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실업계였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급수를 이미 다 딴 터라 인문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도 대학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반이 채 안 되는 숫자였지만 인문계 공부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취업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 친구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인문계 공부였다.
친구들은 인문계 공부를 하는 우리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대학 가려면 인문계로 갔어야지 왜 실업계에 들어와서 난리냐’며 쑥덕거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는 꼭 돼야 해”하며 응원해 주었다.
저녁이 되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었다. 가방을 놓자마자 안수를 했다. 주님밖에는 매달릴 데 없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짜증이 났고, 때론 피곤함에 코피도 났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사명자이기에 맡겨주신 일을 감당했다.
새벽기도회에도 꼭 참석했다. 그때 말고는 기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달려갔다. ‘대학 가서 하나님 일 더 크게, 더 멋있게 하자.’ 그것이 당시 내 모토였다. 중간중간 부흥회도 나갔다. 될 수 있으면 부흥회는 줄이려고 애썼다. 꼭 가야 될 곳만 갔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 무렵, 남편이 군청 공무원이신 한 여자분이 교회에 왔다. 물론 병이 들어서 해볼 것 다 해보고 마지막으로 교회에 온 것이다.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밥도 먹지 못했는데 몇 주 안수 기도를 받은 후 치유가 됐다. 그분이 나팔수가 되어 치유사역 소문이 공무원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공무원 가운데 건강의 문제가 있거나 가정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함양 반석성결교회의 위상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마음만 바쁠 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신 어머니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염려하셨다. 정말 그 많은 환자를 두고 대학을 간다는 것은 어렵기만 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나님 일을 좀 더 깊이 있고, 폭넓게 하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마침내 대입학력고사를 쳤다. 입학원서까지 썼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환자 때문에 대학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해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한 해가 갔고 또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전년에는 일반대학에 가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부할 시간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의대를 가기로 하였다. 치유사역과 병행하기에는 한의대가 제격으로 보였다. 어머니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았다.
다시 학력고사를 치르고 전주의 모 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면접 보는 주간에 전주에서 부흥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대학을 선택한 것이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교회에는 양해를 구해 토요일까지 부흥회를 해주기로 하고 면접일 하루를 뺐다. 한 달 뒤 발표가 났다. 합격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몰려오는 환자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국 방글라데시 태국 네팔에서도 환자가 왔다. 어찌 그리 많은지, 감사하면서도 답답한 마음, 웃어야 하면서도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나님, 은혜 주세요. 저를 강하게 사용해 주세요. 저를 홀로 두지 마세요.” 그렇게 몸부림치며 구한 기도가 있었기에 그 결과에 감사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찬양하였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며 자아를 죽였다. 그리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렀다. 마음이 회복되면서 감사가 나왔다. 또 찬양하였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 은혜가 너무너무 크고 감사했다.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위대하게 사랑하시며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가을이 오자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대학진학이 소망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신학대학교를 가볼까.’ 남들은 한 번만 하면 되는 고민을 나는 3년에 걸쳐서 해야만 했다. 부모님 모르게 원서를 썼다. ‘제일 가까운 신학대학교가 어딜까?’ 가장 가까운 곳이 부산에 있는 고신대학교였다. 밤마다 시험공부를 남몰래 하면서도 안수와 부흥회 인도를 했다. 틈틈이 철야기도를 했는데, 그 시간을 공부시간으로 바꿨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간절히 호소했다.
“아버지, 제가 부흥회를 나가보니까 신학대학에 가야겠어요. 사람들이 신학 했느냐고 따지고, 학벌도 물어봐요.” 조용히 하나님께 내 마음을 보여드렸다. 그리고 면접일, 부흥회를 가는 것처럼 하고 면접을 보고 왔다. 내가 신학대학에 진학하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