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탕본문: 연대기B(역대하) 31장
히즈키야 왕의 다음 개혁은 레비 족의 성전 사역과 십일조 제도의 회복이었습니다.
성전 사역은 제사와 기타 부속 사역들이지요.
왕은 먼저 하나님 경배에 필요한 제사를 모두 과거 선왕(善王)들의 좋았던 시대처럼 정상적으로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즉 매일 아침저녁 번제, 안식일 번제, 매달 첫날 번제, 명절/절기 번제 등입니다. 이를 위해 히즈키야는 왕실 재산에서 얼마를 뚝 잘라 과감하게 쾌척했습니다.
성전사역은 과거 다빋/슐로모 시대에 레비 족의 각 선조 계열대로 맡겨진 의무를 후손들의 '계파'에 따라 재정돈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본(本) 시리즈나 바탕본문이 성경 자체를 통해서 충분히 아는 사실은, 레비족 사람들은 대대로, 전적으로 성전 사역을 하되, 제사 사역(사제들과 사제 도우미들), 찬양음악 사역, 성전 관리, 성전 문지기 사역 등을 했으며, 아울러 거의 다들 예언 사역을 하고, 구약 말씀에 능통했다는 것입니다.
응식=권리
그러나 이들이 효율적으로 안정스럽게 사역하기 위해선 먹고 살 기반이 있어야 하며, 그 중요한 기반은 백성이 내는 십일조였지요(신명기 18:3,8). 당시 십일조는 주로 음식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성전 사역에 전무하기 위해선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 음식을 한글개역에서 '응식'(應食)이라고도 했는데 마땅히 받을 권리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레비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성전 경배 사역 전문/전담 지족으로 택하셨기에 지족별 땅을 분배받지 않았고, 분열 전 시대엔 전국 각처의 12개 지파에서 레비인들에게 나눠 준 고유의 기업이 있어 왔습니다. 그랬기에 레비인들은 비번일 때 자신이 누리고 꾸려가는 땅뙈기와 집 등이 있었지요. 그러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국에서는 성전에 오가기가 쉽지가 않고 불편해지자, 여러 모로 하자가 생겨납니다. 회복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히즈키야 이전 선왕 대에 소홀히 했거나 내팽개쳐진 성전 사역의 회복을 위해선 동시에 십일조 제도 회복이 덩달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백성들 특히 예루샬렘 시민들에게 레비인들의 응식을 성전에 들이라고 촉구합니다.
그 결과는 엄청났지요. 유월절 잔치로 은혜를 잔뜩 받은 백성들이 모든 소출과 소산의 십일조는 물론 첫물과 맏물까지 기꺼이 갖다 바치기를, 3월부터 7월까지 무려 약 5개월간 지속했습니다!
그렇게 차고 넘치고 남아서, 결국 성전 안에 특별 곳간을 마련하고 그 관리를 위한 전문 일꾼들까지 두게 됩니다.
이것이 먼 훗날 포로기 이후까지 본보기와 전통이 되지만, 가깝게는 바로 히즈키야 아들 대에 곧장 깨어지기에 하나님은 대언자 말라키를 통해 재강조하십니다(말라키 3:10). 하나님은 그 곳간을 곧 하나님의 창고라고 부르십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로 바친 응식은 레빝 족의 온 회중 그러니까 어린이까지 모두 혜택을 받습니다(31'18). 한 마디로 성전사역에 관여된 모든 사람들이 받은 것입니다(31:19).
메시아와 십일조
여기서 잠시..
구약성경의 끝 권서(券書)이며 포로기 이후 신약과의 사이의 기간인 '중간기'에 앞서 네헤미아 시대의 마지막 대언자였던 말라키는 십일조를 재강조합니다. 말라키는 끝 2장에서 메시아의 초림과 '엘리야' 곧 침례(세례) 요한의 도래까지 예언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슐로모의 제1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제2성전인 제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뒤에도 십일조는 필요했고 당대의 타락한 사제들을 향해서도 강조됐으며, 헤로드 왕이 제룹바벨 성전을 무너뜨리고 신축한 '헤로드' 성전 시대에도 주님은 여전히 십일조 정신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교훈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십일조에 관해 아무 말씀도 강조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십일조 정신은 맥맥히 유지됐고, 신약 뒷 부분의 히브리서 7장에서도 6회나 언급됩니다. (티엘티의 십일조 관련 글들 참조)
왜 그럴까요?
십일조는 고대로부터 지속되다 성막-성전 시대에 잠시 제도화 됐을 뿐, 율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여전히 일차적으로 재정적 복의 지름길입니다.
또..아브라함 당시 엘리온(가장 높으신 분)의 사제 겸 샬렘 왕이었던 멜키쩨뎈(뜻: 의의 왕)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입증된 사람으로서 십일조를 받듯, 그를 승계한 하늘 대 사제 예수 크리스토 즉 메시아께서도 죽지 않고 살아계셔 우리를 위해 사역하시고 중보하시니 십일조는 그 분에게도 합당하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신약과의 연계성
여기서 독자에게 묻고 싶은 한 가지는..과연 교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구약 율법시대의 이 제도가 신약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아무 것도 없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사역자들은 교회에서 나는 것을 받고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자격을 적용하고 안 하고는 사역자 자신에게 달려 있지만 말입니다.
자비량 목회와 선교를 한 사도 파울은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본래 자활력과 전문기술-장막깁기-을 갖고 있던 자기한테는 걸맞았기 떄문이지요. 파울은 어느 모로든 전문인 선교사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부양할 대상 가족이 없었지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사도/사역자로서의 "받을 권리"를 적용하지 않습니다(코린토A=고전 9:1-18). 복음을 값없이 전하여 복음으로 인한 더 큰 상을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코A 9:18끝).
우리는 이 파울의 '권리'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권리는 주님께서도 강조한 사안이며 사도들도 인용한 바입니다(마태복음서 10'10, 루카복음=눅 10'7, 티모테A=딤전 5'18). 이 권리는 분명히 사역자들에게 존재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냐가 중요하며, 쓰고 안 쓰고가 순전히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나 교인이나 어떤 개인이 사역자에게 포기를 강요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교회에 불행이 따릅니다.
그러나 파울처럼 사역자가 이 권리를 얼마나 조절하냐도 매우 중요하며, 이 점에서 우리는 파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파울은 각 교회에마다 이 권리 조절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대처했습니다. 일꾼이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더 큰 상급을 바라는 자기 신앙양심과 교회의 형편에 따라 권리 적용의 수위가 조절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돌아 보면, 페트로나 기타 11사도들, 7집사 등 초대교회 사역자들은 자비량으로 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페트로나 요한 등이 갈릴리 호 어부 생활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팔면서 지냈다는 기록도 없고요. 사도들은 교회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사역하며 살았음이 거의 틀림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제도와 신약 교회의 연계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구약제도가 신약교회에서 갖는 의미가 전무한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 십일조를 맹렬히 반대하는 안티십일조인들은 구약과 신약이 마치 전혀 무관한 듯 몰고 가는 성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사라지면서 십일조도 단절됐고, 따라서 사역자들에 대한 응식/수당 지급도 끊겼다는 생각들입니다.
과연 하나님께 경배함에 있어 다른 모든 것은 남고 단지 십일조만 사라졌냐는 것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사역자들을 일꾼으로 생각하느냐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교회 사역자들이 일꾼들이 아니라면, 십일조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초기교회에서 십일조가 다 사라졌다면, 12사도들과 7집사 등의 일꾼들은 쉽게 말해서 뭘 먹고 살았냐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당시 초기교인들은 성령과 권능을 받고 기쁨과 감사에 넘쳐 가산을 팔아 바치는 등 교회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나눠 먹고들 지냈습니다. 그리고 빈민/고아/과부들을 도왔습니다.
여기에 십일조만 포함되지 않고 싹 빠져 버렸다는 안티들의 주장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제가 말하는 사역자들이란, 교회를 대표한다는 담임목회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는 교회 일에 전력하는 일꾼 모두를 말하며, 십일조는 담임목회자 전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일꾼들은 자기 권리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 적용
현대교회에서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십일조가 목회자의 '모든 것' 보조/부양에 쓰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역자는 담임목회자만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십일조로 담임목사만을 부양하라는 말이 없지 않습니까.
중대형교회에서 십일조를 통해 목회자가 부자가 되는 것은 더구나 그렇습니다. 특히 목회자 가족이 몽땅 십일조에 얹혀 사는 모습은 비성경적입니다. 목회자 가족은 되도록 교회 신세를 질 게 아니라 식구마다 자립해야 바람직하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가족 전원이 교회 사역에 깊이 관여될 때는 다릅니다. 그럴 때는 교회가 알아서 적절히 배려해 줘야지요. 더욱이 목회자가 수입원이 클 때는 '권리' 조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고대 레비 성전음악인들과는 달리 현대 찬양대원들은 한 주 내내 찬양에만 전적으로 몸 바치고 시간 바쳐 사역하는 것은 아니므로 적용되기 힘들지만 음악교육 훈련과 선곡/편곡, 연구 등에 힘쓰는 주요 찬양사역자들은 마땅히 교회가 배려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엔 어떤 응용이 필요하겠지요. 찬양사역자들도 세상 일로 인한 별도의 수입이 있다면, '응식/권리'의 적용 수위를 조절해야 당연합니다.
교회 사역을 주 목표로 공부하는 사역지망생, 성서대학생/신학생 등은 교회가 마땅히 배려해야 합니다. 단순히 학비/장학금 이상의 것 즉 생활비까지도 적절히 배려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합니다. 다만 해당 학생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꼭 소속교회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교회이니까요.
사역자들에게 쓰고 남는 나머지는 적절히 응용해서 활용하되, 특히 빈민/고아/과부를 돕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성도들이 다니는 소속/출석교회에만 내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원칙이라거나 법칙이라는 말조차 성경엔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코린토A 16:2를 볼 때, 각 교회 별 내지 지역 신앙공동체 중심으로 하는 게 전례였다는 것일 뿐입니다.
사역자들은 예수님이 돌보시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계실 때나 승천하신 이후나 계속 사도들의 삶을 돌아보셨습니다. 교회가 늘 풍성하게 하셨고, 어려울 때는 이방인들의 교회를 통해서도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십일조가 점점 사라져가는 풍토 속에서 교회의 주요 재정의 근간인 십일조 없이 자율적인 헌금으로만 교회 사역과 모든 예산을 충당하다는 것, 하나의 말세현상이고 교회와 사역자들로서는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지평이 좁아지고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셈이지요.
한국 교회 뿐 아니라 미국 교계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참고로, 십일조는 오직 한국 교회에서만 한다는 일각의 주장-어처구니 없습니다. 십일조는 오히려 미국교회가 훨씬 더 강조해 왔지요.
그런가 하면, 십일조를 강조하는 일부 문제종교집단들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세력이 강화돼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전사역 제도와 십일조를 회복한 히즈키야 개혁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바 교훈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