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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1) "신의 도성"(원제목「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

영국신사77 2020. 3. 25. 13:23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원제목「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

 

 

유명한 어거스틴의 책 가운데,

 "신의 도성" 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있읍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읍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로 보면 절대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읍니다.

그러나, 도끼를 휘두르면서 벌거벗은 채로 쳐들어오는 

야만인 오트족한테 로마는 함락됩니다.


아우성과 화염 속에서 

거대한 로마성이 무너지는 순간에, 

어거스틴은 굉장한 고민을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 나라가 무너지고, 

저 야만인들이 점령하게 되는가? 

여기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민을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역사관을 내어놓게 됩니다.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무너지는 로마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그는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칠흙같은 캄캄한 어두움이 있읍니다.

이 어두움을 치른 후에야, 

아침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토론토 노하덕 목사 설교 중에서

 

 

               이스라엘=교회로 보는 시각의 출발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펌)

          http://blog.naver.com/r5158/120002839962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도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못한 개혁 교회는

이제 '메시지' 대신에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음으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하에서

자신들의 해석체계를 정립했다.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Christ-Killer)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다인들의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까지도 이것을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시켰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제목「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

이라는 역사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했으며,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만한 논리성을 갖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보다 매우 다르게 미화되어 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베드(Bede, 673-735)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로마사 이해'

 

                                                        -로마제국 타락... 빛바랜 기독교 국교화-

  

 

최근 한국복음주의신학회(KETS) 제36차 신학포럼이 

안대학교 대학원 진리동 6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날 포럼에서는 박영실 박사(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Trinity, Ph.D.)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로마사 이해'라는 제목으로 발제해,

'두 성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을 소개했다.

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편집자주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은 

어거스틴에 의해

서기 413년부터 시작하여 426년까지 13년간 저술되었는데,

이 시기는 고트족이 로마를 함락한 때이다.

 

로마제국의 패망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

'왜 이런 재난이 일어났는가?'하는 질문들이

기독교인이나 이교도인을 불문하고 쏟아져 나왔다.

이교도들은 

로마제국이 가장 무력해진 그 시기가,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는 점을 부각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나섰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답해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일을 허용하셨는가를

섭리사적 구도에서 설명해야 했다. 

이 일에 누구보다도 잘 준비된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동시대인들 중, 

그 누구보다도 이교도 전통과 기독교 전통 모두를

지적이나 경험적으로 섭렵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번영과 성취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의 구도에서 보아야 하며,

로마 제국은 다른 민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인들이 달성한 성취는

로마인들의 '명예와 칭찬과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질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로마의 평화는

현세적이며, 일시적인 유익을 주는 가치로 

어거스틴은 간주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특히 로마제국의 권세와 질서가,

단지 세속적인 것일 뿐임을 강조한다.


그는 로마 제국 원래의 성격인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로마사 전반에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또한 그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사소한 변화만을 가져왔을 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의 태도는,

기존의 로마 제국의 정책과 연속선상에 있고,

그의 치세가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성격 변화를 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신의 도성>에서 어거스틴의 이러한 논의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그는 로마의 멸망에 관한 책임은,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께도 없음을 밝히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일등시민들이 되려고 힘써왔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하는 이교도들의 비난을 논박한다. 

또한 둘째 단계로서,

어거스틴은 

로마 멸망의 치명적인 원인을 설명하면서,

로마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그의 요긴한 해석적 도구가

바로 '두 성의 이론'이다. 

<신의 도성>은 

기본적으로 두 성의 이야기이고,

'두 성의 이론'은 그것을 통합시키는 주제이다.

어거스틴이 어떻게 두 도성

즉, '신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terrena civitas)'을 구분하는가?

한마디로 그 대답은 사랑이다.

사랑은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사랑(amor sui)과 하나님 사랑(amor Dei)이다. 

두 도성은,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을 멸시하기까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에 의해서 이뤄졌고,

 

'신의 도성'은 

자기를 멸시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건설되었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를 자랑하며, 

신의 도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전자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만,

후자는 선한 양심을 증거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구한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을, 

로마 지도자들의 교만과 자기사랑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로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들의 업적에 취하고,

현세적 가치를 추구하였다고 그는 지적한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받으셔야 마땅할 권위와 권세를 가로챌 때,

그 사회와 국가에는 

더 이상의 정의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정의를 갖지 못한 로마는, 

참된 국가일 수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정의 중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곧 예배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로마 파산의 이유를, 

진정한 정의인 참된 예배의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로마의 다원주의, 현세적 경향, 이성에 의론한 철학적 종교는 

참된 종교가 되지 못하며,

"영생은 이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마인들이 

분명하게 거짓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로마의 멸망은 

하나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즉, 어거스틴은 

역사적인 현실로서의 로마 제국이,

죄에 의해서 깊이 손상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있다.


곧 그의 '두 성의 이론' 속에서 

로마는 '지상의 도성'의 자리에 위치한다.

이러한 '두 성의 이론'의 핵심에는, 

강한 종말론적 요소가 놓여 있다.

마지막 심판에 두 성은 완전히 분리되고, 

'지상의 도성'은 멸망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해석은, 

철저하게 신학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엄격한 신학적인 구도에 따라, 

역사를 해석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신의 도성'에서 나타난 어거스틴의 로마사 이해는 

너무 비관적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류정희 기자 jhryu@chtoday.co.

 

 

 

 

 

 

 

 

 

 

                                            

 

                                                      

 

                                                                                                       

 

 

 

... 관계를 추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의... 무한한 영적 간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진행되는 인간의 도성신의 도성, 바빌론과 예루살렘이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역사를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점으로 보았다. 별에서부터 새의... 

http://lord.kehc.org/articles/viewhistorych.htm      유사문서검색 | 미리보기

 

 

    어  거  스  틴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어거스틴-

                               Refer from onnuri.or.kr & klmc.de 글


제 4세기가 낳은 대성자 어거스틴은

고대 로마 교회가 낳은 4대 박사,

곧 히에로니무스, 암부르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 스 1세 중에서

제 1인자로 꼽히는 최대 인물이었다.

마니교를 위시해서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사설을 물리 치는데,

4천 권이 넘는 저서를 내면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다.

 

이 위대한 인물이

그 어머니 모니카가 눈물로 드린 기도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354-430)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에서 출생.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 관리였고,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에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살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34살)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41살)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함은 물론,

하나님이 잠재해 계시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어거스틴이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과 영혼이었다.

 

 

              

성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


인문 과학의 영역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그러한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실은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이 

서양 역사의 중차대한,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하는 점에 있습니다.

한 이교도 아버지와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는 저 열광적인 흥분의 시대,

곧 이교문화와 기독교가 마지막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에 

여전히 배교자 율리안의 투쟁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율리안은 가장 극한 폭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향력에서 로마 제국을 빼돌려

이교 제신(諸神)에게 다시 바치기를 원하였던 사람입니다.

 

생애의 절정에서 

어거스틴은 중차대한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는데,

곧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카톨릭 국가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 감독과 황제를

서로 동거동락 하게 하였던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때에,

동로마와 서로마의 분리를,

즉 어떤 의미로 서방의 탄생 시간을,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게르만 정신의 탄생 시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미 알라리히가 로마를 침공하였고,

게르만 지파들은 서로마 제국을 쳐서

그 잔재로 자신의 제국들을 건설할 참이었습니다.

 

열병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안으로,

게르만계 반달족이 그의 감독 도시(히포)를 포위하였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즉 한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의 외적인 운명에 따라 볼 때에도, 

과도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서,

이교 문화가 기독교에 의하여, 

로마 문화가 게르만 문화에 의하여 극복되었던 시대와,

형성중인 서양의 최초의 윤곽들이

역사의 하늘에서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직시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독특한 특성 이외에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성자 자신의 인격입니다.

이미 생전에도 상당히 읽혀졌던 「고백록」에서

그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한 영혼의 역사를

보기 드문 필체로 그리고 있는데,

이 필체는 

아주 복잡다단하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과정들을

그 본원적인 신선함과 향내를 풍기는 가운데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에,

곧 고대 말기의 정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심리학적 심리 관찰과 심층 관찰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현대적인 어느 현대인과도 같이,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 세계에 힙 입고 있습니다.

단순한 세상 감정으로 대답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그냥 뛰어 넘어섬으로써

자신을 등한시하고 외부 세계에 전념하던 

고대 사람의 입장과는 현격하게 달리,

그의 사유에 있어서 내적인 사람,

곧 인간 영혼은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가까운 의미 있는 성찰 대상과 인식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에 

어거스틴은 의식적인 경험주의자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섬세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진정 "생리학적 심리학"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성찰과 타인 성찰의 노정에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표현들과 기능들과 법칙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여전히 오늘도

어린아이의 영혼의 삶과 그의 놀이와 눈물과 거짓말에 대한 그의 진단들과,

연민과 비극적인 것에 대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은,

이에 대해 말하여 질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상에 속합니다.

 

아마도 그는 일말의 의식의 사실들의 토대로부터야 

비로소 실재성의 굳건한 대지로 들어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 영혼 안에서 발견된,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제 공리의 기존 사실로부터, 

이 실체적인 선험으로부터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이르는 

어떤 확실한 길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거듭 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성찰이 형이상학적 대상들의 사전 단계요 근거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심리학적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서 

심지어 신적인 삶의 심층을,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존재를 들여다보고, 

인간 영혼의 삶을 비유로 삼아 

삼위일체의 내부 삶을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적-심리학적인 정신 자세가 

그의 탐구 자세에 부여하였던 것은, 

우리가 특히 어거스틴 적(的)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실재성에 가까움과 

그러한 뜨거운 구체성과 선명함과 동시에 

또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신 자세는 

허무맹랑한 것에서 그의 사유를 지켜주고, 

그가 제 아무리 높이 정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여도, 

모든 인간적인 인식의, 

그러나 또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의 불완전함과 제약성에 대하여 

그를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누구와도 달리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중에서도 심리학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즉 미리 예감하는 동시에 

미리 느끼고 포착하면서 

궁극적인 가능성들과 맥락들을 감촉하는 능력은 

그의 심리학적인 재능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새로운 고랑을 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하여 수 백년 간이나 애써 왔고 

또 애쓰고 있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싶은 신학 분야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미 얻은 결과들의 

순수 논리적인 추론과 괄호 묶음을 무시하였고, 

그의 사상들의 보다 말끔한 조직적인 구축과 확장 등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창조적이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의 심리학적 내부 고찰과 심층 고찰의 풍성함과 

관계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통찰들과 신학적인 통찰들은 

상당히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고도의 통일성으로 총괄하여서 

그들에게 그의 체계의 전체 안에서 

그들의 특별한 장소를 배당하고자 하지도 않았거니와, 

적어도 그렇게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적지 아니한 그의 논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그 학술적인 연구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어거스틴의 명제들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생동력 있는 사람으로서, 

즉 먼저 자신의 질문들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문제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외적인 대상을 

결코 그 단순한 문제 자체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계시키는 가운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이 

단지 체험의 과정으로서 혹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하기나 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진리인 동시에 학문이 아닌 

진리 자체나 학문 자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학문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고 풍성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주체, 곧 신학자는 

대상(객체), 곧 계시의 말씀의 고상한 실재성 앞에서 

전적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습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침묵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 듣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주체성을 벗어나서, 

모든 개인적이며 문화사적이며 시대사적인 정조들과 숙고들에서 

온전히 벗어난 가운데 

진리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순수성과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의 작업 방식을 수놓는 이 유일한 파토스는 

순수 사실성의 파토스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결한 봉사의 파토스입니다.

 

이렇게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전적으로 타당한 것, 초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이 흘러나오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토마스주의적인 교리방식의 

냉랭한 것, 뻣뻣한 것, 비인격적인 것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인격과 그의 시대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적지 않게 시대 조건적이요, 상대적인 것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그 때문에 

일깨워주고 불을 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불을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어거스틴이 

이미 그의 심리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있다면, 

즉 어느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그러했던 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즉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러한 특별 방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의 특유한 리듬을 통하여, 

그의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통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삶의 여러 수수께끼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였을 때, 

카톨릭 교회의 삶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지도 아니했거니와 

철저한 교회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독한 자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의 이교도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제어하기 어려운 삶의 쾌락과 

무제한적인 명예욕과 생동감 있게 번득이는 정신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즉 한 부드러운 유연한 심성과 섬세한 영적 감각과 

순전한 내적 경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열정적인 감각성의 온 정열을 다하여 

이 세상의 즐거움에, 곧 외적 명예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사랑의 자극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말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한 이교도였습니다.

"내가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내 영혼은 건강하지 못했고, 

 종기 투성이가 되어서 바깥 세상으로 내던져졌습니다." 

물론 또한 이교도로서 그는 어머니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얌전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이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이 뜨거운 정열적인 시절에 어머니의 유산은, 

그가 친구들을 찾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러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영적인 연대성을 가지려는 그의 욕구는 

전 생애에 걸쳐서 드러나며 

후에, 그의 사랑의 신학과 공동체 신학이 그 위에서 성장하였던 바 

그러한 자연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키케로(Cicero)가 지혜 추구에 대하여 논하였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란 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에,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 덕택으로 말미암아서 

어머니의 유산은 계속하여 제법 풍성하게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 

그는 지혜의 불멸성을 추구하고자 열망하였습니다. 

그 책은 "이 학파나 저 학파가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얻고, 붙잡고, 강하게 포옹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 진리, 진리시여, 

 그때에도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님을 찾아 숨을 헐떡거렸는지요!"

 

여기서 이미 가장 내면적인 어거스틴이, 

곧 열정적인 진리의 추구자,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자 애쓰는 사람, 

하나님을 얻고자 싸움을 벌이는 사람으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 어떤 전문적 학문의 주도 명제와 교조가 아니라, 

또한 그 어떤 한 조각의 실재성을 단순히 탐색하고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원 근원들과 배후 근원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시금, 한 이론적인 지식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적인 입장 천명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하였던 진리는 그에게 있어서 삶이었습니다. 

'veritas'(진리)와 'beata vita'(행복한 삶)는 그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질문과 사유는 그의 삶의 의지의 깊이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을 실존적인 질문이자 사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영혼을 불태웠던 진리에 관한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전반적인 하기의 발전을 그릇된 빛 가운데 보지 않기 위하여, 

이미 여기서 동시에 확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자신이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그 어떤 단순한 의미로 볼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것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란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꽤 언짢은 실망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으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그에게 다가온 세계관 체계들을 검증하였습니다.

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미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들의 가르침에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그 자신이 생각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의 진리 추구는 무엇과 관계되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짐을 가중시켰던 그러한 일종의 난점들과 반 명제들을 

해명하는 일과 관계되었습니다.

 

그의 그 당시, 대중적인 스토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물질주의적인 사유 방식에 있어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질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떠한 실재성도 있지 못했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의 질료성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아마도 하나님이,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자체에 빨아들이는 

그러한 끔찍하게도 생긴 해면과도 같이, 

무한히 질료적인 연장으로 존재하는가?

 

하여튼 그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생각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카톨릭 교회에 진노를 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러한 단순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하나님 개념을 대변하는 까닭에 

그러한 하나님 사상이 들어 있는 구약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고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사유를 약속해 주는 어지간한 하나님 개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즉 이 질문은 반(反) 카톨릭 적으로 첨예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하나님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악과 질병과 죄와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될 수 있는가? 

그의 물질주의적 전제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또한 악은 다소 질료적인 것, 곧 질료적 실체였습니다. 

이 악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실체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그것은 도리어 악한 마귀의 권세물은 아닌가?

 

이 질문 또한 반 카톨릭적 르상티망의 결과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를 지극히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악한 것, 곧 죄를 인간의 자유 의지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또한 심리적으로 악한 것, 즉 질병과 죽음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곧 아담의 원죄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거스틴의 감각적이며 열정적인 정신이 

그 당시에 느꼈듯이, 이러한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어거스틴 안에 필경 심각한 대립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다소 질료적인 것, 한 실체였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의 피조물적인 무력함 가운데 

스스로 악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가 

감성적으로 아마도 더욱 자극되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가 악하다 불렀던 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거니와 

또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 감정은 

또한 바로 이 문제로부터 항시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문제와 비슷한 난점들에 대하여 

적절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지 신적인 권위의 비중만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자랑이 

자유스런 탐구의 억압, 참으로 진리애의 억압을 의미하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요컨대 그가 교회가 제시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고 찾아야 했다고 하는 의미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 없이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여 탐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이 교회에 대한 이러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 

그가 그의 이해들을 끊임없이 교회의 가르침과 비교하고 

교회를 비난하고자 극구 애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심리학자에게서 교회의 권위가 

그렇게 그 당시에 벌써 그의 무의식 안에, 

그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때, 

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회가 요구하는 권세로서 

그 당시에 이미 그의 영혼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궁극적인 진리 탐구를 

카톨릭 진리와의 논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던 까닭에 

내적으로 교회에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에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 안에 있던 어머니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19살의 어거스틴은 마니교도에게 갔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성장해 나온 다른 영지주의와 비슷하게도, 

거기에 단순한 하나님 개념만 들어 있다 하여서 구약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그럴듯한 학술적이며 천문학적인 논증들로 강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 진리"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자유스러운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든 믿음을 맹신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죄와 악을 

자기 의지의 무행위라 설명하지 않고, 

빛의 하나님과의 투쟁을 벌이는 한 악한 원리의 발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그의 비판적 사유의 모든 요구들이 채워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 즉 살 권리와 온전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확보된 것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은 9년간 이 정열적인 동방의 이원론에 헌신하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저항과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는 극점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진리애는 너무도 정직한 것이었으므로 

마니교도들의 천문학적인 지혜와 

그들의 "잘 차려입은 사환" 파우스투스에게 속아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하여 

이 결과에 이르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서 마니교의 전 교리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한 좌절로 말미암은 이 분위기 안에서 그는 

384년에 법정 웅변 교사로 밀라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처음에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의심과 절망을 품게 하였으나, 

심층적으로 그의 회심의 위기를 불러 일으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요 처세적이며 경건한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카톨릭 신자들의 하나님 개념과 믿음 개념에 대한 

자신의 거절적인 판단들이 

그릇된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밀라노에서 겪은 체험들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우리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려앉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의 영혼은 그것을 "매일 더 많이" 마셨습니다.

 

이처럼 카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상(像)은 

밀라노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영혼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계몽에 열어 주었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주장을 매력 있게 만들었던 것은 

다시금 어머니의 오래된 유산, 

곧 모니카에게서 전수된 그리스도에 관한 청소년기의 영향들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이런 계획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 부모님이 세워주신 그 곳에 내 발을 굳게 디뎌야지."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괴롭히고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두 주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참된 하나님 개념에 대한 문제와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그의 물질주의적인 전제에, 

곧 모든 존재자가 필경 물체적이라는, 

즉 하나님과 악이 

어떠한 물질적인 실체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그는 물질(질료)로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곤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그러한 부질없는 시도는 

그를 단순히 감내하기 어려운 투쟁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찢겨지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겪는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어거스틴은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어거스틴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한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와 영혼의 지복을 얻기 위한 

동일한 열정적인 고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양자에게서 천문학과 악령에 빠진 일, 

여인 사랑과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에 대한 좌절과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나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발전의 마지막을 미리 이야기 해 보자면, 

양자에게서 "지복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계시"를 통한 

동일한 구원의 노정이 나옵니다.

 

그의 분열되고 짓눌려진 영혼의 염려로부터, 

그의 물질주의적 사유의 곤궁에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두 번째 위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신(新)플라톤주의 서적들을 읽은 일이었습니다. 

고대의 철학적 체계에서 정신적인 것이 플라톤과 그 후손들의 체계에서만큼 

그처럼 그 본래 존재와 본래 법칙에 있어서 풍성하게 인식되고 알려진 것은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서적 

- 무엇보다도 플로틴의 「엔네아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순수 영적인 것의 본질과 실재성이, 

곧 변화하지 않고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인, 

그러기에 사라지고 가시적인 사물들보다 

더 심오하고 더 참된 존재를 소지하는 그러한 한 영적 개념 세계의 실존이 

더욱 더 그에게 반짝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물리쳤던 해방하는 인식, 

곧 비 물체적인 한 존재, 질료적 존재보다 더욱 뛰어난 한 존재, 

한 순수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었습니다.

 

이로써 물질주의적 사유가 관념론적 사유로써 극복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서 그 결과들은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불변하는 개념 세계의 원 근거인 하나님은 순수 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도 이 불변하는 개념들의 유기체와 담지자로서 순수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사유에 있어서, 질료적 실재성과 충돌하는 일없이, 

흡사 하나님과 영혼이 그 영원한 실재성을 가지는 장소가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차후로 그는 공간과 연장의 문제로 놀라는 일없이, 

하나님과 영혼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또한 동시에 다른 문제, 

곧 악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 진리와 원 실재성으로서 

존재의 충만함, 곧 불변자, 참 존재이기 때문에, 

비신적인 것, 반신적인 것, 곧 죄와 악은 어떠한 질료적인 것도, 

요컨대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재의 결여, 존재로부터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은 모든 어려운 문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의 물질주의적인 사유가 없어진 동시에 

물질주의적 하나님 개념과 그 이원론적 우주론이 사라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그에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비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거한다." 

진리는 하나님이 영혼과 접촉하시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양극, 즉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제부터 이 성자의 사유가 움직이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는가?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에게로, 마음의 고요함으로, 위대한 침묵으로 돌아갑니다.

 

어거스틴은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어거스틴에게서 차후에 물질주의적 사유로부터 해방됨과 더불어, 

곧 카톨릭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징적인 일입니다. 

확실히 그 자체로 볼 때에 관념론으로 나아감으로써 

카톨릭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이 카톨릭 교회와 그 권위가 

이미 처음부터 그의 무의식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추측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질풍 노도 시대에 

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러한 모든 비난들이 그대로 사라졌던 순간에, 

교회는 유일한 참된 교회로 그의 정신 앞에 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떨구듯이, 

옛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영 개념과 더불어 

또한 유일한 카톨릭 교회와 유일한 카톨릭 진리가 

문제없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확실히 그가 이 카톨릭 진리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 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고백은 

모든 교의와 제도들에 대한 분명한 긍정을 포함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심정적으로 그 당시에 이미 온전한 카톨릭 교인이었으며, 

그는 끝까지 이것으로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카톨릭주의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조명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기독교를 

그 당시에 아직도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양 종교 체계들의 공통점만을 인지하였고 

그 차이점과 반대되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공통점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개념에서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순수 영이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영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을 그대로 원용하였는데, 

그 당시에 그는 여전히 그 가르침이 

범신론적인 색채를 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고백하였던 그 하나님은 

확실히 모든 변화하고 물체적이며 감각적인 사물들 저 편에, 

참으로 이것들과의 본질적인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영적인 것 자체의 저 편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전적 타자, 곧 모든 영적인 것과 비 영적인 것의 창조주적 원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오로지, 자신 안에서 무한히 풍성하게, 단계적으로 

영적인 제 능력을 우주로 방출하며 사람에게 내어 비추는 

- 참으로 인간 영혼이 저 신적-영적 권세의 한 부분으로서, 

질서 잡힌 단계적 과정에서 다시금 그러한 신적

-영적인 것으로 올라가서 환시 가운데 

  그와 하나가 될 자격을 부여받는 그런 형태로 - 

그러한 영적 존재의 최고 정점이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 자신은 "떨리는 바라봄의 순간에" 

신적인 것을 이 방식으로 건드렸다고 믿었습니다. 

신적인 것은 모든 영적인 것과의 본질적 일치를 이루었고 

모든 비 영적인 것과는 본질적 대립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세계상으로부터 도덕성은, 영적인 것, 

곧 이러한 신적인 생명의 불꽃을 감각적인 것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만유의 영과 사랑으로 일치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모든 비 영적인 것, 곧 육신, 몸, 감각성을 죽이는데 있었습니다.

 

감각성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을 죽이는 일이 신플라톤주의 윤리의 목표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가 영의 실재성에 있어서 그를 깨웠던 순간에 

바로 이 플라톤주의를 통하여 터무니없는 신령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위대한 성자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진기한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속적인 회심 이야기가 이것을 보다 극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어거스틴은 바로 그 당시에 기독교를 신플라톤주의의 빛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전적으로 감각을 벗어나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도 부드럽고 양심적이어서, 

철저히 이러한 감각을 벗어나는 길을 걸을 수 있기 전에는 

감히 세례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부터 그의 쾌감적이며 정열적인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엄청나고 심각한 투쟁이, 

곧 몸과, 이와 관계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요, 여성을 반대하는 투쟁이었습니다.

"한 여성의 포옹을 포기해야 한다면, 너무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은 

이제부터 어떠한 형태의 여인 사랑도, 심지어 혼인도 포기하는 것을 

그의 양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포기는 그에게 있어서 그 당시에 복음적인 조언으로서, 

곧 특별한 완전성 추구의 표현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폭적인 감각 초탈의 새 윤리가 요구한 도덕적 의무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마니교가 "육"을 한 오염된 원리라고 정죄하고 전수했던 그러한 영지주의적인 정죄는 

신플라톤주의를 통하여 수정된 것이 아니라,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의무적으로 이루어진 가정생활과 주의 깊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의 위엄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여도, 

필경 혼인 생활에서 다소 감각적으로 오염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지혜로운 어머니가 그에게 추천하였듯이, 

그러한 어떤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너무도 섬세한 감정을 소지하였기에, 여기서 절충안들을 만들 수 없었으며, 

그의 그 당시 입장으로 볼 때에 혼인은 하나의 절충안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것은 격렬한 투쟁이었습니다. 

두 "의지가 내 안에 있었는데, 곧 옛 의지와 새 의지요, 

하나는 육적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이요, 

이 둘은 서로 싸우며, 내 영혼은 이 분쟁으로 찢겨 졌습니다."

 

존경받던 수사학자 빅토리누스의 회심에 관한 충격적인 보고와 

성 안토니우스와 그의 수도원들의 엄격한 회심자 생활에 관한 감동적인 소식은 

더욱 깊게 그의 의지를 움직여 모든 감각성을 단호하게 부정하게 하였으며, 

이 야수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또한 이 가운데 신음하며 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내적인 투쟁이 바깥 정원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을 때에, 

곧 그가 "모든 뼈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으라고 제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에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번민을 하였을 때에," 

어린아이들의 말소리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성경을 펼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마치 새로운 눈으로 대하듯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장 13-14절)

이 구절을 읽은 직후에 곧 그의 마음은 

"매우 밝은 확신성의 빛으로 비추어지고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치유된 것입니다. 

것은 의식적으로 카톨릭 기독교로의 회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온전한 카톨릭 그리스도인이 되기만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의 베일을 쓰고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마음과 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신플라톤주의라는 옷에서 기독교적 영혼을 보시고 

이 영혼이 은혜를 달라고 외친 것을 들어 응답해 주셨습니다.

 

순전히 심리학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 

어거스틴과도 같이 이러한 영적인 사람의 출현은 

확실히 한 기나긴 발전, 곧 한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의식의 주변에 혹은 하부 의식에 위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청소년기의 인상들이 더욱더 모든 유사한,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넘어온 정신적

-도덕적인 인상들을 입었고 

의식 분야의 테두리에서 쌓아 올렸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더욱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의식의 중심에 저장된 다른, 

참으로 대립되는 청소년기 체험들에 대한 그 압력은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압력을 하나의 강한 감정의 긴장으로 느꼈습니다. 

이 긴장은 그의 외적이며 내적인 체험들이 더욱 그 안에서 

영적인 그리움들을 강화시키면 시킬 수록,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제한적인 자기 평가절하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심의 느낌들은 

이것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밖의 정원에서 절망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던 순간에 

의식의 테두리에 쌓인 영적 체험들이 승리를 거두어, 

갑자기 의식 분야의 한 중심에 들어와 

여기서 단 한번 청소년 때부터 수집된 정욕의 체험들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자신이 아주 갑자기 중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그는 이 비약을 창조 초월적인 권세의 강림으로서, 

은혜의 역사(役事)로서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 심리학적인 성격에 의하면, 

청소년기의 종교적 인상들이 성숙한 사람 안에 다시 강하게 일어난 것, 

곧 발현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안에 있는 어머니가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여기서 한 사람의 영적인 과정에 있어서 

처음 종교적인 청소년기 인상들과 아울러 

부모 교육에 귀속되는 그러한 엄청난 의미를 인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신플라톤주의적이라고 표현하였던 

그러한 체험들과 확신들이 

주요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 심리학적인 분석으로써 

어거스틴의 회심의 수수께끼를 다 드러내었다고 믿는 것은 

지대한 오류일 것입니다. 

심리학적인 수단으로써 

우리는 회심의 과정을 서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 뿌리에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표를 잘 설정하고 불굴의 인내로써 모든 신체

-심리학적 규칙을 사용하는 가운데 

어거스틴 안에서 일어났던 체험들의 교환을 그렇게 규정하며, 

마지막까지 감각적인 사람으로부터 한 영적인 사람이 되었던 

저 궁극적인 권세가 무슨 권세였는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목표를 잘 설정하면서 

그 과정의 전향을 후에 방해하고 

새 사람을 모든 험난한 재발에서 보호하였던 

그러한 궁극적인 권세가 무엇이었는지 - 

이와 같이 잘 역사하는 궁극적인 권세의 본질이 

심리학자의 체험에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없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입을 열며, 여기서 신학자가 입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권세를 자신 안에서 역사 하는 것을 

한껏 감촉하였던 사람과 함께 

자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의 송가를 부르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후에 우리가 세례 받은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데, 

어거스틴의 회심이 확실히 카톨릭 기독교로의 온전한 진지한 회심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것이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어거스틴의 영성에 달라붙어 있는 강한 신플라톤주의적 요소들은 

그의 신학적 전개와 성숙의 끊임없는 원동력과 가시요 자극제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이후의 전체적인 발전을, 

그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내적으로 해방되었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 속으로 성장해 나아갔던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만일 그가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신플라톤주의와 논쟁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성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확실히 지금과도 같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고투는 

어거스틴이 기독교에 대한 전체 이해를 얻고자 애를 쓸 때에, 

세례 시에 받은 새로운 것을 그 본질적인 것을 놓고 질문하고 

전해 받은 옛 것과 관계시키려는 것이, 

즉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의 문제로, 

그에게 있어서 한 관심일 때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미 강조하여 언급했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그리고 그의 질풍노도 시절 전반에 걸쳐서,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구세주를 사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니교도로서 그는,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의 독생자"를 고백하였는데, 

물론 여기서 그가 그 영지주의적인 전제들로부터 

예수의 참된 육신의 본성에 대하여 

고백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니교와 결별한 이후에도 

그는 성육신의 비밀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를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난 지혜의 인물"

로 존경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 들어갔을 때, 

교회로부터 성육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카씨키아쿰에서 그의 제자들이 또한 단지, 

본래의 의미로 아버지만을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는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오 전적인 사람이시다'란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서 어두워졌다는 요점은 

그의 전체적인 이후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시다'라는 근본 전제와 

'성육하신 하나님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근본 전제에 있어서 

어거스틴이 그의 회심 이후로 변화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마도, 어떠한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의 특별한 기능들에 속하며 

기독교 본질의 구축과 확장에서 어떠한 것이 

그의 신성의 특별한 기능들에 속하는가 하는 질문에 있어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에 대하여 제시하였던 그러한 뒤바뀐, 

참으로 대립적인 대답들이 

그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통하여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특징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첨예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신적인 진리이시기 때문에, 

내가 구속함을 받았는가?

혹은 그리스도께서 내 인간적인 형제가 되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함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오류에서의 구속이 관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을 통한 죄에서의 구속이 관점인가?

 

초기 시절에 어거스틴은 처음 답변을, 

후기의 성숙한 시절에는 두 번째 답변을 선호하였습니다.

그의 신학 전체는 

이 두 번째 답변의 연속선상에서 

그 특별한 색채를 입었던 것입니다.

 

처음 결정적인 시기는 

그가 사제가 되었던 시기인 391년으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아직 사제가 아니었을 때, 즉 387년에서 391년까지 

그의 마음에는 회심하던 때의 그러한 정신 자세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기독교를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그 본질적인 깊이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가 그 진리의 내용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서로 구분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카톨릭 국민 교회의 포괄적인 뒤바꾸는 권세를 체험하였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체계 안에서 

"단지 몇 마디 말과 문장만"을 바꿀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또한 어거스틴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요, 

그는 말씀, 진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용어적으로는 교회의 가르침의 토양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그는 이러한 신적인 말씀과 이 지혜를 

이내 신플라톤주의의 'patrikos nous'(아버지의 영), 

즉 일자로부터 발하면서 만물의 원상들과 본질들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창조적으로 설정하는 

그러한 신적인 본원 권세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제 사물의 모든 본질이 근거를 두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이 사물들이 

현 모습을 얻고 있는 그러한 본원 진리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는 척도(modus)요 원형(archetypon), 

지음을 받은 세상의 궁극적인 최고의 형상 원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거스틴은 이미 상당히 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이러한 사상들의 근거가 되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과는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결연히 굳게 붙잡고 있던 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라는 사실, 

그가 한 영원히 지속되는 세상의 과정 가운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그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또한 여기서 그는 

제 사물이 내적인 자연적인 필연성과 더불어 

창조주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스러운 창조주 의지의 결과라는 사실을 

뒤흔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분명하게 여기서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의 로고스론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억지로 맞추고 있다 하여도, 

그에게 있어서 고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상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아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신적인 본원 진리 가운데 

미리 그리고 함께 주어져 있는 변화 불가한 진리들을 

직접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묵상적 신비주의, 

즉 그리스도께서 곧 그러하신 그러한 진리 안에서 

모든 불변하는 진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바라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의 합일에 이르게 되는데, 

참으로 그것이 이 삶에서 가능한 한,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몇몇 특권을 부여받은 영들이 

이미 지상에서 이와 같이 삼위일체를 직접 바라보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고, 

물론 단 한번이 아니라, 일곱 단계로 방법론적으로 계속되는, 

감각적인 것에서 초감각적-신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가운데, 

그러한 일을 체험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이 땅에서 전적으로 가능한 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진정한 철학과 동일하며, 

본질적으로 하나의 주지주의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또한 지복(至福,더없는 행복)은 

한 영원한 진리 체험에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그리스적인 것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적으로 주지주의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꼭 붙잡고 있고

결코 참된 오성(recta ratio)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자(sapiens)라는 것입니다.

참된 덕은 이러한 참된 오성에 있으며, 

현자가 이 참된 오성을 소유하는 한,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의 중재자 직분은 

오로지 그의 신성적인 것에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말씀이요, 

우리의 영을 내적으로 해방하고 비추시는 진리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본어는 믿음이 아니라 앎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어떠한 구원의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단지 일종의 앎에 대한 내용물, 

즉 그 자신이 진리를 직접 바라볼 능력을 부여받게 될 때까지, 

육신적인 성향의 감각적인 사람이 사용하는 한 대체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첨예하게 헬라주의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그것을 마니교도 시절에 물질주의화 하였던 것처럼, 

그는 이제 신플라톤주의에 매혹되어 

그것을 헬라주의화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구속을 가져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곧 영원한 말씀과 

영원한 진리로서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구속의 동화에 있어서 한 사후 보조적인 의미만 그의 인성에 귀속될 뿐입니다.

이것을 더 자세히 규정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은 다시금 신플라톤주의에, 

특별히, 이전에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던, 

즉 모든 감각적인 노력으로부터 정화시킨 사람만이 

그 불변하는 진리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는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에 결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가 

이러한 마음의 정화를 사람의 도덕적인 고결함에 돌리는 반면에, 

어거스틴은, 만일 감각성에 빠진 사람에게 

도덕적 이상, 곧 'auctoritas divini intellectus'(신적 오성의 권위)가 

사람이 되신 분 안에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그를 촉구하여 본받게 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그 감각성에 빠진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가 그의 시야를 자기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사람이 되신 분에게로 돌리며 

이 사람이 되신 분의 겸비(humilitas)로써 자신의 영적 교만을 알고 

또 이것을 버리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통하여 

신플라톤주의자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성육신의 의미는,

 성육신이 인간 본성을 영원한 진리로 특별히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며, 

사람이 되신 분의 형태에서 

신적인 삶의 규범들을 그 "강권적인 위엄과 찬란한 청명성" 가운데 

흡사 눈으로 보듯 그렇게 만들며 

결국 사람의 노력에다가 

생생한 본보기(exemplum vivendi)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적인 뜨거운 모범적 의미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귀속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증명해 주신 사실은, 

지혜 추구에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어떠한 죽음의 양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시기에 어거스틴이 아직 너무나도 신플라톤주의자였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등에게 참된 구속적인 권세를 돌리지 못하고 

그것을 기독교의 핵심과 중점에 두지 못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에 관하여 침묵하며, 

이 시절에 또한 범한 죄에 대한 통회나 회개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직 성육하신 분을 본받는 가운데 

그의 마음을 모든 불순한 연정에서 정결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한 진리를 직접 바라보는 것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만이 관건이었습니다.

이 바라봄이야말로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이해함으로써 

얼마나 어거스틴이, 성 바울과 성 요한과 카톨릭 교회가 보았던 

그러한 기독교의 참된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가는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그러한 열정적인 절박한 마음이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마음과 더불어 그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391년에 사제로 임명되었을 때에, 

성경 전체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하여, 

그의 감독 발레리우스에게 부활절 때까지 휴가를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참으로 이 철저한 성경 연구에서 

하나의 전적으로 새로운 발전의 시작과 이정표를 볼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사유는 개인적이며 전체적인 사유였기에, 

새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일어났으며, 

어거스틴은 전적으로 어디서나 자신의 초기의 사유 과정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기독교적 이해를 허용하였던 

그러한 신플라톤적 표현들을 다른 설명 없이 간직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차후 신플라톤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생 신플라톤주의에 관하여, 그가, 예레미야에게서 인용하는 방식으로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숙고를 통해서든, 

영원한 진리들의 변화불가성을,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는 말씀을 알고 고백하였다는 사실을 

신플라톤주의의 특별한 업적으로서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성경을 강독함으로써 열려지게 되었고,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더 이상 단순히 공통적인 것만을 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대립들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대립은 무엇보다도 그의 세계 내재적인 일원론적인 하나님 개념과 

그 정신 태도의 주지주의적인 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차후에 지속적으로 엄격히 오류를 피함으로써, 

심지어 후에 그 자신의 이전 태도에 대하여 

심히 항의하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 그의 새로운 통찰력이었습니다:

"복되게 사는 것은 단지 오성에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에 따른 삶일 것이다.

 복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내재적 태도의 자리에 초월의 태도가 들어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논점이 되는 바 

그러한 대립들은 차안의 세상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과 영, 

감각적 세상과 오성적 세상의 대립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차안과 피안, 시간과 영원성,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대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해야 할 그것은 

물체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오용과 동시에 영적인 것의 오용입니다.

내적인 전향, 곧 하나님께 원칙적으로 향하는 자세는 

모든 도덕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표징인 척도라는 것입니다.

이 자세가 없을 때에, 사람이 자기 자신을, 

또한 그의 가장 영적인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서 긍정할 때에 

또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도덕들은

 "도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악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교만한 인식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 세상 앞에서 어리석음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인간의 겸손한 긍정이 기독교의 근본 행위입니다.

믿음은 더 이상 지식에 이르는 단순한 사전 단계가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요, 

결단, 곧 배아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를 

진지하고 내적으로 원하는 일과 행하는 일이 우선권이 있지, 

더 이상 인식이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주지주의자에서 의지주의자로 변화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현자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spiritalis)입니다.

더 이상 진리가 최고이며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러합니다. 

더 말씀을 드리자면, 

참된 진리는 사랑에 근거를 두며 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390년에 완성된 「카톨릭 교회의 관습」이란 글에서 이미 그는, 

물론 플라톤적인 경향의 의도로,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기본 속성이라 칭송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신약의 정신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 5장 5절)

참된 가장 심오한 실재성은 하나님 자신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특별난 주안점이요, 

그의 모든 행위에 참된 내용을 줍니다.

'Dilige, et quod vis, fac!'(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사랑만이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상징으로써 표시를 하고, 

아멘을 말하고 할렐루야를 노래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를 찾고 교회를 짓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악마의 자녀들과 구분된다."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소지한 감독 어거스틴 이외에 

다른 어떤 교부나 신학자도 그러한 내적인 감동과 중후함을 가지고, 

그러한 감동적인 음색으로써, 

성 바울이 전에 불렀던 그 사랑의 애가(愛歌)를 수용하지 못했으며 

다음 시대에 계속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교회 예술이 그에게, 바로 그의 손에 한 타오르는 마음을 넘겨주었을 때에, 

그것은 잘 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 위대한 거룩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의 기독교에서 

순수하고 온전한 기독교로 옮겨간 사건이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사제 시절에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참된 실체인 사랑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는 사실, 

곧 성령의 행위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참으로 또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 

영의 새 생명은 만유 정신으로부터 침하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도 사랑의 "부으심"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절에, 적어도 이러한 사랑의 새 생명의 토대인 믿음이 

사람의 업적이라는 사실을 고수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사제 시절에 

제 아무리 인상적으로 'massa peccati'(죄 덩어리)에 관하여 말하고 

인류의 운명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내어 맡겼다 하여도, 

그 당시에 그는 여전히 사람의 본성이 

전폭적으로 부패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시절에 

아직 인류의 실재적인 상속 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인간 의지의 상속된 무지와 허약함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양자는 사람을 악에 치우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의 능력과 주도권을 통하여 

그리고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음으로써 

모든 악한 동기들에 대하여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은 그 근본 본질에서 아직 부패된 것이 아니며, 

그런 까닭에 인간 본성은 자기 능력으로 

적어도 새 생명에 이르는 시작, 곧 믿음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또한 아직 사제 시절에, 

그 자신이 후에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듯이, 

인간적인 '할 수 있음'을, 

가령 이후의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도 같이, 

여전히 비교적 낙관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물들여지지 않은 핵심, 

즉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믿을 수 있는 바 

그러한 한 건전한 의지는 인간 본성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거스틴 안에서는 옛 이교도적인 신플라톤주의적 유산, 

곧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계속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396년이 다가 왔습니다.

어거스틴은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회의 음울한 체험들, 성직자들과 수도승들 가운데 임재한 도덕적 결여, 

나아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양심적인 자기 성찰 등은 

그 안에서 이미 오래 전에, 

그가 이미 이 삶에서 삼위일체 되신 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주었었던 바 

그러한 대담한 확신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또한 이미 사제 시절에 

그로 하여금 통회와 회개의 구원의 가치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습니다.


이 체험들로부터 그는, 

한 친구의 질문들에 응답해 주기 위하여, 

397년에 다시 한번 바울 서신을,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철저하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다'란 사실이 

그에게 분명한 확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 바로 이것이 

사람 안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환히 비추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동요된 마음으로 그는 

"오 사람아, 네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장 7절)란 말씀의 깊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이 근본적인 인식을 

후에 반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에서 모든 방면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우리의 인간 본성은 자체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그 단순한 자연성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그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아담의 죄가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하는 것 속에서, 

우리의 인식과 원함에서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인 바 

그러한 것 속에서 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Sunt omnes homines... una quaedam massa peccati.'

(모든 사람은... 하나의 죄덩어리다)

이 새로운 인식의 배경에서야 비로소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구속 교리를 그 중심에서, 

그 핵심에서 포착하고 들추어내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그 본성 존재의 가장 깊은 심층에 이르기까지 부패되었기 때문에, 

인류에게 있어서 한 새로운 본성, 

곧 우리가 한 새로운 무죄한 사람 존재로 편입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구속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람 존재가 하나님께로 구속함을 받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새로운 토대와 뿌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이 죄의 저주 아래 있지 않고 

본질상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서 나온 한 사람과 같이 

동일한 공동 혈육과 공동 운명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러한 한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구속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기독교는 한 새로운 사람과 

이 새 사람으로의 편입에 관한 은혜의 소식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 안에 받아들여진 그 분은 

단순히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 곧 새 아담, 

인류의 머리, 

구원의 공동체의 기원이자 처음 난 자, 

참으로 그는 새로운 인류 자체이십니다.


처음 아담 안에 전 인류가 이미 배아적으로 포함되었듯이, 

이 둘째 아담 안에, 

바로 그가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전 새로운 인류가, 곧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단일체가 

이미 배아적으로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구속받은 인류는 

예수의 시공적으로 전개된 인류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이 있는 곳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 공동 존재와 공동 생명이 그와 같이 내적인 것이기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를 하나의 유일한 그리스도로서, 

참으로 하나의 유일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온전한 구원의 관심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인간 존재가 새 사람인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존재적 결합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에와 같이 성육하신 말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성례전에서 이 존재적 결합이 기초가 놓여지고, 

성만찬에서 이 결합은 인격 대 인격이라는 모든 신앙인들의 단일체, 

곧 하나의 유일하고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포괄하는 

나(자아), 'unus homo'(단 한 사람)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바로 성례전에서 

이러한 새 사람과의 존재적인 결합이 일어나고 

갱신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성례전적입니다.

어거스틴은 초기 시절에 성례전과 더불어 

어떠한 옳은 것도 시작할 줄 몰랐기에, 

그에게 있어서 이제 그것은 아주 뚜렷한 상징, 

참으로 기독교 본질 자체의 완성된 표현이었습니다.

성례전에서 그러한 일이 올바로 일어나는데, 

오직 기독교 비의만이, 

곧 '새 사람 그리스도와 우리의 존재적인 결합'만이 

거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바울의 "한 중보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곧 새 아담, 형제 중 먼저 난 이, 그리스도의 몸, 

그의 머리와 그의 지체들에 관한 가장 심오한 사상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상들은 확실히 전적으로 과거에 귀속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의 이그나치우스로부터 암브로시우스와 

위(僞) 암브로시우스와 힐라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새로운 입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찬양하였던 교부들의 음성이 

잘못 울린 적은 없었습니다.

도나투스주의자인 티코니우스도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로부터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어느 교부도, 아마도 그 이후의 어느 신학자도 

이러한 신비적 일치가 

그렇게 심오하게 그리스도론적인 비밀에 뿌리를 두지를 못했으며 

기독교와 교회의 내적 이해에 있어서 

히포의 위대한 성자만큼이나 

그렇게도 풍요하며 포괄적으로 평가하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위대한 스승, 위대한 이방인 사도의 천재적인 제자였습니다.

물론 어거스틴은, 그가 바울을 여기서 그렇게 잘 이해했다고 하는 사실을, 

이것이 눈에 띄는 일이라 하여도, 

아마도 그가 성 바울의 무기를 가지고 

바로 이 자리에서 내리쳤던 바 

그 동일한 신플라톤주의로부터 갖게 되었습니다.

여느 다른 철학적 체계와 달리 

참으로 바로 이 신플라톤주의가 그의 일원론적 토대들로부터, 

모든 영적인 것의 물체적인 통일성을 제시하였으며 

이 모든 영적인 것이 

신적인 것과 본질적으로 결합됨을 제시하였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제 아무리 단호하게 이 견해를 거절하고, 

영혼이 하나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반대한다 하여도, 

그리고 그가 재차 초기에 세상을

 "살아있는 본질"로서 잘못 판단한 일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에게 있어서, 적어도 단지 형식적으로 고찰해 볼 때에, 

만유의 통일성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인 근본 상념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념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통일성에 관한 바울적인 사상들 

- 비록 이것들이 전적으로 다른 전제들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 

에 대한 이해를 첨예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또한 사제 시절 이전에 벌써, 

아담으로부터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통일체로서, "한 유일한 인생처럼"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사람이 되신 분을 통한 구원,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그 머리의 신체적 결합은 

성자 어거스틴의 구속론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의 신학 일반의 구심점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은혜론과 예정론이 그 자신과 제자들에게 있어서 

제 아무리 선정적인 것이었다 하여도, 

그의 신학적 관심에 있어서 

그것은 첫 번째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것에 불과합니다.

첫 번째 것은 기독교에 관한 그의 근본적인 이해를 말하는데, 

어거스틴은 기독교를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새 사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속에서, 오직 성육신의 비밀스러운 과정에서만 

인류의 구속, 그 신인적인 머리를 통한 신성과의 재 합일이 

단 한번 포함되었다고 보는 

그러한 소아시아의 총괄 갱신론의 신판으로만 보려 한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가 이러한 하나님 말씀과 인류의 결합을 정적인 것, 

즉 단지 일어난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분 안에서 역동적으로 계속 역사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속하는 요인은 본래 성육신과 

그 초역사적인 의미 내용과 가치 내용에 있다기 보다는, 

사람이 되신 분과 그의 역사적인 사역하심과 

그 계속적인 사역 안에,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사랑하면서 

이 사람이 되신 분에게 편입된다면,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자기 것으로 동화하게 됩니다.

"그는 머리시요 우리는 몸이며 

 우리는 또한 그가 그의 위격에서 당하신 것을 그 안에서 당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의 제물", "십자가의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안셀름의 의미로 보상의 행위로서 규정하는 것을 단념하는 반면에, 

매우 인상적으로 'pro peccatis nostris'(우리의 죄를 위하여), 

'sacrificium pro nobis'(우리를 위한 제물)란 말을 강조합니다.

"전 인간 본성은 믿음과 그의 죽음의 성례 전을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


어거스틴은 우리를 위한 구속적인 헌신의 관점에서 

예수의 삶 전체를 보았습니다.

화목적인 헌신의 동인을 밝혀내기 위하여 그는, 

분명히 어떤 한 이론에 국한되는 일없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거의 모든 구속에 관한 이론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몸의 머리가 자기 지체들을 위하여 살며 고난 당하고, 죽고 부활하며 

바로 이 사실을 통하여 

모든 죄책을 그들에게서 없앤다고 하는 확신에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에게 있어서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가장 참된 의가 

그리스도를 통한 이 죄사함에 있다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분의 구원의 행위는 

오직 이 화목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자 어거스틴의 고찰 방식의 역동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지체 안에서 

새 생명의 계속 역사 하는 능동적 원리로서 입증된다고 하는 

그의 가르침에서 강조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은 

경험적인 개인-자아가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한 그 안에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 

곧 지체 안에 계신 머리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그의 은혜론과 예정론을 구축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새 원리는 자연적으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massa damnata'(정죄 받은 덩어리)로부터 구속으로 부르신 자를 

믿음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의 그 어떤 선견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탐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의 깊이로부터,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그의 신적인 행위의 선지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은 

선천적으로 믿을 능력, 곧 'posse habere fidem'(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 

즉 또한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은총의 충동에 동의할 능력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영적인 생명의 동인들에 맞추면서, 

바로 그 "사랑스러움"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그의 감각적인 구속에서 구원하고 자유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며, 

의지가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극복할 수 없게" 자유스러운 내적인 긍정으로써 

진리에 순종할 정도로 동의하게끔 하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귀소되는 은혜의 유혹들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의 그 빛나는 실재성과 그 생생한 현상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은혜, 곧 시공 안에서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겸손과 사랑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덕목들입니다.

'humilitas'(겸손)와 'caritas'(사랑)란 개념은 

어거스틴의 이와 같은 발전 단계에서 

그 초기의 국한되었던 의미를 상실합니다.

'humilitas'(겸손)는 더 이상 단순히 진리 인식에 종사함에 있어서 

참된 자기 겸비가 아니며, 

'caritas'(사랑)는 더 이상 단순히 주변 사람에 대한 섬김이 아닙니다.

이 양 개념은 우주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은혜이기 때문에, 

'humilitas'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한, 겸손이 우리 완전함 자체이다."

그것은 양심에서 빛나는 의식이요, 

우리를 온전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수중에 내어 맡기는 것에 관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머리와 그 지체와의 하나됨이기 때문에, 

'caritas'는 단지 이웃, 곧 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전체성, 공동체 의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전적인 기독교 세계는 

'unus Christus'(유일한 그리스도), 'amans seipsum'(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어거스틴의 의미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홀로가 아니며,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 지체와의 결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세상 감정은 

언제나 전체적이고 공동의 것에 있었지, 

단독자와 개인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로부터 곧 알 수 있는 사실은, 

성자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어떠한 자세가 교회에게 귀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 사이에 

하나의 동일성, 곧 외적인 현상의 동일성이 아니라, 

내적 본질의 동일성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지체에게 역사 하시는 유일한 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있는 일이 가능하며, 

모든 가라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 성도들은 머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활력을 얻기 때문에, 

교회 은총의 복으로 풍성한 샘터, 

곧 'unica columba'(유일한 비둘기), 교회의 참된 반석(petra)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성도의 교제에 빚을 지지 않은 은혜는 

교회 내에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의 가시적 수여자는 

성직을 맡은 자, 곧 그 권위를 자기 자신으로부터나 

공동체의 품으로부터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가지는 그러한 교회의 "일군들"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는 

이 땅에 있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장소요, 

그리스도의 구세주 권세의 계시와 나타남, 그의 몸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구원을 갖다주는 교회에 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과 

모든 분파주의적이며 이단적인 공동체들에 대한 그의 강한 반대 자세는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동일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부정적인 판단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얀센주의 논쟁에서 

교회에서 재차 부인되었던 견해에 이르기까지 극단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밖에 있는 것은 정죄된 세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또한 교회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의 승리는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동일함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다면, 야만족들이 그 감독 도시를 파괴할 것이며,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이 성소 가장 깊숙이 까지 들어 와서 

제단을 허물 것이나,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은 

앞으로도 교회에서 그 강인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 바로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를 거두며 앞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투쟁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어거스틴에게 맞는 말입니다.

이미 그가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진리의 추구자였으며, 

전 인생을, 곧 정신과 몸을 가장 담대하고 가장 고상한 것, 

곧 오직 구원하는 그 진리에 대한 문제에 

인생을 내걸었던 사람이었다는 이 사실만이 

그에게 세계사의 위인들 가운데 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질문만을 던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와 상처투성이인 한 진리가 

그 답변이었던 곳에서조차도, 

그에게는 또한 대답할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의 전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고상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정신사적인 의미를 평가한다면, 

그 의미는 전적으로 그 당시의 오류들과의 논쟁에서 거둔 승리와 

이로써 주어진 중요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개념들의 해명과 깊이에

 있지만은 않습니다.

교회 내적인 삶과 교회 경건에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력이 

오히려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 당시의 기독교로 하여금 

자신을 새롭고 활력있게 숙고하도록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시금 새롭게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변증교부들의 반 영지주의적인 활동이후로 

교회 내에는 기독교를 순수하게 주지주의적으로, 

도덕주의적으로 해석하였던, 

곧 사람들이 믿으면서 인식해야 하는 신적인 가르침으로서,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바로잡아야 하는 

그러한 신적인 규율로서 해석하였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 바울과 교부들 가운데 

최상의 교부들에게 

침잠(沈潛, 마음을 가라앉혀서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함)하였으므로, 

기독교의 새로움과 그 온전한 의미가 그에게서 빛을 발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상 구속이요 

본질적으로 성육신의 비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믿으면서 신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곧 그리스도이신 새 사람 안에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복음이요, 

이것이 그의 삶을 강건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마음의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원천은 그리스도시요, 

 내 뿌리는 그리스도시요, 

 내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중심에서부터 그는 

이교도 문화와 기독교, 하나님과 세상을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어거스틴과 같이, 

그러한 명료성과 심오함을 가지고서, 

그러한 내적인 감흥과 그러한 풍성한 체험과 그러한 반짝이는 언어를 가지고서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을 선포하였던 교부나 신학자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은 날이나 혹은 그의 태어난 날을 

장엄하고도 새롭게 축하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마음, 

어거스틴의 사유와 삶의 이러한 보물을,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그대로 조심스럽게 보존하였습니까?

이 질문은 심한 질문입니다.

대답할라 치면 풀이 죽고 맙니다.

참으로 여전히 우리는 모두, 

구속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니체가 극명하게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구속받은 자들이여, 

 그들이 더 구속함을 받았을지 모른다"란 말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게르만족과 유럽인들의 가장 깊은 심층에 있지 아니합니다.

단지 그 때문에 우리 시대의 교만한 이기주의와 

자기 추구적인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며 

상속권을 상실한 자들의 편에서 한 

그릇되고 왜곡된 공동체 이상향을 

뇌수와 마음에 심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또 그러하다는 사실 때문이요, 

우리가 특별히 수 백년 이래로, 

어거스틴의 기독교로부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모든 지체들의 본질적 결합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러한 엄청난, 

공동체를 형성하며 보존하는 권세들을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갱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원 근거로부터 나온 갱신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듭남(중생)입니다.

그러한 중생이 있어야 

어느 정도나마 어거스틴의 정신과 

어거스틴의 기독교를 다시 일깨움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형상은 

단지 어두운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형상은 또한 미래를 향하여 밝게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옛 진리가 

다시 새로운 고상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은 살아 있습니다.

 

                                     Refer from onnuri.or.kr & klmc.de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