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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15) 대전 오정동 한남대 내 ‘오정골 선교사촌’

영국신사77 2011. 9. 6. 08:16

[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교육사역 헌신한 선교사 자취 한눈에…

                                                         2011.06.12   국민일보


(15) 대전 오정동 한남대 내 ‘오정골 선교사촌’

“도심 한복판에 이런 아름다운 경관이 숨어 있다니…. 영화나 드라마 촬영, 연인 데이트 장소로 적합할 것 같네요.”

대전 오정동 한남대 정문과 상징탑을 지나 경상대 뒷길을 걷다보면 ‘비밀스런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오정골 선교사촌(인돈학술원 일대)’이다. 시대는 영락없는 1950년대를 연상하게 한다.

주변에는 40∼50년생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솔부엉이·새매·소쩍새 등 5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어 생태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중앙의 채소밭과 입구 쪽에 있는 한옥 형태의 관리동이 정겨움을 더한다.

한남대 캠퍼스 내 ‘오정골 선교사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대전시가 최근 이곳을 ‘영화 찍기 좋은 곳’으로 선정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입소문이 퍼지면서 방문객도 부쩍 늘었다.

‘영화의 도시’를 선언한 대전시는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포토 레터’를 제작했다. 시는 올 초부터 이 레터를 영화 제작자와 기획사 등에 보내고 있다.

선교사촌은 한남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린튼(1891∼1960년·William A Linton, 한국명 인돈)의 부인(한국명 인사례)이 설계하고 한국인 목수가 시공했다. 붉은 벽돌에 한식 지붕을 올리고 진입로가 현관으로 보이는 동서양 건축이 어우러져 건축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수 한옥으로 지어진 관리동 1채와 동서양 건축이 어우러진 3개동의 기와 건물이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집은 ‘린튼 하우스’다. 1912년 22세 젊은 나이에 목포에 도착한 린튼은 그 후 48년 동안 전주 신흥학교와 한남대를 중심으로 미국 남장로교의 교육선교 사역에 헌신했다.

 

‘서머빌 하우스’로 부르는 두 번째 집은 1954년 내한해 94년까지 한남대 교수를 지낸 서머빌(John N Somerville) 선교사가 살았다. 서머빌은 안동 권씨 족보연구로 74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학 전문가다. 이 집은 현재 인돈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머지 한 채인 ‘크림 하우스’는 52∼66년 한남대와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던 크림(Keith R Crim, 한국명 김기수) 교수의 집이다.

당시 오정골에는 6만2800여㎡(1만9000여평)에 이르는 선교사촌이 조성돼 있었다. 침례교 선교사들이 살던 지역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육사업을 하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전자는 침례교신학대 소유로 넘어가고 이후 이 학교가 대전 하기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건설회사에 매각돼 건물과 수령 40년이 넘는 고목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지금은 9900㎡(3000여평) 규모의 선교사 주거지만 남아 있다.

한남대는 선교사들이 떠난 뒤인 94년 사택 일부에 인돈 선교사를 기념하는 ‘인돈학술원’을 개원,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와 각종 서적과 편지, 그림, 도자기 등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다.

한남대를 설립한 인돈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와 함께 국내 대표적인 외국인 선교사로 꼽힌다. 두 사람의 후손들은 4∼5대에 걸쳐 이 땅에서 교육사업을 하거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인돈의 후손들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이 중단된 뒤에도 유진벨재단 과 ‘한국을 사랑하는 기독교인 친구들’ 결성에 참여해 북한 동포 돕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잘 알려진 반면, 인돈은 역사에 묻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인돈은 지난해 제91주년 3·1절 기념식에서야 독립운동 등에 앞장 선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인돈은 특히 여성교육을 강조했다. 한국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중심에 교육받은 여성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을 치면 바로 수업을 시작하라. 종을 치기까지 수업을 계속하라. 숙제를 내주어라. 교수와 학생은 수업시간에 빠지지 마라. 기독교 분위기를 유지하라.”

 

한국을 떠나기 전 유언으로 남긴 인돈의 교수 지침은 지금도 이 땅의 교육자들이 지켜야 할 기본이 되고 있다.

‘오정골 선교사촌’은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은 좋은 사례로 손꼽힌다. 99년 선교사촌 일부가 건설업자에 팔리면서 훼손 위기에 봉착했지만, 대전의 뜻있는 시민들의 ‘땅 1평 사기 운동’과 이에 공감한 한남대의 도움으로 결국 해결됐다. 인돈학술원은 ‘건축문화의 해’인 99년 ‘좋은 건축물 40선’에 선정됐다. 또 북측 3개동은 2001년 대전시 문화재 자료 제44호로 지정됐다.

이문균 한남대 인돈학술원장은 “도심 속 비경으로 손꼽히는 ‘오정골 선교사촌’의 역사적 보존 가치가 교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대전=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