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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감리교 창시자|

영국신사77 2011. 6. 18. 20:21

존 웨슬리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감리교를 창시한 신학자이자, 근대 복음주의적 기독교 부흥을 이끈 목사입니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하고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영국과 미국을 순회하며
뜨거운 은혜설교를 했고,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로 사회개혁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웨슬리 신학은 성화를 중심한 성령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해 회개·칭의·중생를 거쳐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실천적인 신학입니다.

 
1. 존 웨슬리의 생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19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존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벳잔치]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독법·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수·문법·역사·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 라는 소리가 목사관2층에서 들렸다. 웨슬리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 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 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 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존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리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교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리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대를 꺾고 말았다.

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작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

그가 먼훗날 그 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리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의 사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리가 쓴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에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

요한 웨슬리가 집사 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다."

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 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넣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을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받은 것은 1727년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 교구와 우릇 교구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이 벅차, 아들 존 웨슬리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리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 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포드그리스도교회 대학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 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지들과 함께 매일 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 시간을 될 수 있는대로 줄이는 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 (metho-dists)라는 별명 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로 돌아온 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 [신성 구락부] (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 잡고자 뜻 있는 청년 몇 사람이 조직한 [신성 구락부]는 신임회장 존 웨슬리를 맞았다. 회원 네 명중 세 명은 대학 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 재학생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 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도 심방하였으며, 무산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리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리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돈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 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벽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리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 파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음 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리의 부친 엡윗 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웨슬리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 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는 얼마간 옥스포드 학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 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

 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 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아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 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 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

 폭풍이 지난후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리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는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

 웨슬리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리비아 교단의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 겐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 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각케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 영국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 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리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웨슬리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전도했다.

 다음주일 웨슬리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리의 부흥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퀘이커교 창설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가 중생한지 18일 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 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웨슬리 일행에게 일대 수난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리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즉석기도·평신도 전도·찬송·연회·속회·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만 9천7백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 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가 2만5천9 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리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 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위에 누운 웨슬리 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선구자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 였다. 그의 후계자인 우리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게 구제·교육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 할 것이다.
 
 
2. 존 웨슬리의 영향
 
                 존 웨슬리…‘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생활속으로
  
 한국교회의 교회제도는 칼뱅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지배해왔다. 그래서 감리교회나 성결교회, 순복음교회도 모두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감리교회마저도 담임목사를 감독과 감리사가 파송하는 게 아니라, 교회 구역인사위원회의 3분의 2 찬성으로 초빙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신학은 자유주의도, 근본주의도, 신정통주의도 아닌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속회나 구역예배, 부흥회 등은 모두 웨슬리의 전통에서 나왔다. 한국의 성도들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선호하는 데, 그것은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이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모두 웨슬리식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마저도 그 별명이 ‘고함치는 감리교회 설교가(a roaring Methodist preacher)’라고 불릴 만큼 웨슬리적이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 유형을 형성한 신학은 웨슬리신학이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철저히 웨슬리적이지 못한 요소들이 많다. 웨슬리신학사상을 올바로 알고 이해할 때 더 건전하고 성숙한 한국교회로 거듭나고 성장할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의 노력이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중세적 해석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구원의 출발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칼뱅이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곧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은총(responsible grace)’이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다.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웨슬리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노력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다가온다는 펠라기우스적 인신협동(인간 50%,하나님 50%)’을 강하게 비판하고,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면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 곧 ‘신인협동’(하나님 100%,인간 10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할 수 있고(can),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must)’는 주장이 여기서 나왔다.
 
 미국의 1, 2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 조너선 에드워즈, 찰스 피니 등이 모두 칼뱅주의자들이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인간 의지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흥회 설교를 했다. 한국의 장로교회나 침례교회 부흥사들도 모두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을 웨슬리처럼 주장한다.
 
 웨슬리는 구원의 출발은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으로 이뤄지고 구원의 완성,곧 성화는 믿음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필수조건은 믿음이요, 구원의 충분조건은 행함이다.
 
 웨슬리는 신앙의 본질은 내면적(inward)인 것으로 이해하고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social)인 것으로 이해했다. 웨슬리신학자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 Evangelism)와 건전한 복음주의(Healthy Evangelism)를 구분하면서, 웨슬리는 건전한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고 해석한다. 불건전한 복음주의란 신앙의 내면적인 것,곧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하고 사회적인 것에는 무관심하는 것을 의미하고, 건전한 복음주의란 신앙의 내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대해 동시에 관심 갖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내면적 성결을 위한 경건의 훈련과 사회적 성결을 위한 자비의 훈련이 함께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웨슬리는 그의 찬송가 서문에서,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을 모른다고 강조했다. 또 사회적 종교(social religion)가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고 했다.
 
 웨슬리는 이를 위해 경제적 분배운동을 강조했다. 성화란 우리의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경제적 성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3대 원리,곧 최대한 성취하되 최대한 아껴 쓰고 최대한 베푸는(gain all you can,save all you can,give all you can) 청지기 정신과 재산상속 반대운동, 소자에게 베풂을 통한 하늘나라 저축 등을 주창했다.
 
 웨슬리는 세제 개혁과 노예해방, 교도소 개혁, 여성 해방, 산업노동자의 노조운동 등에 직접 뛰어들어 그의 신앙을 실천했다.
 
 웨슬리는 영국성공회 안에서 교회를 갱신시키려는 감리교 신도회 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라고 말하지 않고,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라고 했다. 마치 예수회가 가톨릭내에서 가톨릭의 갱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감리교신도회도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운동이 되길 바랐다.
 
 그는 오늘날의 셀 목회나 가정교회의 원형이 된 속회를 조직해 작은 교회 운동을 펼쳤다. 12명을 단위로 한 의무적 모임인 속회와 함께 5∼6명의 자발적인 소모임인 밴드도 결성했다. 속회나 밴드는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공동의 성화를 위한 생활과 영성의 나눔을 가지면서 감리교인들의 성화에 원동력을 제공했다.
 
 웨슬리의 신학을 오늘날 다시 돌아볼 때 한국교회의 영성이 더욱 성숙해야 함을 절감한다. 아무리 은총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 은총이 임할 때 인간이 마음의 문을 열고 응답해야 하는 자유의지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 우리를 온전한 성화로 인도하려고 하시더라도, 우리는 죄성을 갖고 있기에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 마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믿음은 강조하지만 행함이 부족하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열심히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노력,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도 한국교회에 불붙어야 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각종 은사를 체험하는 수동적 객관적 영성에 머무르지 않고, 그 영적 능력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능동적 주관적 인격적 성화의 영성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가는 사회적 성결운동을 강조한 웨슬리의 정신은 오늘 한국교회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실직자, 노숙자, 외국인노동자, 굶주리는 북한 주민,탈북민 등의 아픔과 울음에 귀를 귀울이고 응답해가는 한국교회가 돼야 한다. 웨슬리의 신학적 가르침은 한국교회를 향해 영적 갱신운동이라는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김홍기 교수 약력
△감신대 신학사 △미국 드류대학교 철학박사 △한국웨슬리학회 부회장 △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임교수
김홍기(감리교신학대 교수)
 
 
3. 존 웨슬리의 연표와 통계
 
 연표로 본 요한 웨슬리
년 도
월 일
나 이
내 용
1703
6.28

born in Epworth in England
1709
2
6
화재에서 생존함을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스3:2)로 비유
1714

10
런던 챠트하우스 입학
1720

16
옥스퍼드(Oxford) 대학 입학
1724

21
인문학 석사
1725
9.19
22
영국 성공회 목사가 됨(4대째 목사)
1727

24
옥스퍼드 대학 조교수 활동
1729

26
Holy Club 시작됨
1735
10.14
31
미국 죠지아로 선교 출발 , 풍랑가운데 중요한 신앙체험
1736
2.5
32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항 도착
1737
12.2
33
미국 선교 실패 귀국길에 오름
1738
2.1
34
고국 도착
1738
5.24

올드스케이트에서 회심체험
1742


브리스톨에서 속회조직
1791
3.2
88
사망

 
 통계로 본 요한 웨슬리
 
전도생활
50년간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이상 되는 거리를 다님
선교거리
40만Km
하루평균 다닌 거리
32Km
저술
200권이 넘음
설교회수
4000번 이상 설교
60년간 변함없는 생활
새벽4시 기상 기도와 설교
찬송생활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만든 찬송가 중
525곡을 선정하여 찬송가로 만듬
사망 5일전 생활(88세)
32Km떨어진 곳에 복음 전도
함께 한 사역자
죠지 휫필드, 챨스 웨슬리 등
 
 
웨슬리 회심일 날의 일기
 
1738524()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9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