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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스라엘의 역사연구 3

영국신사77 2010. 9. 22. 02:46
이스라엘의 역사연구 3


제12장 솔로몬 왕

1. 왕으로 세워지다(왕상 2:12-46;3:4-28, 대하1:1-17)
(1) 왕권 강화(왕상2:12-46)
-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수넴(Shunammite)여인 아비삭과의 결혼을 요청 하였으나 솔로몬은 이 청약을 자기 통치의 위협이라 생각하고 거절하였으며 아도니야를 처형 하였다.
-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키고 아나돗으로 추방 시켰다.
-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제단 앞에서 요압을 죽이도록 하였다.
- 솔로몬은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시므이를 죽였다.
(2)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의 축복의 필요성을 깨달은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에 응하여 그로 하여금 청탁케 하셨다. 이에 솔로몬은 통치에 필요한 지혜를 요구하였다.

2. 솔로몬 왕국
(1) 방어 조치
- 그의 주요 방어 조치는 이스라엘중심 땅을 둘러싼 주요 도시들을 강화 하는것이었다.
- 솔로몬은 1,400의 병거와 12,000 의 마병을 모으고 4,000의 말 외양간을 유지 하였다.
(2) 솔로몬의 궁정
- 솔로몬은 다윗 정부에 있던 사람들이외에 아사리아(Azariah)와 총리대신 사붓(Zabud)이었다
- 부인 : 700 / 첩 : 300 (왕상 11:3)
- 하루식량 : 가는 밀가루 30석 / 굵은 밀가루 60석 / 살진소 10 / 초장의 소 20 / 양 100마리
(3) 재정의 유지
1) 세 금
- 나라를 열 두 군으로 나눈후 각 군 위에 세리를 두었음.
2) 부 역
- 가나안 사람을 이용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역에도 의존하였다.
3) 외국의 공물과 예물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4) 무 역
- 무역로 : 홍해를 통해 남쪽으로 가는 것
- 솔로몬은 말과 병거에 관한 무역도 수행하였다.

3. 외국과의 관계
(1) 애굽과의 동맹
-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애굽과 동맹을 맺었다고 직접 언급되어있다.(왕상 3:1)
(2) 두로와의 동맹
- 또다른 중요한 동맹은 페니키아왕 히람(Hiram) 1세 와 맺어진 것이었다.
- 히람은 성전 건축을 예상하여 이미 다윗에게 백향목을 제공 하였다.
(3) 스바 여왕의 방문
- 스바는 현대의 예멘(Yemen)으로 보여 진다.
- 그녀는 솔로몬에 대한 예물로 금 120달란트를 가져왔고 돌아갈때는 많은 예물과 함께 자기가 바라던 모든 것을 다시 받아 만족하여 돌아 갔다.

4. 건축 사업(왕상 5:1-9:9, 대하2-7장)
(1) 성전 건축
- 구체적인 건축은 솔로몬의 재임 4년봄에 시작 하여 7년후 가을에 완성 되었다.
- 길이 27.4m / 넓이 9.1m /
- 성소 : 전체의 23를 차지 󰡉 정금제단, 정금등대, 열개의 진설병 상이 있음
- 지성소 : 전체의 13을 차지
- 성소앞에 넓이 9.1m 길이 3m 되는 현관이 있음
(2) 성전 봉헌
- 언약궤를 지성소에 둠 :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것
- 긴봉헌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다.
(3) 다른 건축물
- 자신의궁전 : 13년동안 건축
- "레바논 나무의 궁" : 백향목 기둥으로 바쳐서 지음.
: 무기고로 사용
- 솔로몬의 부인인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도 있었다.

5. 문학 시대
(1) 역 사 서
- 나단 선지자 : 다윗, 솔로몬에 대한 통치의 사기를 씀
- 갓 선지자 : 다윗의 집권만을 다룬 사기를 씀
- 아히야와 잇도 : 솔로몬의 행적을 다룬 역사서를 씀
(2) 음악과 시
- 다윗 : 73편의 시를 써서 일부를 성전 예배에 사용케함
- 솔로몬 : 2편을 씀
- 아삽(Asaph, 예배의성가대장) : 12편의 시를 씀
- 고라의 아들들 : 18편의 시를 씀
- 에단과 헤만 : 각각 1편의 시를 씀
(3) 지혜문학과 극 문학
- 솔로몬은 전도서와 아가서 전체와 잠언의 대부부을 씀

6. 영적인 쇠퇴와 징벌 (왕상11장, 대하 9:29-31)
(1) 쇠 퇴
- 종교적으로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 그의 모든 외국 부인들의 거짓 신을 위해 산당을 지은데에서 그의 변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러나 솔로몬은 죽기전에 이러한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 갔다.
(2) 징 벌
1) 여로보암
- 선지자 아히야는 그의 새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열조각을 여로보압에게 주면서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것을 알려 주었다.
-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볼암을 죽이려 하였으나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였다.
2) 에돔의 하닷
- 하닷의 활동으로 솔로몬의 남방 제국 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하닷은 요압의 잔인한 행위를 기억 하여 솔로몬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3) 다메섹의 르손
- 르손으로 인하여 솔로몬의 북방 제국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그는 유능한 군사적 인물이었으며 배후에 유능한 군대를 모집하였다. 그는 점차 지위와 세력을 증가 시켜 솔로몬에게 심각한 골치거리를 일으켰다.

7. 왕 으로서의 솔로몬
- 솔로몬은 40년(B.C 970-931)의 긴기간을 통치하였다.
- 그는 넓은 제국을 물려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부와 명예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었다.
-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13장 북방왕국


1. 반란(왕상12:1-4, 대하 10장)
- 열 지파는 이 왕국에서 탈퇴 하여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안을 왕으로 하는 자기들만으 왕국을 세웠다.
- 여로보안 은 자기의 두지파 유다와 베냐민을 통치 하는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2. 초기 시대(B.C931-885, 왕상12:25-16:20)
(1) 왕이 된 여로보암
1) 새 왕국
-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라는 열지파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 그는 세금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징수제도를 완전히 없앴을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디르사(Tirzar)를 수도로 정했다.
2) 대체된 예배 장소
- 종교적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 백성들을 위한 다른 예배 장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2) 질책과 징벌을 받은 여로보암.
- 여로보암의 행동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꾸짖게 하신다.
- 그가 그로임해 다시 마음을 돌이 켰다는 기록은 없다.
(3) 영토의 손실
- 이스라엘 초기에 특히 여로보암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왕성해져 그들이 잃었던 영토를 다시 요구 하였다.
- 이러한 영토의 손실 외에도 여로보암의 국가는 적어도 한번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죽음
- 여로보암은 22년간의 통치후 자연사로 죽었다.
(5) 나 답
- 나답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디르사에서 2년간 다스렸다.
- 종교적으로 나답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다.
(6) 바 아 사
-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스렸다.
- 그이 통치에 관해서 남쪽의 유다와 계속 투쟁을 벌였다는것 외에는 기록 된 바가 거의 없다.
- 종교적으로 바아사는 그의 두 선임자의 방법을 계속 했다.
(7) 엘라 와 시므리
- 엘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군사적인물 시므리가 공모 하여 엘라를 살해 하였다.
-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 하였는데 이것이 7년 통치 후였다.

3. 오므리 왕조(B.C885-841, 왕상 16:23-22:53, 왕하1-8장)
(1) 정치적 상황
- 오므리는 3년 동안 세번째 왕가를 대신 하였다.
- 유다의 아사왕은 바아사를 공격 하기 위해 이미 이 나라왕 벤하닷 1세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었다.
-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오므리의 집권
1) 새 수도 사마리아
-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사마리아를 정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요새로 증명되었다.
- 이 건축 사업에 훌륭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 B.C 722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2) 모압의 정복
- 모압인의 돌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3) 페니키아 동맹
-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정식동맹의 표시로 공주의 아머지 엣바알
과 조약을 맺은것으로 보인다.
(3) 아합과 이세벨
1) 바알 숭배의 도입
- 이들은 이세벨의 본래 종교인 바알-멜칼트(Baal-Melqart)의 제단을 이스라엘에 도입 시켰다.
-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 하였다.
2) 통치적인 수완
- 아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 오므리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들은 아합의 "사아궁"으로 판명 되었다.
3) 전쟁 경험
- 종교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으로 아합은 군사적으로 살효를 거두었다.
- 아합은 라못 길르앗에서 벤하닷과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4) 유다와의 동맹
- 아합의 딸 아달랴는 동맹의 표시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 하였다.
-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들을 원조 하였다.
(4) 선지자 엘리야
1) 기근과 불
- 그의 첫번 행동은 이런 사악한 종교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을 내실 것이라고
아합왕께 고하는 일이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멜산에서 시험을 주선 하는데 협동하도록 왕을 설득 하였다.
2) 실패와 재기
- 엘리야 자신이 연약해지는 순간 여호와 숭배에 대한 국민적인 재생의 전망을 망쳐 버렸다.
- 엘리사와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정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계속 저항 하면서 10년동안
함께 일 하였다.
3) 이 후의 세가지 이야기
1. 󰡉 아합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왕궁 근처에서 부당하게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에 대해 엘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2. 󰡉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의회복을 바알세불에게 사람을 보낸것을 엘
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3. 󰡉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간것이다.
(5)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2년간 다스리다가 아글이 없이 죽었다.
- 아하시야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6) 여호람
1) 종교적 관점
- 여호람은 바알을 없애 버렸다.
- 그러나 여호람이 바알을 계속 지지 했을것이라는 추측은 이세벨이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2) 모압의 반란
- 여호람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 여호람 재임 시의 아람 사람 예화
1) 아람 장군 나아만
- 그는 문둥병에 걸려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여자 아이로 부터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요단강에가 7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되었다.
2) 장님이 된 아람 사람
- 얼마후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인들은 눈이 멀게 되어 곤경을
겪었다.
3) 사마리아의 포위
- 수 개월 후 아람 사람들은 더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다시 와 사마리아를 포위 하였다.
4) 아람 사람에의한 부상
- 아람 사람과의 마지막 교섭에서 여호람은 죽었다.

(8) 선지자 엘리사
1) 배경 문제
- 엘리사가 한일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알-멜칼트에 항거 하는것이었다.
- 엘리사의 활동기간은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 하여 요아스때에 죽었으니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2) 엘리사의 경험
- 엘리사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여호람 재임 시의 일로써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하
나의 연속적인 내용은 아니다.
- 엘리사의 주요 관심중의 하나는 점띵은 선지자를 교육 시키는 일이었다.

4. 예후왕조(B.C841-753, 왕하 9:11-10:36;13장;14:16-29)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다
-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넷째 왕조를 살해 하리라는 징벌을 예고 하셨다.
-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중 한 사람을 보내 여호람 대신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고 숙청에 관한
지시를 전하게 하였다.
1.󰡉 여호람왕
2.󰡉 이세벨의 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창문에서 떨어뜨림.
3.󰡉 아합의 70명의 아들 살해.
4.󰡉 이스르엘에 있는 모든 궁정 관리를 살해
5.󰡉 아하시야의 친척 42명 살해
6.󰡉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임
(2) 왕이 된 예후
- 종교적으로 예후는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는데 순종 하였으므로 제일 초기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
으나 처음에 시작한 그 길을 계속 따르지 못 하였다.
1) 하사엘의 이스라엘파괴
- 외국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욕은 특히 예후 재임 시에 선고 되었다.
- 이것은 아람 사람 하사엘에 의해 오게 되었으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었다.
2) 앗수리아 앞에서의 모욕
- 이스라엘을 또한 에후 재임시 앗수리아로 부터 피해를 입었다.
- 앗수리아 침범은 하사엘의 침범 이전에 일어 났으며 이스라엘땅 부다는 하사엘의 땅에 더 큰 해
를 가져다 주었다.
- 이 사건은 앗수리아 기록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다.
3)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3) 여호아하스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4) 요아스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5) 여로보암 2세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6) 8 세기 선지자
- 선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 여로보암 2세때의 선지자
󰡉 요나 / 아모스 / 호세아
(7) 스가랴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5.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1) 살 룸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 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2) 므 나 헴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게 되었다.
(3) 브가히야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5) 호 세 아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앗수리아의 속국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7. 요약
- 이스라엘은 B.C931년 부터 B.C722년 까지 약 2세기 동안 국가로 존재 하였다.
- 제9왕조 / 19명이 집권 / 8명의 왕은 암살당했거나 자살함.
- 오므리에게의 징벌
󰡉 예후에의한 오므리 가문의 진멸
󰡉 하나님은 앗수리아에 국가적 모욕을 허락 하심



제14장 유다 왕국


1. 이스라엘의 투쟁기간(B.C931-870, 왕상 14:21-1524, 대하10-16장)
(1) 르호보암
- 르호보암은 41세때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다스림
- 솔로몬 후기 시대의 종교적인 타락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1) 여로보암으로부터의 성공
- 르호보암은 두개의 주요적, 곧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시삭으로부터 군사적인 접전을 맞게
되었다.
- 여로보암과의 전투는 성공적이었으나 두번째 시삭 한테는 비극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종교적인
결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셈이었다.
2) 애굽의 시삭에게 패배 당함
- 르호보암 5년에 시삭은 애굽의 우월성을 과시 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감행 하였다
- 시삭의 세력은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미쳤다.
(2) 아비얌
- 르호보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비얌은 3년간 다스렸다.
- 여로보암의 투쟁을 계속 하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3) 아 사
-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1) 종교적 행적
- 그는 그 땅에서 남색 하는자와 우상을 몰아 내었다.
- 최근의 전투에서 노략하여온 소700마리와 양7,000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 아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못하였다.
2) 애굽에게 승리하다.
- 아사왕은 두번의 외국전투를 겪었다. 첫번째는 애굽과의 전투였는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자만심
- 두번째 애굽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왕 바아사 와의 갈등이었는데 그것은 군사적이기 보다는 경제
적이었다.

2. 이스라엘과의 동맹시대(B.C873-835, 왕상22:42-50, 왕하 8:16-29;11:1-16
,대하17:1-23:15)
(1) 여호사밧
1) 훌륭한 종교 행적
- 그는 땅에서 바알 제단을 없애고 산당을 없애기도 했다.
- 그는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했다.
-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헤온데서 드러난다.
2) 강력한 통치자
- 5대대의 강력한 군대 소유
- 본국의 수비 강화에도 신경을 써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함.
3) 재판 규정
-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 임명
- 모든 재판을 공정히 하도록 촉구함
4) 이스라엘과의 동맹
- 그는 이 동맹에서 천부적인 정치가로서 자질을 과시 하였다.
-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면에서는 큰 손실을 가져 왔다.
(2) 여 호 람
-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4년동안 섭정을 하였다.
- 5가지의 불행한 사건
1.󰡉 여호사밧의 모든 아들들을 죽임
2. 3.󰡉 그의 통치에 대한 연속적인 반란
4. 󰡉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략
5. 󰡉 여호람 자신의 끔찍한 죽음
(3)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1년도 채 못다스렸다.
- 아하시야는 예후의 습격으로 도망쳤으나 예후의 신하들에게 붙잡혀 므깃도에서 살해 당함.
(4) 아 달 랴
1) 잔인하고 사악한 통치
-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 그녀는 죽은 아들의 장자에게 돌아갈 왕권을 차지 하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 하도록
하였다.
2) 요아스에게 왕관을 씌우다.
- 아달랴의 전복을 기다리고 계획해왔던 여호야다는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려 놓았으며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처형 하도록 명령했다.

3. 하나님께 합당한 왕(B.C835-731, 왕하12-15장, 대하 23:16-27:9)
(1) 요아스
1) 종교적 개혁
- 요아스는 여호야다를 통하여 바알 멜칼트성전과 그 제단 우상등을 멸하였다.
- 요아스는 자신이 혼자 통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성전을 수리 하도록 명령 하였다.
2) 타락과 징벌
-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왕은 바알-멜칼트 제단에 동조적인 조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그에대한 징벌로서 요아스는 모반자들의 손에의해 암살 당했다.

(2) 아마샤
1) 에돔에 대한 승리
- 아마샤는 에돔에 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 이스라엘에게 패배함
- 에돔을 이긴 아마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3) 죽 음
- 그는 라기스로 도망 쳤으나 추격당하여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3) 웃시야
1) 섭 정
- 52년의 통치 기간중 처음 24년은 아버지와 섭정을 하였고 마지막 12년은 아들 요담과 같이 섭정
을 하였다.
2) 영토확장
- 그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여로보암과 같은 능력을 발휘 하였다.
남쪽 : 에돔을 계속 지배
동쪽 : 아람에게 예물을 받음
서쪽 :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김
3) 전성기
- 주전743년 까지 웃시야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됨
(4) 요담
- 요담은 20년간 다스림
- 아하스를 섭정으로 세움
- 요담은 유다에서 4번째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왕이었다.

4. 앗수리아 점령 시기(B.C743-640, 왕하 16-21장, 대하28-33장)
(1) 아하스
- 총 28년간 다스림 ; 12년은 아버지와 같이 다스림. ; 13년은 아들 히스기야와 섭정을 함.
1) 베가와 르신의 포위
- 친앗수리아 감정으로 인해 이스라엘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포위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앗수리아 반역에 협조 할것을 요구함
2) 종교적 결함
- 종교적으로 아하스는 바알우상을 만들고 힌놈(Hinnom) 골짜기에서 어린 아이 희생제르르 드렸으
며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3) 군사적 실패
- 에돔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가기까지 하였다.
(2) 히스기야
1) 하나님이 인정 하심
-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실때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 아하스의 고의적인 우상숭배 이후 히스기야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 하였다.
-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명하여 다시 지키게 하였다.
2) 히스기야와 앗수리아
-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반 앗수리아파였다.
- 히스기야는 주전 711년에 블레셋 지역으로 들어와 당시 주도적인 블레셋도시 아스돗(Ashdod)의
반란을 진압 했다.
3) 히스기야와 산헤립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705-681)이 왕위에 오르자 히스기야는 동맹에 가담 했다.
-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보복에 철저히 준비를 가하였다.

4) 산헤립의 침략
- 산헤립은 주역도시 두로를 분쇄하였고 이때 동맹가운데 비블로스, 아르바드, 모압, 에돔, 암몬도
포함되었다.
- 산헤립은 또다른 주역도시 아스글론을 멸하고 이곳의왕 시드기야(Sidqia)를 앗수리아로 추방 하
였다.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산헤립이 세번째 주역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내륙으로 이동한것은
이때로 보인다.
- 산헤립의 보고 :
󰡉 엘테케, 딤나, 에그론 근처의 성읍 정복.
20만명이 넘는 포로포획.
히스기야의 총 46개 성읍 점령.
5) 히스기야의 병과 명성
-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회복 되었다.
-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의 사자들이 유다와 바벨론에게 공통된 반 앗수리아의 목적으로 예루살
렘을 방문 하였다.
(3)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
1) 이사야
- 히스기야갸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었을때 이사야는 애굽과의 연합을 반대 하였다.
- 여기서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변하여 주전 701년의
동맹을 맺은 데에는 이들의 영향이 작용항것으로 보인다.
2) 미 가
-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재임동안 활동 하였다.
- 미가의 주요 메시지는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것이었다.
(4) 므 낫 세
1) 종교적 배반
- 므낫세는 종교적인 면에서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였다.
- 이에는 당시 앗수리아 종교 관습과 이전의 페니키아의 바알-멜칼트 숭배가 혼합되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 징벌과 회개
-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징벌은 므낫세가 앗수리아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형태로 오게
되었다.
- 므낫세는 포로로 있는동안 회개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결과 마침내 유다로 돌아올수
있었다.
(5) 아 몬
- 아몬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아몬은 우상숭배를 하였으며 그의 신복들이 공보하여 그를 죽였다.

5. 바벨론의 지배(B.C640-586, 왕하 22-25장, 대하34-36장)
(1) 요 시 아
1) 요시아의 개혁
- 그의 나이 26세때 요시아는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게 하고 개혁
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 예루살렘 성전과 전땅으로 부터 모든 이방 제단이 제거 되었다.
- 요시아는 앗수리아의 쇠약한 시기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 요시아의 개혁중 가장 중요한 면은 유월절의 준수였다.
2) 요시아의 죽음
- 세계적인 발전으로 추구하고자 하였을때 그는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다.
- 요시아는 전략지인 므깃도에서 애굽을 막으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2) 7세기 선지자들
󰡉 예레미야 : 우상숭배에 대한 재앙에 대해서 경고함.
󰡉 스 바 냐 : 유다의 죄악에 대한 극심한 재앙을 예고.
󰡉 나 훔 : 간접적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말하나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
리실것이라는 내용
󰡉 하 박 국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바벨론이 들어올것을 예고
(3) 여호아하스
- 요시아의 세 아들중 첫번째로 여호아하스가 다스렸으나 애굽왕 느고는 그의 형 엘리야김을 왕으로
대치 시키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꿀것을 명령 하였다.
-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4) 여호야김
- 여호야김은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효과적인 통치도 하지 못하였다.
-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나귀와 같이 매장당할것"이라고 선언 함으로서 그에대해 멸시하고 있다.
(5) 바벨론의 부상
- 주전 605년 애굽과 바벨론은 유브라데스의 칼케미쉬(Carchemish)에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 애굽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줌으로 바벨론은 새롭게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
- 주전 601년 느부갓네살은 애굽쪽으로 이동하여 그 경계에서 느고와 대전 하였다.
(6) 여호야긴과 주전 597년의 예루살렘 포획 사건
- 느부갓네살은 잠깐의 휴식후 주전 597년에 다시 돌아와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 주전 598년 겨울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떠났고 이달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7) 시드기야와 주전 586년의 포로 사건
1) 바벨론에 대한 반란
- 예루살렘안의 강력한 반바벨론파들은 반란에 대한 압력을 불어넣어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게 하였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 하였다.
-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사신을 보내어
유다의 충성을 표현 함으로서 훌륭한 판단을 보여 주었다.
- 그러나 5년후 시드기야는 설득을 당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애굽에게 원조를 요청 하였다.
2) 예레미야가 그의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다.
- 이 기간동안에 예레미야는 자기동포 유다 사람의 손에서 큰 고초를 당하였다.
- 수난에도 불구 하고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경고와 충고를 던져 주었다.
3) 예루살렘의 함락
-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성은 주전 586년 7월에 바벨론에게 함락 되었다.
-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는 두눈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15장 포로기와 귀환


1. 유다말기(왕하 25:22-26, 렘40-44장)
(1) 보편적 상황
- 정복국가에서 유능한 인물을 포로로 잡아가는 수법은 바벨론 사람이 아수리아에서 본뜬 것이다.
- 유다는 바벨론의 일개 주가 되었으며 외국이 지명한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 그 첫번 총독이 그달리야(Gedaliah)였으며 그는 미쓰바를 새 수도로 정하였다.
(2) 그달리야의 암살
- 그달리야는 두달동안 다스리다가 왕가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에게 암살되었다.
- 이스마엘은 암몬왕 바알리스를 배경으로 음모를 꾸며 그달리야를 죽이고 미쓰바에있는 작은
바벨론 부대와 약간의유대인 조수들을 죽였다.
(3) 예레미야가 조언을 하다
- 요하난과 그의 동료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구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
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 10일후 바벨론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땅에나아 있어 애굽으로 피신 하지 말라고 경고 하였다.
(4) 애굽으로 내려감
- 많은 유다사람이 애굽 여행길에 올랐고 예레미야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따라
갔다.
-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경고 하기를 하나님께 계속 불충성 하였으므로 아무도 유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2. 바벨론 포로시기(B.C605-539)
(1) 느부갓네살
1) 군사적 활동
-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 그는 두로섬을 실제로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 받았다.
- 그는 주전 582년에 코엘레-수리아, 모압, 암몬등을 원정 하였다.
- 주전 568년 애굽을 침략 하였다.
2) 건축사업
- 그는 복잡한 구조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미디안 왕비를 위해 느부갓네살이 테라스 위에 메달아 세운 정원이었다.
(2)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 그의 아들 아벨-마르둑이 2년간 통치 하였다.
- 아벨-마르둑은 그의 매부 네리 글리살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신 그가 주전 560년 8월 왕위에
올랐다.
- 그이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정권을 잡았으나 몇개월후 나보디누스를 포함한 신하들에 의해 암살
되었고 나보디누스가 왕권을 잡게 되었다.
(3) 나보디누스
- 하란출신인 나보디누스는 느부갓네살이후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다.
- 재임 초기에 실리시아와 수리아에 대하여 두번의 원정을 하였다.
- 나보디누스가 없는 바벨론에서는 오랫동안 연례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다.

3. 유다의 포로생활
(1) 다 니 엘
1) 다니엘의 명예
- 느부갓네살이 이 젊은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이유는 자기 왕국의 유능한 관리로 쓸 인물을 이
가운데서 뽑고자 함이었다.
- 실제로 그는 페르시아의 120방백들을 감독하는 새 총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다니엘의 영향
-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높은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기 동포 포로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중요한 역할 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다니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선포에도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2) 일반 포로들
1) 숫 자
- 두번째 추방때 : 용사 7,000 , 기술자 1,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이었다.
2) 에스겔
- 그는 포로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로서 죄를 꾸짖기도 하고 구원의 약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3) 바벨론에서의 생활
1) 조직이 유지됨
- 유다의 지방 행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
-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조직도 보유 되었다.
2) 이주의 자유
- 포로들은 그 땅에서 이주의 자유를 누렸다.
- 에스겔은 자기집을 소유 하면서까지 이동하였다.
3) 서신의 특권
- 유대인 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4) 고용의 기회
- 포로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선택한 사람들의 종류에서 발견된다.
5) 비옥한 땅에서 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발강가에서 살았는데 이는 카바리 운하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6) 계속적인 징벌
-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안락한 환경가 생활에서 오는 모욕감을 견디더야 했다.

4. 페르시아 시대
(1) 바벨론 정복
1) 고레스의 예비적인 승리
-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정복 함으로써 그 세력이 고조에 달했는데 이는 주로 고레스 대제에 의해
이룩 되었다.
- 세계주도권을 노리는 고레스는 북메소포타미아 건너편에 그의 군대를 진군 시키고 크로이수스와
접전하여 거의 장해를 받지 않고 진입 하였다.
2) 바벨론의 함락
- 주전 539년 그는 주요 지역 바벨론으로 진군하여 이제 단독으로 겨루게 되었다.
- 결정적인 접전은 북쪽으로 티그리스강의 오피스에서 고레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2) 페르시아의 통치자
1) 캄비세스
- 캄비세스는 그의 형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캄비세스의 업적으로는 주전 525년 애굽을 정복 함으로써 이미 확보된 넓은 영토를 더 추가 시
킨 일이었다.
- 캄비세스는 전 국토를 지배 하여 제국의 관구로 포함 시켰다.
2) 다리오 히스타스페스
- 다리오1세는 반란을 짐압 하고 왕위를 획득하는 일에 성공하고 반란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 다리오는 전 조직을 재조직 하는 수완을 과시 했다.
- 그러나 주전 490년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이스의 손에 모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3) 크세르크세스 1세
- 그는 바벨론을 앗수리아와 통합 시켰다.
- 그의 함대가 살라미스에서 참패를 당한후 그는 수도로 돌아와 건축 사업을 시작 하였다.
4)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
- 아닥사스다의 첫번 과업은 왕위를 탐내는 모든 적수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미약 하다가 알렉산더의 출현으로 그리이스에게 망하였다.

5. 첫번째 귀환(에스라 1-6장)
(1) 고레스 칙령
- 고레스가 그 첫해 작은 나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 고레스 칙령의 내용
* 고레스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성전 재건
* 원하는 유대인은 귀국, 남아 있는 유대인 경제적 원조를 해줄것
* 느부갓네살이 취한 금,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것.
(2) 귀 환
- 칙령이 발표된 직후 주전 538년이나 537년에 귀환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임.
(3) 성전 건축
1) 훌륭한 시작
- 성전 건축은 그땅에도착한 직후 시작되었다.
- 첫번 순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는데 꽤 빨리 이루어진것 같다.
-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를 제기 하여 건축은 중단 되었다.
2) 건축사업이 다시 시작 되다.
- 다리오 2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건축활동의 재기를 촉구 하였다.
- 그해 6월에 작업이 시작 되었고 4년후 다리오 6년에 성전이 완성 되었다.

6. 두번째 귀환(에스라 7-10장)
(1) 사이 기간
- 학개 : 성전을 완성 하지 않은 백성들을 비난
- 느혜미야 : 예루살렘성을 건축 하기 위해 돌아옴
- 에스라 : 주위의 이방인들과 결혼한 백성들의 죄를 고백
(2) 왕의 조서
- 에스라 는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백성들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건 시키는 일이었다.
(3) 귀환과 활약
1) 여행
- 에스라는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아하바 강에 집합시켜 첫달 12일에 출발해 5월 첫날에 예루
살렘에 도착 했다.
2)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
- 에스라는 도착 직후에 유대인들의 주위 백성들과의 결혼에 대해 듣고 가책을 느꼈다.
- 에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고 곁애 있던 사람들은 이 결혼이 취소 되어야 한다고 말 하였다.
3) 결혼을 취소 하라
- 각각의 결혼을 따로 다스리기로 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각각의 마을에서 임명된 판사들과
장로들이 재판을 맡기로 결정 하였다.

7. 세번째 귀환(느헤미야1-13장)
(1) 성 건축 시도의 좌절
-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얼마전에 성건축의 시도가 좌절 된적이 한번 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건축을 중단 하도록 요구 하였다.
(2)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잔을 올리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아발나하라의 관리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신의 안전통과와 건축
에 필요한 물질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응낙과 동시에 여행으로 부터 느헤미야를 보호 하
기 위해 군대 장관과 마병도 공급해 주었다.
(3) 느헤미야의 성 건축
1) 준 비
- 그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 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밤에 몰래 나아가 성을 탐 색 하였다.
- 예루살렘과 그 주위 성읍으로 부터 일할 만한 사람들이 곧 모아 졌고 이들은 모두 구체적인 노
동 지역을 할당 받았다.
2) 반 대
-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처음에는 단순히 반대를 하였으나 예루살렘을 공
격하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4) 총독이 된 느헤미야
1) 유다의 규모
- 경계선 : 헤브론 바로위에서 동서로 그은 선
- 북쪽 경계선 : 기브온과 미쓰바를 포함
- 동쪽 : 여리고 포함
2) 빚을 사면 하다
- 빚을 사면한 기록이 건축사업 이야기에 포함된것으로 보아 아마 초기에 이루어진것 같다.
3) 보안 수단
- 성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도우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과 다른 레위인을 뽑았다.
- 주민등록 검사로 인해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었다.
4) 율법의 낭독
- 느헤미야는 율법 낭독을 위해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적은 수의 분단으로 나누어 그 뜻을 설명
해 주었다.
5) 봉헌식
- 주전 444년 두 행렬로서 성 주위의 양쪽에서 행진하여 성전에서 함께 만나는 봉헌식을 행하였다.
(5) 느헤미야의 둘째 임기
1) 개혁
-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기가 잠깐 없는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헤이해져 있는 상황을
보고 슬퍼 하였다.
- 안식일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고 수비대를 두어 상행위를 금지 하였다.
- 느헤미야는 또한 혼합 결혼에도 개혁을 가하였다.
2) 알려져 있지 않은 기간
- 그가 적어도 주전 407년에는 유다 총독이 아니라는 증거로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 이때의 총
독이 바고아스라고 나와 있다.
(6)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 그가 시대의 죄악에 대해 기록 하고 있는것은 느헤미야가 겪었던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 에스더 이야기(에스더1-10장)
(1) 내 용
- 이야기는 아하수에로왕 3년에서 부터 시작 된다.
- 왕후를 해임 시킨후 새왕후를 에스더로 선택한다.
- 이 일 후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공모를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고하고 에스더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요청하게 된다.
- 하만이 참석한 특별 잔치에서 에스더는 왕에게 백성을 음모한자가 하만임을 밝히고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고자 했던 나무에 하만을 처형하게 된다.
(2) 의 미
1) 유대인의 수
- 이 이야기에서 자기들이 죽인 75,000명보다 더 많은것으로 보인다.
2) 자 유
- 모르드개는 궁정에서 뛰어난 지위에 있었으며 에스더는 왕후가 될정도로 유대인들은 자유를 누
렸다.
3) 섭리적인 보호
- 유대인의 보호를 위해 사건들이 정확한 시간에 들어 맞았다는데에서 특히 증명되는 이 섭리는
이 이야기의 뛰어난 특징이다.
4) 부 림 절
- 하만은 유대인을 살해할 구체적인 날을 결정하기 위해 제비 뽑기를 하였다.
- 유대인에게는 이사건이 좋은 일로 바뀌었음으로 절기를 제정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9. 엘레판틴 집단
- 엘레판틴은 섬이었다. 이 섬은 첫 폭포의 하단에 위치 하며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500마일이다.
- 이 유대인들은 이전에 바벨론을 두려워 하여 예레미야와 함께 유다에서 도망한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
- 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거주인들이 섬긴

출처 : 뒤나미스21
글쓴이 : 양정국(Cari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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