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메시아 계보 대장정

3년 통치 아비야 왕(메시아계보대장정32)

영국신사77 2015. 10. 9. 22:25




바탕 본문: 왕들A(왕상) 15:1-8, 연대기B(역대하) 13:1-22


이스라엘 왕국시대가 시작돼 샤울을 비롯, 다빋-슐로모 등 불과 3대를 거친 동안 왕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통탄해 오신 하나님은 당초 작정하시고 예고하신 뜻대로 슐로모의 아들 레호보암 왕 때에 유다-이스라엘 분열왕국 시대로 접어 들게 하셨습니다. 

본 시리즈 앞편(제31회)에서 비친 대로, 궁극적으로 슐로모와 후계자들의 우상숭배 죄악의 결과로 아들 레호보암의 통치기간은 부친 집정기의 절반 길이도 안 되는 불과 17년. 그 손자 아비야(=아비얌) 때는 고작 3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비야 역시 메시아의 조상의 한 명입니다(마태 1:7).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뜻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요!

아비야의 선조들

아비야는 부왕 레호보암이 사랑했던 아내 마아카(일명 '미카야', 고 압샬롬의 외손녀. 압샬롬의 '딸'로 기록돼 있는 것은 후손을 아들이나 딸로 통칭하기도 하는 히브리 관습 때문. 연대B 11:20)의 아들입니다. 흔히 성경 속 사가(史家)들이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엄연히 여성인 왕의 어머니를 밝힐 때..여기 은근히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은 물론,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과도 같이. 뿌리가 중요하다는 암시이지요.

마아카는 압샬롬의 딸 타마르(압샬롬의 이복 형 암논에게 성폭행을 당한 압샬롬의 누이, 타마르와는 동명이인. 슈무엘B=삼하 13:1-23 참조)와 기베아 사람 우리엘 사이의 딸이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연대B 13:2. 요세푸스의 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도 이를 뒷받침함). 아마도 어머니를 존중하던 타마르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 자기 딸의 이름을 '마아카'로 불렀을 테지만 아버지 우리엘은 비슷한 이름 '미카야'("누가 주/야웨님 같으랴!"란 뜻)로 고쳐 불렀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 마아카/미카야를 레호보암 왕이 둘째 아내로 고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아카는 얼굴은 아름다웠는지 모르지만 '미카야'란 이름 답지 않게 사악한 여성이었습니다. 즉 아쉐라 우상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던 것입니다. 이 우상은 레호보암-아비야 대를 거쳐 차기 왕 아사 때까지 존속해 있다가 주/야웨님만 섬긴 선한 왕이었던 아사의 철퇴를 맞게 됩니다.  

아쉐라는 고대 근동에서 아모리 족, 카나안 족이 섬긴 여신으로 고대 우가맅 문서에 따르면 엘 신의 배우자겸 모신으로 바알을 포함한 70신의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카나안 7족은 거의 공히 남신 바알과 여신 아쉐라를 주신으로 섬겼기에 하나님은 일찍이 미쯔라임 출국 이후 카나안 정복을 한참 앞둔 광야시대 때 향후 이 우상들을 찍어 버리라고 미리 경고하신 바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정반대로 행합니다. 이 바알과 아쉐라는 훗날 아합 등 이스라엘 역대 왕들이 섬긴 주신이기도 했지요.

마아카의 외할아버지, 압샬롬(일명 아비샬롬)은 우리가 아는 대로 스스로 왕이 되려고 아버지 다빋을 배신하고 수도 예루샬렘을 찬탈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살해된 반역자입니다. 다빋이 육신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건만 쇠뿔로 들이받듯 그 사랑을 역으로 치받은 것입니다. 압샬롬은 그래서 아버지가 다스려온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곤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내쫓고 수도 찬탈에 성공했을 때 남아있던 아버지의 첩들을 대낮에 뭇 백성이 보는 가운데 강간하여 욕 보였습니다. 초기 포르노의 한 장면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이 비극의 원인은 아버지 다빋의 범죄-밭쉐바와의 간통 및 우리야 암살-에도 있습니다. 
자연히..그런 압샬롬에게서 우리는 그다지 선한 열매를 기대하기 힘들지요.

더욱이 압샬롬 자신도 똑 같은 이름의 이방 여성, 마아카의 소생이었습니다. 이 마아카는 일찍이 다빋이 순전히 외교적 목적으로 연혼(連婚)한 게슈르 왕 탈마이(또는 '톨마이')의 딸이었지요(연대A 3:2). 게슈르 족은 아람(현 시리아)과 가까운 지역 사람들로, 남쪽으로는 미쯔라임(에집트)의 옛 영토와의 접경지역에 살았습니다. 고대에 미쯔라임을 떠나 광야생활을 하다가 카나안으로 접근해 온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전력이 있는 민족이기도 하고요. 
아브라함의 친척과 같은 후손인 아람과 동반 관계인 게슈르는 또 일찍이 판관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영토 상당량을 빼앗았던 일이 있습니다(연대A 2:23). 게슈르라는 말의 어원은 '다리'(bridge)라는 뜻과 함께 "자랑스럽게 쳐다본다" 즉 거만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게슈르의 이 거만한 영이 핏줄인 압샬롬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빋은 한때 게슈르 족을 정벌하다시피 혼내 준 적이 있습니다만(슘A=삼상 27:8), 아마도 탈마이 왕의 딸 마아카의 미모에 반해 아내로 삼음으로써 탈마이와 사돈지간이 되어 정치적인 화해를 한 모양입니다. 이 마아카에게서 천하미남 압샬롬이 태어납니다.

더욱이 압샬롬은 누이 타마르를 겁탈한 맏형 암논을 죽인 뒤 3년간 외조부가 다스리는 게슈르로 피신해 있던 적이 있습니다(슘B=삼하 13:23-39). 이때 압샬롬은 외조부 탈마이 왕에게서 좋지 못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탈마이는 외손자에게 "네가 제대로 출세하려면 네 아버지 다빋을 내쫓아야 한다. 일을 저질러라"고 지시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다빋의 손자인 레호보암은 이 압샬롬의 외손녀인 마아카 왕후를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본래 레호보암은 첫 아내로 할아버지 다윋의 다른 아들인 예리뫁의 딸이자 다윋의 형 엘리압의 후손인 딸인 마할랕과 결혼해 세 아들을 얻었지만 두 번째 얻은 이 마아카를 가장 사랑했고 왕세자 아비야를 비롯한 네 형제를 낳았지요(연대B 11:21). 그밖에도 레호보암은 16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으니 가히 그 아버지(슐로모)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 합니다.
 
레호보암은 일찍이 왕세자였을 당시 아버지 슐로모의 전도서/잠언 등의 교훈을 통해 현숙한 아내를 얻어야 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슐로모 자신이 전혀 결혼생활에 본을 보이지 못했기에 레호보암도 아버지께 본 받은 자기 취향 대로 눈에 띄는 여성을 택한 것이지요.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레호보암 자신의 어머니 나아마도 암몬 출신입니다(왕들A 14:21). 천 명이나 되는 처첩들을 거느리면서 그 여성들이 유입해온 우상들을 꼬박꼬박 받들어 숭배하는 데 앞장선 슐로모가 데려온 이방 여성의 한 명이었지요(왕들A 11:1). 그래서 레호보암에게서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격인 아비야가 태어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습니다.

아비야는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했고 증조 할아버지 다빋의 신앙은 저멀리 저버렸습니다. 레호보암이 충신들의 충언을 거부했듯 아비야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 아비야에게 좋은 조언을 해 줄 사람들은 아예 없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웨 하나님께서는 다빋을 사랑하셨기에 예루샬렘을 여전히 견고히 하셨다는 사실. 더욱이 아비야의 아들 아사는 훌륭한 군주로서 왕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었고 하나님은 아비야의 짧고 아쉬웠던(?) 치세기를 아사 시대에 다시 대폭 보태어 주십니다. 

제마라임 전쟁

아비야는 비록 아버지 레보호암이 행한 모든 악한 일을 본받아 저질렀지만, 한 가지 선행이랄 만한 일이 있습니다. 치세 초기에 발발한 남북 전쟁 당시 하나님을 의지한 사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군을 도와 대승을 거두게 하십니다. 이것은 '왕들'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연대기엔 퍽 자세히 기록된 사건입니다(연B 13:2 이하).

이 전쟁을 학자들은 '제마라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아비야 왕이 제마라임 산 위에서 개전(開戰) 연설을 한 때문이지요(연대B 13:4). 제마라임 산은 유다 영토에 속한 벤야민 지족 땅의 일부였고(예슈아=여호수아 18:22), 야로브암 왕이 금송아지를 세워 둔 벹엘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고대 벤야민 지족의 도시 또는 에프라임 족 땅의 산이었던 제마라임의 현 위치가 어디냐에 대해선 견해가 분분합니다. 랍비 요셒 슈바르츠는 요르단강에서 약4마일 떨어진 평원 여리고 북쪽의 폐허가 남은 '키르벹 에스사므라'(일명 키르밭 알 자므라)였다고 주장합니다. 비슷한 이름 사마리아에서 유추됐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대교 성서학자 Y. 아하로니는 ('메샤 스텔레'='모압의 돌' 발견자로 유명한 프랑스 예술인/외교관/고고학자, 샤를 시몽 클레르몽-가노의 견해를 따라) '라스 에스-자이마라'로 보기도 합니다. 그밖에 여러 다른 지역 설도 있습니다. 

이 전승 사건은 아비야의 극히 짧은 통치기간에 비해 매우 상세히 기록돼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요. 즉 연대기 기자는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늘 잘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교훈의 효과를 최대화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전쟁을 좀 상세히 살펴보렵니다. 

바로 분열왕국 시대가 시작된 레호보암-야로브암 때 부터 남북전쟁이 시작됐고 수시로 재발했습니다. 아비야 때도 야로브암과의 사이에 발발했고 그 다음 아사 때도 남북전쟁은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이 전쟁처럼 대규모였던 적은 없습니다. 제마라임 전쟁은 북 이스라엘군의 도발로 시작된 것으로 봐 집니다(연대B 13:8a,12끝부분)

하나님은 자주 전쟁을 그분에 대한 신뢰의 바로미터로 삼으시곤 합니다.

야로브암 치세 제18년에 일어난 이 전쟁은 야로브암의 여러 경력이 아비야보다 축적된 시기였고, 북군의 규모도 커서(80만) 유다군(40만)의 2배였기에 응당 북군이 이길 만한 군세였지요.

그런데 북군에 응하여 남군을 이끌고 맞싸우게 된 아비야는 웅변적인 개전 연설을 합니다. 간추려 보면, 하나님은 '소금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의 집을 영원히 다빋과 그 후손에게 주시기로 하셨는데 야로브암이 배신하여 레호보암을 대적해 유다가 당시 많은 영토를 뺏겼는데도 다시 북군이 호전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남측에 비해 볼 때, 북 이스라엘의 신앙과 경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즉 야로브암은 이교를 본받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터무니 없는 제도와 방식으로 엉터리 사제들을 세워 우상숭배교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반면 남왕국 유다는 성전에서 사제들을 율법과 전통에 따라 야웨를 제대로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히 선한 왕이 아니었던 아비야의 이 연설은 다소 과장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게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 아비야의 이 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이 그의 치세 초기에 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야 자신도 레호보암처럼, 야로브암 못지 않게 범죄했을 당시엔 이처럼 자신만만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비야는 연설 도중, 아버지 레호보암이 나이가 "젊을"(어릴) 때 왕위에 오른 시기에 전쟁도 벌어졌었다고 회고합니다(13:7). 당시는 레호보암이 41세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비야가 아버지에 비해 훨씬 더 나이가 든 중년기 말엽쯤 왕위에 올랐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레호보암이 퍽 일찍 장가를 들기 시작했다는 추정도 가능하고요.] 

승전의 열쇠-하나님의 개입

아비야의 남 유다 왕국 군대가 승전한 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남군은 어느 모로 보나 불리한 데다 북군은 유다 군의 뒤쪽으로 복병을 매복시켰습니다. 남군은 앞뒤로 포위된 사실을 뒤늦게 알자 기겁하여 하나님께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물론 죄가 극심하여 습관성/중독성 수준일 때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정 말을 듣지 않을 때는 호소도 듣지 않고 망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옛날 충성스럽던 왕 다빋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빋에게 유다 왕조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고 지탱해 주시기로 하신 언약을 상기하신 것입니다(왕들A 15:5).

남군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소리를 지르자 하나님은 즉각 개입하셔서 야로브암의 군대를 치십니다. 그러자 방금까지 군세가 유리했던 북군이 패주하기 시작합니다. 때를 놓칠 세라 남군은 북군 뒤를 바짝 추격해 무려 50만명의 목숨을 이삭 줍듯 줍습니다. 절반도 못 되는 30만명만 살아 남은 북군은 결국 패운의 낌새를 느껴 항복하고 맙니다.

연대기 기자는 여기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대(자손)가 항복하고 유다 군대가 이겼다. 이것은 그들이 그 선조의 하나님 주/야웨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라고.    

과연 그렇지요! 이 전쟁은 남군이 패전하기 십상이었는데 순전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긴 한 판의 기적 전쟁이었습니다. 

남군은 승전할 뿐더러 아비야 왕의 뒤를 따라 북왕국에 쳐들어가 금송아지 숭배 처소가 있던 남쪽 끝 벹엘/예샤나/에프론 등 3개 도시와 그 주변 마을들을 모두 전리품으로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주/야웨님의 도움으로 이처럼 대승을 거둔 아비야는 애석하게도 야로브암 왕보다 먼저 숨졌고 그 아들 아사 왕이 즉위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원수인 야로브암도 죽습니다(왕A 14:20, 15:9 참조). 그러기에 아비야는 짧은 기간 내 빨리 강성해졌다가 빨리 타락하고 빨리 죽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아비얌 = 바닷신이 아버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야 왕의 이름입니다. 
남북 역대왕들의 기록인 '왕들'A (열왕기상)는 '아비얌'으로, 유다 역대왕들이 기록인 연대기서는 '아비야'로 서로 다르게 기록한 상호 간 차이는 주목할 만 합니다.

아비야는 '주/야웨님은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비얌'은 '바다의 아버지', 또는 "해신(海神)이 나의 아버지"란 뜻일 수 있습니다. '얌'은 카나안 족의 우상의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비야 왕의 오류를 명백히 지적한 '왕들' 기자는 이 이름을 통해 아비야 왕이 바닷신을 신/우상의 하나로 섬겼다는 암시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선, "바다가 내 아버지"란 의문의 이름 뜻이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연대기 기자는 (13장 끝 부분에서) 아비야가 점점 강성해지다 보니 그 짧은 생애(?), 치세기 동안에도 아내 14명, 아들 22, 딸 16명을 뒀다는 놀랄 만한 사실을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늦으막에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아비야 왕은 이 전승에 힘입어 방만해져서 과욕을 부리다 끝내 요절한 게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사실 이같은 일부다처는 아비야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할아버지 슐로모의 외교적(?)인 엄청난 과다 축첩행위는 그렇더라도..아버지 레보호암 자신도 처첩 78명을 거느린 데다 아들 28명, 딸 60명 등을 거느릴 뿐더러 왕세자 아비야를 비롯한 모든 왕자들에게도 아내를 많이 구해준 것을 봐도 말이지요.

아무튼 우리가 깨닫는 중요한 사실은 다빋의 등불은 세상의 빛, 메시아의 찬란한 등대가 나타나 비췰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는 진리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