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운 조병화 문학관을 찾아서
경기도 안성은 우리나라 거인 시인을 둘씩이나 배출한 고장이다.
세계시인대회장을 지낸 조병화(趙炳華) 시인의 고향이며, 박두진(朴斗鎭)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늘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 있는 조병화문학관을 찾았다.
그가 태어난 난실리는 한양조씨의 집성촌이다.
조선의 개혁주의자 조광조가 사화로 죽음을 당하자,
한양조씨들은 전국의 각 고을로 숨어들었다. 이 마을도 그런 마을의 한 곳이다.
갑자기 싸늘한 날씨를 불구하고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간 문학관은 문이 꼭꼭 잠겨 있었고,
"동절기 휴관"이라는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크게 실망을 하고 주위를 빙빙돌며 돌아 보는데,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 다가와
혹시 문학관을 들어가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물었다.
그분은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조우형(趙祐衡)씨로
자신이 '조병화시인의 5촌조카'라고 말하며,
쏜살같이 집에 달려가 열쇄꾸러미를 들고 와서
문학관 1,2층, 편운재, 청아헌, 묘소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조병화문학관은 편운 조병화의 유품 및 창작저작물, 그림을 상설 전시하는 문학기념관으로서,
조 시인이 전 생애의 창작활동을 통해 추구해 온
꿈과 사랑의 시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을 뿐만아니라
한국 현대문학의 상세한 발자취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 "계관시인"임을 나타내고 있는 -
조병화시인 흉상
- 흉상 밑에 새겨진 글 -
나의 자화상
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
버려서 안될 거까지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시인 조병화(1921-2003)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태어 났으며,
호는 편운(片雲, 한 조각 구름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두번이나 상처를 했다.
첫째부인이 아들하나를 낳고 돌아 갔는데,
재혼을 한 둘째 부인마져 아들하나를 낳고 얼마 안되어 별세를 하였다.
조시인은 아버지에게는 5남 2녀 중
막내아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예순인 아버지와 마흔인 어머니 사이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조시인이 8살때 돌아가셔서
홀로된 어머니가 전실 자식까지 훌륭히 키웠다.
조시인은 안성에서 송전공립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다녔으며,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경성사범학교· 제물포고등학교 · 서울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도회인의 애상을 평이한 수법으로 노래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조시인은 한국문단의 고질적인 병폐일 수도 있는
등단을 거친 시인이 아닌 것도 특이하다.
시집으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을 한 것이니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될런지 모른다.
1955년 중앙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 · 경희대 교육대학원장·
인하대학교 대학원장, 부총장 ·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
한국시인협회장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세계시인대회장 등으로 활약 하였다.
조우형선생(조시인의 조카)과 함께
전시실 내부
문학관 내 귀중한 전시물
문학관은 대지 315평에 연건평 85평 2층 건물로,
전시실 4실, 20평 규모의 전시 겸용 세미나실이 있다.
조시인은 1949년 제 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시작으로 해서
52 번째 시집인 『따뜻한 슬픔』을 끝으로 세상을 마감 하였으며,
유고시집인 『넘을 수 없는 세월』까지
53권의 시집을 포함하여 160권의 저서를 간행하였다.
전시실의 벽을 타고 그 밑에는 53권의 시집을 필두로 하여
삥둘러 가며 그가 집필, 출판한 책들 전시해 놓고 있다.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밤의 이야기>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공존의 이유> <남남> 등의
시집이 눈에 띈다.
생애 업적을 증명하는 자료들
전시관 중앙에는 조시인이 살아온 족적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잘 진열되어 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쓴 시 "나의 생애"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의 생애-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나는 어머니에서 태어나와
어머니로 돌아가는 그 길을
한 결 같이 살아왔을뿐,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웠습니다.
1996. 가을.
조병화
상복도 많아, 훈장만도 3개나
1959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하여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모란장 , 금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서울시 문화상, 한국시인협회상, 3·1 문화상 , 5,16민족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학대상 등
굵은 상을 많이 받았다.
빛나는 활동을 많이 하고 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복도 많았던 것 같다.
조병화의 럭비사랑
"시인 조병화보다는 럭비인 조병화로 기억되고 싶다."
조시인은 16세 때인 1937년 럭비 명문인 경성사범학교(현재 서울대 사범대학 전신) 2학년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해 해방 때까지
10년 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럭비는 그에게 청춘 그 자체였다.
조시인은 일정시대에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한 뒤
처음에는
육상을 하였는데 걸음이 빠르다고 럭비부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문리대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럭비선수로서 활약했고
1941년에는 조선대표로도 선발됐다.
경성사범시절 선생은
낮에는 럭비를 하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불을 밝히며 공부에 전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조시인은 해방직후인 1946년 당시 럭비축구협회(현재의 대한럭비협회) 창설을 주도했고,
1959년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한 뒤 럭비부 부장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다.
또한 럭비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매년 열리는 ‘럭비인의 날’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셨다.
생전에 시인보다는 럭비인 조병화로 불리길 좋아했던 조시인은
시간이 날 때 마다 럭비구장을 찾아 후배들의 플레이를 지켜봤고
거의 빠짐없이 럭비인 행사에 참가해
후배들에게는 영원한 '러거맨'로써 기억되고있다.
트레이드 마크 "베레모와 곰방대"
한국시단을 이끌어온 시인 총집합
전시관 벽에는 한국시단을 이끌어온 시인들의 사진이 총집합 되어 있다.
"조병화의 시간 속에 만난 얼굴들"이란 타이틀로
이곳에서 2008.5.9~10.31, 전시한 50여점의 사진을 그대로 게시해 놓았다.
여기서는 기라성 같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을 다 만나 볼 수 있어 좋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만한 저명한 문인들이 많은데
대략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상, 김남조, 김동리, 김소운, 김춘수, 노천명, 마종기, 모윤숙, 박계주, 박두진, 박목월,
박인환, 박종화, 백 철, 서정주, 송지영, 신봉승, 신석정, 양주동, 안수길,
오영수, 이경희, 이봉구, 이어령, 이해랑, 이헌구,
전숙희, 정비석, 조경희, 조풍연, 주요섭, 차범석,
천경자, 최정희, 피천득, 한하운, 현 인, 황금찬, 황순원.
-편운재-
편운재 입구
편운재 입구 조병화시인 흉상 앞에서
벽에 붙은 "편운재" 현판
조시인의 체취가 물신 풍기는 편운재
편운재는 1962년 시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 어머니 묘소 앞에 세운 묘막이다.
조시인이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모친의 말씀을 자필로 벽에 새겨놓은 글씨가 시선을 끈다.
편운재에 들어가니 조시인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는 혜화동에 있던 시인의 서재를 그대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청와헌-
청와헌과 시비<꿈의 귀향>
꿈의 귀향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니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일중 김충현선생 글씨 간판
청와헌(聽蛙軒) 서재
청와헌(聽蛙軒)은 "개구리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 개구리들의 합창소리를 듣고 자란 조병화시인이
그 소리가 그리워 붙인 이름일 게다.
지금도 이곳은 주위에 논 밭이 있어
봄이면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묘소-
어머니와 부부가 나란히 누워있는 묘지
조병화시인의 묘지는 청와헌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가신 어머니가 맨 오른쪽,
다음이 부인의 묘소이고, 맨 왼쪽이 조시인의 묘이다.
아버지와 조부 묘소는 조병화 문학관과 편운재 사이에 있다.
묘비 옆에 세워 놓은 시비
아, 조국의 하늘이 나의 하늘이로다.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수장기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
조병화
묘소 옆에 있는 모자상
기형도나 고은 등 역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들 어머니를 소재로
강한 집착과 그리움을 나타내는 작품을 많이 배출하긴 하였지만,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그를 끝없이 외롭게 만들고,
죄스럽게 만들고, 안타깝게 만들고, 또 부끄럽게 만든,
즉 ‘고독’의 시발점으로서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묘소 앞에 있는 시비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어머니>(1973) -
[찾아 가는 길]
출처: http://blog.daum.net/wuban777/13427421[반석같은 친구]
'♧ 시와 文學 그림 > 文化공연文學그림讀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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