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①- ⑤... 이종무 목사

영국신사77 2011. 4. 15. 00:45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①
[703호] 2009년 05월 02일 (토) 이종무 목사 webmaster@kehcnews.co.kr

 

문준경(文俊卿) 전도사는 한국교회가 배출한 대표적인 여성순교자다.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간 문 전도사는 결혼 첫날부터 소박을 맞아 생과부가 됐다. 하지만 전도부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됐으며, 목포 북교동교회 이성봉 목사에게 은혜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으며, 전도부인이 되어 훗날 48명의 순교자를 낸 임자도 진리교회와 증도의 증동리교회, 우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곳곳에 기도처를 세우는 등 섬선교에 헌신했다.

 

6·25한국전쟁 중 섬에 들이닥친 공산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지만, 그 순교의 피로 증도의 90% 이상이 복음화 되는 기적을 일구었다.

 

뜻있는 인사들이 성결교단에서 순교기념관 건립과 성역화에 뜻을 모으도록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다.

 

 

                                  어이없는 생과부 신세가 되어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의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소녀 준경은 할아버지가 진사였기에 넉넉한 양반가문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그녀는 천성이 곱고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하인들에게도 인정을 많이 베풀어 마음씨 고운 주인댁 따님으로 불렸다.

 

호기심 많고 총명한 그녀는 남자들처럼 글을 배우고 싶어 아버지께 오빠들과 같이 서당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하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편하게 살면 됐지 이 무슨 말이야? 착하고 똑똑해서 귀여워해줬더니 애비 상투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그러는 게냐?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라.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느니라.”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로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17세에 신안군 지도면 등선마을의 정근택과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남편이란 사람은 결혼하자마자 외방에 나가 몇 달 씩 소식도 없이 지내다가, 어쩌다 집에 돌아오면 부모만 뵙고 아내와는 한밤도 자지 않고 말조차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남편의 마음을 붙잡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였다. 알고 보니 남편은 목포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그때 문준경은 자신을 ‘남편 있는 생과부’로 지칭하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시부모도 극진히 섬겼다. 인정이 많고 자상한 시부모는 며느리가 보기 민망스럽고 안타까웠지만,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망나니 같은 아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문준경이 애처롭고 안쓰러워 친딸보다 더 사랑하고 보살펴주었다. 그의 총명함을 안지라 그녀가 혼자 어려운 세파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글이라도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녀는 단시일에 한글을 깨쳐 시아버지는 크게 감탄했다. 한글을 깨친 그녀는 닥치는대로 책을 구해서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            <계속>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②
[704호] 2009년 05월 09일 (토) 이종무 목사 webmaster@kehcnews.co.kr

 

                          불붙은 소명감으로 전도자가 되어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시어머니는 큰 시숙이 모시게 되어, 홀로 남게 된 문준경은 결혼 후 20년 동안 살아온 등선마을을 떠나 목포의 큰 오라버니 댁 근처로 옮겼다. 목포 북교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프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나이 36세, 1927년 3월 5일 여느 때와 같이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자신과 똑같은 또래의 점잖은 부인이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가 처음 보는 성경과 찬송가를 꺼낸다.

 

“자매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뜨거운 지옥 불구덩이에 빠집니다. 자매님, 사는 게 얼마나 헛되고 힘듭니까? 이런 세상에 믿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믿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에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부인의 친근감에 이끌려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처음 보는 부인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에게 약속한 대로 주일이 되어 부인을 따라 북교동교회에 나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북교동교회의 담임 장석초 전도사는 한학자로서 한시와 고전을 두루 섞어가며 구수하게 설교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문준경은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여 1년후인 1928년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완전히 변화되어 은혜가 충만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여, 교회에 나간 지 1년 만에 학습·세례 받고 1928년 6월 압해도의 개척교회를 들락거리며 전도하고 목포의 한 지역을 맡아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힘썼다. 세례 받은 지 1년 남짓하여 집사의 직분을 받았다. 집사가 된 그는 자고 깨면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힘썼다.

 

1931년 40세 때 이성봉 전도사가 목포교회에 부임하자 날마다 교인들이 늘어 놀랍게 부흥하였으며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 목포 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낮에는 삯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거나 교회에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던 문준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희망과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적 스승인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게 되어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문준경은 평신도 신분으로 전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죽을 때까지 말씀을 전하고 싶은 소원이 불같이 일어났다. 또한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깨치고 싶었다. 한글을 깨쳐 성경을 열심히 읽지만 그 속에 담김 뜻을 헤아리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그로부터 하나님께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불철주야 기도하면서 매달렸다.

 

문 집사는 1931년 5월에 이성봉 전도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경성성서학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면접과정에서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청천병력 같은 통보를 받게 된다. “우리학교 규칙상 남편이 있는 부인은 입학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남편의 반대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또 졸업 후에도 전도부인으로서 활동하려면 육아나 가사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남편이 쉽사리 허락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혼이거나 남편이 사별한 부인의 경우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그녀는 원장을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자신은 결혼한 부인이지만, 생과부로 살고 있는 사정을 말하면서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원장은 청강생으로 허락했다. <계속>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③

                 성서학원 학생시절 섬마을에 세운 교회들
[705호] 2009년 05월 16일 (토) 이종무 목사 webmaster@kehcnews.co.kr

경성성서학원 청강생이 된 것만으로 문준경은 감지덕지했다. 그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제는 6년으로 매년 3개월 동안 공부하고, 9개월 동안은 어디든지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해야 했다. 그는 학기 중에는 청강생으로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면서,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장학금 지원을 받지 못해 배고픈 설움도 많이 겪었다.

 

                              첫 개척교회 임자도의 진리교회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9개월의 실습기간이 돌아왔다. 그녀는 첫 실습을 신안군 임지면 진리에 와서 전도하여 진리교회를 세웠다. 그녀는 첫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증도에서 가까운 임자를 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임자도에 발을 내딛었다.

 

문준경은 임자도에 당도한 후 노방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쉬는 동안 동네 언덕에 올라 찬송가를 불렀고, 이 찬송을 듣는 아이들과 동네아낙, 할머니 등이 모여 그의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런 다음 이어진 즉흥설교를 순수한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였고, 이러한 노방전도의 결실로 정규예배로 발전하여 진리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9개월이 지나자 다시 등교하여 원장에게 정식장학생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또 거절을 당했다. 어느 날 교정을 거닐다가, 뜻밖에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너무나 반갑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인사를 하고 청강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사정을 말했다.

 

이성봉 전도사는 곧장 원장실로 찾아가서 자신이 문전도사의 추천서를 써주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문 집사를 정식학생으로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문준경은 정식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숙사 밥을 먹게 되니 건강도 좋아져 매 실습기간마다 열심히 전도하여 신안 섬마을에 교회를 세워나갔다. 그녀는 성격이 명랑 활달했다. 늘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유머가 풍부하고 화술에 능했다.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고 구수하게 잘하는지 듣는 사람마다 매료되어 감동을 받아 변화되어 갔다.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찬송뿐만 아니라 가요나 민요도 구성지게 잘 불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복음성가가수 뺨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가졌던 같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 고운 목소리로 불러대는 노랫가락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더없이 좋은 전도의 도구였다. 그는 특히 이명직 목사가 지은 ‘희망사’라는 찬송을 잘 불렀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고나 부귀공명장수는 바람잡이이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 ”

이렇게 이어지는 찬송은 무려 16절까지인데, 문준경 전도사는 이걸 잘 불렀다. 문 전도사가 나룻배를 타고 섬마을에 나타나 동산이나 마을복판에서 찬송을 구성지게 부르면 마을아이들과 아낙네, 남정네 할 것 없이 모여들었다. 찬송을 부른 후 전도설교를 하여 모인 무리들이 예수를 믿도록 감동시켰다.

 

           실습기간에 세운 2.증동리교회, 3.대초리교회, 4.재원리교회, 5.전리교회

문 전도사가 이렇게 노방전도를 시작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녀가 실습기간에 세운 두 번째 교회가 증동리교회이고 세 번째가 대초리교회, 네 번째가 재원리교회, 다섯 번째 세운 교회가 우전리교회였다. <계속>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④
                              고무신 아홉 켤레와 죽음의 각오
[706호] 2009년 05월 23일 (토) 이종무 목사 webmaster@kehcnews.co.kr

문준경은 6년의 학업을 마치고 영예로운 졸업장을 가슴에 안고 신안군 증도로 돌아왔다. 증동리교회를 선교본부로 삼아 머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안 일대의 섬들을 돌며 말씀을 전했다. 증동리를 비롯하여 대초리 방축리 염산 등에도 교회와 기도소를 세우고 임자, 재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영혼을 사랑하고 불우이웃을 돕는데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 그녀는 섬마을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신안군 10여개의 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마을에 매우 요긴한 사람이 됐다.

 

그는 어디든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그 당시 교통이 매우 열악한 때라, 수많은 섬들을 찾아다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는 김에 주민들의 부탁으로 심부름꾼, 짐꾼, 우체부 노릇을 하기가 일쑤였으니, 고된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언제나 그의 손에는 선물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잔칫집에 초청받으면 잔치음식을 싸달라고 하여 배고픈 섬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보따리에 때로는 과일, 감자, 고구마, 학용품, 장난감, 의복, 아낙네에게 필요한 잡화 등이 들어있어, 그가 도착하면 보따리에 시선이 가 있기도 했다. 그는 섬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추위와 더위, 비바람, 눈보라를 가리지 않고 갯벌, 진흙길, 거친 돌길도 마다않고 걸어 다니느라, 한해에 고무신이 아홉 켤레씩이나 떨어졌다.

 

문 전도사는 의약환경이 열악한 섬마을의 정신병자, 중풍환자, 크고 작은 병, 그 밖의 난치병 환자를 기도로 고쳐주어 의사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두고 싶어 하는 소원을 아시고 수양딸 백정희를 주셨다. 문전도사는 백정희에게 사랑을 듬뿍 쏟으며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했다. 백정희는 후일 전도사가 되어 복음 사역에 동고동락했고, 문 전도사의 순교현장에 같이 있었기에 그의 순교의 증인으로서 생생한 기록을 남기게 했다.

 

문 전도사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목포경찰서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탈진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는 찬송을 불렀으며, 에스더 4장 16절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구절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기로 각오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이 신안군의 섬에도 말려왔다. 이 때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과 합세하여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평소 교회를 증오하던 전 아무개란 자가 주동이 되어 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문 전도사는 배를 마련해놓고 양도천 전도사와 백정희 전도사를 피신하라고 권유했다. 두 전도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노라며 오히려 문 전도사에게 피신하라고 권유했으나, 문 전도사는 “나는 늙어서 죽어도 좋으나 두 전도사님은 살아서 주의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있어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돌봐야합니다”라고 하면서 두 전도사를 강권하여 범선에 승선시켰다.

 

이때 기회만 있으면 전도사부터 죽여 없애기로 앙심을 품고 있던 전 아무개 일당이 곤봉과 죽창을 들고 달려와 승선한 두 전도사를 배에서 끌어내렸다. “너희들이 도망가면 어디로 가, 감히 나를 속이고 도망가려고해? 이 악질반동분자들아” 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붓고 마구 때리며 짓밟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하고 말았다.

 

문 전도사는 간신히 두 전도사를 집으로 데려와서 피투성이가 된 옷을 벗기려하니 온몸이 퉁퉁 부어서 옷을 벗길 수 없었다. 문전도사는 가위로 옷을 잘라내고 보니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오열을 하면서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                                                     <계속>

 

 

                   신안 섬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⑤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707호] 2009년 05월 30일 (토) 이종무 목사 webmaster@kehcnews.co.kr

 

이런 일이 있은 후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문 전도사와 백 전도사 그리고 몇몇 교인들을 연행해갔다. 죄명은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공산당들은 양민들을 잡아다 가둬놓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유로 잔인한 매질 끝에, 밤마다 두 세 사람씩 끌어내어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문 전도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풀어주었다.

 

얼마 후 국군이 목포에 상륙했다는 말이 돌았고 이를 전해들은 공산세력은 후퇴를 서둘렀고, 10월 4일 국군의 배가 증도로 다가오는 그날 밤, 양민들과 교인 수십 명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줄줄이 엮어 끌고 갔다. 문 전도사와 백 전도사도 이 대열에 있었다. 악도들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마구 내리치니 한 사람 두 사람씩 쓰러져 죽었다.

 

10월 5일 새벽, 백 전도사도 손을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끌려왔다. 증동리 백사장은 살벌한 죽음이 감돌았고 공산세력은 끌고 온 양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찔러 죽였다. 드디어 문준경 전도사의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고 놀려대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찔렀다. 그 와중에도 문 전도사는 백정희 전도사와 교인들만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방아쇠를 당겼다. 새벽 적막을 깨뜨리는 한 방의 총소리는 역사의 휘장을 가르듯 그렇게 삶과 죽음을 가르며 허공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문준경 전도사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하고 59세로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때가 새벽 2시였다. 백 전도사는 문 전도사의 옆에서 어서 죽고만 싶었다. 그런데 악도들은 총알이 아깝다며 백 전도사와 김두학 장로를 내무분소로 끌고 갔다. 그렇게 내무분소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오니 새벽 5시였다. 백 전도사는 문 전도사의 체취가 배어있는 텅 빈 방안을 둘러보며 흐느껴 울었다.

 

울다보니 음력 8월 23일 조금 지난 때인지라, 문 전도사의 시신에 조수물이 넘어올 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조금만 늦어도 문 전도사의 시신이 바닷물에 휩쓸려갈 판이었다. 그 당시 공산당에 의해 학살된 시신에 손을 댔다가는 무수히 매를 맞기 때문에, 아무도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다. 백 전도사는 문 전도사의 조카딸 조동례 권사(이만신 목사의 모친)와 권복엽 집사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공산당의 눈총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문 전도사의 시신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버선까지 젖어있었다. 옷과 살이 붙어 옷을 벗길 수 없어 칼로 옷을 찢어서 벗겼다. 그들은 문 전도사의 시신을 거두어 약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무덤에 고이 안장시켰다.

 

백 전도사는 문 전도사가 순교한 그날로부터 3년 동안 소복하고 그를 추모하며, 매일 새벽기도 후 문 전도사의 묘소를 찾아가 기도했다.

 

1951년 2월 2일 문 전도사의 회갑을 맞아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장에서 정씨 문중 선산까지 장례행렬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섬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분을 자기 어머니, 할머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2006년 우리나라 종교인구 분포에 따르면 개신교가 18%인데, 신안군은 35%나 된다. 이중 증도는 주민 90%가 개신교다. 증도의 거의 모든 가구들이 다 예수 믿는 가정이다. 증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오늘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열매를 거둔 데에는 신안군 섬마을 선교의 영원한 어머니로 불리는 위대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준경 전도사는 1950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증도 사람들 가슴 속에는 영원한 어머니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친부모가 돌아가신지 몇 십 년이 지나면 자식들의 기억 속에 잊혀 지는데, 돌아가신지 60여 년이 다 된 한 여인을 온 마을사람들이 잊지 못하고 기리며 묘소를 찾아 눈물짓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문 전도사는 순교했으나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돼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 가정들이 변화되고 마을이 변화되고 있다. 문 전도사의 순교의 피 때문에 지금도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신안 섬마을의 영원한 어머니로 살아있기에 주님오실 때까지 계속 역사하시리라.                                                                            <끝>

 

 

출처:한국성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