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부터 94년 전인 1919년 4월 4일 낮 12시, 의미심장한 운명의 시간이다.
독립운동을 외치기 위해 나온 시위대는 3곳으로 나눠 편성하고 1대는 최대진 목사(당시 최목사는 노회로 인해 참여하지 못함 - 김영인 교사의 요청으로 실제로는 최대위 학생이 주도)가 이리역과 평화동 쪽에서 대교농장으로 진출하고, 2대는 문용기 선생이 무내미 방향에서 구 시장으로, 제3대는 김내문 감찰의 아들인 김만순이 동이리 방면에서 구 시장으로 진출해 한곳으로 운집된 대열은 수백 명의 전위대로 기세를 높였다.
이 때 문용기 선생은 대형 깃발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전진했고 시위대의 인원은 점점 늘어나 1천여 명에 이르자 더욱 기세를 높여 나갔다.
위협을 느낀 일본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시위를 이끌던 지휘부 인사들도 일사각오로 무장돼 있었기 때문에 일보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쳐나간 이들은 팔봉 배못(현 이제마을)에 사는 김종길(남풍이)선생이 다리와 머리에 총을 맞고 ‘억’하고 앞으로 쓰러졌고 오산면 남참부락의 제3대로 참여한 김만순이 동이리 방면에서 대열에 합류해 “우리나라를 빼앗기느냐 다시 찾느냐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나갑시다”며 기세높여 나갈 때 자기집 머슴으로 참여하던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하고 쓰러지면서 선혈이 난자하니 대열은 잠시 흐트러지는 듯 했지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특히 대열의 맨 앞에서 시종 시위를 이끌어 나가던 문용기 선생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의 헌병대는 뒤에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와 긴 칼을 높이 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만세소리와 함께 태극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해 나갔으나 헌병은 또다시 그의 왼손마저 내려치니 태극기가 다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다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갔고 일본 헌병들은 다시 달려들어 착검한 총으로 사정없이 옆구리와 배를 찌르고 쓰러져 있는 그의 머리를 계속 가격했다.
문용기 선생은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를 조선독립에 바치겠오”라고 크게 외치면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6세의 어린 신랑이었던 박영문 열사. 그는 결혼한 지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는 신부가 싸리문 기둥을 잡고 서서, "무사히 다녀오라"는 신부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뒤로 한 채 그의 생각에는 오로지 만세현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본 헌병은 다른 사람들을 뒤쫓다가 박영문이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와 사정없이 그의 가슴과 이미 큰상처가 있는 배를 다시 찔렀다. 붉은 피가 적삼을 적셔 내리면서 밖으로 내품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찰상을 입은 복부에서 내장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양손으로 쏟아지는 장기를 웅 켜 쥔 채로 다시 일어서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모든 기력이 다한 상태였기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박영문은 16세의 도남학교학생 회장으로써 민족해방의 제단 앞에 거룩하고도 숭고한 투혼을 발휘했다.
▲ 2010년 11월 26일. 오산면사무소 내에서 열린 관재 문용기 열사 충혼비 정비 제막식 행사에서 이한수 시장을 비롯 유가족 등이 천을 벗기고 있다.
이러한 4ㆍ4만세 운동은 오산면 남전에서 구한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김내문 집안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 들였고 남전교회를 다녔다. 1917년에는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한 민족주의자 최대진 목사가 남전교회로 부임한 뒤, 김내문 가정을 심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의 지도자인 박연세 장로와 김내문, 최대진, 김만순 등과 당시 도남학교 김영인 선생 등이 연대한 구국운동의 모의가 시작됐다.
급기야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갈 때 오산 김내문의 집에서 아들 김만순, 목사 최대위, 김영인 선생과 함경도 갑산탄광에서 금광사업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해 만주 등으로 송금하는 등 구국운동에 열중하던 민족지도자 문용기가 3월 중순경에 김내문 집을 찾아 합세하면서 4월 4일 낮 12시를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이상은 익산독립운동기념사업회 황성근 대표의 글을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나라의 독립을 외친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발전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의 희생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ㆍ4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3ㆍ1만세 운동과 버금가는 익산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익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직도 사죄와 반성없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일부 일본인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