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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⑴-(10) : 박준서 박사(연세대학교)

영국신사77 2016. 4. 12. 15:59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⑴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국민일보 2004-10-28 17:07]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 신학계의 태두인 박준서 박사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를 연재합니다. 

내주부터 매주 화요일 35면에서 

박 교수의 해박한 신학과 현장의 숨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1517년 늦가을. 

독일 엘베 강가의 조용한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의 아침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우유배달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사이 

검고 긴 사제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어디론가 분주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의 손에는 

둘둘 말린 큰 종이뭉치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투지와 긴장감이 배어났다.


젊은이가 도착한 곳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교회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채에 부속된 ‘성채교회’(Castle Church)였다.

그러나 그곳에 대학이 설립되면서부터 ‘대학교회’로 사용된 것이다.


육중한 대학교회 문앞에 멈춰선 젊은 사제는 

가지고 온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종이가 펼쳐지자, 

며칠 밤 관솔불 밑에서 밤이 늦도록 한 자씩 써내려간 촘촘한 글씨들이 드러났다.


그는 펼쳐진 큰 종이를 

대학교회의 문에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여놓았다.


성문 입구에 위치한 이 대학교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이었고

교회 출입문은 

대학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알리는 게시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부 독일의 매서운 추위가 밀어닥치기 직전 10월의 마지막 날,

대학교회 정문에 

장문의 게시문을 붙여놓은 젊은이는

그곳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던 34세의 소장학자 마르틴 루터 교수였다.


그는 24세에 가톨릭교회 신부로 서품 받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당시 신설대학이었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젊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대학 사회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정성스럽게 기록하여

대학교회의 문에 붙여놓은 게시물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 신부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밝히려는 소망으로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성명서에 관해서 대학 안에서 토론하고자 합니다.

 토론 장소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문서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당시의 현안에 대해서 

대학내에서 학문적으로 공개 토론하자는 초청의 글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제기한 공개 토론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황의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던 ‘면죄부’에 관한 것이었다.


돈을 주고 사는 면죄부가 

정말 인간의 죄와 이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면제해줄 수 있는가?

또한 가톨릭교회 교황은 

참으로 면죄권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95개 조항에 이르는 장문을 통해서 

그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95개 조항’에 나타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제1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의 삶은 

        항상 참회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제2조, 참회란 교회에서 성직자가 집전하는 

        ‘참회의 종교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21조, 교황의 이름으로 된 면죄부를 사면

        죄의 형벌을 면죄 받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제27조, 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찰랑 소리 내며 떨어질 때

        ‘연옥’에 있던 영혼이 연옥 밖으로 뛰어나온다고 설교하는 것은 

          허황된 거짓말이다.


제28조, 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찰랑 소리내며 떨어질 때

        (교회의) 돈에 대한 탐욕만 늘어난다.

(27조, 28조는 

당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즐겨쓰던 말을

루터가 인용하면서 반박한 것이다.)


제45조,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86조, 엄청난 부를 소유한 교황은

         (면죄부를 팔아) 가난한 크리스천의 돈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해야할 것이 아닌가.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95조, 크리스천은 많은 고난을 거쳐 천국에 가는 것이지

        (면죄부를 샀다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장장 95개 항목에 이르는 긴 글을 통해서

교황의 면죄권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 

단호히 ‘아니오’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가 대학 안에서 공개 토론을 위해서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 95개 조항을 대학교회 문에 게시했을 때,

그것이 몰고올 해일과도 같은 역사의 새 물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교회개혁이라는 역사의 대변혁에서

자신이 주역을 감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95개 조항’은 

당시 가톨릭교회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각변동의 진원이 되었고,

1517년 10월31일은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박준서 박사(연세대학교)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⑵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성장
[국민일보 2004-11-01 15:42]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아니면 영웅이 새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역사논쟁의 화두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오만방자한 자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시대에 따라 역사의 주역을 감당할 인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믿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인 모세 다윗 바울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쓰신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16세기초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역사의 주역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2000년 교회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가 바로 교회 개혁의 주역 ‘마르틴 루터’였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10일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더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가문이었다. 

본래의 성은 루더(Luder)였으나, 

후일 마르틴 루터는 ‘루터’(Luther)라고 바꾸었다.

그의 어머니 ‘마가레타’는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고생 없이 자라났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와 결혼한 그는 

결혼 초기에 많은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루터가 태어난 바로 그 다음날 

그는 ‘성 베드로 바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11월11일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마르틴’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당시 독일 농민사회에는 특이한 상속제도가 있었다. 

농지가 장자에게 상속되는 게 아니라 

막내아들에게 상속되는 제도였다. 

 농지를 상속 받지 못한 형제들은 

막내동생 밑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든지, 전업을 하든지 해야 했다. 


루터의 아버지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루터가 태어난 다음해 한스 루더는 

식구를 데리고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만스펠트’로 이사했다. 

광산촌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근면했을 뿐만 아니라 

유별나게 사회적 신분 상승의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내력과 의지력으로 힘든 광산 생활을 이겨냈고 

노력의 결과 차츰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마침내 한스 루더는 구리 광산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고 

시의회 의원까지 되었다. 

맨주먹으로 광산일을 시작한 그로서는 

큰 성공이었고 대단한 신분상승이었다.


그래서 한스 루더가 아들에게 건 기대는 남달랐다. 

아들만은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고 

법률가와 같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집념이 강했던 아버지는 루터가 네살 반이 되었을 때 

어린 아들을 ‘라틴어 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라틴어는 

대학과 상류사회에서 통용되는 필수적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라틴어 학교에서 어린 루터가 9년 동안 지냈던 시기는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다. 

학교 규율이 엄해서 항상 체벌이 행해졌고 

라틴어의 ‘암기와 매질’이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후일 루터는 이 시기를 ‘지옥’과도 같은 날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시작한 라틴어 공부는 

훗날 그가 위대한 신학자이며 교회 개혁가가 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루터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이젠나흐’에 있는 명문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곳은 루터의 어머니쪽 친척들이 살고 있는 도시여서 

루터에게는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명문가 ‘코타’가정에서 생활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껏 부르며 행복한 4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가 18세 때 루터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루터가 당시 독일에서 최고 명문으로 손꼽히던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그의 라틴어 실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입학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에르푸르트대학에서 4년만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그의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법률 공부를 시작한지 두달만에 

루터 아버지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루터가 돌연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박준서교수 <연세대 교수·구약학>




박준서 교수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⑶ 폭풍속의 서원,교회사 새장을 열다
[국민일보 2004-11-08 15:21]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그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신다. 

기도하는 조용한 골방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그의 뜻을 전하시기도 한다.


1505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중부 독일의 7월 어느 날.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가 연방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명문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이 젊은이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에르푸르트에 가까웠졌을 때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는 더욱 험악해지고 순식간에 어둠의 땅이 되어버렸다. 

천둥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번쩍이는 칼날과 같은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사방으로 내려꽂혔다. 

공포에 질린 청년은 고꾸라질 듯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긴박한 절규가 튀어나왔다. 

“성 안나여! 도와주소서.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혼비백산한 청년의 입에서 황망 중에 터져나온 서원이었다. 

“수도사가 되겠다”가 되겠다는 한 마디 서원의 말이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을 활짝 여는 시발점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길위에서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은 

1505년 7월2일 에르푸르트(Erfurt) 근교에서 

폭풍 가운데서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그가 바로 에르푸르트대학의 젊은 법학도 마르틴 루터였다.


이 일로부터 꼭 2주 후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명문대학에서 법학공부를 접고 

서원한 대로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루터 아버지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자기가 겪었던 험난한 고생길을 아들만은 걷지 않게 하기 위해 

아들 교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고 루터가 법률공부를 시작했을 때 

당시 상당한 고가품이었던 법률전서 한 질을 사줄 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법률공부를 시작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루터는 이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했던 삶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은 루터에게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루터가 그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을 당시 

에르푸르트에는 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로 널리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단’에 속한 수도원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13세기에 일단의 수도사들이 모여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의 수도원은 상당히 번성했고 

루터 당시에는 유럽 전역에 이 수도단에 속한 수도원이 수십 개에 달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수도원에서 몇년 동안 생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접하게 되었다. 

후일 루터 신학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 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뒤, 그의 나이 24세가 되었을 때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가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는다. 

신부로 서품 받자 수도원장은 

그를 에르푸르트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루터에게 정식으로 높은 수준의 신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수도사로 입문한지 불과 2년만에 신부로 서품 받는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고, 

신부로 서품 받자마자 명문대학 신학부에서 신학 수업을 받게 한 일도 특별한 배려였다.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앞으로 루터가 

 수도원과 가톨릭교회를 위해 크게 일할 훌륭한 재목으로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에르푸르트는 독일 튀링겐주의 주도로서 번성하는 도시이다. 

루터가 공부했던 에르푸르트대학은 

오늘도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독일의 명문대학으로 건재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가 입문했던 수도원도 잘 보존되어 있고, 

수도원 시절 루터가 기도하고 고행하며 명상하던 작은 방도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루터가 신부로 서품 받았던 대성당도 

루터 당시의 웅장한 모습 그대로 우뚝 서 있어 

 도시 전체가 젊은 날의 루터의 체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박준서 박사(연세대학교)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⑷ 십자군과 면죄부
[국민일보 2004-11-15 15:35]


1517년 초엽 중부 독일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수도사 ‘테첼’(Tetzel)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였다. 특유의 언변으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귀를 열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낳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재산까지 남겨주었건만 너희는 우리를 이 고통받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꽃 속에 우리를 그대로 놔둘 셈이냐?’ 여러분은 고통 받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릅니다.”


절절히 가슴을 파고드는 테첼의 웅변에 돌아가신 부모형제를 생각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주머니를 들고 테젤이 팔고 있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는 아직 종이화폐가 보급되기 전이라 주화를 사용하던 때였고, 면죄부 구매에 돈이 너무 몰려 판매대 한쪽에서 주화를 찍어내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면죄부’가 무엇이었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그토록 현혹되었을까?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던 교리 가운데 ‘연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구원 받아 천국 가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떨어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연옥의 뜨거운 불꽃 속에서 죄값을 치른 후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사람이 구원 받고 천국에 가려면 생존시 쌓아놓은 ‘공적’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즉 천국에 가려면 쌓은 공적이 합격선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은 죄는 각자의 책임이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한 행실이나 믿음으로 쌓은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에 따라서는 넘쳐나도록 많은 공적을 쌓은 사람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순교자와 또한 성인(Saint)의 칭호를 받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여기서 중요한 교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그들의 차고 넘치는 공적 즉, ‘잉여공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옥에서 죄값을 치르며 고생하는 영혼이 ‘잉여공적’을 나누어 받으면 남아 있는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잉여공적’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권한인가? 그것은 바로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한이라는 것이었다. 교황이 갖고 있는 이 권한은 죽은 자나 산 자를 ‘죄의 징벌’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천국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실로 막강한 권한이었다. 이것이 곧 교황의 ‘면죄권’이었다.


기독교회 역사를 보면 교황이 ‘면죄권’을 대대적으로 행사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11세기말 십자군전쟁 때였다. 서기 7세기 중엽 당시 신흥종교였던 이슬람교를 따르는 아랍인들이 성지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그후 그들이 줄곧 성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기독교의 성지 탈환’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1099년). 그는 십자군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거나 살아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면제해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십자군전쟁 때도 전쟁이 한창 진행되면서 엄청난 전비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돈 많은 거상이나 귀족들은 십자군전쟁을 위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전비에 쪼들리던 교황은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고 돈만 내놓는 사람들도 면죄해줬다. 교황의 면죄권이 돈과 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잠잠해졌던 교황의 면죄권은 1500년대 들어서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모습으로 또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언변이 좋은 수도사 테첼이 열을 올리며 판매하던 ‘면죄부’였다.


                                                          박준서 교수(연세대학교)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⑸]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 판매
[국민일보 2004-11-22 15:49]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성경을 읽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 옳지 않으면 칭찬 받지 못한다. 좋은 목적이 잘못된 수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교회의 일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2000년에 걸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는 일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권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 교황이었다. 한편 그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고 예술을 깊이 사랑한 교황이었다. 그는 당대 예술 거장들을 육성했고 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오늘도 예술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라파엘의 바티칸 벽을 가득 채운 벽화들은 모두 그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큰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꿈이었다. 그는 1506년 로마에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설계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Bramante)에게 맡겼다. 워낙 방대한 구상이었기 때문에 율리오 교황은 건축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세상을 떠났다(1513년).


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그는 늘어나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전가의 보도와 같은 교황의 면죄권을 사용하기로 했고, 결국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를 증명하는 증서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면죄부였다. 목적은 좋았으나 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독일의 중부지역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는 대학이 신설되었고(1502년), 그 대학에는 젊은 성서학자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수도단에 속한 수도사이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수도원 시절부터 인간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깊이 사색하며 기도했다. 때로는 금식과 고행도 하며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며 씨름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루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힘쓰고 노력해서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너무도 보잘것 없고 미미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은 원죄(原罪)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인간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인간의 죄성(罪性)으로 오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밤낮으로 고민하던 루터에게 성경말씀 한 구절이 마치 하늘의 계시처럼 들려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이 한 마디 말씀에서 루터는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해답을 얻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며, 인간의 구원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감겼던 눈이 떠지며 밝은 빛을 보듯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신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은총의 순간이었다.


구원의 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이 어떻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성서의 진리에 전혀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당시 유럽에는 신학자와 신분이 높은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면죄부 판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와 이를 매매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인 일인지를 진정 교회를 위한 충정의 마음으로 또박또박 적어내려 갔다. 모두 95개 조항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는 먼저 이 문제를 주제로 대학내에서 공개토론을 하고 싶었다. 1517년 10월31일 루터는 공개토론을 제안하는 글과 함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95개 조항을 대학교회문에 게시했다. 루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교회개혁이라는 역사의 새로운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박준서 교수 (연세대학교)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⑹ 루터와 카톨릭의 교회의 대결
[국민일보 2004-11-29 15:49]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2)


구약성경 전도서의 말씀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때를 정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의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시기도 한다.


가정해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시대보다 

100년전에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책과 기록은 손으로 필사되었다. 

필사본 시절 새로운 지식의 확산이나 정보의 전달은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 한정되었고 

그 전달 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변혁을 가져온 것이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1400년대 중엽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납으로 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기름 잉크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그가 개발한 인쇄기로 처음 인쇄해낸 책은 라틴어 성경이었다. 

이로부터 5년 동안 만들어진 성경은 과거 1000년 동안 필사된 성경보다 많았다.


1500년대에 들어서자 인쇄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었고 

유럽의 대도시에는 인쇄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쇄술은 보편화되었다. 

이로써 지식과 정보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를 기다려 마르틴 루터를 들어쓰셨다.


1517년 10월 마지막 날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했을 때 

즉각 독일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독일 주요 도시의 인쇄소들은 앞을 다투어 ‘95개 조항’을 인쇄했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95개 조항’이 확산되자 루터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면죄부 판매는 급감했다. 

신설 대학의 무명의 젊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일약 화제의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루터의 주장은 조용한 대학도시에서 일어났던 

‘작은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95개 조항’에 대해 로마교황청의 초기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교황청은 젊은 신학 교수의 혈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95개 조항의 내용이 알려지고 독일에서 루터의 지지자들이 늘어나면서 

면죄부 판매가 급감하자 교황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 신분을 갖고 있던 루터에게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루터의 로마행은 위험한 것이었다.


이때 루터와 교황청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이었다. 

독일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던 그는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교황청에도 영향력이 컸던 당대의 거물이었다.


그는 그의 영지 안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교수를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중재로 루터는 로마로 가지 않고 

독일에서 교황이 보낸 인물에게 그의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교황청에서 지명한 인물은 당시 손꼽히는 신학자였던 추기경 카예타누스였다. 


면죄부에 대해 신학 논쟁을 고대하던 루터는 

그와의 만남이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루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서 

추기경 앞에 섰다(1518년 10월).


그러나 진지한 신학적 토론을 기대했던 예상과는 달리 

추기경은 일방적으로 루터를 혹독하게 견책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의 입장은 확고했다. 

추기경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루터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교황청은 

이번에는 신학 논쟁의 달인으로 이름난 신학자 에크를 루터와 만나게 했다. 

에크라면 젊은 신학 교수 루터를 충분히 제압하리라고 믿은 것이다. 


루터와 에크의 만남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졌다. 

이 논쟁에서도 루터는 종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성역이었던 

교황권과 종교회의의 최고 권위까지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로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로서 남은 길은 루터를 ‘파문’하는 것뿐이었다.


                                               박준서 교수(연세대학교)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⑺ 위기 속에서 피어난 루터 신학의 꽃
[국민일보 2004-12-13 15:28]



1520년 6월 중순 로마교황청은 마르틴 루터에게 교황의 교서를 내려보냈다. 그 내용은 루터가 그동안 발표한 ‘이단적’인 모든 책과 글들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60일 이내에 그의 ‘잘못된’ 주장들을 철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루터가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파문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도 첨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교회의 파문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 바울의 진노를 면치 못하리라.”


이보다 꼭 1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신학논쟁에서 

루터는 면죄부 판매나 교황권에 대해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제 교황청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루터를 파문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당시 파문은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교서가 루터를 침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청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루터는 

전혀 흔들림 없이 그다운 방법으로 대응했다. 

밤을 새워가며 장문의 논문 3편을 작성한 것이다. 


그는 먼저 ‘독일국가 귀족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썼다. 

뒤이어 ‘교회의 바벨론 포로’ ‘크리스천의 자유’를 연속해서 집필했다. 

루터의 글들은 곧장 인쇄소로 전달되었고 

독일의 인쇄소들은 밤낮없이 이들을 찍어냈다.


파문의 위협 앞에서 루터가 집필한 3편의 논문은 

그가 쓴 수많은 글 중에서 단연 백미로 꼽힌다. 

루터는 63년의 생애를 통해서 초인적이라고 할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오늘날 독일 비텐베르크에는 ‘루터의 집’라고 명명된 역사적 건물이 잘 보존돼 있다. 루터가 그의 생애의 절반이 넘는 3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단’에 속하는 수도원이었다. 

루터가 당시 새로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 그는 이 수도단에 속한 수도사의 신분이었다. 자연히 그는 이 수도원을 거처로 삼게 되었고 그후 평생 그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루터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이 건물은 오늘날에는 ‘마르틴 루터 기념박물관’으로 전환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루터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모두 수집해놓아 루터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곳에 진열된 소장품들은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 특별히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루터가 평생 집필한 글들을 집대성해 놓은 ‘루터 전집’이다. 

거의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범인들로서는 평생을 걸려 읽기에도 어려운 엄청난 양이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루터의 글들 중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그것은 1520년 후반 루터가 파문될 위기의 시간에 

밤을 지새며 집필했던 3편의 논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논문은 루터 신학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모든 개신교회 신학의 토대와 초석이 됐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루터의 신학을 대표하는 3편의 논문의 핵심요지는 무엇인가?

먼저 ‘독일 국가 귀족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보자. 

이 글에서 루터는 교회 안에 세워진 장벽들이 무너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구약시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듯이 

교회 안의 장벽도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너져야 할 장벽 중에 두 가지만 열거하면, 

첫째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장벽이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세례 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농부든 상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교황이나 사제들과 똑같이 

제사장의 신분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다만 직임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만인제사장’ 신학이다.


다음으로 무너져야 할 장벽은 

로마 교황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장벽이다.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교황은 신앙과 교리 문제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성역 중의 성역이었던 교황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또한 루터는 이 글에서 

교회는 많은 재물을 소유할 필요가 없고, 

헌금의 종류도 줄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인 일에 

더욱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가 이 글을 쓸 때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것을 각오했다. 

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화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성경 말씀의 진리 안에서 

그는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없는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나 있었다.


                                             박준서 <연세대교수·신학박사>




[종교개혁, 그 발자취를 따라] ⑻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국민일보 2004-12-20 15:14]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황제가 세운 대학이었고 따라서 ‘카를 대학’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얀 후스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약관 29세에 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후스는 그만큼 인정 받았던 출중한 학자였다. 그가 37세가 되었을 때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학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후스 생애의 큰 전환점은 그가 존 위클리프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던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점,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종교개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후스는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글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후스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위클리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후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죽음을 두려워말고,진리를 사수하라.”


그에게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마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414년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다. 후스는 이 종교회의에 참석, 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개혁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 황제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그는 콘스탄츠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즉시 체포돼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였고 ‘이단자’에게는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1415년 7월 당시 로마교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고 하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후스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였다. 그런데 후스의 최후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화형대에서 뜨거운 불길이 후스의 몸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이제 ‘거위’와 같이 불에 타 죽지만 앞으로 

 ‘백조’와 같은 인물이 내 뒤를 이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전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백조’를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⑼ 가톨릭 교회를 향한 루터의 결별 선언과 파문

[2004.12.27, 15:26]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고 역사의 방향도 새롭게 전개될 수 있다.


 

1520년(37세)은 마르틴 루터에게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에게 교서를 보내서 60일 이내에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였던 루터에게 베푸는 마지막 ‘관용의 기회’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문뿐이었다. 파문은 그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이단자에게는 화형의 형벌도 불사했다.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루터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의외로 담담했고 담대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강한 성(城)’이요 ‘방패와 병기’가 되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었다. 

루터는 그 위기의 시간을,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고 재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 

 

펜을 잡은 그의 손은 밤낮없이 분주히 움직였고 

진주와도 같이 빛나는 글들이 속속 집필되었다.

 

그해 1520년 

8월에는‘독일국가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장’, 

9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11월에는 ‘크리스천의 자유’가 쓰여졌고, 

그의 친필원고는 곧장 인쇄소로 옮겨져 출판되었다.

이 3편의 논문은 

위기 속에서 피어난 루터 신학의 꽃이었다.

 

첫번째 논문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12월14일자).

두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살펴보자. 

논문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참된 교회’도, 

당시 가톨릭 교회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과 

당시 교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일곱 가지 성례전(聖禮典) 가운데, 

오직 두 가지만이 진정한 성례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이 두 가지만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다른 것은 성례전으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임종 때 성유(聖油)를 발라주는 ‘종부성사’,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 

결혼예식이 되는 ‘혼배성사’들은 

성례전(sacrament)이 될 수 없다고 제거한 것이다. 

 

루터의 주장이 당시 가톨릭 교회에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행해져 내려온 

종교의식과 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터 신학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은, 

세번째 논문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루터 자신도 이 글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수많은 명구(名句)들을 쏟아냈다.

 
 “크리스천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다.
  동시에 크리스천은 누구에게나 예속되는 완전한 종이다.”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짧은 명구에서 
루터는 크리스천 삶의 두 가지 차원을 잘 요약하고 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진리 안에서, 
세상의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러나 봉사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의 전형을 찾았다.
 
루터가 당시 중세교회의 교황을 공격한 것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교황이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왕들도 그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는 
높고 높은 존재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루터는 이 논문에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선행의 공적이 쌓여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요 은총이며, 
인간이 공적을 쌓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라고 했다.

또한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존재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크리스천들은 
선행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3편의 논문은, 
당시 가톨릭 교회를 향한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 결별 선언이었다. 
그는 그 선언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해 12월 비텐베르크 대학 문앞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그에게 보낸 ‘교황교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라버렸다.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반응은 단호했고 신속했다. 
루터가 교황교서를 불태운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1521년 1월3일, 
교황청이 보낸 파문장이 루터에게 날아들었다. 
사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으로 접어든 것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⑽ 독일 황제앞에 선 마르틴 루터

[2005.01.10, 17:16]


1521년(38세) 신년초,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편 이때를 전후해서 독일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19년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가 

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가 독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도 할 줄 몰랐고, 

독일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의 황제가 되자 보름스(Worms)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독일의 내부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고, 

특히 당시 팽창일로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책 마련 등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521년 1월말 황제의 도시 보름스에서 제국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카를 5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논란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그것은 “루터 문제”였다. 

로마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독일 황제에게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법자’로 선언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종교법으로는 ‘파문’하고, 

세속의 법으로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범죄자’로 낙인 찍어, 

마르틴 루터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독일 내부 사정에 어두웠던 카를 5세는 

‘루터 문제’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황제는 교황청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것으로 루터 문제를 일단락지으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제국의회에 참석한 제후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확고하게 루터를 두둔했다. 

루터에게 자기 주장을 밝힐 소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를 범법자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황제로 선출될 때 프리드리히 선제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의회에 출석하여 

그의 입장을 밝히라는 서한을 보내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루터의 친구들은 모두 보름스로 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들은 꼭 100년전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보헤미아(현 체코)의 얀 후스(Jan Hus)가 끝내 화형당했던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보름스에서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를 아끼는 친지들이 그를 만류할 때 루터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힘차게 진실을 외칠 때입니다.”

루터는 이미 골리앗 앞에 홀로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그를 지지하고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독일인이 있었다. 

교황청에서 파송한 교황청 특사까지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독일인들의 90%는 루터의 이름을 외치며 루터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10%는 ‘로마 교황청 부숴버리라’라고 외칩니다.”

독일 국민이 루터의 지지자가 된 데에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인쇄술의 발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인쇄소들이 앞다투어 루터의 글들을 인쇄해냈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살았던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에는 

인쇄소가 무려 30곳이나 있어서, 루터의 글을 경쟁적으로 인쇄했다고 한다. 

루터의 사상과 주장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루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521년 4월초, 루터는 보름스를 향해 출발했다. 

루터가 도시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루터를 격려해주었다. 

특히 에르푸르트를 지날 때는 그곳 대학의 총장을 비롯, 교수들이 모두 나와 

그 대학이 배출한 자랑스런 졸업생 마르틴 루터를 

열렬히 환영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해주었다.

비텐베르크를 떠난 지 꼭 2주만에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했다. 

그는 보름스성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환영의 나팔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입성했다.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마치 개선장군처럼 루터를 맞이했다.

루터는 친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름스 입성에 관해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 날은 제게는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곧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던 일을 상기시킨 것이다.

루터가 보름스에 도착한지 바로 다음날인 4월17일 오후 4시, 

그는 독일 황제가 주재하는 제국의회장으로 안내되었다. 

루터도 장엄한 어전회의의 광경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가 황제 앞에 섰을 때, 

심문관은 토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짤막한 두 가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