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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하나님은 인간을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1> -<3>

영국신사77 2020. 1. 22. 00:10

사랑의교회 중재 막판… 모두 눈물로 부둥켜안았다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1>

입력 : 2020-01-07 00:03/수정 : 2020-01-08 13:27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운데)가 지난달 23일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와 반대측 인사들을 중재한 뒤 화해의 기도를 하고 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손이 떨리고 어깨도 떨렸다. 두 눈동자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도 모른다. 두려운 영광과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난달 23일 7년 동안 분쟁을 겪어온 서울 사랑의교회 양측 인사와 함께 첫 화해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우려하며 공적 사역을 많이 해 왔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문제를 새에덴교회의 문제처럼 아파하며 기도하고 염려해 왔다. 그래서 고향 선배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K변호사에게 화해 제안을 했다. 오 목사 반대 측에 있던 그는 2004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K변호사를 설득하는 것만도 2년 반, 3년이 걸린 것 같다. 고향 선배이지만, 도대체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K변호사를 통해 김근수 안수집사를 알게 됐다. 김 집사에게도 허리를 굽혀 간청했다. “교회분쟁은 다툼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어떻게든지 품고 화해하는 게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드디어 2018년 11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새에덴교회 30주년 기념예배 때 K변호사가 김 집사와 함께 기념예배를 드리러 온 게 아닌가. 그래서 그 바쁜 시간 손님을 다 물리치고 두 사람을 방에 불러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후부턴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반대 측 대표자인 김두종 장로님과 권영준 장로님을 꼭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사실 그 일도 쉽지 않았다.

두 장로는 나를 만날 이유가 뭐가 있느냐면서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아이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한 번만 뵙고 싶습니다. 부탁을 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6월 두 장로를 만났다. 처음에 만났을 때 권 장로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휴대전화만 쳐다봤다. 그래도 계속 구애를 했다. 한국교회 제도권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사과하고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때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부총회장 단독후보 신분이었다. 총회 내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일을 추진한 것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미 그때 부총회장 단독후보가 돼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개인적인 욕심은 하나 있었다. 총회장이 됐을 때 사랑의교회 문제로 더 신경쓰지 않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나는 예장개혁 출신으로 예장합동 내에선 비주류다. 하지만 총회 경선 역사상 37년 만에 단독후보가 될 만큼 총회 안에서 여러 목사님과 장로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목사부총회장에 출마할 생각이 없을 때도 사랑의교회를 마음에 끌어안고 기도는 계속하고 있었다.

소강석 목사


그렇게 해서 두 장로와 만나게 됐고 진정성을 보이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소통이 된다고 확신했을 때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님과 만났다. 오 목사님을 뵀을 때, 그분도 정말 통 큰 마음과 배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 측에 대한, 진정성 있는 미안함과 송구함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비서실에도 공개하지 않고 은밀하게 중재 사역을 진행한 것이다. 나는 공적인 일정을 교회 앞에 모두 공개한다. 식사 약속이나 만남은 비서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양측에 누가 될까 봐 비서실에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일정을 수첩 다이어리에도 적어놓지 않았다. 그냥 그 주간의 일정을 메모해서 은밀하게 만날 정도로 극도의 비밀을 유지했다.

두 장로의 핵심 요구 조건은 딱 하나였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진정성 있는 공개사과였다. 그래서 이렇게 설득했다. “오 목사님께서 회개할 내용이 있으면 하나님께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 앞에도 충분히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시고도 남을 분입니다.”

그러나 일이 다 돼가다 무산되고 말 상황이 발생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뻘인 김 장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사정했다. “아무리 제가 전라도 촌놈 출신이라 하더라도 저도 대형교회 목사입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사랑의교회 문제가 우리 교회 문제고 한국교회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 합의서에 사인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이다. 앞으로도 모쪼록 이 일이 잘 매듭지어지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그동안 쌓여온 아픔과 상처의 얼룩을 닦아내는 화해의 걸레가 되겠다.’

이번 일을 통해 중재 사역에선 양쪽을 모두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한쪽 편을 들면 일은 틀어지게 돼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입을 무겁게 하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오 목사님께도 더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도록 엎드려서라도 고언할 것이다. 반대 측 두 장로를 끝까지 배려하고 아버지, 형님처럼 모시며 그들의 아픔과 상처도 보듬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사랑의교회 강남성전에 가서 말씀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양측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 됨과 하나 됨을 이루도록, 한국교회 화해 사역과 꽃씨 목회의 모델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


▒ 왜 ‘생명나무목회’인가

공격받는 한국교회… 최고의 방어는 교회 생명력



사탄은 최고의 무기인 선악과로 한국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다. 
선악과나무는 영어로 
‘트리 오브 나리지 오브 굿 앤드 에빌(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인데, 번역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뜻이다. 
사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접근한 것이다. 
사탄의 전략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요즘은 선악과적 공격이 시대와 맞아떨어지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성주의 시대를 맞으면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을 향해 도전했다. 
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은 모든 것을 구조화시켰다. 
신학계에도 ‘역사적 비평연구’가 들어와 성경을 난도질했고 
교회 안에 이성적 신앙이 유입됐다.

후기 구조주의로 와서는 이성과 함께 감성적인 공격까지 합류하면서 
집단적 선악과 현상, 안티적 쏠림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는 선악과에 물든 내부자들이 생겨나고 
바깥에는 시류에 편승한 안티 크리스천과 
속칭 ‘안 나가 신자들’이 결합해 집단적으로 공격한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대응을 못 하고 있다. 
최고의 방어는 교회가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나무신학을 정립하고 
생명나무목회를 해왔다. 

생명나무신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생명존중을 강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개척 초창기부터 생명나무목회를 했다. 
광주신학교 시절 교장이셨던 박종삼 목사님께 생명나무를 배웠다. 
훗날 교부 어거스틴이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해석했고 
종교개혁자 칼뱅은 생명나무를
 ‘하나님이 특별하게 주신 성만찬’ 
혹은 ‘그리스도 자체’라고 해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명나무를 연구하고 
생명나무목회를 해온 의미를 더 깊이 알게 됐다. 
이후 총신대 신대원 교수인 이희성 목사의 도움을 받아 
생명나무에 대한 많은 학자의 설명 자료를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실체로서의 생명나무는 없다. 
그러나 언약의 상징으로서 생명나무는 
구약의 언약 공동체에서도 많이 언급됐다.(잠 3:18, 11:30, 13:12, 15:4) 

예수님은 이 땅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처럼, 
둘째 생명나무로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나무란 표현만 없을 뿐이지 
생명의 물(요 4:14) 생명의 양식(요 6:55) 생명의 떡(요 6:35)으로 
오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나무로 존재하신다.(계 2:7, 22:7)

그런데 오늘날 안타까운 현상이 있다. 
교회가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작동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악과라는 바벨탑에 갇히는 상황이 많다. 
주의 몸 된 교회가 선악과라는 바벨탑에 갇혀버린 것이다. 
복음보다 윤리, 생명나무보다 선악이 위에 있고 
옳고 그름이 은혜를 눌러버리고 있다. 
이게 사탄에겐 최고의 무기다. 
이 무기에 교회가 무너져가고 있다.

교회 안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이 생명은 생명존중시대에서 말하는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복음으로 인한 생명이요, 
말씀이 가져다주는 생명이다. 

나는 생명나무신학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서 
김홍도 목사의 ‘불기둥’, 하용조 목사의 ‘로마서 강해’, 
오정현 목사의 ‘목회트렌드2000’, 
스티브 멕베이의 ‘은혜 영성의 파워’라는 책에서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책으로 집필했고 세계적인 조직신학자인 서철원 박사와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구약신학자인 벤 게메런 교수의 자문과 검증을 받아 
국내에서 ‘생명나무신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1만5000명 이상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콘퍼런스도 개최했다. 
생명나무 목회의 붐이 한동안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를 위한 공적 사역에 눈을 떴다. 
그래서 반이슬람, 반동성애, 차별금지법, 종교인 과세 문제 등을 대처하는 데 앞장섰다. 
교단이나 연합기관이 분열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더 급한 불을 끄느라 긴급하게 대처한 것이다. 
이 사역에 몰두하다 보니 
생명나무 콘퍼런스를 오랫동안 못하게 돼 우선 지면으로 대신한다.

소강석 목사



황폐한 영혼의 영토에 꿈의 꽃씨를 뿌렸다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2>

입력 : 2020-01-14 00:06
새에덴교회는 1988년 7월 서울 가락동 지하상가에서 8명의 성도로 시작됐다. 89년 여름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찬양을 하고 있다.

나의 목회는 원래 ‘곰의 목회’였다. 곰은 겨울잠을 자기 전에 나무에 올라가 떨어져본다고 한다. 떨어져서 몸이 아프면 다시 양식을 더 먹고 아프지 않으면 굴에 들어가서 겨울잠을 잔다고 한다. 나의 목회 역시 ‘곰의 목회’였다. 왜냐면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단 한 번도 부교역자 생활을 하며 목회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척을 하며 직접 몸으로 부딪쳐 스스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실패와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이정동 교수의 말처럼, 성공과 실패가 축적이 되면서 꽃씨 목회의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나는 개척자금이 없으니까 서울에서 신학교 수업이 끝나면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서울 개척 후보지를 물색하고 다녔다. 신도시 목회의 꿈이 없어서 목동, 상계동을 두루 살펴보았다. 나중에는 영등포, 대림동, 궁동, 오류동, 온수동까지 다 다녔다. 왜냐면 앞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쓰시고 내가 개척한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은 서울이되 위성도시인 부천이나 의정부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지역까지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 가락동을 찾았다. 당시 가락동은 신흥 개발 지역인데다가 분당 신도시 계획이 발표되기 전이었지만 구 성남시까지 흡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학력이나 스펙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개척을 준비했지만 꿈은 컸다. 당시 목동이나 상계동은 상가를 얻어 교회를 개척하려면 억대가 필요했는데 가락동은 1000만~2000만원 보증금에 월세를 내면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락동 23평 지하상가에서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교회를 개척했다. 훗날 맨땅, 맨발, 맨손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부흥을 이루었다고 해서 ‘맨발의 소명자’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나는 장소를 계약하기 전에 지역 조사부터 착수했다. 개척 교회의 지역과 장소 선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그물이 좋고 어부가 훌륭해도 고기가 없는 곳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개척자들이 이런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교회를 시작하다 어려움을 겪는다. 먼저 자신을 알고, 지역과 사회를 알고, 전도 대상층을 바로 이해하면 모든 일이 비교적 쉬워진다. 자신의 달란트는 무엇인가, 자신의 은사가 이 지역 주민의 특성에 맞는가만 확실하면 개척의 성공은 보장된다.

나는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었지만 가슴에 뜨거운 소명감을 불태우며 온 몸으로 뛰었다.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주보를 뿌리고 전도지를 뿌리고 다녔다. 문제는 아파트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새벽기도 이전에 일어나서 집사람과 신문배달을 했다. 단 신문 속에 우리 교회 전단지를 넣어 돌리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나 나는 신문만 배달한 것이 아니라 위층에서부터 아래층까지 교회 전도지를 꽂아놓고 왔다. 아파트 뿐만 아니라 가락동 거리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로 누비고 쓸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고 집집마다 전도지를 뿌리고 다녔다.

이렇게 하면 그 다음 주간에 사람들이 수십 명 몰려올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물론 한두 명씩 온 것은 사실이지만 등록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다. 설교가 양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토요일날 저녁에는 강단에서 설교 연습을 몇 번이나 했다. 그렇게 설교 리허설을 한 후 강단에서 내려와 빈 의자를 붙잡고 기도하고 다녔다. “하나님 사람 좀 보내주세요. 길을 지나가는 걸인이라도 좋으니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제 생명을 다 바쳐 목회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면 또 가슴이 뜨거워져 정말 의자를 눈물이 촉촉하게 적실 정도로 울고 또 울며 기도했다. 한 마디로 그때부터 의자에 눈물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람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그때 온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하거나 번지르한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 근처에 올림픽 패밀리 타운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렇게 신문을 배달하며 전단지를 돌려도 그 동네에서는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부터도 그런 교회는 안 나갈 것 같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낮예배 때도 쥐들이 짹짹 거리며 우글거리는 칙칙한 지하실 교회에 누가 오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상처 받고 가슴에 한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생명처럼 사랑하며 상처와 아픔을 품었다. 그리고 최고의 설교를 하려고 몸부림쳤다. 영혼의 영토에 꿈의 꽃씨, 생명의 꽃씨, 사랑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리고 집사람은 가락시장에서 상인들이 버리고 간 배추와 무시래기를 주워 다가 주일이면 찾아오는 성도들에게 된장국을 끓여 대접했다.

나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한과 아픔을 안다. 그러나 그 한과 애환으로 끝나지 말고 지금 남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또 찾아오는 몇 사람의 가슴 속에 꿈의 꽃씨, 생명의 꽃씨를 뿌리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꽃씨는 어떻게 뿌리고 어떻게 싹이 나고 자라게 되었는가.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생명나무 선택은 예수의 생명, 정신·사상 따르는 것

오늘날 구원의 도정에 있는 성도와 교회론적인 범주에서 
생명나무란 무엇이며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건은 
창세기 2장과 3장의 사건으로 이미 종결됐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생명나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빛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나무를 알아야 한다. 
사탄이 선악과 사건의 패러다임을 갖고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해 오고 
생명나무의 교훈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생명의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 순간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며 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2의 아담으로 오신 것처럼, 
둘째 생명나무로 오셨다. 
우리는 생명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고 말씀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상을 따라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절대로 삶 속에서 주인이 돼선 안 된다.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거나 자의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내 안에서 거듭나 있는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존재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그러니 순간 순간마다 
예수님의 생명을 사모하고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 신앙이다.

생명나무 신앙을 지닌 사람은 
절대 옛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새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갖고 
새 생명의 법칙과 새 생명의 원리로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자기 생각과 똑똑함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나 경험, 지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언제나 말씀의 생명을 추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살아간다.

그러니 생명나무 신앙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는 삶을 살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가 선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다. 
말씀과 성령만을 추구하고 따른다. 
그것이 내 선입견에 맞느냐 안 맞느냐, 
내 도덕적 기준과 윤리적 잣대에 맞느냐 안 맞느냐는 그다음이다. 

그것이 내게 생명이냐 아니냐,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을 둔다.

그래서 나 자신이 정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 맞지 않아도, 
심지어 자신에게 어떠한 손해와 불이익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그것이 과거 내게 생명이고 은혜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가 된다면 과감하게 목숨을 걸고 선택한다. 
신앙생활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쁘신 뜻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명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두고 
오직 생명에 우선순위를 두며 모든 것을 선택한다.

내 선악의 지식과 판단의 안경을 쓰고 보면 
교회도 비난하고 공격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목사가 어땠느니, 목사의 가족이 어땠느니, 
교회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불평하고 비난할 요소가 많을 수 있다. 
인간 편에서 볼 때는 그들의 말이 다 옳은 것같이 들린다. 
그들은 선악의 논리에 명철한 사람이고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과연 생명이 있으며 눈물 젖은 감동과 행복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두 눈은 선악의 빛으로 반짝거리는 것 같지만 
얼굴은 영적으로 굶주려 메말라 있고 
영혼은 기갈과 배고픔으로 허덕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본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한 사랑의 안경을 쓰고 교회를 바라본다.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섬기고 포용하며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편을 선택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생명나무를 언제나 꼭 붙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악과를 선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소강석 목사

상처·아픔 어루만지며 가슴 속에 희망, 꿈의 꽃씨 뿌려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3>

입력 : 2020-01-21 00:04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1989년 서울 가락동 지하 예배당에서 열린 교회 창립 1주년 기념예배에서 기도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지하상가 76㎡(23평)에서 교회 개척을 준비할 때 일이다. 서울에 이삿짐을 풀어놓자마자 집사람이 주변 교회를 돌아다니더니 주보 몇 장을 가져왔다. 주보를 보니 주변 목사님들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하고 스펙이 좋았다. 바로 옆 건물에서 개척한 목사님은 연세대를 나왔고 조금 더 옆에 있는 목사님은 고려대를 나왔다. 조금 더 가서 건너편에 있는 목사님은 서울대를 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목사님은 감리교신학대, 그 옆으로 조금 더 가서 있는 목사님은 총신대, 저 위쪽으로는 고신대 출신의 목사가 있었다.

지방신학교 출신이었던 나는 주보에 이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목회자들의 화려한 스펙의 숲에서 한 그루 못생긴 나무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 신분으로 교회 개척을 했다. 부목사로 써주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집사람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전도사님, 어쩌다가 이런 곳을 개척 장소로 삼았어요. 저런 분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성공하려고 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다시 지방으로 내려갑시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딱 맞는 말이었다. 그럴수록 이를 더 악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래 봬도 하나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동행하는 스토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발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을 때 성령님께서 이렇게 질문하는 듯했다. “내가 너에게 한 영혼, 영혼을 보내주면 너의 생명처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 그때 나도 모르게 성령님께 이렇게 답을 드렸다. “성령님, 물론이지요. 저의 생명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상가 개척교회를 찾아오는 분들은 대부분 마음에 쓴 뿌리가 있고 독버섯이 있었다. 아니, 아예 마음속에 나쁜 운전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실패를 통해 상처를 받았거나 기존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담임목사에 대한 독점성이 강하고 주목받기를 좋아했다. 경험으로 봤을 때, 그들을 효과적으로 양육하면 큰 일꾼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처받은 사람끼리 또다시 싸우다가 교회 공동체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개척교회에선 30명, 50명이 모이다가 서로 싸우고 다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 목회는 성도들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상처와 아픔의 쓴 뿌리, 독버섯을 먼저 뽑아줘야 한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 그들의 심리적 아픔을 어루만져 줬다. 성장과정에 상처가 있는 사람에겐 내면의 지하실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어린아이와 화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먼저 성도들의 마음속 지하실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달래줬다.

특히 대형교회나 타 교회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뽑아내 주었다. 교인들이 대형교회나 타 교회를 욕할 때 목회자가 같이 욕하면 안 된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되, 위로와 희망을 줘야 한다. “얼마나 아프셨나요. 힘드셨나요.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제가 더 잘 섬기겠습니다.” 주보 1면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그림을 넣어 인쇄했다. 그리고 맨 밑에 ‘저도 이렇게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지면서 가슴 속에 희망의 꽃씨, 꿈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우리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실패하고 상처받아 쓰라리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제, 자매님을 우리 지하실 개척교회로 보낸 것이 아닙니까. 우리 다시 일어납시다. 저를 보십시오. 저도 한과 아픔과 상처가 많은 목회자입니다. 우리 같이 손을 잡고 일어납시다. 걸어갑시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사랑과 섬김, 비전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러자 절망과 낙심으로 폐허가 됐던 교인들이 회복하며 한 명, 한 명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며 꿈의 공동체를 이뤘다. 상처와 상처가 부딪치면 다툼과 분란밖에 안 일어나지만 꿈과 꿈이 연결되고 손을 잡으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난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꿈과 꿈이 연결되고 융합되면 개인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 솟아나고 교회 공동체의 부흥에 대한 열망이 타오른다. 그 회복과 부흥을 향한 열망을 기도회를 통해 엮어줬고, 진심 어린 사랑을 담은 설교를 통해 상처받은 심령의 영토에 꽃씨를 뿌렸다. 그러자 교인들의 영혼에 사랑의 꽃이 피고 꿈의 싹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부흥했고 그때 사랑과 꿈의 꽃이 핀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 중직자가 됐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그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기둥 같은 중직자가 돼 섬기고 있다. 그들은 교회 후세대들에게 믿음을 전수하며 사랑과 꿈의 꽃씨를 뿌리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

선악과나무는 영어로 
‘트리 오브 나리지 오브 굿 앤드 에빌’(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다. 
즉,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는 말이다. 
조금 더 의역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얻게 하는 나무’라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것을 먹는 순간 
당장 선악에 대해 눈을 뜨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교부 어거스틴은 이 나무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고 했으며, 
이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통제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아담과 하와에게 금지하셨을까.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만 가진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의 간교한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고유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고 도전한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선악 판단의 주체를 하나님 자신이 되게 하셨고 
선악 판단의 진정한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선악 판단의 주체도 하나님께 두고 
선악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두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과 지식, 지혜,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판단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열매를 
따 먹도록 유혹했던 사탄의 시험과 유혹, 
혹은 사탄의 정신과 사상을 
선악의 원리로 삼아 사는 것을 말한다.

선악과적 삶의 중심에는 
옛사람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 먹게 했던 사탄은 
지금도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욕구를 유혹하고 자극하고 발동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독자적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본성을 그대로 소유한 옛사람을 폐기해야 한다. 
그 모든 선악의 지식과 판단을 하나님 앞에 반납하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20~30년 되고 중직자가 돼도 
옛사람을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선악과적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의 선악 마인드와 판단에 기초를 두게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추구할 수 없다. 
신앙의 마인드나 패러다임 자체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다. 
교회 안에서 항상 부정적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 직장 사업장에서도 늘 하는 것이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이다.

그뿐인가. 
그 선악 판단의 대상은 하나님에게까지도 옮겨간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으로 결정하고 판단해놓고 
나중에 손해가 나고 불이익을 당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선악 판단의 바벨탑을 쌓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 생각보다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선악의 지식을 먼저 추구하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 회의의 경우도 그렇다. 
원래 교회 회의는 일반 세상 회의와 다르다. 
왜냐면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도 
항상 자기의 선악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결정하며 
그 뜻을 순종하는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돼야 한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과 내 주장과 내 뜻을 관철하는 회의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기 시작하면 
교회 회의에서도 내 뜻과 주장만을 관철하려 한다. 
그래서 내 뜻과 내 고집을 관철하기 위해서 “법이요, 규칙이요”라고 외친다. 

물론 공동체의 질서 유지와 교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법과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이루고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과 규칙을 
하나님의 뜻과 은혜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선악과적 신앙과 삶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허물고 있지 않은가.

소강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8871&code=231112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