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준경 전도사와 증동리교회 ◇
2010.03.04 23:57:32
* 문준경 전도사는 섬 선교의 어머니이자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 이성봉 목사의 전도로 주님을 영접(1927년)한 후 목포 동교회에 입교했으며, 경성성서신학원(현재의 서울신학대 전신)을 졸업한다. 전도의 열정이 남달라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전남 신안군 21개 면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 문준경 전도사 초상화 | |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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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 전도사가 졸업한 동양선교회 경성성서학원(1928년) |
* 신학과정 학업 중 증동리 교회를 비롯한 4개 교회(1930년 임자진리교회, 1935년 증동리교회, 1936년 대초리, 방축리교회)를 개척하였고, 졸업 후 전남 신안군 21개 면을 순회하며 7개 교회를 더 개척하여 신안군 복음화에 기초를 세웠다.
*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졌다는 일화는 문 전도사가 전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곳을 걸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문 전도사는 이 섬 돌아다니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등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 |
*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문 전도사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일제에 굴욕하지 않았다. 또한 문준경 전도사는 1950년 증동리의 공산 세력에 의해 목포의 정치 보위부 등에 끌려가는 등 무수한 고초를 겪다가 그 해 10월 4일 주민들과 함께 두 손을 포박당한 채 백사장으로 끌려갔다.
* 문준경 전도사 묘지와 기념비
* 그녀는 죽음 앞에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자식(당시 성도들)은 살려 달라’면서 자신보다 성도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너는 반동의 새끼를 많이 까는 씨암탉’이라며 곤봉과 죽창으로 휘두르다가 마침내 총탄을 가슴에 꽂았다. 자신이 30년이 넘게 살아온 증동리가 훤히 보이는 하얀 백사장에서 그녀는 한 알의 밀알로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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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문준경 전도사 장례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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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 예배를 마치고 |
* 시신도 소천한 지 1년이 지나서야 수습할 수 있었고, 이듬해 2월 2일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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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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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 전도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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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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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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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 전도사 영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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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내 기념비 |
* 증동리교회
- 신안군 증동리는 현재 섬주민 전원이 그리스도인으로 순교자의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 문 전도사의 영향으로 신안에 세워진 교회들에서는 이만신 목사, 이봉성 목사, 이만성 목사, 김준곤 목사 등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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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전남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130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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