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메시아 계보 대장정

아사왕의 승리/배신/죽음(메시아계보대장정35)

영국신사77 2015. 10. 9. 22:28

 

사진: 바르하닫(=벤하닫)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텔 단 석비'(현무암으로 됨).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한 왕을 이겼다는 내용. '다빋 왕가'라는 글자가 나온다.  


바탕본문: 연대기B(역대하) 13:9-15, 16장 온 장, 왕들A(왕상) 15,16장

 
아사 왕의 대(對) 쿠쉬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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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史)의 교훈
 

아사 왕은 아버지 아비야(=아비얌) 왕 당시 대북전쟁인 '제마라임'에서 대승한 비결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본 시리즈 33회 참조). 
당시 남군이 북국 이스라엘 군세의 절반에 불과한 데다 북측의 복병전으로 포위됐으나, 남군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완승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마라임 전쟁 무렵 왕세자였던 아사의 나이가 얼마였는지 모르나 그는 아버지가 그다지 훌륭한 군주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군사들이 하나님께 매어달릴 때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셨다는 데 대해 큰 충격과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충격과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아사 왕의 곧은 심지와 개혁 정신은 여기서 나왔음이 거의 틀림 없습니다. 그가 개혁하는 10년 동안 하나님은 나라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기간 중 아사는 국력과 국군을 강화합니다.

대다수 군주들처럼, 아사 왕에게도 전쟁의 기회는 찾아옵니다. 고대 신정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전쟁은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을 테스트하고 재확인하여 다지는 계기가 되곤 했지요.  


쿠쉬 제국

놀랍게도 이번엔 쿠쉬(Kush 또는 Cush) 제국의 제라 왕이 이끄는 1백만 군대와 맞닥뜨립니다. 제라 왕은 슐로모 왕을 예방한 쉐바의 여왕(에티오피아의 '마케다')의 후대인 '아세르카마니' 또는 우사르켄 왕으로 추정됩니다. 

제라는 300대의 전마차(戰馬車/병거)를 곁들여 나타납니다. 
현대의 탱크 격인 전마차는 물론, 말이 끌고 달리는 무장마차를 뜻하지요. 전마차엔 1인승 또는 2인승 이상도 있었습니다. 특징은 단순히 말을 탄 기병과 달리 철갑으로 무장된 마차 안에서 말을 부리며 질주할 동안, 사방으로 활/창/칼/도끼/방패 따위의 무기를 고루 활용할 수 있는 기동성/기능성을 동시에 갖춘, 강력하고 두려운 '달리는 요새'였습니다. 말은 힘 세고 빠르기로 유명한 미쯔라임(에집트) 준마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바위가 많거나 등등 지형이 고르지 못할 때는 불리하기도 했지요. 
그밖에도 전마차들 중엔 영화 '벤 허'에서 보듯 경주용도 있고, 군주를 위한 의전용도 있었습니다.  
퍽 오래 전, 홍해 바닥에서 고대 미쯔라임 전마차의 바퀴가 발견돼 영상으로 녹화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해와 파라오 군대의 추격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것입니다!  

옆 그림: 카나안 7족의 하나였던 히타이트(한글성경 '헷'족)족의 전마차 그림과 로마시대 전마차 모형의 시승.

성경에 이름이 자주 나타나는 '쿠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에티오피아로 흔히 칭해지는데 고대엔 훨씬 더 광대한 나라였지요. 아프리카 북동부, 미쯔라임 바로 아래 쪽의 고대 제국으로, '에티오피아'와 동격으로 취급되는 까닭은 구약성경이 그리어 역인 70인경(LXX)에서 그렇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70인경은 72명의 유대학자들이 미쯔라임 알렉산드리아에서 썼지요. ]


쿠쉬란 이름은 본래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으로 나타나며(창 10:6-8), 고대 중동지역에 머물다가 형제 미쯔라임(에집트의 조상)과 함께 남부로 내려갔습니다. 쿠쉬의 아들/손자 중엔 '쉐바'란 이름이 나타납니다. 즉 쉐바는 쿠쉬 족의 일부였습니다.    

쿠쉬 제국은 대체로, 청 나일, 백 나일, (현재 수단의) 아트바라 등의 강 유역 등에 발달한 나라로, 에티오피아를 비롯, 누비아, 에리트레아/소말리아 지역 등을 포함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쿠쉬를 당대 아프리카 전체로 보기도 했습니다. 전성기 때는 미쯔라임까지 정복한 데다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미쯔라임 제25왕조의 피예, 타하르카 등 다섯 파라오들이 쿠쉬 출신들입니다 .
또 쿠쉬 땅엔 남부 아라비아 일부도 포함됐다고 아랍인들이 주장합니다. 그들은 쉐바 여왕이 아라비아에 근거지를 뒀다고 주장하지요. 

지도: 쿠쉬의 전성기 이전 영토

쿠쉬 왕조에서는 왕을 '쿼레', 여왕을 '칸타케'로 불렀는데, 쉐바의 여왕도 칸타케로 불렸을 터입니다. 먼 훗날, 초기교회 시대에 예루샬렘을 방문했다가 집사 필맆에게 침례를 받은 쿠쉬 왕궁의 재무장관도 칸타케('아만티테레' 여왕으로 추정)의 내시(=환관)였지요(행전 8:27).

레호보암 시대에 예루샬렘을 침입했던 미쯔라임의 파라오 쇼셍크(본 시리즈 31회 참조)는 당시 쿠쉬/룹(리비야) 군 다수가 포함된 대 연합군을 끌고 온 바 있습니다(연대B 12:3b).


또 한 판의 기적 대승

아무튼 제라가 이끄는 쿠쉬 군대가 마레샤에 쳐 들어 왔을 때였습니다. 마레샤는 레호보암 왕 때 요새지로 구축한 곳이지요(연대B 11:8). 
유다의 아사 왕은 약 60만 국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맞서 마레샤 부근 제파타 계곡에 진을 쳤습니다. 아사는 과거 아버지 아비야 왕대에 유다군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승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주/야웨님! 
수가 많든 힘이 약하든 주님이 도우시는 데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도우소서, 오 주/야웨님, 우리 하나님!  
우리가 님을, 그리고 님의 이름을 믿고서, 
이 대군에 맞서 나왔습니다.  
주/야웨님, 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건대, 사람들이 님을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열(?) 받으십니다! 마치 "오냐, 말 잘 했다! 니 말대로 하마!"라고 하시는 듯 아사와 유다군 앞에서 적군을 패주시키시니까, 유다군이 곧장 추격하기 시작, 남쪽 카데쉬와 슈르 사이의 펠레쉩 지방인 게라르까지 이르렀습니다. 놀랍게도..100만 쿠쉬 군대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완승이었죠.

아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유다를 사랑스럽게 생각하신 하나님이 유다군에게 철저한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이지요.

사진: 고대 쿠쉬의 유적

더욱이 하나님은 게라르 부근의 펠레쉩(=불레셋) 등 여러 민족이 감히 유다를 넘보지 못하도록 그들에 마음 속에 두려움을 뿌려 놓은 사이, 유다 군은 내친 김에 그 모든 도시들까지 쳐 버리고 쿠쉬는 물론 이 도시까지 탈취합니다. 엄청난 전리품을 몰수히 거둘 뿐더러 양/낙타 등 수많은 동물들을 천막 속에서 지켜 가며 예루샬렘까지 끌고 왔습니다.

다들 지쳤지만 대승의 기쁨에 잔뜩 젖어 흥겨웠습니다.

바로 이 때에 맞춰 하나님의 메신저가 나타납니다. 오덷의 아들 아자리야였지요. 그는 성령으로 격려와 함께 경고 연설을 합니다. 

  "..여러분이 주/야웨님과 함께 하면 주/야웨님께서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34회 참조. 이하 생략)


주님은 왜 이때 아자리야를 시켜 이러셨을까요? 
제 때에 격려, 칭찬과 더불어 훗날을 위한 경고를 미리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쉽게 풀이한다면, 잘 될 때 조심도 하라는 충고입니다. 
위기를 예방하고 대처해 지금처럼 계속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경고가 필요했던 이유를 우리는 나중에야 밝히 알게 됩니다.


변질과 배신

아니나다를까, 과연 평화 시절 10년이 지난 뒤 위기 때, 아사 왕은 주님을 배반하기 시작합니다. 즉 그의 통치 제36년. 바로 북 이스라엘의 바아샤 왕이 쳐들어 온 때였지요.
북군은 유다를 치러 올라와 아사에게 아무도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고 예루샬렘 부군의 라마 성을 요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아샤는 아사 왕이 즉위한지 제3년에 북국 초대 왕 야로브암의 아들 나답을 배신, 살해하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금송아지와 아쉐라 목상 등을 섬긴 야로브암 왕의 시대는 단 2대로 끝난 것이지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셈이지만, 바아샤 역시 선대와 다름 없는 사악한 군주였습니다.  

바아샤는 이스라엘을 24년간 다스리면서 남쪽의 아사왕과 자주 다투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작심하고 아사 왕과 수도 예루샬렘을 고립시키려고 나선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중대한 전시의 위기에 아사 왕이 변질됩니다. 
과거와 같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자기 꾀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주/야웨님의 성전 창고와 왕실 창고에 보관해 놓았던 금과 은을 꺼내어, 이웃나라 아람(=쉬리아)의 왕 벤하닫(아람어: '바르하닫')에게 조공 삼아 수도 다메쉨(=다마스쿠스)으로 보내면서 자신의 전략대로의 지원을 청합니다. 순전히 인본주의 대책이지요.

아사는 앞서 대 쿠쉬 전에 승리한 뒤 과거 선왕 아비야가 성별(聖別: 거룩하게 구별함)해서 하나님께 바쳤던 것과 본인이 직접 따로 성별했던 금/은/기구들을 성전에 들인 바 있습니다(연B 15:18). 그로부터 불과 10년 후 그는 다시 그것들과 자기 궁에 있던 금은까지 챙겨 다메쉨으로 보낸 것입니다.

[ 아람 왕 '벤하닫'이란 이름의 뜻..'벤'(아람어 '바르')은 아들이란 뜻, '하닫'은 아람 사람들의 주신인 '우레의 신'이었습니다. 벤하닫은 타브림몬 왕의 아들, 헤지온 왕의 손자였습니다(왕들A 15:18). 벤하닫이란 명칭은 거의, 미쯔라임(에집트)의 '파라오'처럼 아람 왕을 가리키는 통칭이기도 합니다. 이 벤하닫을 훗날 요아쉬 왕 때의 벤하닫2세(왕들B 13:3, 24)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빋 왕 시대에 과거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세력을 펼치던 아람 소왕국의 하나인 조바의 하닫에제르(=하닫 신은 나의 도움이란 뜻)가 전마차 1,000대와 기병 7,000명 등을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다 다빋에게 왕창 패배한 뒤, 조공을 바치고 친화조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연A 18:3-8 참조).


그랬던 아람이 근래 이스라엘 바아샤 왕과 조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아사 왕이 말한 '조약'이란, 선조 다빋 때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그 친화조약이 왕마다 대대로 이어져 왔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람은 다빋 이후 이스라엘/유다와 대체로 친화를 해 오다 벤하닫 때 와서 외교적 효과를 위해 이스라엘-아람 조약이 급체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조약은 깊지 못해 금방 깨져 버립니다. 
아사 왕이 두둑한 금/은 뇌물을 제공하자, 북쪽과는 해약하고 남 유다 쪽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초기에 소왕국 그룹이었던 아람은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된 뒤 군대를 키우며 갈수록 강대 세력으로 떠 오릅니다. 나중엔 남/북 왕국을 수시로 넘보고 침입하는 처지로 바뀝니다. 유다/이스라엘이 신앙이 기울면서 아람에게 헛점을 보인 것입니다.

이후부터 아람은 심심하면 두고두고, 틈틈이 남/북 양국을 교대로 침입, 얻을 것을 얻고 챙길 것을 챙기는 고약한 버릇을 키워 갑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남/북을 통탄하신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허용하셨기 때문이지요(왕들B 13:3,4). 
나병환자였다가 대언자 엘리샤를 통해 고침 받은 저 유명한 나아만 장군도 바로 아람 왕국의 국방장관이었지요.
다빋 왕은 당당히 아람을 쳐 부수고 정리한 데 비해 남/북 분열 왕국은 점점 아람의 콧대를 높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튼, 벤하닫은 생각치도 않게 난 데 없이 남 유다로부터 절로 굴러 들어 온 번쩍거리는 금/은 보화에 "이게 웬 떡이냐?!" 싶자, 즉각 아사의 말에 응해 지휘관들과 군대를 보내어 북 왕국을 침입합니다. 이스라엘 낲탈리 지족의 땅의 이욘을 비롯, 단,아벨마임(=아벨/벹마아카) 등 주요 요새지와 낲탈리의 보급창고 도시들, (역시 낲탈리 지역인) 갈릴리(=킨네렡/킨노롵) 호반 도시들을 점령해 버립니다. 아람의 군사력을 짐작케 해 주는 대목이지요.

소식을 듣고 보급로가 차단된 줄로 알아 챈 북국 바아샤 왕은 하는 수 없이 라마 요새지 건축을 중단하고 늦기 전에 부랴부랴 수도 티르자로 퇴각해 버립니다. 
믿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하나요..조약을 맺었다가 하루아침에 배신한 아람에게, 뒤통수를 된통 얻어 맞은 것입니다. "벤하닫..이, 이런 괘씸한..못 믿을 놈이로군." 이를 갈고 눈물을 머금으며 그 때로부터 평생 유다와 아사를 괴롭히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아람의 도움으로 바아샤의 침공작전 차단에 성공한 아사 왕은 무릎을 치며 "우하! 그럼 그렇지..역시 내가 그렇게 하길 잘 했어!", 크게 웃고 신나게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세 좋게 즉각 시국 전환에 나섭니다. 온 국민에게 소집령을 내려, 북군이 구축을 중단한 라마 요새지에 내버려진 모든 건축 자재, 돌과 목재들을 실어 나르게 합니다. 백성이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강제 동원돼 갈릴리-요단강 수운 작업으로 나른 돌과 재목을 북쪽과의 접경 지대인 벤야민 지족 지역의 게바(=일명 '게바 벤야민', 기베아, 가바)와 미즈파, 두 도시를 요새화 하여 국경 수비를 대폭 강화합니다. 
 

아사의 죽음

그러나 정작 주/야웨님은 아사 왕을 매우 괘씸하게 보십니다. 사람이 10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죠! 대 쿠쉬 전쟁에서 '거저 먹기'식 대 승리와 엄청난 전리품을 안겨 주시고 10년간 평화시대를 허락해 줬건만, 그 은덕은 새카맣게 잊어 먹었는지 하나님을 아주 무시해 뒷전에 밀쳐 두다시피 하고 '단독 드리블'을 했을 뿐더러, 성전에 이미 바쳐진 보물들을 제멋대로 다시 꺼내어 아람에다 넘겨 버렸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아사의 이런 배신적 행각이 다가 올 줄 미리 내다 보시고 10년 전 당시 대언자 아자리아를 통해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이 앞날을 잘 내다보실 줄 모르는, 불완전한 신, 비전능한 신으로 규정해온 소위 '열린신론'(Open Theism, Open Theology)은, 따라서 거짓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언제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절대자이십니다! ]

도대체, 고작 10년 세월이 뭐기에, 아사는 이렇게도 변한 것일까요...? 
전쟁이 없던 평화 시절,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대 쿠쉬 전쟁에서 이긴 후 그의 마음은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졌을 것입니다. 전승이 부분적으로 자기 공로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르지요. 1백만 대군을 전멸시키고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는 등 완승을 거둔 데 대해 주변 나라에서 경탄과 찬사가 자자하고, 북국 백성들도 나날이 남국을 그리며 넘어 오자 그는 자만심으로 넘쳤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거늘 그는 '주제파악' 정신을 놓쳐 버립니다. 
 
이런 해이하고 오만해지는 마음은 마귀가 갖다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하고 무사 안일할 때 더욱 마음을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과거 슐로모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주변의 모든 국가가 굽신거리고 전혀 전쟁 걱정 없이, 백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놀고 먹는 수 십년의 평화시대가 계속되자, 마귀는 슐로모의 수많은 아내들을 통하여, 슐로모의 마음을 주/야웨님으로부터 우상에게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아사의 이런 모습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깨우치십니다. 뉘우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선견자(先見者/'라아') 하나니가 왕에게 나아와 이런 하나님의 심경을 전달합니다. 

    "왕께서 아람 왕에게 기대시고 왕의 하나님 주/야웨님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아람 왕의 군대가 폐하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쿠쉬와 루빔(=리비야) 무리가 대군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의 말과 전마차들이 엄청나게 많지 않던가요? 그러나 왕께서 주/야웨님을 의지했기에 야웨님이 왕의 손에 넘기셨던 것입니다. 주/야웨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펴보셔서 자신의 온 맘을 그 분께로 향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하십니다. 왕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기에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역정을 버럭 내고 당장 대언자 하나니를 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울러 그즈음 왕이 국민 몇 사람들을 학대했습니다. 

3년 후 아사 왕은 발에 중병이 나서 앓기 시작하지만, 이 때도 마음이 비뚤어져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국내 의사들에게 진료를 부탁합니다. 
중환을 만나 죽게 되자 벽을 향해 꿇어 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어 목숨을 10년 연장 받았던, 그의 먼 후손 히즈키야 왕과는 매우 대조적이지요(참고: 왕B 20:1-7).      

발병이 심해졌는지 왕은 2년 후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백성들은 비록 왕이 생시에 잘못을 했다곤 하나 너무 아깝고도 아쉬워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왕이 생시에 다윋성에다 미리 자신을 위해 파 둔 무덤 속에 매장하되, 온갖 향재와 향품을 가득히 채운 침상 위에 시신을 올려 놓고 경의를 표합니다.

'왕들' 기자는 아사 왕이 몇 가지 잘못을 제외하곤 평생 그 마음이 곧았던 점을 높이 샀습니다(왕A 15:14). 그러나 훗날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는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했지요. 이 산당은 두고두고 백성들의 미혹거리가 됩니다(왕A 22:43, 왕B 12:3, 14:4).

아사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왕이었기에 참으로 아까운 군주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하나님만 잘 섬겼더라면, 더 장수하면서 나라를 더욱 든든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사 왕의 왕세자는 예호샤팥. 예호샤팥 역시 부친과 맞먹는, 퍽 훌륭한 왕이 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었지요. 그러나 그에게도 역시 약점은 있습니다. 즉 북국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아하브와 사돈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북쪽 사정

한편, 북 이스라엘 왕국의 바아샤 왕은 통치 23년만에 죽고 그 아들 엘라가 대신 왕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오므리 장군이 이끄는 국군이 기뻬톤에서 펠레쉩 군대와 맞서 있을 때, 왕은 수도 티르자의 왕궁관리 아르짜의 집에서 거나하게 술에 만취돼 있을 때, 수도에 남아 있던 (전마차군단의 절반을 맡아 있던) 지므리 장군이 조용히 쿠데타를 일으켜 엘라를 죽이고 대신 왕이 됩니다.

지므리는 바아샤-엘라 왕실의 모든 친지/친구들까지 깡그리 죽였는데, 몇년전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했던 대로 입니다(왕A 16:1-7, 11-13). 즉 바아샤 생시에 하나님께서 대언자 예후를 통해 바아샤를 꾸짖기를, "맨 땅에서 널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건만, 너는 야로브암과 똑 같은 길로 행하고 내 백성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여 나의 진노를 부추겼다"시면서 야로브암 집안처럼 모두 쓸어 버리겠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모두 그대로 이뤄집니다! 성경 여기저기의 남은 예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므리는 쿠데타에 성공해 수도 티르자를 차지하고 왕이 되긴 했어도 단 7일만 통치하고 끝납니다. 기뻬톤 진지에 있던 국군은 지므리의 반역 소식을 듣자, 오므리 장군을 왕으로 앞장 세우고 돌아 와 티르자를 완전 포위한 것입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 전마차군단의 나머지 절반을 맡은 장군이었을 터입니다. 이름도 엇비슷한 지므리-오므리의 대치 상황은 전마차 군단장끼리의 쟁탈전이 될 뻔 한 셈이지요.

그러나 벼락군주 지므리 왕은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수도가 함락돼 버리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왕궁 요새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궁에다 방화를 한 뒤 자신도 타 죽고 맙니다. 고대 샤울 왕의 뒤를 이어 '자살군주 2호'가 된 것입니다.

지므리는 쿠데타 후 불과 1주일 동안 왕위에 올라있는 사이 그 역시 야로브암/바아샤/엘라 왕과 다름 없이 궁중의 우상을 섬겼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실 수 없는 상황이죠(왕A 16:19). 

이스라엘 왕실은 이제 '콩가루' 위기입니다. 지므리의 자살로 오므리에게 절로 굴러 들어 오게 된 왕위가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군대의 절반은 기낱의 아들 티브니를 왕으로 앉히려고 그를 따랐고 절반만 오므리 곁에 남습니다. 그러나 오므리 측 군대가 티브니 측을 진압했고 티브니는 죽습니다. 짧은 기간에 3명의 '왕'들이 각축전을 벌인 셈입니다.


오므리의 사마리아 천도

신왕 오므리는 북 이스라엘 역사 상 비교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수도를 티르자로부터 쇼므론(=사마리아)으로 옮겼기 때문이죠. 그는 12년 재위 기간동안 티르자에서 6년간, 새 수도 쇼므론에서 6년간-각각 절반씩을 통치합니다.

사진: 오므라 왕의 이름이 언급된 '모압 비석'
(일명 '메샤 비문')


오므리는 티르자에서 6년간 지내다 보니 우선 티르자 왕궁이 불타 버려 꺼림직한 데다, 자신의 왕위를 지탱해 줄 요새지로서는 빈약하다고 판단합니다. 건국 이래 짧은 기간 동안 왕대가 여러 번 마구/자주 바뀌자, 그는 자신의 신변 안전도 강화할 겸 위상도 떨칠 수 있는 마땅한 수도감을 찾게 됩니다. 
 
그러던 중 부호인 쉐메르가 보유하고 있던 산지를 둘러 보고 "바로 여기다!" 라고 판단, 은 200 키카르(탈렌트)로 매입해 궁성을 건축하면서, 쉐메르의 이름을 따서 '쇼므론'으로 부릅니다.  

사실..초대왕 야로브암이 첫 수도로 삼았던 쉐켐은 쇼므론 산지의 일부이기도 했지요. 쇼므론 산지에 있던 '축복 선언의 산' 게리찜과 '저주선언의 산' 에발 사이의 도시였던 쉐켐은 고대 선조 야콥의 거주지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히비 족(한글성경 '히위 자손')의 일파인 하모르 부족의 근거지로 그 땅 일부를 야콥이 은 1백냥을 주고 구입해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제단도 세운 곳이지요. 그러나 야콥의 아들들이 여동생 디나를 강간한 하모르 왕자 쉐켐 등 현지인들을 전멸시켜, 결국 나머지 모두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쉐켐은 훗날 판관(사사) 시대에 명 판관/장군 기데온의 첩과 그 아들 아비멜렠이 살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야로브암 왕은 그후 또 다른 임시 수도 페누엘을 거쳐 티르자로 옮겨 갑니다. 티르자는 나답-바아샤-엘라-지므리 왕대까지 수도였다가, 오므리 왕대에 와서 쇼므론에 수도 자리를 넘겨 주게 됩니다. 
결국 오므리는 초대왕 야로브암의 거주지 부근으로 되돌아 온 셈입니다.

오므리 왕은 야로브암 등 과거 모든 왕들보다 더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격동시켰고, 그의 아들/며느리는 저 유명한 최악의 군주 커플-아하브(아합)/예제벨(이세벨)이었습니다! 

오므리가 건설한 새 수도 쇼므론 즉 사마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여러 모로 유리한 곳이었지만 장차 극악한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저주받다시피 했고, 주민들은 대대로 유대인들에게 천대를 받게 됩니다. 쇼므론의 원어 쉐메르는 '남은 포도주', '포도주 찌끼'란 뜻입니다. 

대언자 미카가 지적한 대로(밐 7:16a) 오므리와 아하브는 북 왕국 최악의 왕들이었고 이후 왕들도 북국의 멸망 때까지 이들을 계속 본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