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누구를 위한 계시의 말씀일까. 일차적으로는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일곱 촛대로 상징되는 일곱 교회(계 1:4, 20)를 말한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당시 지리적 위치로 보면 아나톨리아 고원까지 이르는 소아시아 서부 전역에 걸쳐 있었다. 로마의 영토였던 에베소나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 위치한 교회들이 요한계시록의 일차적 수신자였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면서 이렇게 전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 1:4)
그러나 당시 소아시아에는 이들 교회 외에도 골로새와 드로아 등의 교회들이 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고려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왜 일곱 교회만 지칭했던 것일까. 서신의 수신자를 7이라는 완전수로 표현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대와 모든 교회를 나타내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서에서 7은 창조와 안식일, 안식년, 희년과 관련된 완성의 숫자다. 그래서 요한계시록도 7이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 사자를 상징하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계 1:20)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로 1~3장에 등장하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계 1:4)는 지역교회로서의 일곱 교회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에 선포되는 ‘각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언제나 모든 교회를 향한 성령의 외침으로 끝을 맺는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선포를 보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신천지의 교리를 보자. 교주 이만희는 ‘천국의 비밀: 계시록의 진상’이라는 책의 29~31쪽에서 종말에 초점을 맞춰 일곱 교회는 장차 말일에 아시아에서 나타날 ‘예비된 일곱 교회’를 요한이 환상 가운데 소급해 본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 아시아는 동방, 지금의 한반도를 칭한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친다. 이는 통일교 문선명의 ‘원리강론’ 310~311쪽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다. 통일교는 이 대목에서 요한계시록 7장 2절의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란 구절을 인용해 재림 예수가 한국으로 온다고 주장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주후 1세기 아시아는 지금의 터키 영토를 말한다. 그리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아시아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했다. 이렇듯 계시록 수신자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왜곡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의 영적 주제는 교회다. 요한계시록에는 당시 존재했던 교회와 현재 존재하는 교회,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도래할 수많은 교회에 대한 계시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지상교회뿐 아니라, 승리한 교회로서의 천상교회가 때론 교회라는 직접적인 용어로 나타난다. 다양한 교회의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상호 교차하며 계시돼 있다.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라는 직접적인 명칭은 요한계시록 1장과 3장에서만 무려 18차례 기록돼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결론 장인 22장 16절에선 주님께서 직접 교회를 언급하시며 왜 사자들을 보내 계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셨는지를 설명하신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계 22:16) 이런 맥락에서 요한계시록의 영적 수신자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시작과 끝은 교회로 시작해 교회로 끝을 맺는다.
그 외에 요한계시록은 전체 장에 걸쳐 교회의 직접적인 용어 대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교회를 칭한다. 예를 들어 종들과 형제들, 나라와 제사장, 촛대들, 이긴 자, 남은 자, 흰옷 입은 자들, 성도들, 14만4000, 셀 수 없는 큰 무리, 거룩한 성, 여인,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자들, 나의 백성과 그의 백성, 신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어린 양의 열두 사도 등이 그렇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관된 교회의 상징들이나 이미지를 교회론적 시각에서 해석할 때 내포된 영적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렇지 않고 이를 종말론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김영복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