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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어머니의 뇌에는 아들과 딸이 산다

영국신사77 2012. 10. 12. 00:09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어머니의 뇌에는 아들과 딸이 산다

  • 이영완 산업부 기자
  • 입력 : 2012.10.10 22:53

    "임신 중 어머니·태아는 세포 나눠 동물 뇌와 심장서 태아 흔적 발견
    사람 뇌에도 태아의 염색체 보여 어머니 치매와 유방암 막는 역할
    일부 암은 오히려 발병률 높이지만 뇌에서 어머니다운 마음 이끌어 내"

    이영완 산업부 기자
    어머니에겐 자식이 모르는 초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군(軍) 시절 꽤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유리에 부딪친 오른쪽 머리는 크게 부풀어올랐고 얼굴은 수십 바늘을 꿰매야 했다. 다행히 머리 안쪽엔 아무런 이상이 없어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며칠 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도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로 "어디 아프지?"라고 말씀하셨다. 전화를 받을 때 바로 내 옆에 있던 사람들도 내 목소리에서 사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던 터였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수백㎞ 떨어진 집에 앉아 아들이 가벼운 감기에 걸린 것도 알아채곤 했다.

    혹시 어머니 머리엔 자식의 분신(分身)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이 그 증거를 찾았다. 바로 '마이크로키메리즘(microchimerism)'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 뱀의 꼬리를 한 '키메라(chi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 임신을 통해 어머니와 태아가 서로 세포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과학자들은 실험용 생쥐 암컷의 뇌에서 Y성(性)염색체를 가진 세포를 찾아냈다. 여성은 XX염색체를, 남성은 XY염색체를 가진다. 그렇다면 암컷에서 발견된 Y염색체는 임신 과정에서 수컷 태아로부터 받은 세포의 증거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26일 미국의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 과학자들은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여성 시신(屍身)의 뇌에서 Y염색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32~101세 사이에 사망한 여성 59명의 뇌를 조사했고, 그중 3분의 2에서 Y염색체가 발견됐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사람의 뇌에는 혈뇌장벽이란 게 있어 약물이나 병원체가 피를 타고 뇌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임신 중에는 이 장벽이 느슨해진다고 한다. 태아의 세포는 어머니 뇌로 들어가 오랫동안 살았다. 이번 조사에서 94세에 사망한 여성의 뇌에서도 Y염색체가 발견됐다.

    결국 어머니는 평생 머리에 자식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딸도 분명히 어머니와 세포를 나눴을 것이다. 다만 같은 여성인 어머니와 염색체를 구분하기 어려워 아들의 흔적만 찾은 것뿐이다.

    어머니가 품은 자식의 세포는 어떤 역할을 할까. 자식을 지키는 어머니는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한다. 임신을 하면 여리기만 하던 여성의 몸이 자식을 보호하는 전사(戰士)의 몸으로 바뀐다. 이번 연구에서 어머니에게 들어간 자식의 세포도 그 과정에서 한몫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진이 분석한 여성 59명 중 33명은 생전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렸다. 앞서 연구에서는 임신을 많이 한 여성일수록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아들의 Y염색체도 치매 여성의 뇌에서 더 많이 발견됐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치매에 걸리지 않았던 여성의 뇌에 있는 Y염색체가 치매 여성보다 훨씬 많았다.

    미국 마운트 시나이대의 히나 초드리 박사는 지난해 생쥐가 임신하면 태아의 세포가 어머니의 심장으로 들어가 새로운 심근세포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세포는 심장 손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초드리 박사는 "어머니 뇌에 들어간 태아의 세포 역시 신경세포로 자라날 것"이라며 "태아의 세포가 어머니의 뇌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자식의 세포를 간직한 어머니는 여성의 적(敵)인 유방암에도 덜 걸린다. 지난 3월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의 다른 연구진은 10년 전 암에 걸리지 않았던 덴마크 여성 428명의 혈액을 현재의 혈액과 비교했다. 혈액에서 Y염색체가 발견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유방암 발병률이 낮게 나왔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대장암이나 류머티즘 관절염의 경우엔 Y염색체가 많은 여성일수록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 덴마크 여성 연구에서 Y염색체가 발견된 비율은 유방암에 걸린 여성의 40%였지만, 대장암의 경우 90%였다. 암에 걸리지 않은 여성은 70%가 Y염색체를 갖고 있었다. 즉 아들의 세포는 유방암은 억제하지만, 대장암 발병률은 높인 셈이다.

    아직까지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식의 세포가 어머니 몸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많은 과학자는 어머니가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데 일조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 한 예로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움직임을 보여도 바로 어머니의 심장박동이 올라가고 피부에 전기가 이전보다 잘 흐른다고 한다. 이는 감정을 공유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혈관으로 들어간 태아의 세포가 뇌의 특정 영역으로 가서 자식을 보호하는 마음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분명 어머니에겐 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