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요한계시록 22 : 6 ~ 16)
◆ 민병석 |
성경 본문 / 요한계시록 22 : 6 ~ 16
요절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2,13).
서론 : 22장은 요한이 받은 종말적 계시의 마무리가 된다.
5절로 천국에 대한 계시를 마치고,
6절부터는 계시록의 결론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경종이 나온다.
7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란 말씀이나,
10절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은 결론에서,
요한계시록이 과연 어느 시대에 적용될 말씀인지 알 수 있다.
요한이 본 요한계시록은 주 재림의 시기에 관한 인류의 종말적인 계시이지,
결코 1세기경 로마 당시의 교회의 핍박상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며,
또 전반적인 전 교회 시대의 교회에 대한 핍박사도 아니다.
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세 번이나 나오고 있다(계 22 : 7,12, 20).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하셨다 : 6절에서는 주님이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 요한에게 계시해 주신 일에 대하여,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고 했다.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란 말씀은 “약속에 관한 예언을 선지자들에게 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 사도 요한에게 종말적인 계시를 주시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시라, 옛적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 재림에 대하여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시라고 밝혀 주심으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심을 거듭 거듭 강조하신다.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속히 오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 뜻을 두 가지 면으로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주 재림 시기이다. 성경에서는 주 재림에 대하여 시한부적으로 계시해 주신 일이 없다.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면 종말에 관한 계시에는 어떤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인가? 시한부적 시기에 관한 내용인 것이 아니라, 징조적 시기에 대하여 계시해 주고 있다. 모두 징조적 시기에 관한 것이다. 이러 이러한 징조나 사건이 나타나거든 종말에 이른 줄 알라고 하는 징조적 계시로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예언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적 무대 위에 그대로 연출된다. 그것을 우리는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데, 이 같은 성취가 없는 예언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예언이든, 하나님의 예언이나 계시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신 18:22). 그러므로 여기서 때가 가깝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종말의 징조가 성취될 때를 기준한 것이며, 우리는 그 때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그 때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세로, 주의 재림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에 대한 경종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예언의 말씀은 시기적으로 결코 속히 될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시한부적 시기는 절대로 모르지만, 그때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로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우리의 신앙적 자세가 이처럼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눅 12:35-40. 21:34-36). 이 계시의 말씀이 실질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시대에 이르고 있다 : 여기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주 재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적응시키며, 그 옷을 세마포로 단장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2.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치 말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치 말라”고하셨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종말적인 계시와 환상을 보여 주신 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고 명하셨다(단 12: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로 종말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셨지만, 그 계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깨닫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그 계시는 종말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니엘의 종말적인 계시가 “인봉된 책”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인류의 마지막 종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그때에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계시를 받을 그 당시에 종말에 이르러서가 아니다. 초림의 메시아가 오셔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이제는 재림의 메시아가 오셔서 이 구속을 완결 짓는 오메가의 역사를 이루셔야 한다. 인류의 종말에 올 모든 약속이, 실제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소망이기 때문에, 이것을 인봉한 채로 두면 안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계시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소망을 주시기 위한 신앙의 경종과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유익을 주시려는 목적에서 주신 것이다. 두루마기란 성도들이 입고 있는 의의 옷을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 옷을 입게 된다. 그리고 이 옷은 또한 혼인 잔치에 반드시 입고 들어가야 할 예복이 된다(마 22:11~14). 우리는 이 옷을 더럽힐 수 있다. 그러나 더럽혀진 그 옷은 빨아야 한다.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하셨다(요13:9,10). 이 발을 씻는 일이 두루마기를 빠는 일인데, 이것은 곧 회개를 말한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고하셨다. 요한계시록은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요한에게 확실히 보이신 계시이다. 이 계시는 신학자의 신학적 견해로도, 새로운 종말적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다. 이 분명한 증거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일도, 과소평가로 중요한 의미를 축소시키는 일도, 예수님의 증거를 우롱하는 결과가 되므로 용납될 수 없다. 우리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듣고 그 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성도들의 모든 열매는 이 사랑에서 나온다(계4,5. 요14:15). 진리로 무장하고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에서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고 생활에 적용시키도록 힘쓴다.
22 장에만도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재림 다짐이
(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요한이 받은 이 계시는 지체될 일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나 선지서에서 예언해 주고 있는 종말적인 계시는
다른 또 한가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2)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야말로,
예수님은 이 책을 읽을 모든 사람들에게 엄히 경종하여 말씀하시기를
(1) 종말에 관한 예언은 그것을 인봉 할 때가 있고 또 그것을 개봉할 때가 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에게 인봉치 말라고 명하셨다.
(2)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
결론 : 16절에서 예수님은
복 습 문 제
①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계 22 : 6
②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신 뜻은?
계 22 : 10
③ 두루마기를 빤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
계 22 : 14
연구과제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② 전3년반 마지막 시기에 일어날 “첫째 화”를 이길 수 있는 준비로,
③ 음녀 교회의 배도적 세력을 경계하고,
④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하고
출처: 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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