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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 / 계시록 일곱교회

영국신사77 2020. 4. 2. 21:27














[서머나]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란 말 가운데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으로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호머(Homer)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제숭배가 성행하는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였다. 

한편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본 서신 외에 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폴리갑의 생애’에서 바울이 이곳에 전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머나 교회]

‘서머나’의 이름은 ‘몰약’이라는 향료에서 유래되었다. 8-9 피트의 높이로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몰약’이라는 가시 돋친 나무는 쓴맛을 지니고 있다. 몰약의 향기는 대단히 훌륭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해 올만큼 값지고 훌륭한 향료이다. 몰약의 향기는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눌리고 부서질수록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낸다고 한다. 이는 순교의 서머나 교회로 명명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서머나 교회는 서기 100 년부터 콘스탄틴 황제가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313 년까지 혹독한 핍박을 치른 시대를 대표한다. 항구 도시로서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번 파괴되었고 외적의 침략으로 거의 폐허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재건하여 유명한 항구 상업도시로서 주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이곳의 초대 교회를 핍박하였고, ‘유대인들의 훼방’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머나는 비잔틴 제국, 셀주크-오토만 제국 그리고 터키 등의 역사적 변천으로 비잔틴 제국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적 유적을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차례의 자연 재난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지가 대파되었으나 오늘날 여전히 옛날의 영화를 누리고 있다.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가는 부유하고 번영한 항구 도시다. 일찍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살았는데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기독교인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했다. 그러나 고난과 박해 중에도 기독교인들은 신앙 고수에 더욱 충성했다. 이곳에 있던 유대인 개종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 되었고 그들은 로마의 황제 예배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로 인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계시록에 소개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의 하나로서 다른 교회는 모두 책망을 받았으나 빌라델피아 교회와 이 교회는 칭찬을 받았으며 ‘죽도록 총성 하라’는 권면을 받았다.(계2:8-12) 주후 160년경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때에 10여세의 소년 챠반익을 맹수의 굴에 던졌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것은 수령의 유혹이라 하여 서머나의 초대 감독인 폴리갑을 잡아다가 죽이려고 체포하였을 때 나이 86세였다.그의 덕망을 보고 예수만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 하였으나 "86년간 나를 배반하지 않은 예수를 내가 배반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 화형 당하였다. 156년에 서머나 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 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디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 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말했으나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 하였다.군중들은 그를 사자 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 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