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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빈첸초 벨리니

영국신사77 2011. 4. 21. 01:53

빈첸초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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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벨리니

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 1801년 11월 3일~1835년 9월 23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는 유려한 선율로 유명하며, 도니체티, 로시니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된다.

[편집] 일대기

벨리니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어릴때부터 교회 음악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도로 일찍부터 작곡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6살 때 첫 번째 작품을 작곡했다. 이후 가족들의 권유로 18세의 벨리니는 나폴리 왕립음악원(Real Collegio di Musica)에 입학하여 칭가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825년에《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를 작곡하였는고, 이 작품의 완벽한 형식으로 이탈리아를 떠나버린 롯시니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826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의 의뢰로《비앙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후에 이 작품의 제목은 "비앙카와 헤르난도(Bianca e Gernando)"로 다시 붙여지게 된다.》를 작곡하였다. 그는 1827년에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의뢰로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탈리아의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시에 의한《해적》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작품이 되었다.

 

이후, 1829년 《이국의 여인》와 《차이라》, 1830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를 《카플렛가와 몬테규가》라는 오페라로 작곡하였고 1831년에는 《몽유병 여인》와 《노르마》각각 발표하였다. 1833년에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상연한후, 파리로 이주하여 1835년에 최후의 오페라 《청교도》를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벨리니는 19세기초 이태리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작곡자로 도니체티와 더불어 당대의 거장으로 꼽힌다. 벨리니의 기품, 우수에 찬 선율의 아름다움은 19세기 많은 작곡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창조적인 선율에 영향을 받은 쇼팽은 임종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고, 바그너, 고티에 등도 벨리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올려 놓기까지 했다. 오페라의 아리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선율은 그의 오보에 협주곡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편집] 오페라

 

      벨리니 (이탈리아 작곡가)  [Bellini, Vincenzo]

 
                                                                                                          출처: 브리태니커
 
1801. 11. 3 시칠리아 카타니아~1835. 9. 23 프랑스 파리 근처 퓌토.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감각적 표현력이 강한 독자적인 양식의 성악 선율을 만드는 데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그는 바그너의 초기 작품을 포함한 그 이후의 오페라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쇼팽과 리스트 같은 기악음악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벨리니는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가 입학시킨 나폴리 음악원에 재학중 첫번째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후 벨리니는 영향력있는 오페라 흥행주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의뢰로 나폴리 오페라를 위해 〈비안카와 페르난도 Bianca e Fernando〉를 작곡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다른 작품들을 의뢰받았는데, 특히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을 위해 작곡한 〈해적 Il pirata〉(1827)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희극 작가인 펠리체 로마니를 대본작가로 쓰는 행운도 안았는데, 이후 여섯 작품을 로마니와 공동으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을 개작한 〈카풀레티가와 몬테키 I Capuleti ed i Montecchi〉(1830)와 〈몽유병 여인 La sonnambula〉(1831)·〈노르마 Norma〉(1831)가 있다.
 
'오페라 세미세리아'(심각한 내용이지만 행복하게 끝나는 오페라)에 속하는 〈몽유병 여인〉은 영국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어 영어로 번역되어 공연되기도 했다. 고대의 갈리아 지방을 무대로 한 대표작 〈노르마〉는 초연이 실패했는데도 지속적인 성공을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1833년 런던에 잠시 머물렀던 벨리니는 파리로 가서 로시니의 영향을 받아 테아트르 이탈리엔 극장에서 오페라를 의뢰받고 〈청교도 I puritani di Scozia〉(1835)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부적절한 대본이 약점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야심적이고 아름다운 오페라이다.
 
벨리니의 명성은 전적으로 당대 명가수들의 벨칸토 창법에 의존한 것이었다. 개혁가가 아니었던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상과 동일했고, 명료성·형식과 멜로디의 우아함, 가사와 음악의 밀착된 결합을 추구했으며, 인내를 가지고 당시 오페라의 폐단을 고쳐나갔다.
 
관현악단의 반주보다 가수의 노래를 더 중시해 가수의 목소리를 극적 표현의 주된 수단으로 삼았으나, 그의 화성은 동시대인이었던 도니체티에 비한다면 매우 획기적이었으며 서주와 간주에서 관현악의 처리는 형식적인 겉치레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니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악 선율의 독자적인 매력과 우아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