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메시아 계보 대장정
아슈르 대군의 유다 침략 (메시아계보대장정60)
바탕본문: 왕들B(왕하) 18:7-19:37, 연대기B(역대하) 32:1-22,
참고본문: 예샤야후(이사야)서 36:1-37:38
착한 왕 히즈키야가 하나님께 이처럼 충성을 바치며 사역한 얼마 후, 북쪽의 이방 대국 아슈르(아씨리아)의 산헤립 왕이 이끄는 대군이 유다를 침입합니다. 히즈키야 왕 제1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일대 위기입니다! 실로 큰 난국에다 대란이었지요. 그래선지 성경은 이 사건을 퍽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예호봐(야웨) 하나님은 왜 하필, 남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충성된 히즈키야 왕대에 이런 큰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만, 반드시 하나님의 그만한 뜻이 있을 터입니다. 히즈키야와 유다를 괴롭히시기 위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산헤립이 이끄는 약 20만의 아슈르 군대는 유다의 견고한 도성들을 장악하려고 포위해 진을 쳤고, 상당수는 점령했습니다. 이 침공 사건은 대강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1. 아슈르 군, 유다 성 다수를 함락시킴
2. 아슈르, 유다 제2의 도시 라키쉬 공략. 주둔기지화.
3. 히즈키야가 아슈르 왕에게 귀금속 공물을 바침
4. 산헤립이 랍샤케와 군대를 파견. 예루샬렘 성민 회유(내란 유도)
5. 히즈키야의 겸허와 예샤야후(이사야)의 기도,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
6. 하나님의 개입과 초자연적 승전 (아슈르군 18만5천 전멸)
7. 산헤립의 패주/암살
북 이스라엘의 패망 (참고본문: 왕들B 17:1-41, 18:9-12)
메시아 계보와 직접 관계는 없으나..아슈르 군의 유다 침공 훨씬 이전에 북 이스라엘도 아슈르에 침략 당하여 결국 패망하는 일대 비극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심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로써, 10지파로 이뤄졌던 북 이스라엘은 초대 왕 야로브암(여로보암)부터 최후 왕 호쉐아에 이르기까지 총 19대 왕, 주전(BC) 약 931-722년(추정 학설에 따라 연대가 다를 수도 있음)의 약 200년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각 왕당 평균 10년씩 통치한 셈이지요.
과연 북 이스라엘은 왜 망했을까요? 우리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지요.
성경 기자는 그 원인을 명명백백히 설명해 놓았습니다(왕들B 17:7-23, 18:12).
한 마디로 하나님을 끝까지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도무지 회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이렇다 할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그나마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던 혼혈인들이 생존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지요. 바로 이들 가운데서 쇼므론(사마리아) 사람들이 훗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최후 왕인 호쉐아 왕은 유다왕 아하즈의 제12년에 왕이 되어 9년간 악정을 베풀다가 샬만에세르(='술마누-아사리드'. 한글성경 표기: 살만에셀 또는 '살만') 5세가 이끄는 아슈르 군대에게 침략과 멸망을 당합니다. 본디 이름이 '울룰라유'였던 이 샬만에세르 왕은 티글랕 필레세르 3세의 아들입니다. 티글랕 필레세르 3세는 쇠퇴해가던 구 아슈를 다시 일으켜 전과 같이 강력한 신 아슈르(Neo-Assyrian) 시대를 몰고 온 영웅이었지요.
샬만에세르 5세는 BC 727-722년(추정)의 단 5년간 아슈르-바빌론을 통치하면서도 '쇼므론 정복왕'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덧없는 세월입니다. 그의 이른 죽음은, 하나님이 아슈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패망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고 뭘까요?
그는 아직도 쇼므론을 포위/점령하고 있던 722년 테벹 월 12일에 죽어, 아슈르는 샤루케누(사르곤) 2세가, 바벨론은 마르둨-아플라-이띠나 2세(성경의 메로닼발라단/발라단/베로닼발라단. 한글성경의 '브로닥발라단' 또는 '므로닥발라단', 참조: 왕들B 20'12, 이사야 39'1)가 각각 뒤를 이어 다스립니다.
이스라엘 패망의 배경
왼쪽 사진 ◀ 바퀴가 여섯 달린 아슈르군의 공성수레 (주전 9세기 경 부조)
이스라엘의 호쉐아 왕은 이전에도 이스라엘을 쳐들어 온 아슈르에게 항복해 매년 조공을 바치다가 미쯔라임(에짚트)의 '소' 왕에게 사자를 보내더니 아슈르를 배신하고 조공을 중단했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샬만에세르가 호쉐아 제7년(유다 왕 히즈키야 제4년)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여러 성들을 치고, 3년간 쇼므론을 포위합니다.
이 3년간 호쉐아 왕이 회개하거나 주/예호봐께 간구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훗날 산헤립 왕의 유다 예루샬렘 포위 때 히즈키야의 태도와 퍽 대조적입니다.
호세아 제9년. 샬만에세르는 드디어 쇼므론을 차지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아슈르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가의 하보르, 마다이(메대)의 여러 고을에 흩어 놓았습니다. 그 대신 바벨론/쿠타/아바/하맡/세파르바임 등지의 주민들을 데려다 쇼므론의 여러 성읍에 거주시킵니다. 이것은 점령지역 주민들의 애국심을 약화시키기 위한 아슈르의 '효과적'인 중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역대 아슈르 왕들이 늘 같은 정책을 구사했습니다.
그런데 종주국에 의해 남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심겨진 거민들이 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야웨님을 전혀 경배하지 않고 자기네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그 가운데 일부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아슈르 왕은 이스라엘 포로 가운데서 사제를 챙겨 이스라엘로 보내어, 베텔에 거주하면서 그곳 주민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야웨님도 섬기고 자기네 우상들도 섬깁니다.
아슈르의 유다 침공 배경
윗 사진 ▲ 산헤립왕의 전마차와 수하 군대 (부조)
앞서 비친 대로, 산헤립 왕이 이끄는 아슈르 군대가, 히즈키야 제14년에 유다를 침공해 들어 왔습니다. 이것은 앞서 히즈키야가 즉위 얼마 후 하나님만 섬기고 대국 아슈르도 섬기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히즈키야는 이웃나라 필레쉩(불레셋)을 쳐서 굴복시킨 용맹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히즈키야가 주전 701년쯤 아슈르를 배반한 배후엔 미쯔라임/바벨론의 입김도 있었답니다. 이에 따라 산헤립은 유다를 쳐 들어와 (아슈르 자체 주장으로는) 46개 요새지/국고성과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점령했고, 일부는 파괴했습니다.
아슈르는 유다-이스라엘 국경지의 전략요충지이고 나라 제2의 도시인 라키쉬까지 침공하자, 히즈키야는 편지를 써서 라키쉬에 주둔 중인 산헤립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당시 라키쉬는 이미 함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윗 그림 ▲ 유다 제2의 도시 라키쉬의 함락을 그린 아슈르 부조
내용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떠나서 그냥 돌아가시면, 왕이 내게 부과하시는 공물을 내가 감당하여 바치겠습니다." (왕들 B 18:14)
'잘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히즈키야가 앞서 배신했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히즈키야가 앞서 바벨론 및 에짚트와 손을 잡고 아슈르를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없진 않습니다(왕들B 18:7,21, 20:12, 연대B 32'31).
그러자 산헤립은 "그러면 그렇지. 네까짓 게 어쩌겠냐?" 하고는 은 200 키카르(탈렌트), 금 30 키카를 연례(?) 공물로 정하여 히즈키야에게 내게 했습니다. 히즈키야는 우선 그 해에 성전 출입 문에 입힌 금과 왕궁의 기둥마다 입혔던 금을 모두 벗겨 산헤립에게 주었습니다.
히즈키야가 이때 왜 사전에 하나님께 미리 여쭙질 않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얼마 후, 아슈르 군은 재차 유다의 주요 성읍들을 치면서, 끝내는 수도 예루샬렘도 넘보고 다가옵니다.
그러자 히즈키야는 급거 수도방위 전략을 위해 그 수하 신복들, 사령관들과 의논한 끝에, 백성들을 동원해 성 밖의 모든 수원과 시내 등을 메우고 막아 버려 적군이 물을 구할 수 없게 만듭니다(32:3,4). 또 이 때를 계기로 히즈키야 왕대에 예루샬렘 시내에 대대적인 수도 공사가 이뤄졌고,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수로들은 지하에 주로 구축됐습니다.
또한 성벽 개보수공사, 망대 건립, 바깥 성벽도 쌓아 올리기, 다빋 성의 '밀로' 강화, 무기/방패 제작 보완 등을 하게 합니다. 또 신임 사령관/지휘관들을 임명합니다.
히즈키야 왕은 또 전쟁이 두려워 떨며 불안해 하는 시민들을 모두 성문 광장에 모이게 하여, 몸소 연설로써 백성의 마음을 안돈(安頓)시킵니다.
오른쪽 위 사진 ▶ 히즈키야 왕대에 새로 건설된 지하 수로 (길이 533m로 기혼 샘과 실로암 못 사이를 연결)
"시민들이여. 다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고, 아슈르 왕과 그 무리를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마오. 그와 함께 하는 힘보다 우리와 함께 하는 힘이 더 크다오! 그와 함께 하는 건 몸뚱이에 팔 뿐이고,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은 주/예호봐 우리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우리를 도와 우리 대신 싸워 주실 거요!"
왼쪽 위 사진 ◀ 히즈키야의 수로 건설 업적을 새긴 (당대의) '실로암 기념비'
기개 넘치고 믿음직스런 왕의 연설에 백성은 비로소 큰 위로와 든든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물론 히즈키야는 주/예호봐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이런 '배짱'을 보인 것입니다.
산헤립의 대변인 랍샤케
당시 유다 제2의 도시이고 국경지대 전략요충지인 라키쉬에 주둔하고 있던 산헤립 왕 자신은 라키쉬 공략을 계속하면서, 타르탄/랍사리스/랍샤케 등 수하 사령관 3명이 이끄는 대군을 예루샬렘으로 보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타르탄은 아슈르 제2인자인 군 총사령관, 랍샤케는 왕의 비서 겸 왕의 술잔을 맡은 궁중주관(酒官) 내지 시종장관, 랍사리스는 관리장 격인 국무장관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답니다. 이들의 이름이기보다 관직명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세 사령관들이 이끄는 아슈르 군이 예루샬렘 성 밖 윗못 수도 곁, 세탁자들의 밭의 큰길에 이르렀을 때, 그 대변인 격인 랍샤케가 큰 소리로 유다 왕을 불러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샬렘 성에서 힐키야의 아들인 궁관 엘리야킴, 서기관 쉡나, 아샆의 아들인 사관(史官) 요아 등이 히즈키야의 대변인 격으로 그들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랍샤케가 그들에게 유창한(?) 유다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은 히즈키야에게 전하시오.
대왕 아슈르 왕의 말씀이오:
'넌 뭘 믿고 이다지 자신만만하냐? 네게 전략과 전력(戰力)이 있다 한들 빈말일 뿐! 지금 네가 도대체 누굴 믿고 날 배신한 것이더냐?! 이제 보아라. 너는 저 상한 갈대 지팡이 미쯔라임(에짚트)을 의지하는데, 그것에 기대다간 손바닥을 파고 들어 찌르기나 하지. 파라오-미쯔라임 왕은 그를 의지하는 누구한테나 그런단다.'
(그리고) 그대들은 혹 내게, '우리는 우리 하나님 예호봐님을 신뢰합니다' 할테지만, 산당들과 제단들을 없애 버리고 유다와 예루샬렘에게 '예루샬렘에 있는 이 단 앞에서만 경배해야 한다'고 말한 자가 바로 히즈키야 아니오?
이제 그대(히즈키야)는 나의 주인 아슈르 왕과 내기를 하오. 그대한테 말 2천마리를 줄 테니까, 거기 올라 탈 마병들을 내놓아 보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내 주인의 신하들 중 말단 지휘관 하나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겠소? 설령 미쯔라임의 전마차들과 기병들을 얻는다고 한들.
아무렴 내가 예호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이 곳을 치러 왔겠나? 예호봐께서 전에 내게 몸소 말씀하셨지: '이 땅으로 진군해서 패망시켜라'고."
랍샤케의 이 말을 보아, 비록 산헤립이 시켰다곤 하나 비교적 말재주가 능하며, 실로 간교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흡사 마귀의 전략을 연상시킵니다. 산헤립과 그 대군은 이미 라키쉬나 예루샬렘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차제에, 히즈키야와 백성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상대의 자중지란을 목표 삼고 있지요.
그러자 유다 대표단이 랍샤케에게 정중하게 말합니다 :
"부탁드리는데, 님의 종들(우리)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다 알아 듣습니다. 유다 말로 우리한테 말씀하지 마시고요, 성벽 위에서 듣는 백성들의 귀가 있쟎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당시 유다 사람들 일부가 아람어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람어는 본디 아브라함 당시부터 아브라함 친족들의 언어로서, 훗날까지 아람 족과 주변 국가에서 쓰던 말입니다. 포로 시대를 거쳐 신약시대에도 유다 민족 다수가 아람어를 사용했고,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참고로, 다니엘서의 예언 등 구약성경 일부의 원문이 아람어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말이 건방지기라도 하다는 듯, 대뜸 랍샤케가 대꾸합니다:
"나의 주인님이 그대의 주인과 그대한테만 이 말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셨겠소? 성 위에 앉아 있는 저 사람들도 들으라고 보내신 거요! 어차피 그들도 그대들과 함께 제 똥을 먹고 제 오줌을 마시게 될 거 아니오?"
랍샤케의 이 발칙한 망언은 예루샬렘 시민들이 향후 계속 포위된 채 굶주리고 목이 마르리라는 '미리 겁 주기' 암시입니다. 그러나 예루샬렘이 미리 대비한 지금, 수도물은 바깥에 없지, 안에는 없지가 않습니다. 장기전이 아닐 경우, '똥오줌'을 먹는 극한 상황은 그렇게 쉽게 오진 않지요.
랍샤케는 내친 김에 벌떡 일어나 시민들이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대왕 아슈르 왕의 말씀을 들어라! 그 분의 말씀이다: 너희는 히즈키야에게 속지 마라! 그는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한다. 또 히즈키야가 너희에게 예호봐를 신뢰하라고 하는 말도 듣지 마라! 그는, '예호봐가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 것'이라고, '이 성이 아슈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해도, 너희는 히즈키야의 말을 듣지 마라!
아슈르 왕의 말씀이다: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 오너라. 그래서 제각기 제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제각기 제 우물 물을 마셔라. 내가 조만간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겨 줄 텐데, 거기는 너희의 본토와도 같은 지역이다.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역, 기름이 나는 올리브와 꿀이 있는 지역이란 말이다. 너희는 생존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히즈키야가 너희를 독려하면서 "예호봐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해도 듣지 말거라. 제국의 신들 중에 국토를 아슈르 왕의 손에서 건진 신이 있냐? 하맡과 아르팓의 신들이 어디 있단 말이냐? 쉐파르바임과 헤나, 이바의 신이 어디 있다는 거냐? 그들이 쇼므론(사마리아)을 내 손에서 건져 냈나? 제국들의 모든 신들 가운데서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예호봐가 예루샬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다."
그러나 예루샬렘 성벽 위의 유다 백성들은 아무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히즈키야 왕의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거리가 있습니다.
우선 랍샤케의 말투는 마귀의 유혹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슈르의 고관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이교 신들을 통해 악마의 영감과 사주를 받고 있었습니다. 온갖 이교 신들은 실상 거짓 신들이고 본질상 악령들이기 때문입니다.
랍샤케의 이 회유의 말은 정복 대상 국가 어디든지 비슷하게 써 먹어 온 방법일 것입니다.
아, 물론 예루샬렘 성중의 유다 국민들은 악명 높은 아슈르에 관한 소문과 대규모 군대를 보고 두려워 겁도 날 것입니다. 이미 북쪽의 형제 나라 이스라엘은 불과 십 여 년전에 망하여 모두 포로로 잡혀 간 상황입니다. 이제는 유다의 주요 도시와 그 시민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절대 위기에 가까운 상황 가운데 랍샤케의 말을 들은 성중 시민들 중엔 속으로, "그래, 그 말이 맞다. 몸 가죽이 벗겨지고 코나 귀, 손발이 잘리지 않으려면 빨리 항복이라도 해야지, 북쪽처럼 되면 어쩌려구?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투항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왕은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사람도 전혀 없지는 않을 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임금님과 우릴 구해 내실 거야. 잠시만 참고 기다리면 돼." 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더 많았을 터입니다.
사실, 랍샤케의 큰 소리와는 달리 지금 아슈르 군대 역시 내적으로는 그다지 기승백배한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되레 지칠 대로 지쳐 있을지 모릅니다. 길고 오랜 정벌길에 나서서 다른 주변 중소국가들을 연이어 누르고 정복해 온 터이고,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강하고 까탈스런 유다에 왔는데, 비록 수십 개 도시를 점령했다곤 하나, 남은 도시들 중 가장 강한 요새인 라키쉬를 간신히 함락시키고, 이제 최강의 도시인 수도 예루샬렘에서 또 다시 격전을 치를 생각이 아득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상대국의 신은 열강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명성 높고 두려운 예호봐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슈르와 산헤립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입니다. 산헤립 왕이 직접 예루샬렘으로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예호봐의 직접적인 징벌이나 저주가 두려운 탓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산헤립은 과거 위엄이 혁혁한 영웅이었던 아버지 샤루킨 2세가 오래 전 그처럼 쉽게 전사한 비보에 자기네가 섬겨 온 신들에 대한 신뢰감이 많이 감소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랍샤케 등을 대신 보내어 산헤립이 지금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은, 아슈르의 오랜 악명과 명성과 규모를 통해 상대국에 미리 겁을 확~ 주고, 수도권 백성들을 설득하여 내부 쿠데타나 조기항복 등 자중지란을 통해 일찌감치 마무리하려는 심산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과거 여기저기 다른 상대국에서도 대동소이하게 써 먹었을 게 뻔합니다.
아울러 이 방식은 마귀가 성도를 회유/설득하여 믿음으로 버리고 실패하고 패배하게 만드는 방식과도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아무튼 성 밖에 나갔던 유다 대표단 3명은 모두 옷을 찢고, 히즈키야 왕에게 랍샤케 회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의 제 옷 찢기는 통탄 또는 회개를 뜻합니다.
공이 던져졌습니다. 아슈르 측의 도도하고 겁 주는 위협적인 항복 설득의 '공'을 유다 측이 어떻게 받냐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과연 히즈키야 왕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렵니다.
이하는, 사건 배경에 관한 참조 자료들입니다.
껄끄러운 대국들의 존재
위 그림 ▲ 아슈르 제국의 광대한 영토(7세기 후반)
미쯔라임(에짚트), 아슈르, 바벨론, 메디아(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의 역사적인 강대 제국들은 왜 있었던 걸까요? 유다와 이스라엘을 두고두고 번번히 괴롭히는 이 제국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좀 완전히 멸하시고 없애 버리시면 안 됐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이들을 당장 단번에 멸하실 수 있었지만, 오래 놓아 두신 까닭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따로 길러 놓으신 비상 시의 적대국들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에 웅거해 있는 것은 사실상 우상숭배의 범죄에 빠지기 쉬운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고하고 견제하시기 위해섭니다.
이들 강대국들 뿐 아니라..펠레쉩, 아람(쉬리아), 에돔/모압/암몬, 아라비아 족 등 중소 국가와 외적들도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주 괴롭히곤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유다가 회개할 때는 하나님은 이들을 물리치시거나 그 왕이 죽도록 하곤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이래서 유다/이스라엘의 존재는 강대국들을 비롯한 주변 나라들에게도 역지사지로 껄끄러웠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앞서 맥 없이 허물어졌지만, 작은 나라 유다/예루샬렘과 히즈키야 왕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며, 그들의 신 예호봐는 강하다는 인식이 열강에도 깔려 있었으니까요.
산헤립은 누구?
아슈르를 BC 704-681년께 통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헤립은 '센나ㅋ헤리브', 아칻어로는 "신-아히-에리바"("달신인 '신'/Sin께서 잃어진 형제들 대신 나로 대체하셨다, 또는 "달신이 형제들을 번성케 했다"는 뜻으로 추정. 그리스어: 사나ㅋ헤리보스)라고 불리던, 고대 제국 명군들의 한 명이었습니다. 사르곤(샤루킨) 2세의 아들인 그는 주전 705년경 아브월 (7-8월) 제12일에 즉위했다고 하네요.
그는 아버지가 출전해 있을 동안 왕세자로 나라를 지키면서 주로 건축 사업에 힘을 썼습니다. 따라서 사르곤 왕이 새 왕궁을 건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명명한 신도시/수도 '두르-샤루킨'(샤루킨의 요새란 뜻. 현 이라크 북부의 '코르사받')도 주로 산헤립이 주도하여 건설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르-샤루킨은 옛 수도 니네베에서 약 20km 남쪽의 '마가누바' 지역의 3평방km(1760x1635m)의 부지에 약 10년간에 걸쳐 조성됐고, 화려한 궁전과 온갖 나무를 심은 사냥터/동산, 기둥 있는 정원, 24m 두께의 성벽, 7개 대문과 157개 망대, 제신들을 섬기는 신전/사당/신전탑(지구라트) 등이 건립됐습니다. 또 왕궁 입구엔 상징적 문지기인 거대하고 무거운 '쉐두'(인두와 소의 몸통/다리에다 날개가 달린 조각상)를 세워 놓았습니다.
왼쪽 위 그림/사진 ◀ 아슈르의 화려한 궁성들과 복원된 니네베 성벽.
그러나 아버지 샤루킨이 돌연 전사하자, 왕위에 오른 산헤립은 얼마 안 있어 두르-샤르킨을 버리고, 니네베로 재천도합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을 딴 왕도가 '재수' 없고 따라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산헤립은 자기 이름을 딴 건축물을 만들진 않습니다.
샤루킨은 샬만에세르 5세의 후임자로, 샬만의 아들인지 여부가 확실치 않습니다. 그는 샬만에 이어 이스라엘 영토에다 아슈르 주민들을 데려다 대거 식민(植民)했고, 특히 수도권인 쇼므론을 아슈르에 충성하는(?) 사마리아나로 굳혔습니다.
산헤립은 즉위 초기부터 니네베를 제국의 으뜸가는 메트로폴리스로 개발했습니다. 703년에 이미 옛 궁을 허물고 공원이 딸린 새 궁전을 건립해 '무비(無比)의 궁'으로 칭했습니다. 또한 왕 전용도로 포장 및 기존 도로 청소/확장, 주신 '아슈르' 신전 건립, 니네베 시민들을 위한 최초의 수로 건설, 성곽 둘레에 해자(못) 조성 등 도시건설 사업에 주력했습니다.
산헤립의 육면주(六面柱, 또는 육각주, '테일러 프리즘')
산헤립 왕이 남긴 다양한 유물/유적들 가운데 '육면주'(일명 육각주, Hexagonal Prisms)는 유명합니다. 붉은 찰흙으로 만들어 구운 6각기둥 모양의 이 문서에는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쓰인 6개 문단, 총 500줄의 문자열들 속에 산헤립의 1년간 '업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해의 산헤립 연감(annal)이라고 할 수 있지요. 높이 38cm, 너비 14cm인 이 기둥은 산헤립 통치기 말년(689년 경)에 제작됐답니다.
이 육면주는 1830년 '테일러' 대령에 의해 니네베의 산헤립 궁터 폐허인 현재의 이라크 모술 쿠윤짘 언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 후 남편을 여읜 테일러 부인으로부터 1850년, 대영박물관(현재의 영국박물관)이 매입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 프리즘'이라고도 불리지요.
산헤립에 의한 또 다른 버전의 육면주가 미국 쉬카고 동양연구소에도 소장돼 있습니다. 그밖에도 단편적 문서인 최소 8개의 육각주 부분들이 영국 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이 두 개 육면주의 비문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기록시기가 양쪽 사이에 약 16개월 차이가 있습니다. 즉 테일러 육면주가 더 먼저 만들어졌고(691 BC경), '동양연구소 육면주'(689년)는 좀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
오른쪽 위 사진 ▲ 산헤립의 육면주(일명 'Taylor Prism')
이 점토기둥 문서는 산헤립의 다른 점령국 토벌에 관한 기록과 함께, 대 이스라엘/유다 정벌기도 포함된 3대 기록들 중의 하나로, 구약성경 기록과는 크게 달리 묘사돼 있고, 따라서 황당한 부분도 있으며, 서로 일치하는 부분은 적은 편입니다. 산헤립의 과장이 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보다는 자존심에 따른 허장성세가 많았던 고대 제국 문서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문서 내용에는, 유다의 '46개' 성벽도시와 수많은 작은 마을들에 대한 점령, 20만150명을 포로 삼고 가축들까지 옮겨 간 것, 정복지를 미틴티(아쉬돋 왕), 파디(에크론 왕), 실리벨(가자 왕) 등 필레쉩 족의 3개 도시국가 왕들에게 '분배'하고, 파디를 '예루샬렘 대표 군주'로 남겨 둔 것 등이 기재됐습니다.
이 문서는 또 히즈키야 왕이 예루샬렘에 '새장 속 새'처럼 갇혀 있던 중, "아랍 족과 용병들이" 그를 버리고 떠나자, 뒤늦게 산헤립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는데, 30 키카르(탈렌트)의 황금, 800 키카르의 은, 귀금속 보석과 장신구, 홍옥수, 상아 장식 침대/의자, 코끼리 가죽, 상아, 흑단목(에보니), 회양목재 등은 물론, 심지어 왕실의 공주들과 후궁들, 남녀 음악인들을 산헤립에게 뒤딸려 니네베로 날라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산헤립 육면주의 이런 황당한 아전인수 격 기록은 성경 내용(특히 왕들 18'13-19'37, 이사야 36'1-37'38 등)과는 매우 대조됩니다. 실제로는 오히려 히즈키야가 주/예호봐님과 당대의 대언자 예샤야후(이사야)의 도움으로 예루샬렘을 성공적으로 방비하고, 대천사를 통해 약 20만의 아슈르 군사를 전멸시키는 대승리로 피날레를 장식했지요!
따라서 육면주의 기록 내용은 사실 증언이 아니라, 산헤립이 당초 예루샬렘을 점령했을 경우, 이루려고 했던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도 학자들은 왜 산헤립이 그 큰 군대로도 예루샬렘을 공략하지 못했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학자 조지 롤린슨 교수(옥스퍼드 대)는 산헤립의 갑작스런 '서부 침략' 중단 사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가 분석합니다.
"센나헤리브는 말년에 킬리키아 서쪽으로는 더 원정을 하지 않았다. 또 남부 시리아와 에짚트를 대상으로 한 공략계획 재개도 없었다. 에사르하똔(산헤립의 아들)의 통치말기까지는 그랬다." (1873년)
롤린슨의 분석이 맞다면, 산헤립은 20만 대군 전멸 사건 후 주 예호봐님을 너무나 두려워 한 나머지, 근처에 가기도 겁냈음이 분명하며, 그런 상황은 연대기B 32'21 기록과 일치합니다. 또 6면주 기록은 다른 나라 정복과 더불어, 히즈키야의 유다에게도 당연히 '승리'했다고 주장, 자기 군대의 대패 사실을 숨기고 국민과 후대를 속여 자위(自慰)해 보려던, 알퍅하고도 거창한 문서사기에 불과합니다.
위 사진 ▲ 포로들을 산 채로 몸껍질을 벗기는 잔인한 아슈르 군인들
그도 그럴 것이 6면주 머릿글 부분에 있는 산헤립의 장황한 자기소개문은 우스꽝스런 허장성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헤립은 또 자신의 유다 라키쉬 점령이 매우 자랑스러웠던 양, 니네베 궁전 벽의 석부조에 당시 상황을 새겨놓았습니다. 현재도 영국 박물관 라키쉬 갤러리에 소장돼 있습니다.
이런 산헤립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비교적 평생 소박하고 겸허한 군주였던 히즈키야와는 매우 극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왼쪽 그림 ◀ 선처를 호소하는 고위급 포로들의 눈을 직접 단창으로 찔러 소경으로 만드는 아슈르 왕. 포로들의 입엔 동물처럼 재갈이 물려 있다. (왕들B서 25'7 참조)
산헤립은 또 다른 아슈르 역대군주들처럼, 점령국 포로들의 몸 껍질을 군사들이 직접 맨손으로 벗겨 벽에다 붙이기, 사지와 몸 부분 자르기, 하체에다 막대기를 꿰어 세우기 등으로 점령국 사람들의 간담을 녹이는, 사상 최악의 잔인한 '전시 효과'를 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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