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아디라의 역사


두아디라 지역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순박한 농부들과 목동들이 터를 잡고 생활하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후에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활발한 상업과 무역의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수였으며 그의 사후 거대한 헬라제국의 시리아 지역 왕이 된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Nicator Ⅰ)에 의해 B.C. 300년경 점령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이곳을 ‘두아’라는 딸의 이름과 ‘성읍’이란 뜻의 ‘테리아’를 합성하여 ‘두아테리아’, 즉 ‘두아(Thya)의 성읍’이라 불렀습니다.

셀레우코스 1세가 이 지역을 점령할 당시만 해도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있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1세는 통치 초기에 이곳을 군사 도시로 발전시키기를 원했고, 이곳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도시로의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주민 이주 프로젝트을 세워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마케도니아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곳은 나중에는 페르가몬(Pergamon, 버가모) 왕국의 속주가 됐고, 페르가몬 왕 앗탈레스 3세가 B.C. 133년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무혈 양도함으로써 두아디라는 로마의 속주가 됩니다. 로마 군대는 두아디라를 소아시아주 수도였던 페르가몬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 지역으로 활용했습니다.

2. 두아디라의 특징

(1) 군사적으로 방어에 불리한 지형에 건설

고대 도시는 대부분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는 평야에 위치해 천연 요새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는 두아디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데, 방어에 지형적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버가모를 정복하려는 침략자들은 먼저 두아디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 로마 군대는 이곳을 중간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두아디라를 수호함으로써 본래 공격 대상인 버가모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려 했던 것입니다.

(2) 자주색 옷감 염색 기술이 발달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란 여자가 복음을 듣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행 16:14). 빌립보까지 판매망을 두면서 장사한 것을 보면, 두아디라의 염색 기술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루디아란 이름은 두아디라가 속한 리디아(Lydia) 지역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리디아는 B.C. 12세기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지역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 후에 발흥했던 왕국이었는데, 그 이름으로 두아디라 주에 작게 남아 있는 지명이었습니다(리디아는 전에 기고한 ‘사데’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자주색을 내는 원료는 두 가지인데,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소라나 조개에서 원료를 채취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얻은 자주색 염료는 고가이고 한 번 물든 자주색은 퇴색이 잘 안 되었는데, 자연히 자주색은 고대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바다가 없는 두아디라에서 생산된 자주색 옷감은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원료를 채취했습니다. 이 나무 뿌리를 물 속에 오래 담가두면 자주색 물이 우러나는데, 그 물에 실이나 천을 넣어 물을 들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루디아는 빌립보 근처 해변에서 소라나 고동을 구하여 자주색 원료를 채집하여 고급 옷감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3) 상인들의 계조직(길드) 성행

당시 이 도시에는 자주색 옷감을 염색하는 일 외에도 주석(구리)으로 로마 군인들의 철모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했고, 면직, 모직,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도 발달하였습니다.

두아디라는 정치적 도시가 아니라 산업 도시였습니다. 각 업종들은 조합원들로 구성된 결속력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조직들은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려면 누구든 필수적으로 계조직 회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데,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조직들 중 가장 단결력이 강한 조합은 섬유 조합으로, 유대인들이 대부분 이에 속했습니다.

▲두아디라 요한기념교회의 석축 기둥과 담장 모습. ⓒ선교회 제공

(4) 트림나스 신전 제사

이곳에는 페르가몬처럼 많은 신전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도시를 수호하는 트림나스(Trymnas) 신이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되어 숭배되었답니다. 트림나스 신상은 좌우에 도끼로 무장한 전사를 조각한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 성행하였던 각 조합(Guild)은 트림나스 신전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조합원들은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 조직으로 곗돈의 일부를 신전에 바쳤고, 곗날이 되면 트림나스 신전에 모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제사 분위기가 고조되면, 마무리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제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생활 기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교의 제사와 거기에 수반되는 부도덕한 관습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3. 두아디라 교회사

현재 두아디라에는 A.D. 600년 경 두아디라 기념교회로 세워진 요한기념교회의 석축 기둥과 담장만 초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 때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하여 크게 번성했으나, 1425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전도됐거나 빌립보의 루디아가 이곳으로 복음을 전달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녀는 요즘 같으면 영향력 있는 여성 사업가로서, 모르긴 몰라도 두아디라에 본사를 두고 멀리 빌립보까지 가서 장사를 하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A.D. 325년 니케아 회의나 431년 에베소 회의에 두아디라 교회의 대표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4. 성서의 교훈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동업 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트림나스 신전에 가서 우상 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두아디라 교회 성도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먹고 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 살기가 힘들고…….

그래서 많은 성도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성도들이 주일 성수와 음주 문제 등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됩니다. “무슨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런 비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원래 옛날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시돈 왕의 딸로서 아합 왕에게 시집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크게 퍼뜨린 자였습니다(왕상 16:30-33, 왕하 9:30-37). 그래서 ‘이세벨’은 우상 숭배를 퍼뜨리며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하여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한, 사악한 여자의 대명사입니다.

두아디라에 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도 이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을 섬기게 하고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아마 이 여자 이세벨은 영지주의에 속하는 이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란 영혼과 물질 이원론을 주장하는,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와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체가 악하다며 금욕하고 절제하는 고행주의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란 원래 악하니 어쩔 수 없고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반(反)율법주의 계통이었습니다. 아마 이 이세벨은 두 번째,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무슨 죄를 짓든 영혼의 구원에는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가 미혹되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구원이란 영혼의 문제인데, 부득불 육체를 좀 더럽혔다 해서 구원에야 지장이 있겠나? 게다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니 할 수 없이 세상과 좀 타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반문하며 스스로 위로했을 것입니다.

▲원제연 선교사.

21세기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도 두아디라 교인들과 동일한 유혹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두아디라 교인들과 같은 그 시험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이거 하나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를 내주게 되면 둘을 내 주고, 둘을 내주면 넷을 내줘야 합니다. 호미로 충분히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지선교회] 이스탄불에서 원제연 선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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