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Two-headed Eagle – 신성 로마 제국 (2) 선제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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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2007. 9. 2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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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후 (選帝侯)의 기원>
이번 편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자 영주들의 꿈, 선제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전에 “사자의 후예들” 시리즈의 외전으로 소햏이 위키피디아를 번역, 참조하여 역갤에 올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선제후, 영어로는 일렉터 (Elector), 독일어로는 쿠르퓨르스트 (Kurfürst)라고 불리는 제후들입니다. 어원을 따지자면, 쿠르 (Kur)는 ‘고르다, 뽑다’라는 뜻이 되겠고, 퓨르스트(Fürst) 는 ‘공(公), 제후 (諸侯) (prince)’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선-제후… 번역이 잘 된 것 같네요.
원래 고대 게르만 부족에서는 그들의 부족장을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지요. 이후, 이 전통은 프랑크 왕국을 거쳐서 프랑스와 독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곧 혈통으로 세습화되는 구조로 바뀌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계속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부족장 선거에 있어서는 원래 모든 부족민들이 투표하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곧 참정권은 몇몇 귀족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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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의 교황 우르반 4세. 그의 편지에서 일곱 명의 선제후가 언급된다.)
13세기 이전의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몇몇 강력한 제후들에 의해 추대되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선제후’가 정립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황 우르반 4세 (Urban IV) (재위: 1261-1264)의 편지에서, “태고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제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제후들은 다음과 같지요.
세 명의 성직 제후: 마인츠 (Mainz)의 대주교, 트리어 (Trier)의 대주교, 쾰른 (Köln)의 대주교
네 명의 세속 제후: 프랑켄 (Franken)의 공작, 슈바벤 (Schwaben)의 공작, 작센 (Sachsen)의 공작, 바이에른 (Bayern)의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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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의 독일.위에서 언급한 세속 선제후들의 영토이다. 분홍색이 작센 공작령, 녹색이 프랑켄 공작령, 남색이 슈바벤 공작령, 노란색이 바이에른 공작령이 되겠다. 이후 작센 공작령은 그 중심이 동쪽으로 (현재의 작센 위치) 이동하게 되고, 위의 작센 공작령은 니더작센 (Niedersachsen) (Low-Saxony) 으로 불리게 된다.)
세 명의 대주교는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주교령을 소유한 성직자들이었고, 특히 마인츠의 대주교는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교황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가장 강력한 성직자였습니다. 네 세속 제후들은 고대의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공작들이었습니다.
<선제후의 확립>
그러다가, 13세기 들어 프랑켄 공작가와 슈바벤 공작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게 되자,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영토를 대부분 계승했던 라인의 궁중백 (혹은 팔츠백: 궁중백에 대해서는 이후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alzgraf bei Rhein) 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제국의 대시종장 (Arch-Chamberlain)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Markgraf von Brandenburg) 에게로 넘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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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재위 1308-1313)을 로마 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모인 선제후들. 아직까지 선제후권이 완전히 확립되기는 이전이지만, 7인의 선제후는 거의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선제후의 위쪽에 각각의 휘장이 보인다. 좌측부터 쾰른의 대주교, 마인츠의 대주교, 트리어의 대주교,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보헤미아의 왕이 되겠다.)
하지만 이 때,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은 같은 비텔바흐 (Wittelsbach) 가문 (비텔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 다음 가는 강력한 가문이었습니다.) 출신이었기 때문에, 한 가문에서 두 장의 투표권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선제후들이 이를 반대하게 됩니다. 결국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 사이에 선제후권을 놓고 싸움이 있었고, 장자 (長子)의 혈통에 가까웠던 라인의 팔츠백이 선제후로 선택되었지요. 나머지 한 자리의 선제후는 고대 제국의 대연회장 (Arch-Cupbearer) 이자,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보헤미아의 왕 (King of Bohemia, König von Böhmen) 이 인정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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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초기의 선제후령. 마인츠 선제후령 (흑회색), 쾰른 선제후령 (좌측 상단의 회청색), 트리어 선제후령 (하늘색), 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작센 선제후령 (붉은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남색), 팔츠 선제후령 (녹색)이 되겠다. 13세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작센 선제후령은 위치가 이동되었고,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팔츠 선제후에게,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바이에른 공작의 선거권은 보헤미아 왕에게 이동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황제와 교황 사이의 다툼에서 대부분의 선제후가 황제를 지지하면서, 교황의 대관식 없이도 선제후의 선출에 의해 황제를 뽑을 수 있다는 금인 칙서(Golden Bull)가 1356년 발표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금인 칙서에 의해 황제권이 약화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에 가깝지요.) 즉,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보헤미아의 왕,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이 선제후로 공인되었고, 이들의 선출은 교황의 대관식이 없어도 제국의 황제로 인정되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전 편에 설명드렸었지요?) 이 중 좌장 역할은 마인츠의 대주교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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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의 금인 칙서를 공포하는 카를 4세 (재위 1355-1378))
<선제후의 호칭과 변천>
위에서 공작 (듀크 (Duke); 독일어로는 헤르초크 (Herzog)) 과 변경백 (마그레이브 (Margrave); 독일어로는 마르크그라프 (Markgraf)), 궁중백 (팔츠백) (카운트 팔라티네이트 (Count Palatinate); 독일어로는 팔츠그라프 (Palzgraf)) 등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독일 귀족 계급에 대해서는 이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여러 귀족 계급이 이제 선제후가 되었으니, 이들은 더 이상 공작 혹은 변경백 등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제 공작 위의 명칭, ‘선제후-쿠르퓨르스트’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이것은 대단한 영예였습니다. 당시 황제와 왕의 호칭은 ‘폐하 = 유어 메저스티 (Your Majesty) = 자이네 마예스테트 (Seine Majestät)'였는데, 이 바로 아래의 존칭은 오직 선제후들에게만 붙여졌지요. ‘고귀하신 전하 = 서린 하이니스 (Serene Highness) = 두르크라우크트 (Durchlaucht)’라는 호칭이 그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황제 폐하, 고귀하신 작센의 선제후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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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596-1632; 선제후 재위 1610-1623, 보헤미아 왕 재위 1619-1620)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보헤미아 귀족들에 의해 1619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옹립된다. 위의 모습이 보헤미아의 왕관을 쓴 모습이다. 이후 자신의 영지도 빼앗기고 선제후권도 박탈 (1623) 당해 구스타프 아돌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도망쳐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 7인의 선제후는 17세기까지 변화 없이 내려오다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edrich V)가 황제에 반기를 들어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내용) 파면됩니다. 팔츠 선제후의 자리는 이전에 장자 상속권으로 선제후 자리에서 미끌어졌던 바이에른의 공작, 막시밀리안 (Maximilian) 에게 계승되어 바이에른 선제후가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에서 팔츠 선제후의 직권이 복권되면서, 선제후의 수는 8인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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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정적(政敵)이자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공작 재위 1597-1651, 바이에른 선제후 재위 1623-1651). 그는 무능했던 프레데릭과는 달리, 정치-경제-외교 면에서 모두 뛰어난 편이었다. 당시 유럽 제일의 부자였고, 카톨릭과 황제를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프레데릭이 파면되자, 선제후의 칭호를 받고 바이에른 선제후로 불리게 된다.)
17세기 말, 칼뱅 파였던 팔츠 선제후령이 카톨릭에 의해 계승되면서, (필리프 빌헬름 (Philipp Wilhelm) (재위 1685-1690)), 신-구교도의 종교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신교도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1692년에 신교도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Braunschbeig-Lüneburg) 공작 에른스트아우구스트 (Ernst August) 가 9번째 선제후가 되지요. 하노버 (Hanover) 선제후령이 그것입니다. 이아우구스트의 아들인 게오르그 (Gerog)가 영국 왕 조지 1세가 됩니다. 영국 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는 것이지요.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결국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면서 선제후 제도도 폐지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조지 1세가 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그 (1660-1727, 선제후 재위 1698-1727, 영국 왕 재위 1714-1727)
[서론] Two-headed Eagle – 신성 로마 제국 (2) 선제후 <1>
<선제후 (選帝侯)의 기원>
이번 편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자 영주들의 꿈, 선제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전에 “사자의 후예들” 시리즈의 외전으로 소햏이 위키피디아를 번역, 참조하여 역갤에 올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선제후, 영어로는 일렉터 (Elector), 독일어로는 쿠르퓨르스트 (Kurfürst)라고 불리는 제후들입니다. 어원을 따지자면, 쿠르 (Kur)는 ‘고르다, 뽑다’라는 뜻이 되겠고, 퓨르스트(Fürst) 는 ‘공(公), 제후 (諸侯) (prince)’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선-제후… 번역이 잘 된 것 같네요.
원래 고대 게르만 부족에서는 그들의 부족장을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지요. 이후, 이 전통은 프랑크 왕국을 거쳐서 프랑스와 독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곧 혈통으로 세습화되는 구조로 바뀌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계속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부족장 선거에 있어서는 원래 모든 부족민들이 투표하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곧 참정권은 몇몇 귀족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지요.
(13세기의 교황 우르반 4세. 그의 편지에서 일곱 명의 선제후가 언급된다.)
13세기 이전의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몇몇 강력한 제후들에 의해 추대되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선제후’가 정립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황 우르반 4세 (Urban IV) (재위: 1261-1264)의 편지에서,
“태고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제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제후들은 다음과 같지요.
세 명의 성직 제후: 마인츠 (Mainz)의 대주교, 트리어 (Trier)의 대주교, 쾰른 (Köln)의 대주교
네 명의 세속 제후: 프랑켄 (Franken)의 공작, 슈바벤 (Schwaben)의 공작, 작센 (Sachsen)의 공작, 바이에른 (Bayern)의 공작
(13세기의 독일.위에서 언급한 세속 선제후들의 영토이다.
분홍색이 작센 공작령, 녹색이 프랑켄 공작령, 남색이 슈바벤 공작령,
노란색이 바이에른 공작령이 되겠다.
이후 작센 공작령은 그 중심이 동쪽으로 (현재의 작센 위치) 이동하게 되고,
위의 작센 공작령은 니더작센 (Niedersachsen) (Low-Saxony) 으로 불리게 된다.)
세 명의 대주교는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주교령을 소유한 성직자들이었고, 특히 마인츠의 대주교는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교황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가장 강력한 성직자였습니다. 네 세속 제후들은 고대의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공작들이었습니다.
<선제후의 확립>
그러다가, 13세기 들어 프랑켄 공작가와 슈바벤 공작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게 되자,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영토를 대부분 계승했던 라인의 궁중백 (혹은 팔츠백: 궁중백에 대해서는 이후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alzgraf bei Rhein) 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제국의 대시종장 (Arch-Chamberlain)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Markgraf von Brandenburg) 에게로 넘어갔지요.
(하인리히 7세 (재위 1308-1313)을 로마 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모인 선제후들. 아직까지 선제후권이 완전히 확립되기는 이전이지만, 7인의 선제후는 거의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선제후의 위쪽에 각각의 휘장이 보인다. 좌측부터 쾰른의 대주교, 마인츠의 대주교, 트리어의 대주교,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보헤미아의 왕이 되겠다.)
하지만 이 때,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은 같은 비텔바흐 (Wittelsbach) 가문 (비텔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 다음 가는 강력한 가문이었습니다.) 출신이었기 때문에, 한 가문에서 두 장의 투표권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선제후들이 이를 반대하게 됩니다. 결국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 사이에 선제후권을 놓고 싸움이 있었고, 장자 (長子)의 혈통에 가까웠던 라인의 팔츠백이 선제후로 선택되었지요. 나머지 한 자리의 선제후는 고대 제국의 대연회장 (Arch-Cupbearer) 이자,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보헤미아의 왕 (King of Bohemia, König von Böhmen) 이 인정되게 되었지요.
(30년 전쟁 초기의 선제후령. 마인츠 선제후령 (흑회색), 쾰른 선제후령 (좌측 상단의 회청색), 트리어 선제후령 (하늘색), 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작센 선제후령 (붉은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남색), 팔츠 선제후령 (녹색)이 되겠다. 13세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작센 선제후령은 위치가 이동되었고,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팔츠 선제후에게,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바이에른 공작의 선거권은 보헤미아 왕에게 이동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황제와 교황 사이의 다툼에서 대부분의 선제후가 황제를 지지하면서, 교황의 대관식 없이도 선제후의 선출에 의해 황제를 뽑을 수 있다는 금인 칙서(Golden Bull)가 1356년 발표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금인 칙서에 의해 황제권이 약화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에 가깝지요.) 즉,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보헤미아의 왕,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이 선제후로 공인되었고, 이들의 선출은 교황의 대관식이 없어도 제국의 황제로 인정되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전 편에 설명드렸었지요?) 이 중 좌장 역할은 마인츠의 대주교가 했습니다.
(1356년의 금인 칙서를 공포하는 카를 4세 (재위 1355-1378))
<선제후의 호칭과 변천>
위에서 공작 (듀크 (Duke); 독일어로는 헤르초크 (Herzog)) 과 변경백 (마그레이브 (Margrave); 독일어로는 마르크그라프 (Markgraf)), 궁중백 (팔츠백) (카운트 팔라티네이트 (Count Palatinate); 독일어로는 팔츠그라프 (Palzgraf)) 등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독일 귀족 계급에 대해서는 이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여러 귀족 계급이 이제 선제후가 되었으니, 이들은 더 이상 공작 혹은 변경백 등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제 공작 위의 명칭, ‘선제후-쿠르퓨르스트’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이것은 대단한 영예였습니다. 당시 황제와 왕의 호칭은 ‘폐하 = 유어 메저스티 (Your Majesty) = 자이네 마예스테트 (Seine Majestät)'였는데, 이 바로 아래의 존칭은 오직 선제후들에게만 붙여졌지요. ‘고귀하신 전하 = 서린 하이니스 (Serene Highness) = 두르크라우크트 (Durchlaucht)’라는 호칭이 그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황제 폐하, 고귀하신 작센의 선제후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596-1632; 선제후 재위 1610-1623, 보헤미아 왕 재위 1619-1620)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보헤미아 귀족들에 의해 1619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옹립된다. 위의 모습이 보헤미아의 왕관을 쓴 모습이다. 이후 자신의 영지도 빼앗기고 선제후권도 박탈 (1623) 당해 구스타프 아돌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도망쳐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 7인의 선제후는 17세기까지 변화 없이 내려오다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edrich V)가 황제에 반기를 들어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내용) 파면됩니다. 팔츠 선제후의 자리는 이전에 장자 상속권으로 선제후 자리에서 미끌어졌던 바이에른의 공작, 막시밀리안 (Maximilian) 에게 계승되어 바이에른 선제후가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에서 팔츠 선제후의 직권이 복권되면서, 선제후의 수는 8인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위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정적(政敵)이자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공작 재위 1597-1651, 바이에른 선제후 재위 1623-1651). 그는 무능했던 프레데릭과는 달리, 정치-경제-외교 면에서 모두 뛰어난 편이었다. 당시 유럽 제일의 부자였고, 카톨릭과 황제를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프레데릭이 파면되자, 선제후의 칭호를 받고 바이에른 선제후로 불리게 된다.)
17세기 말, 칼뱅 파였던 팔츠 선제후령이 카톨릭에 의해 계승되면서, (필리프 빌헬름 (Philipp Wilhelm) (재위 1685-1690)), 신-구교도의 종교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신교도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1692년에 신교도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Braunschbeig-Lüneburg) 공작 에른스트아우구스트 (Ernst August) 가 9번째 선제후가 되지요. 하노버 (Hanover) 선제후령이 그것입니다. 이아우구스트의 아들인 게오르그 (Gerog)가 영국 왕 조지 1세가 됩니다. 영국 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는 것이지요.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결국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면서 선제후 제도도 폐지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조지 1세가 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그 (1660-1727, 선제후 재위 1698-1727, 영국 왕 재위 1714-1727)
[서론] Two-headed Eagle – 신성 로마 제국 (2) 선제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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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23. 12:16
이웃추가
<선제후 (選帝侯)의 기원>
이번 편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자 영주들의 꿈, 선제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전에 “사자의 후예들” 시리즈의 외전으로 소햏이 위키피디아를 번역, 참조하여 역갤에 올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선제후, 영어로는 일렉터 (Elector), 독일어로는 쿠르퓨르스트 (Kurfürst)라고 불리는 제후들입니다. 어원을 따지자면, 쿠르 (Kur)는 ‘고르다, 뽑다’라는 뜻이 되겠고, 퓨르스트(Fürst) 는 ‘공(公), 제후 (諸侯) (prince)’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선-제후… 번역이 잘 된 것 같네요.
원래 고대 게르만 부족에서는 그들의 부족장을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지요. 이후, 이 전통은 프랑크 왕국을 거쳐서 프랑스와 독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곧 혈통으로 세습화되는 구조로 바뀌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계속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통이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부족장 선거에 있어서는 원래 모든 부족민들이 투표하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곧 참정권은 몇몇 귀족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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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의 교황 우르반 4세. 그의 편지에서 일곱 명의 선제후가 언급된다.)
13세기 이전의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몇몇 강력한 제후들에 의해 추대되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선제후’가 정립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황 우르반 4세 (Urban IV) (재위: 1261-1264)의 편지에서, “태고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제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제후들은 다음과 같지요.
세 명의 성직 제후: 마인츠 (Mainz)의 대주교, 트리어 (Trier)의 대주교, 쾰른 (Köln)의 대주교
네 명의 세속 제후: 프랑켄 (Franken)의 공작, 슈바벤 (Schwaben)의 공작, 작센 (Sachsen)의 공작, 바이에른 (Bayern)의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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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의 독일.위에서 언급한 세속 선제후들의 영토이다. 분홍색이 작센 공작령, 녹색이 프랑켄 공작령, 남색이 슈바벤 공작령, 노란색이 바이에른 공작령이 되겠다. 이후 작센 공작령은 그 중심이 동쪽으로 (현재의 작센 위치) 이동하게 되고, 위의 작센 공작령은 니더작센 (Niedersachsen) (Low-Saxony) 으로 불리게 된다.)
세 명의 대주교는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주교령을 소유한 성직자들이었고, 특히 마인츠의 대주교는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교황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가장 강력한 성직자였습니다. 네 세속 제후들은 고대의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공작들이었습니다.
<선제후의 확립>
그러다가, 13세기 들어 프랑켄 공작가와 슈바벤 공작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게 되자,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영토를 대부분 계승했던 라인의 궁중백 (혹은 팔츠백: 궁중백에 대해서는 이후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alzgraf bei Rhein) 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제국의 대시종장 (Arch-Chamberlain)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Markgraf von Brandenburg) 에게로 넘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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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재위 1308-1313)을 로마 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모인 선제후들. 아직까지 선제후권이 완전히 확립되기는 이전이지만, 7인의 선제후는 거의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선제후의 위쪽에 각각의 휘장이 보인다. 좌측부터 쾰른의 대주교, 마인츠의 대주교, 트리어의 대주교,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보헤미아의 왕이 되겠다.)
하지만 이 때,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은 같은 비텔바흐 (Wittelsbach) 가문 (비텔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 다음 가는 강력한 가문이었습니다.) 출신이었기 때문에, 한 가문에서 두 장의 투표권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선제후들이 이를 반대하게 됩니다. 결국 라인의 팔츠백과 바이에른의 공작 사이에 선제후권을 놓고 싸움이 있었고, 장자 (長子)의 혈통에 가까웠던 라인의 팔츠백이 선제후로 선택되었지요. 나머지 한 자리의 선제후는 고대 제국의 대연회장 (Arch-Cupbearer) 이자,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보헤미아의 왕 (King of Bohemia, König von Böhmen) 이 인정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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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초기의 선제후령. 마인츠 선제후령 (흑회색), 쾰른 선제후령 (좌측 상단의 회청색), 트리어 선제후령 (하늘색), 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작센 선제후령 (붉은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남색), 팔츠 선제후령 (녹색)이 되겠다. 13세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작센 선제후령은 위치가 이동되었고, 프랑켄 공작의 선거권은 팔츠 선제후에게, 슈바벤 공작의 선거권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바이에른 공작의 선거권은 보헤미아 왕에게 이동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황제와 교황 사이의 다툼에서 대부분의 선제후가 황제를 지지하면서, 교황의 대관식 없이도 선제후의 선출에 의해 황제를 뽑을 수 있다는 금인 칙서(Golden Bull)가 1356년 발표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금인 칙서에 의해 황제권이 약화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에 가깝지요.) 즉,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보헤미아의 왕, 라인의 팔츠백, 작센의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이 선제후로 공인되었고, 이들의 선출은 교황의 대관식이 없어도 제국의 황제로 인정되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전 편에 설명드렸었지요?) 이 중 좌장 역할은 마인츠의 대주교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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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의 금인 칙서를 공포하는 카를 4세 (재위 1355-1378))
<선제후의 호칭과 변천>
위에서 공작 (듀크 (Duke); 독일어로는 헤르초크 (Herzog)) 과 변경백 (마그레이브 (Margrave); 독일어로는 마르크그라프 (Markgraf)), 궁중백 (팔츠백) (카운트 팔라티네이트 (Count Palatinate); 독일어로는 팔츠그라프 (Palzgraf)) 등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독일 귀족 계급에 대해서는 이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여러 귀족 계급이 이제 선제후가 되었으니, 이들은 더 이상 공작 혹은 변경백 등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제 공작 위의 명칭, ‘선제후-쿠르퓨르스트’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지요.
이것은 대단한 영예였습니다. 당시 황제와 왕의 호칭은 ‘폐하 = 유어 메저스티 (Your Majesty) = 자이네 마예스테트 (Seine Majestät)'였는데, 이 바로 아래의 존칭은 오직 선제후들에게만 붙여졌지요. ‘고귀하신 전하 = 서린 하이니스 (Serene Highness) = 두르크라우크트 (Durchlaucht)’라는 호칭이 그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황제 폐하, 고귀하신 작센의 선제후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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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596-1632; 선제후 재위 1610-1623, 보헤미아 왕 재위 1619-1620)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보헤미아 귀족들에 의해 1619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옹립된다. 위의 모습이 보헤미아의 왕관을 쓴 모습이다. 이후 자신의 영지도 빼앗기고 선제후권도 박탈 (1623) 당해 구스타프 아돌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도망쳐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 7인의 선제후는 17세기까지 변화 없이 내려오다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edrich V)가 황제에 반기를 들어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내용) 파면됩니다. 팔츠 선제후의 자리는 이전에 장자 상속권으로 선제후 자리에서 미끌어졌던 바이에른의 공작, 막시밀리안 (Maximilian) 에게 계승되어 바이에른 선제후가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에서 팔츠 선제후의 직권이 복권되면서, 선제후의 수는 8인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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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정적(政敵)이자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Maximilian) (1573-1651, 바이에른 공작 재위 1597-1651, 바이에른 선제후 재위 1623-1651). 그는 무능했던 프레데릭과는 달리, 정치-경제-외교 면에서 모두 뛰어난 편이었다. 당시 유럽 제일의 부자였고, 카톨릭과 황제를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프레데릭이 파면되자, 선제후의 칭호를 받고 바이에른 선제후로 불리게 된다.)
17세기 말, 칼뱅 파였던 팔츠 선제후령이 카톨릭에 의해 계승되면서, (필리프 빌헬름 (Philipp Wilhelm) (재위 1685-1690)), 신-구교도의 종교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신교도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1692년에 신교도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Braunschbeig-Lüneburg) 공작 에른스트아우구스트 (Ernst August) 가 9번째 선제후가 되지요. 하노버 (Hanover) 선제후령이 그것입니다. 이아우구스트의 아들인 게오르그 (Gerog)가 영국 왕 조지 1세가 됩니다. 영국 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는 것이지요.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결국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면서 선제후 제도도 폐지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조지 1세가 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그 (1660-1727, 선제후 재위 1698-1727, 영국 왕 재위 1714-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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