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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 3분의 1은 실패작, 그게 날 가르쳤다"/ '촬영의 代父' 90세 정일성 감독,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 돼

영국신사77 2019. 10. 6. 17:28

"내 영화 3분의 1은 실패작, 그게 날 가르쳤다"

입력 2019.10.05 03:00

'촬영의 代父' 90세 정일성 감독,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 돼 
"기술과 표현의 자유 발전했으니 더 좋은 영화가 나와야 할 때" 

"내가 찍은 영화 138편 중 40~50편 정도는 굉장히 부끄러운 영화다. 
 전부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싶지만, 그 영화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실패한 영화만한 교과서가 없다."

4일 오전 부산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 정일성(90) 촬영감독이 말했다. 
한국 영화사(史)에 한 획을 그은 이 촬영 예술의 대가는 
'대표작'을 묻는 말에 '실패작'을 꼽았다. 

"내 영화라고 해서 다 좋으란 법은 없다. 

 빛도 못 보고 흥행 못 한 작품도 많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어쩌면 그게 정일성이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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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임권택 감독과 다시 작업할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너무 오래 일하면 매너리즘에 빠져 독이 될 수 있다. 이젠 날 필요로 하는 젊은 감독과 또 다른 영화 신세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임권택 감독과 다시 작업할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너무 오래 일하면 매너리즘에 빠져 독이 될 수 있다. 
이젠 날 필요로 하는 젊은 감독과 또 다른 영화 신세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했다. /김동환 기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일성 촬영감독을 꼽았다. 1957년 데뷔해 김기영·유현목·김수영·하길종·이두용·임권택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들과 영화를 찍어왔다. 오는 11일까지 부산시민공원에서 진행하는 회고전에선 '화녀'(김기영 감독), '만추'(김수용 감독), '만다라'(임권택 감독) 등 그의 대표작 7편을 튼다. "영화 시작한 지 10년 차쯤 됐을 때 '히치콕 회고전' 소식을 듣고, 나도 저 나이 될 때까지 영화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참 부러웠다. 그런데 나도 어언 60년이 넘었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광복을 겪고 전쟁을 거쳤다. 격변으로 가득했던 영화 인생, 그래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정 감독은 4·19 혁명, 5·16, 12·12 등을 거론하며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에, 영화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했다. "불행한 근현대사를 가진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며 고통과 기쁨, 슬픔을 나누며 영화를 만든 세대다."

자신을 '원칙주의자'라고도 했다.
 "형식, 리얼리즘, 그리고 모더니즘이 내 원칙이었다." 
리얼리즘 속에 '꿈'이 없으면 한낮 뉴스나 기록 영화로 전락한다는 점을 염두에 뒀고, 
긴장 속에도 적당한 '여백(pause)'을 안배하는 모더니즘 기법을 
사용하려 애썼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영화의 격조(格調)였다.
 "격조는 영화감독이 만드는 게 아니라 촬영감독이 만드는 것이다. 
  어떤 광선으로, 어떤 각도와 위치에서 아픔을 극대화해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미국 영화의 아류를 찍고 싶지 않았다."

영화계를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6·25전쟁 이후 제대로 된 필름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고, 미군이 싸게 파는 손상된 필름으로 찍어 화면에 얼룩이나 스크래치가 남은 적도 있었다. 그는 "경제적 열악함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던 세대로서 무리한 부탁을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지금은 행복한 시대다. 좋은 기술력과 장비, 표현의 자유도 있다. 그걸 생각하면 더 좋은 영화가 나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1979년작 '신궁'을 시작으로 30여년간 함께 작업한 임권택 감독과 
개막식 날 재회한 일화도 전했다. 
"5~6년 만이다. 파안대소하면서 서로 껴안았다." 

하지만 임 감독과 다시 작업할 생각이 있 는지 묻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와 작업하는 동안 강산이 세 번 변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 
같이 오래 일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서로에게 독(毒)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외도를 했다, 하하! 
임 감독도 젊은 촬영감독한테 기를 받아야 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이젠 나를 필요로 하는 젊은 감독과 
또 다른 영화 신세계를 구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