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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순교지 교회순례-2[두동ㄱ자교회·서두교회]

영국신사77 2013. 4. 17. 16:03

 

 

                                                              두동ㄱ자교회

 

* 두동교회는 1923년 해리슨 선교사의 전도로 박재신이 그의 부속사를 빌려주어 처음으로 설립되었으며 1929년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인근의 땅을 마련, 지금의 ㄱ자형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 두동교회 구 본당[ㄱ자 교회]은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번지에 위치하며,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 이 건물은 1923년 건립된 두동교회 초기 본당으로 기독교 전파 과정에서 남녀유별의 관습이 남아 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우리의 독창적인 “ㄱ"자형 건물이다. 건물의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구분하고 중앙에는 휘장을 쳐 남녀가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모서리에 단을 설치하였다.

* 1920년대에는 남녀유별의 유교적 유풍에 따라 내부를 구분하였던 기존의 휘장들이 제거되는 일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두동교회가 건립된 점이 주목된다. 현재 “ㄱ"자형 교회 건물은 두동교회와 금산교회에 남아 있는데, 한국 기독교 전파과정의 이해와 교회 건축연구에 중요한 건물이다.

 

 

 

 

* 남녀 회중석을 직각으로 배치하여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으며 두 축이 만나는 중심에 강단을 시설하였다. 북서쪽 모서리의 강단은 한 칸 규모이며, 남녀 회중석은 각각 3칸 크기로 같은 규모이다. 전면에서 볼 때 'ㄱ' 자형 평면 중 남북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남자석이고 동서축은 여자석이다.

 

 

 

 

 

 

 

 

 

 

 

 

 

 

 

 

 

                                                                  서두교회

 

                                         "나의 하나님 찬송" 이동찬 집사 인도

 

 

 

 

* 서두교회는 1898년 정정보라는 전도인이 삼기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서두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더욱이 삼기는 백제 불교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으로서 기독교를 접한 다는 것은 혁명적인 생각을 않고는 기독교로 개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서두교회 교인들은 이리 지방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3.1 운동이 일어 날 때 참여하였고, 이러한 일들이 신사참배 반대 저항 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박병렬 장로는 신사 참배를 반대 하다가 옥고를 치른 후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 익산군 삼기면 서두리에 초가 3간 예배처소를 만들고 조선야소교 공의회에서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 초대 당회장으로 마로덕 선교사가 사역한다.

 

 * 마로덕 선교사는 1901년 독신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목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1902년 전주 선교부로 옮기어 전주에서 젊음을 바치게 되었다. 자신의 선교 구역을 할애 받고 익산 지방 일부를 비롯해서 완주지방, 무주지방, 진안지방 그리고 현재는 충청남도가 되었지만 금산지방을 조사들과 함께 순회하면서 전도에 임하게 되었다. 마로덕 선교사는 독신으로서 선교에 한계를 느끼고 1908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하운셀(Miss J. Hounshell)과 결혼하게 된다.

 

 

 

 

 

 

                    "나의 하나님"찬송을 부르는 사랑의교회 포에버 성도들[이동찬 집사 인도]

 

 

 

 

 

 

 

서두교회 옛 예배당

 

 

 

 

                                                                                 * 박병렬 장로

 

 * 박병렬 장로는 1877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삼기면 간촌리에서 한의사 박영호와 방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박병렬은 도마리교회, 방주간교회, 와리교회, 부송교회 등의 매서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익산 지역 3.1 운동에 참여하고, 또한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로 제1계명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이 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심기 주재소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어도 그는 흐트러짐이 없이 신사참배는 절대적으로 기독교에 위배된다면서 버텼고, 삼기 주재소에서는 이리경찰서로 이첩해 버렸다. 이리 경찰서에도 그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그만큼 일본제국주의 생명이 단축된다.”면서 고함을 지르자 이리경찰서 고등계 형사들도 그를 유치장에 놔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석방해 버렸다.

  박별렬 장로는 석방되어 서두교회로 돌아왔지만 그의 온 몸에 고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때 박병렬 장로는 고문자국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근거라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 하였다고 한다. 그는 1940년 9월 2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