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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도쿄에선 일본 전범들이 한사코 버텼다. 1938년의 난징(南京)대학살이 대표적이다. 현장에 남았던 미국인 의사 로버터 윌슨은 “단테가 말한 지옥이 피와 강간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일기를 남겼다. 재판정도 판결문을 통해 2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전범들은 “민간복으로 위장하고 게릴라전을 벌인 장제스(蔣介石) 군대와 민간인을 혼동해 빚어진 불상사”라고 우겼다. 이후 일본 극우세력은 이 발언을 맹신했다. 중국이 제시한 사진들은 “출처가 의심스럽다”며 외면했고 “애당초 학살은 없었다”고도 했다. 적어도 한 권의 사진첩이 발간되기 전까지는. 일본군 운전병으로 난징에 투입된 무라세 모리야스의 『나의 종군, 중국 전선(私の從軍 中國戰線)』이 그것이다. 그가 직접 찍은 살육 현장 사진들에는 생생한 현장 메모까지 붙어 있다.
독도 문제는 오랜 싸움이 될 게 뻔하다. 명백한 물증이 나올 때까지 일본은 일단 우기고 본다.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단단히 하면서 차곡차곡 물증을 쌓아가는 게 최선이다. 문제는 외교 라인이다.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 명칭을 리앙쿠르암으로, 한국령에서 아예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한 것도 까맣게 몰랐다. 이런 한심한 외교 라인이 집요한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
참고로 일본은 패전 뒤 혼란 속에서도 외교정보 수집에는 목숨을 걸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히로히토 일왕과 처음 만나는 사진은 유명하다. 허리에 손을 얹은 맥아더 옆에 긴장된 표정의 일왕이 어깨를 숙이고 있다. 맥아더가 히로히토에 대해 워싱턴에 어떤 보고를 보내느냐는 중요했다. 왕실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일 외무성은 이 비밀서류에 접근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결국 미 국무부의 기밀문서철을 훔쳐보다 들켰다. 그 대가는 비쌌다. 맥아더는 일왕의 통역관을 해고하고, 곧바로 일왕의 신년사에서 ‘신성(神聖)’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에드워드 베르,『히로히토』>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