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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2) [11~20] : 박준서 박사(연세대학교)

영국신사77 2016. 4. 12. 16:18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⑾ '보름스의 황제칙령’과 마르틴 루터

                                             2005.01.17.  국민일보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아멘!”

1521년 4월17일(38세). 이날은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 오후 4시 루터는 보름스에서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독일 황제 앞에 서게 됐다.

그는 21세의 젊은이였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위에 오른 카를 5세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독일의 선제후들과 여러 지역의 제후들, 
교황청 특사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이 의관을 갖추고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세속의 권세와 종교적 권위가 회의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루터가 비록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신설 비텐베르크 대학의 소장 학자이며, 
교회의 신분으로는 사제요, 수도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과,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제국회의장으로 안내돼 들어갔을 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책상 위에 진열된 책들이었다. 
모두 그에게는 익숙한, 자신이 쓴 저서들이었다. 

심문관은 책상 위의 책들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이들 책들은 당신이 쓴 것인가?”  

낮은 목소리로 루터가 대답했다. 

“이 책들은 모두가 본인이 쓴 것입니다.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심문관의 두번째 날카로운 질문이 루터에게 날아왔다. 

“당신이 쓴 글들 중에서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회의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면서, 모든 시선이 루터에게로 집중되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루터가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순간 회의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루터가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루터가 그의 주장을 취소하고 무릎을 꿇으려는 것인가? 

황제는 루터의 요청을 수락했다. 
황제를 대신해서 심문관이 큰 소리로 루터에게 통보했다. 

“황제께서는 은총을 베푸사 내일까지 시간을 주시기로 허락하셨다.”

루터가 왜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을까? 
루터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흔들렸을까?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온 루터는 그날 밤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한, 
 나는 내가 쓴 글의 한 줄도, 
 아니 한 글자도 취소하지 않으리라.” 

다음날 4월18일 늦은 오후 
루터는 다시 황제 앞에 서게 되었다. 

심문관은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당신이 쓴 글 중에서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루터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 쓴 글들은, 모두 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크게 세 종류의 글들입니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고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과 크리스천의 삶에 관한 글들입니다. 
 본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합니다. 
  이 글들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루터의 말은 계속되었다. 
“두번째는 교황과 교황추종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한 글들입니다.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순간 황제의 입에서는 ‘노’(No)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번째는 개인을 공격한 글들입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한 점도 있었지만,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때 심문관이 루터의 말을 끊었다. 

“간단히 대답하라!
 당신이 저술한 책들과 그 안에 있는 잘못된 점들을 취소하겠는가? 못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루터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루터의 많은 말 중에서 
가장 루터다운 명언으로 꼽힌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저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요, 또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루터의 말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의 말은 제국회의장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황제도 이제는 로마교황청의 압력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다. 

황제는 교황청 특사가 작성한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보름스의 황제 칙령’이었다.

“루터는 이단자로 정죄 받은 자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불살라 없애야 한다. 

 누구도 그를 보호해서는 안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루터와 같이 이단자로 정죄 받을 것이다.”

루터는 서둘러 보름스를 떠났다.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소문이 독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도중, 

깊은 산속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가 비밀리에 살해되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루터의 생사를 알 수 없이 흉흉한 소문만 무성해져 갔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⑿ 마르틴 루터의 ‘밧모섬’ 시절

 



루터의 행방과 생사가 불확실해 뒤숭숭할 때, 

비텐베르크의 루터 친지들은 정체불명의 서신을 받아보게 된다. 

극비로 전달된 서신을 받아본 친지들은 깜짝 놀랐다. 

루터의 친필 편지였다. 

발신지는 ‘나의 밧모섬으로부터’로 되어 있었다. 

밧모섬이란 신약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유배되었던 섬이다. 

루터는 있는 곳을 숨기고 함축적으로 밧모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루터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루터의 친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마음놓고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521년 4월, 독일 남부 보름스에서 열렸던 어전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황제의 칙령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제부터 루터의 생명을 빼앗는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루터에게는 생사가 달린 위기의 시간이었다.

황급히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마차를 달려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강행군으로 말을 몰아 아이젠나흐 마을 가까이 오게 되었다. 

이 마을은 루터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4년 동안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던 곳이었다. 

루터가 후일 여러 번 회고했던 대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무장 괴한들이 루터의 마차를 에워쌌다. 

마차에서 루터를 끌어내린 괴한들은 루터의 눈을 가리고 말에 태워 숲속으로 사라졌다. 

숲속으로 이리저리 끌고다니던 괴한들은 

자정이 다 되어 산 정상에 세워진 성채의 성문 앞에 다다랐다. 

밖에서 신호를 보내자 육중한 성문은 소리없이 열리고 

일행은 성채 안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갔다. 

이 성채는 아이젠나흐 마을 근처 산 정상에 세워진 

바르트부르크 성이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루터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고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선언한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신임하는 부하들을 시켜 납치극을 꾸민 것이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도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루터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보호자요,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 납치극은 그로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루터를 보호해주어서는 안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반드시 돕는 자를 보내주시고 피할 길도 열어주신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을 전한 죄로 지하감옥으로 던져졌을 때도 

하나님은 구스인 환관을 보내어 그를 구출해주셨고, 

엘리야 선지자가 배고파 쓰러지자 까마귀를 동원해서 먹을 것을 갖다주셨다.

 ‘육체의 가시’로 고생하던 사도 바울에게는 

의원 누가를 보내주셔서 그를 돌보게 하셨다. 

위기에 처한 루터에게 하나님은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보내주셨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셨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루터에게 안성맞춤의 피신처가 되었다. 

이 성은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더구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영지에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루터가 이 성안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하고 이름도 가명을 썼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위기의 시간일수록 더욱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그가 성에서 숨어 지낸 기간은 10개월 남짓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는 12편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업적은 

이 기간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루터 당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닫혀진 책’이었다. 

루터 자신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성경을 한번도 읽어본 일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모든 세례 받은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만인 제사장’을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렇게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이 읽을 수 있는 ‘열려진 책’으로 만들어 준 것은, 

루터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이다.

독일 사람들이 누구나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독일어 성경이 필요했다. 

루터는 피신 생활 기간을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번역작업에 집중, 

불과 12주만에 신약성경 번역 초역을 끝냈다.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문체로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루터성경’ 번역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⒀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향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주장했던 교회개혁은 신학적 이론 단계였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개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루터보다 몇 년 앞서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했고, 

루터가 교회개혁의 주장했을 때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의 주동자로 나선 카를슈타트는, 먼저 복장부터 바꿨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 신분이었던 그는, 

사제 복장을 벗어던지고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또한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 

뿐만 아니라 마흔 살이 넘은 사제였던 그는, 

15세 남짓한 어린 신부와 결혼했다. 

그의 일련의 행동들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결혼을 계기로, 사제들의 독신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 결과 비텐베르크에서는 결혼하는 사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들까지도 결혼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런 현상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가장 가시적인 교회개혁은 예배의식의 변화였다. 

특히 ‘성찬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교인에게 두 가지 준비를 요구했다. 

첫째는 금식이었고, 둘째는 죄를 사제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받는 ‘고해성사’였다. 

이 두 가지를 준비한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된 예배의식에서는 이를 폐지했다. 

또 종래의 성찬식에서는 일반 교인은 떡만 받을 수 있었고 포도주는 받을 수 없었다. 

포도주는 사제들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성찬예식에서는 모든 예배자에게 떡과 포도주가 허락되었다.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던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뀌었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들도 사제복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었다. 

이것이 지나쳐 깃털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까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개혁운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회의 성모상을 비롯해서 성상(聖像)들을 부숴버리는 성상 파괴운동이 뒤따른 것이다. 

교회 안에 걸려있던 성화(聖畵)도 모두 철거되었고, 

십자가도 우상숭배라고 제거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더욱 과격하고 극단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유럽 각지에서 비텐베르크에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예언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 받은 대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로인해 혼란은 가중되었다. 

과격하게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가서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고,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에 동조하지 않는 사제들에게 폭력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급진적 개혁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균형감각을 갖춘 지도자가 없이 진행된 교회개혁운동은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조용했던 대학도시 비텐베르크는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텐베르크 시의회는 피신중인 루터에게 긴급히 공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하루빨리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개혁운동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된다면, 

그가 주장한 개혁운동은 출발 단계에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서는 더 이상 은둔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1522년 3월초, 루터는 

10개월 동안의 밧모섬 피신생활을 정리하고 비텐베르크로 떠났다.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한 독일 황제의 칙령이 

아직도 유효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신학박사>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⒁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마르틴 루터



10개월 동안의 도피생활을 마감한 마르틴 루터는 
긴 수염과 기사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비텐베르크에 무사히 돌아왔다. 
루터는 그가 없는 동안 너무도 크게 변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기거하던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거의 빈 건물로 변해 있었다. 
성상(聖像)파괴운동으로 교회 안의 성상들은 모두 파괴됐다. 
심지어 ‘피에타’ 석상도 목 부분이 잘려나가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깊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다. 대표적인 것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급진 개혁파와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혼란 상태였다. 루터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급진 개혁파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루터에게 더 힘든 상대는 급격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과격파들이었다. 그들은 과거 루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교회개혁은 바로 루터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떻게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혼란 없이 교회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루터의 고민이요 과제였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즉시 교회 강단에 서서 신념에 찬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루터 특유의 웅변적 설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가톨릭 교회는 금식을 강요했고, 
 성만찬 때 떡만 받으라고 강요했고, 
 고해성사를 강요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듣는 사람들을 향해 루터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도시의 시민들은 
 개혁의 이름으로 또 다시 모든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동안 교회가 강요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루터가 돌아옴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급진개혁파들은 
루터의 설교를 듣고 크게 실망했다. 루터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시작으로 해서 
루터는 거의 매일 강단 설교를 통해 교회개혁의 질서 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교회개혁의 방법으로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외쳤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그러나 폭력은 절대로 안됩니다.”

둘째로 루터가 강조한 것은 교회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적어도 3년간의 연구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루터의 설교는 계속된다. 

“그런데 신학이나 성경을 깊이 알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급격한 개혁의 변화를 따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루터는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루터는 당시 중세교회에서 행해졌던 ‘성상숭배’를 누구보다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로 몰려가 성상을 때려부수는 성상파괴자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리석게도 태양, 달, 별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태양 달 별들을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급진개혁의 기수였던 카를 슈타트는, 
루터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상처를 받았다. 
결국 그는 비텐베르크를 떠났고, 그의 뒤를 따라 과격 개혁파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루터로서는 자기를 지지해준 사람들이었지만,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위해 
그들과의 가슴 아픈 결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비텐베르크는 질서를 회복했고, 
모든 시민은 루터가 이끄는 교회개혁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어느 개혁운동이든지 그것을 이끄는 지도자가 중요한 것이다.

루터의 지도력으로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교회개혁의 분위기는 독일 전역과 인접한 스위스, 동유럽 등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제는 독일 안에서 누구도 쉽게 손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루터는, 교회개혁운동과 함께 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저술활동 등으로 분주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예상치 않았던 시련의 폭풍이 루터에게 몰아닥쳤다. 1524년(41세) 남부 독일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부 농민들이 항거의 횃불을 들자, 이는 단기간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그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에 힘을 얻어 기득권 세력에 항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당연히 약자인 농민편에 서서 봉기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루터는 밤새워 기도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⒂ 루터와 독일 농민봉기운동①/1524년

 



1524년은 마르틴 루터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가 주도하던 교회개혁운동이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남부 독일에서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이 뭉쳐서 귀족 영주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항거의 깃발이 오르자 오랫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은 속속 이들의 대열에 가담했고 곧장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이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농민봉기·농민항쟁·농민반란·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1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럽 역사에서는 민중이 주동이 된 사회변혁 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이 농민운동은 종교개혁의 방향과 전개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농민운동도 원인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그들의 요구사항도 지역에 따라서 다양했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구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이었다. 과중한 세금을 경감하고 ‘망자세’(亡者稅)를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망자세’를 내야 했고, 이 세금은 그러잖아도 사정이 어려운 과부나 고아들을 더욱 빈곤하게 했다. 또한 산에서 나무를 벨 수 있는 벌목권, 사냥할 수 있는 수렵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어획권을 요구했고 농노제도의 철폐 등을 주장했다. 그런데 농민들의 요구 사항 중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교회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에 각기 자체적으로 성직자를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루터가 주장해온 교회개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사실 독일 농민들의 불만은 오랫동안 누적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만을 봉기로 점화시킨 것은 농민들의 변화된 의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의식화된 농민들이 결속해서 일으킨 것이 독일 농민운동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일 농민들을 의식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유명한 ‘만인 제사장’을 주장할 때 언제나 농민들을 예로 들었다. 그는 성직(聖職)과 속직(俗職)의 구분을 부정했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나 밭을 가는 농부나 모두 같다고 설파했다.

 

루터의 말을 들었을 때 독일 농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들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루터가 이끄는 교회개혁을 통해, 신성불가침 존재로 철옹성과도 같았던 당시 가톨릭 교회가 개혁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교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제도도 변혁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이렇게 의식화된 농민들은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따랐고 루터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자임하고 나선 사람은 마르틴 루터가 아니라 의외의 인물인 토마스 뮌처였다. 뮌처는 당대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 수학하던 시절(1518년) 루터의 글에 접하게 되었고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광신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다고 주장했고, 자기의 사명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임박한 종말론’에 심취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당시 독일의 권세자들을 타도해야 할 악의 세력으로 보았고 칼로 이들을 진멸시켜야 한다고 농민들을 독려했다. 오도된 사명감으로 불탔던 뮌처가 이끄는 농민운동은 필연적으로 피를 흘리며 폭력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을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며 따르는 농민들을 향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손에서 무기를 버리고 하루빨리 농토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루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농민들의 실망 또한 컸다. 농민들이 폭도로 변하고 농민운동이 폭력화할수록, 루터는 더욱더 강도 높게 농민봉기에 대해 반대했다. 


반면 농민들은 그들을 지지해주지 않는 루터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루터가 설득하기 위해 농민들을 만났을 때, 그는 큰 수모를 당했고 일부 농민들은 적대감까지 나타냈다. 루터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배척하는 농민들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루터는 한 편의 글을 썼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는 농부 떼거리들을 반대하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이 표출된 글이었고,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글이었다. 


루터는 점점 농민들로부터 소외되었고, 교회개혁은 독일 민중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러면 루터는 왜 농민봉기에 대해 반대했을까? 우리의 관심이 모아지는 대목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16) 루터와 독일농민봉기운동(2)


 



1524년 중반부터 시작된 독일 농민봉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지고 폭력화했다. 유능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농민들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난폭한 폭도로 변했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1년 남짓했던 농민봉기 기간에 중부 독일에서만 300여개의 성과 120개가 넘는 수도원들이 약탈되었다. 농민군들이 휩쓸고 지나간 성과 수도원들은 쑥대밭이 되었고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때로는 성에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불타는 성들은 농민들을 더욱 폭도로 만들어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귀족과 지주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유혈사태도 끊이지 않았다. 누적된 빈곤상태에서 생존권을 주장하며 일어난 농민운동은 급기야 광폭한 농민 폭동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농민봉기 초기 단계에서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를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의 지도력을 갈망했다. 루터의 가르침은 농민들의 자의식을 일깨웠고 자신들의 권리에 눈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루터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농민들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운동이 광란의 반란 사태로 변해가자 루터는 분노했고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갔다. 
 

마침내 독일 전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자, 루터는 성난 펜을 들었다. 그는 독일의 제후와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반란에 가담한 미친 개 같은 농민들을 쳐죽이고 찔러죽이시오.” 무력으로 농민반란을 진압하라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었다. 지옥의 악마들이 모두 폭도로 변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청난 독설이었다.

1년 동안 계속된 농민반란은, 결국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가들 중에는 무자비한 진압의 큰 책임이 루터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루터가 제후와 귀족들에게 농민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쓴 글이 출판된 것은 1525년 5월께였다. 이때는 이미 제후들의 군대와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농민 반란을 거의 진압해가고 있을 때었다. 

그러나 루터가 농민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을 “쳐죽이고 찔러죽이라”고 했던 말은 독일 농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그들은 오랫동안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루터를 ‘배신자’라고 배척했으며, 로마가톨릭 교회는 배후에서 농민봉기를 조정한 장본인이라고 낙인 찍었다. 루터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사실 루터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격은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루터는 초기 단계부터 농민봉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결국 독일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잃게 되었다. 농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루터는 초지일관 농민봉기에 반대했다. 

왜 루터는 자신를 따르는 농민들의 봉기에 반대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루터의 모든 관심이 교회 개혁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나깨나 루터의 초미의 기도 제목은 교회 개혁이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조직이었다. 교황은 황제와 왕들도 그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맞서서 교회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일에만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했다.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추종했던 사람들 중에는 급진 개혁파들이 있었다. 이들 급진 개혁파는 교회개혁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사회개혁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점이 루터와 급진 개혁파 사이를 갈라놓았다. 루터는 농민봉기운동 같은 사회개혁운동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교회개혁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급진 개혁파들은 루터를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난했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있는 비텐베르크의 교황’이라고 공격했다.

만일 루터가 농민봉기를 지지하고 선두에서 지휘했더라면, 농민운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루터는 끝내 이를 반대했고 농민봉기는 처절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독일 농민들은 루터로부터 등을 돌렸고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은 독일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루터가 독일 농민과 민중의 지지는 잃었지만, 반면 독일 제후와 귀족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독일 세속의 권력자들이 루터의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었다. 이때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민중의 차원을 떠나, 정치적 권세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세속 권력이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는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17) 루터의 결혼(1525년 6월13일)

 



파란만장했던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수도사였던 루터가 수녀원을 뛰쳐나온 수녀와 결혼한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루터는 본래 사제들이나 수녀들의 독신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 루터는 줄곧 그들의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터는 이들에게 함께 살아갈 가족을 찾아주거나, 결혼 상대를 찾아 결혼시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크대학 가까이에 있던 수도원에서 기숙하며 수도사 차림으로 지냈다.

수녀원을 탈출해서 비텐베르크로 왔던 수녀 중 한명이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그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 태어나서 10세 때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수녀원에 맡겨졌다. 그후 수녀원에서 성장했고 다른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비텐베르크로 온 뒤 루터는 카타리나를 위해 몇 번 중매를 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사되지 않았다. 루터는 처음에는 카타리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16년이라는 나이차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신부는 26세였다. 후일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나를 결혼으로 몰아넣으셨다.” 오늘날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비텐베르크 도시 전체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루터의 결혼식을 재현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루터는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에게만은 달랐던 것 같다. 결혼 초기 루터의 글을 보면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또한 부인의 이름이 카타리나였으므로 애칭으로 ‘캐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애칭도 점차 ‘케테’로 변했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관심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루터의 명성은 높았지만 당시 대학교수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루터의 집안은 대식구였다.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 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 

루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였음으로 손님들은 금방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유 없는 살림에 식솔은 많고 식사 준비,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끊이지 않았다. 틈을 내어 닭과 돼지도 치고 채소도 심어 가계에 보탬을 줘야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든 일을 감당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문제였다. 건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 집안의 식탁은 언제나 공동식사였다. 학생 방문객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 유명한 루터의 ‘식탁대담’(Tischreden)이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 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두 딸을 잃는 슬픔도 경험했다. 루터는 父情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1000년 동안 어느 주교에게도 허락지 않으셨던 크나큰 축복을 내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녀들은 독일과 보헤미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내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18)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①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 군림하던 황제는 카를 5세였다. 그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자로 규정, 법적 보호를 박탈하는 칙령을 선포했다(1521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내 루터의 지지 세력은 늘어만 갔고, 독일의 많은 제후들들은 강력한 루터의 지지자가 되었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는 이러한 독일내 문제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긴박한 현안들이 많았다. 항상 숙적관계에 있던 프랑스 문제, 유럽의 문턱까지 밀고 들어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 가톨릭 교황청의 무거운 압력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었다.

1526년 카를 5세는 하이델베르크 근처 고도(古都) 스파이에르(Speyer)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대외적인 모든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잠을 설치게 했고, 교황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의 압박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는 독일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협력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했던 1521년의 ‘보름스 칙령’과 관련하여, 그 칙령을 영지내에서 시행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는 제후들의 재량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즉 루터의 교회개혁에 관한 입장을 제후들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황제의 결정을 그들의 영지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루터 지지파 제후들이 승리에 도취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후인 1529년 스파이에르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대외적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고 황제는 긴박한 상황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황제는 이러한 상황 변화와 가톨릭 측의 압력에 못이겨 3년전의 결정을 번복해버리고 말았다. 즉 보름스 칙령을 부활시키고 친 가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돌변 상황에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황제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때부터 루터 지지파들은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알려졌고, 그런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루터 지지파들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대비된 개신교 전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루터 지지파들은 단순히 항의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1531년 독일 중부지역의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 모여 동맹을 결성했다. 황제의 친가톨릭 정책은, 결과적으로 루터 지지파들을 더욱 결속시켰다.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텐 동맹’은 독일내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과 황제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 상황이 빚어졌다. 마침내 황제도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말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황제와 루터 지지파 사이에 대화합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개신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이다. 

이 화의의 핵심은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eius religio)는 것이다. 이때부터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다.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소장 학자 마르틴 루터가 

대학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계시한 이후 38년만에 

그가 이끈 종교개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언제나 자기 백성을 미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향한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그러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온 변화는 무엇인가? 

먼저 교회 예배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가톨릭교회 예배의식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모든 예배는 성직자 중심이었고 평신도는 방관자에 불과했다.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었던 루터는 

모든 예배자가 다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찬송가를 직접 작곡·작사해서 모두 함께 부르게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예배의식의 큰 변화였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19)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②


마르틴 루터가 성공적으로 이끈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개혁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 전반에 걸쳐 중세시대를 마무리 짓고 근대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됐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은 교회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첫째로 교회 예배의식(儀式)이 크게 달라졌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로부터 예배자 모두가 참여하는 예배로, 

의전(儀典)중심의 예배로부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였다.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됐고, 성직자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진행된 예배에서, 

회중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은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은 떡만 받고, 포도주 잔은 받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실수로 흘려서는 안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제들의 특권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모든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배는 모든 독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진행하게 했고, 

따라서 예배자들은 오랫동안 막혔던 귀가 열리게 됐다. 

성만찬에서 모든 예배자는 떡과 잔을 받게 됐다. 

루터는 또한 찬송가를 직접 작사 · 작곡해서 

모든 예배자가 한목소리로 찬양하게 했다. 

모두 참여자가 되어 예배는 활기가 넘쳤고, 

교회에는 신선한 새 바람이 불게 됐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예배의 중심에 놓았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까지 틀에 짜인 정형화된 의전 중심의 예배로부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뀌게 됐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했던 루터는 그 자신이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평생토록 비텐베르크 교회 강단에서 

2,000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이런 외형적 변화와 함께,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이 읽을 수 있는 ‘열린 성경’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루터 이전까지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크리스천들에게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닫힌 책’이었다. 

우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필사본’ 성경시대에, 

성경은 보통사람들이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가품이었다.

인쇄술이 발달된 이후에도 인쇄된 성경책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이었다.

 ‘만인 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또 하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사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13세기에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성경은 전혀 보급되지 않았다. 

번역도 난해할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독일에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독일어는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부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기에,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시작됐다.

1521년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하는 ‘보름스 칙령’을 선포했고, 

루터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은둔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는 성경번역에만 집중했고 

12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수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딱딱하고 난해한 축자적 번역이 아니었다. 

누구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번역이었고 

생동감이 넘치는 유려한 문체였다. 

성경 번역에서 루터는 상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장 28절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럽세계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은 

천사가 마리아를 부를 때 ‘은혜가 넘치는 자여’(gratia plena)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에게 ‘넘친다’는 말은 

그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잔에 ‘맥주가 넘친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었다.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따르지 않고 

‘은혜를 크게 받은 자여’holdselige)라고 번역했다. 

이런 것을 보면 루터가 성경말씀 한 자 한 자를 

얼마나 심사숙고하며 세심하게 번역했는지 알 수 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

    (20·끝) 꺼지지 않는 등불·루터의 가르침과 개혁정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예배·선교· 봉사와 함께 중요하게 손꼽히는 것이 교회 교육이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이 아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마르틴 루터가 이룩한 또 하나의 공헌이었다. 

1520년대말 루터는 그가 살던 작센주의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회 순방을 하는 동안 루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크리스천이 성직자들과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로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성도들을 교육시키지 않은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를 순방하면서 시간을 아껴 
교회 교육용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루터가 교회 순방을 마침과 거의 동시에 출판된 것이 
교회교육 교재의 고전으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이다. 
전자는 주로 어린이와 초신자용이었고, 
후자는 성인과 성직자의 교육용으로 쓰여졌다.
 
루터는 이 교재에서 ‘문답식’ 교육방법을 채택했다. 
‘소요리문답’의 첫 장이 되는 십계명 부분을 읽어보자.

 “첫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을 설명하고 있다. 
암기하기 쉬운 문답식 교육방법은, 
루터 이후 오랫동안 교회교육의 모델이 되어왔다.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재도 집필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교재를 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루터 당시 대부분 독일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주장을 폈다. 
그것은 모든 독일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에 관계없이 
또 남자나 여자나 구별없이,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초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교육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죄 중의 큰 죄”라고 말할 정도로 
교육을 강조했다. 
독일내 제후와 영주들에게 공교육 제도 마련에 앞장설 것을 적극 독려했다. 
루터의 노력으로 공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독일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루터의 생애를 일별해볼 때,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특별히 언급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첫째는 루터의 평생 동역자였던 멜랑흐톤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했던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서 충실한 루터의 동지가 되었다.

대석학이었던 멜랑흐톤은 루터가 그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어학 대가였던 멜랑흐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성경’을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 받는 번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랑흐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비텐베르크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과 멜랑흐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터 생애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은, 그와 동시대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그는 루터를 마음깊이 존경했고 루터 초상화를 많이 남겨놓았다. 그래서 루터는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크라나흐의 루터 초상화를 보면, 
루터는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건장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는 40대 들어서면서부터 여러 병고로 크게 시달렸다. 
그는 고질적인 위장병과 담석증으로 고생했다. 
편두통과 때로는 어지럼증이 심해서, 설교를 중도에 중단했던 일도 있었다. 
투병할 때 그는 친지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죽음과 지옥에서 지냈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편한 데가 없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 루터가 초인적인 저술활동을 했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글을 썼을 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루터, 1546년 63세로 소천.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에 안장.
1546년 루터는 63세를 일기로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죽자 시신은 곧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었고, 
29년전 그가 95개 조항을 써서 계시했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
 
루터는 갔지만, 그의 가르침과 개혁정신은 
오늘날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세상과 교회를 밝혀주고 있다.

이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글을 일단 마무리지으려 한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후속편으로 칼뱅의 종교개혁에 관해 쓰고자 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샬롬! 

                                                       
박준서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