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3. 성찬주일설교
풍랑과 인생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35~41)
여의도순복음교회 http://www.fgtv.com
과연 잘한다. 한번 따라 말씀 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복받았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 교회 잘 오셨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풍랑과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호수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시면서 우리 저 건너편으로 가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으면 걸어서 가든 바다 땅밑을 기어서 가든 날라가든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방법은 모르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다가 큰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한데 제자들이 아무리 배를 저어도 배를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야 예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 어디 계신가. 그 가운데 찾아보니 자기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보니까 예수님이 저 배 한구석에서 팔을 베개로하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곯고 계십니다. 그렇게 격렬한 풍랑 가운데도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서 예수님을 흔들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좋을 때는 예수님 찾지도 아니하고 난 다음 어려우니까 비로소 주님을 찾고 원망부터 먼저 합니다. 우리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말씀을 잊어 버렸다 말입니다. 우리 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으면 가는 것입니다. 죽기는 왜 죽어요? 그런데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까 즉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이 넌지시 보시고 왜 두려워 했느냐? 너의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주님 하신 말씀에 믿음을 두지 않고 바람과 바다에 믿음을 두었기 때문에 그 믿음은 공포로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제자들은 감탄하지 않고 어떻게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이 도대체 누군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본론>
1. 예수님을 모시고 인생 바다를 건널 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예수님을 모시고 인생 바다를 건너가도 파도는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파도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합니다. 어느 곳에 가도 남의 밥의 콩이 굵어 보인다고 남은 편안하게 살고 우리만 고생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다 고생 당합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마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가 없으면 고난 없어요. 그러나 마귀가 이 세상에 있는 이상 마귀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욥같이 순진하고 착한 사람도 공격을 하는데요. 마귀는 원래 루시퍼 천사장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하다가 쫓겨 났습니다. 자기 밑에 부리고 있는 하늘 천사 3분지 2를 데리고 쫓겨났는데 공중에 권세 잡고 있는데 그 천사 3분지 1이 귀신들이 된 것입니다. 귀신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바다 건너편에 돼지떼가 한 2천마리가 비탈에서 먹고 있었는데 거기에 미친 사람 한 사람이 있었어요. 온 동리가 다 아는 사람인데 옷도 입지 아니하고 동리 밖에서 고함고함을 치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하는 사람인데 아무도 이 사람 근처에 못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시니까 그 귀신들린 사람이 쏜살같이 뛰어 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 하나님의 아들인줄 압니다. 나를 무지갱으로 보내지 마소서. 주님께서 귀신보고 나오라. 네 이름이 뭐냐? 우리가 많습니다. 군대입니다. 로마시절의 군대는 2천명에서 5천명이 군대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냥 쫓아내지 마시고 저 돼지떼 속에 들어가게 하소서. 귀신은 어찌하든지 사람에게 못붙으면 짐승에게라도 붙어야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라! 그러니까 짐승에게 들어가니 돼지떼가 순식간에 다 미쳐가지고서 돼지 미친 것은 제가 성경에서 처음 봤어요. 그냥 산비탈을 내리 따라 호수로 빠져 들어가서 다 죽고 만 것입니다. 이 귀신이 들어오면 사람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갈 때 풍랑을 일으킨 것은 뭐냐. 군대 마귀 잡힌 이 귀신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면 쫓겨나갈 줄 알기 때문에 예수님 오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파도를 일으켜서 예수님을 막았으나 예수님을 물에 빠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해서 인생의 파도가 안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이 파도는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배는 물에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안심 하라는 말입니다. 왜 두려워 했느냐.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고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파도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타고 간 배에도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이 그들에게 큰 파도를 더 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웠지 않습니까? 깨운다는 것은 요사이 우리 현대어로 말하면 기도드렸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하면 파도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이 계속 주무셔요. 예수님은 기도만이 깨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될 때도 있고 적게 해야 될 때도 있는데 귀신이 많이 붙은 사람은 많이 기도해야 되고 적게 붙은 사람은 적게 기도해도 예수님이 곧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이 사람에게 다가올 때 몇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가 오브세션이라고 해서 붙어 다닙니다. 자꾸 붙어 다녀요. 개도 밥달라고 자꾸 붙어 다니면 귀찮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마귀가 자꾸 붙어서 따라 다닙니다. 오브세션 단계 그 단계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면 둘째는 오프레션, 억압을 가합니다. 올라타서 누릅니다. 귀신에게 억압을 당해서 내 정신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세 번째로 디프레션,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내버려두면 그 다음에는 포제션, 귀신이 차고 들어와서 주인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다니는 단계가 있고 붙어 다니는 단계가 있고 마음을 우울하게 완전히 고통을 주는 단계가 있고 점령해서 주인 노릇하는 단계가 있는데 그 단계마다 쫓아낼 때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귀신 많이 쫓아냈습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지식있는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부자, 돈많은 사람에게도 들어가는데 어떤 귀신은 한 30분 쫓아내면 나갑니다. 어떤 귀신은 1시간 이상 싸워야 나갑니다. 의사선생님 부인 한분이 왔는데 8시간 싸워서 나갔습니다. 8시간 끊임없이 나오라! 안나온다. 나오라! 안나온다. 나오라! 안나온다. 그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이 쉽게 나갈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귀신하고 대적할 때는 내가 나갈 때까지 싸우겠다. 권세는 우리가 있지만 그 권세가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신령한 생활을 한 사람은 권세가 더 강하고 교회 그냥 들락날락 한 사람은 권세가 약합니다. 귀신이 알아봐요. 그런데 이 귀신을 내쫓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기도를 적게 한 사람도 있고 많이 해야 될 때도 있는데 귀신이 강할수록 이 거라사인처럼 귀신이 강할수록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유언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유언은 가장 중요한 말이 유언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제일 먼저 귀신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 안했어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그 다음 새방언을 말하면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귀신 쫓아내는 것이 제 1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제일 먼저 쫓아내는 것이 귀신입니다. 내 밤새 잘 동안에 언제 나에게 붙어 왔는지 알수가 없으니까 더러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나가라!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물러가라! 나에게 붙어 다니지 마라! 나를 건드리지 마라! 언제나 귀신부터 먼저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방언 기도하지요. 제가 잠자기 전에도 제일 먼저 귀신부터 쫓아냅니다. 너희 귀신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리고 방언 기도하고 밤에 몸이 갑자기 괴롭고 마음이 고통스럽고 그래서 잠을 깰 때가 있습니다. 아주 몸이 으스스하고 좋지 않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귀신 쫓아내는 것입니다. 너희 귀신아, 네가 나를 왜 억압하느냐? 예수 이름으로 명하나니 물러가라! 물러가라! 계속 꾸짖으면 귀신이 물러가는데 저는 특별한 은사가 있어요. 무슨 은사냐. 귀신이 나에게 붙어오는 것은 안보이는데 나갈 때는 보인다 말입니다. 그 희안하게 성경에도 그런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나갈때는 내가 알아요. 몇놈이 나가는지... 그런데 들어올 때는 모릅니다. 몇놈이 들어왔는지... 그것은 안알려 주세요. 나갈 때는 안다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귀신이 나갈 때가 되면은 레디고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알거든... 빨리 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빨리 나가라! 그러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나가요. 나중에 다 나가면 텅하고 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는 것이 얼마나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하냐 하냐면 유언의 첫마디에 귀신부터 쫓아내라고... 그리고 제자들을 내보낼 때 열 두제자를 내보낼 때도 나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70인의 제자도 둘씩 둘씩 내보내면서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귀신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우리에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고통, 우울증, 괴로움, 수많은 고통을 눈에 안보이는 귀신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야 될 것을 반드시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모시고 간 배에 풍랑을 보내어서 그 배를 침몰시키려고 하는 귀신입니다. 얼마나 담대하게 도전을 하는지 몰라요.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귀신이 공격 안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망하게 하지는 못해도 우리에게 훼방은 시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귀신은 도둑이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해서 오신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귀신은 나쁜 귀신, 흉악한 귀신,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귀신 와서 우리에게 늘 죄를 짓게 만들어요. 아담과 하와를 교만하고 오만하고 탐욕을 갖게 해서 죄를 짓게 한 것처럼 예수님을 40주 40야 금식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죄를 짓게 하려고 했던 귀신은 오늘날도 와서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와서 이 마귀의 일을 멸하여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마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쫓겨다녀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여러분 보고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항상 깨어서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귀신이 와서 우리를 심히 괴롭히지 못합니다. 잠들 때 언제나 도적이 오지요. 깨어있는데 도적이 오지 않지 않습니까? 귀신은 깨어 기도하면 우리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합니다. 잠들어서 기도를 그치고 하나님의 예배를 그치기 때문에 귀신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주님이 깨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풍랑에서 잠잠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28절로 30절에 보면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야훼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야훼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고통 때문에 부르짖지 말고 고통이 오기 전에 부르짖으십시오. 고통이 오면 누구든지 다 부르짖어요. 괴로운데 안부르짖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고통 오기 전에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늘 기도드리고 예배 드리고 깨어 있으면 주님이 늘 같이 계시기 때문에 파도가 일자마자 주님이 잠잠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일어서 물이 가득하고 고통이 일어날 때 그때 주님 찾고 주님 깨우고 기도원으로 가고 금식을 하고 예수님을 깨워서 파도를 잠잠케 해주시겠지만 물에 잔뜩 젖어서 고통 당하고 만다구요.
시편 91편 14절로 1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어떤 하나님이라구요? 건지시는 하나님, 높이시는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 환난 때 함께 하고 건지고 영화롭게 해주는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지요.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좋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가기 전에 우리가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한 그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건너가자고 했으면 건너가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가는 것입니다. 물결이 쳐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씀에 믿음을 두지 않고 환경을 바라봤기 때문에 바람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면 언제나 우리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은 마귀가 전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역풍이 불게 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 저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데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있는 말씀 우리 함께 읽어 보십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것을 반드시 다가오게 마귀가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냥은 못들어와요. 먼저 마음에 두려움을 주어서 두려운 생각, 두려운 꿈, 두려운 믿음, 두려운 말을 하도록 해놓고 그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가 다가오는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나 마귀가 다가오는 것이나 똑같은 길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정적이 되고 두려운 꿈을 가지고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두려운 말을 하면은 그를 통해서 마귀가 옳다구나 좋다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두려워 하지 말라. 어떻게 두려워 안합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우리 편이 저 편보다 많습니다. 우리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안잖아요. 우리 편이 마귀 편보다 많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아들을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여러분 그 하나님이 여러분 편에 계신데 마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로써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에 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서 그 몸 찢고 피흘려서 값주고 산 여러분인데 안지키겠어요?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알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쫓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우리에게 가장 큰 원수인 것입니다.
미국 정신 신체 의학 세미나에서 저명한 내과 의사가 “만성환자의 90%는 병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병이 없는데 병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통해서 병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기침을 하거나 가슴앓이를 하고 위산 과다 현상을 보이고, 늘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사해 보면 실제로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병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기는 신체적인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는 병 아니에요. 그러나 병이 들까 싶어 두려워 하므로 그 증상으로써 몸에 그런 반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의학계에서는 “두려워하는 사람은 심장의 기능이 약해져서 심장마비나 뇌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발표 했습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역사 아닙니까?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음 속에 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왜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너무나 많은데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이 계시지요. 아버지가 계시지요. 성령이 함께 계시지요.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너무나 많은데 어찌하여 두려워 하느냐. 주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의 말씀을 바라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마귀를 쫓는 방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의심을 주는 마귀를 내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귀를 꾸짖으라고 말했습니다. 길에서 사나운 개를 만났을 때 태연하게 지나가면서 꾸짖으면서 지나가면 물지 않지만 개를 보고 겁을 집어 먹고 돌맹이를 들고 던지든지 작대기를 들고 흔들면 오히려 개가 얕잡아 보고서 물고 늘어진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벌벌 떨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권세있게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권세가 있습니다. 익수지아,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은 그 권세를 믿음과 동시에 주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하면 그 고백하는 사람에게 벌써 마귀를 내어 쫓을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아무리 힘이 있어도 힘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두나미스지만 익수지아는 권세입니다. 권세가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단호하게 꾸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 한 사람 미친 사람 위해서 기도하는데 곁에 가보니까 마귀야 제발 나가다오~ 나가라~ 너무 괴롭다~ 나도 괴롭고 이 사람도 괴롭고 너무 괴로우니까 물러가다오~ 물러가다오~ 그래서 내가 그러면 마귀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안방 구석에 온 것처럼 더 다가오니까 그러지 말고 단호하게 꾸짖어라. 단호하게 꾸짖어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물러갈지어다. 당장 물러가라! 그러면 대게 마귀가 말합니다. 안나가련다. 안물러간다. 온갖 거짓말을 다하고도 안물러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보하지 말고 단호하게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꾸짖으면 안물러갈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권세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네덜란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두려워했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레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 시험적으로 주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괴로운 고난은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을 두려워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허락하는 고난보다도 훨씬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바다를 건널 때 마귀는 크고 작은 일로 우리를 훼방하며 겁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갈 때 마귀는 오히려 쫓겨 나가고 하나님의 은총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믿었는데 왜 시련을 겪나?
둘째로, 저에게 오는 인터넷에 보면 이런 질문이 많이 와요. 예수를 믿었는데 왜 시련을 겪습니까? 예수를 나는 잘 믿는데 왜 시련이 다가옵니까? 아마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한두번 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면케 하지 않아도 풍랑을 극복하거나 이기게 해주는 주님인 것입니다. 풍랑을 면케 해주면 자라지 않습니다. 저는 젊은 노인에 속하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저보고 말하기를 근육이 많이 없어졌다고 근육을 키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근육을 키우느냐 그러니까 역기를 들어라. 아령을 들으라. 그리고 하루에 만보씩 걸으라. 그러자 아이구 힘이 들어서 역기를 못들어요. 아령도... 힘이 들기 때문에 근육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이 안들면 근육이 안생겨요. 근육이 생겨야 저항력이 생기고 늙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데 이대로 근육이 다 없어지고 뼈와 가죽만 남으면 큰일납니다. 영적으로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은 고난이 있어야 영적으로 근육이 붙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육이 붙어서 믿음에 힘이 생기고 기도에 힘이 생기고 전도에 힘이 생기고 능력있는 신앙을 가지려면 신앙의 근육이 붙어야 되는데 신앙의 근육은 안죽을만한 고통을 통해야 신앙의 근육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을 원통하고 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
사방으로 우겨싸이게 만들어 놓아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들이 와서 우리를 우겨싸요. 그 하나님 아예 오지 않도록 내버려 우겨싸라. 그러나 우리 속에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대항하므로 사방에서 욱여 싸여도 싸이지 않고 우리가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일이 다가와도 정복을 안당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저항해서 그를 이기게 되기 때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는 것은 박해를 갈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 더 흥하게 하도록 긍정적인 믿음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와야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안 온 사람은 간증할 것이 없어요. 여러분도 이제 얼마 안있으면 지역장, 구역장 그 다음에는 장로님, 여러분 지역에 복음 말씀 증거해 달라고 초청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할 말이 없으면 큰일이지요. 그런데 간증이 있으면 할 말이 많다 말입니다. 내가 기도로 말미암아 내 아들, 딸 들을 주께서 인도하고 우리 남편을 예수 믿게 하고 우리 마누라를 주님께 인도해서 병이 낫게 하고... 간증을 하면 실제 체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하게 해서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예배를 인도해야 되는데 일어나서 나는요~ 교회왔다갔다 하고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데 있는지 없는지 나도 알롱달롱 하고... 이렇게 되면 자기도 절단이고 듣는 사람도 절단강산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믿음을 가지고 증거를 해야지요. 그 믿음은 증거를 하려면 체험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체험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홍해수를 갈라 놓았으니까 할 말 없지요. 홍해를 갈랐는데요... 쓴 물을 달게 해주시고 하늘에서 만나가 비와 같이 쏟아 주시고 메추라기가 고기 대신에 오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 오르고 그런 체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확연히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시고... 보통 사람 물위로 걷는 것 보았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물 위로 걸었다니까 그 얼마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학문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어디 글에서 읽고 증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했다. 내가 실제로 느꼈다. 굉장한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어려움은 안당하더라도 살짝 살짝 어려움은 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믿음에 근육이 붙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하게 해서 거꾸러지게 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통해서 신앙의 근육이 생기고 경험이 생기고 은혜를 받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련이 와야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고난 당하면 고난을 이기게 하려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성령을 언제 체험합니까? 내가 고난 당할 때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편안할 때 성령께서 능력을 줄 필요가 없어요. 고난 당할 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와서 능력으로 임하여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하여 방언도 하고 방언하는 사람은 어려움 당할 때 예언도 나오고 방언통역도 나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니 고난이 영광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우리는 오직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이 강해지고, 꿈이 생겨나고, 성공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님이고 귀머거리고 벙어리인 헬렌 켈러가 이런 말을 했으니 사지가 멀쩡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나 또한 이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가득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이 가득할 뿐 아니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가득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만 보지 말고 능력을 보라.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봅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능력을 얻지를 못하지요. 고통을 당하지요. 우리는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으므로 예수님을 모셔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완전한 절망 속에 빠져보아야 한다” 지가 한번 절망에 빠져서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끝났다. 손털었다. 그렇게 해서 그 속에서 이겨나온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는 안그렇지만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절망의 밑바닥을 한번 친 사람들인 것입니다. 완전히 힘도 능력도 다 끝나고 소망도 다 없어지고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시점에서 주님이 손 내밀어서 내 손 잡으라. 그때가 정말 멋있는 믿음의 때인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손 내밉니까? 그런데 처한 사람보고 손 내밀지 멀겋게 걸어가는 사람보고 내 손잡으라. 아니요. 필요없어요. 그럴 것 아닙니까?
D.L. 무디 목사님이 그런 증거를 했습니다. 눈이 오는 겨울철에 자기 딸을 데리고 공원 산책을 하는데 딸의 손목을 잡으니까 딸이 하는 말이 손목 필요없어. 손가락만 줘! 무디 목사님은 키가 크고 신체가 장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딸에게 손가락을 주니까 손가락만 잡고가요. 그러다가 미끄러져서 화닥딱 엉덩방아를 찧고 난 다음 으엉~하고 우니까 봐. 내가 붙잡아 주겠다니까. 아버지 그러면 손목만 줘. 그래서 손목을 내주니까 손목 잡구요. 또 꽝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찧어서 울기에 그 다음 아버지가 손목을 덥썩 잡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끄러지면 달랑하고 달리고 미끄러지면 달랑하고 달리고 그것 봐. 아버지가 잡아주겠다는데 네가 왜 자꾸 그러느냐. 요사이 사람들이 그래요. 하나님. 손가락만 내 주십시오. 손만 잡아 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온 몸통을 다 잡아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흑암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질 때 주님 손내밀면 우리가 너무나 기쁘게 그 손을 잡지요. 평안하고 좋을 때는 주님 손을 떨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은 신앙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능력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셋째로, 자연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귀신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이 꾸짖으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지진도 예수님이 꾸짖으면 잠잠해져요. 자꾸 남의 나라 독도를 자기나라 땅이라고 하지 말고 주님을 믿으면 주님이 꾸짖으면 지진도 잠잠해진다구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주님인 것입니다. 나는 일본 1천만 구령을 위해서 평생을 기도한 사람이고 일본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을 수 없고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욕심을 부립니까? 말은 입가지고 바로 해야지 말을 삐뚫게 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바른말 하다가 욕으로 많이 얻어 먹지만...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될 것은 여러분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안보이는 것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 눈에 보이잖아요. 선천초목도 다 보이고 우리 인생 사물이 다 보이는데 이것은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손길이 뒤에서 역사해서 옷입고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조용기가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도 물질적으로 조용기가 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주님이 안보이는 영혼을 넣어 주어서 영혼이 육신을 옷입고 나온 것이 조용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로 9절에 우리 운명을 바꿀 만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눈에 안보이잖아요. 그렇지요?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속에 있는데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속에 하나님 말씀이 거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속에서 이루어진대로 옷입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씀이 딱 들어와 있으면 그 말씀이 옷입고 여러분의 환경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말로 눈에 안보이는 세계가 중요합니다.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꿈을 바로잡고 믿음을 바로잡고 입술의 고백을 바로하고 있으면 그것이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내 마음은 다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현실만 바꾸어 주시옵소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에 먼저 이루어지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건강하다고 늘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사람이 건강을 옷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나는 승리한다. 축복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사람은 그것이 옷을 입고 축복으로 밖에 나오는 것입니다. 속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우리 속마음이 가득해지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환경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하루 만에 변화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한달이 걸리고 1년이 걸리고 2년이 3년의 시간은 하나님이 정해서 할 것이요, 반드시 속에 가득한 것이 안보이는 것이 옷을 입고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밧줄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것 이것이 주님이 주신 원리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니까 베드로가 즉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이 탁 무릎을 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라. 이 신앙 고백,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무엇이든지입니다. 무엇이든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그것은 내가 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매고 풉니까? 생각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매고 푸는 것입니다. 안보이는 것으로 매고 안보이는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다고 내가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는 것입니다. 내 속으로 내 영혼이 안됨같이 범사도 안되고 안강건해진다. 나는 절단강산이다. 나는 망했다. 그러면 하늘에서 그래? 내가 그렇게 해주마. 성경에 주님께서 너희 한 말을 내가 듣고 그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생각을 정말로 하나님 말씀을 쫓아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하시고 꿈을 언제나 희망이 있는 꿈을 꾸십시오. 절망적인 꿈을 꾸면 안됩니다. 희망을 꿈꾸시고 그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고 믿으시고 말을 늘 여러분 생산적인 말을 하십시오. 복받은 말을 하십시오. 성공적인 말을 하십시오. 죽는다고 하지 말고 산다고 하십시오. 아이구 배불러 죽겠네. 좋아 죽겠네. 배불러 죽고 좋아 죽으면 다 죽었지. 사는게 한도 없잖아요. 그런 말이 얼마나 우리의 생애를 좌우하는 키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실 때 손수 짓지 않았습니다. 천사를 시켜서 짓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혼자 와서 일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보기에 좋은 것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보기에 나쁜 것은 마귀가 갖다주는 것이지 하나님이 갖다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삶 가운데 나타나시면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것은 말에 그와같은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길이길이 교훈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말을 섣불리 하지 말라. 말 속에 생명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대화해서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새들도 살아서 날라 다니지만 말은 못하지요. 개들도 말 못하지요. 오리도 말 못하지요? 원숭이도 말 못합니다. 그러나 바보도 말은 합니다. 사람은 말한다구요. 바보도 말 한다구요. 그것 뭐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하나님이 창조하시면 우리도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팔자를 고칩니다. 말이 팔자를 망하게도 하고 말이 팔자를 고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말로 내가 사라잡힘을 받았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때 여러분 우리의 입술의 말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지 고난 당할 때 말을 파괴적인 말을 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는데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안 보이는 것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물은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보이는 말씀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안보이는 것이 보이도록 옷을 입고 나온 것이 만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안보이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보이는 도우심이 먼저 있고 현실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전성기를 누렸던 나라와 민족을 보면, 그들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을 때 안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나라에 임하여 있을 때 그 나라에 눈에 보이도록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부강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독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나섰을 때 번창하여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가 되었으나 나치 시대가 와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힘을 믿고 온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휘몰아쳤을 때, 망하고 만것입니다. 하나님 계실 때 눈에 안보이지만 온 나라가 훈훈하고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 안계시니까 싸늘한 겨울이 되어 망해 버린 것입니다. 영국도 빅토리아 여왕이 여왕 즉위시 제일 먼저 성경 말씀에 의지하며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 때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온 천하에 식민지를 가진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미국은 어떠한 나라입니까? 미국은 예수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에 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주님 중심으로 섰기 때문에 가장 짧은 3백년 만에 3백년 만에 세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부국이 된 것입니다. 그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축복이 임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보세요. 오랜 역사 가운데 주변 국가들로부터 끊임없는 약탈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 이후 이 나라는 다시는 재건할 수 없을 만큼 초토화 되었습니다. 6.25사변 난 이후에 전쟁의 잿더미에 우리가 살 때 참말 저는 학생시절이었지만 탄식을 했습니다. 왜 내가 이런 나라에 태어났나. 그때 내가 볼때는 희망이 없어요. 일본에게 36년의 수탈을 당하고 난 다음에 곧장 나라가 서자마자 전쟁이 일어나서 잿더미가 되어버렸는데 뭘 바랍니까? 어디가도 희망이 없는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60년 지난 오늘날에 실제로 금년도에 발표한 것 보니까 국민소득 3만달러로 10대 부자 나라가 된 것입니다. 원조 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사를 받아들여서 믿던 나라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온 세계에 파견한 나라가 되었으니 왠일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1천 2백만 성도가 눈에 안보이는 기도를 하기 때문에 안보이는 기도의 손길이 우리 한국을 덮어서 눈에 보이는 축복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연히 된 것 아닙니다. 예수쟁이 자화자찬 한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 나라가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게 된 것은 눈에 안보이는 주님의 손길이 역사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좋은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가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한기총도 분쟁이 있고 여러교회들이 분쟁이 있어 안믿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신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좀 발걸음이 흐트러졌을지라도 회개운동이 일어나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변화의 시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잠시동안 고난 당하나 하나님이 이를 통해서 우리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깨어져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5월 초순에 저는 최자실 금식기도원에 전국 7천명의 목사님들을 불러 모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하기로 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주님이 오시면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합니까? 회개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우리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회개하면 좋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 배후에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처럼,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와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A. 사바티에 프랑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시련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랑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서 우리를 항상 지켜주는 사랑이다.”
보호를 해서 온실 속에 들어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보내어서 모든 시련과 환난을 다 당하되 안 넘어지도록 지켜주는 사랑이다. 강하고 튼튼하고 영육간에 근육질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데 왜 시련을 받게 되는지 의문을 갖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며 말씀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예수님이 나타난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되고 우리가 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학문적인 종교가 아닌 살아 있는 종교는 시련을 통하여 예수님의 나타남을 체험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이것이야 말로 시련을 통해서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험한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신앙의 배를 타고 가도 시련의 파도가 다가옵니다만 그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 체험하고 알게 되고 굳센 믿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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