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빚 졌던 50대, 이젠 억대 기부하죠
[IMF 20년, 해는 다시 뜬다] [3] 女心공략 횟집 대박낸 김경수씨
1996년 개업 직후 아버지 암 진단… 병수발에 IMF로 빚만 지고 폐업
"손님·아버지·경제 탓 하다보니 결국 내 탓 가장 크단걸 깨달아"
주경야독하며 6년간 창업 공부… 여수 산단서 주부 공략해 재기
세상 탓하는 사람들에 희망주려 여윳돈 생기자마자 기부 시작
2014년 부부 아너소사이어티에
전남 강진의 깡촌 출신인 김씨는 24세 때부터 13년간 서울과 부산, 광주광역시, 리비아 건설 현장 등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요리를 배웠다. 이렇게 돈을 모아 서른여섯이던 1996년 말 여수에 아귀찜 식당을 차렸다. "내 가게를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낮에는 아버지를 간병하고, 밤에만 식당 일을 봤다. 아귀찜 요리는 한 살 어린 아내에게 맡겼다. 요리에 전념하지 못하는 식당이 잘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
횟집‘자산어보’의 주인 김경수씨가 주방에서 활짝 웃고 있다. 33년 전 광주광역시에 있는 횟집 주방의 막내로 출발했던 그는 아귀찜 식당 운영에 실패했지만 한정식집 등 식당 요리사를 거치며 절치부심, 이젠 월 매출 1억원이 넘는 여수 유명 횟집의 대표로 재기했다. /김영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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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연 지 1년을 조금 넘긴 1998년 2월 김씨는 억대 빚을 지고 가게와 집을 팔았다. 가족이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친한 친구에게 500만원을 빌려서 겨우 임대 아파트에 들어갔다. 김씨는 "가장이란 사람이 500만원을 못 구해 가족을 길거리에 앉힐 뻔한 처지에 놓였을 때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고 말했다.
당장 생계를 위해 김씨는 한정식집 요리사로 취직했다. 아내도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나섰다. 김씨의 '세상 탓'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식당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다시 밑바닥 주방 일을 하자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정하게 발길을 끊은 단골손님 탓, 식당 일로 바쁜데 암에 걸린 아버지 탓, IMF 사태를 몰고온 정치인 탓. 매일 다른 대상을 찾아가며 원망했다.
반년쯤 세상 탓을 하니 더 이상 원망할 대상을 찾기 어렵게 됐다. 그제야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IMF에도 오히려 더 장사가 잘되는 식당도 있는데 본인 식당은 왜 망했는지, 부모님 건강을 평소에 왜 챙기지 못했는지, 상황이 어렵다고 단골손님 관리를 왜 허술히 했는지 반성하기 시작했다.
세상만 탓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김씨는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엔 거의 읽지 않았던 책을 집어들었다. 매달 월급날이면 서점으로 달려가 책 8권을 샀다. 외식업 마케팅 등 경영 서적과 자기계발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몸이 고단해도 새벽 3시까지 책을 붙잡고 연구했다.
이렇게 6년간 절치부심하며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의 각오로 창업을 준비했다. 식당 요리사로 일하며 여성 고객들의 취향을 분석했다. 남성이 아닌 여성 고객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산업단지가 몰려 있는 여수 지역에서 IMF 사태 이후 남자들의 회식은 줄어들고 집안 돈 관리를 하는 주부들의 계 모임이 많아지는 데 주목했다"고 말했다.
2004년 아내와 함께 모은 3000만원으로 횟집을 차렸다. 여성들이 한입에 먹기 좋게 작은 크기로 회를 썰고, 식감이 부드러운 숙성회를 내놓았다. 한정식집에서 여성들이 메인 요리보다 밑반찬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을 보고, 콘치즈 같은 밑반찬을 더 풍성하게 내놓는 데도 신경 썼다. 아파트 부녀회를 돌면서 홍보도 열심히 했다. 이렇게 하니 개업 1년 만에 월 매출이 7500만원을 넘었다고 한다.
횟집을 차린 지 3년 만에 가게 건물도 인수했다. 여윳돈이 생기기 시작하자 가장 처음 한 일은 기부였다. 예전의 자신처럼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비록 큰 액수는 아니지만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물 한 방울이라도 꾸준히 기부하자"고 마음먹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었다. 3년 만에 기부액 1억원을 돌파해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소사이어티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엔 아내 이름으로 같이 기부를 시작해 2014년 전남 최초의 아너소사이어티 부부 회원이 됐다.
김씨는 65세에 횟집을 물려주고 작은 국숫집을 차리는 게 목표다.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에게는 국수값으로 3000원을 받고, 어려운 분들에게는 500원만 받을 생각이라고 한다. "이익도 안 남기고 국수를 팔면 힘들지 않겠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딱 그 정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조금씩이라도 베풀며 살고 싶어요.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세상 참 잘 살았다며 웃으면서 눈감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수=표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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