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한 뉴욕 특파원 |
1959년 청계천 작은 가게로 시작한 영안모자가 한국에서 계속 모자를 판다고 책잡힐 일이 아니지만 그는 한국의 '산업 생태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오늘날 '모자왕'으로 만들어준 미국 시장에서도 이익만 뒤좇는 건 아니다. 대형 브랜드 한두 개로 시장을 싹쓸이하려 하지 않았고 각 지역의 판매상들과 협력하면서 60개 넘는 지역별 브랜드를 만들었다. 값싼 해외 공장에서 만든 제품만 갖다 팔지 않고 미국에서도 공장을 돌린다. 이런 상생 철학 덕에 현지에 뿌리내리고 무역 보복도 피해갈 수 있었다. 모자로 성공한 후엔 버스·지게차·목장으로 사업을 확장해왔다. 대우자동차가 해체될 때 버스 부문을 인수해 재정비했고, 지게차 창시 기업인 미국 클라크가 파산하자 이를 사들여 되살리는 등 '도전'을 계속해 왔다. 대우버스 인수 후엔 국내에서 현대·기아차와 맞붙으며 "나 죽는다"고 악을 쓰기보다 파키스탄 같은 좀 어렵지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장에 집중했다. 저가(低價) 저상버스, 전기버스 등을 개발하며 미래도 준비했다. 그동안 파트너들에게 모든 걸 공개하는 '투명주의'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상생정신'을 지켰다.
2016년 7월12일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미국에 수출하는 3000달러짜리 최고급 모자를 들고 있다. /이태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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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를 살릴 때는 남들 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 설비투자, 공격적 마케팅'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럴 돈도 없었다. 미국 공장을 당장 재건하지는 못하지만 지역 독점권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해 뿔뿔이 흩어졌던 딜러들을 불러모아 판매망을 정비했다. 미국 지게차 시장 1등인 도요타와 정면 대결하지 않고 도요타가 생산하지 않는 틈새상품을 도요타에 공급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딜러들에겐 본사에 판매권을 빼앗기거나 통폐합될 걱정도 없게 해줬다. 딜러가 400명을 넘어서면서 클라크 브랜드는 회생에 성공했다. 지난 17일 미국 켄터키주 렉싱턴 클라크 본사에서 열린 '지게차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선 할아버지 때부터 70년 넘게 클라크 딜러를 해온 두 명이 상을 받았다. 백 회장이 그들과 포옹하는 장면은 구식 영화처럼 촌스러우면서도 묘한 감동을 일으켰다.
열 살 때 단신으로 월남해 초등학교 2년 반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크고 유연하다. "화려한 산업에서 대박을 터뜨리는 것만 창업인 양 부추기는 세태가 오히려 꿈을 꺾게 한다. 70억 세계시장에 도전할 방법은 많다." 백 회장은 "사양산업이라는 비누 공장도 해외로 가지고 나가면 성공할 방법이 반드시 있다"며 "그런 도전을 끝까지 돕겠다"고도 했다. 남을 누르지 않고도 사업에서 성공하는 길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김덕한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