낙오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절]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며 누린다(마 11:28; 요 14:27).
[4-6절]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부르실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9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영원한 안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수고로운 삶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눅 16:22, 25; 23:43)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과 성화(聖化)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13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행 1:9-11).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쉼파데사이)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또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과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또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그의 신성(神性)의 도우심과 보호 속에서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는 ‘때를 따라 적절한(timely)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메타 팔레시아스)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거울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믿고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그를 더욱 알고 믿고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를 더욱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얻기 위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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