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Opinion銘言

인생의 영원한 교과서 '해병대'/남문기

영국신사77 2012. 6. 20. 23:08

내가 쓴 ‘잘하겠습니다’를 우연히 읽다가 생각이 나서 옮겨본다. “엄마, 3,000원만 주세요.” 1974년 1월 7일,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라도 다녀오는 사람처럼 어머니가 건네준 3,000원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무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해병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해병대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금도 무슨 일이든 생각을 하면 행동에 바로 옮긴다. 아무리 ‘복잡다단한 문제’도 본질만 파악하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밀어붙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나는 해병 266기, 해군·해병 통합 1기로 입대해서 입대 1주일 만인 1월 14일에 해병대가 됨을 선서했다. 전반기 8주 동안은 진해와 상남(현재 창원)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고 포항으로 배치돼 다시 4주간의 후반기 훈련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석달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포항에서 훈련을 받던 중 목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으로 병원이란 곳에 입원을 했다. 포항 국군통합병원이 내 첫 번째 병원이었는데 거기서 3주간의 입원치료를 받았다.
당시의 군대가 대개 그랬지만 포항 국군통합병원은 정말이지 병원이라 할 수도 없었다. 병원 내에서 환자끼리 이른바 ‘빠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툭하면 누가 더 주먹이 센지를 가리는 결투가 벌어졌다. 훈련병이나 졸병들은 엄청난 ‘빠따’를 맞아야 했다. 나 역시 참으로 많이 혼이 났다. 훈련병으로 입원한 환자는 환자도 아니란 것이 이유였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을 텐데 그 시절의 군대는 항상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특히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한 추위는 정말이지 살을 에는 듯했다. 손등과 발등이 쩍쩍 갈라지는 것은 예사였다. 포항으로 배치된 우리 동기 400여 명 가운데 200명 이상이 동상 환자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해병대 생활을 우리는 빡빡 기면서 했다고 표현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당시 해병대 이동용 사령관이 내 큰형님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동기여서 한 마디만 하면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거나 포항에서도 더 좋은 보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나는 보병 생활을 감수했다. 옮겨 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거니와 형님에게 부탁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괜히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어서였다. 무엇보다 스스로 고생을 원해서 지원 입대한 내가 편안함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해병이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가 뭐든 한 번 밀어 붙이기로 하면 불같이 덤비는 성격이 해병대에 딱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 번 가는 군대이므로 이왕이면 훈련이 세다는 곳에 가서 고생을 진탕해 보자는 모험 심리 때문이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것이 해병대 지원자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도 ‘설마 죽기야 하겠냐’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매달릴 때가 있는데, 의외로 성공률이 아주 높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시절의 해병대는 머리에 먹물깨나 들었다는 사람들은 ‘개병대’라며 기피하는 곳이었다. 소대는 물론 중대 단위에서도 대학교 물을 먹은 사람이 귀한 때였으니 해병대가 얼마나 터프하고 힘이 드는 곳이었는지 알 만하다. 그러나 나의 선택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랑스러운 마음이 커져간다. “연장이 없어도 뭐든 할 수 있다!”, “아파도 금방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절대 아플 수가 없다”, “성공은 시간 문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나만 못할 이유가 없다”, “안된다고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이것들이 해병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이다. 해병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CAN DO SPIRIT’, ‘안 되면 될 때까지, 못하면 할 때까지’라는 것이 그 유명한 해병대 정신이다. 해병대에 처음 입대할 때 배웠던 이 말을 나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중얼거려본다. “난 할 수 있다!” 이 말만큼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건 없기 때문이다.

해병대가 좋은 점은 또 있다. 그것은 해병 특유의 의리다. 해병대가 왜 유난히 잘 뭉치는 군대인가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맨주먹으로 제세실업이란 회사를 창업하여 한때 한국 실업계를 풍미했던 해병대 선배 이장우 씨가 본인이 쓴 책에서 ‘인간도처 유해병’(人間到處 有海兵)이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사실 인간 세상 도처에 육군도 있고 공군도 있고 해군도 있다. 그런데 인간 도처 ‘유육군’이나 ‘유공군’, ‘유해군’이라는 말은 별로 안 쓰는데 ‘유해병’이란 말은 많이 쓰고 있다. 그것은 해병대의 단결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해병대나 영국 해병대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도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 해병대 마크를 부착하고 다니거나 가지고 있는 수첩에 전화기에 노트에 심지어 집에 해병대 기를 꽂아 놓고 사는 사람은 해병대 출신밖에 없다. 그만큼 자신이 나온 군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

해병대 시절을 회상하면 자동적으로 얼굴이 연상되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 우리 중대 중대장이었던 배상기 중대장(나중에 해병 사단장까지 역임)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배상기 중대장은 나를 ‘중대 연애편지 담당자’로 임명할 정도로 아꼈다. 제대할 때까지 중대의 거의 모든 펜팔 편지는 내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조부로부터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책읽기를 좋아한 덕분에 그런 평가를 받았는데, 덕분에 고된 훈련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재미난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해병대는 완전무장 구보를 많이 한다. 특히 그 당시는 매주 토요일은 완전무장 구보를 한다. 무장구보가 12킬로를 질주로 40분대에 완착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타 중대와 시합까지 벌였으니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출전하기 전에 모든 병사에게 매를 먼저 친다. 사람은 누구나 낙오할 수 있다. 그러나 해병은 낙오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배 중대장은 훈시를 곧잘 하곤 했다. 또 한 사람은 진해 훈련소에서 해군 해병 1기, 해병 266기, 해군 160기 훈련병들을 가르쳤던 해병 하사 신용행 교관이다. 요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이 아니라 저승사자나 야차 같은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훈련병들에게 ‘하리마오’(인도네시아어로 호랑이라는 뜻)라고 자신의 별명을 소개했다. 별명 그대로 해병대를 길러내기에 아주 적합한 교관이었다. 경우에 어긋난다 싶으면 충격적일 정도로 이른바 매질을 했고, 식사시간을 30초밖에 안 주었으며, “동작 그만과 식사 끝!”을 자기 마음대로 외쳤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바드득 이를 갈며 “이 개XX들”이라면서 음산하게 훈련병을 노려보았다.

다른 훈련병들은 그러한 신 교관에게 겁을 많이 먹었지만 나는 그 교관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 길러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통해서 전우애가 무엇이며 팀웍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훈련소에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74년 1월23일은 설날이었다. 아주 추운 겨울날 밤으로 기억된다. 불침번을 끝내고 막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고막을 찢을 듯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이어 “완전무장! 선착순!”이란 명령이 떨어졌다. 선착순! 완력으로 다져진 내 몸은 마치 스프링 튀어 오르듯 침상에서 튀어 올라 재빨리 완전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1등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건 외출이나 외박 같은 상이 아닌 ‘빠따’라는 체벌이었다. 당시 훈련병 중대장을 맡고 있던 신 교관은 내게 매질을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병대는 너 혼자만 잘해서 되는 곳이 아니다! 동료를 챙기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팀!, 단합!’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다. 팀웍이 좋을 때 성공도 할 수 있고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과 더불어 해병대가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단정한 복장이다. 해병대는 휴가를 나가거나 부대 안에서나 단정한 복장, 깨끗한 복장을 강조한다. 이미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던 ‘양반은 옷매무새부터 단정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복장 단정이다. 건전한 정신은 단정한 복장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고 있다.

그 밖에도 해병대 시절 배우고 익힌 여러 가지들을 평생 동안 생활에서 응용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나는 지금도 회의를 시작하거나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꼭 “팀! 뉴스타!”하고 세 번씩 복창을 하게 한다. 해병대 시절 중대장이 “나가자!” 하면 중대원들이 “해병대!”하고 복창했던 것을 응용한 것이다. 그것은 직원들의 팀웍을 일사불란하게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조직을 믿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복창을 하면서 스스로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하겠다는 뜻이고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는 옷이나 모자 등 눈에 띄는 모든 곳에 해병대의 로고를 붙여서 마음으로부터 확신을 가지게 한다. 우리 뉴스타 그룹도 마찬가지다. 옷이란 옷에는 모두 뉴스타 로고를 새기게 하며 심지어 골프채, 체육복, 자동차 번호판, 개인 가구까지 전부 뉴스타 로고가 박혀 있다. 일종의 ‘뉴스타 혼’을 심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해병대는 내 인생의 대학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가치관을 심어준 곳이 바로 그곳이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편지를 띄우고’로 시작되는 이른바 ‘곤조가’,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로 씌어 있는 해병대 명찰, 그리고 각종 로고! 지금 보아도 멋진 대학이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고 싶다.


남문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