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이집트*Africa 歷觀 &聖地순례

제 18왕조 [신왕국 (1)]-출애굽기의 왕

영국신사77 2012. 11. 25. 09:49

                        이집트 고대 신왕국(1)

 

             <제18왕조> BC 1550 ~ 1292 (258년간)


 

1. 아모세(Ahmose) 1세[아마시스 또는 아모시스라고도 함]

 

                             BC 1550 ~ 1525 - 카메스의 동생

 

2. 아멘호테프 1세(Amenhotep I)[그리스명  아메노피스] 

 

                          BC 1525 ~ 1504


 

3. 투트모세 1세(Thutmose I)  BC 1504 ~ 1492

 

4. 투트모세 2세(Thutmose II)  BC 1492 ~ 1479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  BC 1479 ~ 1457[22년간]:투트모세 3세 섭정

 

5.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BC 1479 ~ 1425[54년간]:'이집트의 나폴레옹'

 

6.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 [ BC 1450-1425:톰슨성경]1425 ~ 1399:출애굽 당시의 파라오

 

 *출애굽 연대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①보다 빠른 견해:-BC 1445-1440년 무렵 18왕조의 6대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2세(BC 1450-1425:25년간) 치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견해.

  ②라암세스2세(BC 1299-1232) 치하에서 BC 129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

 

  성경의 기록은 초기 학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왕상 6:1에는 성전 건축이 출애굽 사건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재위 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잇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기는 BC 1440년이 되는 셈이다. 또 BC 1100년경에 활동했던 입다가 ,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성경에는 '헤스본, 아로엘, 아르논 강가의 모든 성읍들'로 기록]을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삿 11:26)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출애굽 연대는 BC 1400년경이 되는 것이다.  <출처:톰슨성경>

 

7.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BC  1399 ~ 1389

 

8.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BC  1389 ~ 1351

 

9. 아케나톤(Akhenaton)[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 BC   1351 ~ 1334       

   세멘크카라(Semenkhkara) BC  1336 ~ 1334:아케나톤과 공동 통치

 

10. 투탕카멘(Tutankhamen) BC  1334 ~ 1325

 

11. 케페르케프루라 아이(Kheperkheprura Ay) BC  1325 ~ 1321:사제 출신

                         

12. 호렘헤브(Horemheb) BC  1321 ~ 1292 - 장군 출신

 

 

 

 

                                  아모세 1세

  ?~?

  제18왕조를 연 이집트의 왕(BC 1539경~1514 재위, 25년간).

 

  자신의 형제에 이어 힉소스인(이집트를 지배한 아시아인)을 완전히 축출하고 팔레스타인에도 침입했으며 남쪽에 있는 누비아에 대해 이집트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했다.

 

  아모세는 통치 초기에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힉소스인에 대항해 해방전쟁을 재개하면서, 중부 이집트의 외국 동맹세력들을 분쇄하고,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 현재의 카이로 근처에 잇는 이집트의 옛 수도 멤피스를 점령했다.

 

  어머니인 아호텝이 현재의 룩소르 근처에 있는 테베에서 정부를 이끄는 동안, 그는 나일 삼각주의 동쪽 지역에서 힉소스인의 수도 아바리스에 대해 해상작전을 벌였고, 이어서 육상에서는 포위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상(上) 이집트에서 갑자기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둘러 나일 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고, 아호텝도 그를 도왔다.

 

  반란을 진압하고 난 뒤, 그는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뒤이어 팔레스타인에 있는 힉소스인의 거점 샤루엔까지 적을 추격했으며, 3년간에 걸친 포위 끝에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가기에 앞서, 3번에 걸친 군사작전을 벌여 힉소스인과 동맹을 맺고 있던 누비아에 침입했다. 그가 누비아에 침입하게 된 또다른 동기는, 이곳에 금광이 풍부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국경이 안전해지자, 아모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정부를 세우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군인들과 왕가의 성원들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또한 시나이에 있는 구리 광산의 채굴작업을 다시 시작했으며, 시리아의 해안 도시들과도 무역을 재개했다. 이 사실은 시리아에서 발견된 삼나무 사용 기록과, 그의 통치 시대 때 만들어진 값비싼 장신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버려진 신전들을 재건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단을 다시 만드는 한편, 더 야심에 찬 일들을 계획했다.

 

  그러나 아모세는 이집트의 통합과 번영을 이룩하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이집트

 

 

                        아멘호테프 1세 [Amenhotep I]

  ?~?

  이집트의 왕(BC 1514~1493 재위).

  제18왕조를 연 아모세 1세의 아들로 누비아(지금의 수단)에서 이집트 영토를 성공적으로 확장했다.

 

  어느 두 군인의 일대기를 통해 아멘호테프가 누비아에서 벌인 전쟁을 확인할 수 있다. 재위 7년째에 새겨진 벽면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국경지대인 나일 강 제2폭포까지 도달했으며, 더 나아가 남쪽으로 사이 섬까지 국경을 확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리비아에도 침입했으나 그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가 아시아에서 벌인 활동 중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나이의 광산을 다시 열고 중왕국 시대 때 그곳에 지어놓았던 요새를 다시 점령한 사실뿐이지만, 시리아에도 영토가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그가 벌인 건설사업에 대해서는 이후 사람들이 이집트의 고대 건축물들을 허물어 거기에서 돌을 빼가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멘호테프가 예배를 올리던 작고 정교한 석회암 신전이 다시 복구되었으며,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관리는 아멘호테프를 위해 신전 하나를 더 지었다. 그의 무덤은 신전과는 분리되어 있는 석조 건축물이었을 것이며, 무덤 옆에 부속 신전을 세우는 초기 이집트 왕가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무덤 건설 노동자들을 위해 테베 서쪽에 있는 다이르알마디나에 마을을 세웠는데, 이곳에서는 나중에 아멘호테프와 그의 어머니를 함께 숭배했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이집트

 

 

                       투트모세 1세 [Thutmose I]

?~?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93~1482경 재위).

이집트 제국을 누비아(지금의 수단)까지 확장시키고 또 시리아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왕족이 아니었으나 그는 즉위하기 얼마 전쯤에 선왕의 딸과 결혼해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했다. 또 테베에서 발견된 예배소를 통해 기간은 확실하지 않지만 선왕과 공동 통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위하던 날 그는 누비아의 총독에게 자신의 새로운 명칭과 대관식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재위 2년째 투트모세는 선왕 때의 국경을 넘어 강을 타고 누비아 깊숙이 원정했다. 길따라 새겨져 있는 비문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나일 제4폭포를 지나 카니사쿠르구스에 새 국경을 세웠다. 이 모험은 원정에 참여했던 2명의 상(上)이집트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누비아로 깊숙이 밀고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에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금은 제18왕조 때 상당히 채굴되었다. 또다른 이유는 제3폭포 근처에 중심을 두고 있던 적대세력 쿠시 왕국이 제17왕조 때 이집트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누비아 전쟁이 끝난 뒤 투트모세는 얼마 전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던 아시아의 침략자 힉소스족을 계속 쫓아가 시리아의 카르체미시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밀고 들어갔다.

투트모세는 이집트 국내적으로는 테베에 있는 중왕국의 아몬 신전을 완전히 보수했다. 신전 둘레에 담을 쌓고 서쪽 끝에는 사이에 조그만 회랑이 있는 2개의 탑을 만들었다. 바깥 탑 앞에는 2개의 오벨리스크를 새로 세웠다. 투트모세 때 신전의 대칭양식은 신왕국시대 신전의 표본이 되었다. 그보다 먼저 죽은 두 아들 중 하나는 군사령관이 되어 신왕국시대의 군사 작전 중심지였던 지금의 카이로 근처 멤피스에서 근무했다. 후대왕들은 이를 본받아 왕세자를 멤피스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군사기술을 익히게 했다. 또한 투트모세는 테베에 있는 왕들의 무덤 계곡에 자신의 무덤을 세우도록 한 최초의 왕인데 자신의 무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한 듯하다. 그밖에 테베 서쪽의 다이르알마디나에 무덤 건설에 동원된 일꾼들의 마을을 세웠으며, 선왕이 시작한 공동묘지 건설의 지휘조직을 완성시킨 것도 그의 업적으로 추측된다. 재위기간은 여전히 불확실하나 최고 9년까지 확인된다.

 

 

 

                         투트모세 2세 [Thutmose II]

?~?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82경~1479 재위).

이집트의 영토 누비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베두인족을 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징벌대를 파견했다.

선왕인 투트모세 1세와 왕비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순수 왕손인 이복누이 하트솁수트와 결혼했다. 재위 1년에 만들어진 아스완 비문에 의하면 나일 강 제2폭포 주변 쿠시 북부의 족장이 이집트의 종주권에 대항해 반란을 조장하고 누비아에 주둔해 있는 수비군을 위협했다고 한다. 투트모세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남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과 함께 군대를 파견했다.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온 족장의 아들 중 1명은 이집트에 동화되어 속왕으로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 듯하다. 아버지를 따라왔던 한 군인의 전기에 나타난 것처럼 그뒤 얼마 되지 않아 투트모세 2세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베두인족을 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들 자료 이외에 그의 재위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상(上)이집트와 누비아 기념비에 그의 이름이 나타나 있으나 이것은 아들 투트모세 3세의 명령으로 새겨진 듯하다. 투트모세는 테베 서부에 조그만 장례 신전을 지었으며 이 신전은 나중에 아들이 확장했다. 왕실 귀중품 은닉처에 그의 미라가 재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그의 무덤이라고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없다. 후궁과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투트모세 2세가 죽을 당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투트모세의 수석 건축사가 지적한 것처럼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집트를 통치한 것은 그의 의붓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하트솁수트였다. 투트모세의 재위기간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00년경에 한 학자가 재위 18년이라고 적힌 비문을 보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재위 첫해만이 확실히 증명되어 있다. 그 학자가 보았다는 자료는 그뒤 다시 발견할 수 없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진위를 의심하고 있다.

 

 

                         하트솁수트 [Hatshepsut]
 
Hatshopsitu라고도 함.

?~?

여왕으로서는 드물게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이집트의 여왕(독자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통치했던 기간은 BC 1472~1458).

파라오가 누리는 칭호와 표상들을 모두 가졌으며 대략 21년간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투트모세 1세 왕과 왕비 아모세 사이에 태어난 하트솁수트는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와 혼인했다. 왕가의 규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던 2명의 친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자(BC 1512경) 하트솁수트는 남편과 함께 왕위에 올랐다. 기력이 부족했던 투트모세 2세는 기껏해야 8년 정도를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뒤 하트솁수트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이 되었다. 영향력 있는 왕비들의 혈통을 계승한 그녀는 어린 투트모세 3세가 아몬 신의 제사장으로 있는 동안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얼마 동안은 어린 왕의 섭정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국한했으나 BC 1503년 무렵 스스로 파라오의 자리에 올라 '호루스'(Horus : 오직 왕만이 사용할 수 있던 명칭)라는 칭호와 함께 역시 전통적으로 왕만이 붙일 수 있던 인공으로 만든 턱수염을 포함해 파라오가 가지는 모든 표상들을 사용했다. 하트솁수트가 통치에 성공을 거두게 된 본질적인 요인은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는 영향력 있는 일단의 관리들이 정부 내의 모든 요직을 통제한 데 있었다.

여왕이 된 하트솁수트는 행정 쇄신과 상업적 팽창을 강조하며 바다를 통해 푼트(홍해의 최남단에 있는 아프리카의 해안 지방)에 대규모의 원정대를 보냈다. 황금과 흑단을 비롯해 동물 가죽과 비비, 그리고 가공처리한 몰약(沒藥)과 살아 있는 미르라 나무들이 이집트로 들어왔다. 이 미르라 나무는 하트솁수트의 유명한 신전인 테베 서쪽의 다이르알바리 신전의 앞마당을 장식하기 위해 들여왔다. 또한 아시아·누비아·리비아에서도 막대한 양의 조공을 보냈다. 무역과 조공을 통해 얻은 수많은 물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집트의 최고신인 아몬 레 신에게 바쳤으며, 이 신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하트솁수트는 대대적인 건설 사업을 벌였다. 그녀는 또한 힉소스인(이집트 초기의 아시아계 통치자)들이 이집트를 지배할 때 입은 피해를 자신이 복구했다고 주장했다. 카르나크(테베)의 신전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곳에 만든 방을 새로 수리하는 한편, 높이가 거의 30m에 이르는 4개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세웠으며 훌륭한 기도실도 만들었다. 중부 이집트의 바니하산에서는 그리스어로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로 알려진 석조신전을 지었다. 그녀가 이룩한 가장 최고의 업적은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웅대하고 화려한 신전의 건설이다. 하트솁수트와 그녀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인 이 신전에는 그녀의 통치기간중 일어났던 주요사건들이 기록된 양각 부조물이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파라오의 특권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또다른 지역인 '왕들의 무덤 계곡'에 자신이 묻힐 거대한 무덤을 팠다. 무덤의 매장실은 장례식 때 사용할 신전 뒤에 위치하게 할 생각이었으며 아버지의 미라를 자신의 무덤으로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 이처럼 투트모세 1세에 대해 배려를 한 것은 그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이며 자신이 아몬 레 신의 매개를 통해 그로부터 직접 정당하게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주장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트솁수트의 야심은 정력적인 활동으로 군대의 우두머리가 된 투트모세 3세의 야심과 부딪쳤다. 하트솁수트를 비롯해 그녀의 충성스런 관리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투트모세 일파는 점점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투트모세 3세와 혼인한 자신의 딸이 이른 나이에 죽고, 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 투트모세가 성가를 높인 일 등이 하트솁수트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녀가 자연사를 했는지, 퇴위당해 피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 합세수트 여왕 

 

                                 출처 블로그 > 2lili
                                 원본 http://blog.naver.com/2lili/20010352350

 

 

투트모스1세의 딸이었던 합세수트는, 그의 오빠인 투트모스2세와 결혼했으나, 하셉수트는 투트모스2세의 양아들 투트모스3세가 9살 밖에 되지 않아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시작하여 어린 파라오를 신전 안에 유폐시키고 실권을 장악하고 여자가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수천년의 전통을 깨고,

이집트 최초의 여왕이 된다.



 

 

  합세수트 여왕 장제전에 있는 부조로, 당시 남자만 파라오로 오를 수 있던 시대(3300여년 전)에, 어쩜 최초의 여권 운동자라 할 수 도 있겠다.  여자로 파라오에 오른 합세수트는, 이의 정당화를 위해 여러가지 건축물에서 보이는 모습은, 마치 남자 왕과 같이 턱에 수염을 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위의 부조는 합세수트 여왕의 수호신이 학토르 신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으며, 소가 여왕의 손을 핥아 주는 모습으로 신에 의해 여왕이 인정받았으며,

풍요와 번식을 약속해 준다는 의미다. 또한 신들은 그에 대한 답례로 생명과 영원의 상징인 앙크를 내려 준다.

 

 

  카르낙 신전에 있는 부조로, 합세수트 여왕에 의해 왕권을 뺏긴 그녀의 양아들 투트모스 3세가 후에 왕이 되자,  합세수트 여왕에 대한 분풀이로 여왕의 부조를 쪼아 훼손시킨 모습이다.

 

  왼쪽에 보이는 신은, '민'신으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 신전이나 건축물에 있는 부조는, 신에 대한 찬미와 예찬이 주 내용이다.

 

  고왕국 이집트에는 전쟁이 잦아, 많은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 하고 마을에는 부녀자만 남게 된다. 위의 남자는 몸이 아프고 약하다는 핑계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전쟁에서 돌아 온 남자들은, 마을의 여자들이 모두 임신한 것을 보고 놀란다. 이 남자를 데려다 추궁한 결과 자백을 받는다.

꽤씸하여 이에 대한 벌로써 남성의 상징을 잘라 버리겠다 했더니, 이 남자는 용서를 빌며, 그 대신 한 팔과 한 다리를 자르라고 한다. 이 남자에게는 다리 하나와 팔 하나 뿐이고, 남성의 상징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다.

  전쟁이 많았던 예전에는 많은 인구가 역시 무기와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이 남자는 나중에 다산의 신인 '민'신으로 추앙 받게 된다.

 

  합세수트 여왕(오른쪽 모습인데 투트모스 3세가 쪼아 버렸다)에게 다산의 축북을 내리고 있고, 신이 주는 생명의 기인 앙크가 보이고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은 합세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에게 바쳐지는 공물이다. 투트모스 3세는 이 역시 파괴 하고 싶었으나, 태양신에 드리는 제물이기에 감히 파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높은 담을 쌓았다. 따라서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담뒤에 있던 오벨리스크와 햇볕에 노출된 부분의 색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건축물들은 쌍으로 지어 지는데, 오벨 리스크 역시 쌍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쪽은 붕괴되어, 그 옆에 파손된 상단수 일부분이 넘어진 채로 전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오벨리스크를 만드는데는 단지 7개월이 걸렸다는 안내 문이 옆에 있다.

오늘날 파리 콩코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곳에서 파리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5년여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당시의 건축기술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그의 양아들 투트모스 3세의 오벨리스크다.

 

  투트모스 3세 오벨리스크 한 쌍중 다른 하나는, 터키 히포드럼에 있다.

 

 

 

                          투트모세 3세 [Thutmose III]

 

?~BC 1426.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79~1426 재위).

 

개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여겨지는 왕이다. 노련한 전사로서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미탄니 왕국을 무찔렀으며,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수단 지방의 나파타까지 뚫고 들어가 이집트 제국의 번영을 절정에 올려놓았다. 또한 자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신전과 기념비를 세웠다.

 

어린시절

투트모세 2세의 아들로 어머니는 첩인 이시스였다. 투트모세 2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아들이 투트모세 3세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10세 정도였고, 아버지의 상속녀이며 자신의 이복 누이인 네페루레와 약혼한 사이였다. 네페루레의 어머니 하트솁수트는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아내이며 누이였다. 어린 조카의 섭정을 맡게 된 하트솁수트는 강한 결단력과 야심을 가진 여인이었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에 하트솁수트는 왕의 상징과 의복 및 휘장을 지니고 사실상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투트모세는 성장한 뒤에 누비아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팔레스타인에서도 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할아버지 투트모세 1세는 시리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아버지 투트모세 2세도 결코 허약한 왕은 아니었지만, 투트모세 1세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여자인 하트솁수트는 군대를 전쟁터에 내보내기를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집트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을 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투트모세가 왕위에 오른 지 22년째 되던 해, 이집트에 대항하는 만만찮은 연합세력이 형성되었다. 이 연합세력의 지도자는 시리아 북부에 있는 카데시 왕국의 왕이었으며, 분명 미탄니 왕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 하트솁수트가 죽었는데 이는 시기적절한 죽음이었다. 하트솁수트의 조카 겸 사위인 투트모세가 이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통치 말년에 그는 하트솁수트의 이름을 모든 기념비에서 삭제하고 그녀의 동상을 깨부수고 부조에서 하트솁수트의 모습을 지워버리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군사원정

불과 2~3개월의 준비 끝에 왕은 군대를 이끌고 행군할 준비를 갖추었다. 첫번째 전투는 그가 테베의 카르나크에 세운 신전 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투트모세가 가자를 지나 카르멜 산맥 남쪽에 있는 야마이까지 행군한 과정과 참모회의, 그리고 오늘날의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29㎞쯤 떨어진 카르멜 북동쪽의 메기도에 포진하고 있는 적군을 기습하겠다는 왕의 대담한 결정을 묘사하고 있다. 투트모세는 가장 예기치 않은 길, 즉 산을 넘는 비좁은 길로 메기도에 접근했다. 적군은 패배했고, 메기도는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함락되었다.

투트모세가 즉위한 지 33년째 되는 해는 그가 가장 대담한 조치를 취할 기회가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것은 투트모세 1세가 죽은 뒤 날이 갈수록 강대해진 미탄니 왕국 자체를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투트모세는 이 원정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시리아를 가로질러 유프라테스 강의 도하 지점까지 부교(浮橋)로 쓸 상자배들을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한 것이다. 전투 결과 미탄니 왕국의 왕은 달아났고, 그의 첩 30명과 수백 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승리한 투트모세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투트모세 1세의 기념비와 자신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비를 나란히 세웠다. 이곳이 그가 가장 멀리까지 진격한 지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오론테스 계곡에 있는 니이족의 땅에서 코끼리를 잡았고, 귀환하자마자 테베에서 대승을 자축했으며, 포로와 전리품을 국가신 아멘의 신전에 바쳤다.

후기 원정(원정은 통틀어 17차례 이루어졌음)에서 투트모세 3세는 자신이 그동안 얻은 영토를 통합하고, 아시아 영토에 제국 조직의 토대를 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현지의 지배 왕조에 속하는 토착 통치자들은 그후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대신 평화를 유지하고 해마다 이집트에 공물을 바치고 이집트 대표로 그 지역에 파견된 '영토 감독관'에게 복종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지켜야 했다. 토착 통치자의 아들들은 이집트에 볼모로 보내졌고, 결국에는 사고방식과 감정이 이집트화한 상태로 고향에 돌아가서 상속받은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이집트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곳곳에 요새가 세워졌고, 해안과 산악 지방의 요충에는 이집트 수비대가 주둔했다. 투트모세는 남쪽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미치는 누비아 땅의 남쪽 경계선을 카니사쿠르구스까지 확정짓고, 바르칼 산 근처에 있는 나파타에 아멘 신전을 세웠다. 그는 불온한 누비아인을 철저히 진압하고 많은 누비아인을 금광인부로 고용했는데, 이 금광들은 그가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집트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 이집트는 금광에서 나오는 금을 서아시아의 군주들과 물물교환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다. 치세의 마지막 12년 동안 투트모세는 승리의 열매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및 수단 지방에서 보내오는 공물이 그의 금고로 쏟아져 들어왔다(→ 봉건제, 정치제도).

 

이집트의 장식

새로운 번영은 왕의 건축가들이 착수한 놀랄 만한 건축 계획에 반영되었다. 특히 카르나크에 있는 아몬 레 신전은 수많은 새 건물의 증축으로 더욱 커지고, 수많은 오벨리스크로 더욱 화려해졌다. 투트모세가 이 신전에 세운 화려한 화강암 오벨리스크 가운데 2개는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신전을 장식했던 2개의 오벨리스크는 오늘날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뉴욕 시의 센트럴 공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영국 런던의 템스 강변에 있다. 투트모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예술과 공예는 그의 후원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

말년에 투트모세는 체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아들 아멘호테프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아멘호테프는 그의 2번째 아내이며 하트솁수트의 딸인 메리에트레가 낳은 아들이다. 투트모세는 BC 1426년에 죽었으며 테베 서부에 있는 왕들의 무덤 계곡 구석에 묻혔다(→ 왕들의 계곡). 이 무덤도 다른 많은 왕들의 무덤과 함께 나중에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했다. 그의 미라는 제21왕조의 제사장 겸 왕들이 안전을 위해 숨겨둔 은신처에서 1889년에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발견되었다. 원래의 무덤 속에는 엄청난 부장품이 함께 묻혀 있었던 것 같지만 발견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다이르알바리의 계단식 대지에 하트솁수트의 장제전(葬祭殿)과 나란히 세워진 그의 장제전은 1962년에야 발견되었다. 그의 미라를 보면 그는 키가 160㎝도 채 되지 않는 작달막한 사람이다. 그의 얼굴을 묘사한 조상들은 콧마루가 높은 커다란 코와 즐거운 듯이 미소짓는 입술을 가진 단호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의 명성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수많은 부적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그 부적을 지닌 사람에게 권세를 가져다주고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승리를 찬양하는 민중의 송가는 나중에 승리찬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2세 [Amenhotep II]

?~?

이집트의 왕(BC 1428경~1400 재위).

 

신에게 봉헌하는 아멘호테프 2세의 조상(BC 15세기)

 

 투트모세 3세의 아들로, 이집트의 대외적 팽창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왕위에 있으면서 뛰어난 신체적인 능력과 군사적 수완으로 아버지의 정복사업을 계속해나갔다.

 

 훌륭한 전사였던 투트모세 3세는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그를 양육했으며, 특히 체력을 키우고 전쟁기술과 운동정신을 가르치는 데 치중했다. 아멘호테프도 배운 기술을 사용해 무훈을 자랑하는 데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죽을 때는 자신이 아끼던 커다란 활과 함께 묻힐 정도였다.

 

 아멘호테프가 벌인 첫번째 군사작전은 시리아 북부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으로, 이 기간 동안 아시아의 여러 왕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다. 아시아에서 돌아온 그는 반란을 일으킨 아시아의 한 족장의 시체를 누비아의 수도로 보냈고, 이 시체는 본보기로서 시가지의 벽에 걸렸다. 이같은 조처는 누비아에서 평화를 유지시키기에 충분했다.

 

 2번째 군사작전은 이보다는 좀 규모가 작은 것으로 단지 갈릴리 호수까지 나아가는 것에 그쳤으나, 이 작전이 있은 뒤 미탄니·바빌론·히타이트는 아멘호테프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후 북부에서는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이집트 안에서는 아버지인 투트모세 3세 때부터 일해온 관리들 가운데 상당수가 계속해서 아멘호테프를 위해 일했으며, 그는 아버지가 짓기 시작한 건축물들을 모두 완공했다.

 

 또한 하(下)이집트에 성역지들을 새로 건립하는 한편 테베 서쪽에 자신이 죽은 뒤 시신을 안치할 신전을 지었다.

 

 아멘호테프의 무덤은 테베에 위치한 '왕들의 계곡'에 있는데, 훌륭하고 보존상태도 좋으며 그의 미라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이집트

 

 

                         투트모세 4세 [Thutmose IV]

?~?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00~1390 재위).

인도유럽인들이 지배하던 시리아 북부의 미탄니 왕국과 동맹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그의 재위기간에 이집트는 번영이 절정에 달한 평화시대를 맞았다.

투트모세는 선왕의 정비(正妃)의 아들로 왕자였을 때부터 현재의 카이로 근처에 위치한 멤피스의 군 작전기지에서 근무했다.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는 무장을 갖추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떠나 소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소아시아에 있는 히타이트 제국의 위협이 커지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과거 이집트의 적이었던 시리아의 미탄니 제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이 협상은 마침내 평화조약으로 결실을 맺었고, 미탄니의 공주가 이집트 왕과 결혼함으로써 결속은 더욱 공고해졌다. 두 나라는 서로 선물을 교환했으며 알랄라크 시(지금의 터키 남부 아차나)는 미탄니에게 양도되었다. 두 나라는 이같은 우호관계를 통해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투트모세는 통치하는 동안 아텐 신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신앙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의 손자가 벌인 종교혁명을 통해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와 아몬 신을 모시는 사제들간에 어떤 적대감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예술은 그의 손자대에 아마르나 양식을 낳게 한 새로운 경향의 서곡이었다. 투트모세는 약 9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죽었고 아들인 아멘호테프 3세가 그뒤를 이었다. 그의 무덤은 1903년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는 그를 매장할 때 함께 넣었던 가구도 일부 들어 있었다.

 

 

 

                           아멘호테프 3세 [Amenhotep III]

 

별칭은 Amenhotep the Magnificent.

  ?~?

  이집트의 왕(BC 1390~1353 재위).

 

  이집트가 번영을 누리며 평화를 향유하던 시대에,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이집트와 누비아에 거대한 건물들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재위 5년째에 이집트의 최남단 아쿠야타라 불리는 지역에 대해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뒤 나일 삼각주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고, 그의 통치시대는 평화로웠다. 이 소요는 하푸의 아들이며, 왕의 가장 뛰어난 관리인 * 아멘호테프가 육상과 해상으로 조심스레 이집트로 접근해 들어와 진압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아버지인 투트모세 4세와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2세처럼 사냥을 하며 보냈으며, 자신이 세운 공적을 널리 알려 기념하기 위해 2번에 걸쳐 커다란 스카라베(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왕쇠똥구리 모양의 부적)를 만들었다.

 

  아멘호테프는 집권 초기에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했다. 정비(正妃)가 된 티이는 뒷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을 낳았다. 재위 11년째에 그는 룩소르의 북쪽 160㎞ 떨어진 티이의 고향 마을인 아흐밈 근처에 거대한 인공연못을 파게 했다. 그는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의 재능을 이용해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장제전(지금은 왕의 거대한 동상만이 남아 있음)을 세우고, 누비아에 대규모의 신전을 세우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테베 지역에서는 룩소르 신전의 주요부분을 완성했으며, 카르나크의 신전에는 탑문을 새로 세웠다. 또한 멤피스에도 많은 건물을 세웠다. 그는 당시 다른 강국들과 외교문제에 대해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다. 이 사실은 그와 아크나톤 왕이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들을 모아놓은 '아마르나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가 황금을 가지고 아시아로부터 말·구리·청금석(靑金石)을 사들였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아멘호테프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탄니(시리아 북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강력한 왕국) 및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히타이트 왕국의 공주와도 정략결혼을 시도했다. 그의 외교서신은 아시리아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여러 봉신들에게도 보내졌다.

 

  통치 말기에 병이 들었을 때는 미탄니의 지배자인 투시라타가 그의 치료를 위해 신의 조각상을 이집트로 보낸 일이 있다. 말년에는 왕비인 티이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멘호테프가 죽은 후 티이는 투시라타와 직접 서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이집트

 

 

            * 아멘호테프 [Amenhotep, son of Hapu]

 

BC 1440경 하(下)이집트 아트리비스~BC 1360경.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밑에서 활약했던 고위 관리.

  평생 동안 왕으로부터 여러 영예를 받았으며, 사후 1,0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신격화되었다.

 

  그는 정부 관리로 일하며 승진을 거듭해, 아멘호테프 3세 시절에 군사직인 병력 충원담당 서기에 올랐다.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 일할 때는 해상을 통한 외국으로부터의 유입을 규제하기 위해, 나일 강의 여러 지류에 설치해놓은 검문소에 군대를 배치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베드윈족들이 내륙을 통해 이집트로 침입하는 것도 막았다. 그의 동상 가운데 하나에는 그의 직책이 군사령관으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왕가의 사업을 모두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된 그는, 지금의 룩소르 근처에 있는 테베에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葬祭殿) 건립사업을 지휘했던 것 같다. 이밖에도 누비아(지금의 수단)에 다른 신전들을 세우는 한편, 건축자재를 수송하고 각종 건물들을 세우는 일도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테베에서 나온 2개의 아멘호테프 상(像)을 보면, 그가 아몬 신의 신전에서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재자로 일하는 한편, 아멘호테프 3세의 세드 축제(파라오가 재위 30주년 되는 해에 벌인 재생제로 그뒤에도 정기적으로 되풀이되었음) 중 하나를 주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은 아멘호테프의 고향인 아트리비스를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신전 옆에 그를 위해 자그마한 장제전을 짓도록 했는데, 이것은 왕족이 아닌 이집트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영예였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정치·행정 > 관리 > 이집트

 

 

 

                            투탕카멘 [Tutankhamen]

 

본명은 Tutankhaten.

?~?

BC 1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의 왕(BC 1333~1323 재위).

1922년에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무덤으로 유명하다. '아마르나 혁명'을 이끈 아크나톤 왕이 죽은 뒤 즉위했으며, 그의 유력한 조언자들은 전통 종교와 예술 양식을 되살렸다.

그의 미라를 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투탕카텐은 바로 전에 이집트 왕을 지낸 스멘크카레의 동생인 것으로 여겨진다. 스멘크카레는 위대한 왕 아크나톤의 사위로, 아크나톤과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텔엘아마르나(아크나톤의 수도인 아크타톤)에서 발굴된 적요서와 그밖의 상황 증거로 미루어볼 때, 투탕카텐은 아크나톤과 스멘크카레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것 같다.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옥새는 투탕카텐이 즉위한 후 1~2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음을 암시한다. 그는 왕위 계승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크나톤의 셋째 딸과 결혼했는데, 이 딸은 아마 왕가에서 살아남은 공주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을 것이다. 즉위할 때 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고위 관리이자 섭정이며 왕가와 유대를 갖고 있는 아이와, 장군인 호렘헤브가 그의 주요조언자가 되었다.

이들의 지도에 따라 투탕카텐은 오늘날의 카이로 근처에 있는 행정 수도 멤피스로 거처를 옮기고, 테베에 있는 아버지의 궁전을 복구했다. 또한 즉위한 지 늦어도 4년 뒤에는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고, 옛날 신들의 신전·조상·특권 및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부활하는 한편 아크나톤의 방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는 아몬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이처럼 굴복했지만, 아크나톤이 유일신으로 섬긴 태양신 아텐을 금지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왕실 포도밭과 군대는 여전히 아텐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 호렘헤브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이집트의 옛 동맹국인 시리아 북부의 미탄니 왕국을 돕기 위해 시리아로 진격했다. 미탄니 왕국은 히타이트 왕국의 봉신들과 전쟁에 말려들어 있었다. 히타이트 왕이 보낸 증원군이 봉신들을 돕기 위해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가고 있을 때 투탕카멘이 1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아이가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왕위를 이었다.

투탕카멘이 죽은 지 얼마 후 테베 서부에 있는 그의 무덤(그가 원래 만들어둔 무덤은 아이가 자신의 무덤으로 삼았음)에 2차례에 걸쳐 도굴꾼이 침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에 사소한 손상만 입힌 뒤 곧 체포되었다. 그후 이 무덤은 1922년 영국의 이집트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제19왕조 시대에 '아마르나 왕들'(아크나톤·스멘크카레·투탕카멘·아이)이 왕의 명단에서 삭제되고 공공연히 비난을 받으면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는 위치는 잊혀지고, 많지 않은 그의 기념비는 나중에 파라오가 된 호렘헤브에게 대부분 강탈당했다. 제20왕조 시대에 람세스 6세의 무덤이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만들어졌을 때 돌 부스러기가 골짜기 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젊은 왕의 무덤을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렸다. 제20왕조의 일꾼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 가까이 갔지만 그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이 무덤은 제20왕조말에 대규모로 자행된 약탈을 모면했고, 후대 사람들이 왕들의 계곡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그 위치를 발견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

왕의 미라는 작은 묘실 속에 안치된 3중 관 속에 누워 있었다. 가장 안에 있는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밖에 있는 2개의 관은 나무틀에 금을 망치로 두드려 박아넣은 것이었다.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수많은 보석과 부적이 미라 위와 그 미라를 휘감은 싸개 속에 놓여 있었다. 관과 관석은 글을 가득 적은 나무판에 금박을 입힌 4개의 제단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런 글은 사실상 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른 방들은 가구·조상·옷·전차·무기·지팡이와 그밖의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무덤이 없었다면 투탕카멘은 지금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무덤 덕분에 투탕카멘은 그보다 오래 살았거나 훌륭한 치적을 남긴 어떤 전임자나 후임자보다도 유명해졌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문의 무덤 The Tomb of Tutankhamn〉(1923~33)과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의 〈투탕카멘 Tutankhamen〉(1963)이 있다. 1977년에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의 순회 전시회와 관련하여, I. E. S. 에드워즈가 쓴 글 및 리 볼틴과 해리 버턴이 찍은 사진이 실린 〈투탕카문 : 무덤과 보물 Tutankhamun : The Tomb and its Treasures〉이 출판되었다.

 



출처 : Copyright © © Lee Boltin

 

 

설명 :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장의용 황금 마스크(BC 14세기), 카이로에 있는 Egyptian Museum 소장
출처 : Copyright © Hirmer Fotoarchiv, Munchen

 

설명 : 이집트 신왕국 때의 왕실 복식:길고 넉넉한 더블 스커트를 입은 투탕카멘(BC 1333~1323 재위)과 가슴 부위에 아름답게 주름을 잡은 로브(robe)를 입은 왕비 앙케세나멘, 투탕카멘의 옥좌 뒷면(부분), 카이로에 있는 Egyptian Museum 소장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이집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