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메시아 계보 대장정

복의 연줄 (메시아계보대장정3)

영국신사77 2015. 10. 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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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메시아-복의 연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히브리 족의 첫 선조이자 복의 뿌리와 샘이었던 것이죠(창 12:2b).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숨지면 '아브라함의 품'(낙원)에 안겼습니다. 

[여기서 잠시: 사실 '복의 근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 '베라카'는 그냥 복이란 뜻이고, '-근원'이라는 직접적인 낱말은 곁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대부분과 한글 성경 일부는 'source' 또는 '근원'을 뺐지요. 그러나 분명 '근원'이란 어의가 베라카에 포함될 수 있음을 여러 렉시콘(원어자전)이 보여줍니다. 
하물며 복 받은 사람들의 원조인 아브라함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란 말은 하나님이 본디 복의 근원이 아니시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은 그 분이 지정하신 복의 근원이다-라는 말이 되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사람일 수 밖에 없음은 고대의 하나님의 사제 멜키쩨뎈의 축복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님. 가장 높으신(지존자)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주소서." 
   (창 14:19)

그 아브라함의 복이 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뿌려집니다(갈라티아 3:8b,14. 로마서 4장 전장 참조).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메시아의 관계는 단지 법적/혈연적 관계일 뿐더러 복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복이 믿음으로 대물림 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지요(롬 4:13,16,23, 갈 3:7,9 참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서 비쳤거니와 비슷한 말씀을 거듭거듭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b. 12:3, 26:4도 참조).

즉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경로/채널은 바로 메시아를 통해서지요! 그 메시아는 성자님이 인간 되어 오신 예수 크리스토이시고요. 다음 성구가 이를 입증해 줍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a)

위에서 '네 씨'란 단수,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이것을 파울은 갈라티아서 3:16에서 해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 받을 '천하 만민'에 포함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복이 어떤 복입니까? 너무도 많지요!

사실 아브라함을 통해 복 받은 사람들은 많지요.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융성했음은 주변을 둘러 보시면 잘 아실 터이고..유대계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들인 이슈마엘(이짜크의 이복 형), 에사후(야콥의 형)의 후손들이 나름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복된 사람들은 누구냐.. 바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를 믿는 사람들입니다(롬 3:22, 4:6~8)!


아브라함은 어떤 '복'의 근원?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복이 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니 그가 영적인 복을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크리스토를 믿기만 하면, 역시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인 은총을 다 누릴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롬 4:15,16, 15:9 참조). 여기까지는 아마 안 믿거나 의심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을 터입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아브라함의 복이 과연 영적인 복 뿐일까요? 많은 신학자들은 그렇게들 믿고 있지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현상은 그런 신학자들도 주일날 '만 복의 근원 하나님',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찬송가 가사를 부르며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만 복'이 뭡니까? 복의 근원이 뭡니까? 하나님이 모든 복의 뿌리란 얘기가 아닌가요?
[저는 신학을 욕 보이겠다는 게 아니라, 신학은 성경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성경을 올바로 올곧게 분변하여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학이 진리 이해에 도움되야지 성경 이해를 방해하면 안 되지요!]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때 모든 생물들을 복 주셨습니다(창 1:22). 번식하고 창성하라고. 그러나 인간에겐 월등한 복을 더 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릴 거의 신적(!)인 통치권과 함께 역시 번성, 번영의 복을 더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시 8:5~8, 창 1:26~30). 더욱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할 수 있는 특권도 주셨습니다(창 2:9, 3:22b).

그러나 최초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써, 이 통치권은 합법적으로 싸탄에게 넘겨졌으나(루카=눅 4:5~7. 참고: 요복 12:31b, 14:30, 코린토B=고후 4:4, 요서A=요일 5:19b)..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 때 선언하신 복 때문에 죄인들은 아직 자연과 정부/제도/사회의 통치권 등 제한된 권한이나마 그럭저럭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율법을 어긴 이래 유전적 죄성 즉 '원죄'를 물려 받고 또 본인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계속 짓는 엄청난 죄악으로 각 사람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 왔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한 평생 겪는 질병/가난/고통/재앙/억압/부자유/두려움/죽음 등이 모두 율법의 저주와 그 증상들입니다(신명 27:11~26, 28:15~68). 사상 최악의 역병인 에이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이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한 율법의 모든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킨 것입니다(갈 3:13). 할렐루야!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 즉 구주로 믿고, 이젠 더, 과거의 노예주인 마귀가 아닌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면, 먼저 우리는 모든 죄와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 8:1,2 에페소 2:1)! 그것이 복음입니다. 아울러 마귀와 죄의 노예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 예수님의 동생들로서 하늘 보좌에 앉힌 바 됐습니다(히2:10~17, 엪 2:6b). 할렐루야! 그것이 구원이요 거듭남이요 영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복은 달랑 구원 뿐만은 아닙니다. 아울러 남은 삶을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라고, 말세의 '방주'로서 세워주신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복음을 권능있게 역동적으로 전하라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 두세 사람 이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고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교회가 바로 현세의 천국입니다. 주님은 "그대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뤀 17:21). 물론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보좌를 삼은 내 속에도 천국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롬 8:9, 계 3:20). 즉 우리는 앞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천국의 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은 어떤 컨텐츠를 담고 있냐는 궁금증에 싸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과연 영적인 복 뿐일까요?

"구원과 천국과 영생-그것만도 족해요! 뭘 더 바라려고..?" 할 신자도 더러 있을 터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굳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만 받겠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복들 중에서 딴 건 다 빼 놓고 구원만 달랑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선 아무래도 좋으니 천국/영생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른 복은 안 받아도 된다는 겁니다. 번영주의, '형통신학'은 싫다는 겁니다. 물질/신유/형통 따위는 지저분해서 싫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되지요. 거부하니까.


그러나 영적인 복 이상의 복이 더 많은데도 몰라서 못 누린다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특히 신학의 영향 탓입니다. 물론 신학은 좋은 것을 많이 갖다 줬습니다. 성경신학 때문에 성경에 대한 통찰력도 여러 모로 깊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잘못된 명제 때문에 교회가 손해 본 것도 많습니다. 뭐냐고요? 이제 곧 설명이 됩니다.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신학은 어디까지나 학문일 뿐, 영적 권능이 없습니다. 신학과 기독교 철학이 사람 영혼 하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딱 하나-복음 뿐입니다(롬10:8~17).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복 8:32) 할렐루야!

신학과 철학은 이론과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신학은 처음부터 생긴 게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일부 인사들에 의해 카톨맄 계 안에 서서히 생성돼 왔고 카톨릭 교회를 통해 먼저 굳혀져 간 운동입니다. 신학자들의 가장 큰 특징과 모순이 뭐냐면..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분으로 한 쪽으로는 믿으면서도 한 쪽으로는 그 분의 초자연적 권능을 적극 제한하고 배제, 심지어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계시의 완성, 계시의 '점진성' 때문이라는 전제 아래.

물론 기록계시는 신구약 성경으로 완성됐지요. 그 이상의 기록계시가 있을 수 없습니다(계시록 22:18,19). 그런데 모든 계시가 다 끝났나요? 아니지요! 계시가 없으면 사람이 망하는데(잠 29:18) 계시가 이젠 더 "없다"면 어떻게 교회가 살아가나요? 어떻게 존속되나요? 사도 파울은 분명히 "..여러분이 모일 때..계시도 있으며.." 라고 했습니다(코린토A 14:26). 그건 기록계시가 완성되면 계시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왜 대언자 요엘은 지상종말이 오기까지 말세에 계시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까(행전 2:17~21. 특히 후반부 참조)?  

아무튼..그래서 신학 때문에, 교회가 초자연적 요소는 빼 놓고 나머지는 다 갖춘 우스꽝스런 모습이 됐습니다. 마치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군인이 전장에 나선 형국입니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교회가 모두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복과 샬롬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크리스토의 몸인 교회의 참 모습일까요? 아니지요!

교회의 참 모습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따라 그분이 마련해 두신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모두 최대한 활용하고 권능을 가동시켜야 바른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 목표인 땅 끝까지 복음 전파를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영적인 복? 

그런데 신학은 온갖 사람의 이론으로 거기에다 이런저런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 브레이크의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이것 -메시아를 통해 우리가 받는 아브라함의 복은 영적인 복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복을 신학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복은 구원 뿐 아니라 성령의 초자연적인 권능/은사도 포함됩니다. 성령의 아홉(9) 열매도 포함됩니다(갈 5:22,2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엔 현세적인 복-물질적/육적인 복도 포함됩니다! 교회가 이 복 없이는 유지될 수가 없지요. 돈 없이 복음 전파할 수 있나요? 돈 없이 교회당을 지을 수 있나요? 그런데 신학 이론은 자연적으로 굴러 들어오는 자원만 활용하지, 메시아를 통해 누리게 돼 있는 아브라함의 현세적인 복은 안 받겠다는 묘한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깨끗하게 영적인 복만 누리겠다는 것이지요.

그럼 하나님이 태초에 자연과 인간에게 주신 복은 불순한 복인가요? 잘 살고 잘 먹고 잘 번식하라고 하신 복은 받아선 안 됐을 성격의 '비복'인가요? 그럼 왜 '만복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는 겁니까? 그냥 '영복(=영적인 복)의 하나님'이라고만 부를 것이지. 
 
신학의 물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물질적인 복은 구약인들과 현재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 신약 신자들에겐 적용이 안 된다고들 믿고 있지요. 정말 측은하고 가련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만 제대로 축복받은 인간들로 여긴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시온주의와 기독교 시온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아브라함의 물적/육적 복은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아닐까요? 돈과 신유, 자녀의 복은 우리의 것이 아닐까요? 천만에! 그건 신학적인 착각이지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결코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메시아를 통해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뿐 아니라 온갖 복이 구약인/유대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똑 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함께 확인해 볼까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갈라티아 3: 5~18 일부 중략)

위 말씀을 보면 (10,13절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크리스토께서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온 율법의 저주는 전술한 대로 가난/질병/고통/억압/재앙/두려움/죽음 등 모든 해롭고 좋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크리스토께서 십자가에 달려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으심으로써 이 모든 저주를 영영 도말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단 크리스토를 믿는 신자들에게만 그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그나마 신학의 전제에 묶이지 않고 순수하게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그대로를 믿는 사람들만 제대로 효력과 효과, 효험을 본다는 겁니다.


온갖 복

자, 구약 때를 곰곰이 살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누린 온갖 복을 발견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이짜크 등을 통하여 자녀 생육의 복을 받았듯, 이스라엘 백성이 미쯔라임(아이귑트=애굽)에서 심히 번성하고 창대해졌습니다(미쯔라임탈출기=출애굽 1:7). 인구가 장정만 세어도 60만이었습니다(12:37). 
그리고 430 년간 노예로 종살이를 하던 미쯔라임에서 모쉐를 통해 탈출합니다(출12:40, 참고: 행 13:19b). 미쯔라임은 여기서 마귀의 상징이지요.

그 뿐인가요..미쯔라임을 떠날 때 이스라엘권 자체의 자산도 고스란히 갖고 나왔거니와 그곳 사람들에 요구하여 온갖 은금 패물과 의류 등을 마치 당연한 것을 받는 양 선물로 받아 챙겨 나왔습니다(출 12:38, 35~36).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요!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과거 똑 같은 미쯔라임에서 많은 선물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12:16 참고: 20:14).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홍해 도해 당시 미쯔라임 전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적군을 전멸시키셨습니다(출 14:6~31). 온 민족이 한꺼번에 멸망 당할 뻔한 위기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광야 생활 40년간 밤엔 불기둥, 낮엔 구름기둥으로 이끄시면서 기온 조절까지 하시며 돌보셨고(출 13: 21~22)  그 오랜 세월 옷이 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게 신비롭게 역사하셨고 먹을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신 8:4,16, 29:5, 네헤미아=느 9:21).

그 뿐인가요..부지 중 병에 걸렸거나 죽은 환자가 없었고 다만 교만 죄로 저주 받아 병에 걸렸거나 죽은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또 죄악으로 불뱀에 물린 사람들 마저도 모세의 놋뱀 지팡이만 바라 보면 낫게 하셨습니다(민수기 21:9). 놋뱀은 바로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를 상징하지요(요복3:14)!

그 뿐인가요..비록 1세들은 예슈아(여호수아), 칼렙만 빼 놓고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2세는 시냇물과 샘이 흐르고 꿀이 흐르고 온갖 곡식과 열매, 광물이 넘치는 카나안 땅으로 진입했습니다(신 8:7~10).  

이것이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 즉 선민으로서 누린 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신실한 약속들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하물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믿는 우리들이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옷이 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똑 같은 이적을 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딴 것으로라도 채워 주시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공사역에 나서자마자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루카=눅 4:18,19)

"..이 글이 오늘 여러분의 귀에 성취되었소."(뤀 4:21b)

할렐루야! 메시아를 통해 죄에서의 해방,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속량의 메시지와 선언이 이뤄질 때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해, 즉 땅과 노예들을 구속할 희년(Jubilee)이 왔다는 것입니다(레 25:8~55 이 61:1,2 참조).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그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마 12:28).

그 은총의 열매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로써 맺히고 베풀어졌습니다! 그 결과 풍요와 자유, 치유, 그리고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왔습니다(요복 10:10). 

그럼 아마도 독자는 물을 것입니다: 죄를 씻음 받고 영생과 구원, 거듭남을 누리게 된 것은 알겠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왜 아직도 질병이 있고 가난이 있고 억압과 부자유가 남았냐고. 
그 까닭은..율법의 저주는 십자가 위에서 영영 도말됐지만(갈 3:13) 우리가 그 효력을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온전히 승리 선언을 하고 바로 내 것으로 챙기기 전까지는 저주의 증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교회 즉 우리에게 묶기(binding)와 풀기(loosing) 권세의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마 16:19). 묶고 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교회 즉 우리에게 권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풍요의 선물, 신유의 은사 등을 믿음과 예수 이름으로 얻어 가난과 질병에서 해방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이미 그 몸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우리가 이것을 누리고 안 누리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주님께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아직도 구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안에서 약속하신 대로 구약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자동으로 누리게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누릴 수 없다는 식의 주장입니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린 것이지,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예수 이름으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믿음으로 나의 의지로, 예수 이름으로 그것-아브라함의 복을 청구해야 합니다! 내 것이 됐음을 선포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교회/신자에게 예수의 이름을 왜 주셨습니까? 단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ritual) 기도 끝에다 꼬리표로 달라고? 아니면 모든 '청구서'에 일일이 써 먹으라고 주신 건가요?

한 번 볼까요? 마르쿠스=마가 16:17,18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징표가 따를 테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악령들을 내쫓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고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

여기 아브라함의 복이 포함돼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님 안에서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 뿐인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b)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3,24, 26)

한 마디로 예수의 이름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그 이름으로 원하는 것을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복과 함께 치유도 풍요도 해방도 예수 이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이 모두를 다 챙겼습니다. 신유도 풍요도, 악령축출도 다 행하고 챙겼습니다. 행전엔 그런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코보 5:14~16은 뭡니까, 그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신학은 오직 초기 교회를 빼놓고 나머지 교회는 여기 해당이 안 된다고 우기니 말이나 됩니까? 그런 발상은 예수 크리스토는 어제나 오늘, 영원히 동일하다(히 13:8)는 말씀에도 어긋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 모든 세대의 교회에 베풀어 주신 것을 예수 이름으로 누려야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우스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님. 그대의 영혼이 잘됨 같이 그대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랍니다"고.

만약 기존 전통주의자들의 말이 옳다면 요한은 이런 식으로 말했어야지요.

     "사랑하는 님. 오직 그대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요한의 사랑받는 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요한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곧 주님께도 사랑받는 사람들이지요.

메시아와 관계를 맺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복도 겸손히 받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만하게.."난 영혼의 복만 받겠어, 딴 건 집어 치워!" 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도 안 받을 뿐더러 남이 복 받는 것을 말리고 심지어 쌍수를 들고 보따리 싸서 다니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더 좋은 언약, 더 나은 언약 아래 거한다(히 7:22, 8:6b)는 우리가 유대계나 아랍계보다 못한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딴 건 몰라도 하나님이 신실한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들은 그분의 자녀들로 챙길 줄 알아야지요. 그것이 슬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영적인 것만이라는 주장은 슬기로운 것이 아닙니다.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는 생각입니다. 이 점 이해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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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nagisa9599@naver.com tnsfPwk 2009/01/28 09:22      

    요한복음의 14,15,16장은 예수님이 잡혀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시지요...

    이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고 난 뒤 겪게 될 제자들의

    공포와 혼란, 슬픔과 고통을 다 아셨고 그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죽어야 하며 아버지께로

    가야만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게 됨을 알려주십니다.

    이 장들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주로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제자들로 

    이뤄진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과 그에 대적하는 세상으로 나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7,8)

    과연 포도나무에 접붙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마음 속에 거하는 우리들은

    무엇을 구하게 될까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아 함께 있었음

    이니라 ..."(요16: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그의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0-12)

    요한 복음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말씀은 분명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기도일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끔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분명 구약도 하나님의 약속이며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예수님의 오심과 승천하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신약의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신약의 모든 명령을 읽어보십시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4-10) 

    우리는 이런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하늘의 복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로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복의 근원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간절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목숨을 맞바꿔야만 했던 그 때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이제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말씀했습니다... 과연 바울은 맺고 풀기를 못하여

    육체의 질병을 고치지 못하고 복을 온전히 못 누린 것일까요...

    두렵습니다... 저도 분명 온전하고 완전하게 안다고 결코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만

    위의 글을 읽으며 제 마음에 에스겔 3:21이 떠올라 감히 용기를 갖고 긴 글을 씁니다..

    혹시 제 글에 오류가 있다면 용서하시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항상 하나님께서

    그 분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지혜와 겸손으로 무릎꿇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 캡틴 2009/01/28 09:38    

      우선 환영합니다. 
      (사족이지만..요새 며칠 사이 여러 댓글 줄 사이에 공백이 많아지는데^^..메뉴의 '서식'난에서 줄바꿈을 조절해 주시면 독자들이 읽기 편할 거 같습니다.)

      쓰신 내용이 다소 우회적(?)이어서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군요.
      좀 더 직설적으로 다시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알 듯 말 듯 해서^^.

  2. Favicon of http://nagisa9599@naver.com tnsfPwk 2009/01/28 12:42      

    직설적이면서도 어떻게 해야 좀더 제 본 뜻이 잘 드러날 수 있을까 많이 고심하게 되네요^^; 일단 위의 제 댓글은 복의 의미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즉,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의 복과 신약시대의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복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죠...

    구약시대가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의 믿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승천 이후 성령께서 직접 저희에게 가르치시며 저희 안에 내주하시는 신약 시대의 믿음은 장성하여 단단한 것을 씹어 먹을 수 있는 수준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구약시대의 복을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당연히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다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팔복말씀도 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가난함, 애통,온유,의에 주리고 목마름,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 의를 위한 핍박입니다... 결코 아브라함의 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셈이죠...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보고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할 것이라 말씀하셨고(요16:2), 바울도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며(롬 8:37) 베드로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벧전 4:14)라고 했습니다...

    병고침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믿는 자의 간구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나 바울도, 디모데도 병고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병 조차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는 선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에 대해 성경이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면 저로서는 분명 오해의 여지가 너무나 큰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에 위의 댓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은 실제적 삶에서 누리는 어떤 재정적, 신체적 복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복'이라기 보다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가 이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실 수도 있는 것이구요... 그럴 때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를 제해주십사 3번이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네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어쩌면은 냉정하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복'은 결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알고 그 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핍박을 당해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고통 안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용기,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고린도후서 6장 4절에서 10절을 보십시요... 어느 누구도 믿는 자가 아니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주신 복은 바로 그런 삶을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맛보고 그 은혜에 직접 참예하는 바로 그 복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요즘 '긍정의 힘', '잘되는 나'와 같은 식의 책들이 줄을 잇고 있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라는 글을 찾아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마지막 때가 가까와지는 것 같습니다...
    하기사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말세의 시대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육의 것을 심으면 육의 열매를 얻고 영의 것을 심으면 영의 열매를 얻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아신다는 것을 믿고 필요가 아닌 진정한 복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 캡틴 2009/01/29 04:53    

      님의 선한 뜻은 잘 압니다.

      복에 관해선..제 자신도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요. 특히 보수신학을 배우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같은 교단의) 옛 담임목사님이 강조하시던 소위 '기복적' 신앙과 십일조 문제는 제게 중요한 의문을 떠올려 주곤 했습니다. 
      제가 성경의 복관에 관해 절대적 확신을 얻은 것은 미국인교회의 성경적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자보다도 옛 담임목사의 복관/십일조관이 옳았다는 결론을 얻은 것입니다. 부정 못할 확실한 증거들과 함께.

      제 스승들(일부)을 비롯한 신학자들 다수는 십일조는 옳다면서 십일조에 결부된 복은 기대하지 마라는 모순을 보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런 모순을 보입니다.

      저는 신약시대의 새 언약이 구약시대의 옛 언약보다 못하다면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못하다면 누가 "믿어 주려고" 하겠나요..?
      우리가 딴 것 다 누리고도 유대인들이 받은 기본적인 복만은 누리지 못한다면, 그건 결코 복음이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철학적/추상적/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복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멜키쪠뎈의 복, 말라키 3:10의 복, 시1편의 복됨, 마태복음 5장의 행복, 갈라티아서 3장의 복 등을 혼동해선 안됩니다. 이 복관들은 잘 분류할 것들이지 결코 서로 모순된 것들이 아닙니다.

      님이 강조하신 (그리고 일부 신약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시1편, 마태5장의 복됨/행복은 주로 존재론적/주체적/본질적인 행복, 또는 형용사적/근원적인 행복에 가깝습니다. 거기 비해 말라키 3:10, 히브리서 7:1-10의 복은 보다 더 객체적/명사적/대상적인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편으로 더 나아가 갈라티아 3장의 복은 위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고 봅니다. 이건 궤변이 아닙니다^^.

      위의 행복관과 복관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갈라티아 3:7-14에서 말하는 복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누리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3:13이 말하는 '저주'는 복과는 반대개념입니다. 여기서 갈라티아 기자(파울)는 (십일조의 경우처럼 율법시대 500년 전의!) 아브라함의 복임을 은연중 강조하며 이것은 히브리서 7장과도 일치합니다. 

      만약 복이 중요하지 않다면 저주도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돌이켜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시대를 거쳐 카나안에 진입하자마자 (모쉐의 유언대로) 동시에 둘로 나뉘어 에발 산에서는 저주 선언을, 게리찜 산에서는 복 선언을 합니다. 

      에발 산에서 선포된 저주는 여전히 인류에게 상존합니다. 
      마찬가지로 게리찜에서 선포된 복도 여전히 인류에게 유효합니다. 
      갈라티아서에 따르면, 후자는 신약시대엔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더 해당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됐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이스라엘에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모든 것이 네 것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복들은 기본적으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생(이방우상종교를 뜻함)들, 돼지(이방인을 상징)들과 어울리던 탕아였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옷(의/거룩)을 갈아 입히고 금반지(성도/자녀의 신분)를 끼우고 풍악(기쁨/행복)을 울리고 대 연회(복/천국)를 베풉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맏아들이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더 큰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누리던 것들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고 해 봅시다. 
      요한복음 10:10에서의 '생명'만 누리고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믿음/구원/건강/장수/치유/번영/풍요..등등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거나 절반만 누린다고 해 봅시다. What's so good about it.....?

      그건 복음, 즉 복된 소식, 기쁜 소식, 기분 좋은 소식이라고 하기가 어렵지요.
      남은 잘 되는데 나만 덜 되는 건 복음, 복된 소리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만 모시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한 채 예수님만 잘 믿으면 만사 오케이, 행복해집니까? 

      교회가 십일조만 받고 성도에게 복이 안 간다면 교회가 '행복'해집니까?

      치유를 말해 보죠.
      예수님 당시 물론 치유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어서 주님은 '자녀들의 양식'이라고 하셨고 심지어 개들에게 던져줌이 마땅치 않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당대의 이방인 여성은 믿음으로 치유를 얻었습니다. 
      이것, 중요합니다! 믿음과 치유..이것은 아브라함의 것인데 이방인 여성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비단 그뿐인가요? 분명히 나아만 장군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임에도 불구, 믿음으로 치유 받았습니다. 더구나 당대에 유대인 나환자들이 많았지만 오직 나아만만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성령이 오신 후 어떻게 됩니까?
      택한 선민, 택한 자녀의 경계와 벽이 무너져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택한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계속 구원, 성령의 권능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녀의 신분이 이방인의 것도 됩니다. 
      믿음이 이방인의 것도 됩니다.
      복도 이방인의 것도 됩니다. 
      치유도 이방인의 것도 됩니다. 

      만약, 유대인에겐 되는데 이방인에겐 안 되는 것, 유보된(reserved)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성경은 그게 뭔지 밝혀줄 겁니다. 그게 뭘까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시대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오히려 메시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겐 영적 복이 유보된 셈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영/혼/육의 모든 것입니다.)

      분명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도/장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님. 님의 영이 잘 되듯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시길!"

      요한이 이 말을 한 대상은 바로 이방인 가이우스였습니다! 

      성경말씀의 모든 언약들, 그리고 십일조에 연계된 약속된 아브라함의 모든 복은 믿거나 말거나 오늘날 우리에게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오직 크리스토 안에서(IN CHRIST)!

  3. 버들피리 2009/01/29 04:01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구약의 복과 신약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복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범사가 잘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잘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일이 잘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을 벌든 출세를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부만 강조하다 보니 고난과 정직과 공의는 사라지고 오히려 맘몬에 종 노릇 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장로는 돈이 많거나 출세를 해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있는 사람만 당연 선출 되야 한다는 풍조가 교회마다 만연해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이 잘 산다면 좋은 일입니다. 구제도 많이 할 수 있고 여러모로 좋은 일들이 많겠죠. 하지만 돈이 없어서,또는 우리가 못 살아서 한국 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복을 받았고 여타 물질적인 복, 자녀가 잘 되는 복들은 부수적인 은혜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 세대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곳곳에 살아 나고 저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동화 되지 않고 정의롭게 살기만을 더 소망 합니다.

    • 버들피리 2009/01/29 05:20    

      제가 복이 다르다고 표현 한 것은 하나님의 복 자체가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하신 복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복이 다르 다는 말씀으로 드렸습니다.

    • 캡틴 2009/01/29 05:30    

      님의 선한 뜻도 역시 느껴집니다. 
      그러나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다르다"고 한다면 복의 하나님은 변질될 수 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더 나아가 갈라티아서 3:9,14이 무의미해집니다! 사도 파울은 분명히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당시 만물을 복. 주셨고 지금도 그 복은 유효하지, 무효하지가 않습니다. 복의 법칙은 영원합니다. 

      복은 영/혼 만의 것은 아닙니다. 
      영/혼/육/물 모든 것의 좋은 것들입니다. 

      저는 시1편의 행복론이 마5장의 행복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다만 위 두 장은 존재론적 행복론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시1:3은 행복자가 하는 일들이 다 잘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의 요서C(요삼서) 1:2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성도가 야콥이 십일조 약정을 하면서 복을 구한 것을 '야만' 정도로 여깁니다. 문화적인 기도가 못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의 재/부재=유/무 이것이 관건입니다. 

      만물이 그렇듯 우리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복이 없으면 못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복'이란 영/혼/육/물적인 전차원/전인적/통전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구약적')복이 따로 필요없다고 하는 신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 풍조와 함께 눈여겨 볼 현상은 십일조 무용론입니다. 

      복이 필요없으니 십일조도 쓸모 없다는 주장이지요.
      또는 십일조는 내가 알아서 내지만 복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관대하고 대범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신앙이 바른 신앙일까요?
      아니면 할 것을 다 하면서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른 신앙일까요?

  4. 버들피리 2009/01/29 04:54      

    얼마전에 가난한 개척 교회 사모님이 물질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시작전 그 사모님과 함께 봉고차를 나란히 앉아 타고 갔는데,,옷도 흐름한 데다가 신발을 보니 색깔이 탈색되어 허옇터라구요..사모님이 얼굴에 바르는 로숀을 화장지에 묻혀 신발에 문질러서 허연 색깔을 커버 하시더군요. 마음이 짠하여 신발을 하나 사드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개척교회 사모로서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까?..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제가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개척교회가 돈이 없어서 힘든 것이 아니다. 함께 기도로 이곳에 같이 하며 도와달라. 돈이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말았다..등등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 아니고서는 강론 할 수 없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아직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도 없고 결혼 후 모든 가정 제품이나 생필품까지 얻어 쓰면서 여유돈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려 보내는 간증을 들으면서 현 시대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아가 한국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선교를, 복음을 못 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물질을 필요한 곳에 흘려 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5. 버들피리 2009/01/29 05:13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심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저 또한 자식이 잘 되고 건강하게 장수하길 원합니다.인간인 이상 거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복은 조건적인 복이 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순종하면 내가 너희에게 베풀겠다..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통하여 참으로 자유하는 삶을 살고 있슴으로 복이 넘칩니다. 끝으로 많은 목사님들이 록펠러를 예를 들어 십일조의 복을 이야기 합니다만..록펠러가 어떤 사람입니까? 록펠로의 실체를 알고 나면 한국 교회의 명사주의 및 십일조를 거두기 위한 방편임을 알게 됩니다.

  6. 캡틴 2009/01/29 05:14      

    오늘날 현실 교회는 받은 바 복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잘못한다고 해서 성경의 복관까지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 규명을 잘못해서 성경을 손가락질하는 것 밖엔 안 됩니다.

  7. 캡틴 2009/01/29 05:24      

    저는 성경에 약속된 모든 복이 오늘날도 100%(!) 유효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살아 오면서 확인하고 확신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제가 미국인교회에 처음 갔을 때 교회가 전반적으로 권능은 넘쳤지만 퍽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선 우리의 믿음에 따라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수시로 말씀을 통해 강조하셨습니다.

    처음엔 야외예배 때 대절한 교회버스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관과 십일조가 강조되면서 점차 풍요로워지더니..야외예배 때 점차 자가용이 더 늘기 시작했고 마침내 교회버스를 대절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 교회는 제가 떠날 때까지 교회버스가 없었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아담한 새 교회당도 지었습니다. 한 독신 여성도는 부동산이 세 채나 됐고 성령께서는 그 중 하나를 교회건축에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성도는 순종했고 그 이상의 복을 받았습니다. 

    전 구약의 복이 변질됐다거나 약화됐다거나 무용화된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영/혼/육/물의 모든 복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든 말든 말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좋지요.
    성경의 모든 약속에 우리는 '예'로 응답해야지 '아니오'로 응답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모든 면에서 더 좋은 것입니다. 더 감해지거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주/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모자람도 아쉬움도 없으리!

    • 버들피리 2009/01/29 05:28    

      네..저 또한 동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동일한 복을 주시고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조건부 복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함으로 자동적으로 주신 다는 복임을 믿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부자로 살수없다고 봅니다 다 꼬리가 아니라 머리로 살수도 없다고 봅니다 다 장수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에 부하든 가난하든 병들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만 나타나길 바랄뿐입니다.

    • 캡틴 2009/01/29 08:05    

      '조건부 복'이란 말씀은 야콥의 경우를 뜻하신 것인지요? 아니면 말3:10이 잘못됐다는 뜻이신지?

      복이 '자동'이라고 해서 우리가 복을 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데도 모든 게 자동 응답되는 건 아니겠지요. 

      복이 '자동'이라고 한다면 논리상 복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요복 14-16장에서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하시는 듯 한데..저는 신자가 모두 부자가 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풍요와 부의 축적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이 하나님의 뜻이라면..모두들 유교적/수도원적 청빈을 구하고 수녀/수사가 돼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풍요의 하나님이시지, 가난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크리스토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심은 세상적 차원의 가난이 아니라 하늘 차원의 가난이지요. 
      실제로 주님은 물질적으로 쪼들린 흔적이 없습니다. 결례를 행하실 때인 어릴 때 외엔 말이지요.

  8. Favicon of http://nagisa9599@naver.com tnsfPwk 2009/01/29 07:06      

    두 분의 말씀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나 우리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상처를 입기 보다는 서로를 통해 내 자신을 더욱 바르게 비춰보게 되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 어쩌면은 보다 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서로의 선한 뜻을 확인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전적으로 버들피리님의 글에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0절 말씀을 보며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것이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물론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것을 돈을 사랑함으로 바로 갖다 넣어서 해석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제 스스로 제 안에 있는 부패한 마음이 항상 복이라 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바로 끌고 가는 터라 어쩌면은 그만큼 더 조심하고자 하고 더 냉정하게 끊어내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복이란 단어에 대해 조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버들피리님의 말씀처럼 각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에 따라 부하든, 가난하든, 병 들든, 건강하든 간에...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캡틴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여러가지 복에 대해 좀더 다양하고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

    참 신비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 한분으로 이렇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요... 우리의 생각과 분별이 과연 옳바른 것이었는가는 물론 천국에 가서 확인이 되겠지요..우리는 이곳에서 모두가 완전하지 않기에 그때에 가서야 모두 하나님의 본 뜻을 깨달으며 함께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기대합니다...

    그때까지 각자 더욱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며 바르게 분별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매진하며 푯대를 향해서 달리는 버들피리님, 캡틴님 그리고 저와 모든 분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9. 캡틴 2009/01/29 08:10      

    가난이 더 복되다고 한다면 모든 교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교와 구호사역의 배후엔 풍요로운 성도의 아낌없는 손길이 있습니다. 
    자고로 가난하면 그만큼 남을 돕기가 어렵게 됩니다.
    성도와 교회가 늘 풍성하길 기도하라는 것이 사도 파울의 교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욕을 위해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풍요롭길 원하는 것을 
    결코 혼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버들피리 2009/01/29 08:29    

      네^^캡틴님. 우선 자동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먼저 그의 의와 나라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을 근거로 했습니다. 제 어휘력이 딸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건부 복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구약의 복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 할때 주어 지는 복이라 생각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만이 하나님 뜻이고 유익하다란 말씀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각 개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캡틴님 말씀을 읽노라면 오히려 가난한 교회,,가난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지도 안았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 당연한 결과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 캡틴 2009/01/29 19:13    

      - 캡틴님 말씀을 읽노라면 오히려 가난한 교회,,가난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지도 안았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 당연한 결과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 음.. ㅋㅋㅋ 
      재치 있는 느낌이십니다..만은 그럼 저도 다른 방향으로 에둘러, 재치 있게(?) 여쭤 보죠.
      예수님 가족이 결례 무렵까지 한동안 가난했던 것은 복을 구하지 않았기에 어려운 형편이 당연했던 건가요?

    • 버들피리 2009/01/30 07:37    

      야고보서 4장 3절 말씀은 좀 더 묵상 해 볼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3절 말씀만으로는 캡틴님 말씀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1절 부터 보면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전쟁과 싸움이 너희 가운데 있고 너희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서로 죽이고 다투고 싸우고 하는 구나. 이제 너희들 끼리 더 이상 빼앗기 위해 싸움과 다툼을 멈추고 너희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을 이제 나에게 구하라. 너희 정욕을 위한 구함이 아니라면 내가 다 허락하겠노라.."

      교리적인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 캡틴 2009/01/30 08:15    

      "그대들은 먼저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그대들에게 더해 주실 거요." 라는 이 말씀이 '자동'의 뜻으로 이해된다면 다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이 갖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는 탓입니다" (얔 4:2b)

      - 조건부 복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구약의 복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 할때 주어 지는 복이라 생각 되었기 때문입니다. 
      > 복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순종에 포함되지 않나요..?

      -그리고 가난만이 하나님 뜻이고 유익하다란 말씀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각 개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각 개인을 향한 섭리라면, 크리스토께서는 왜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나요(코B 8:9)?
      순교자처럼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 진리 내지 섭리라고 말해 놓고 보면, 누구나 잘 믿기 위해선 가난해야 한다는 결론 밖에 나질 않지요. 그게 기독교의 보편적 사상인가요..?

    • 캪틴 2009/01/30 08:20    

      우선..3절이 아니라 2b절이고요. (님의) 교리적 잘못의 우려는 여기 없습니다^^.

      물론 컨텍스트로 보면, 그렇지요.
      그러나 2b만도 옳은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동으로 올 줄 믿고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칼뱅주의적 '절대주권'사상의 영향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최고통치주권을 믿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자의지가 없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 못 받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루카복음 11:5-13 말씀을 장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10. 캡틴 2009/01/29 08:17      

    오늘날 교계가 풍요를 잘못 사용해서 혼동과 오착을 가져오는 것은 성경의 복관이나 풍요론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사도 파울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은 영구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파울 자신도 때와 상황에 따라 가난에만 처한 게 아니라 풍요에도 처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는..성경 진리에 대해 올바른 방향으로 응답해야 바랍직합니다. 외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반향할 게 아니라 바로 성경 진리 자체 앞에 자신이 직접 응해야만 합니다. 

    성도가 늘 풍요롭기를 바라는 것..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저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가난이 허용되는 수도 있지요. 이 점을 우리는 혼동해선 안됩니다. 
    철학의 가르침과는 달리 가난은 우리의 친구가 아닙니다^^.

  11. 캡틴 2009/01/29 08:30      

    만약 성도의 가난이 처음부터 바람직한 것이라면..
    주님도 태어나셨을 때의 가난을 영구히 지속하셨어야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주님 가정은 단지 결례 때까지 가난했을 뿐..
    박사들의 방문 이후 풍요로워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 가지 예물은 당대의 왕실 급에 해당하는 선물이고 주님의 부모가 이것을 팔아 가업에 보태썼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팔아서 바쳤다는 얘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요셒이 목수 일을 가업으로 일으켜 지방안팎에 유명 목수가 되는 데 일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물려받았고요.
    주님의 가족은 대식구였습니다. 형제가 자그마치 다섯, 누이가 둘 이상이었고 마리아 요셒까지 하면 최소 9명이었죠. 그들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성경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요셒과 주님까지 2대에 이르는 명장 목수였습니다. 

    주님의 공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점심을 수시로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늘 넉넉했고 (이스카리옽이 맡아 있던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까지 했습니다. 
    자고로.. 내게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돕습니까?! 

    가난의 의미, 풍요의 의미를 우린 잘 파악해야 합니다.
    가난이 혹 훈련에 도움될지언정 
    가난 자체가 모범신자의 표상은 아닙니다.

    • 버들피리 2009/01/29 08:50    

      캡틴님 감사합니다. 저 또한 가난이 더 유익하고 풍요롭다라고 말씀드린적도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지금 우리 곁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 보다 더 큰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은혜, 기쁨, 사랑에 감격하여 교회를 섬기며 헌금을 더리며 십일조를 드리지 복 받기 위함으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실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한 기도도 공부를 잘해서 머리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세상풍파와 싸워 이기며 주님 붙잡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일찍 죽어도 감사하며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 은혜임을 믿습니다.

    • 캡틴 2009/01/29 18:57    

      예 저도 님이 고맙고..논쟁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진 말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복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이나 죄가 아닙니다! 

      님의 선의이고 자유이고 옳으심을 인정합니다. 다만..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게 단죄 대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하라는 입장입니다. 말라키 3:10에 명시된 사항이며..이것은 신약시대에 무효화되질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야콥의 서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악입니다. 

      또 님의 선의를 인정합니다만, (그렇다고) 자식이 공부 잘 하고 머리가 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믿음의 기도가 단죄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허영과 욕심이 지나치면 안되겠지요. 

      -가난해도 병들어도 일찍 죽어도 감사하며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 은혜임을 믿습니다.
      > 이 부분의 성경적인 근거는요? 
      혹시 장수가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시는지요?
      페트로A(벧전) 3:10a, 시91:16

      저는 님의 선의를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님의 현 입장이 더 나은 믿음이라고 인정하기도 곤란합니다^^.

    • 버들피리 2009/01/29 23:37    

      캡틴님 저는 솔직히 성경에 황금과 몰약을 예수님이 받으셨다고 해서 부유하게 자랐다고 판단하시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죠. 다만 그렇게 추측하시는 것이지요?
      저는 고향땅에서 복음을 전한 후
      사람들에게 목수의 아들이라고 비난과 조소를 받은 이유는 오히려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집안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돈 많고 부유하고 명성있는 사람이 대접 받는 세상 풍토를 볼때
      예수님 또한 그런 무시를 당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매(요7:15)

      이 말씀을 인용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진 예수님 모습은 부유한 집의 자제거나 비범하거나 평범 이상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또한 이사야 53:2 말씀을 볼때
      온실속에 자라난 화초 보다 질경이 같이 질기고
      억척같게 자라났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 캪틴 2009/01/30 09:58    

      버들피리님이 실망하실까 봐서..미뤘던 댓글을 답니다. 

      (논쟁보다는 유머스런 덕담으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만..논쟁으로 비쳐도 할 수 없죠, 뭐 ㅋㅋ) 

      송구스럽지만 저는 근거가 넉넉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오히려 님의 추정이 더 무리스럽다고 봅니다. 
      결례 전 예수님 가족은 무척 가난했음이 틀림 없습니다(뤀 2:22-24. 참조:레12:8). 부부가 살림이 넉넉치 못해 비둘기를 바친 상황은 눈물겨운 가난의 정경이지요. 
      그러나 동방박사들의 예방 뒤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님께서야 뭐라고 해석하시든 간에 말이지요^^. 참고본문: 마태복음 2:1-12)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라고 하셨는데..초장부터 평가절하 하시려는 의향이 뚜렷하신 거 같아서 으으..아고! 은근히 속상하고 섭섭하군요^^. 
      박사들이 바친 황금/유향/몰약은 분명히 당대의 왕께 바치는 예물이었음에 의심할 의지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 우리의 시각과 현 표준에서 이 예물이 대수롭지 않게 비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대엔 대단한 극상품(極上品)이었습니다! 노예나 천민/평민이 아닌 왕들과 귀족들 수준에 걸맞은 것이었지요. 

      박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왕께 경배하러 왔고..또 왕께 경배했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황금/유향/몰약을 (실례지만) '코딱지' 만큼씩 가져왔을 리는 만무하겠지요?! ㅋㅋㅋ. 비록 결과적으로 가난한 집 어린아기에게 바쳐졌지만, 당대의 어느 왕께라도 기꺼이 서슴없이 바칠 만큼 넉넉하고 많은 양이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 예루샬렘 헤로드 왕 앞에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은 (두번째 실례지만) '코딱지' 만큼의 양을 간단히 포장해서 작은 박스에 넣어 가져온 게 아니라 큼직한 보배합(테사우로스: 즉 왕실/집안 등의 각종 보물을 저장해 두는 함)을 통째로 옮겨 와 그 속에서 꺼내어 바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큼직한 보배합에서 (세번째 실례지만) '코딱지' 만큼의 예물을 그것도 왕님 앞에 꺼내어 바친다는 게 얼마나 안 어울리는 상황이겠습니까!

      더구나 박사들은 머나먼 동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아마도 사막 등에서 (휴대품 보호상) 필수적인 호위 병력과 수행원들을 여럿 거느리고 왔을 터입니다. 그런데 (네번째 실례지만) '코딱지' 만큼의 예물을 그 먼 거리에서 수많은 호위인원을 동원해 가며 큼직한 보배합 안에 달가닥거려 가며(물론 그럴 경우 단단히 포장이야 했겠지만) 예루샬렘 왕궁까지 수고스럽게 옮겨 왔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더더구나 박사들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별빛만을 바라보며 따라 왔습니다. 찬란한 별빛 아래서 (또 실례를 무릅쓰고) '코딱지'만큼의 예물을 들고 달랑달랑 간다는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정성이야 지극할 수 있지만 그걸 들고 왕께 나아간다는 건 좀 황당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고대에 쉬바 여왕이 슐로모 왕을 예방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쉬바 여왕은 무려 금 120탈렌트와 엄청난 양의 향품과 보석을 슐로모에게 선물로 줬는데 그런 향품은 전무했다고 하지요(연대B 9:1,9). 이거야, 군주가 군주에게 바친 것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박사들이 왕에게 바친 예물도 이에 준하지 않았을까요? 그 사이에 아무리 세월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집안은 쉽게 말하면 이 가난한 나자렡 동네에서 졸지에 갑부가 된 셈입니다.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이 예물을 온 동네에 골고루 나눠줬다거나 성전에 예물로 몽땅 바쳤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이건 명백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그분의 독생자-왕들의 왕, 주들의 주님을 당분간 세상에서 키우라고 살림 밑천으로 주신 선물로 볼 순 없을까요? 그렇다면 하늘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설마 '코딱지' 만큼의 선물을 주시곤 "부족할 테지만 잘들 해 봐"라고 생색을 내실 리가..??
      아마도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일확천금은 아닐지언정 적지 않은 거금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째지게?) 가난했던 요셒-마리아 부부가 이 예물을 갖고 넉넉한 살림을 장만하고 무엇보다 명장 목수인 요셒(요셒은 나자렡 주변에서 이름난 목수였음이 성경상 분명합니다)의 사업기반 격으로 활용했을 것은 시쳇말로 '당근'이었을 겁니다. 

      여기까지..황당하기 이를 데 없고 어슬프기 짝이 없는 김삼의 순진한 억측일까요..아니면 매우 근거 있고 일리 있는 유력한 당연논리적 추정일까요?

      [재차 송구하지만..님의 위 댓글 나머지는 이 경우 걸맞지 않습니다.]

  12. 캡틴 2009/01/29 19:18      

    혹시..
    이번 주제(풍요) 문제로 제가 긴 논쟁을 벌인 데 대해 짜증이 나셨다면 용서를 구하고요. 

    독자들께 고백을 하나 하지요. 
    저는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강조하는 풍요를 현재 그다지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위선이 아니냐고요..? 

    저는 진정 엘 샤따이- 주님이 약속하신 풍요를 누리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티엘티 독자 모두가 이 풍요와 번영, 형통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시길 전능한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번영신학이 아니냐고요? 기복신앙이 아니냐고요? 형통신학이 아니냐고요?
    Well..whatever you say..just..
    GOD BLESS YOU! 
    AMEN

  13. 캪틴 2009/01/29 20:53      

    프리메이슨 33단으로 유명했던 '긍정적 생각의 힘'의 저자, 노먼 빈슨 필 목사는 성경을 빌려 뉴에이지적인 자기 어젠다에다 억지춘향격으로 끼여 맞춘 것입니다. 
    그의 문제점은 무조건적 긍정철학을 개발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장차 세계통합 때 사상최악의 독재자로 나타나 세계단일국가를 다스릴 거짓 메시아/짐승이 (부정/반대/비판/저항 없는)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만들 사상적 세뇌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울 오스틴의 '긍정의 힘'도 빈슨 필과 비슷한 뉴에이지적 맥락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무조건적 긍정철학이 아니지요. 긍정과 부정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긍정적 고백이 잘못된 것이냐..?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하여 마땅히 "예. 아멘"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아니오, '노멘'"으로 부정하면 약속을 받을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필/오스틴 적인 긍정철학입니까? 

    거듭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획일주의적 사고입니다.

  14. 버들피리 2009/01/30 00:29      

    캡틴님 말씀 충분히 공감합니다. 복을 구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제가 감히 어떻게 단죄 할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를 믿음으로 거부하거나 주일성수 같은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 생각합니다.저는 단지 제 믿음으로 그렇게 드리는 것이 옳다고 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일찍 죽어도 감사하며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 은혜임을 믿습니다."의 성경적 근거는
    하나님이 모든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캡틴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장수하며 복을 누리며 많은 선한일로 하나님께 영광드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참 명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뜻은 그기에 국한 되어 있질 않는것 같습니다. 욥의 고백처럼 세상 살이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이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 사람을 단련하시기도 하시며 질병과 사고와 가난등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하게 우리를 향하고 계시고 결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살면서 보게 됩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바닥에 그냥 떨어 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주의 눈앞에 귀하다고 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든 불치병에 걸려 온갖 방법과 기도를 해도 낫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감사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또한 은혜요 복이 될 것입니다. 살면서 이런 일들을 보게 되고 또 삶의 여러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 가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육신의 가시가 있고 눈 앞에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폭풍가운데 날아 오르길 간구하며 소망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캡틴님보다 제 생각과 믿음이 우월하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요?? 오히려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배우며 예수님을 닮아 가길 소망합니다. 이곳 TLT에서 이렇게 좋은 만남과 공부를 허락하신 하나님!내려 주신 복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15. 오직 성경 2009/01/30 00:35      

    <저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하라는 입장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김삼 목사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청지기의 의무,자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기꺼이 십일조를 내는 것과 
    약속된 복을 받기 위해 내는 것과 어떤 입장이 하나님 앞에서 더 사랑스러워 보일까 
    고민 좀 해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전자였는데 지금은 사랑스러운 것은 후자일 것 같고 전자는 대견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아비가 줄 복을
    갈구하며 아비의 명령을 지키는 것도 충분히 이뻐보일 것 같습니다. 다만 영적인
    복, 신령한 복은 탐하여도 상관없지만 육신의 복은 탐하기보다 남에게 꾸이지 않을
    정도 또는 나누어 줄 정도 환난이나 곤고가 없는 정도인 선에서 자족하는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육신의 지나친 복은 오히려 하나님을 잊고 살게 할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서 달라는 대로 주지 않고 그 선하신 뜻에 따라 조절하여 주실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십일조를 하여 물질 복을 받을 때에도 받지 못할때에도 이미
    십일조를 하게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복이 다 눈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성경에 야곱만큼 복을 적극적으로 갈구한 자도 다시 없을 것이 그는 장자에게 복을 주려는이삭으로부터도 결국 차자로서 장자의 복을 받아 내었고 밤새 씨름해서라도 하나님께 기어코 복을 받아내었던 한마디로 복에 자기 전부를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그가 태에 있을때부터 사랑했다고 했고 (복을 우습게 알고 팟죽 한그릇에 판) 에서는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복의 근원이라 인정하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찌 보시는지 알 수 있는 예 아닐까요.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 태동하였으니 영적 이스라엘인이 우리들이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복음을 믿으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썩지 않는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여 영원이 영혼육의 복을 받으며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지요.
    물론 이세상에서도 육신의 복을 구하면 주시겠고 구하지 않아도 주실 것이나
    때로 천국을 위해 육신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자들도 있고 재물을 포기한 자도 있다는
    사실만 염두에 둔다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육간에 필요한 것들을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받는것은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 일 것 같습니다. 


    졸라대는 자녀에게 분명 더 주시기는 하지만 부모 말 거역하고 미운 짓만 하면서 복달라 하는 자식은 한대 때려주고 싶은게 부모 마음이니 기왕이면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복 달라고 강청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 캪틴 2009/01/30 10:04    

      역시 "오직 성경!"입니다. ㅋㅋㅋ
      님의 말씀에 제가 평소 역설해 온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믿어야 할 사실 두 가지 중 하나는 하나님이,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보상자(원어: 미스타포도테스)이시라는 진리입니다. 

      보상자라는 원어의 뜻은 일꾼에게 마땅한 대가를 주는 고용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믿음의 대가를 주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바치는 십일조도 대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말라키 3:10이 이것을 반증해 줍니다. 

      하나님께 대가를 바라는 것이 '대가성' 또는 대가기대성이고 따라서 '불순'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복의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 자신을 '상급'으로 계시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의 미스타포도테스이십니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를 하나님께 복을 구걸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걸인들로 비유한 적이 있지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시편 기자는 굶주려 포효하는 사자들도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먹이를 구한다는 표현을 했지요. 물론 지저귀는 새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우리는 배고파 울부짖는 사자처럼, 지저귀는 새처럼 하나님의 복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로마서 11:35은 이런 경우 적용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바치지 않고 그야말로 대가만을 바라는 경우를 가리킵니다(추가 참조: 욥 35:7, 41:11).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do ut des'론이 그런 경우라고 보여집니다.

  16. Favicon of http://nagisa9599@naver.com tnsfPwk 2009/01/30 06:57      

    많은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제 자신의 신앙의 지점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 되는 좋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글쓴 분들의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스며있는 신앙과 성품의 모습들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본받게 됩니다...

    캡틴님이 말씀하신 '획일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판단컨대 캡틴님은 저에게 "복을 영적인 면으로만 국한시켜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시는 많은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고 염려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에 대해 그처럼 영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는 획일주의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저도 공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반대의 모습으로 지례짐작하고 각각이 좀 더 크게 나타내는 한 가지 모습에만 집중하여 그에 대한 우려와 염려를 극대화시킨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 또한 캡틴님에게 "복을 실재적, 물질적 면에 집중함으로 복의 영적인 면에 대해 가치를 크게 두지 않는다"라고 염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글들을 쓰게 되었지요...그런 점에 있어서 저도 캡틴님이 생각하시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캡틴님에게 획일주의의 모습을 본 셈입니다... 사실 전 캡틴님의 생각이 번영신학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쩌면은 캡틴님과 저는 복에 대한 정의 자체가 같으면서도 서로의 표현이 다르기에 같은 복이란 단어를 두고도 서로의 견해차를 두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조금은 감정적이기도 했던(물론 저의 입장에서였습니다만...^^) 대화들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대화의 주제였던 복과는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감정적으로 판단치 말아야겠다는 회개와 겸손함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안에 저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교만함이 있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캡틴님의 생각의 전체적인 면을 보지 못한 채 단편적인 면만으로 판단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캡틴님의 해석과 적용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만으로 캡틴님의 신앙의 전체를 함부로 재단한 것을 용서하십시요...

    이번의 많은 댓글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서로의 생각의 다름을 보며 각자의 신앙을 더욱 건실히 세워나가고 서로를 세워주는 믿음의 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 제 이름이 좀 우스워 보이나 보죠...?^^; 제가 천로역정을 좋아해서 저 자신을 '순례자'라고 생각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자고 항상 다짐하곤 했는데, 왠지 한글로 '순례자'라고 쓰니 괜히 목에 힘주고 나 열심히 믿는다고 자랑하는 거처럼 보여서 여간 쑥쓰럽지 않더군요... -_-; 그래도 제 자신의 다짐은 지속하고 싶어 영타로 쳤답니다... 그저 제 믿음의 색깔이라 너그러이 봐주십시요...

    버들피리님, 들풀님, 오직성경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캡틴님께도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 들풀 2009/01/30 07:22    

      간밤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이렇게 귀한 형제님과 - 혹 자매님이시라면 용서를~ -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서로 세워주며 권면하고 나누며 교제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큰 복입니다. 우리가 서로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면서 또한 복을 누리고 있음에 하나님께 다시 감사드리게 됩니다.

    • 버들피리 2009/01/30 07:44    

      오,,주님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종에게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한 성도들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순례자님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순례자님,캡틴님,오직성경님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도님들 통하여 이루어 지시길 기도합니다.

    • 캪틴 2009/01/30 07:47    

      할렐루야! 
      저 역시 tnsfPwk님이 다시 반갑고 기쁘고 ㅋㅋ..
      저 역시 때때로/부분적으로 교만할 가능성과 그럴 때가 있음을 뉘우칩니다. 

      tnsfPwk란 필명처럼 순교자 신앙을 강조하시는 님을 존중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순교자와 같은 신앙을 보유할 필요가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 후반 참조). 이 말은 모두 순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님의 말씀은 균형을 갖추자는 뜻으로 뵈는데요..제가 소위 '번영신학'을 강조하는 뉘앙스로 비쳤다면 고칠 점이 있겠군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바는..번영신학을 무조건 경계하다 보니 분명히 성경에 약속돼 있고 성도들이 마땅히 누릴 전인적인 복과 번영, 형통까지도 미리 빼앗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성경 약속들을 강조하게 된 겁니다. 
      '지레짐작'..예, 지적이 좋습니다. 균형을 갖추도록 애를 써야지요.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잘 보면..믿음으로 복을 받은 야콥이나 순교자들이 함께 신앙선진으로 나열돼 있음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아무튼 tnsfPwk님을 축복하며..
      한 가지 첨언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나그네요 순례자이지, 순례자가 대단하고 특별한 용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간다고 참된 성지순례단은 아닙니다. 참된 성지는 하늘나라이며 우리는 모두 그 나라를 향해 가는 참된 성지순례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