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문준경전도사님 일대기 비문
故문준경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은 섬 선교의 어머니이며,
성결의 신앙을 지키려는 성결교회의 상징적 인물이다.
1891년 2월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셨다.
1908년 3월에 현 무안군 지도면 등선리 정씨 가문으로 출가하셨다.
그 후 1927년 故이성봉 목사님이 시무하던 목포 북교동교회에 입교했으며,
1931년 5월 서울 성서학원 (現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복음 사역자로 첫발을 내딛는다.
1933년 임자도 진리교회의 개척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인 1935년 증동리교회를 개척(1935년부터 순교시까지 시무했음)하였고
쉬지 않는 걸음으로 대초리교회와
방축리 기도처(현 방축리교회)를 1936년에 개척하였고,
그 후 우전리교회와 사옥교회를 개척하고 병풍교회는 순교기념교회로 세웠다.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문 전도사님은 나룻배를 타고
무안군(현 신안군)의 21개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 개척에 불길을 붙였다.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졌다는 일화는
문 전도사님이 전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머리에 손 한번 얹으시고 “예수 믿고 천국 가거라”했던 아이가 지금의 예수를 믿어 권사가 되었노라고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을 품고 다녔던 복음 전도자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경방단(당시 일제의 후방 치안담당기관)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문 전도사님은 6.25가 나던 그 해에 증도에 들어온
공산군들에 의해 목포로 끌려가서 죽음의 고비를 맞았으나,
국군의 상륙 소식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증동리로 돌아오려 하자,
故이성봉 목사님이 구약성경 이사야 26장 20절 말씀인
“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 가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는 구절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를 뿌리친 채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타고 갔던 풍선(돛단배)을 다시 되잡아 타고 증동리로 돌아 오셨다.
그 후 1950년 10월 4일 저녁에 공산군들이 다시 지도로 압송한다고 하며
여기 터진목 모래사장으로 끌고 왔다.
사형장인 이곳 모래사장에 문 전도사님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 생존자 김두학 장로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산군은 1950년 10월5일 새벽3시 줄에 묶인 채 문 전도사님을 이곳으로 끌고 온 후 죽창으로 찌르고, 발길로 차며, 총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후려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문 전도사님은 ‘나는 죽이더라도 백정희 전도사와 성도들은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모래사장에 끌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군은 ‘너는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이기에 처형한다’며 문 전도사님을 창으로 잔인하게 온 몸을 찔렀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숨통을 끊는다고 하며 목에다 총구를 대고 발사하였다.
순교한지 며칠이 지난 뒤에도 공산군이 두려워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시 청년이었던 이만성목사(증경총회장)님의 증언을 들으면, “터진목에서 백정희 전도사님과 조수용씨, 나와 같이 세명이 시신을 솔무등으로 옮겨 물을 떠다가 시신을 씻기는데, 뜨거운 햇빛에 이틀이나 노출되었던 얼굴은 피부가 벗겨졌었다”고 증언하고 계신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하니
복음전도와 헌신의 삶을 오는 세대에 물려주었다.
당신이 못다한 사역은 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순교한지 1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솔무등에다 가매장했다가, 이듬 해 2월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니 그 당시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추모인파 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장례식이었으니,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행렬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들 한다.
사역 중에는 모든 이의 어머니였고, 산모들에게는 산파였으며,
한숨 짖는 가정에 가서는 찬송으로 위로하였는데
천국가와 허사가를 불러 소망을 심었으니,
이를 들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 전도사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순교의 뜻을 이어받아
그렇게 한 알의 밀알되어 뿌려놓은 믿음의 씨앗들이 수 많은 열매로 맺혔다.
당신께 사랑의 큰 빚을 진 모든 이들이 그 뜻을 기리며 여기 기념비를 세우다.
“순교의 아름답고 숭고한 꽃이여 영원하시라”
추모 예배일 : 매년 3월 11일 주후 2003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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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성봉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
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증도는 짱뚱어다리를 비롯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는 곳이어서
순교유적 답사와 함께 두루 돌아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후면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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