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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약력

영국신사77 2011. 6. 1. 20:57

 

문준경 전도사  약력 


◎ 1891.2.2.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진사 문재경씨의 셋째 딸로 태어남.

 

◎ 1908년 3월 17세 때, 무안군 지도면 등선리 정씨 가문으로 출가하셨다.

1927년3월5일 36살 때 한창 삯바느질에 바쁜 그녀에게 어떤 점잖은 부인이 찾아왔다.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부인은 자리에 앉자, 가방에서 까만 두 권의 책을 꺼냈다. 성경과 찬송가였다. 부인은 성경을 펴보이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간곡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처음듣는 이야기라 그녀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홀로 서럽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또 사랑으로 대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문준경은 설움이 복받쳐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이 부인의 손에 이끌려당시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던 목포 북교동교회에 입교하여,

 3개월만인 그해 6월에 세례를 받고,  철저한 신앙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음.

 

1931년 5월 40살에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처음에는 청강생(결혼 전력으로)으로 입학했다가

   이성봉 목사의 보증으로 정규 신학생이 됨.

 

◎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1933년[42살]......... 임자도 진리교회 설립,

    1935년[44살]......... 증동리교회,

    1936년[45살]......... 대초리교회 건립.

    1936년 5월[45살]... 6년만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

    1936년경[45살]..... 방축리에는 기도처를 지음.

 

‘염병’이라 불리던 전염병이 신안의 섬 일대를 휩쓸 때, 1년에 9 켤레의 고무신을 바꿔 신으며

    섬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돌보고,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문 전도사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목포경찰서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탈진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는 찬송을 불렀으며 에스더 4장 16절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구절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기로 각오했다.

 

-1943[52살]-45[54살]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증동리 교회당이 강제로 일제치하의 경방단에 강매된 후,

    쓰라린 행패와 갈등을 극복하며 법정 승소로 교회를 되찾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임자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우진리교회,

병풍리교회,

사옥교회,

장고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 특히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 지역 최초의 교회였다.

 

1950.10.5.(59세) 새벽 2시경 증동리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공산 폭도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 이북 공산당원에게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순교 당함.

 

 문준경 전도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정희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준경 전도사에게는 이 순교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떼들을 홀로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증동리교회를 찾아갔다가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순교의 사건이 있기 전 문준경 전도사는 양도천, 이봉성 전도사 등과 함께 특별 감시 및 교육대상에 차출되어, 증동리에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을 압송하던 내무서원들은 세 전도사에게 친척집 등으로 가라고 이르고는 도망가 버렸다.

 

양도천 전도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에 머물렀고, 문준경 전도사는 잠시 친정을 방문한 뒤, 공산당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성봉 목사는 증동리에도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에 있는 신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백 전도사가 제 대신 남아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어서 돌아가야지요. 한시라도 빨리요”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증동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에서는 48명이 학살당함.

                                                       -허명섭(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

 

1951년 2월 2일 문 전도사의 회갑을 맞아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장에서 정씨 문중 선산까지 장례행렬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섬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분을 자기 어머니, 할머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장례식 때는 백범 김구 선생 장례식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순교의 피와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그로부터 증도는 복음의 진원지가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이며, 그 중에서도 증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으로, 주민 2,200명에 교회만 11개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