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연구 3
제12장 솔로몬 왕
1. 왕으로 세워지다(왕상 2:12-46;3:4-28, 대하1:1-17)
(1) 왕권 강화(왕상2:12-46)
-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수넴(Shunammite)여인 아비삭과의 결혼을 요청 하였으나 솔로몬은 이 청약을 자기 통치의 위협이라 생각하고 거절하였으며 아도니야를 처형 하였다.
-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키고 아나돗으로 추방 시켰다.
-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제단 앞에서 요압을 죽이도록 하였다.
- 솔로몬은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시므이를 죽였다.
(2)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의 축복의 필요성을 깨달은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에 응하여 그로 하여금 청탁케 하셨다. 이에 솔로몬은 통치에 필요한 지혜를 요구하였다.
2. 솔로몬 왕국
(1) 방어 조치
- 그의 주요 방어 조치는 이스라엘중심 땅을 둘러싼 주요 도시들을 강화 하는것이었다.
- 솔로몬은 1,400의 병거와 12,000 의 마병을 모으고 4,000의 말 외양간을 유지 하였다.
(2) 솔로몬의 궁정
- 솔로몬은 다윗 정부에 있던 사람들이외에 아사리아(Azariah)와 총리대신 사붓(Zabud)이었다
- 부인 : 700 / 첩 : 300 (왕상 11:3)
- 하루식량 : 가는 밀가루 30석 / 굵은 밀가루 60석 / 살진소 10 / 초장의 소 20 / 양 100마리
(3) 재정의 유지
1) 세 금
- 나라를 열 두 군으로 나눈후 각 군 위에 세리를 두었음.
2) 부 역
- 가나안 사람을 이용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역에도 의존하였다.
3) 외국의 공물과 예물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4) 무 역
- 무역로 : 홍해를 통해 남쪽으로 가는 것
- 솔로몬은 말과 병거에 관한 무역도 수행하였다.
3. 외국과의 관계
(1) 애굽과의 동맹
-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애굽과 동맹을 맺었다고 직접 언급되어있다.(왕상 3:1)
(2) 두로와의 동맹
- 또다른 중요한 동맹은 페니키아왕 히람(Hiram) 1세 와 맺어진 것이었다.
- 히람은 성전 건축을 예상하여 이미 다윗에게 백향목을 제공 하였다.
(3) 스바 여왕의 방문
- 스바는 현대의 예멘(Yemen)으로 보여 진다.
- 그녀는 솔로몬에 대한 예물로 금 120달란트를 가져왔고 돌아갈때는 많은 예물과 함께 자기가 바라던 모든 것을 다시 받아 만족하여 돌아 갔다.
4. 건축 사업(왕상 5:1-9:9, 대하2-7장)
(1) 성전 건축
- 구체적인 건축은 솔로몬의 재임 4년봄에 시작 하여 7년후 가을에 완성 되었다.
- 길이 27.4m / 넓이 9.1m /
- 성소 : 전체의 23를 차지 정금제단, 정금등대, 열개의 진설병 상이 있음
- 지성소 : 전체의 13을 차지
- 성소앞에 넓이 9.1m 길이 3m 되는 현관이 있음
(2) 성전 봉헌
- 언약궤를 지성소에 둠 :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것
- 긴봉헌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다.
(3) 다른 건축물
- 자신의궁전 : 13년동안 건축
- "레바논 나무의 궁" : 백향목 기둥으로 바쳐서 지음.
: 무기고로 사용
- 솔로몬의 부인인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도 있었다.
5. 문학 시대
(1) 역 사 서
- 나단 선지자 : 다윗, 솔로몬에 대한 통치의 사기를 씀
- 갓 선지자 : 다윗의 집권만을 다룬 사기를 씀
- 아히야와 잇도 : 솔로몬의 행적을 다룬 역사서를 씀
(2) 음악과 시
- 다윗 : 73편의 시를 써서 일부를 성전 예배에 사용케함
- 솔로몬 : 2편을 씀
- 아삽(Asaph, 예배의성가대장) : 12편의 시를 씀
- 고라의 아들들 : 18편의 시를 씀
- 에단과 헤만 : 각각 1편의 시를 씀
(3) 지혜문학과 극 문학
- 솔로몬은 전도서와 아가서 전체와 잠언의 대부부을 씀
6. 영적인 쇠퇴와 징벌 (왕상11장, 대하 9:29-31)
(1) 쇠 퇴
- 종교적으로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 그의 모든 외국 부인들의 거짓 신을 위해 산당을 지은데에서 그의 변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러나 솔로몬은 죽기전에 이러한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 갔다.
(2) 징 벌
1) 여로보암
- 선지자 아히야는 그의 새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열조각을 여로보압에게 주면서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것을 알려 주었다.
-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볼암을 죽이려 하였으나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였다.
2) 에돔의 하닷
- 하닷의 활동으로 솔로몬의 남방 제국 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하닷은 요압의 잔인한 행위를 기억 하여 솔로몬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3) 다메섹의 르손
- 르손으로 인하여 솔로몬의 북방 제국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그는 유능한 군사적 인물이었으며 배후에 유능한 군대를 모집하였다. 그는 점차 지위와 세력을 증가 시켜 솔로몬에게 심각한 골치거리를 일으켰다.
7. 왕 으로서의 솔로몬
- 솔로몬은 40년(B.C 970-931)의 긴기간을 통치하였다.
- 그는 넓은 제국을 물려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부와 명예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었다.
-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13장 북방왕국
1. 반란(왕상12:1-4, 대하 10장)
- 열 지파는 이 왕국에서 탈퇴 하여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안을 왕으로 하는 자기들만으 왕국을 세웠다.
- 여로보안 은 자기의 두지파 유다와 베냐민을 통치 하는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2. 초기 시대(B.C931-885, 왕상12:25-16:20)
(1) 왕이 된 여로보암
1) 새 왕국
-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라는 열지파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 그는 세금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징수제도를 완전히 없앴을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디르사(Tirzar)를 수도로 정했다.
2) 대체된 예배 장소
- 종교적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 백성들을 위한 다른 예배 장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2) 질책과 징벌을 받은 여로보암.
- 여로보암의 행동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꾸짖게 하신다.
- 그가 그로임해 다시 마음을 돌이 켰다는 기록은 없다.
(3) 영토의 손실
- 이스라엘 초기에 특히 여로보암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왕성해져 그들이 잃었던 영토를 다시 요구 하였다.
- 이러한 영토의 손실 외에도 여로보암의 국가는 적어도 한번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죽음
- 여로보암은 22년간의 통치후 자연사로 죽었다.
(5) 나 답
- 나답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디르사에서 2년간 다스렸다.
- 종교적으로 나답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다.
(6) 바 아 사
-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스렸다.
- 그이 통치에 관해서 남쪽의 유다와 계속 투쟁을 벌였다는것 외에는 기록 된 바가 거의 없다.
- 종교적으로 바아사는 그의 두 선임자의 방법을 계속 했다.
(7) 엘라 와 시므리
- 엘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군사적인물 시므리가 공모 하여 엘라를 살해 하였다.
-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 하였는데 이것이 7년 통치 후였다.
3. 오므리 왕조(B.C885-841, 왕상 16:23-22:53, 왕하1-8장)
(1) 정치적 상황
- 오므리는 3년 동안 세번째 왕가를 대신 하였다.
- 유다의 아사왕은 바아사를 공격 하기 위해 이미 이 나라왕 벤하닷 1세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었다.
-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오므리의 집권
1) 새 수도 사마리아
-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사마리아를 정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요새로 증명되었다.
- 이 건축 사업에 훌륭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 B.C 722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2) 모압의 정복
- 모압인의 돌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3) 페니키아 동맹
-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정식동맹의 표시로 공주의 아머지 엣바알
과 조약을 맺은것으로 보인다.
(3) 아합과 이세벨
1) 바알 숭배의 도입
- 이들은 이세벨의 본래 종교인 바알-멜칼트(Baal-Melqart)의 제단을 이스라엘에 도입 시켰다.
-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 하였다.
2) 통치적인 수완
- 아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 오므리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들은 아합의 "사아궁"으로 판명 되었다.
3) 전쟁 경험
- 종교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으로 아합은 군사적으로 살효를 거두었다.
- 아합은 라못 길르앗에서 벤하닷과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4) 유다와의 동맹
- 아합의 딸 아달랴는 동맹의 표시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 하였다.
-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들을 원조 하였다.
(4) 선지자 엘리야
1) 기근과 불
- 그의 첫번 행동은 이런 사악한 종교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을 내실 것이라고
아합왕께 고하는 일이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멜산에서 시험을 주선 하는데 협동하도록 왕을 설득 하였다.
2) 실패와 재기
- 엘리야 자신이 연약해지는 순간 여호와 숭배에 대한 국민적인 재생의 전망을 망쳐 버렸다.
- 엘리사와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정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계속 저항 하면서 10년동안
함께 일 하였다.
3) 이 후의 세가지 이야기
1. 아합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왕궁 근처에서 부당하게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에 대해 엘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2.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의회복을 바알세불에게 사람을 보낸것을 엘
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3.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간것이다.
(5)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2년간 다스리다가 아글이 없이 죽었다.
- 아하시야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6) 여호람
1) 종교적 관점
- 여호람은 바알을 없애 버렸다.
- 그러나 여호람이 바알을 계속 지지 했을것이라는 추측은 이세벨이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2) 모압의 반란
- 여호람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 여호람 재임 시의 아람 사람 예화
1) 아람 장군 나아만
- 그는 문둥병에 걸려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여자 아이로 부터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요단강에가 7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되었다.
2) 장님이 된 아람 사람
- 얼마후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인들은 눈이 멀게 되어 곤경을
겪었다.
3) 사마리아의 포위
- 수 개월 후 아람 사람들은 더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다시 와 사마리아를 포위 하였다.
4) 아람 사람에의한 부상
- 아람 사람과의 마지막 교섭에서 여호람은 죽었다.
(8) 선지자 엘리사
1) 배경 문제
- 엘리사가 한일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알-멜칼트에 항거 하는것이었다.
- 엘리사의 활동기간은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 하여 요아스때에 죽었으니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2) 엘리사의 경험
- 엘리사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여호람 재임 시의 일로써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하
나의 연속적인 내용은 아니다.
- 엘리사의 주요 관심중의 하나는 점띵은 선지자를 교육 시키는 일이었다.
4. 예후왕조(B.C841-753, 왕하 9:11-10:36;13장;14:16-29)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다
-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넷째 왕조를 살해 하리라는 징벌을 예고 하셨다.
-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중 한 사람을 보내 여호람 대신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고 숙청에 관한
지시를 전하게 하였다.
1. 여호람왕
2. 이세벨의 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창문에서 떨어뜨림.
3. 아합의 70명의 아들 살해.
4. 이스르엘에 있는 모든 궁정 관리를 살해
5. 아하시야의 친척 42명 살해
6.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임
(2) 왕이 된 예후
- 종교적으로 예후는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는데 순종 하였으므로 제일 초기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
으나 처음에 시작한 그 길을 계속 따르지 못 하였다.
1) 하사엘의 이스라엘파괴
- 외국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욕은 특히 예후 재임 시에 선고 되었다.
- 이것은 아람 사람 하사엘에 의해 오게 되었으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었다.
2) 앗수리아 앞에서의 모욕
- 이스라엘을 또한 에후 재임시 앗수리아로 부터 피해를 입었다.
- 앗수리아 침범은 하사엘의 침범 이전에 일어 났으며 이스라엘땅 부다는 하사엘의 땅에 더 큰 해
를 가져다 주었다.
- 이 사건은 앗수리아 기록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다.
3)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3) 여호아하스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4) 요아스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5) 여로보암 2세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6) 8 세기 선지자
- 선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 여로보암 2세때의 선지자
요나 / 아모스 / 호세아
(7) 스가랴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5.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1) 살 룸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 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2) 므 나 헴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게 되었다.
(3) 브가히야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5) 호 세 아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앗수리아의 속국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7. 요약
- 이스라엘은 B.C931년 부터 B.C722년 까지 약 2세기 동안 국가로 존재 하였다.
- 제9왕조 / 19명이 집권 / 8명의 왕은 암살당했거나 자살함.
- 오므리에게의 징벌
예후에의한 오므리 가문의 진멸
하나님은 앗수리아에 국가적 모욕을 허락 하심
제14장 유다 왕국
1. 이스라엘의 투쟁기간(B.C931-870, 왕상 14:21-1524, 대하10-16장)
(1) 르호보암
- 르호보암은 41세때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다스림
- 솔로몬 후기 시대의 종교적인 타락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1) 여로보암으로부터의 성공
- 르호보암은 두개의 주요적, 곧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시삭으로부터 군사적인 접전을 맞게
되었다.
- 여로보암과의 전투는 성공적이었으나 두번째 시삭 한테는 비극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종교적인
결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셈이었다.
2) 애굽의 시삭에게 패배 당함
- 르호보암 5년에 시삭은 애굽의 우월성을 과시 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감행 하였다
- 시삭의 세력은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미쳤다.
(2) 아비얌
- 르호보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비얌은 3년간 다스렸다.
- 여로보암의 투쟁을 계속 하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3) 아 사
-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1) 종교적 행적
- 그는 그 땅에서 남색 하는자와 우상을 몰아 내었다.
- 최근의 전투에서 노략하여온 소700마리와 양7,000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 아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못하였다.
2) 애굽에게 승리하다.
- 아사왕은 두번의 외국전투를 겪었다. 첫번째는 애굽과의 전투였는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자만심
- 두번째 애굽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왕 바아사 와의 갈등이었는데 그것은 군사적이기 보다는 경제
적이었다.
2. 이스라엘과의 동맹시대(B.C873-835, 왕상22:42-50, 왕하 8:16-29;11:1-16
,대하17:1-23:15)
(1) 여호사밧
1) 훌륭한 종교 행적
- 그는 땅에서 바알 제단을 없애고 산당을 없애기도 했다.
- 그는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했다.
-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헤온데서 드러난다.
2) 강력한 통치자
- 5대대의 강력한 군대 소유
- 본국의 수비 강화에도 신경을 써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함.
3) 재판 규정
-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 임명
- 모든 재판을 공정히 하도록 촉구함
4) 이스라엘과의 동맹
- 그는 이 동맹에서 천부적인 정치가로서 자질을 과시 하였다.
-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면에서는 큰 손실을 가져 왔다.
(2) 여 호 람
-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4년동안 섭정을 하였다.
- 5가지의 불행한 사건
1. 여호사밧의 모든 아들들을 죽임
2. 3. 그의 통치에 대한 연속적인 반란
4.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략
5. 여호람 자신의 끔찍한 죽음
(3)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1년도 채 못다스렸다.
- 아하시야는 예후의 습격으로 도망쳤으나 예후의 신하들에게 붙잡혀 므깃도에서 살해 당함.
(4) 아 달 랴
1) 잔인하고 사악한 통치
-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 그녀는 죽은 아들의 장자에게 돌아갈 왕권을 차지 하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 하도록
하였다.
2) 요아스에게 왕관을 씌우다.
- 아달랴의 전복을 기다리고 계획해왔던 여호야다는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려 놓았으며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처형 하도록 명령했다.
3. 하나님께 합당한 왕(B.C835-731, 왕하12-15장, 대하 23:16-27:9)
(1) 요아스
1) 종교적 개혁
- 요아스는 여호야다를 통하여 바알 멜칼트성전과 그 제단 우상등을 멸하였다.
- 요아스는 자신이 혼자 통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성전을 수리 하도록 명령 하였다.
2) 타락과 징벌
-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왕은 바알-멜칼트 제단에 동조적인 조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그에대한 징벌로서 요아스는 모반자들의 손에의해 암살 당했다.
(2) 아마샤
1) 에돔에 대한 승리
- 아마샤는 에돔에 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 이스라엘에게 패배함
- 에돔을 이긴 아마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3) 죽 음
- 그는 라기스로 도망 쳤으나 추격당하여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3) 웃시야
1) 섭 정
- 52년의 통치 기간중 처음 24년은 아버지와 섭정을 하였고 마지막 12년은 아들 요담과 같이 섭정
을 하였다.
2) 영토확장
- 그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여로보암과 같은 능력을 발휘 하였다.
남쪽 : 에돔을 계속 지배
동쪽 : 아람에게 예물을 받음
서쪽 :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김
3) 전성기
- 주전743년 까지 웃시야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됨
(4) 요담
- 요담은 20년간 다스림
- 아하스를 섭정으로 세움
- 요담은 유다에서 4번째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왕이었다.
4. 앗수리아 점령 시기(B.C743-640, 왕하 16-21장, 대하28-33장)
(1) 아하스
- 총 28년간 다스림 ; 12년은 아버지와 같이 다스림. ; 13년은 아들 히스기야와 섭정을 함.
1) 베가와 르신의 포위
- 친앗수리아 감정으로 인해 이스라엘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포위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앗수리아 반역에 협조 할것을 요구함
2) 종교적 결함
- 종교적으로 아하스는 바알우상을 만들고 힌놈(Hinnom) 골짜기에서 어린 아이 희생제르르 드렸으
며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3) 군사적 실패
- 에돔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가기까지 하였다.
(2) 히스기야
1) 하나님이 인정 하심
-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실때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 아하스의 고의적인 우상숭배 이후 히스기야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 하였다.
-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명하여 다시 지키게 하였다.
2) 히스기야와 앗수리아
-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반 앗수리아파였다.
- 히스기야는 주전 711년에 블레셋 지역으로 들어와 당시 주도적인 블레셋도시 아스돗(Ashdod)의
반란을 진압 했다.
3) 히스기야와 산헤립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705-681)이 왕위에 오르자 히스기야는 동맹에 가담 했다.
-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보복에 철저히 준비를 가하였다.
4) 산헤립의 침략
- 산헤립은 주역도시 두로를 분쇄하였고 이때 동맹가운데 비블로스, 아르바드, 모압, 에돔, 암몬도
포함되었다.
- 산헤립은 또다른 주역도시 아스글론을 멸하고 이곳의왕 시드기야(Sidqia)를 앗수리아로 추방 하
였다.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산헤립이 세번째 주역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내륙으로 이동한것은
이때로 보인다.
- 산헤립의 보고 :
엘테케, 딤나, 에그론 근처의 성읍 정복.
20만명이 넘는 포로포획.
히스기야의 총 46개 성읍 점령.
5) 히스기야의 병과 명성
-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회복 되었다.
-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의 사자들이 유다와 바벨론에게 공통된 반 앗수리아의 목적으로 예루살
렘을 방문 하였다.
(3)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
1) 이사야
- 히스기야갸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었을때 이사야는 애굽과의 연합을 반대 하였다.
- 여기서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변하여 주전 701년의
동맹을 맺은 데에는 이들의 영향이 작용항것으로 보인다.
2) 미 가
-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재임동안 활동 하였다.
- 미가의 주요 메시지는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것이었다.
(4) 므 낫 세
1) 종교적 배반
- 므낫세는 종교적인 면에서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였다.
- 이에는 당시 앗수리아 종교 관습과 이전의 페니키아의 바알-멜칼트 숭배가 혼합되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 징벌과 회개
-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징벌은 므낫세가 앗수리아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형태로 오게
되었다.
- 므낫세는 포로로 있는동안 회개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결과 마침내 유다로 돌아올수
있었다.
(5) 아 몬
- 아몬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아몬은 우상숭배를 하였으며 그의 신복들이 공보하여 그를 죽였다.
5. 바벨론의 지배(B.C640-586, 왕하 22-25장, 대하34-36장)
(1) 요 시 아
1) 요시아의 개혁
- 그의 나이 26세때 요시아는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게 하고 개혁
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 예루살렘 성전과 전땅으로 부터 모든 이방 제단이 제거 되었다.
- 요시아는 앗수리아의 쇠약한 시기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 요시아의 개혁중 가장 중요한 면은 유월절의 준수였다.
2) 요시아의 죽음
- 세계적인 발전으로 추구하고자 하였을때 그는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다.
- 요시아는 전략지인 므깃도에서 애굽을 막으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2) 7세기 선지자들
예레미야 : 우상숭배에 대한 재앙에 대해서 경고함.
스 바 냐 : 유다의 죄악에 대한 극심한 재앙을 예고.
나 훔 : 간접적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말하나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
리실것이라는 내용
하 박 국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바벨론이 들어올것을 예고
(3) 여호아하스
- 요시아의 세 아들중 첫번째로 여호아하스가 다스렸으나 애굽왕 느고는 그의 형 엘리야김을 왕으로
대치 시키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꿀것을 명령 하였다.
-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4) 여호야김
- 여호야김은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효과적인 통치도 하지 못하였다.
-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나귀와 같이 매장당할것"이라고 선언 함으로서 그에대해 멸시하고 있다.
(5) 바벨론의 부상
- 주전 605년 애굽과 바벨론은 유브라데스의 칼케미쉬(Carchemish)에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 애굽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줌으로 바벨론은 새롭게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
- 주전 601년 느부갓네살은 애굽쪽으로 이동하여 그 경계에서 느고와 대전 하였다.
(6) 여호야긴과 주전 597년의 예루살렘 포획 사건
- 느부갓네살은 잠깐의 휴식후 주전 597년에 다시 돌아와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 주전 598년 겨울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떠났고 이달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7) 시드기야와 주전 586년의 포로 사건
1) 바벨론에 대한 반란
- 예루살렘안의 강력한 반바벨론파들은 반란에 대한 압력을 불어넣어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게 하였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 하였다.
-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사신을 보내어
유다의 충성을 표현 함으로서 훌륭한 판단을 보여 주었다.
- 그러나 5년후 시드기야는 설득을 당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애굽에게 원조를 요청 하였다.
2) 예레미야가 그의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다.
- 이 기간동안에 예레미야는 자기동포 유다 사람의 손에서 큰 고초를 당하였다.
- 수난에도 불구 하고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경고와 충고를 던져 주었다.
3) 예루살렘의 함락
-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성은 주전 586년 7월에 바벨론에게 함락 되었다.
-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는 두눈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15장 포로기와 귀환
1. 유다말기(왕하 25:22-26, 렘40-44장)
(1) 보편적 상황
- 정복국가에서 유능한 인물을 포로로 잡아가는 수법은 바벨론 사람이 아수리아에서 본뜬 것이다.
- 유다는 바벨론의 일개 주가 되었으며 외국이 지명한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 그 첫번 총독이 그달리야(Gedaliah)였으며 그는 미쓰바를 새 수도로 정하였다.
(2) 그달리야의 암살
- 그달리야는 두달동안 다스리다가 왕가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에게 암살되었다.
- 이스마엘은 암몬왕 바알리스를 배경으로 음모를 꾸며 그달리야를 죽이고 미쓰바에있는 작은
바벨론 부대와 약간의유대인 조수들을 죽였다.
(3) 예레미야가 조언을 하다
- 요하난과 그의 동료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구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
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 10일후 바벨론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땅에나아 있어 애굽으로 피신 하지 말라고 경고 하였다.
(4) 애굽으로 내려감
- 많은 유다사람이 애굽 여행길에 올랐고 예레미야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따라
갔다.
-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경고 하기를 하나님께 계속 불충성 하였으므로 아무도 유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2. 바벨론 포로시기(B.C605-539)
(1) 느부갓네살
1) 군사적 활동
-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 그는 두로섬을 실제로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 받았다.
- 그는 주전 582년에 코엘레-수리아, 모압, 암몬등을 원정 하였다.
- 주전 568년 애굽을 침략 하였다.
2) 건축사업
- 그는 복잡한 구조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미디안 왕비를 위해 느부갓네살이 테라스 위에 메달아 세운 정원이었다.
(2)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 그의 아들 아벨-마르둑이 2년간 통치 하였다.
- 아벨-마르둑은 그의 매부 네리 글리살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신 그가 주전 560년 8월 왕위에
올랐다.
- 그이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정권을 잡았으나 몇개월후 나보디누스를 포함한 신하들에 의해 암살
되었고 나보디누스가 왕권을 잡게 되었다.
(3) 나보디누스
- 하란출신인 나보디누스는 느부갓네살이후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다.
- 재임 초기에 실리시아와 수리아에 대하여 두번의 원정을 하였다.
- 나보디누스가 없는 바벨론에서는 오랫동안 연례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다.
3. 유다의 포로생활
(1) 다 니 엘
1) 다니엘의 명예
- 느부갓네살이 이 젊은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이유는 자기 왕국의 유능한 관리로 쓸 인물을 이
가운데서 뽑고자 함이었다.
- 실제로 그는 페르시아의 120방백들을 감독하는 새 총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다니엘의 영향
-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높은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기 동포 포로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중요한 역할 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다니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선포에도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2) 일반 포로들
1) 숫 자
- 두번째 추방때 : 용사 7,000 , 기술자 1,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이었다.
2) 에스겔
- 그는 포로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로서 죄를 꾸짖기도 하고 구원의 약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3) 바벨론에서의 생활
1) 조직이 유지됨
- 유다의 지방 행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
-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조직도 보유 되었다.
2) 이주의 자유
- 포로들은 그 땅에서 이주의 자유를 누렸다.
- 에스겔은 자기집을 소유 하면서까지 이동하였다.
3) 서신의 특권
- 유대인 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4) 고용의 기회
- 포로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선택한 사람들의 종류에서 발견된다.
5) 비옥한 땅에서 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발강가에서 살았는데 이는 카바리 운하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6) 계속적인 징벌
-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안락한 환경가 생활에서 오는 모욕감을 견디더야 했다.
4. 페르시아 시대
(1) 바벨론 정복
1) 고레스의 예비적인 승리
-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정복 함으로써 그 세력이 고조에 달했는데 이는 주로 고레스 대제에 의해
이룩 되었다.
- 세계주도권을 노리는 고레스는 북메소포타미아 건너편에 그의 군대를 진군 시키고 크로이수스와
접전하여 거의 장해를 받지 않고 진입 하였다.
2) 바벨론의 함락
- 주전 539년 그는 주요 지역 바벨론으로 진군하여 이제 단독으로 겨루게 되었다.
- 결정적인 접전은 북쪽으로 티그리스강의 오피스에서 고레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2) 페르시아의 통치자
1) 캄비세스
- 캄비세스는 그의 형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캄비세스의 업적으로는 주전 525년 애굽을 정복 함으로써 이미 확보된 넓은 영토를 더 추가 시
킨 일이었다.
- 캄비세스는 전 국토를 지배 하여 제국의 관구로 포함 시켰다.
2) 다리오 히스타스페스
- 다리오1세는 반란을 짐압 하고 왕위를 획득하는 일에 성공하고 반란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 다리오는 전 조직을 재조직 하는 수완을 과시 했다.
- 그러나 주전 490년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이스의 손에 모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3) 크세르크세스 1세
- 그는 바벨론을 앗수리아와 통합 시켰다.
- 그의 함대가 살라미스에서 참패를 당한후 그는 수도로 돌아와 건축 사업을 시작 하였다.
4)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
- 아닥사스다의 첫번 과업은 왕위를 탐내는 모든 적수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미약 하다가 알렉산더의 출현으로 그리이스에게 망하였다.
5. 첫번째 귀환(에스라 1-6장)
(1) 고레스 칙령
- 고레스가 그 첫해 작은 나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 고레스 칙령의 내용
* 고레스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성전 재건
* 원하는 유대인은 귀국, 남아 있는 유대인 경제적 원조를 해줄것
* 느부갓네살이 취한 금,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것.
(2) 귀 환
- 칙령이 발표된 직후 주전 538년이나 537년에 귀환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임.
(3) 성전 건축
1) 훌륭한 시작
- 성전 건축은 그땅에도착한 직후 시작되었다.
- 첫번 순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는데 꽤 빨리 이루어진것 같다.
-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를 제기 하여 건축은 중단 되었다.
2) 건축사업이 다시 시작 되다.
- 다리오 2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건축활동의 재기를 촉구 하였다.
- 그해 6월에 작업이 시작 되었고 4년후 다리오 6년에 성전이 완성 되었다.
6. 두번째 귀환(에스라 7-10장)
(1) 사이 기간
- 학개 : 성전을 완성 하지 않은 백성들을 비난
- 느혜미야 : 예루살렘성을 건축 하기 위해 돌아옴
- 에스라 : 주위의 이방인들과 결혼한 백성들의 죄를 고백
(2) 왕의 조서
- 에스라 는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백성들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건 시키는 일이었다.
(3) 귀환과 활약
1) 여행
- 에스라는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아하바 강에 집합시켜 첫달 12일에 출발해 5월 첫날에 예루
살렘에 도착 했다.
2)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
- 에스라는 도착 직후에 유대인들의 주위 백성들과의 결혼에 대해 듣고 가책을 느꼈다.
- 에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고 곁애 있던 사람들은 이 결혼이 취소 되어야 한다고 말 하였다.
3) 결혼을 취소 하라
- 각각의 결혼을 따로 다스리기로 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각각의 마을에서 임명된 판사들과
장로들이 재판을 맡기로 결정 하였다.
7. 세번째 귀환(느헤미야1-13장)
(1) 성 건축 시도의 좌절
-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얼마전에 성건축의 시도가 좌절 된적이 한번 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건축을 중단 하도록 요구 하였다.
(2)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잔을 올리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아발나하라의 관리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신의 안전통과와 건축
에 필요한 물질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응낙과 동시에 여행으로 부터 느헤미야를 보호 하
기 위해 군대 장관과 마병도 공급해 주었다.
(3) 느헤미야의 성 건축
1) 준 비
- 그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 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밤에 몰래 나아가 성을 탐 색 하였다.
- 예루살렘과 그 주위 성읍으로 부터 일할 만한 사람들이 곧 모아 졌고 이들은 모두 구체적인 노
동 지역을 할당 받았다.
2) 반 대
-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처음에는 단순히 반대를 하였으나 예루살렘을 공
격하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4) 총독이 된 느헤미야
1) 유다의 규모
- 경계선 : 헤브론 바로위에서 동서로 그은 선
- 북쪽 경계선 : 기브온과 미쓰바를 포함
- 동쪽 : 여리고 포함
2) 빚을 사면 하다
- 빚을 사면한 기록이 건축사업 이야기에 포함된것으로 보아 아마 초기에 이루어진것 같다.
3) 보안 수단
- 성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도우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과 다른 레위인을 뽑았다.
- 주민등록 검사로 인해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었다.
4) 율법의 낭독
- 느헤미야는 율법 낭독을 위해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적은 수의 분단으로 나누어 그 뜻을 설명
해 주었다.
5) 봉헌식
- 주전 444년 두 행렬로서 성 주위의 양쪽에서 행진하여 성전에서 함께 만나는 봉헌식을 행하였다.
(5) 느헤미야의 둘째 임기
1) 개혁
-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기가 잠깐 없는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헤이해져 있는 상황을
보고 슬퍼 하였다.
- 안식일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고 수비대를 두어 상행위를 금지 하였다.
- 느헤미야는 또한 혼합 결혼에도 개혁을 가하였다.
2) 알려져 있지 않은 기간
- 그가 적어도 주전 407년에는 유다 총독이 아니라는 증거로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 이때의 총
독이 바고아스라고 나와 있다.
(6)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 그가 시대의 죄악에 대해 기록 하고 있는것은 느헤미야가 겪었던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 에스더 이야기(에스더1-10장)
(1) 내 용
- 이야기는 아하수에로왕 3년에서 부터 시작 된다.
- 왕후를 해임 시킨후 새왕후를 에스더로 선택한다.
- 이 일 후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공모를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고하고 에스더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요청하게 된다.
- 하만이 참석한 특별 잔치에서 에스더는 왕에게 백성을 음모한자가 하만임을 밝히고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고자 했던 나무에 하만을 처형하게 된다.
(2) 의 미
1) 유대인의 수
- 이 이야기에서 자기들이 죽인 75,000명보다 더 많은것으로 보인다.
2) 자 유
- 모르드개는 궁정에서 뛰어난 지위에 있었으며 에스더는 왕후가 될정도로 유대인들은 자유를 누
렸다.
3) 섭리적인 보호
- 유대인의 보호를 위해 사건들이 정확한 시간에 들어 맞았다는데에서 특히 증명되는 이 섭리는
이 이야기의 뛰어난 특징이다.
4) 부 림 절
- 하만은 유대인을 살해할 구체적인 날을 결정하기 위해 제비 뽑기를 하였다.
- 유대인에게는 이사건이 좋은 일로 바뀌었음으로 절기를 제정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9. 엘레판틴 집단
- 엘레판틴은 섬이었다. 이 섬은 첫 폭포의 하단에 위치 하며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500마일이다.
- 이 유대인들은 이전에 바벨론을 두려워 하여 예레미야와 함께 유다에서 도망한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
- 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거주인들이 섬긴
제12장 솔로몬 왕
1. 왕으로 세워지다(왕상 2:12-46;3:4-28, 대하1:1-17)
(1) 왕권 강화(왕상2:12-46)
-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수넴(Shunammite)여인 아비삭과의 결혼을 요청 하였으나 솔로몬은 이 청약을 자기 통치의 위협이라 생각하고 거절하였으며 아도니야를 처형 하였다.
-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키고 아나돗으로 추방 시켰다.
-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제단 앞에서 요압을 죽이도록 하였다.
- 솔로몬은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시므이를 죽였다.
(2)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의 축복의 필요성을 깨달은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에 응하여 그로 하여금 청탁케 하셨다. 이에 솔로몬은 통치에 필요한 지혜를 요구하였다.
2. 솔로몬 왕국
(1) 방어 조치
- 그의 주요 방어 조치는 이스라엘중심 땅을 둘러싼 주요 도시들을 강화 하는것이었다.
- 솔로몬은 1,400의 병거와 12,000 의 마병을 모으고 4,000의 말 외양간을 유지 하였다.
(2) 솔로몬의 궁정
- 솔로몬은 다윗 정부에 있던 사람들이외에 아사리아(Azariah)와 총리대신 사붓(Zabud)이었다
- 부인 : 700 / 첩 : 300 (왕상 11:3)
- 하루식량 : 가는 밀가루 30석 / 굵은 밀가루 60석 / 살진소 10 / 초장의 소 20 / 양 100마리
(3) 재정의 유지
1) 세 금
- 나라를 열 두 군으로 나눈후 각 군 위에 세리를 두었음.
2) 부 역
- 가나안 사람을 이용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역에도 의존하였다.
3) 외국의 공물과 예물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4) 무 역
- 무역로 : 홍해를 통해 남쪽으로 가는 것
- 솔로몬은 말과 병거에 관한 무역도 수행하였다.
3. 외국과의 관계
(1) 애굽과의 동맹
-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애굽과 동맹을 맺었다고 직접 언급되어있다.(왕상 3:1)
(2) 두로와의 동맹
- 또다른 중요한 동맹은 페니키아왕 히람(Hiram) 1세 와 맺어진 것이었다.
- 히람은 성전 건축을 예상하여 이미 다윗에게 백향목을 제공 하였다.
(3) 스바 여왕의 방문
- 스바는 현대의 예멘(Yemen)으로 보여 진다.
- 그녀는 솔로몬에 대한 예물로 금 120달란트를 가져왔고 돌아갈때는 많은 예물과 함께 자기가 바라던 모든 것을 다시 받아 만족하여 돌아 갔다.
4. 건축 사업(왕상 5:1-9:9, 대하2-7장)
(1) 성전 건축
- 구체적인 건축은 솔로몬의 재임 4년봄에 시작 하여 7년후 가을에 완성 되었다.
- 길이 27.4m / 넓이 9.1m /
- 성소 : 전체의 23를 차지 정금제단, 정금등대, 열개의 진설병 상이 있음
- 지성소 : 전체의 13을 차지
- 성소앞에 넓이 9.1m 길이 3m 되는 현관이 있음
(2) 성전 봉헌
- 언약궤를 지성소에 둠 :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것
- 긴봉헌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다.
(3) 다른 건축물
- 자신의궁전 : 13년동안 건축
- "레바논 나무의 궁" : 백향목 기둥으로 바쳐서 지음.
: 무기고로 사용
- 솔로몬의 부인인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도 있었다.
5. 문학 시대
(1) 역 사 서
- 나단 선지자 : 다윗, 솔로몬에 대한 통치의 사기를 씀
- 갓 선지자 : 다윗의 집권만을 다룬 사기를 씀
- 아히야와 잇도 : 솔로몬의 행적을 다룬 역사서를 씀
(2) 음악과 시
- 다윗 : 73편의 시를 써서 일부를 성전 예배에 사용케함
- 솔로몬 : 2편을 씀
- 아삽(Asaph, 예배의성가대장) : 12편의 시를 씀
- 고라의 아들들 : 18편의 시를 씀
- 에단과 헤만 : 각각 1편의 시를 씀
(3) 지혜문학과 극 문학
- 솔로몬은 전도서와 아가서 전체와 잠언의 대부부을 씀
6. 영적인 쇠퇴와 징벌 (왕상11장, 대하 9:29-31)
(1) 쇠 퇴
- 종교적으로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 그의 모든 외국 부인들의 거짓 신을 위해 산당을 지은데에서 그의 변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러나 솔로몬은 죽기전에 이러한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 갔다.
(2) 징 벌
1) 여로보암
- 선지자 아히야는 그의 새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열조각을 여로보압에게 주면서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것을 알려 주었다.
-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볼암을 죽이려 하였으나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였다.
2) 에돔의 하닷
- 하닷의 활동으로 솔로몬의 남방 제국 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하닷은 요압의 잔인한 행위를 기억 하여 솔로몬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3) 다메섹의 르손
- 르손으로 인하여 솔로몬의 북방 제국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그는 유능한 군사적 인물이었으며 배후에 유능한 군대를 모집하였다. 그는 점차 지위와 세력을 증가 시켜 솔로몬에게 심각한 골치거리를 일으켰다.
7. 왕 으로서의 솔로몬
- 솔로몬은 40년(B.C 970-931)의 긴기간을 통치하였다.
- 그는 넓은 제국을 물려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부와 명예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었다.
-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13장 북방왕국
1. 반란(왕상12:1-4, 대하 10장)
- 열 지파는 이 왕국에서 탈퇴 하여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안을 왕으로 하는 자기들만으 왕국을 세웠다.
- 여로보안 은 자기의 두지파 유다와 베냐민을 통치 하는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2. 초기 시대(B.C931-885, 왕상12:25-16:20)
(1) 왕이 된 여로보암
1) 새 왕국
-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라는 열지파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 그는 세금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징수제도를 완전히 없앴을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디르사(Tirzar)를 수도로 정했다.
2) 대체된 예배 장소
- 종교적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 백성들을 위한 다른 예배 장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2) 질책과 징벌을 받은 여로보암.
- 여로보암의 행동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꾸짖게 하신다.
- 그가 그로임해 다시 마음을 돌이 켰다는 기록은 없다.
(3) 영토의 손실
- 이스라엘 초기에 특히 여로보암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왕성해져 그들이 잃었던 영토를 다시 요구 하였다.
- 이러한 영토의 손실 외에도 여로보암의 국가는 적어도 한번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죽음
- 여로보암은 22년간의 통치후 자연사로 죽었다.
(5) 나 답
- 나답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디르사에서 2년간 다스렸다.
- 종교적으로 나답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다.
(6) 바 아 사
-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스렸다.
- 그이 통치에 관해서 남쪽의 유다와 계속 투쟁을 벌였다는것 외에는 기록 된 바가 거의 없다.
- 종교적으로 바아사는 그의 두 선임자의 방법을 계속 했다.
(7) 엘라 와 시므리
- 엘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군사적인물 시므리가 공모 하여 엘라를 살해 하였다.
-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 하였는데 이것이 7년 통치 후였다.
3. 오므리 왕조(B.C885-841, 왕상 16:23-22:53, 왕하1-8장)
(1) 정치적 상황
- 오므리는 3년 동안 세번째 왕가를 대신 하였다.
- 유다의 아사왕은 바아사를 공격 하기 위해 이미 이 나라왕 벤하닷 1세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었다.
-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오므리의 집권
1) 새 수도 사마리아
-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사마리아를 정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요새로 증명되었다.
- 이 건축 사업에 훌륭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 B.C 722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2) 모압의 정복
- 모압인의 돌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3) 페니키아 동맹
-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정식동맹의 표시로 공주의 아머지 엣바알
과 조약을 맺은것으로 보인다.
(3) 아합과 이세벨
1) 바알 숭배의 도입
- 이들은 이세벨의 본래 종교인 바알-멜칼트(Baal-Melqart)의 제단을 이스라엘에 도입 시켰다.
-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 하였다.
2) 통치적인 수완
- 아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 오므리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들은 아합의 "사아궁"으로 판명 되었다.
3) 전쟁 경험
- 종교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으로 아합은 군사적으로 살효를 거두었다.
- 아합은 라못 길르앗에서 벤하닷과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4) 유다와의 동맹
- 아합의 딸 아달랴는 동맹의 표시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 하였다.
-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들을 원조 하였다.
(4) 선지자 엘리야
1) 기근과 불
- 그의 첫번 행동은 이런 사악한 종교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을 내실 것이라고
아합왕께 고하는 일이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멜산에서 시험을 주선 하는데 협동하도록 왕을 설득 하였다.
2) 실패와 재기
- 엘리야 자신이 연약해지는 순간 여호와 숭배에 대한 국민적인 재생의 전망을 망쳐 버렸다.
- 엘리사와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정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계속 저항 하면서 10년동안
함께 일 하였다.
3) 이 후의 세가지 이야기
1. 아합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왕궁 근처에서 부당하게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에 대해 엘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2.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의회복을 바알세불에게 사람을 보낸것을 엘
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3.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간것이다.
(5)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2년간 다스리다가 아글이 없이 죽었다.
- 아하시야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6) 여호람
1) 종교적 관점
- 여호람은 바알을 없애 버렸다.
- 그러나 여호람이 바알을 계속 지지 했을것이라는 추측은 이세벨이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2) 모압의 반란
- 여호람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 여호람 재임 시의 아람 사람 예화
1) 아람 장군 나아만
- 그는 문둥병에 걸려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여자 아이로 부터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요단강에가 7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되었다.
2) 장님이 된 아람 사람
- 얼마후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인들은 눈이 멀게 되어 곤경을
겪었다.
3) 사마리아의 포위
- 수 개월 후 아람 사람들은 더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다시 와 사마리아를 포위 하였다.
4) 아람 사람에의한 부상
- 아람 사람과의 마지막 교섭에서 여호람은 죽었다.
(8) 선지자 엘리사
1) 배경 문제
- 엘리사가 한일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알-멜칼트에 항거 하는것이었다.
- 엘리사의 활동기간은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 하여 요아스때에 죽었으니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2) 엘리사의 경험
- 엘리사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여호람 재임 시의 일로써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하
나의 연속적인 내용은 아니다.
- 엘리사의 주요 관심중의 하나는 점띵은 선지자를 교육 시키는 일이었다.
4. 예후왕조(B.C841-753, 왕하 9:11-10:36;13장;14:16-29)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다
-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넷째 왕조를 살해 하리라는 징벌을 예고 하셨다.
-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중 한 사람을 보내 여호람 대신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고 숙청에 관한
지시를 전하게 하였다.
1. 여호람왕
2. 이세벨의 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창문에서 떨어뜨림.
3. 아합의 70명의 아들 살해.
4. 이스르엘에 있는 모든 궁정 관리를 살해
5. 아하시야의 친척 42명 살해
6.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임
(2) 왕이 된 예후
- 종교적으로 예후는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는데 순종 하였으므로 제일 초기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
으나 처음에 시작한 그 길을 계속 따르지 못 하였다.
1) 하사엘의 이스라엘파괴
- 외국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욕은 특히 예후 재임 시에 선고 되었다.
- 이것은 아람 사람 하사엘에 의해 오게 되었으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었다.
2) 앗수리아 앞에서의 모욕
- 이스라엘을 또한 에후 재임시 앗수리아로 부터 피해를 입었다.
- 앗수리아 침범은 하사엘의 침범 이전에 일어 났으며 이스라엘땅 부다는 하사엘의 땅에 더 큰 해
를 가져다 주었다.
- 이 사건은 앗수리아 기록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다.
3)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3) 여호아하스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4) 요아스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5) 여로보암 2세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6) 8 세기 선지자
- 선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 여로보암 2세때의 선지자
요나 / 아모스 / 호세아
(7) 스가랴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5.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1) 살 룸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 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2) 므 나 헴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게 되었다.
(3) 브가히야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5) 호 세 아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앗수리아의 속국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7. 요약
- 이스라엘은 B.C931년 부터 B.C722년 까지 약 2세기 동안 국가로 존재 하였다.
- 제9왕조 / 19명이 집권 / 8명의 왕은 암살당했거나 자살함.
- 오므리에게의 징벌
예후에의한 오므리 가문의 진멸
하나님은 앗수리아에 국가적 모욕을 허락 하심
제14장 유다 왕국
1. 이스라엘의 투쟁기간(B.C931-870, 왕상 14:21-1524, 대하10-16장)
(1) 르호보암
- 르호보암은 41세때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다스림
- 솔로몬 후기 시대의 종교적인 타락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1) 여로보암으로부터의 성공
- 르호보암은 두개의 주요적, 곧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시삭으로부터 군사적인 접전을 맞게
되었다.
- 여로보암과의 전투는 성공적이었으나 두번째 시삭 한테는 비극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종교적인
결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셈이었다.
2) 애굽의 시삭에게 패배 당함
- 르호보암 5년에 시삭은 애굽의 우월성을 과시 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감행 하였다
- 시삭의 세력은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미쳤다.
(2) 아비얌
- 르호보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비얌은 3년간 다스렸다.
- 여로보암의 투쟁을 계속 하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3) 아 사
-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1) 종교적 행적
- 그는 그 땅에서 남색 하는자와 우상을 몰아 내었다.
- 최근의 전투에서 노략하여온 소700마리와 양7,000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 아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못하였다.
2) 애굽에게 승리하다.
- 아사왕은 두번의 외국전투를 겪었다. 첫번째는 애굽과의 전투였는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자만심
- 두번째 애굽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왕 바아사 와의 갈등이었는데 그것은 군사적이기 보다는 경제
적이었다.
2. 이스라엘과의 동맹시대(B.C873-835, 왕상22:42-50, 왕하 8:16-29;11:1-16
,대하17:1-23:15)
(1) 여호사밧
1) 훌륭한 종교 행적
- 그는 땅에서 바알 제단을 없애고 산당을 없애기도 했다.
- 그는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했다.
-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헤온데서 드러난다.
2) 강력한 통치자
- 5대대의 강력한 군대 소유
- 본국의 수비 강화에도 신경을 써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함.
3) 재판 규정
-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 임명
- 모든 재판을 공정히 하도록 촉구함
4) 이스라엘과의 동맹
- 그는 이 동맹에서 천부적인 정치가로서 자질을 과시 하였다.
-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면에서는 큰 손실을 가져 왔다.
(2) 여 호 람
-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4년동안 섭정을 하였다.
- 5가지의 불행한 사건
1. 여호사밧의 모든 아들들을 죽임
2. 3. 그의 통치에 대한 연속적인 반란
4.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략
5. 여호람 자신의 끔찍한 죽음
(3)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1년도 채 못다스렸다.
- 아하시야는 예후의 습격으로 도망쳤으나 예후의 신하들에게 붙잡혀 므깃도에서 살해 당함.
(4) 아 달 랴
1) 잔인하고 사악한 통치
-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 그녀는 죽은 아들의 장자에게 돌아갈 왕권을 차지 하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 하도록
하였다.
2) 요아스에게 왕관을 씌우다.
- 아달랴의 전복을 기다리고 계획해왔던 여호야다는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려 놓았으며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처형 하도록 명령했다.
3. 하나님께 합당한 왕(B.C835-731, 왕하12-15장, 대하 23:16-27:9)
(1) 요아스
1) 종교적 개혁
- 요아스는 여호야다를 통하여 바알 멜칼트성전과 그 제단 우상등을 멸하였다.
- 요아스는 자신이 혼자 통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성전을 수리 하도록 명령 하였다.
2) 타락과 징벌
-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왕은 바알-멜칼트 제단에 동조적인 조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그에대한 징벌로서 요아스는 모반자들의 손에의해 암살 당했다.
(2) 아마샤
1) 에돔에 대한 승리
- 아마샤는 에돔에 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 이스라엘에게 패배함
- 에돔을 이긴 아마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3) 죽 음
- 그는 라기스로 도망 쳤으나 추격당하여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3) 웃시야
1) 섭 정
- 52년의 통치 기간중 처음 24년은 아버지와 섭정을 하였고 마지막 12년은 아들 요담과 같이 섭정
을 하였다.
2) 영토확장
- 그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여로보암과 같은 능력을 발휘 하였다.
남쪽 : 에돔을 계속 지배
동쪽 : 아람에게 예물을 받음
서쪽 :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김
3) 전성기
- 주전743년 까지 웃시야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됨
(4) 요담
- 요담은 20년간 다스림
- 아하스를 섭정으로 세움
- 요담은 유다에서 4번째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왕이었다.
4. 앗수리아 점령 시기(B.C743-640, 왕하 16-21장, 대하28-33장)
(1) 아하스
- 총 28년간 다스림 ; 12년은 아버지와 같이 다스림. ; 13년은 아들 히스기야와 섭정을 함.
1) 베가와 르신의 포위
- 친앗수리아 감정으로 인해 이스라엘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포위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앗수리아 반역에 협조 할것을 요구함
2) 종교적 결함
- 종교적으로 아하스는 바알우상을 만들고 힌놈(Hinnom) 골짜기에서 어린 아이 희생제르르 드렸으
며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3) 군사적 실패
- 에돔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가기까지 하였다.
(2) 히스기야
1) 하나님이 인정 하심
-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실때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 아하스의 고의적인 우상숭배 이후 히스기야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 하였다.
-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명하여 다시 지키게 하였다.
2) 히스기야와 앗수리아
-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반 앗수리아파였다.
- 히스기야는 주전 711년에 블레셋 지역으로 들어와 당시 주도적인 블레셋도시 아스돗(Ashdod)의
반란을 진압 했다.
3) 히스기야와 산헤립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705-681)이 왕위에 오르자 히스기야는 동맹에 가담 했다.
-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보복에 철저히 준비를 가하였다.
4) 산헤립의 침략
- 산헤립은 주역도시 두로를 분쇄하였고 이때 동맹가운데 비블로스, 아르바드, 모압, 에돔, 암몬도
포함되었다.
- 산헤립은 또다른 주역도시 아스글론을 멸하고 이곳의왕 시드기야(Sidqia)를 앗수리아로 추방 하
였다.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산헤립이 세번째 주역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내륙으로 이동한것은
이때로 보인다.
- 산헤립의 보고 :
엘테케, 딤나, 에그론 근처의 성읍 정복.
20만명이 넘는 포로포획.
히스기야의 총 46개 성읍 점령.
5) 히스기야의 병과 명성
-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회복 되었다.
-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의 사자들이 유다와 바벨론에게 공통된 반 앗수리아의 목적으로 예루살
렘을 방문 하였다.
(3)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
1) 이사야
- 히스기야갸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었을때 이사야는 애굽과의 연합을 반대 하였다.
- 여기서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변하여 주전 701년의
동맹을 맺은 데에는 이들의 영향이 작용항것으로 보인다.
2) 미 가
-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재임동안 활동 하였다.
- 미가의 주요 메시지는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것이었다.
(4) 므 낫 세
1) 종교적 배반
- 므낫세는 종교적인 면에서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였다.
- 이에는 당시 앗수리아 종교 관습과 이전의 페니키아의 바알-멜칼트 숭배가 혼합되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 징벌과 회개
-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징벌은 므낫세가 앗수리아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형태로 오게
되었다.
- 므낫세는 포로로 있는동안 회개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결과 마침내 유다로 돌아올수
있었다.
(5) 아 몬
- 아몬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아몬은 우상숭배를 하였으며 그의 신복들이 공보하여 그를 죽였다.
5. 바벨론의 지배(B.C640-586, 왕하 22-25장, 대하34-36장)
(1) 요 시 아
1) 요시아의 개혁
- 그의 나이 26세때 요시아는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게 하고 개혁
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 예루살렘 성전과 전땅으로 부터 모든 이방 제단이 제거 되었다.
- 요시아는 앗수리아의 쇠약한 시기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 요시아의 개혁중 가장 중요한 면은 유월절의 준수였다.
2) 요시아의 죽음
- 세계적인 발전으로 추구하고자 하였을때 그는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다.
- 요시아는 전략지인 므깃도에서 애굽을 막으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2) 7세기 선지자들
예레미야 : 우상숭배에 대한 재앙에 대해서 경고함.
스 바 냐 : 유다의 죄악에 대한 극심한 재앙을 예고.
나 훔 : 간접적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말하나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
리실것이라는 내용
하 박 국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바벨론이 들어올것을 예고
(3) 여호아하스
- 요시아의 세 아들중 첫번째로 여호아하스가 다스렸으나 애굽왕 느고는 그의 형 엘리야김을 왕으로
대치 시키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꿀것을 명령 하였다.
-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4) 여호야김
- 여호야김은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효과적인 통치도 하지 못하였다.
-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나귀와 같이 매장당할것"이라고 선언 함으로서 그에대해 멸시하고 있다.
(5) 바벨론의 부상
- 주전 605년 애굽과 바벨론은 유브라데스의 칼케미쉬(Carchemish)에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 애굽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줌으로 바벨론은 새롭게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
- 주전 601년 느부갓네살은 애굽쪽으로 이동하여 그 경계에서 느고와 대전 하였다.
(6) 여호야긴과 주전 597년의 예루살렘 포획 사건
- 느부갓네살은 잠깐의 휴식후 주전 597년에 다시 돌아와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 주전 598년 겨울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떠났고 이달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7) 시드기야와 주전 586년의 포로 사건
1) 바벨론에 대한 반란
- 예루살렘안의 강력한 반바벨론파들은 반란에 대한 압력을 불어넣어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게 하였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 하였다.
-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사신을 보내어
유다의 충성을 표현 함으로서 훌륭한 판단을 보여 주었다.
- 그러나 5년후 시드기야는 설득을 당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애굽에게 원조를 요청 하였다.
2) 예레미야가 그의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다.
- 이 기간동안에 예레미야는 자기동포 유다 사람의 손에서 큰 고초를 당하였다.
- 수난에도 불구 하고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경고와 충고를 던져 주었다.
3) 예루살렘의 함락
-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성은 주전 586년 7월에 바벨론에게 함락 되었다.
-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는 두눈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15장 포로기와 귀환
1. 유다말기(왕하 25:22-26, 렘40-44장)
(1) 보편적 상황
- 정복국가에서 유능한 인물을 포로로 잡아가는 수법은 바벨론 사람이 아수리아에서 본뜬 것이다.
- 유다는 바벨론의 일개 주가 되었으며 외국이 지명한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 그 첫번 총독이 그달리야(Gedaliah)였으며 그는 미쓰바를 새 수도로 정하였다.
(2) 그달리야의 암살
- 그달리야는 두달동안 다스리다가 왕가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에게 암살되었다.
- 이스마엘은 암몬왕 바알리스를 배경으로 음모를 꾸며 그달리야를 죽이고 미쓰바에있는 작은
바벨론 부대와 약간의유대인 조수들을 죽였다.
(3) 예레미야가 조언을 하다
- 요하난과 그의 동료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구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
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 10일후 바벨론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땅에나아 있어 애굽으로 피신 하지 말라고 경고 하였다.
(4) 애굽으로 내려감
- 많은 유다사람이 애굽 여행길에 올랐고 예레미야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따라
갔다.
-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경고 하기를 하나님께 계속 불충성 하였으므로 아무도 유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2. 바벨론 포로시기(B.C605-539)
(1) 느부갓네살
1) 군사적 활동
-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 그는 두로섬을 실제로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 받았다.
- 그는 주전 582년에 코엘레-수리아, 모압, 암몬등을 원정 하였다.
- 주전 568년 애굽을 침략 하였다.
2) 건축사업
- 그는 복잡한 구조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미디안 왕비를 위해 느부갓네살이 테라스 위에 메달아 세운 정원이었다.
(2)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 그의 아들 아벨-마르둑이 2년간 통치 하였다.
- 아벨-마르둑은 그의 매부 네리 글리살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신 그가 주전 560년 8월 왕위에
올랐다.
- 그이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정권을 잡았으나 몇개월후 나보디누스를 포함한 신하들에 의해 암살
되었고 나보디누스가 왕권을 잡게 되었다.
(3) 나보디누스
- 하란출신인 나보디누스는 느부갓네살이후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다.
- 재임 초기에 실리시아와 수리아에 대하여 두번의 원정을 하였다.
- 나보디누스가 없는 바벨론에서는 오랫동안 연례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다.
3. 유다의 포로생활
(1) 다 니 엘
1) 다니엘의 명예
- 느부갓네살이 이 젊은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이유는 자기 왕국의 유능한 관리로 쓸 인물을 이
가운데서 뽑고자 함이었다.
- 실제로 그는 페르시아의 120방백들을 감독하는 새 총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다니엘의 영향
-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높은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기 동포 포로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중요한 역할 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다니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선포에도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2) 일반 포로들
1) 숫 자
- 두번째 추방때 : 용사 7,000 , 기술자 1,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이었다.
2) 에스겔
- 그는 포로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로서 죄를 꾸짖기도 하고 구원의 약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3) 바벨론에서의 생활
1) 조직이 유지됨
- 유다의 지방 행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
-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조직도 보유 되었다.
2) 이주의 자유
- 포로들은 그 땅에서 이주의 자유를 누렸다.
- 에스겔은 자기집을 소유 하면서까지 이동하였다.
3) 서신의 특권
- 유대인 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4) 고용의 기회
- 포로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선택한 사람들의 종류에서 발견된다.
5) 비옥한 땅에서 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발강가에서 살았는데 이는 카바리 운하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6) 계속적인 징벌
-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안락한 환경가 생활에서 오는 모욕감을 견디더야 했다.
4. 페르시아 시대
(1) 바벨론 정복
1) 고레스의 예비적인 승리
-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정복 함으로써 그 세력이 고조에 달했는데 이는 주로 고레스 대제에 의해
이룩 되었다.
- 세계주도권을 노리는 고레스는 북메소포타미아 건너편에 그의 군대를 진군 시키고 크로이수스와
접전하여 거의 장해를 받지 않고 진입 하였다.
2) 바벨론의 함락
- 주전 539년 그는 주요 지역 바벨론으로 진군하여 이제 단독으로 겨루게 되었다.
- 결정적인 접전은 북쪽으로 티그리스강의 오피스에서 고레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2) 페르시아의 통치자
1) 캄비세스
- 캄비세스는 그의 형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캄비세스의 업적으로는 주전 525년 애굽을 정복 함으로써 이미 확보된 넓은 영토를 더 추가 시
킨 일이었다.
- 캄비세스는 전 국토를 지배 하여 제국의 관구로 포함 시켰다.
2) 다리오 히스타스페스
- 다리오1세는 반란을 짐압 하고 왕위를 획득하는 일에 성공하고 반란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 다리오는 전 조직을 재조직 하는 수완을 과시 했다.
- 그러나 주전 490년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이스의 손에 모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3) 크세르크세스 1세
- 그는 바벨론을 앗수리아와 통합 시켰다.
- 그의 함대가 살라미스에서 참패를 당한후 그는 수도로 돌아와 건축 사업을 시작 하였다.
4)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
- 아닥사스다의 첫번 과업은 왕위를 탐내는 모든 적수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미약 하다가 알렉산더의 출현으로 그리이스에게 망하였다.
5. 첫번째 귀환(에스라 1-6장)
(1) 고레스 칙령
- 고레스가 그 첫해 작은 나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 고레스 칙령의 내용
* 고레스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성전 재건
* 원하는 유대인은 귀국, 남아 있는 유대인 경제적 원조를 해줄것
* 느부갓네살이 취한 금,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것.
(2) 귀 환
- 칙령이 발표된 직후 주전 538년이나 537년에 귀환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임.
(3) 성전 건축
1) 훌륭한 시작
- 성전 건축은 그땅에도착한 직후 시작되었다.
- 첫번 순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는데 꽤 빨리 이루어진것 같다.
-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를 제기 하여 건축은 중단 되었다.
2) 건축사업이 다시 시작 되다.
- 다리오 2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건축활동의 재기를 촉구 하였다.
- 그해 6월에 작업이 시작 되었고 4년후 다리오 6년에 성전이 완성 되었다.
6. 두번째 귀환(에스라 7-10장)
(1) 사이 기간
- 학개 : 성전을 완성 하지 않은 백성들을 비난
- 느혜미야 : 예루살렘성을 건축 하기 위해 돌아옴
- 에스라 : 주위의 이방인들과 결혼한 백성들의 죄를 고백
(2) 왕의 조서
- 에스라 는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백성들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건 시키는 일이었다.
(3) 귀환과 활약
1) 여행
- 에스라는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아하바 강에 집합시켜 첫달 12일에 출발해 5월 첫날에 예루
살렘에 도착 했다.
2)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
- 에스라는 도착 직후에 유대인들의 주위 백성들과의 결혼에 대해 듣고 가책을 느꼈다.
- 에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고 곁애 있던 사람들은 이 결혼이 취소 되어야 한다고 말 하였다.
3) 결혼을 취소 하라
- 각각의 결혼을 따로 다스리기로 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각각의 마을에서 임명된 판사들과
장로들이 재판을 맡기로 결정 하였다.
7. 세번째 귀환(느헤미야1-13장)
(1) 성 건축 시도의 좌절
-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얼마전에 성건축의 시도가 좌절 된적이 한번 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건축을 중단 하도록 요구 하였다.
(2)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잔을 올리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아발나하라의 관리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신의 안전통과와 건축
에 필요한 물질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응낙과 동시에 여행으로 부터 느헤미야를 보호 하
기 위해 군대 장관과 마병도 공급해 주었다.
(3) 느헤미야의 성 건축
1) 준 비
- 그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 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밤에 몰래 나아가 성을 탐 색 하였다.
- 예루살렘과 그 주위 성읍으로 부터 일할 만한 사람들이 곧 모아 졌고 이들은 모두 구체적인 노
동 지역을 할당 받았다.
2) 반 대
-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처음에는 단순히 반대를 하였으나 예루살렘을 공
격하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4) 총독이 된 느헤미야
1) 유다의 규모
- 경계선 : 헤브론 바로위에서 동서로 그은 선
- 북쪽 경계선 : 기브온과 미쓰바를 포함
- 동쪽 : 여리고 포함
2) 빚을 사면 하다
- 빚을 사면한 기록이 건축사업 이야기에 포함된것으로 보아 아마 초기에 이루어진것 같다.
3) 보안 수단
- 성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도우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과 다른 레위인을 뽑았다.
- 주민등록 검사로 인해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었다.
4) 율법의 낭독
- 느헤미야는 율법 낭독을 위해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적은 수의 분단으로 나누어 그 뜻을 설명
해 주었다.
5) 봉헌식
- 주전 444년 두 행렬로서 성 주위의 양쪽에서 행진하여 성전에서 함께 만나는 봉헌식을 행하였다.
(5) 느헤미야의 둘째 임기
1) 개혁
-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기가 잠깐 없는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헤이해져 있는 상황을
보고 슬퍼 하였다.
- 안식일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고 수비대를 두어 상행위를 금지 하였다.
- 느헤미야는 또한 혼합 결혼에도 개혁을 가하였다.
2) 알려져 있지 않은 기간
- 그가 적어도 주전 407년에는 유다 총독이 아니라는 증거로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 이때의 총
독이 바고아스라고 나와 있다.
(6)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 그가 시대의 죄악에 대해 기록 하고 있는것은 느헤미야가 겪었던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 에스더 이야기(에스더1-10장)
(1) 내 용
- 이야기는 아하수에로왕 3년에서 부터 시작 된다.
- 왕후를 해임 시킨후 새왕후를 에스더로 선택한다.
- 이 일 후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공모를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고하고 에스더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요청하게 된다.
- 하만이 참석한 특별 잔치에서 에스더는 왕에게 백성을 음모한자가 하만임을 밝히고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고자 했던 나무에 하만을 처형하게 된다.
(2) 의 미
1) 유대인의 수
- 이 이야기에서 자기들이 죽인 75,000명보다 더 많은것으로 보인다.
2) 자 유
- 모르드개는 궁정에서 뛰어난 지위에 있었으며 에스더는 왕후가 될정도로 유대인들은 자유를 누
렸다.
3) 섭리적인 보호
- 유대인의 보호를 위해 사건들이 정확한 시간에 들어 맞았다는데에서 특히 증명되는 이 섭리는
이 이야기의 뛰어난 특징이다.
4) 부 림 절
- 하만은 유대인을 살해할 구체적인 날을 결정하기 위해 제비 뽑기를 하였다.
- 유대인에게는 이사건이 좋은 일로 바뀌었음으로 절기를 제정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9. 엘레판틴 집단
- 엘레판틴은 섬이었다. 이 섬은 첫 폭포의 하단에 위치 하며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500마일이다.
- 이 유대인들은 이전에 바벨론을 두려워 하여 예레미야와 함께 유다에서 도망한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
- 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거주인들이 섬긴
출처 : 뒤나미스21
글쓴이 : 양정국(Cari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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