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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독일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권위’문제를 중심으로-권진호(목원대)글[성화사랑]

영국신사77 2019. 11. 1. 23:31
배성수 2018.03.23 10:00


성 토마스교회, 마틴루터가 1539년5월 25일 설교한 교회


라이프찌히는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활동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517 마틴루터가 95조 반박문을  놓은지 2년만인 

1519 74일부터 714일까지 

라이프찌히의 플라이스부르그성

(Pleissburg,  신시청자리에 1895년까지 있었음)에서 

마틴루터와 루터파의 입장을 따르는 

칼슈타트(Kalstadt)라고 불리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테인(Andreas Bodenstein) 

로마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하러 나온 박사이자 교수인 요한 에크(Johann Eck) 사이에  유명한 '라이프찌히논쟁' 벌어졌다.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에 대하여 에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에크는 처음부터 루터에 반대하여 

이미 100여년 전 이단으로 처형당한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와 루터를 연관지으며 공격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에크의 승리로 끝났으나 

 것을 기회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실하게 정리할  있었다. 


마틴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세번 설교를 했는데 

1539 5 24일에 슐로스교회(Schlosskapelle)에서, 

다음날인 5 25일에는 토마스교회(Thomaskirche)에서 설교하고 

1544 8 12 바울교회(Paulinerkirche)에서 설교하였다. 


마틴루터는 라이프찌히 머물 때 

대체로 인쇄업자인 롯터(Lotter) 집에 머물렀는데 

지금의 Hainstr.16/18번지이다 


라이프찌히 종교개혁 기념비 1883년에 세웠으나  동안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도시 세 군데 거리의 이름을

 Lutherstrasse., Martin-Luther-Ring, Martinstrasse 명명해, 

마틴루터를 기리고 있다.(출처: http://bibletour.tistory.com/778 [BibleTour])


마틴 루터가 1539년 성령 강림절 기념 설교를 한 곳(출처-http://blog.naver.com/jissi20/220123928060)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wed20&logNo=220718503669)


성 토마스교회


성 토마스교회


성 토마스교회, 바하 묘 ,  

라이프치히를 널리 알린 사람은 바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이다. 

그는 오랜 세월 성 토마스 성당의 악장을 지냈고, 이곳에 묻혔다.



<성 니콜라이 교회>


성 니콜라이교회(출처-cafe.daum.net/R.PM/CoAZ/59 )


니콜라이 교회는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틴 루터가 방문한 걸로 유명하다. 

1539년 당시 그는 유스투스 요나스 1세와 함께 이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세워진 교회로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 지어졌으나 

16세기 초에 고딕 양식이 첨가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프랑스인 건축가 Johann Carl Friedrich Dauthe 에 의해 

리모델링되었다. 

1539년 이후 개신교회가 되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칸토르로 재직했던 성 토마스 교회와 더불어 활동했던 곳으로 

매년 바흐 페스티발 때마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초청되어 기량을 펼치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 교회에 들어서면 곧 이렇듯 바흐의 흉상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비단 바흐가 아니더라도, 

성 니콜라이 교회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건물이다. 


라이프치히는 동서와 남북 유럽을 잇는 교차로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일찌기 상업이 발달하여 번창해왔다. 

12세기, 그 유명한 2개의 통상로가 교차되는 십자의 지점에, 

바로 이 성 니콜라이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 교회는 중세 상인들의 보호 성자였던 니콜라이에게 봉헌되었다. 

사방으로 향한 길의 중심에 서 있던 이 성 니콜라이 교회는 

모든 보행자들에게 개방되어 왔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1989년부터 

매주 월요일저녁에 모인 촛불집회는 

기어코 구동독의 경찰에 의해 검거되고 막히고 말았다. 

비폭력 평화 집회를 통제하고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마침내 때는 1989년 10월 9일이 되었다. 

이 집회가 계속된다면 유혈 진압도 감행하겠다는 신문 기사가 발표되었고, 

당시 군대, 전투 경찰, 사복 경찰들으로 

이 교회를 둘러싼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주 이 비폭력 평화 집회에 참석한 비밀경찰들이 

그들로서는 처음 접했을 예술과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 

지속적으로 감화되어왔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뜻밖에도 그 날의 모임은 

교회 내부에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정숙하고 집중력있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였던 쿠르트 마주어 교수의 호소문이 발표된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갔다. 

교회 밖 광장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의 상황을 교구의 목사 퓌러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그 상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장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꺼지지 않게 살리기 위해서는 두 손이 모두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니 촛불을 들면서,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군대, 전경, 사복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경비 태세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바로 이 대규모 평화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이러한 움직임은 구동독 전역으로 퍼졌나갔다.

이로써 성 니콜라이 교회는 

독일 통일이라는 현대사의 큰 장을 펼쳐낸 역사의 무대로 기록되었다. 


이 교회는 슈바이처와도 관계가 있다. 

슈바이처는 25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2년간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29세 때에는 성 토마스 교회에 딸린 신학교의 기숙사 사감을 1년간 하다가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출처- 블로그 > Deutsche Parnass) 


성 니콜라이교회(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wed20&logNo=220718503669)


성 니콜라이교회(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wed20&logNo=220718503669)


루터가 1539 5 24일에 설교한 슐로스교회(Schlosskapelle) (출처-https://www.gettyimagesbank.com/view/kapelle/185874704)


루터가 1544 8 12 설교한 바울교회(Paulinerkirche)(출처-https://blog.naver.com/blume2580/220736617870)



<루터의 라이프치히 논쟁>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권위문제를 중심으로

                                권진호(목원대학교)

                           (출처-http://cafe.daum.net/jangdalsoo/)  


. 들어가는 말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습을 반대했지만 

이 교회로부터 분리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 그는 단지 근원적인 사도의 교회를 회복시키고자 원했을 뿐이. 

그래서 그에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루터에게 있어 복음의 산물(피조물)인 교회는 나뉠 수 없는 존재였다.


2)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데, 

교회에서 복음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믿음이 불러일으켜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3) 교회야 

1) 루터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회(교파) 분열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말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의 설교 장소인 것이다. 


루터는 1517년 이후 1521년까지 

종교개혁의 초기 국면에서 교황 및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의 중심은 표면상으로는 면죄부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황권이었다. 


, 교황제도가 신적인 법에 근거한 것이며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며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소위 교황 수위권 문제였다. 


복음과 종교개혁 사상을 ()발견한 루터가 

교회의 최고 권위로 간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1518년 이후로 

가톨릭의 대적자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원칙이 되는 교회규범으로, 

그리고 갈등의 상황에 있어 

절대적인 최고의 교회권위로 삼았다. 


그러므로 초기 종교개혁은 

권위 및 규범의 갈등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4) 이 갈등이 루터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서로 결별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터가 근본적으로 처음 교황의 수위권을 문제 삼으며 

교황제도가 신적인 법에 의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의심한 것은 

1519년의 라이프치히 토론에서였다. 


라이프치히 토론은, 

그때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자세하게 다룬적이 없었던 교황의 수위권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5) 이프치히 공개토론은 

단지 학문적인 토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6)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의 형성과 종교개혁의 출발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7) 라이프치히 토론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내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본 논문은 루터의 라이프치히 토론을, 

특히 권위의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토론의 종교개혁사적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 


이를 통해 

라이프치히 토론의 내용과 의미가 밝혀질 뿐만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본질과 

종교개혁 초기국면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부 비판에서 교황 수위권 비판으로
라이프치히 토론은 교회의 권위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단계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토론은 교황과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신학적인 확신에 근거하여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킨 전체과정의 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토론은 사실 이미 면부 논쟁에서 시작하여 

매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다. 

루터는 1517 10 31일 면부를 반대하는 논제를 통하여 

이미 권위 문제를 제기했다.


8) 하지만 그것은 루터 논증의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그는 다만 참회 신학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부의 실행과 이론에서 발견된 목회상담적, 윤리적 딜레마를 풀고자 했다.


9) 교회와 성서의 권위에 관한 논쟁은 

1518년 프리에리아스(Prierias)와의 문서교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10) 프리에리아스는 루터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소송을 맡아 심의하였다. 

루터의 논제들을 검열하는 그의 작품 

교황의 권력에 관한 대화(Dialogus de potestate papae)는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로마의 공식적인 첫 번째 답변이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에리아스는 교회에 관한 네 가지 기본명제를 제시하면서


11) 소위 교황주의, 즉 교황은 신앙에 관한 

오류 없는 규범을 제시하며 성서를 뒷받침하고 성서의 권위를 갖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루터에 대한 프리에리아스의 공격목표는 다음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교회의 교리와 행동을 위한 유일한 척도가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95개 논제 배후에서 진동을 감지하지만, 

그 결과는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었다.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을 오류가 없는 신앙의 규범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다. 

또한 신앙의 규범, 곧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으로부터 

서는 힘과 권위를 갖는다.


12) , 성서는 교회에 의해 승인되는 한, 

그리고 교회에 의해 승인되는 만큼 유효하고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프리에리아스는 

중세말기에 주장된 교황 및 공의회의 무오류됨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서를 로마 교회와 특히 교황 아래로 예속시켜 버렸다.


13)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은 

교황 및 그 권위에 대한 루터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14) 루터는 여기서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15세기 교회법학자 파노르미타누스(Panormitanus)를 통하여 

황과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5) 루터가 95 논제를 작성할 때에는 

성서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가 서로 단지 긴장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와 로마 교회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대립이 초래된 것은 

실제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


16) 론 처음에는 루터는 

교황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


17) 교황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점점 격화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교황에 대해 점점 더 신랄한 비판을 가하도록 한 사건은 

바로 추기경 카예탄 앞에서의 심문이었다. 

카예탄의 루터 심문은 1518 10 12일부터 14일까지 

아욱스부르크에서 있었다.


18) 카예탄은 당대 최고의 스콜라 신학자였고 

교황 무오설 및 교황 수위권을 주장한 교황주의자였다. 

그는 전에 면부를 연구한 적이 있었고, 

이번 심문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카예탄의 심문은 이전까지의 구속력 없는 토론이 아니라 

이단자를 심문하는 소송의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대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터와 로마의 싸움을 본질적인 문제로 한정시키고 

가능하면 그 싸움을 극복하려는 매우 중요한 시도가 되었다.


19) 카예탄의 루터 심문이야말로 

교황에 대한 루터의 신학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 루터의 오류에 대한 중요한 대화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세후기 부 교리의 초석이 되는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 가르침에 관한 

교황 클레멘스 6(Clemens VI)의 교서 Unigenitus(1343)21)에 

루터의 주장(58번째 논제)이 위배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성례전이 아니라 

성례전에 대한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루터의 가르침이 오류라는 것이다.


22)  루터는 7번째 면부논제에 대한 해설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신뢰할 때만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1] 

루터는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교서에 관한 카예탄과의 토론에서 

관습적인 교회 권위체계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클레멘스 6세의 교서뿐만 아니라 

식스투스 4세의 같은 내용 혹은 유사한 교서 역시 정확히 숙고했다고 대답했다. ... 

하지만 그것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 나에게 충분한 권리를 갖지 못했는데, 

특히 다음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교서는 성서를 오용했으며, 말씀들을, 그것이 본래 갖고 있지 않은, 

심지어 그것의 정반대를 뜻하는 낯선 의미로 뻔뻔스럽게 왜곡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논제에서 본보기로 따랐던 성서가 

교서보다 분명하게 앞서야 한다.


23) 여기서 교황의 가르침 및 권위, 그리고 교황의 교서를 포함한 교회법의 권위는 

한 번에 무너졌다. 

, 성서는 구속력 있는 권위체계로 

교황의 말과 교회의 법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스캔들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주장은 권위 있는 교리 결정의 일반적 관행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교리결정이 성경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교리결정이 가장 납득할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이미 있어 왔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차이점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성서와 교회의 권위가 조화를 이룬다는, 

지금까지 견지된 견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24) 루터는 카예탄 앞에서의 심문이 

자신의 생애에서 갖는 중요한 계기를 

은혜의 말씀에 직접 의지하는 신앙인의 확신은 

카예탄의 교회 성례론, 

즉 신자는 오직 교회를 통한 구원 중재만을 일반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반면 

개인 자신과 관련해서는 

접적인 구원의 확신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었다. 

루터가 주장한 믿음의 확신은 

카예탄에게 있어 

교회를 나누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후에 루터의 말을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Hoc enim est novam ecclesiam construere) 라고 평가했다.


. 라이프치히 토론 성립 과정
라이프치히 공개토론이 이루어진 계기는, 

잉골쉬타트(Ingolstadt)의 신학자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 

1518년 초에 쓴 오벨리스키(Obelisci)였다. 

이 작품에서 에크는 1517 10 31일 

루터의 면부논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루터에게 보헤미아 이단의 혐의를 두고 

교황에 반항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루터는 자신의 답변인 아스테리키(Asterici)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은 채 

에크에게 보내면서 타협을 시도하였다.


30) 하지만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칼쉬타트(Andreas Bodenstein von Karlstadt)는 

에크의 공격이 자신에게도 향해 있음을 깨닫고, 

1518 5월 루터도 모르는 사이에 

370개의 변증론적 논제들을 출판했다. 

이에 에크 8월에 112개의 반대논제를 출판하고, 

칼쉬타트에게 가르침의 차이들을 

학문적인 공개토론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토론 장소로 라이프치히가 정해졌다.


31) 공개토론을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했고, 

토론 가운데서 어느 쪽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는 심판의 역할이 필요했다. 

라이프치히 신학대학은 이러한 심판관의 역할을 거부하였지만, 

작센의 공작 게오르그(Georg von Sachsen)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토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32) 1518 12 29, 에크는 12개의 논제를 출판함으로 

칼쉬타트와의 토론을 준비하였다.


33) 물론 여기에는 루터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에크의 공격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고 

화가 난 루터는 

12개의 반대논제를 출판했다.


34) 에크는 1519 3월에 7번째 논제가 새로 추가된 13개의 논제를 다시 출판했고, 

루터도 이 작품을 받은 후 자신의 논제를 또 다시 썼다.


35) 루터와 에크의 핵심 토론점은 

이제 마지막 논제(13번째 논제)인 교황의 수위권이었고, 

에크의 공격이 루터를 향하고 있음이 분명 해졌다. 

루터가 교황과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이 격화된 계기는, 

사실 에크의 13(12)번째 논제에 있었다. 

에크는 루터의 주장들을 검토하면서, 

교황권의 문제는 신학과 교회의 측면에서 중심된 주제에 해당하며 

이 주제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중세후기의 교회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루터가 전에 면부 논제 해설에서 언급한 것,


36)  로마 교회가 교황 대 그레고리(590-604)시기에 

아직 다른 교회, 적어도 헬라 교회 위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 1(314-335) 이전에 

다른 교회에 대한 우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성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도 토론에 동의했으나, 

신학대학측은 이 문제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신학대학측이 판단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에크의 문의는 거절되었다. 

메르제부르크 주교는 토론을 반대하였는데, 

왜냐하면 토론은 교황의 금지명령에 어긋나며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 토론에 반응한 교서, 

 1518 11 9일의 면부교(Cum postquam[DH 1447-1449])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 게오르그의 단호한 태도로 일은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베드로의 자리와 믿음을 가진 자가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대리자라는 사실이다.


37) 루터는 반대논제에서 수위권주제를 다루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날카로움으로 수위권문제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지난 400년간에 있었던 로마 교황의 매정한 교령들로부터 증명된다. 

그러나 처음 1100년의 입증된 역사, 성서의 본문, 

그리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이것과 대립된다.


38) 로마 교회의 수위권은 

1100년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성경과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서도 반박되어진다는 루터의 주장은, 

로마 교회의 옹호자들을 격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루터의 많은 친구들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39) 이 논제는 중세후기 교회제도의 교회법적인 근거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 문제에 열중하여 

교회법 책들과 역사에 관한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40) 교회사적인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루터는 

1519 6 교황의 권력에 관한 13번째 논제의 해설 출판하였고, 

이 작품을 라이프치히 토론 개최시에 제출하고 

토론 후에 증보하여 출판하였다.


41) 루터의 생애에서 

이 시기만큼 교회사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시기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연구에 근거하여, 

루터는 토론에서 제기된 세세한 문제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었다. 

교황의 권력에 관한 13번째 논제의 해설이 지닌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토론에서 이루어진 것보다 

더 조직적으로 교황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에 있다.


42) 루터는 이 작품에서 매우 분명하게, 

성서와 초기 교회사와 고대 교회 공의회의 교령을 

믿음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권위로서 중심에 놓았고, 

조직적인, 논증의 방식으로 교황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그는 성서주석적인, 교회사적인, 일반적인 논증을 통해 

교황의 신적 권한을 반박한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중세후기 교회의 토대를 공격하는 토론서가 되었다.


43) 치밀하게 계획된, 하지만 메르제부르크 주교가 

마지막 순간까지 격렬하게 반대한 라이프치히 토론은 

결국 6 27일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 ()에서 시작되었다.


44) 루터도 칼쉬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에 도착했.


45) 토론은 6 27일 월요일부터 7 15일 금요일까지 3주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휴일을 빼면 15일간 토론이 진행된 것이다(오전 7-9; 오후14-17). 

토론의 진행과정은 기록과 기타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게 우리에게 전해졌다.


46) 첫 토론자인 에크와 칼쉬타트는 6 27일부터 7 3일까지, 

그리고 714일과 15일에 칭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자유의지를 주제로 

토론에 참여하였다.

 이보다 중요한 토론이 7 4일부터 14일까지 

에크와 루터 사이에 이루어졌다. 

루터와 에크는 

먼저 교황 수위에 대한 신적인 권리에 대하여 토론했고, 

그 다음에는 연옥, , 참회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모든 주제가 다 다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토론은 7 15 14시경 중단되고 폐회사로 종결되었다. 

에크는 자신이 토론의 승자라고 생각했지,


47) 토론은 사실 결론 없이 끝났다. 

심판관으로 예정된 파리 대학교와도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즉 충분히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이센부르크성에 대해서는 Thomas Noack, Der Ort der Disputation-die Pleißenburg,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45-54 참조. 


45) 원래 라이프치히 토론은 

에크와 칼쉬타트가 하는 것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루터와 에크가 

서로 12개의 논제 및 반대논제를 작성하는 시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안도 부보다는 더 파괴력이 강하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가 주요 주제였다. 

루터는 토론 참여를 허락해 달라고 

2 19일에 게오르그 공작에서 신청을 했으나, 

거부의 대답도승낙의 대답도 받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못한채, 

1519 6 칼쉬타트와 동행하여 라이프치히로 갔다. 

게오르그 공작은 계속하여 토론을 원했고 

토론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지시키려고 한 메제부르크 주교의 시도에 

정력적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에, 

라이프치히로 가는 루터의 길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루터는 결국 라이프치히 토론에 임박하여 

참석을 허락받았다. 


46) 라이프치히 토론의 경과에 대한 전승으로는 

두 가지 자료형태가 있다. 

첫째로는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 및 청중의 서신과 보고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루터와 에크의 서신들이 있다. 


두 번째 자료형태는 토론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공식적인 공증기록과 청중이 사적으로 받아 적은 기록이 있는데, 

3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나 

우리에게는 소수만 전해지고 있다. 

라이프치히 토론에 대한 기록으로는 

WA 2, 254-383; WA 59, 433-605 . 

-그 외 몇몇 증인들의 보도와 서신으로는 

Helmar Junghans (Hg.), Die Reformation in Augenzeugenberichten 

(München: DTV, 1980), 67-86. 47) 


에크는 자신이 토론의 승자라고 느꼈고 

또한 여러 대학교와 장소에서 승리자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그는 루터로 하여금 사실상 중세 가르침의 일치를 벗어난 언급을 하게 하는데 

라이프치히 토론 (1867년에 나온 유화. 루터와 에크가 설교단에서 마주보고 있으며 

중앙에 게오르그 공작과 포메른의 바님[Barnim] 공작이 앉아 있다) 

에어푸르트 대학교가 판결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48) 토론에 참석한 사람과 토론을 지켜본 청중들이 받은 인상과 영향은 다양했고, 

토론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했다.


49) 특히 게오르그 공작은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종교 개혁의 적이 되었다.


50) 또한 라이프치히 토론으로 

여러 소책자들이 나오는데 성공했다. 

또한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답변자로서의 역할로 인해 

논증에 있어 곤경에 처했다. 

즉 루터는 에크의 논증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논증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A. Schubert, Libertas Disputandi, 427 참조. , 


이로써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 사상을 공적으로 널리 전파하고 

종교개혁에 대한 공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51)


. 라이프치히 토론에서의 권위문제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부라는 특수한 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의 성격은 

기독교의 결정적인 규범과 권위에 관한 근본적이고도 공개적인 논쟁으로 바뀌었다. 

토론의 절정은 7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교황의 수위권에 관하여 루터와 에크사이에 이루어진 논쟁에 있었다. 


교황의 수위권을 반박하고 

교황 및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신학적인 확신을 갖게 된 루터는, 

이 토론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권위를 구분하였다. 

당시 선풍을 일으키고 큰 결과를 낳게 한, 

그리고 토론의 의미와 중요성이 달려 있는 교황 수위권, 즉 권위문제를 중심으로 

루터와 에크의 토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에크는 루터와 교회론과 권위에 대한 주제로 논쟁을 이끌어 나갔다. 

기서 둘 사이에 불일치하는 점들이 언급되어졌다. 


,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고전 1:12; 3:5), 

에크는 교황이 머리라는 외침 모두가 이단적인 것은 아닙니다라는 대답이었다는, 

당시 목격자인 프뢰쉘(Sebastain Fröschel)의 보고가 있다. 는 의미로 해석한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52) 한 에크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에 대한 반석을 

모든 주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53) 그런데 권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실질적인 교회론 문제 자체보다는 

이 문제를 입증하기 위한 논증제시에 있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베드로를 추종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다고 훈계했다. 

루터는 이것이 베드로가 모든 신자위에 

특별한 직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반대하는 강한 논증이라고 생각했. 

루터는 고린도전서 1 12-13절을 참조해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54) 그런데 에크는, 요비아누스 반박(Contra Jovianum)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한 히에로니무스를 증인으로 삼았다.


55) 여기서 루터는 

추구된 더 작은 권위 때문에 

 내가 더 큰 권위에 의해 찢겨지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논증했다.


56) 다시 말해, 에로니무스는 

권위에 있어 바울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보다 항상 위에 있기 때문이다.


57) 교회의 머리로서의 베드로 및 히에로니무스의 권위에 대한 토론은, 

에크가 루터에게,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당한 후스(Johannes Hus) 

타락한 오류들을 제시함으로써 

공의회의 권위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제시된 오류 가운데에는 

루터가 바로 에크와 토론하면서 말한 

베드로는 거룩한 보편 교회의 머리이지도 않으며 

 머리인 적도 없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58) 루터는 즉시 이 조항이야말로 

후스와 보헤미아인들의 

장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조항들

(articuli Christianissmi et evangelici)에 속한다고 대답하였다.


59) 하지만 에크는 이 말의 결과를 간파했다. 

, 이 견해에 따르면,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부당하게 정죄를 받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에크는 루터보다 더 분명하고 신속하게 목표를 세우고 

루터를 후스주의자들의 보호자라고 책망했다.


60) 이에 루터는 

자신이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61) 에크는, 일 루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의회가 기독교 진리가운데 오류를 범했다면, 

공의회의 권위가 동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면서 

루터를 점점 궁지로 몰아 세웠다. 


루터는 7 6일에도, 후스주의자들의 타락한 가르침들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했다. 


7 7일 루터는 공의회의 규례들이 지켜져야 한다는 에크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주목 회론과 권위의 문제 사이의 기초적인 맥락을 주목하였다. 

그래서 그는 루터에게서 교회와 성경의 관계는 

권위의 지평에서 해석학상 불일치하게 해석되고 

이로써 결국에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에 대립시키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할 만한 제한을 가진 언급을 함으로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이 언급은 에크로 하여금, 

이제 대적자 루터는 이단자가 되었다는 승리의 외침으로 반응하게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때때로 공의회는 오류를 범했고 또한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믿음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들에서 그렇다.


62) 여기서 사용된 무엇보다도(praesertim)라는 말은 

분명 독점적인 형식이 아니라 등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의회 역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 놓은 것이다. 

루터는 또한 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가했다.


63) 루터의 언급은 파노르미타누스처럼 

교회 권위들의 오류 가능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권위들이 실제로 오류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주장한것이 된다. 

이로써 루터는 에크에 의해 내몰려져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넘어서,


64) 지금까지의 숙고로부터 점점 전체적으로 분명해지는 결과들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다룬 이후, 

공의회 권위의 무오류성에 대한 토론과 함께 

교회인간의 권위를 논박하였고, 

이로써 사실상 자기의 시대 교회의 권위구조로부터 해방된 것이었. 


사실 루터는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토론에 임한 것이 아니었으나, 

에크와의 토론을 통해 

권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교회의 권위, 즉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언급을 

이후로는 더 이상 취소하지 않았다. 

에크와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루터에게 오히려 확신이 생긴 것은, 

공의회와 더불어 교황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에크는 

루터에게 이러한 인식을 하도록 한 촉진자였다. 


루터의 이러한 인식이 

적대자들에 의해 더욱 논박되면 될수록, 

교황의 무오류성이 더 강하게 변호되면 될수록, 

인간인 교황에게 신적인 정당성과 권위가 부여되고 

하나님 말씀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루터에게는 더욱 분명해졌다.


65)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루터의 사고에는 점점 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루터는 

새로운 자기인식, 

즉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고 복음을 되돌리는 것이 

자신의 구속사적인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


66) . 나가는 말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에크는 루터를 이단자로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목표는 내용상으로 보면 성공적이었다. 

루터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된 후스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복음적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토론은 

실제적으로 당시 끼친 영향에서 볼 때 

오히려 루터의 성공이었다.


67) 종교개혁의 불씨를 

독일의 여러 지역으로 퍼지게 하는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사상에 


65)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추측은 

1519년 후기 시편강해를 하는 가운데 더욱 굳세졌다. 

, 적그리스드로서의 교황에 대한 생각은 

이제 성경으로부터 근거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인쇄된 작품에서 간접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교황이 성서에 대한 오류 없는 강해를 한다고 주제넘게 주장하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인간의 규정을 신앙조항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모든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참된 적그리스도 (Endchrist)라고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WA 6, 322, 18-19).라고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토론이야 말로 

기독교의 권위에 대한 그의 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루터에게 있어 

성서의 권위와 당시 교회의 권위 사이에는 

대립이 명백하였다. 

결국 라이프치히 토론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이해를 크게 분열시켰다. 


루터는 교회의 제도들(교황, 주교직, 공의회)의 권위뿐만 아니라 

것들의 가르침과 규정들, 그리고 모든 교회전통을 

역사적으로 상대화 시켰. 

특히 로마교회와의 갈등에서 

신적인 권리와 인간적인 권리의 구분을 발전시킨 루터에게 있어, 

교황의 수위권은 

신적인 것이거나 성서에 맞는 규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습에 따른 규정으로부터 온 것 일 따름이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교황에 대한 루터의 이의제기는 

앞서 살핀 것처럼 급기야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루터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갈등을 더욱 급격하게 만들었고, 

루터로 하여금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였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1520년부터 교황의 교회 기독교 교회를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68) 이제 루터에게 있어 

모든 기독교의 존재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근본적인 양자택일은 

교황이냐 복음이냐에 달린 것이었다. 


이처럼 교황의 권위 문제는 

종교개혁 초기국면에서 가장 큰 주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사안이었기에,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한 라이프치히 토론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사적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이프치히 토론이 권위문제와 관련하여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이 있다. 

사실 교황의 권위 및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비판적인 언급은 

상황에 따라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성서원칙 및 복음의 발견에 근거한 신학적인, 필연적인 결과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가르침을 차별화 시켰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피조물이거나 인간적인역사적인 제도로서, 

성서를 섬기면서 

성서 아래에 위치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루터가 가진 확신이었다. 


이런 점에서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 신학에 대해서 중요한 표지판 역할을 했다. 


라이프치히 토론이 

루터와 종교개혁 신학에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세상적인, 인간적인 권위를 부인하는 것 외에 

종교개혁의 긍정적인 권위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분명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 모토이다. 

성서 안에 있지 않는 것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렇다고 전통을 완전하게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전통이 성서와 상응하는 곳에서는, 전통을 수용했다. 


하지만 성서는 루터에게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폐기될 수 없고 

영원한 구원의 문제에서 

어떤 것을 통해서도 보충될 수 없는 결정적인 표준이었다.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에 해당한다. 


루터는 기독교인에게 결정적인 규범과 권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직 성서로라는 원칙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오직 성서로는 

기독교 교회를 바른 신앙과 실천의 길로 되돌리려고 노력한 

교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맥그래스는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원칙이라면, 

오직 성서로라는 모토는 

종교 개혁의 형식적인 원리였다고 말한다.


69)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폐위시킨 대신, 성경을 즉위시킨 것이다.


70) 결론적으로 말하면, 종교개혁의 초기국면(1517-1521)에 

루터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규범과 권위 문제였다. 


교황의 권위 및 수위권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루터는 오직 성서의 권위만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비록 처음에는 단지 소음에 불과하였지만 

결국엔 단지 개혁이 아니라 

개신교가 출현하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초기 종교개혁 국면에서 

권위의 문제를 다룬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라이프치히 토론이었다. 

이 토론이야말로 

교황 및 공의회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신학적인 확신으로, 

그리고 오직 성서원칙으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71) 마지막으로,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가 교황제도 및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는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분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와 에크 및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 입장을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토론의 핵심에는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이 깔려있다. 


루터는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교황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라이프치히 토론을 통해 분명하게 갖게 된 루터의 확신이었다. 


분명 루터에게 교회의 권위는 위대한 것이고 

교회는 복음의 산물(피조물)이지만,


72) 그런 교회라도 

복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73) 결국 루터에게 결정적인 사실은,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머니가 아니라 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말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74) 71) 그런데 사실 개신교회에서는 

오직 성서로 원칙 때문에 

권위 있는 해석자의 부재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있어왔다.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없다고 할 때, 

그럼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경우, 

심지어 이단과 정통이 있을 때 

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점이 

개신교회에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이 이단의 확산을 초래하였고 

기독교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난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기독교에 역동성을 갖게 하고 

개신교의 정체성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맥그래스는 본다. 


이런 관점의 연구로는 

앨리스터 맥그래스/ 박규태 역,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참조. 


그러므로 기독교 최고의 권위, 아니 유일한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으며, 

직 성서로의 원칙에 근거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정당성을 갖게 된다.


참조.

김주한, 종교개혁은 교파분열의 발단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28 (2011), 197-221.


2) Ecclesia enim creatura est Euangelii(WA 2, 430, 6-7)[Resolutiones Lutherianae super propositionibus suis Lipsiae disputatis]. 


3) WA 2, 431, 29-32. 11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참고. Kurt-Victor Selge, Das Autoritätengefüge der westlichen Christenheit im Lutherkonflikt 1517-1521, in: HZ 223 (1976), 591-617. 


5) Martin Brecht, Martin Luther. Sein Weg zur Reformaton 1483-1521 (Stuttgart: Calwer Verlag, 1981), 302. 


6) 라이프치히 토론은 본질상 중세 대학의 전통인 자유로운 학문적 토론이었다. 

16세기 지식인들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적인 공개토론에 익숙해 있었다. 

토론은 청중을 자신의 의견에 대해 설득시키는 기술로서 

논리적인 사고에 대한 능력이고 능변(能辯)이었. 

당시 학위는 이러한 토론을 통과함으로 주어졌다. 

루터의 토론에 대해서는 

Anselm Schubert, Libertas Disputandi: Luther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als akademisches Streitgespräch, in: ZThK 105 (2008), 411-442; Reinhard Schwarz, Disputation, in Luther Handbuch, hg. A. Beutel (Tübingen: Mohr Siebeck, 2005), 328-340 참조.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17  

7) Armin Kohnle, Die Leipziger Disputation und ihre Bedeutung für die Reform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hg. Markus Hein/ Armin Kohnle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2011), 9-24 (10-11/24).-Bernhard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5), 134: 


이 토론에서 공의회 및 교황의 권위 문제에 대한 양측의 견해는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구성되었다. 

또한 루터에 대한 이단 혐의는 전보다 더욱 거세게 제기되었다. 

루터 역시 성서의 권위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자세하게 전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되어야 할 사실은, 갈등이 첨예화됨으로 

루터는 원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교회론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8) B. Lohse, Luthers Theologie, 119.-몇 구절들에서,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가 더 이상 일치할 수 없다는 조짐이 보인다. 

결국 루터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 11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

2013) 9) 참고. Volker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Die Autoritätenfrage in der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117-124 (118). 

95개 논제를 (고통당하는 영혼을 위로하는) 목양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서술로는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서울: 익투스, 2012) 참조.

-홍지훈은 95개 논제는 면죄부(판매) 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속죄론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Cf. 홍지훈, 마르틴 루터의 속죄론, 한국교회사학회지 21 (2007),295-318 (295-296). 10) 이에 대해서는 M. Brecht, Martin Luther, 234-235; B. Lohse, Luthers Theologie. 123-125 참조. 11)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

프리에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교회에 대한 네 가지 근본명제를 제시했다. 

1) 전체교회는 본질의 면에서 보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지만, 

힘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교회요 교황이다. 

2) 전체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결정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다면, 

참된 공의회 또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공의회의 최종적인 결정은 더욱더 오류가 될 수 없는데,이것은 곧 교황의 결정이다. 

3)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기지않는 사람은 이단자이다. 

4) 지금까지의 관례는 중요성 면에서 교회의 결정들과 동일하. 

부에 대하여 로마 교회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또한 Christopher Spehr, Luther und das Konzil. Zur Entwicklung eines zentralen Themas in der Reformationszeit (Tübingen: Mohr Siebeck, 2010), 54-57 참조.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19 12) Dialogus de potestate papae, in: Valentin Ernst Loescher, Vollständige Reformations-Acta und Documenta, oder umständliche Vorstellung des Evangelischen Reformations-Wercks Bd. 2 (Leipzig, 1723), 15. 13)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 또한 Jared Wicks, Luthers Reform. Studies on Conversion and the Church (Mainz: Philipp von Zabern, 1992), 156-157 참조. 

14) 루터는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을 1518 8월 초에 접했고, 이 작품을 다시 출판했다. 그리 1518 11월에 반박작품 Ad dialogum Silvestri Prieratis de potestate papae responsio (WA 1, 647-686)을 작성했다. 

15) 루터는 부차적인 교회법 전통, 즉 파노르미타누스(Panormitanus, Nikolaus von Tudeschi, 1386-1445)의 주장에 자극을 받아 처음으로 그를 인용하였다. 

, 교황과 공의회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신앙인 각자, 즉 평신도는 

보다 나은 권위, 다시 말하면 성서에서 더 나은 근거들을 갖고 있다면 

공의회나 교황에 예속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참고. Reinhard Schwarz, Luther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6), 57.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루터가 인용한 파노르미타누스의 주장에 대해 서는 B. Lohse, Luthers Theologie, 140-141 참조. 120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

2013) 16)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 

17) 루터는 프리에리아스 반박작품에서, 로마 교회와 교황이 지금까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고 또한 참된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다. 참고. WA 1, 662, 31-38. 18) 이에 대해서는 B. Lohse, Luthers Theologie, 127-131; R. Schwarz, Luther, 59-61; Otto Hermann Pesch, Hinführung zu Luther (Mainz: Matthias-Grünewald-Verlag, 1982), 103-115 참조.

-루터는 아욱스부르크에서의 심문의 과정을 아욱스부르크 행적(Acta Augustana)에서 전해주었다(WA 2, 1-26). 19) 참고. Bernd Moeller, Luther und das Papsttum, in: Luther Handbuch, 106-115 (110). 20) Bernd Moeller, Deutschland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7), 60. 21) DH 1025-1027. 

22)참고. B. Lohse, Luthers Theologie, 130; O. H. Pesch, Hinführung zu Luther, 109-111. 23) WA 2, 8, 1-9. 24) V.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119. 122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때 나는 교황에 대항해 싸우기 시작했다.

25) 교황제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은 

루터를 깊이 불안하게 했던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1518 11 28일 교황에 대한 공의회 호소에서

26),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시편 말씀(116:11)을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는 논거로 제시하였다. 

교황 역시 잘못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할 경우 

그에게 순종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면으로 반박 해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하였다.


27) 그리고 교황의 힘은 

성서와 진리의 존엄을 넘어서거나 위배되어서는 안되며, 

성서와 진리의 존엄을 위해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28) 심지어 루터는 몇 주 후에 

구 링크(Wenzeslaus Linck)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처음으로, 교황이 어쩌면 적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29) 교황에 대한 루터의 불신이 점점 깊어져 가는 가운데,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권위에 대한 루터와 로마교회의 이해는 더욱 첨예화되었고 

권위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25) WATR 5, 80, 5. 26) WA 2, 36-40. 27) WA 2, 37, 12-28. 28) WA 2, 39, 31-32. 29) WABr 1, 121, 11-14 (Nr.121).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3 30) WA 1, 281-314. 31) 


루터는 1518 10월 추기경 카예탄의 심문을 받기 위해 

아욱스부르크에 머무르고 있을, 

에크와 만나 칼쉬타트의 중재자로서 

공개토론 장소로 라이프치히나 에어푸르트를 제안했다. 

로마나 파리 혹은 쾰른을 생각하고 있던 에크는 라이프치히를 택했다. 

참고.WABr 1, 131 (Nr. 109). 


32) 라이프치히에서의 토론을 위해서는, 

관계가 있거나 적어도 동의를 해야 하는 기관 및 사람들과의 논의가 필요했다. 


1) 그 지역의 영주인 작센의 공작 게오르그. 

2) 주최의 역할을 해야하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3) 신학적인 토론에 전문적인 책임이 있고 

심판관의 역할을 해야 하는 라이프치히 신학대학부. 

4) 마지막으로 교구의 주교인 메르제부르크(Adolf von Merseburg).

-라이프치히 토론의 핵심역할은 물론 작센의 영주인 공작 게오르그에게 있었다. 

그가 두 가지 동기에서 토론을 찬성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을 

우선적으로 자기 지역의 대학교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토론되는 신학 문제에 대해 

토론을 통해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싶었 124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참고. A. Kohnle, Die Leipziger Disputation und ihre Bedeutung für die Reformation, 13-15. 33) WA 9, 208-210. 34) Disputatio D. Iohannis Ecci et P. Martini Luther in studio Lipsensi futura (WA 2, 155). 35) WA 2, 158-161 (?루터선집 5? (서울: 컨콜디아사, 1984), 281-286). 36) WA 1, 571, 16-20.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5 37) WA 9, 209, 41-210, 2. 38) WA 2, 161, 35-38. 39) 이에 대해서는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27 참조. 


40) 루터는 사실 이러한 집중적인 연구 결과 

놀랍고도 엄청난 발견을 하였다. 

그는 1519 3 13일 쉬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편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또한 (는 이것을 네 귀에만 속삭인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는 아닌지, 

혹은 적어도 그의 사도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즉 진리)가 

그에 의해 교서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왜곡되고 십자가형을 당한다고 볼 때

(WABr 1, 359, 29-31 (Nr. 161). 12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41) Resolutio lutheriana super propositione decima tertia de potestate Papae(WA 2, 183-240).

-이 작품에서 루터는, 교황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본문들을 연구하였고 

이것들을 성서와 교회사로부터의 본문들과 대조하였다. 

루터는 기본적으로는 교황제도와 수위권주장을 고집했으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은 비판하였다. 

처음 부분에서 루터는 교황의 통치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교황의 통치권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통치권을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 13/15 절에 따라 

상위의 권위로 인식하였다. 

그 다음, 루터는 통치권에 대한 지금까지의 근거 제시는 

증거가 아니라고 간주하면서 

먼저 소위 성서증거들과, 그리고 교회법과 교령의 증거들을 반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에 근거한 논증을 하였다. 


이 작품에 관해서 Helmar Junghans, Martin Luther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87-94 (89-94);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31-136; B. Lohse, Luthers Theologie, 136-138; Leif Grane, Martinus noster. Luther in the German Reform Movement 1518-1521 (Mainz: Philipp von Zabern, 1994), 57-80 참조. 42) B. Lohse, Luthers Theologie, 136. 43) B. Lohse, Luthers Theologie, 138: 


루터는 제일 먼저 주석가로서 시작했고, 

후에 비텐베르크대학 개혁에 함께 일했고, 

학문에 그리고 또한 대중에 이르는 길을 가면서 

미해결 혹은 토론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반면 이제 루터는 중세후기 교회의 기초를 공격하는 토론서를 내놓게 되었다.


44) 토론이 대학교에서 행해지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근거한 신학자들의 반대 외에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7 12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48) 토론의 심판관에 대해서는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24-125; C. Winter, Die Protokolle der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35-43 (42). 49) 참고. M. Brecht, Martin Luther, 307-332; Christoph Volkmar, Von der Wahrnehmung des Neue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131-142. 50) 


게오르그 공작은 루터와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였고 

이로써 1539년 죽을 때까지 라이프치히에서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게오르그 공작을 격분시킨 것은, 

루터가 보헤미아 후스의 이단이라는 에크의 비난에 대해

 친애하는 박사여, 후스의 가르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9 참고. H. Junghans (Hg.), Die Reformation in Augenzeugenberichten,70-71.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와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대한 게오르그 공작의 적대적인 교회정치적 행동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참고. Heiko Jadatz, Herzog Georg von Sachsen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73-86 (86).51) 


사실 16세기 대중적인 여론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들을 살펴본다면, 

종교개혁측의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다.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와 쉬팽글러(Lazarus Spengler)는 

소책자들에서 루터의 편을 들었다. 

피크하임어(Willibald Pirckheimer)는 

풍자시 다듬어진 에크(eccius dedolatus)에서 에크를 조롱하였, 

에라스무스는 이제부터 에크를 바보 취급하기 시작했다. 


130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52) WA 59, 441, 251-264 / 445, 397-407.53) WA 59, 465, 1018-1027. 54) WA 59, 437, 149-154. 55) WA 59, 441, 259-264. 56) WA 59, 445, 397-398. Non patior propter minorem auctoritatem inductam me divelli a maiore. 57) 


이 루터의 말은 두 사람 토론의 이해를 위해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다른 권위에 대해 독점적인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권위에 대해 더 큰 권위 고려한 것이다. 

에크는, 바울과 히에로니무스 사이에 

권위에 서열이 있다는 루터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였다(WA 59, 450, 566-568). 


따라서 이 시점에 루터와 에크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들의 서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하게 귀속시키는 모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열화에 관한 모든 언급들은, 

그 해석의 목적이 서열화 된 권위들의 공통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는 한, 

문제가 없다. 하지만 차이들을 결정해야 하는 기준으로 

이러한 서열화를 적용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은, 존경받지만 

원칙적으로 볼 때 잘못될 수 있는 권위인 히에로니무스에게 있어 

비교적 문제가 되지 않았. 

하지만 에크의 전략은 교회의 권위에 관한 토론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에크는 교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1 참고. V.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120-121.

-에크의 시도는 조화의 모델, 

루터의 시도는 차별화의 모델로 표현될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 결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있어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교회의 오래된 전승일수록 루터의 편에 서 있는 반면, 

최근의 전승일수록 루터와 차이가 나고 에크의 편에 있다는 것이다. 


참고. Kurt-Victor Selge, Die Leipziger Disputation zwischen Luther und Eck,ZKG 86 (1975), 26-40 (35-38). 58) WA 59, 461, 883-884. 59) WA 59, 466, 1049. 60) WA 59, 461, 900-908; 468, 1108-1110. 61) WA 59, 472, 1237-1238. 132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62) WA 59, 500, 2081-2083. 63) WA 59, 508, 2309-2311. 64) B. Moeller, Luther und das Papsttum, 1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3 66) V. Leppin, Martin Luther (Darmstadt: WBG, 2006), 149. 67) 참고. Walter von Loewenich, Martin Luther. Der Mann und das Werk (München: List Verlag, 1982), 142: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단호하게 서게 된 결과 

 새로운 추종자들을 얻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는 결국 에크의 승리가 아니라 

 루터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34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68) WA 10II, 228, 11-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5  69)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9), 145. 70)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145. 13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72)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 관한 해설(Resolutiones Lutherianae super propositionibus suis Lipsiae disputatis)에서, 


교회의 권위는 위대하고 오류가 없는데,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배되기 때문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을 고백했다(WA 2, 429, 25-26). 

73) incomparabiliter minor ipso (WA 2, 430, 7). 74) WA 42, 334, 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7 주제어 라이프치히 토론, 권위, 교황, 공의회, 루터, 에크 Leipzig Debate, Authority, Pope, Council, Luther, Eck 13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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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권위’문제를 중심으로-


                                                     권진호(목원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습을 반대했지만 

이 교회로부터 분리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 그는 단지 근원적인 사도의 교회를 회복시키고자 원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루터에게 있어 ‘복음의 산물(피조물)’인 교회는 나뉠 수 없는 존재였다.


2)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데, 

교회에서 복음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믿음이 불러일으켜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3) 교회야 말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의 설교 장소인 것이다.


1) 루터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회(교파) 분열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김주한,
“종교개혁은 교파분열의 발단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28 (2011), 197-221.
2) “Ecclesia enim creatura est Euangelii”(WA 2, 430, 6-7)[Resolutiones Lutherianae super
propositionibus suis Lipsiae disputatis].
3) WA 2, 431, 29-32.
11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루터는 1517년 이후 1521년까지 종교개혁의 초기 국면에서 

교황 및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의 중심은 표면상으로는 면죄부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황권이었다. 

즉, 교황제도가 신적인 법에 근거한 것이며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며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소위 교황 수위권 문제였다. 


복음과 종교개혁 사상을 (재)발견한 루터가 

교회의 최고 권위로 간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1518년 이후로 가톨릭의 대적자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원칙이 되는 교회규범으로, 

그리고 갈등의 상황에 있어 

절대적인 최고의 교회권위로 삼았다. 


그러므로 초기 종교개혁은 ‘권위 및 규범의 갈등’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4) 이 갈등이 루터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서로 결별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터가 근본적으로 처음 교황의 수위권을 문제 삼으며 

교황제도가 신적인 법에 의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의심한 것은 

1519년의 라이프치히 토론에서였다. 


라이프치히 토론은, 그때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자세하게 다룬적이 없었던 교황의 수위권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5) 


이프치히 공개토론은 

단지 학문적인 토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6)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의 형성과 종교개혁의 출발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7)


라이프치히 토론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내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본 논문은 루터의 라이프치히 토론을, 

특히 권위의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토론의 종교개혁사적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라이프치히 토론의 내용과 의미가 밝혀질 뿐만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본질과 

종교개혁 초기국면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참고. Kurt-Victor Selge, “Das Autoritätengefüge der westlichen Christenheit 

im Lutherkonflikt
1517-1521,” in: HZ 223 (1976), 591-617.
5) Martin Brecht, Martin Luther. Sein Weg zur Reformaton 1483-1521 

(Stuttgart: CalwerVerlag, 1981), 302.
6) 라이프치히 토론은 본질상 중세 대학의 전통인 자유로운 학문적 토론이었다. 

16세기 지식인들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적인 공개토론에 익숙해 있었다. 

토론은 청중을 자신의 의견에 대해 설득시키는 기술로서 

논리적인 사고에 대한 능력이고 능변(能辯)이었다. 

당시 학위는 이러한 토론을 통과함으로 주어졌다. 

루터의 토론에 대해서는

 Anselm Schubert, “Libertas Disputandi: Luther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als akademisches Streitgespräch,” in: ZThK 105 (2008), 411-442; Reinhard Schwarz, “Disputation,” in Luther Handbuch, hg. A. Beutel (Tübingen: Mohr Siebeck, 2005), 

328-340 참조.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17

7) Armin Kohnle, “Die Leipziger Disputation und ihre Bedeutung für die Reform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hg. Markus Hein/ Armin Kohnle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2011), 9-24 (10-11/24).-Bernhard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öttingen:Vandenhoeck & Ruprecht, 1995), 134: 

“이 토론에서 공의회 및 교황의 권위 문제에 대한 양측의 견해는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구성되었다. 

또한 루터에 대한 이단 혐의는 전보다 더욱 거세게 제기되었다. 

루터 역시 성서의 권위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자세하게 전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되어야 할 사실은, 

갈등이 첨예화됨으로 루터는 원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교회론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Ⅱ. 면죄부 비판에서 교황 수위권 비판으로
라이프치히 토론은 교회의 권위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단계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토론은 

교황과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신학적인 확신에 근거하여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킨 전체과정의 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토론은 사실 이미 면죄부 논쟁에서 시작하여 

매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를 반대하는 논제를 통하여 

이미 권위 문제를 제기했다.8) 

하지만 그것은 루터 논증의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그는 다만 참회신학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면죄부의 실행과 이론에서 발견된 목회상담적, 윤리적 딜레마를 풀고자 했다.9)


8) B. Lohse, Luthers Theologie, 119.-몇 구절들에서,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가 

더 이상 일치할 수 없다는 조짐이 보인다. “결국 루터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
11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교회와 성서의 권위에 관한 논쟁은 

1518년 프리에리아스(Prierias)와의 문서교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10) 


프리에리아스는 루터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소송을 맡아 심의하였다. 

루터의 논제들을 검열하는 그의 작품 “교황의 권력에 관한 대화”(Dialogus de potestate papae)는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로마의 공식적인 첫 번째 답변이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에리아스는 교회에 관한 네 가지 기본명제를 제시하면서11) 

소위 ‘교황주의,’ 즉 교황은 신앙에 관한 오류 없는 규범을 제시하며 

성서를 뒷받침하고 성서의 권위를 갖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루터에 대한 프리에리아스의 공격목표는 다음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교회의 교리와 행동을 위한 유일한 척도가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95개 논제 배후에서 진동을 감지하지만, 

그 결과는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었다.”


9) 참고. Volker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Die Autoritätenfrage in der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117-124 (118). 95개 논제를
(고통당하는 영혼을 위로하는) 목양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서술로는 김용주, ?루터. 혼돈
의 숲에서 길을 찾다?(서울: 익투스, 2012) 참조.-홍지훈은 95개 논제는 면죄부(판매)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속죄론’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인 해
석이라고 본다. Cf. 홍지훈, “마르틴 루터의 속죄론,” 「한국교회사학회지」 21 (2007),
295-318 (295-296).
10) 이에 대해서는 M. Brecht, Martin Luther, 234-235; B. Lohse, Luthers Theologie. 123-125 참조.
11)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프리에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교회에 대한 네 가지 근
본명제를 제시했다. 

1) 전체교회는 본질의 면에서 보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지만, 

힘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교회요 교황이다.

 2) 전체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결정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다면, 

참된 공의회 또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공의회의 최종적인 결정은 더욱더 오류가 될 수 없는데,
이것은 곧 교황의 결정이다. 

3)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이단자이다. 

4) 지금까지의 관례는 중요성 면에서 교회의 결정들과 동일하다. 

“면죄부에 대하여 로마 교회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또한 Christopher Spehr, Luther und das Konzil. Zur Entwicklung eines zentralen
Themas in der Reformationszeit (Tübingen: Mohr Siebeck, 2010), 54-57 참조.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19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을 

오류가 없는 신앙의 규범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다. 

또한 신앙의 규범, 곧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으로부터 

서는 힘과 권위를 갖는다.12)

즉, 성서는 교회에 의해 승인되는 한, 그리고 교회에 의해 승인되는 만큼 유효하고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프리에리아스는 중세말기에 주장된 교황 및 공의회의 무오류됨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서를 로마 교회와 특히 교황 아래로 예속시켜 버렸다.13)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은 교황 및 그 권위에 대한 루터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14) 루터는 여기서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15세기 교회법학자 파노르미타누스(Panormitanus)를 통하여 교황과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15) 루터가 95개 논제를 작성할 때에는 성서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가 서로 단지 긴장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 불가능한 대립관계
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와 로마 교회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대립이 초래된 것은 실제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16) 


12) “Dialogus de potestate papae,” in: Valentin Ernst Loescher, Vollständige 

Reformations-Actaund Documenta, oder umständliche Vorstellung des 

Evangelischen Reformations-WercksBd. 2 (Leipzig, 1723), 15.
13)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 또한 Jared Wicks, Luther’s Reform. Studies on
Conversion and the Church (Mainz: Philipp von Zabern, 1992), 156-157 참조.
14) 루터는 프리에리아스의 작품을 1518년 8월 초에 접했고, 이 작품을 다시 출판했다. 

그리고 1518년 11월에 반박작품 “Ad dialogum Silvestri Prieratis de potestate papae 

responsio”(WA 1, 647-686)을 작성했다.
15) 루터는 부차적인 교회법 전통, 즉 파노르미타누스(Panormitanus, Nikolaus von Tudeschi,
1386-1445)의 주장에 자극을 받아 처음으로 그를 인용하였다. 

즉, 교황과 공의회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신앙인 각자, 즉 평신도는 보다 나은 권위, 

다시 말하면 성서에서 더 나은 근거들을 갖고 있다면 

공의회나 교황에 예속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참고. Reinhard Schwarz, Luther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6), 57.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루터가 인용한 파노르미타누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B. Lohse, Luthers Theologie, 140-141 참조.
120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16) B. Lohse, Luthers Theologie, 124.


론 처음에는 루터는 교황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17) 

교황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점점 격화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교황에 대해 점점 더 신랄한 비판을 가하도록 한 사건은 

바로 추기경 카예탄 앞에서의 심문이었다.

카예탄의 루터 심문은 1518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아욱스부르크에서 있었다.18) 


카예탄은 당대 최고의 스콜라 신학자였고 교황 무오설 및 교황 수위권을 주장한 교황주의자였다. 그는 전에 면벌부를 연구한 적이 있었고, 이번 심문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카예탄의 심문은 이전까지의 구속력 없는 토론이 아니라 이단자를 심문하는 소송의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대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터와 로마의 싸움을 본질적인 문제로 한정시키고 가능하면 그 싸움을 극복하려는 매우 중요한 시도가 되었다.19) 


카예탄의 루터 심문이야말로 교황에 대한 루터의 신학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20)

루터의 오류에 대한 중요한 대화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세후기 면죄부 교리의 초석이 되는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 가르침에 관한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의 교서 “Unigenitus”(1343)21)에 

루터의 주장(58번째 논제)이 위배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성례전이 아니라 성례전에 대한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루터의 가르침이 오류라는 것이다.22)



17) 루터는 프리에리아스 반박작품에서, 로마 교회와 교황이 지금까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
고 또한 참된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다. 참고. WA 1, 662, 31-38.
18) 이에 대해서는 B. Lohse, Luthers Theologie, 127-131; R. Schwarz, Luther, 59-61; Otto
Hermann Pesch, Hinführung zu Luther (Mainz: Matthias-Grünewald-Verlag, 1982),
103-115 참조.-루터는 아욱스부르크에서의 심문의 과정을 “아욱스부르크 행적”(Acta
Augustana)에서 전해주었다(WA 2, 1-26).
19) 참고. Bernd Moeller, “Luther und das Papsttum,” in: Luther Handbuch, 106-115 (110).
20) Bernd Moeller, Deutschland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7), 60.
21) DH 1025-1027.
22) 루터는 7번째 면벌부논제에 대한 해설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신뢰할 때만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1



루터는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교서에 관한 카예탄과의 토론에서 

관습적인 교회 권위체계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클레멘스 6세의 교서뿐만 아니라 

식스투스 4세의 같은 내용 혹은 유사한 교서 역시 정확히 숙고했다고 대답했다. ... 

하지만 그것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 나에게 충분한 권리를 갖지 못했는데, 

특히 다음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교서는 성서를 오용했으며, 말씀들을, 그것이 본래 갖고 있지 않은, 

심지어 그것의 정반대를 뜻하는 낯선 의미로 뻔뻔스럽게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논제에서 본보기로 따랐던 성서가 

교서보다 분명하게 앞서야 한다.23)

여기서 교황의 가르침 및 권위, 그리고 교황의 교서를 포함한 교회법의 권위는 

한 번에 무너졌다. 

즉, 성서는 구속력 있는 권위체계로 

교황의 말과 교회의 법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스캔들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주장은 권위 있는 교리 결정의 일반적 관행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교리결정이 성경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교리결정이 가장 납득할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이미 있어왔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차이점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성서와 교회의 권위가 조화를 이룬다는, 

지금까지 견지된 견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24)

루터는 카예탄 앞에서의 심문이 

자신의 생애에서 갖는 중요한 계기를

은혜의 말씀에 직접 의지하는 신앙인의 확신은 

카예탄의 교회 성례론, 

즉 신자는 오직 교회를 통한 구원 중재만을 일반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반면 

개인 자신과 관련해서는 

접적인 구원의 확신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었다. 

루터가 주장한 믿음의 확신은 

카예탄에게 있어 교회를 나누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후에 루터의 말을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Hoc enim est novam ecclesiam construere)라고 평가했다. 


참고. B. Lohse, Luthers Theologie, 130; O. H. Pesch, Hinführung zu
Luther, 109-111.
23) WA 2, 8, 1-9.
24) V.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119.
122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때 나는 교황에 대항해 싸우기 시작했다.25)

교황제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은 

루터를 깊이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1518년 11월 28일 교황에 대한 공의회 호소에서26),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시편 말씀(116:11)을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는 논거로 제시하였다. 


교황 역시 잘못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할 경우 

그에게 순종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면으로 반박해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하였다.27) 


그리고 교황의 힘은 

성서와 진리의 존엄을 넘어서거나 위배되어서는 안되며, 

성서와 진리의 존엄을 위해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28) 


심지어 루터는 몇 주 후에 

구 링크(Wenzeslaus Linck)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처음으로, 교황이 어쩌면 적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했다.29)

교황에 대한 루터의 불신이 점점 깊어져 가는 가운데,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권위에 대한 루터와 로마교회의 이해는 

더욱 첨예화되었고 

권위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25) WATR 5, 80, 5.
26) WA 2, 36-40.
27) WA 2, 37, 12-28.
28) WA 2, 39, 31-32.
29) WABr 1, 121, 11-14 (Nr.121).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3


Ⅲ. 라이프치히 토론 성립 과정
라이프치히 공개토론이 이루어진 계기는, 잉골쉬타트(Ingolstadt)의 신학자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가 1518년 초에 쓴 “오벨리스키”(Obelisci)였다. 이 작품에서 에크는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면벌부논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루터에게 보헤미아 이단의 혐의를 두고 교황에 반항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루터는 자신의 답변인 “아스테리키”(Asterici)라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은 채 에크에게 보내면서 타협을 시도하였다.30)
하지만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칼쉬타트(Andreas Bodenstein von Karlstadt)는 에크의 공격이 자신에게도 향해 있음을 깨닫고, 1518년 5월 루터도 모르는 사이에 370개의 변증론적 논제들을 출판했다. 이에 에크도 8월에 112개의 반대논제를 출판하고, 칼쉬타트에게 가르침의 차이들을 학문적인 공개토론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토론 장소로 라이프치히가 정해졌다.31) 공개토론을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했고, 토론 가운데서 어느쪽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는 심판의 역할이 필요했다. 라이프치히 신학대학은 이러한 심판관의 역할을 거부하였지만, 작센의 공작 게오르그(Georg von Sachsen)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토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32)


30) WA 1, 281-314.
31) 루터는 1518년 10월 추기경 카예탄의 심문을 받기 위해 아욱스부르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에크와 만나 칼쉬타트의 중재자로서 공개토론 장소로 라이프치히나 에어푸르트를 제
안했다. 로마나 파리 혹은 쾰른을 생각하고 있던 에크는 라이프치히를 택했다. 참고.
WABr 1, 131 (Nr. 109).
32) 라이프치히에서의 토론을 위해서는, 관계가 있거나 적어도 동의를 해야 하는 기관 및 사
람들과의 논의가 필요했다. 1) 그 지역의 영주인 작센의 공작 게오르그. 2) 주최의 역할
을 해야하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3) 신학적인 토론에 전문적인 책임이 있고 심판관의 역
할을 해야 하는 라이프치히 신학대학부. 4) 마지막으로 교구의 주교인 메르제부르크
(Adolf von Merseburg).-라이프치히 토론의 핵심역할은 물론 작센의 영주인 공작 게오르
그에게 있었다. 그가 두 가지 동기에서 토론을 찬성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을 우선적으로 자기 지역의 대학교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보
았다. 그리고 그는 토론되는 신학 문제에 대해 토론을 통해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싶었
124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1518년 12월 29일, 에크는 12개의 논제를 출판함으로 칼쉬타트와의 토론을 준비하였다.33) 물론 여기에는 루터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에크의 공격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고 화가 난 루터는 12개의 반대논제를 출판했다.34) 에크는 1519년 3월에 7번째 논제가 새로 추가된 13개의 논제를 다시 출판했고, 루터도 이 작품을 받은 후 자신의 논제를 또 다시 썼다.35) 루터와 에크의 핵심 토론점은 이제 마지막 논제(13번째 논제)인 교황의 수위권이었고, 에크의 공격이 루터를 향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루터가 교황과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이 격화된 계기는, 사실 에크의 13(12)번째 논제에 있었다. 에크는 루터의 주장들을 검토하면서, 교황권의 문제는 신학과 교회의 측면에서 중심된 주제에 해당하며 이 주제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중세후기의 교회체계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루터가 전에 면벌부 논제 해설에서 언급한 것,36) 즉 로마 교회가 교황 대 그레고리(590-604)시기에 아직 다른 교회, 적어도 헬
라 교회 위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 1세(314-335) 이전에 다른 교회에 대한 우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성


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도 토론에 동의했으나, 신학대학측은 이 문제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신학대학측이 판단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에크의 문의는 거절되었다. 메르제부르크 주교는 토론을 반대하였는데, 왜냐하면 토론은 교황의 금지명령에 어긋나며 교황 레오 10세가 면벌부 토론에 반응한 교서, 즉 1518년 11월 9일의 면죄부교령(“Cum postquam”[DH 1447-1449])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 게오르그의 단호한 태도로 일은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참고. A. Kohnle, “Die Leipziger Disputation und ihre Bedeutung für die Reformation,” 13-15.
33) WA 9, 208-210.
34) “Disputatio D. Iohannis Ecci et P. Martini Luther in studio Lipsensi futura” 

(WA 2, 155).
35) WA 2, 158-161 (?루터선집 5권? (서울: 컨콜디아사, 1984), 281-286).
36) WA 1, 571, 16-20.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5


베드로의 자리와 믿음을 가진 자가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대리자라는 사실이다.37)
루터는 반대논제에서 수위권주제를 다루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날카로움으로 수위권문제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지난 400년간에 있었던 로마 교황의 매정한 교령들로부터 증명된다. 그러나 처음 1100년의 입증된 역사, 성서의 본문, 그리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이것과 대립된다.38)
로마 교회의 수위권은 1100년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성경과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서도 반박되어진다는 루터의 주장은, 로마 교회의 옹호자들을 격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루터의 많은 친구들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39) 

이 논제는 중세후기 교회제도의 교회법적인 근거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 문제에 열중하여 교회법 책들과 역사에 관한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40) 교회사적인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루터는 1519년 6월 “교황의 권력에 관한 13번째 논제의 해설”을 출판하였고, 이 작품을 라이프치히 토론 개최 시에 제출하고 토론 후에 증보하여 출판하였다.41) 


37) WA 9, 209, 41-210, 2.
38) WA 2, 161, 35-38.
39) 이에 대해서는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27 참조.
40) 루터는 사실 이러한 집중적인 연구 결과 놀랍고도 엄청난 발견을 하였다. 그는 1519년 3
월 13일 쉬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편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또한 (나
는 이것을 네 귀에만 속삭인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는 아닌지 혹은 적어도 그의 사도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즉 진리)가 그에 의해 교서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왜곡되고 십
자가형을 당한다고 볼 때”(WABr 1, 359, 29-31 (Nr. 161).
12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루터의 생애에서 이 시기만큼 교회사적인 문제를 

중적으로 다룬 시기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연구에 근거하여, 루터는 토론에서 제기된 세세한 문제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었다. “교황의 권력에 관한 13번째 논제의 해설”이 지닌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토론에서 이루어진 것보다 

더 조직적으로 교황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에 있다.42) 


루터는 이 작품에서 매우 분명하게, 

성서와 초기 교회사와 고대교회 공의회의 교령을 

믿음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권위로서 중심에 놓았고,
조직적인, 논증의 방식으로 교황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그는 성서주석적인, 교회사적인, 일반적인 논증을 통해 

교황의 신적 권한을 반박한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중세후기 교회의 토대를 공격하는 토론서가 되었다.43)

치밀하게 계획된, 하지만 메르제부르크 주교가 

마지막 순간까지 격렬하게 반대한 라이프치히 토론은 

결국 6월 27일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성(城)에서 시작되었다.44) 



41) “Resolutio lutheriana super propositione decima tertia de potestate Papae”(WA 2,
183-240).-이 작품에서 루터는, 교황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본문들을 연구하였고
이것들을 성서와 교회사로부터의 본문들과 대조하였다. 루터는 기본적으로는 교황제도
와 수위권주장을 고집했으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은 비판하였다. 처음 부분
에서 루터는 교황의 통치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교황의 통치권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통치권을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 13/15
절에 따라 상위의 권위로 인식하였다. 그 다음, 루터는 통치권에 대한 지금까지의 근거
제시는 증거가 아니라고 간주하면서 먼저 소위 성서증거들과, 그리고 교회법과 교령의
증거들을 반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에 근거한 논증을 하였다. 이 작품에 관해서
는 Helmar Junghans, “Martin Luther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87-94 (89-94);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31-136; B. Lohse,
Luthers Theologie, 136-138; Leif Grane, Martinus noster. Luther in the German Reform
Movement 1518-1521 (Mainz: Philipp von Zabern, 1994), 57-80 참조.
42) B. Lohse, Luthers Theologie, 136.
43) B. Lohse, Luthers Theologie, 138: “루터는 제일 먼저 주석가로서 시작했고, 후에 비텐베
르크대학 개혁에 함께 일했고, 학문에 그리고 또한 대중에 이르는 길을 가면서 미해결
혹은 토론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반면 이제 루터는 중세후기
교회의 기초를 공격하는 토론서를 내놓게 되었다.”
44) 토론이 대학교에서 행해지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근거한 신학자들의 반대 외에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7


루터도 칼쉬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에 도착했다.45) 

토론은 6월 27일 월요일부터 7월 15일 금요일까지 3주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휴일을 빼면 15일간 토론이 진행된 것이다(오전 7-9시; 오후 14-17시). 토론의 진행과정은 기록과 기타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게 우리에게 전해졌다.46)

첫 토론자인 에크와 칼쉬타트는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그리고 7월14일과 15일에 칭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자유의지를 주제로 토론에 참여하였다. 이보다 중요한 토론이 7월 4일부터 14일까지 에크와 루터 사이에 이루어졌다. 루터와 에크는 먼저 교황 수위에 대한 신적인 권리에 대하여 토론했고, 그 다음에는 연옥, 면벌부, 참회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모든 주제가 다 다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토론은 7월 15일 14시경 중단되고 폐회사로 종결되었다. 에크는 자신이 토론의 승자라고 생각했지만,47) 



도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즉 충분히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플라이센부르크성에 대해서는 Thomas Noack, “Der Ort der Disputation-die Pleißenburg,”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45-54 참조.
45) 원래 라이프치히 토론은 에크와 칼쉬타트가 하는 것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루터와 에크가 서로 12개의 논제 및 반대논제를 작성하는 시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안도
면벌부보다는 더 파괴력이 강하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가 주요주제였다. 루터는 토
론 참여를 허락해달라고 2월 19일에 게오르그 공작에서 신청을 했으나, 거부의 대답도,
승낙의 대답도 받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못한채, 1519년 6월
칼쉬타트와 동행하여 라이프치히로 갔다. 게오르그 공작은 계속하여 토론을 원했고 토론
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지시키려고 한 메제부르크 주교의 시도에 정력적으로 대응하였
기 때문에, 라이프치히로 가는 루터의 길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루터는 결국 라이
프치히 토론에 임박하여 참석을 허락받았다.
46) 라이프치히 토론의 경과에 대한 전승으로는 두 가지 자료형태가 있다. 첫째로는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 및 청중의 서신과 보고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루터와 에크의 서신들
이 있다. 두 번째 자료형태는 토론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공식적인 공증기록과 청중
이 사적으로 받아 적은 기록이 있는데, 3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나 우리에게는 소수만
전해지고 있다. 라이프치히 토론에 대한 기록으로는 WA 2, 254-383; WA 59, 433-605 참
조. -그 외 몇몇 증인들의 보도와 서신으로는 Helmar Junghans (Hg.), Die Reformation in
Augenzeugenberichten (München: DTV, 1980), 67-86.
47) 에크는 자신이 토론의 승자라고 느꼈고 또한 여러 대학교와 장소에서 승리자로서의 대접
을 받았다. 그는 루터로 하여금 사실상 중세 가르침의 일치를 벗어난 언급을 하게 하는데
12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라이프치히 토론 (1867년에 나온 유화. 루터와 에크가 설교단에서 마주보고 있으며 중앙에 게오르그 공작과 포메른의 바님[Barnim] 공작이 앉아 있다)

토론은 사실 결론 없이 끝났다. 

심판관으로 예정된 파리 대학교와 에어푸르트 대학교가 

판결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48) 


토론에 참석한 사람과 토론을 지켜본 청중들이 받은 인상과 영향은 다양했고, 

토론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했다.49) 


특히 게오르그 공작은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종교개혁의 적이 되었다.50) 



성공했다. 또한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답변자로서의 역할로 인해 논증에 있어 곤경
에 처했다. 즉 루터는 에크의 논증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논증을 적극적으로 펼
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A. Schubert, “Libertas Disputandi,” 427 참조.
48) 토론의 심판관에 대해서는 C. Spehr, Luther und das Konzil, 124-125; C. Winter, “Die
Protokolle der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35-43 (42).
49) 참고. M. Brecht, Martin Luther, 307-332; Christoph Volkmar, “Von der Wahrnehmung
des Neue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131-142.
50) 게오르그 공작은 루터와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였고 이로써 1539년 죽을 때까지 라이프
치히에서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게오르그 공작을 격분시킨 것은,
루터가 보헤미아 후스의 이단이라는 에크의 비난에 대해 “친애하는 박사여, 후스의 가르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29


또한 라이프치히 토론으로 여러 소책자들이 나왔는데, 

이로써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 사상을 공적으로 널리 전파하고
종교개혁에 대한 공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51)


Ⅳ. 라이프치히 토론에서의 ‘권위’문제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면벌부라는 특수한 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의 성격은 기독교의 결정적인 규범과 권위에 관한 근본적이고도 공개
적인 논쟁으로 바뀌었다. 토론의 절정은 7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교황
의 수위권에 관하여 루터와 에크사이에 이루어진 논쟁에 있었다. 교황의
수위권을 반박하고 교황 및 공의회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신학적인 확신을
갖게 된 루터는, 이 토론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권위
를 구분하였다. 당시 선풍을 일으키고 큰 결과를 낳게 한, 그리고 토론의
의미와 중요성이 달려 있는 교황 수위권, 즉 권위문제를 중심으로 루터와
에크의 토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침 모두가 이단적인 것은 아닙니다”라는 대답이었다는, 당시 목격자인 프뢰쉘(Sebastain
Fröschel)의 보고가 있다. 참고. H. Junghans (Hg.), Die Reformation in Augenzeugenberichten,
70-71.-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와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대한 게오르그 공작의 적대적
인 교회정치적 행동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참고. Heiko Jadatz, “Herzog Georg von
Sachsen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in Die Leipziger Disputation 1519, 73-86 (86).
51) 사실 16세기 대중적인 여론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들을
살펴본다면, 종교개혁측의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다.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와 쉬팽글러(Lazarus Spengler)는 소책자들에서 루터의 편을 들었다. 피크하임어
(Willibald Pirckheimer)는 풍자시 “다듬어진 에크”(eccius dedolatus)에서 에크를 조롱하였
고, 에라스무스는 이제부터 에크를 바보 취급하기 시작했다.
130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에크는 루터와 교회론과 권위에 대한 주제로 논쟁을 이끌어 나갔다. 

기서 둘 사이에 불일치하는 점들이 언급되어졌다. 

즉,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고전 1:12; 3:5)을, 

에크는 교황이 머리라는 의미로 해석한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52) 


한 에크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에 대한 반석을 

모든 주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53)

그런데 권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실질적인 교회론 문제 자체보다는 

이 문제를 입증하기 위한 논증 제시에 있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베드로를 추종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다고 훈계했다. 

루터는 이것이 베드로가 

모든 신자 위에 특별한 직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반대하는 강한 논증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1장 12-13절을 참조해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54) 


그런데 에크는, “요비아누스 반박”(Contra Jovianum)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한 히에로니무스를 증인으로 삼았다.55) 


여기서 루터는 “추구된 더 작은 권위 때문에 

내가 더 큰 권위에 의해 찢겨지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논증했다.56) 

다시 말해, 히에로니무스는 권위에 있어 

바울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보다 항상 위에 있기 때문이다.57)


52) WA 59, 441, 251-264 / 445, 397-407.
53) WA 59, 465, 1018-1027.
54) WA 59, 437, 149-154.
55) WA 59, 441, 259-264.
56) WA 59, 445, 397-398. “Non patior propter minorem auctoritatem inductam me divelli a
maiore.”
57) 이 루터의 말은 두 사람 토론의 이해를 위해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다른 권위에 대해 독점적인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권위’에 대해 ‘더 큰 권위’를
고려한 것이다. 에크는, 바울과 히에로니무스 사이에 권위에 서열이 있다는 루터의 주장
에 완전히 동의하였다(WA 59, 450, 566-568). 따라서 이 시점에 루터와 에크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들의 서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하게 귀속시키는 모델에 있
음을 알 수 있다. 서열화에 관한 모든 언급들은, 그 해석의 목적이 서열화 된 권위들의
공통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는 한, 문제가 없다. 하지만 차이들을 결정해야 하는 기준
으로 이러한 서열화를 적용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은, 존경받지만 원칙
적으로 볼 때 잘못될 수 있는 권위인 히에로니무스에게 있어 비교적 문제가 되지 않았
다. 하지만 에크의 전략은 교회의 권위에 관한 토론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에크는 교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1

교회의 머리로서의 베드로 및 히에로니무스의 권위에 대한 토론은, 에크가 루터에게,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당한 후스(Johannes Hus)의 ‘타락한 오류들’을 제시함으로써 공의회의 권위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제시된 오류 가운데에는 루터가 바로 에크와 토론하면서 말한 “베드로는 거룩한 보편 교회의 머리이지도 않으며 머리인적도 없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58) 루터는 즉시 이 조항이야말로 후스와 보헤미아인들의 ‘가
장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조항들’(articuli Christianissmi et evangelici)에 속한다고 대답하였다.59) 하지만 에크는 이 말의 결과를 간파했다. 즉, 이 견해에 따르면,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부당하게 정죄를 받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에크는 루터보다 더 분명하고 신속하게 목표를 세우고
루터를 후스주의자들의 보호자라고 책망했다.60) 


이에 루터는 자신이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61) 

에크는, 만일 루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의회가 기독교 진리가운데 오류를 범했다면,
공의회의 권위가 동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면서 

루터를 점점 궁지로 몰아 세웠다. 


루터는 7월 6일에도, 후스주의자들의 타락한 가르침들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했다. 

7월 7일 루터는 공의회의 규례들이 지켜져야 한다는 에크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주목회론과 권위의 문제 사이의 기초적인 맥락을 주목하였다. 

그래서 그는 루터에게서 교회와 성경의 관계는 

권위의 지평에서 해석학상 불일치하게 해석되고 

이로써 결국에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에 대립시키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참고. V. Leppin, “Papst, Konzil und Kirchenväter,” 120-121.-에크의 시
도는 ‘조화의 모델’로, 루터의 시도는 ‘차별화의 모델’로 표현될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
결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있어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교회의 오래된 전승일수록 루
터의 편에 서 있는 반면, 최근의 전승일수록 루터와 차이가 나고 에크의 편에 있다는 것
이다. 

참고. Kurt-Victor Selge, “Die Leipziger Disputation zwischen Luther und Eck,”
ZKG 86 (1975), 26-40 (35-38).
58) WA 59, 461, 883-884.
59) WA 59, 466, 1049.
60) WA 59, 461, 900-908; 468, 1108-1110.
61) WA 59, 472, 1237-1238.
132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할 만한 제한을 가진 언급을 함으로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이 언급은 에크로 하여금, 

이제 대적자 루터는 이단자가 되었다는 승리의 외침으로 

반응하게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때때로 공의회는 오류를 범했고 또한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믿음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들에서 그렇다.62)
여기서 사용된 ‘무엇보다도’(praesertim)라는 말은 분명 독점적인 형식이 아니라 등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의회 역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 놓은 것이다. 루터는 또한 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가했다.63)
루터의 언급은 파노르미타누스처럼 교회 권위들의 오류 가능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권위들이 실제로 오류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 된다. 이로써 루터는 에크에 의해 내몰려져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넘어서,64) 

지금까지의 숙고로부터 점점 전체적으로 분명해지는 결과들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다룬 이후에, 공의회 권위의 무오류성에 대한 토론과 함께 교회-인간의 권위를 논박하였고, 이로써 사실상 자기의 시대 교회의 권위구조로부터 해방된 것이었다. 


사실 루터는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토론에 임한 것이 아니었으나, 에크와의 토론을 통해 권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교회의 권위, 즉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언급을 이후로는 더 이상 취소하지 않았다.

62) WA 59, 500, 2081-2083.
63) WA 59, 508, 2309-2311.
64) B. Moeller, “Luther und das Papsttum,” 1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3


에크와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루터에게 오히려 확신이 생긴 것은, 

공의회와 더불어 교황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에크는 루터에게 이러한 인식을 하도록 한 ‘촉진자’였다. 


루터의 이러한 인식이 적대자들에 의해 더욱 논박되면 될수록, 

교황의 무오류성이 더 강하게 변호되면 될수록, 

인간인 교황에게 신적인 정당성과 권위가 부여되고 

하나님 말씀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루터에게는 더욱 분명해졌다.65)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루터의 사고에는 

점점 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루터는 새로운 자기인식, 

즉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고 복음을 되돌리는 것이 

자신의 구속사적인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66)


Ⅴ. 나가는 말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에크는 루터를 이단자로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목표는 내용상으로 보면 성공적이었다. 루터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된 후스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복음적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토론은 실제적으로 당시 끼친 영향에서 볼 때 

오히려 루터의 성공이었다.67) 

종교개혁의 불씨를 

독일의 여러 지역으로 퍼지게 하는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사상에65)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추측은 

1519년 후기 시편강해를 하는 가운데 더욱 굳세졌다. 


즉, 적그리스드로서의 교황에 대한 생각은 

이제 성경으로부터 근거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인쇄된 작품에서 

간접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교황이 성서에 대한 오류 없는 강해를 한다고 주제넘게 주장하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인간의 규정을 신앙조항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모든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참된 적그리스도(Endchrist)라고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WA 6, 322, 18-19).


66) V. Leppin, Martin Luther (Darmstadt: WBG, 2006), 149.
67) 참고. Walter von Loewenich, Martin Luther. Der Mann und das Werk (München: List
Verlag, 1982), 142: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단호하게 서게 된 결과 새로운 추종자들을 얻
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는 결국 에크의 승리가 아니라 루터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34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토론이야 말로 기독교의 권위에 대한
그의 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루터에게 있어 성서의 권위와 당시 교회의 권위 사이에는 대립이 명백하였다. 결국 라이프치히 토론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이해를 크게 분열시켰다. 루터는 교회의 제도들(교황, 주교직, 공의회)의 권위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가르침과 규정들, 그리고 모든 교회전통을 역사적으로 상대화시켰다. 특히 로마교회와의 갈등에서 신적인 권리와 인간적인 권리의 구분을
발전시킨 루터에게 있어, 교황의 수위권은 신적인 것이거나 성서에 맞는 규정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습에 따른 규정으로부터 온 것일 따름이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교황에 대한 루터의 이의제기는 앞서 살핀 것처럼
급기야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루터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갈등을 더욱 급격하게 만들었고, 

루터로 하여금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였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 이후 

1520년부터 ‘교황의 교회’와 ‘기독교 교회’를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68) 

이제 루터에게 있어 

모든 기독교의 존재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근본적인 양자택일은

 ‘교황이냐 복음이냐’에 달린 것이었다. 


이처럼 교황의 권위 문제는 

종교개혁 초기국면에서 가장 큰 주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사안이었기에,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한 라이프치히 토론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사적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이프치히 토론이 권위문제와 관련하여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이 있다.
사실 교황의 권위 및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비판적인 언급은 

상황에 따라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성서원칙 및 복음의 발견에 근거한 신학적인, 필연적인 결과였다. 


68) WA 10II, 228, 11-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5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가르침을 차별화시켰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피조물이거나 인간적인-역사적인 제도로서 성서를 섬기면서 성서 아래에 위치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루터가 가진 확신이었다. 이런 점에서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 신학에 대해서 중요한 표지판 역할을 했다. 


라이프치히 토론이 루터와 종교개혁 신학에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세상적인, 인간적인 권위를 부인하는 것 외에 종교개혁의 긍정적인 권위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분명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 모토이다. 성서 안에 있지 않는 것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전통을 완전하게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전통이 성서와 상응하는 곳에서는, 전통을 수용했다. 하지만 성서는 루터에게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폐기될 수 없고 영원한 구원의 문제에서 어떤 것을 통해서도 보충될 수 없는 결정적인 표준이었다.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에 해당한다. 루터는 기독교인에게 결정적인 규범과 권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직 성서로’라는 원칙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오직 성서로’는 기독교 교회를 바른 신앙과 실천의 길로 되돌리려고 노력한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맥그래스는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교리가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원칙이라면, ‘오직 성서로’라는 모토는 종교개혁의 형식적인 원리였다고 말한다.69)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폐위시킨대신, 성경을 즉위시킨 것이다.70)

결론적으로 말하면, 종교개혁의 초기국면(1517-1521년)에 

루터와 로마가톨릭 교회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규범과 권위문제였다. 


69)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9), 145.
70)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145.
136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교황의 권위 및 수위권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루터는 오직 성서의 권위만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비록 처음에는 단지 소음에 불과하였지만 

결국엔 단지 개혁이 아니라 개신교가 출현하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초기 종교개혁 국면에서 

권위의 문제를 다룬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라이프치히토론이었다. 

이 토론이야말로 교황 및 공의회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신학적인 확신으로, 

그리고 ‘오직 성서’원칙으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사건이었다.71)

마지막으로,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가 교황제도 및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는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분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 라이프치히 토론은 루터와 에크 및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 입장을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토론의 핵심에는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이 깔려있다. 루터는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교황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라이프치히 토론을 통해 분명하게 갖게 된 루터의 확신이었다. 

분명 루터에게 교회의 권위는 위대한 것이고 교회는 복음의 산물(피조물)이지만,72) 

그런 교회라도 복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73) 


결국 루터에게 결정적인 사실은,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어머니’가 아니라 ‘딸’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말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74)

71) 그런데 사실 개신교회에서는 ‘오직 성서로’ 원칙 때문에 

권위 있는 해석자의 부재로 말
미암아 어려움이 있어왔다.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없다고 할 때, 

그럼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경우, 

심지어 이단과 정통이 있을 때 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점이 개신교회에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이 이단의 확산을 초래하였고 

기독교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난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기독교에 역동성을 갖게 하고 

개신교의 정체성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맥그래스는 본다. 

이런 관점의 연구로는 앨리스터 맥그래스/ 박규태 역,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참조.
72) 루터는 라이프치히 토론에 관한 해설(“Resolutiones Lutherianae super propositionibus suis
Lipsiae disputatis”)에서, 

교회의 권위는 위대하고 오류가 없는데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배되기 때문

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을 고백했다.

(WA 2, 429, 25-26).
73) “incomparabiliter minor ipso” (WA 2, 430, 7).
74) WA 42, 334, 12.
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37

그러므로 기독교 최고의 권위, 아니 유일한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으며, 

‘오직 성서로’의 원칙에 근거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정당성을 갖게 된다.


주제어
라이프치히 토론, 권위, 교황, 공의회, 루터, 에크
Leipzig Debate, Authority, Pope, Council, Luther, Eck
138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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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호, 마틴 루터와 라이프치히 토론 141
Abstract
Martin Luther und die Leipziger Disputation
-konzentriert auf die Autoritätenfrage-
Kown, Jin Ho
(Mokwon University)
Die Leipziger Disputation von 1519 stellt einen Höhepunkt in der frühen
Reformationsgeschichte dar. Die Bedeutung der Leipziger Disputation liegt
in der heftigen Auseinandersetzung über der kirchlichen Autorität, vor allem
den päpstlichen Primat. Diese Arbeit zielt darauf ab, die Leipziger Disputation
aus Sicht der Autoritätenfrage zu verstehen und deren reformatorische
Bedeutung herauszufinden
In der frühen Phase der Reformation ging es um den Autoritätenkonflikt.
Zwar begann Luthers Konflikt mit der römischen Kirche, wie 95 Thesen
gegen den Ablass von 1517, mit der Ablasskritik, aber dabei ging es
wesentlich um die Autoritätenfrage. Das Zentrum der causa Lutheri, die
sowohl bei Prierias als auch vor Kardinal Cajetan behandelt worden war,
lag in der gültigen Autoritätenfrage.
Luther erregte Debatten mit J. Eck über die Autorität von Papst und
Konzil und bestreitete diese. Hierbei behauptete Luther, dass der Papst bzw.
der Konzil irren könne und kein göttliches Recht behalte. Für Luther ist
142 韓國敎會史學會誌 第34輯(2013)
etwas heilsnotwendiges für die Christen keine kirchliche Instanz wie Papst,
sondern nur die Heilige Schrift. Luther hat mit der Autorität der kirchlichen
Institutionen auch ihre Lehren und Satzungen sowie kirchliche Traditionen relativiert. In der Leipziger Disputation ging es Luther um die Unterscheidung
zwischen Gotteswort und Menschenwort sowie zwischen göttlichem Recht
und menschlichem Recht.
접 수 일 (2013년 2월 27일)
수 정 일 (2013년 3월 28일)
게재확정일 (2013년 4월 5일)

(출처 : http://cafe.daum.net/jangdal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