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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Insight] 세계적 명품 냄비 ‘르크루제’의 폴 밴주이담 회장1

영국신사77 2011. 3. 1. 14:57

[j Insight] 세계적 명품 냄비 ‘르크루제’의 폴 밴주이담 회장

[중앙일보] 입력 2011.02.19 02:13 / 수정 2011.02.19 02:13

“식민지 지주였던 아버지 나를 일꾼들과 일하게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의 줄루란드에서 태어나 스와질랜드에서 자랐다. 열네 살 때부터 면화를 실은 트랙터를 몰고 산을 누볐다. 흑인·백인 할 것 없이 함께 일하고 어울렸다. 자연을 벗 삼아 지낸 어린 시절은 훗날 그가 세계적인 주방용품 회사를 이끄는 자양분이 됐다.

형형색색 아프리카의 자연은 그가 만드는 냄비에 녹아들었고, 차근차근 기본을 다지는 농부의 경험은 경영자의 혜안을 선사했다. 알록달록한 무쇠 냄비로 유명한 르크루제의 폴 밴주이담(73) 회장 이야기다. 그는 1987년 르크루제를 인수해 오너 경영자가 됐다. 성장 정체로 고민 중이던 르크루제의 구원 투수가 돼 세계 70개국에서 약 9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재탄생시켰다. 최근 방한한 그를 만났다.

글=박현영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밴주이담 회장의 어린 시절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연상케 한다. 네덜란드 이민자 후손인 부친과 프랑스 위그노(개신교도)의 후손인 모친이 결혼해 줄루란드에 정착했다. 남아공의 전형적인 시골인 줄루란드는 현직 대통령 제이컵 주마의 고향이기도 하다. 농장 일을 도우며 주경야독한 밴주이담은 도시로 나가 회계사 자격을 얻으며 비즈니스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주방용품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회계사무소에 들어가 처음 맡은 고객이 주방용품업체였다. 13년간 적자를 낸 독일계 회사의 부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회사를 정상화시키면 보수 대신 지분의 일부를 넘겨받는 조건이었다. 회사를 살려냈고, 약속대로 지분을 받았다. 4~5년 뒤 미국의 제약·생활용품 회사에 내 지분을 팔았다. 지금 가치로 약 100억원쯤을 손에 쥐게 됐다. 서른두 살 때였다.”

●일찍이 큰돈을 만졌다.

 “평생 놀아도 될 정도의 거액이었다. 집 떠날 때 하숙비로 10파운드를 받아 나왔으니, 큰 성공이었다. 하지만 난 세상이 궁금했다. ”

 그는 남아공에서 11년 더 일하고 81년 런던으로 갔다. 미국계 생활용품 회사에서 사장을 할 때였다. ‘괜찮은 프랑스 주방용품 브랜드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르크루제였다.

 “당시 르크루제는 창업자의 4대손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브랜드가 탄탄하고 품질과 기술력도 최고 수준이었다. 그걸 영업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현금도 풍부해 조금만 손 보면 되겠다고 판단하고 회장에게 인수를 건의했다.”

 르크루제 인수를 놓고 이사회가 열렸다. 그런데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미국계 회사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강경한 노조 문제를 염려했다. ‘르크루제는 너무 무겁다’는 그룹 회장 부인의 취향도 반대 이유로 거론됐다. 그는 "무거운 것은 맞지만 무게가 별로 문제가 안 되는 사람도 많다”고 반박했다.

"‘여기 계신 분 중 담배 피우는 분은 손들어 보라’고 하자 논란이 종결됐다. 인수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의 승인이 걸림돌이 됐다. 정부와 여론이 프랑스의 대표 브랜드가 미국계 회사에 넘어가는 데 반대하는 방향으로 흐르자 결국 인수를 포기했다.”

 이때 그의 기업가적 본능이 꿈틀했다.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신이 르크루제를 인수 하기로 했다.

 “놓치기 너무 아까웠다. 내 인생의 마지막 일자리라고 생각하고 전 재산을 털어 넣었다. 20년 넘게 생활용품 업계에 몸담은 경험을 살리면 회사를 회생시키는 데는 자신 있었다. 마음먹은 일을 실천에 옮겼다는게 내가 남과 다른 점이다.”

●인수 금액이 궁금하다.

 “그건 밝히지 않겠다. 지금 르크루제 가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금액이다.”

●인수 후 경영 전략은.

 “사업 방식을 기초부터 뜯어고쳤다. 당시 르크루제는 주로 대형마트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매우 잘못된 브랜드 포지셔닝이었다. 상품의 완성도나 브랜드가 고급 유통망에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백화점 쪽에서도 원해 대형마트와 백화점 양쪽 모두에 물건이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건 재앙이었다. 대중 시장을 노리거나 고급 시장을 노리거나 하나를 택해야 한다. 목표 고객과 비즈니스 모델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 진출도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나.

 “주방용품 업계 상위 20개 브랜드에 들었지만 글로벌화에선 뒤처져 있었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만 팔리고 있었다. 인수 당시 해외지사가 미국에 한 개뿐이었다. 직원 1500명 중 영업 담당은 10명에 불과했고, 마케팅·상품개발·디자인 인력은 없었다. 지금은 해외지사를 24개국에 뒀다. 전체 직원 수는 여전히 1500명인데 영업에 1000명, 공장에 400명 있다. 공장 현대화와 생산 공정 개선을 병행했다.”

 모험 같은 그의 인생도 르크루제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남아공에서 태어나 영국과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일했고, 세계를 여행하며 안목을 키웠다. 그는 영어·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어·줄루어를 구사한다.

●르크루제의 브랜드 경쟁력은.

 “단연 상품의 기술력이다. 르크루제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진 건 1925년이지만, 1500년대부터 무쇠를 이용해 주물 냄비를 만드는 전통이 이어졌다. 대표 상품인 원형 무쇠 냄비는 전량 프랑스 본사에 있는 공장에서만 생산한다. 최종 검수 단계에서 완성품의 30%가 폐기될 정도로 품질 관리가 깐깐하다. ‘무결점(zero tolerance)’ 전략이다. 그런 자신감에서 제품을 평생 보증한다. 대를 이어 사용하는 ‘명품’의 명성을 얻게 됐다.”

●우려했던 노조 문제는 없었나.

 “좋은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파업이 가능했던 건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자를 필요가 없었다.”

 지난해 르크루제는 전년보다 20% 이상 성장했다. 그는 “이렇게 큰 폭의 성장률 증가는 반갑지 않다”며 “목표 성장률은 10~20% 이내”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적게 잡는가.

 “최근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 경영은 재미있고, 지적인 도전이다. 직원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현하는 게 즐거움이지,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회사를 빨리 키워야 할 이유가 없다. 원래 르크루제는 상장 기업이었다. 인수합병(M&A)으로 회사를 키우지 않는다는 주주들 압박이 싫어 시중에 있던 주식을 모두 사들여 상장 폐지했다. 지속적인 성장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농부 출신인 것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농사에서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보수적이 된다. 사탕수수 농사를 지을 때 홍수가 한 번 나면 모든 게 쓸려갔다. 1년에 수십 번도 닥친다.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기계의 오류나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 금융위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 위기에 대비해 재고를 충분히 쌓아두는 습관이 들었다. 6개월치는 꼭 보유한다. 은행에 기대지 않는 경영 스타일도 아마 농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무차입 경영을 뜻하는가.

 “10여 년 전부터 현금 경영을 하고 있다. 은행에는 1%도 의존하지 않는다. 공장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데, 주변 부지 매입부터 건축까지 비용을 모두 현금으로 조달했다. 약 5000만 유로(약 760억원)의 투자다.”

●이유는 뭔가.

 “남아공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돈이 없어 생긴 습관이다. 상품을 기차에 실어 놓고 도장을 받아 은행으로 달려가서 돈을 받아다 그걸로 운임을 냈다. 매일 현금 흐름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들었다. 은행과 거래하면 ‘필요한 자금을 제때 조달받을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을 하게 된다. 그 시간에 마케팅·영업·상품 개발에 신경 쓰고 싶다. 우리 회사는 임원회의에서도 자금 문제는 안건이 되지 않는다. 돈 걱정은 나 혼자로 충분하다. 직원들은 각자 일에 집중하면 된다.”

●선진 금융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경영의 한 방법 아닌가.

 “모두 레버리지(차입)를 신봉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첨단 학문을 가르치는 하버드대에서도 금융 레버리지, M&A로 몸집 불리기 같은 걸 배운다. 하지만 M&A의 극히 일부만 성공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성패와 관계없이 M&A 성사만으로도 돈을 버는 이들이 이를 부추긴다고 본다. 지난 50년간 기업의 90%가 사라지고 10% 이하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내가 몸담았던 생활용품 기업 2개도 당시엔 세계 최대·최고의 기업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회사 규모에 집착하다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좋은 직원을 해고하고, 회사의 장점이 사라지면서 마진이 줄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악순환이 된다. 나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풍부한 현금은 금융위기 때 위력을 발휘했겠다.

 “무차입 경영과 세계로 분산된 판매 전략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이 기회에 부동산을 싸게 살 수 있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지난 2년간 환상적인 건물을 싼값에 샀다.”

●무엇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나.

 “식민지에서 성장한 게 좋은 영향이 됐다. 아버지는 지주였지만 내가 일꾼들과 함께 일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편견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 삶을 일구는 개척자가 될 수 있었다.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라, 위에 있는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우월감을 느끼지도 말라는 걸 배웠다. 나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누구든 나만큼 이룰 수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똑똑하고, 집중력이 좋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은퇴 계획은.

 “르크루제를 사고 싶다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만, 이 회사는 팔 회사가 아니다. 금보다 더 나은 투자라는 게 입증됐는데, 내가 왜 파나. 현재 가치는 한 10억 유로(약 1조1200억원)쯤으로 알고 있다.”

르크루제의 대표 상품인 원형 무쇠 냄비는 30가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① 무쇠를 녹인 쇳물을 모래로 만든 틀에 부어 냄비 모양을 잡는다. ② 오랜 경력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냄비의 거친 표면과 모서리를 정리한다. ③ 녹 방지를 위한 1차 코팅 후 800도 오븐에서 굽는다. ④ 유리 성분의 에나멜로 2차 코팅을 해 색깔을 입힌다. ⑤ 육안으로 품질검사를 한다. 완성품의 30%를 폐기할 정도로 기준이 엄격하다.

대를 이어 쓰는 ‘명품 가마솥’의 성공 비결
프랑스 장인이 한솥 한솥 수백 가지 색을 칠하죠


르크루제의 성공 비결은 제품의 독창성에 있다. 무쇠라는 소재, 전통적 제조 방식, 천변만화의 색상이 르크루제를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만든 공신이다.

 르크루제는 1925년 벨기에 출신 주조 전문가인 아르망 드사게르와 에나멜 전문가인 옥타브 오베크가 프랑스 북부 소도시 프레누아 르그랑에서 창업했다. 르크루제(Le Creuset)는 프랑스어로 가마솥을 뜻한다. 에나멜 무쇠 냄비 시장의 65%를 점유하고 있다.

 르크루제의 핵심 기술은 모래로 만든 거푸집에 무쇠를 녹인 쇳물을 부어 냄비 모양을 잡는 것이다. 틀이 잡히면 모래 거푸집을 부숴 냄비를 꺼낸다. 그 때문에 “단 하나도 완전히 똑같은 모양은 없다”는 게 폴 밴주이담 회장의 설명이다.

 르크루제 하면 다양한 색깔이 떠오를 정도로 에나멜 코팅은 르크루제를 경쟁 제품과 차별화하는 포인트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무채색 일색이던 냄비에 색을 입히고 냄비째 식탁에 올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 덕분에 르크루제는 디자인 혁신 사례로 꼽힌다. 지금까지 개발된 색상은 수백 가지다. 이 가운데 올해는 40가지 색을 주문 할 수 있다. 적당량의 에나멜을 냄비 표면에 고르게 분사하는 기술도 남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르크루제의 핵심 기술이다. 에나멜 코팅은 3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기술자가 수작업으로 한다. 이들을 돕는 보조역할도 경력 7년이 넘어야 할 수 있다. 한때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에나멜 작업에 로봇을 도입했으나 중단했다. 사람이 하는 것보다 표면 처리가 고르지 못했기 때문. 현재 냄비 생산량은 하루 3000개, 약 40t 분량이다.

 묵직한 무게는 무쇠 냄비의 단점으로 꼽힌다. 지름 20㎝ 무쇠 냄비의 무게가 3㎏ 안팎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냄비 바닥과 벽면, 뚜껑에 열이 고르게 퍼지고 열을 오래 보유할 수 있어 요리할 때 맛과 향이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가마솥과 같은 원리다. 세련된 디자인, 장인의 손기술, 유행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패션 명품 브랜드에 비유해 ‘주방용품의 럭셔리’로 불린다.

 르크루제는 밴주이담 회장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르크루제를 인수한 뒤 회사의 전통과 유산을 잇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사람의 힘을 믿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직원들을 중용했다. 그들의 비즈니스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삶의 경험도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73세의 회장을 비롯한 제품 개발, 생산, 전략 등 회사의 핵심 업무를 하는 임원들은 대부분 60대 중·후반이다.

 글로벌화에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웠다. “한번 진출하면 100년은 있을 것으로 판단해 진출 국가를 결정한다. 지금까지 진출했다가 매장을 철수한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르크루제 매출액의 92%가 수출에서 나온다. 현지화 전략도 강화하고 있다. 각국 문화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다. 미국 시장을 위한 호박 모양의 스튜 냄비, 프랑스인을 위한 타르트 접시, 일본에선 스키야키 냄비와 이탈리아의 리조토 냄비를 개발했다. 한국 지사의 제안으로 2009년에 밥공기와 국 대접, 반찬 그릇이 나왔다. 도자기 그릇, 스테인리스 스틸 냄비, 실리콘 조리도구로 상품 구성을 다양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쇠 냄비류가 전체의 75%이상을 차지한다.

j칵테일 >> 먼로는 누굴 위해 르크루제를?
 
1999년 10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에서 열린 메릴린 먼로의 유품 경매 행사. ‘엘리제 옐로’라는 색의 르크루제 무쇠 냄비와 프라이팬 12개 세트가 등장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2만5300달러(약 3000만원)에 낙찰됐다. 예상 가격인 800달러의 30배가 넘었다. 먼로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어느 것 하나 가치 없는 게 없겠지만, 르크루제 냄비 세트는 특히 주목받았다. 그가 사랑했던 권력자와 수퍼스타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쓰였을지 모른다는 호기심 때문이다. ‘그녀의 진짜 매력은 요리였을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왔다. 주간지 피플은 “먼로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바깥 출입이 쉽지 않았던 그는 집에서 요리를 자주 했고, 손님을 초대해 대접하기도 했다”고 썼다. 폴 밴주이담 르크루제 회장도 이 경매에 입찰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르크루제가 대통령을 위한 요리에 쓰였다고 생각하니 흐뭇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