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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 폴리스/페르시아의 고도,이란:정수일

영국신사77 2010. 5. 5. 22:57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문명의 모임터, 페르세폴리스

 

                     영화는 간데없고 고즈넉한 기둥만이…

 

» 페르세폴리스 유적 들머리. 주두 윗부분에 동물 장식을 놓은 웅장한 규모의 기둥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기념비적인 열주 양식은 고대 페르시아 건축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란 동북단의 시아파 성지 마슈하드를 이륙한 항공기는 야음을 타고 서남 방향으로 황막한 카비르 사막과 이란 고원을 넘었다. 1시간 반 만인 밤 9시10분 고도 시라즈에 착륙했다. 시라즈는 자그로스 산맥 기슭의 해발 1468m의 높은 곳에 자리잡아 제법 시원한 느낌이다. 이튿날 아침 도심에서 이스파한행 간선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5리는 실히 될 먼 곳부터 높다란 석주가 우람한 공장 굴뚝처럼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차장, 매표소, 매점, 앞뜰은 명소답게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25년 전 찾았을 때 구질구질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으로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69~331)의 왕도였다. 이란인들은 ‘타크테 잠시드’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로 ‘타크테’는 ‘옥좌’란 뜻이고, ‘잠시드’는 이란 전설 속 왕의 이름이니 ‘잠시드왕의 옥좌’란 의미가 된다. 건국 초부터 ‘왕중왕’(샤한샤)으로 자처한 통치자들은 행정 중심지인 수도와 종교·외교 행사지로서의 왕도를 따로 두었다. 3대인 다리우스 1세도 수도는 수사로 정했으나 왕도는 페르세폴리스로 잡았다.

 

 

B.C. 518년부터 60년간 지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왕도
알렉산더군이 불질러 잿더미로

» ‘만국의 문’ 부근에 있는 돌로 만든 목우상. 구슬띠 장식을 두른 말 조각상은 오늘날 이란에서 페르시아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도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에 짓기 시작했다. 5대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기원전 469년께) 거의 완성되었으니, 약 60년 동안 지은 셈이다. 나지막한 라흐마트(‘자비’란 뜻)산을 등지고, 대지를 돋우어 만든 높이 12m의 인공 테라스 위에 터를 잡았다.

 

 총면적은 약 12만 8천㎡(460×280m)에 달한다. 정면에 수림 우거진 마르브 다슈 평야가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닦아 계단식 건물을 짓는 것은 바빌로니아식 건축법이다.

 

 일세를 풍미한 이 거대하고 화려한 왕도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동정군이 불을 질러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존(永存)을 꿈꾸던 철옹성은 18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유적은 무상한 역사 속에 2260년 동안 숨죽이고 파묻혔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대 동방연구소팀이 6년간 발굴하면서 비로소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다. 비록 일그러지고 빛바랜 재현이지만, 세인을 그 영화의 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 양쪽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牧牛像)과 사람 얼굴에 날개 돋친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 인면수신상이 나타난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이다. 짐승의 한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곧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그 길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이악스레 노려보고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아파다나 궁전이나 백주지(百柱址)에 이른다.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 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었다.

 

 

수많은 궁전 터와 독수리상
벽에 돋을새김한 조공행렬도…
화려한 문화 되살아나는듯

» 페르시아 제왕들의 암굴묘 유적인 ‘낙쉐 로스탐’.

   낭떠러지에 굴을 뚫어 제왕 4명의 무덤자리를 놓은 특이한 얼개다.

 

 동물 투쟁도는 동서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미술사가들은 그 원형을 이 궁전의 것에서 찾는다. 뱀이 거북을 감은 우리네 현무도의 발상원(發想源)도 관련지을 수 있을 성싶다.

 

 아파다나 궁전에 나타난 목우와 사자, 투쟁도의 상징성에 관해서는 학계 견해가 엇갈린다. 목우는 겨울을, 사자는 여름을 대표하는 동물로 그들의 투쟁은 계절의 이동을 표현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은 우리 사신도에 등장하는 동쪽의 청룡을 봄, 서쪽의 백호를 가을, 남쪽의 주작을 여름, 북쪽의 현무를 겨울로 배정하는 동양사상과 상통한다. 그밖에 사자는 왕을, 목우는 적을 상징하므로 사자가 목우를 덮치는 것은 왕의 절대적 통치를 시사한다는 일설도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스키타이족 조공자들이 쓴 고깔형 모자다.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절풍모(折風帽)와 신통하게도 닮은꼴이다.

 

 유지에서 가장 큰 공간은 사방 70m의 터에 100개 기둥 흔적이 남은 백주지(‘백주의 방’)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착공해 아들 대에 완성한 공간으로, 알현장이나 회의장으로 추정된다.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지 한가운데의 중앙궁전은 회의실로서 동남북 세 방향에 문이 하나씩 나 있어, 일명 삼문궁(트리필론)이라고도 한다. 북쪽 계단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회의 모습을 새긴 생생한 부조가 남아 있다.

 

 동문 들머리에는 속주 신민들이 다리우스 1세의 옥좌를 받든 상들이 보이며 유지의 중앙 지점 바닥에는 사방 1m쯤 되는 검은 돌이 박혀 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낙쉐 로스탐

 3시간 동안 둘러보고 서북쪽 6㎞ 떨어진 낙쉐 로스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 ‘라비 타부스’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향긋한 꽃과 싱싱한 나무가 우거지고 물고기 노니는 연못까지 갖춰 운치가 있었다.

 

 이란어로 ‘낙쉐’는 ‘조각’이나 ‘회화’란 뜻이고 ‘로스탐’은 전설 속 영웅의 이름이다. 한마디로 암굴묘군(岩窟墓群) 유지인데, 낭떠러지 암굴에 4명의 왕이 묻혀 있다. 암벽을 향하고 왼쪽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2세의 순이다.

 

 다리우스 1세 외의 3기 묘주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 4기의 묘형은 기본상 동일하다. 묘실 표면은 십자형이고, 상부에 피장자의 상이나 묘비, 옥좌를 멘 이른바 ‘옥좌메기’상, 아후라 마즈다의 신상 등이 그려졌고, 하부에는 기마전투도가 부조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1세 사이의 높이 7m에 이르는 대형 ‘기마전승도’에는 260년 에데사에서 사로잡힌 동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말 위의 사산조 페르시아왕 샤푸르 1세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근에도 사산조 시대 왕들의 위풍을 보여주는 낙쉐 라잡 암각 유적이 있는데, 대관식 장면과 성직자의 활동상 등이 그려져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유라시아 중심부에 우뚝 선 첫 세계적 통일 제국이다. 문화적 절충주의와 포용성을 표방하면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명 요소들을 섭취하고 조화시켜 소중한 인류 공동유산을 낳았다.

 

 이 제국의 왕도 페르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문명의 모임터’로서 그 여진은 실크로드 동방의 한반도까지 미쳤던 것이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건축사 박물관 페르세폴리스
후대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

»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촘촘히 이어진 옛 거석 기둥들의 풍경이 인상적인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서방 건축을 아우른 고대 건축사의 박물관이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기단부에 새겨진 23개 속국의 공물 봉헌 장면 부조는 유적의 주인인 페르시아가 이집트, 그리스, 인도 문명을 융합시킨 복합적 문명국이었음을 웅변한다.

 

 건축사적으로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산물인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가 되었다. 페르시아 건축은 대제국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거대 열주들이 연속되는 양식의 구조물을 즐겨 사용했는데,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세운 뒤 그리스인들도 이를 받아들여 통치의 권위성을 과시하는 기념비적 양식을 만들게 된다.

 

 아기자기한 신전 양식이 권위적인 대칭형 동물조각을 달고, 거대한 덩치를 키우게 되었고, 대형 기둥들로 채워진 홀 얼개의 시장 건축물 ‘스토아’가 유행한 것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종모양 기둥과 동물들을 그 기둥머리(주두) 위쪽에 결합시킨 페르시아 건축의 유풍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왕의 사자 석주 등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건축사가들은 페르세폴리스 건축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 그리스 양식과 애초부터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4세기께 소아시아 해안지역의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꾸준히 조공을 바치면서 유명한 이오니아식 기둥양식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1세가 세운 페르세폴리스 아케메네스 궁의 기둥 양식은 주두 윗부분의 소머리 장식을 제외하면 이오니아 식과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 이란 문화유산의 주요 상징이 된 주두의 동물머리 장식은 후대 헬레니즘의 장식조각에 차용되기도 했다. 시차를 두고 정치적 문화적 필요성에 따라 서로의 양식을 수용하는 그리스-페르시아의 실리적 건축교류를 증언하는 유적이 바로 페르세폴리스다.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군주와 문인들에게 영감과 향수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근세 유럽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영원한 왕도로서 동경의 도시가 되었듯이, 중근동·중앙아시아 지배자들은 페르세폴리스의 장대한 유적을 그리며 호연지기의 꿈을 키웠다.

 

 16세기 영국 극작가 말로는 희곡 〈템벌레인 대왕〉에서 정복군주 티무르가 페르세폴리스 언덕을 말 타고 내달리는 야망을 안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고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페르세 폴리스/페르시아의 고도,이란

                        세계를 품었던 페르시아의 古都…수십개국 사신 모습 생생  

 

 페르세폴리스란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뜻이나 정작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사’(Parsa)라 부른다.

▲ 쓰러져 있는 커다란 돌기둥들이 당시의 아파다나의위용을 말해준다. 그 뒤로 많은 왕의 집무실 다차나가 보인다.

파르사는 ‘파르스’에서 나왔는데, 그건 파르스 지방(지금의 이란 남부지역)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곳 파르스에서 시작되었기에 파르사는 대제국의 이름이면서 수도의 그것으로 쓰였다.

남부 도시 시라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비의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은 앞이 탁 트여 전망은 아주 좋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야말로 황성 옛터이나 기둥과 계단, 허물어진 벽과 문의 형상들이 남아 있어 그 옛날의 영화를 그려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유적 입구의 기둥에는 거대한 인면유익(人面有翊ㆍ사람의 얼굴에 날개를 가진) 황소상 두 쌍이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어 마치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아파다나(알현실)로 오르는 계단에는 동물상이 아니라 공물(供物)을 들고 서 있는 각국의 사신, 창을 들고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과 제국의 관리, 이들을 맞아들이는 대왕의 모습이 보인다. 복장과 표정, 인상들을 눈여겨보면 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도 알 정도로 매우 사실적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자체 생산물만으로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했기에 중계무역을 발전시켜야 했는 바 그 결과가 그런 작품을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에 새겨진 사신들은 아파다나를 받치고 있다기보다는 왕조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으리라. 쓰러져 있는 돌기둥의 크기만으로도 당시 아파다나의 규모를 짐작케 하니 그들은 얼마나 조공무역에 의존했겠는가.

  그 뒤는 제법 형태가 남아 있는 왕의 집무실인 ‘다차나’인데, 거기선 옥좌에 좌정한 다리우스 대왕과 왕세자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무슨 일인지 그들의 발 아래에는 신하들이 줄을 맞춰 서 있고 대왕의 머리 위로는 ‘아후라 마즈다’ 신상이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친 자세다. 새의 형상인 아후라 마즈다는 왕권을 증명하는 절대신이었으니, 이 부조는 아후라 마즈다·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로 왕권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왕권신수도’인 셈이다.

 

  페르시아 제국이 지향했던 바를 이토록 여실히 보여주는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진으로 그 종말을 맞게 된다. 기원전 334년, 도시의 대부분이 화염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때 대제국 페르시아도 문을 닫았다.

 

출처 블로그 > 인터네피아
원본 http://blog.naver.com/killidmg/120013558452

 

 

 

 

                                     페르세폴리스

 

 고대 페르시아(Persia)제국의 옛 수도 - 

 페르세폴리스는 동·서양의 모든 문화가 모여 새로운 세계문화가 탄생한 곳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Silk Road)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입지함으로써,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들이 이곳에 집결했다. 지금은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옛 모습을 완전히 찾을 수는 없으나, 바빌로니아(Babylonia)?아시리아(Assyria)?이집트(Egypt) 등의 고대 건축양식들이 혼합된 유적의 보고(寶庫)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대략 12만5천m2의 면적을 보이고 있다. 지형은 북쪽과 동쪽은 높고 남쪽과 서쪽은 낮은데, 대략 15m 높이로 장방형으로 축조된 화강석 기단 위에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 해당하는 곳은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진 ‘크세르크세스의 문(Gate of Xerxes)’이다. 세계 각국에서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궁전을 가려면 경의를 표하며 이 문을 지나야만 했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의 문은 ‘세계의 문(Gate of All Nations)'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문 앞에서 페르세폴리스의 나팔수들은 힘찬 음률로 사신들의 도착을 환영했다.


 세계의 중심임을 과시하는 크세르크세스의 문 앞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2개의 날개 달린 황소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문을 지키는 호위병인 셈이다. 조각상 1개는 얼굴이 없어질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지만, 가지런한 수염을 갖춘 위엄스러운 용모에다 근육질의 힘찬 다리, 그리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박차고 날아오를 것 같은 날개는 문을 수호하기에 손색없는 위풍당당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문을 지나면 “다리우스대왕의 접견실(Audience Hall of Darius the Great)”이었던 ‘아파다나(Apadana)’로 연결된다. 아파다나로 오르는 북쪽과 동쪽의 계단 벽면에는 당시에 떨쳤던 페르시아제국의 권위와 번영이 부조로 잘 나타나 있다.

 
  계단 벽면에는 줄지어 늘어선 신하들과, 페르시아에 대한 영원한 충성의 증표로 진귀한 공물들을 바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사신들의 끊임없는 행렬 등, 갖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부조로 잘 묘사되어 있다. 커다랗게 새겨진 근엄한 왕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상대적으로 작게 새겨진 사신들이 공손한 태도로 손에 진상품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복장을 한 사신들이 데리고 온 사자?낙타?기린?말?황소 등의 동물들과 함께, 연꽃이나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수목들의 모습도 새겨져 있다.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의 얼굴에는 동글하게 말린 수염까지도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어떻게 돌을 쪼아 저토록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항상 그러하듯 위대한 유적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은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페르시아 전통 건축양식을 보이는 아파다나는 사신들이 왕을 알현했던 곳이다. 다리우스대왕이 건설을 시작해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공했다. 당시 1줄에 기둥이 6개씩, 6줄로 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홀에다, 외곽에는 36개의 기둥을 두른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높이 20m에 이르는 기둥 13개가 남아 있는데, 주두(柱頭)에 화려하게 치장된 조각장식은 페르시아 전통 건축양식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아파다나를 지나면 서쪽으로는 “다리우스대왕의 거처”였던 ‘다리우스의 궁전(Palace of Darius)’으로, 남쪽으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거처”였던 ‘크세르크세스의 궁전(Palace of Xerxes)’으로 연결된다. 다리우스의 궁전은 ‘타차라(Tachara)’로,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하디쉬(Hadish)’로 불려지고 있다. 아파다나와 같이 이곳들의 계단 벽면과 문에도 페르시아제국의 권위와 번영이 드러나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에는 “나는 크세르크세스이다. 나는 왕 중의 왕인 대왕이다. 제국의 왕으로 모든 종족의 왕이자 아케메네스의 왕이다. 다리우스대왕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이곳에 페르시아를 건설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자신감이 넘치는 이 글귀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제왕다운 면모를 잘 표출하고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궁전 남쪽은 왕의 여자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하렘(Harem)'으로 불려지고 있다. 
 아파다나의 동쪽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접견실(Throne Hall of Xerxes)”이었던 ‘100개의 기둥궁전(Hundred Column Palace)'이 위치해 있다. 당시 1줄에 기둥이 10개씩, 10줄로 100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이 궁전은 대략 70m×70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용도는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환대하여 향연을 베풀던 곳이었으나, 실상은 제왕에 대한 변치 않는 충성심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지금은 궁전을 이루었던 100개의 기둥은 모두 없어지고 잔해만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다. 


 100개의 기둥궁전 남쪽에는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진귀한 공물들을 보관했던 ‘다리우스의 보고(Treasury of Darius)'가 위치해 있다. 초석(礎石)만 드러내 놓고 있는 다리우스의 보고의 일부를 지금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00개의 기둥궁전 동쪽은 언덕과 면하는 곳으로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3,000여 명의 병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페르세폴리스 동쪽 언덕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재위 BC 404-359),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재위 BC 359-338), 다리우스 3세(재위 BC 336-330)가 잠들어 있다. 그들의 선조인 다리우스대왕,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2세(재위 BC 423-404)가 영면해 있는 낙쉐루스탐(Naqsh-e Rustam)에서와 같이, 바위산을 뚫은 뒤 그 안에다 시신을 안치하는 암벽묘(岩壁墓)를 만들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외관(外觀)을 취하고 있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암벽묘에는 빛의 신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가 왕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신과 악마, 천국과 지옥이 서로 엮어내는 페르시아인들의 이원론적 신앙은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拜火敎)’ 즉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로 발전했다. 아후라마즈다가 왕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모습을 암벽묘에다 새김으로써 그가 왕 중의 왕임을 상징화하는 것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암벽묘에서 페르세폴리스를 내려다본다. 해발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끝없이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서, 묻히고 잊혀진 페르시아제국의 옛 영화를 다시 떠올린다. 


 한편 페르세폴리스가 여름궁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리 땅을 파도 물 한 방울도 나올 것 같지 않은 황갈색 흙으로 덮여 있다. 2,5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기후가 변한 것이다.

 

 기후가 바뀌어 비가 오지 않게 되면서 울창한 숲이 없어지고 비옥한 토양은 쓸모없는 땅으로 변했다. 지금 보이는 입구의 소나무 숲은 페르세폴리스를 복원하면서 인위적으로 조림을 한 것이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고대 오리엔트의 영광과 멸망의 역사

           페르시아 제국 번성기 때 완성된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통해

                        고대 제국의 흥망 성쇠를 되돌아보자.

 

 기원전 약 460년에 완성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 페르세폴리스.

 이란 시라즈 근교에 있는 페르세폴리스의 유적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다리우스 1세에 의하여 건설이 시작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불타 폐허가 되었다. 페르세폴리스 주변의 유적을 돌아보고,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멸망의 역사를 살펴보자.

 

                         100개의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백주의 방’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으로,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8년에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위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어졌고,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기원전 4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다. 인공의 테라스 위에 조영된 왕궁은 세 방향을 벽돌 성벽이 둘러싸고, 북쪽과 동쪽은 구릉을 등지고 있다. 테라스 전체는 약 460×280m이고 높이는 12m였다고 한다.

왕궁을 올려다보면서 북서쪽의 거대한 테라스를 계단처럼 오르면 ‘크세르크세스의 문(만국의 문)’이 나온다. 이 문이 유일한 성문이며, 날개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황소의 상이 입구의 양쪽을 지키고 있다. 경의를 표하면서 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장대한 ‘아파타나’에 압도되고, 조금 직진하면 미완성의 문을 지나 화려한 ‘백주의 방’으로 빨려 들게 된다. 아파타나의 안쪽에는 중앙 궁전을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이 살던 궁전이나 하렘(왕의 거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왕궁의 가장 안쪽에는 엄중하게 경호된 보물 창고가 놓여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신년제 등의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하며, 동시대의 행정 수도인 수사와는 다른 역할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인공의 테라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벽,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등을 맞댄 기둥 머리 등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 양식에, 포르티코와 플루트(세로 홈)가 나 있는 기둥 등 그리스의 새로운 건축 양식이 훌륭하게 융합하여 아케메네스 특유의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7세기 무렵(신아시리아 시대)에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하였던 제국이다. 또한 그리스풍의 육감적인 부조가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하생략)

 

 

 

 

 

 

                    이란, 페르세폴리스

 

등록자 : 최영실[mysil1027] 등록일 : 2006년 05월 27일 등록지역 : 중동 >>

푸른 하늘과 맞닿은,
낮은 산 아래의 너른 평원에 펼쳐진 유적지..


화려했던 그 날의 영화를 보여주는 듯
다양한 모습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이스의 아크로폴리스와 흡사한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뜨거운 햇살이 사라지고
멀리 두터운 먹구름이 내려앉은 하늘을 보며 내려왔다.




[정보]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인의 호칭.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파르사(Prsa).
이란 남부, 시라즈 북동쪽 약 60㎞ 지점에 있다.

 다리우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 2대에 걸쳐 건설되었고, 이오니아·리디아·시리아·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 외에 박트리아·소그드 등 제국 각지에서 기술자·노동자가 동원.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조각·공예·장식에는 고대예술의 요소가 보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고 세계 지배자 다리우스의 통일적 의지하에 종합된 새로운 양식이다.

 대기단(大基壇) 북서부의 대계단(높이 11.7m)을 오르면 크세르크세스가 완성시킨

'만국의 문'이 있다.

알현전은 제국 지배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신년제가 집행되는 장소이며, 그 계단 벽측에는 신년제에 참가한 중앙아시아와 인더스지방에서 이집트·에티오피아에 이르는 23개의 주요 피정복민족의 조공행렬도가 부각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가 세계제국의 수도를 의도하여 건설한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는 수사(Susa)가 행정수도로 이용되었으므로 아케메네스왕조 후기에는 왕이 페르세폴리스를 찾는 일은 드물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경제활동이 조금 알려져 있을 뿐이다.

 BC 331년말 침입한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군대는 이곳에서 수사의 3배에 달하는 재화와 보물을 얻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 마케도니아·그리스군의 보복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거대한 기둥이 남아 있는 유적은 이슬람시대의 사료(史料)에 <천의 기둥>이라든가 <40개의 첨탑> 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17세기 이후 그곳에서 찍혀진 비문이 그로테펜트의 설형문자 해독의 단서가 되었다.

 

 

 

 

 

 

 

     사막, 낙타 때 그리고 오아시스의 나라 이란

                                                                                              2005.1.25.   http://blog.joins.com/elgood/4031641   

 

‘히잡’ 이라는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들, 검은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 이국적인 용모를 가진 남자들, 그리고 사막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낙타 떼와 오아시스. 과거 페르시아 대제국이며 이슬람 세력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시아파의 본고장 이란으로 떠난 길.



- 사막의 밤하늘에 본 별무더기 -



“아이고 허리야.”

 엄살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퀘타에서 이란과의 국경지대인 타프탄까지 딱딱한 버스의자에 통조림처럼 끼어 가자니 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중간에 내려 허리 한번 펼 간이역도, 하다못해 그 흔한 그 휴게소도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사막과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가도가도 끝이 없다. 그 와중에도 버스 안의 남자들은 멀리 동양에서 온 여행자를 구경하느라 눈을 반짝인다. 외국 여성에 댛산 중동 남자들의 호기심에 대단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버스 안의 수많은 눈동자가 줄곧 나에게서 떠나지 않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사막을 계속 달리던 버스는 오후 8시가 되자 갑자기 멈춰 섰다.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버스에서 우르르 내린다. 더 황당한 건 운전기사까지 내렸다는 사실이다. 영문도 모르고 멀뚱하니 버스에 앉아 있는데, 버스 밖의 사람들이 사막 한가운데 보자기를 깔더니 해가 지는 쪽을 향해 절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슬람교 교리에 따라 석양을 향해(정확히 말하면 메카를 향해) 절하는 모습은 이방인의 눈에 낯설기만 했다.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자 버스는 다시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버스 안으로 확 올라왔다. 사막 한가운데서 타이어가 펑크 난 것이다. 버스에 내려 멍하니 앉아 있는데, 한쪽에선 소변을 보거나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다. 화장실은 가야겠는데 허허벌판에 몸을 가릴 나무 한 그루도 없던 터라 결국 우산을 펴서 가리고 소변을 보았다. 우산이 뚫어질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느껴진다.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얼마쯤 달렸을까, 드디어 버스는 사막에 하나뿐인 휴게소에 정차했다.

“콜라 한 병, 아니 두 병 주세요!”

양손에 환타와 콜라를 흐뭇하게 쥐고 휴게소 마당에 깔린 카펫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주위가 캄캄해지자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갑자기 내게 확 달려들었다. 불빛 때문에 보이지 않던 작은 별들마저 또렷이 빛을 발하며 밤하늘은 별천지가 되는데, 이 또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장관이다. 지금까지 일생에 본 별을 다 합해도 그날 밤 사막에서 본 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국 버스에 사막을 20시간가량 달려 이란의 국경인 타프탄에 도착했다. 출국 신고를 위해 이란 출입국 사무소로 가니 여자들은 모두 스카프를 쓰라고 했다. 인도에서 구입해 들고 오긴 했지만, 어떻게 하는 줄 몰라 난감했다. 우두커니 스카프를 들고 있자, 사무소의 여직원이 대신 둘러주었다.

간단히 입국 신고 후에 이란 땅을 밟으니 공기도 후텁지근한 것 같고, 사람들도 다 사담 후세인 같이 생긴 것 같아서, 또 새로운 나라에 들어왔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약간 찝찌름한 이란 물로 목을 축이고 픽업 트럭에 올라 밤이라는 도시로 향했다.




하염없이 사막을 뚫고 가는데 사막 한가운데 웬 서양 여인이 구조를 청하고 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지만 반바지 차림인 걸 보고 이란인 운전기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 독일 여인의 캠핑카가 사막 한가운데에 모래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이가 마흔은 되어 보이는 캐더린은 독일산 셰퍼드 한 마리를 동무 삼아 거대한 캠핑카를 몰고 홀로 여행 중이란다. 버스에 밧줄을 걸어 캠핑카를 당겨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운전기사는 왜 이런 무거운 차를 몰고 사막으로 들어온 거냐고 툴툴거리면서도 앞에서 끌어보고 뒤에서 밀어보며 열심이다. 마침 도로에 지나가는 거대한 트레일러가 보여 얼른 도움을 청했다. 옆자리에 아들과 부인까지 태운 트레일러 주인은 친절하게도 트레일러를 몰고 도와주러 왔다. 트레일러의 강력한 힘을 빌려 가까스로 모래에서 빼냈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트레일러가 모래에 빠져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시동을 거니 헛바퀴 돌며 소리만 요란할 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트럭의 물도 거의 다 마셔버리고 목이 타들어갔다. 결국 모래에 빠진 트레일러와 캠핑카를 위해 구조 차량을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다시 트럭 짐캄에 올랐다. 사막 한가운데 빠진 두 대의 차량을 뒤로하고 도로로 나오니 운전기사가 다시 투덜거린다. 트럭의 물 한 통을 아까 다 마셔버린 것이다. 픽업 트럭 짐칸에 앉아 있으려니 날은 덥고 목은 마르고 정말 죽을 지경이다.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움켜잡고 달리는 트럭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목에서 모래가 느껴진다. 목이 타들어가고 따가운 햇살에 노출된 피부는 연신 비명을 질러댄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 사막을 달리다 보니 길가에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보인다. 세상에 이보다 반가운 광경이 있을까. 그날 그 가게는 목마른 우리에게 오아시스였다.

                       - 8천 년 전의 고대 도시 아게 밤 캐슬 -

밤의 조그만 도시지만 ‘아게 밤 캐슬‘ 이라는 12세기의 고성과 성 안의 유적을 진주처럼 품고 있다. 간밤의 여독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점심을 벅고 한낮의 햇볕을 피해 게스트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무렵 아게 밤 캐슬로 향했다. 택시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고하고 예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성벽이 보인다. 담장이 높게 빙 둘러 있어 성 안의 모습은 짐작되지 않았으나, 성벽 밖에서 얼핏 보아도 성의 규모를 기대하게 만든다.




1만5천 리알(한화 약 2천원)의 입장료를 내고 성문을 들어서니 감탄사가 절로 날 만큼 멋진 광경이 쫘악 펼쳐진다. 돌산 위에는 거대한 성이 있고, 성 밑으로 거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다. 벽돌로 지은 건축물에 황토를 발라 대단히 품위 있는 옛 시대의 정취가 느껴진다.

이곳은 아무리 둘러봐도 질리지 않는다. 마구간이었다는 곳, 시장 터, 공중 화장실…. 지금은 황토벽과 기둥 같은 흔적만 남아 있다. 8천년 전 생활상을 상상하며 걷자니 마치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지금이라도 수레가 지나가며 길 비키라고 소리 지를 것 같다.

어느 지방이나 그곳에서 가장 많이 나는 재료로 집을 지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황토로 벽돌을 만들고, 황토를 이겨 발라 이렇게 멋진 사막의 집을 만들었다. 이러한 황토집들은 비가 오지 않는 이곳 기후에서나 가능한 가옥 형태일 것이다.

이란의 소도시에 이 정도의 유적이 숨어 있다면 다른 곳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Do you speak English?"

대학생 알리는 처음 만난 건 페르시아 카펫의 본고장 카산의 핀 정원에서였다. 영문학을 전공한다는 알리는 마침 그곳에서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있었다. 영어 책을 읽는 그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란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아, 그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몽땅 물어보았다.

“정말 코미테(풍속 단속 경찰)가 있어요?”
이란에 들어가기 전부터 제일 궁금했던 것이다.
“코미테는 몇 년 전에 없어졌어요.”

하긴 코미테는 필요치 않다. 사실 거리를 다니는 사람 모두가 다 코미테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관광객인 내 복장이 조금만 단정치 못해도 길 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심지어 게스트하우스 안에서조차 차도르로 친친 감고 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너무 더워 한번은 맨머리로 게스트하우스 안을 돌아다니다가 그 집 딸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야 했다.




알리는 정색을 하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코미테는 시민들은 잡아 가두는 일로 악명을 떨쳤다고 설명한다. 몇 년 전 그 역시 여자친구와 손잡고 거리를 걷다가 코미테한테 걸려 잡혀갈 뻔했단다.

대학생 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카산 시내 구경을 나섰다. 카산은 페르시아 카펫의 본고장으로, 정말 질 좋은 카펫을 지천에서 만날 수 있다. 5백년이 되었다는 골동품 카펫의 가격이 우리 돈 5백만원, 이란인들에게는 까무라칠 만큼 비싼 가격이지만, 우리에겐 그 가치를 놓고 보면 정말 헐값이다.

이곳의 카펫은 일명 ‘매직 카펫’ 이라 불린다. 알리바바의 나는 양탄자가 아니라, 카펫의 방향을 바꾸면 카펫의 색깔이 달라 보이는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숙련된 직공 두 사람이 꼬박 1년 동안 1장을 짠다는 카펫이 여기서는 아주 흔했다. 어느 집을 가나 카펫 서너 장은 겹쳐서 바닥에 깔아놓았고 벽에도 흔하게 걸려 있다.

‘아, 이 귀한 것들이 이렇게 널려 있다니…. 아까워라.’

                            - 시라즈의 페르세 폴리스 -

시라즈는 이란에서 손꼽히는 큰 도시로 볼거리가 많다. 깨끗한 거리와 거리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엔 맑은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가로수도 잘 정비되어 있다.

시라즈에서 유명한 것은 ‘페르세 폴리스’ 와 이슬람의 상징인 ‘모스크’ 들이다. 페르세 폴리스는 ‘페르시아 도시’ 라는 그리스어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1세의 여름 궁전으로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8년부터 3년에 걸쳐 지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시라즈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높이 15m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면 가로 300m, 세로 450m의 거대한 단구 위에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제국의 문’ 이라고 불리는 크세르크세스 문. 몸은 황소, 얼굴은 사람, 독수리 날개를 한 부조의 큰 기둥을 하고 있는 크세르크세스 문이 동, 서쪽을 바라보며 제국을 지키고 있다. 왕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로 왕에게 경배를 하며 이 길을 지나가야 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외국 사신 등을 맞이하는 접견실이었던 아파다나 왕궁이 보인다. 왕궁은 계단을 따라 다시 올라가야 되는데, 이곳은 왕궁 자체보다 계단의 아름다움이 더하다. 창을 들고 활을 옆에 찬 이들의 곱슬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들, 그리고 멀리 에티오피아, 이집트, 인도 등에서 온 큰 눈과 오뚝한 코의 사신들이 고유 의상을 입고 나란히 서서 충성심을 표하며 조공물을 들고 왕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들의 모습은 그 당시 아케메네스의 힘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아파다나 왕궁 뒤로 사자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다리우스 대왕의 궁전 티차라의 기둥이 보인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때 모두 불타버리고, 곳곳에는 다 부서진 높이 7m의 기둥과 궁전 터의 흔적, 36개의 석주만 남아 있는 이곳 유적지들은 과거 화려했던 역사를 쓸쓸히 되살려주었다.

페르세 폴리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리우스 1세의 무덤이 있는데, 돌산을 깎아 만들어 매우 위엄있고 장엄하다.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여 전세계의 판도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페르세 폴리스는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 그 자체였다.

                              - 제국의 수도 에스파한 -

에스파한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한때 세계의 절반이라 불렸을 만큼 영화를 누렸던 곳이다. 이말 광장을 중심으로 몇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자르(시장)가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에는 거대한 모스크가 2개나 자리하고 있다. 사진 촬영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이슬람사원의 내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정교하다. 그들이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을 사원 내부에 그린 것 같다. 모스크 안의 기도실에서 온통 검은 천을 두른 여인들 속에 둘러싸여 있자니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넓게 펼쳐진 알리콰푸 궁 광장 안에는 분수가 있고, 그 분수를 둘러싸고 잔디가 펼쳐져 있다. 밤이 되자 화려한 조명에 광장의 분위기는 로맨틱하게 변하고,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하나 둘씩 광장 잔디밭에 자리를 잡는다. 가족들은 음식을 챙겨 나오기도 하고, 연인들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긴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잔뜩 광장에 자리를 깔고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어 앉을 자리가 없다. 겨우 자리를 발견하고 잔디밭에 앉아 있으니, 옆에 있던 한 가족이 손짓을 한다. 자기들과 같이 식사하자는 것이다. 가장인 핫산과 젊은 부인 헤세드, 그리고 귀여운 세 살배기 아들 모하메드, 장인 장모까지 어울려 여름밤을 보내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 가족이 얇게 밀어 만든 빵의 일종인 차파티, 해바라기 씨 말린 것, 수박 등을 내놓으며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정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모두와 함께 포즈를 취하려는데 갑자기 엉덩이에 뭔가 느껴졌다. 그 와중에 핫산이 슬그머니 뒤로 손을 뻗어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순간 너무나 당황했다. 자기 바로 옆에 부인과 가족들이 있는데….





‘이게 바로 친절한 중동 남자들의 속 마음이구나.’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랍 국가를여행할 때는 주의하라는 조언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여행중에 너무 경계만 하는 것도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해 잠깐 방심했더니…. 사실 어디 가나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에스파한은 화려한 모스크가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란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기억에 남는 곳이다. 물론 남자 여행자 없이 여자 혼자 광장에 갔을 땐 상황이 또 다르다. 일행 없이 여자 혼자인 걸 알면 여기저기 광장을 거닐던 남자들이 와서 추근대기 시작하고 어떤 땐 짜증을 넘어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좁은 골목길을 몰래 따라오거나, 지나가면서 엉덩이를 건드리고 팔을 툭툭치는 등 무슬림 여자들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외국인에게는 스스럼없이 한다. 이들은 혼자 여행하는 여자 외국인의 자유를 과대평가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여성 여행자들이여, 중동을 여행할 땐 꼭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가자. 곳곳에서 치근대는 남자들에게 결혼반지라고 보여주면 꽤 효과가 있다.

 이슬람 규율은 여자들에게 더 엄격하다. 시내의 공중 화장실에서 만난 스무 살쯤 되는 이란 아가씨. 히잡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가린 검은 망토 속을 살짝 젖혀 보여주는데, 속에는 화려한 반짝이로 가득한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겉으로는 절대 신의 맹세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검은 망토 안에 화려한 옷을 감추고 있는, 겉만 무슬림인 아가씨들은 언젠가 외국인처럼 염색한 머리를 휘날리며 반소매에 짧은 치마를 입고 싶어하는 신세대들이다.

 열사의 중둥. 이 식상한 표현 그대로 이란을 포함한 중동 지역은 대부분이 사막지대이며, 사막은 정말로 뜨겁고 건조하다. 마치 대형 건조기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사막의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은 피부를 갈라지고 목을 잠기게 한다. 그러나 사막의 열기보다 뜨거운 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과 삶의 의지였다.

                                                                   <글 강영숙 여행전문가>

                            ▶ 이란 입국시 유의사항

 이란에 입국할 때 공항에서 소지한 외환 금액은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이란 법규에 따라 입국 때 신고한 금액은 소지할 수 있으나, 신고하지 않으면 법규에 따라 소지한 외환이 불법으로 간주되어 압류 등의 조치가 따른다.

 의류, 가정용품, 문구류, 옷, 식품류 등의 물품은 통관이 쉬우나, 무기류, 술, 마약, 과일 등은 통관이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출국할 때 페르시아 카펫은 1인당 1장만 살 수 있다, 출국 역시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검사가 대체로 엄한 편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므로, 공항에 3~4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