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황금기-여호사밧 치세(메시아계보대장정36)
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2009/04/05 20:49
사진: 예호샤팥 왕의 '무덤'으로 일각에 알려진 출입구.
다빋의 아들 아브샬롬의 기념비 바로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부근 일대는 '예호샤팥 골짜기' 또는 '판단(심판)계곡'으로 불린다.
초대 왕 때부터 선한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는
달리..
남 왕국 유다엔 하나님께 선의를 품었던 왕들이 퍽 많았습니다.
아비야
아사
예호샤팥(=여호사밧)
요아쉬(=요아스)
아마찌야(아마시야)
아자리야(우찌야=웃시야)
요탐(요담)
히즈키야(히스기야)
요쉬야(요시야)
이는 무엇보다 이들의
선조 다빋을 아끼시고 그 등불을 꺼지지 않으마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주/야웨님의 큰 사랑 때문이었지요.
이 왕들 중 다수가 "하나님의 마음과 맞는 마음"을 지녔던 선조 다빋(=다윗)과 비교되곤 합니다.
아울러 모두들 다빋의 후손이자
메시아의 선조였지요.
특히 아비야-아사-예호샤팥은 3대에 이은 선한 군주로 우리를 흐뭇하게 해 줍니다.
몇 가지 과오와 약점, 단점들을 빼 놓고는.
예호샤팥 왕대는 가히 유다
왕국 전반기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의 아들 예호샤팥은
35세에 등극합니다.
[ 그의 어머니는 실히의 딸, 아주바였는데,
이름의 뜻은 여성으로선 드물게 '버려짐/폐허더미'란 뜻을 갖고 있어,
혹 예언적 이름은 아닌가 생각되는 군요.
고대 카나안 정복 당시 예슈아(여호수아)와 함께 유일한 1세로 진입,
헤브론 성을 정복한 유다 족
지도자, 칼렙 장군의 아내도 동명이인입니다.
아무튼 이 이름처럼,
예호샤팥 다음 3대 군주들이 폐허처럼 내동댕이 쳐 집니다.
바로 아하브(아합)와의 연계
탓이지요. ]
예호샤팥의 이름은 '주/야웨님이 판단/심판하셨다' 또는 '주/야웨님은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엔 왕 예호샤팥 말고도 4명의 동명이인-예호샤팥들이 더 있는데,
대체로 모두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예호샤팥 대에 이런 좋은 때를 누릴 수 있었음은 주/야웨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슐로모(=솔로몬)가 비록 후년에 수많은 여성/우상들 탓에 극도로 타락했지만,
전반기엔 '예디디야'(주/야웨님께 사랑받는 사람)란 이름까지 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당대 세계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듯,
예호샤팥도 거의 그렇습니다.
그가 잘 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곧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상 다빋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바라봤지, 우상 바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율법/계명들을 실천하고 북 이스라엘의 행실을 본받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사 왕의 신앙을 본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얼마나 "이뻐" 보였겠나요!
주님은 왕에게 온갖 좋은 것은 다 주고 싶으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이상 주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호샤팥 역시,
예외 없이 훗날 하나님을 적당히 배신합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어 버린 소치이지요.
국방 강화 (17:1,2, 12-19)
예호샤팥 왕의 괄목할 업적들이 하고 많지만,
그는 우선적으로 국방을 대폭 강화합니다.
일종의 '부국강병' 정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증조부 레호보암 왕 때 요새화된 모든 유다 도시들을 방비할 군대를 주둔시키고
유다 전국과, 선친 시대에 침공해 점령했던 북 이스라엘의 에프라임 땅 성들에다
수비대를 배치합니다(연대B 11:5, 15:8 참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국력이 점점 더 강해지자,
즉위 몇 년 후엔 유다에 추가로 요새들과 국고성들을 짓고,
유다 각 도시에 보급식량을 저장할 뿐더러 수도 예루샬렘에다 전사/용사들을 배속시킵니다.
사실, 예호샤팥 시대 국군 병력은 100만이 넘어
사상 최강을 자랑하던
때였습니다.
연대B 17:12-19에 따른, 당시 지족 별 사령관 수하의 군대 규모는
이렇습니다:
아드나/30만(용사들)
요하난/28만(일반 병력)
아마시야/20만(용사들)
벤야민
족
엘리아다/20만(창/방패 무장)
예호자받/18만(전사들)
합계: 116만
왕국 초기의 규모보다는
훨씬 배가된 규모이지요. 그밖에도 곳곳의 요새지와 성에다 수많은 수비대를 배치했다니 추가 병력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150만 정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용사/전사들 모두가, 총사령관인 왕의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국방과 전쟁에 임하는 섬김이들이었지요. 특히 유다 족의 아마시야 장군은 자신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친, 헌신적인 신앙과
열정의 군인이었습니다(위
16절).
그러나 예호샤팥 왕의 훌륭한 점은..
비록 국군이 이처럼 막강하고 장군과 용사들이 많아도
군대의 힘보다는 늘 하나님을 우선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참 보기 드문,
현왕(賢王)/명군(明君)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은 그러한 왕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방의 모든 나라들 속에 유다를 겁내는 두려움을 주셔서
감히 예호샤팥을 넘보지 않게
몸소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늘, 믿는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시 35:2, 에페소 6:16)!
아멘.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 유다와 예호샤팥을 존중하게 만드셔서
고래로 이스라엘의 숙적인 펠레쉩까지도 각종 예물/은 등의 조공을 바쳤고,
멀리 아라비아 족도 숫양/숫염소를 각각 7,700마리씩 모두 14,000마리를 갖다 바칩니다.
물론 왕이 주문한 적도 없습니다만.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지요.
펠레쉩은 과거
판관(=사사)시대부터 통일왕국을 거쳐 분단되기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특히 통일왕국시대 초기엔 샤울과 전쟁을 반복한 나라였습니다. 다빋은
한때나마 펠레쉩의 신세를 지기도 했지요.
하여튼 기회만 있으면
이스라엘/유다를 넘봐 온 나라입니다. 샤울 치세 하의 통일왕국 시절 펠레쉩의 명장이 다빋의 물맷돌에 맞아 죽은 거인 골리앝이었지요.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은 펠레쉩이란 이름에서 비롯됐습니다.
먼 나라인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이 숫양과 숫염소 등 가축 떼를 대거 예물로 보낸 사실은 놀랍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라비'/'아르비' 등으로 불린 아라비아는 비록 이스라엘/유다에선 멀리 떨어진 나라였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유다와 꽤 인연이 있는 나라입니다.
아라비아인들은 고대로부터 잘 알려져 있고 슐로모 시대에는 그곳 왕들이 금/은 예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연대B 9:14). 숫염소/숫양들은 아라비아 유목민 주산물로 이스라엘의 양들과 교역하기도 했습니다(에제키엘=에스겔 27:21, 예샤야후=이사야 13:20).
그러나 흥미롭게도 훗날
예호샤팥이 과오를 저지를 때, 이 펠레쉩과 아라비아 사람들은 다시 적으로 돌변합니다. 바로 예호샤팥의 아들 예호람 왕이 악정을 베풀 때, 모두
배신할 뿐더러 적대감을 갖고 예호람의 왕자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주된 원인은 바로 훗날 예호샤팥이 북국의 악한 왕 아합과 사돈 및 동맹을 맺은 탓이지요.
하지만 훗날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다를 초강의 문명국가로 만든
아자리야(=우찌야) 왕은 펠레쉩과 당대의 구르바알에 살던 아라비아인들에게 응징을 가하기도 합니다.
아라비아 민족은, 그보다 더
나중인 바빌론 포로기 후 총독 네헤미야(=느헤미야) 시대엔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면서 네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예루샬렘 성 재건
작업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느헤미야
2:19, 4:7).
신약시대인 먼 훗날 오순절엔 유대계 아라비아인들이 성령 강림을 맛보기도 합니다(행전 2:11).
한편 자국민들인 유다 족도 예호샤팥 왕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온갖 예물을 수시로 바쳐, 왕이 극도의 부와 영예를 누렸다고 성경은 밝혀 줍니다(17:5).
한결 같은 주/야웨님 경배(17:3,4)
예호샤팥 왕은 우상숭배에 쉽게
빠지던 다른 남/북 군주들과는 달리 온 맘으로 한결 같이 하나님만 경배했습니다. 바알림(카나안 족의 주신/복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찾을
뿐더러 나라 안의 산당과 아쉐라 목상들을 모조리 제거했습니다.
부친 아사
왕을 그대로 본받은, 올곧은 정신이 아닐 수 없지요(연B 14:2-5, 15:16).
걸림돌-산당
그러나 예호샤팥은 야웨 경배에 있어, 아버지 아사와도 같이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주요
산당들('바마'. 복수 '바모트')을 제거하지 않은 사실입니다(20:33, 왕들B 22:43). 백성이 제사를 드리는 주요 산당은 간혹 임시로 야웨 경배에도 쓰였으나(슈무엘A=삼상 9:12, 연대A 16:29, 왕A 3:4
등) 고래로부터 편법 예배 또는 우상숭배의 근거지이기가
쉬웠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미쯔라임(에짚트) 출국 후 광야시대 때
이미 산당 제사를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신명기 12:2-5 '높은 곳'=산당). 그러나 성막/성전이 생긴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폐습이자 악습이었습니다. 남북이 다
그랬습니담(왕A
13:33)
아사 왕 때도, 마땅히 없애야 할 이 중요한 걸림돌이 제거되지 않았습니다(연대B 15:17). 예호샤팥도 아버지 아사처럼 이교의 우상 산당들은 제거했지만(17:6, 비교 14:2
끝), 야웨 제사를 겸했던 산당들은 과감히 처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랜 훗날까지 이 관행은
지속됩니다(왕B 12:3, 14:4,
15:4,35, 17:32). 그만큼 산당 예배는 질기고 끈끈한
유혹적 관행이었던 모양입니다! 두고두고 선의의 왕들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지요.
야웨 경배도 겸했던 산당 제거 작업을 최초로 단행한 왕은 히즈키야(연대B 31:1, 이사야 36:7, 참고: 왕B 18:4,22). 그나마 히즈키야의 아들 메나쎄 왕 때 잠시 부활했다가(왕B 21:3, 연대B
33:3,17) 손자 요쉬야 왕대에 가서야 다시
뿌리뽑히지요(왕B
23:8,9,15,19,20). 역대 군주들 중 요쉬야 만큼
철저히 개혁을 단행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말씀 교육
(17:7-9)
아무튼..예호샤팥은, 비록
초기에 훌륭했지만 말년에 중대한 몇몇 약점들이 있었던 아버지 아사의 지난 날을 곰곰히/꼼꼼히 살펴 봤을 것입니다. 그런 약점과 단점들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또한 우상 척결, 율법 준수 등 아버지의 훌륭했던 점을 모두 본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이 바로 말씀 교육이었습니다.
즉위 3년째 되던 해, 예호샤팥은 율법에 정통한 당대의 학사들-벤하일/오바디야/제카리야/네타넬/미카야를 유다의 여러 도시에 파견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게 합니다. 그들의 도우미 격으로 레빝 지족 사람들 10명과 엘리샤마, 예호람 등 두 사제들도 보냅니다. 모두 율법에 밝은 당대의 라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주/야웨님의 율법책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책을 들고 가서 이 모든 도시들을 두루 순회하면서 국민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혹과 위기 (18:1)
그러나 사람은 역시, 높이
오를 때 삶을 조심해야 하는 법..예호샤팥의 영예와 부가 최고조에 이르자, 마귀는 슬며시 유혹의 손길을 뻗쳐 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라의 기반이 탄탄해지자, 왕은 엉뚱하게도 북
왕국과의 정책적인 외교'란 것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도 왕세자를 미끼로.
예호샤팥의 큰 과오인 이것은 훗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토록 선한 예호샤팥이 어쩌다, 그토록 사악한 오므리의 아들 아하브의 왕실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일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국 최악의 군주인데도 말입니다.
예호샤팥은 아마도 나라가
커지니, 마음에 여유로워져서 지금까지 숙적으로 지내 온 이스라엘과 친교 관계를 맺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형님 나라'처럼 생각됐는지도 모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남북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닙니까.
그리고 선친 때 북
왕국 오므리 왕이 수도를 쇼므론(사마리아)으로 천도하고, 아들 아하브 대에 와서도 퍽 장기간 통치하는 등 과거와는 사뭇 다른 '업적'을
역사적으로 눈여겨 보게 됩니다. 극도로 우상숭배를 하는 등 하나님 보시기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말입니다. 예호샤팥은 이 점에서 하나님보다
'관대'하려던 모양입니다.
[ 현대에도 이처럼 관대한 사람들이 많지요.
성경과는 다른 다양한 영성을 무차별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맘을 소유한 교계 명사들 말입니다. 마음이 넓다 보니 결국 좁은 길 아닌 넓은
길로 걷게 됩니다. ]
아니면, 혹시, 천하의 요녀 예제벨과 아하브 사이의 딸이 유난히 예쁘다(?)는 소문에 며느리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는 예제벨의 명성을 들은 아내로부터 "우리, 그 부부와 한 번 친하게 지내보면 어떨까요"란 식의 부추김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예호샤팥은 이들과
사돈지연을 맺을 뿐더러 급기야 남/북 동맹조약까지 맺고 아하브의 대 아람 전 출전 당시 몸소 참전하기까지 합니다.
예호샤팥의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 보시기엔 참으로 천만 위태롭고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요.
놀랍게도 예호샤팥은 하나님께 단 한 마디도 여쭤 보지 않고 제 발로 아하브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습니다. 이 점에서는..하나님께 질문을 여쭙기도 바빴던 선조 다빋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나님도 속으로 통탄하시면서 그냥 놔 두시고 맙니다.
왜 하나님은 소위
'절대주권'으로 이런 그를 막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시고 도우시던 왕이 하루 아침에 싸탄의 꾐에 빠져 이런 일을 저지르자, "그래..그럼 너 좋은 대로 해 봐라"고 이 일에 상관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호샤팥을 그냥 내버려 두시진 않고 여전히 지키시고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크신 사랑이지요!
하지만..훗날 그 아들/손자 대에 가서는 무섭고 끔찍한 결과를 허용하십니다. 후대에 길이 경고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지요. 아무리 좋은 왕이라도 잠시 하나님을 저버리고 마귀에게 한 눈 팔 때, 끔찍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하브-예제벨 (참조: 왕들A 16:29-33)
본 시리즈의 주된 흐름을
지탱하기 위해 예호샤팥 왕가와 사돈 지간인 북국의 아하브-예제벨 부부에 관해선 여기서 긴 얘기를 하지 않으렵니다만..예호샤팥과 사돈지간이었던
이들의 '꼴'이 어땠는지를 대강 훑어 보기로 하지요.
지난 회에서도
언급됐듯 아하브의 부왕 오므리는 당시까지 북국 사상 최악의 임금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런데 아하브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악한
군주입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악에 팔려 지낸 사람이었지요.
아내를
잘못 얻은 탓이기도 합니다(왕A
21:25).
'절세의 미녀' 보다는 절세의 마녀였던 예제벨은 찌도니(시돈 족)의 군주 엩바알의 딸이었습니다(왕A 16:31). 엩바알이란 이름은 "바알의 총애를 받아 살다"라는 뜻입니다. 찌도니는 바알과 함께 여신 아쉬타롵/아쉐라를 열렬히 추앙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과거 슐로모도 찌도니 여성을 아내로 맞아 우상숭배에 몰입한 바 있지요(왕A 11:1,5).
예제벨은 아하브와 결혼하자 때는 왔다는 양 친정 아버지 밑에서 갈고 닦은 바알/아쉐라 교를 즉각 시집 이스라엘로 도입합니다. 그러자 남편 아하브도 덩달아 수도 쇼므론에 건립한 바알 사당 속에다 제단도 쌓고, 아쉐라 목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바알교와 아쉐라 교는 그래서 아하브 치세에 최고 전성기를 이룹니다. 아하브-예제벨 부부 시대에 바알/아쉐라교 대언자만도 850명이나 됐습니다.
예제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야웨님께 속한 북국 대언자학교 출신의 대언자들 수 백 명을 학살합니다. 자기 딴엔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했지만 궁내대신 오바디야의 배려로 100명은 생존합니다. 아하브-예제벨 부부는 또 선량한 농장주 나봍의 포도밭을 탐내어 결국 나봍을 죽이고 포도밭을 강탈합니다.
아하브-예제벨 시대는 탁월한
대언자 엘리야가 활약한 시대이기도 하지요.
훗날 엘리샤에게 대언자직과
함께 영감의 상징인 두루마기를 승계하고 승천한 엘리야는 예수님의 '변화' 사건 당시 구약 지도자 모쉐와 함께 구약 대표급 대언자로 세 제자들
앞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저 유명한 카르멜 산 대치 사건 때 유일한 주/아웨님의 대표로서 하늘에서 내린 제단 불 이적 끝에
아하브-예제벨 왕실의 바알/아쉐라 대언자 850명을 모조리 잡아 죽입니다.
악의 씨밭
예호샤팥의 연혼을 통해
남/북은 예호샤팥-에호람-아하찌야 등 3대에 이르기까지 표면 상의 '화친'/동맹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사실 상 하나님을 배신한
동맹관계였습니다. 동맹 관계를 얻는 대신 야웨 신앙을 일시 팔아 먹게 됩니다.
그 결과, 예호샤팥의 후대인 아들 예호람, 손자 아하찌야가 차례로 아버지가 아닌 북국의 아하브를 닮아
사악한 왕들로 타락하고 단명해집니다.
예호샤팥 왕실에 시집 온
아탈리아, 곧 아하브-예제벨 부부의 딸은 혹 '얼짱'이었는지는 모르되, 사악한 부모의 영을 고스란히 전수한 악의 씨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호샤팥의 왕세자 예호람은 아내 아탈리아로부터 건네받은 이교
정신으로 주 야웨님을 배신하는 온갖 사악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요. 그의 통치 기간은 아버지의 약 5분의 1에 불과한
8년입니다.
아탈리아는, 아버지 아하브를
마구 쥐어 흔들던 어머니 예제벨의 페미니즘도 전수 받은 탓인지 훗날 예호람의 씨를 말리다시피 하고 스스로 여왕이 됩니다. 남북 왕국 사상 유일한
여왕입니다. 어머니 못쟎은, 독하고 무서운 여인이었지요. '그 엄마에 그 딸'의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녀의 통치기는 고작 6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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