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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고레스 대왕I](1)/성경과 페르시아

영국신사77 2010. 4. 26. 13:02

      키루스 2세 [Cyrus II, BC 585?~BC 529, 56세]

 

  히브리어:'코레쉬'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재위 BC 559∼BC 529, 30년간)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26세)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키고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10월 키루스의 나이 46세 때, 

나보니도스[* 당시 바벨론은 그의 아들 섭정왕 벨사살이  통치하고 있었음-관리자 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고레스 대왕[키루스 2세, Cyrus II]

 

  성서에서의 별칭은 고레스[키루스] 대왕. 히브리어로 '코레쉬'

 

                                          개요

BC 590(~580) 메디아(또는 페르시스)~529경 아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한 정복자. 

이 제국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에게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근동지역을 포괄했다.

그리스의 군인이며 저술가인 크세노폰이 자신의 저작 

〈키로파이디아 Cyropaedia〉에서 최초로 기록한 고레스 전설의 주인공으로,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백성의 아버지로 불렸던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이며, 

성서에서는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해방자로 기억되고 있다(→ 유대교).


                                     생애와 전설

 

고레스는 BC 590~580년 메디아가 아니면 페르시스(지금의 이란 파르스)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고레스라는 이름이 개인의 이름인지, 군주가 되었을 때 부여된 왕호(王號)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아케메네스 제국이 창설된 뒤에, 이란과 관련된 자료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이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레스 대왕이 그 이름을 사용한 페르시아 통치자로는 최소한 2번째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아카드어(그리스도교 이전 시대 메소포타미아 언어)로 된 한 설형문자 문헌에는, "그는 항상 왕권을 행사해온 가문 출신으로, 안샨테이스페스 대왕의 후손이며, 안샨 왕 고레스 대왕[고레스 1세]의 손자이고, 안샨 왕 캄비세스 대왕[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다. 어쨌든 고레스는 오랜 통치자 가문 출신인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이다. 크세노폰이 쓴 이상화된 전기는, 역사논문이라기보다 이상적 통치자에 관해 그리스인들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레스가 페르시아의 자기 나라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다른 민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고레스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후의 아카이메노스 왕조 군주 가운데 그렇게 존경 받은 인물은 없었다.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 및 그리스의 사가인 테시아스 등이 이야기하는 고레스의 어린 시절은 고레스 전설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명백히 한 왕조의 창건자에 대해 거의 초인적인 자질을 지녔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정형(定型)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란 역사에 등장하는 후기 왕조의 창건자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믿음이 존재한다.

 

전설에 따르면 메디아인의 왕이며 페르시아인들의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가, 자기 딸을 페르시스에 있는 자기 신하인 캄비세스라는 군주와 결혼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났다. 그 아기가 자라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꿈을 꾼 아스티아게스는, 고레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수석고문관이 아기를 죽이는 대신, 양치기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10세가 된 고레스는 뛰어난 자질 때문에 아스티아게스에게 발각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꿈에 개의하지 않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살려주었다. 페르시스에서 성인으로 자란 고레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는 군대를 이끌고 고레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BC 550년 그의 군대가 그를 배신하고 고레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레스의 정복

 

메디아인의 제국을 계승한 뒤, 고레스는 먼저 이란 고원에 사는 이란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한 뒤, 서방으로 확대해 나갔다. 소아시아리디아크로이소스는 아스티아게스가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디아인을 희생시켜 자기 영토를 확대했다.

 

고레스는 메디아 왕의 후계자로서 리디아를 치러갔다.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는 BC 547(또는 546)년에 함락되고 크로이소스는 살해되거나 분신자살했다. 어떤 자료에는 그가 고레스의 포로가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도 나온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던 에게해 해안지방 그리스의 이오니아 도시들은 이제 고레스에게 복속되었으며, 대부분이 평화적으로 굴복했다. 몇군데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들은 나중에 가혹하게 진압당했다.

 

그 다음에 고레스는 바빌로니아로 화살을 겨누었다. 그곳의 군주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그는 평야지대를 침략했다. 거대도시 바빌론의 민족신인 마르두크를 섬기는 제사장들까지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정복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BC 539년 10월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도시였던 바빌론이 페르시아인의 수중에 떨어졌다.

 

성서(에스라 1:1~4)에서, 고레스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에 돌아가게 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바빌론 유수). 또한 바빌로니아인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마르두크 신을 존중하고 지방 관습을 지지하는 한편, 지방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지방 주민들을 무마했다.

 

바빌론의 점령으로 고레스는 메소포타미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정복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까지 수중에 넣었다. 소아시아에 있던 실리시아의 왕은 고레스가 크로이소스를 공격할 때 고레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실리시아는 고레스의 제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군사력과 외교적 수단까지 동원해 고레스는 당시 유례가 없었던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

 

고레스는 몇 군데에 도읍을 두었던 것 같다. 하나는 예전에 메디아인의 수도로 오늘날의 하마단에 해당하는 엑바타나 시였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스에 지은 제국의 새 수도 파사르가다에로, 고레스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승전을 거두었던 터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은 얼마 안되지만 방문객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고레스는 바빌론을 겨울 수도로 삼았다.

 

결코 페르시아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던 고레스는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메디아인을 무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페르시아인과 합쳐서 두 민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이원적인 왕국을 꾸렸다.

 

키루스는 페르시아인들을 신하로 거느리고 제국을 통치했던 메디아인들에게서 왕권의 전통을 빌려와야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은 아마도 메디아인 한 사람을 총리대신 비슷한 고문관으로 삼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다.

 

다리우스 시대 이래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후기의 부조를 보면, 한 메디아인이 대왕과 나란히 있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또한 페르시스 토착민이던 엘람인들도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인의 스승이었다. 예컨대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석재 부조에 페르시아인들이 엘람인의 옷을 입고 엘람인이 만든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이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다


고레스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내는 데서뿐만 아니라, 아카이메노스 특유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서도 지도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고레스의 가정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인 캄비세스가 그를 계승했다. 다른 한 아들 바르디야(그리스인들이 부르기는 스메르디스)는 캄비세스가 집권한 뒤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오빠인 캄비세스와 결혼한 아토사라는 딸과, 그밖에도 두 딸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고레스는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를 무찌르고, 메디아인이 소유한 동부 이란의 영토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뒤 그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했다.

 

헤로도토스는 카스피 해 동쪽에 사는 유목민족들을 상대로 그가 벌인 원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고레스는 처음에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의 여왕을 무찌르고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아들이 포로로 있다가 자살하자, 어머니가 복수를 맹세하고 고레스를 무찔러 죽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고레스가 중앙 아시아를 정벌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멀리 변방에 있는 소그디아나에는 키레스카타 또는 그리스어로 키로폴리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는 고레스의 동방 정복이 얼마나 먼곳까지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트란속사니아).

 

 

                                      고레스의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이 그 창건자인 고레스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확대되어, 2세기가 넘게 존속했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레스는 위대한 정복자이며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들의 마음 속에서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스라엘의 모세 같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의 무용담은 세부내용에서 고대세계의 다른 영웅이나 정복자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갓난아기 고레스를 양치기가 맡아 기른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모세가 강가의 갈대 사이에 버려진 이야기를 연상시키며, 폭군 할아버지를 타도한 이야기는 다른 신화와 전설에도 흔히 나온다. 


고레스 전설은 일찍이 페르시아인들에게서 생겨나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페르시아인들의 고레스에 대한 존경이나 외경의 감정은 그대로 그리스인들에게 전달되었다. 크세노폰이 그리스인 동포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고레스를 통치자의 모범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고레스는 제국 창건자 이상의 존재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그는 고대 사람들이 통치자에게 기대한 탁월한 자질의 상징이 되었으며, 용맹하면서도 관대하고 아량 있는 정복자로서의 영웅적 특질을 지녔다. 


그의 인품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져, 그들 자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영향을 미쳤고, 로마인들이 전하는 전설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 이란은 고레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브리태니커 백과  R.N. Frye 글

"고레스(키루스) 2세"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2k1115b

                            

                                                              참고문헌

                                            The Heritage of Persia : R. N. Frye, 1963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 A.T.E. Olmstead, 1948

 

 

 

 

            고레스 (2) -성경과 페르시아-

  배철현 박사는 연세대학 신대를 졸업후 도미,
줄곧 하바드대 대학원에서 고대근동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마치고,

창조사학회 아카데미에서 “고대 창조신화와

비교연구론”과 “성경과 페르시아” 강의를 진행하였다.

                 고레스,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종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 2세: 주전 559~529)은 이른바 고레스 칙령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유대 민족이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구약성서에는 고레스를 여러 구절에서 언급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는 고레스가 바빌론을 점령할 때(주전 539)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다니엘 1:21; 6:29; 10:1), 고레스 칙령은 역대기하 36:22-23, 에스라 1:1-4, 6:3-5 등에 기록되어 있다.

 

             고레스가 건설했던 파사르가데 왕궁.

                 접견실의 석벽만이 옛 영화를 말해준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를 야훼의 ‘목자’ 또는 ‘메시아’로 불렀다. 주전 8세기에서 7세기에 활동한 이사야 선지자가, 약 150년 후에 등장할 고레스 대왕을 언급한 것에 대하여, 18세기 말에 되더라인(D derlein)은 이사야서 40장에서 66장까지의 저자는 고레스 대왕 시절에 활동한 ‘제2 이사야’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보수 유다교와 기독교 학자들은 주전 8-7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전체를 기술했고, 고레스 칙령은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러한 논란은 BC 2C로 추정되는 이사야 두루마리(쿰란)의 발견으로 

   이사야서의 진위 논쟁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고사(Antiquities)』에서는 고레스 대왕이 이사야서를 읽고, 유다인들을 귀환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무드 시대에 유대 랍비들은 이방인 왕 고레스를 ‘메시아’로 칭송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사야서 41장 2절의 인물은 고레스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임금 캠비시스(Cambyses) 1세와 메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레스의 외가쪽 증조할아버지는 갈대아 제국의 나보폴라살과 함께,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고레스의 유년시절에는 페르시아 왕국이 메대 왕국의 속국이었으나, 주전 550년 고레스 대왕이 메대 임금인 자기의 외할아버지 아스티야게스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면서, 명실공히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고레스 대왕은 첫번째 세계 제국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메시아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매우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고레스는 동양과 서양을 정복하여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첫 만남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고레스의 역사성을 객관적으로 고찰하여, 고레스가 어떤 인물인가를 재조명해 본다.

 

먼저 고대 페르시아어, 아카드어 그리고 그리스어 사료에서 고레스를 어떻게 평가했나 살펴보기로 하자.


                    BC 5세기 전후의 페르시아 영토

 

 

 

 

 

1. 고대 페르시아어 사료

 

고대 페르시아어가 쐐기문자로 쓰였지만, 아카드어나 수메리어와는 전혀 다른 알파벳 방식을 취한다.


고대 페르시아어가 고레스왕 당시에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다리우스 대왕 시절(주전 521-486)에 만들어졌는지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월터 힌츠라는 독일학자는 아래에 소개하는 다리우스 대왕의 베히스툰 석비(The Behistun Inscription)칠십번째 단락의 해석을 통하여, 고레스 시대에는 고대 페르시아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단락은 고대 페르시아어가 다리우스 대왕때에 처음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아후라마즈다의 은혜로 다른 종류의 문자, 곧 아리아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 문자는 토판이나 양피가죽에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파사르가데(psasrgadae)에 있는 고레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3개의 짧은 비문이, 후대 다리오 2세(다리오 대왕)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파사르가데 궁의

한 석벽에 부조된

고레스왕의 모습.

내신들이 파라솔을

받쳐들고 있다.

.

 

 

a. 나는 고레스 왕, 아케메니드(고대 페르시아) 사람이다.
b. 고레스, 위대한 왕, 캠비시스왕의 아들,

                                  아케메니드 사람이다.
c. 고레스 위대한 왕, 아케데니드 사람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인 고레스에 대한 사료는 없다.

 

 

                                2. 아카드어 사료


바빌로니아에서 사용한 아카드어는 고레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백 장의 쐐기문자 점토판에도 남아 있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어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널리 쓰이던 아카드어를 사용한 것이다.
 

메대 왕국을 물리친 뒤 고레스 대왕은 갈대아 제국을 침공했다.

『나보니두스 역대기에 따르면, 

주전 539년 10월 12일 고레스 대왕의 군대는 나보니두스 왕의 군대를 오피스(Opis)에서 대파했다. 

고레스의 장군 고르비야스(Gorbyas)가 바빌론을 미리 침공하고, 

2주 뒤 고레스 대왕의 바빌론 사람들의 환심을 얻는 일이었다. 

그는 나보니두스 임금이 바빌론의 마르둑(Marduk)신을 저버리고 

달의 신인 신(Sin)을 떠받든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제사장들과 시민들을 위하여, 

마르둑신과 그의 아들 나부(Nabu)신을 모실 에상길라(Esangila)를 바빌론에, 

그리고 에지다(Ezida)를 보르시파에 재건한다.


우룩(에렉)지방에서 발견된 한 점토판 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레스, 에상길라와 에지다를 재건한 사람,

         캠비시스의 아들 위대한 왕, 그가 바로 나다

 

호즈무즈드 라삼(Hormuzed Rassam)이 

1879년 바빌론의 말둑 신전에서 발견한 ‘고레스 실린더'(Cyrus Cylinder) 에 따르면, 

고레스는 바빌론성을 침공할 때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순조롭게 입성했다고 전한다.
 

현재 대영박물관과 미 예일 대박물관에 소장된 이 실린더는 

고레스 시대에 아카드어가 궁중문서에 사용되었고, 

바빌론 사람들에게 환영받았음을 입증해 준다.
 

고레스 대왕을 찬양하기 위해 쓰인 

[나보니두스의 버스 어카운트(Verse Account of  Nabonidus)〕에서도 

나보니두스를 마르둑신을 모시는 제사들의 적으로, 

고레스 대왕을 해방자로 묘사하고 있다.

 

 

 

 



          베히스툰석비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문자를 읽고 있는필자

 

 

                           3. 그리스어 사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고레스왕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헤로도투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잠시 종식시킨 

‘칼리아스 평화조약(The Peace of Callias 주전 499년) 이후 

페르시아 제국, 특히 이집트와 바빌론을 여행한 뒤 『역사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직접 페르시아를 여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몇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20세기 초까지는 헤로도투스의 '역사서'가 페르시아 제국사의 기본서가 되어 왔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과 고대 페르시아어의 이해로, 이 책은 재평가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만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그의 자료가 모두 사실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는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으는데 천재적인 역량을 발휘하였다.

 

때로는 비난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전하기도 한다. 

특별히 고레스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전설적인 요소로 각색하였다. 

그러나 『역사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전쟁, 도망 또는 아스티야게스(astyages)의 항복 따위의 기사는 

아카드어 사료의 내용과 일치한다.
 

에스킬루스(Aeschyus)의 연극 「페르시아사람들」은 주전 472년에 쓰인 것인데, 

그는 살라미스에서 직접 전쟁에 참가한 것을 바탕으로 고레스를 평가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제노폰은 

만 명의 용사와 함께 아닥사스다 2세를 제거하고, 

그리스파였던 그의 동생 고레스를 등극시키려고 페르시아 제국을 직접 방문하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고레스 유년기(Cyropaedia)"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가 고레스 3세에 대한 존경을 고레스 대왕에 반영하여, 

적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남기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닥사스다 2세의 그리스 주치의였던 크데시아스(Ctesias)는 

고레스를 사생아의 아들로 각색하였다.

 역사적으로 그의 자료는 거의 쓸모가 없다.

 

 

 

 

 

 

 

고레스 2세는 캠비시스 1세와 

메대의 왕 아스티야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Mandane)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레스의 이런 가족 배경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서』1권 91장에 나오는 

‘델픽 오러클’(델피신탁 Delphic Oracle)에 나타나 있다.
 

이 ‘신탁’에서 다음과 같이, 

‘나귀’가 메대왕이 될 것이라고 리디아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 나귀는 사실 고레스이다. 그의 부모는 같은 민족이 아니고

어머니 쪽이 더 귀족이며, 그의 아버지는 보잘 것 없는 출신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메대 사람의 왕 아스티야게스의 딸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네 편의 고레스의 유년 기사(『역사서』1.107~30)를 전하고 있는데, 

그는 고레스의 등극을 아카드(Akkad)의 사르곤(Sargon)대제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Romulus)와 비교 하였다.
 

고레스의 유년기는 제노폰이 쓴 『고레스 유년기(Cyropaedia)』란 작품에도 나온다. 

고레스가 그의 할아버지 아스티야게스의 궁궐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대신 역할을 했고 (Cyropaedia 1.3.1),

고레스의 어머니가 고레스에게 앞으로 메대 땅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유능한 말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Cyropaedia 1.3.15) 한다.

 

 

 

 


                                  1. 메대정벌

 

 

고레스 대왕의 파사르가데에 있는 아파다나 궁(집견실)의 유적.고레스가 세운 세계제국은 동·서양 문명교류의 시작이었다.

  

 

 

                                2. 리디아 정벌
 

시메리아인 (Cimmerian)들이 

아나톨리아의 프리지안(Phrygian)의 수도 고르다움(Gordium)을 주전 676년에 멸망시킨 후부터, 

아나톨리아의 맹주는 리디아로 바뀌었다.

 

주전 560년부터 전설적인 크로에수스(Croesus)가 리디아를 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델피 신탁’을 받고, 

크로에수스는 바사제국과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주전 547년 리디아-바사 전쟁이 

갑바도기아의 프테디아(Pteria)에서 시작되었다.(헤로도투스 1.76).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전쟁이 11월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혹독한 겨울 날씨로 양측이 모두 후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레스는 후퇴하는 척하다가 

크로에수스를 협공하여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를 전소시켰다.

 

고레스와 휴전계약을 맺었던 밀레투스(Miletus)를 제외하고는, 

이오니아인(Ionian)과 아에올리아인(Aeolian)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 도시들이 거의 페허가 되었다.
 

고레스의 이 리디아 정벌은 

후에 있을 알렉산더가 일으켰던 바사-그리스 전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3. 동편정벌


고레스는 주전 546년부터 540년까지 동편의 나라들 

파르티아,드랑기아나, 아리아, 코라스미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간다라, 스키타이, 

사타귀리아, 아라크시아, 마카를 정벌하였다.                    

 

 

                              4. 바벨론 정벌


바벨론의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 왕이 말둑 신을 버리고 

(Sin)신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아들 벨샤살(Belshazzar)에게 바벨론을 탁정하고, 

아라비아에 있는 테이마(Teima)로 10년동안 칩거 생활을 했다.
 

주전 543년,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으로 돌아와 고레스의 위협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제사장들과 바벨론 백성들의 불만으로 헛수고였다. 

더구나 자그로스에 있는 구티움(Gutium)의 통치자인 구바루(Gubaru)가 

나보니두스를 배반하여 고레스에게로 투항하였다.

 

고레스는 오피스(Opis)의 남쪽에서 티그리스강을 건너 바벨론으로 진격했다. 

바벨론시를 가로지르고 있는 유프라테스강을 통해 바벨론 성을 침입하였다.


다니엘서 5장에 의하면, 

벨샤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져온 거룩한 기명으로 향연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나보니두스 역대기』(Nabonidus Chronicle)는 구바루와 그의 군대가 전쟁을 하지 않고 

바벨론성에 침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성에 들어갔을 때,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를 ‘해방자’로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벨샤살은 처형되고, 

나보니두스는 카르마니아(Carmania)로 귀양을 보냈다.

 

 

 

 

고레스는 이전의 정복국가들이 행했던 것과는 달리, 

정복 당한 국가의 신들을 존경하는 종교 유화정치를 폈다. 

그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사실은, 

그의 종교 유화정치의 한 부분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야훼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전한다.

에스라 6장 8절에 의하면, 

고레스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건축을 위하여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고 전한다. 

학개와 스가랴서에서는 고레스의 재정적인 도움은 말하지 않지만, 

이런 정책은 고레스의 공식 정책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레스가 70세(주전 530년)가 되던 해, 

그는 아랄해(Aral Sea)에 있는 마싸게테(Massagetae)를 침공한다. 

그래서 거기에 야하르테스강 옆에 사이로폴리스(Cyropolis:현재명 구로카쓰)를 세운다. 

그러나 주전 530년 7월에 고레스는 그곳에서 전사한다.

 

그래서 그의 시신이 다시 바사왕국의 파사르가데로 옮겨져 장사되어진다. 

아리안 (Arrian 6.29)에 의하면,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인간! 나는 캄비시스의 아들 고레스, 바사제국을 세웠고 아시아의 주인이다.

 나와 내 비문에 원한을 품지 말아라.

 

 




고대 페르시아의 민족종교였던 배화교의 신전터. 페르시아는 자신의 종교를 속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각 민족 고유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유화정책을 폈다

  고레스 대왕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그의 계단식 무덤

구조가 이채롭다


 

최초의 제국 건설자, 아시아의 맹주, 이사야가 ‘메시아’와 ‘목자’라고 불렀던 고레스는, 

우리가 기대한 만큼 그렇게 화려한 궁궐이나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파사르가데에 있는 그의 궁궐과 무덤은, 

후대 바사왕국의 다른 왕들의 규모와 비교하면 아주 작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향했던 다언어, 다문화주의 때문이었다.

동서양의 많은 정복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었기에, 

이제 그의 제국에는 바사와 메대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제국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 

정복한 나라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실제로 그 문화를 바사 제국 건설의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제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당시 비문(碑文)은 전통적인 언어였던 엘람어나 아카드어를 사용하였다.

 

건축 양식에서도 이런 문화 융합과 새로운 문화 창조의 성숙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왕국이나 무덤의 양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소아시아, 그리스 문명의 단순한 융합체 같지만, 

실은 다문화를 포용해서 새롭게 변신을 했던, 

진정한 바사제국의 문화가 표현된 것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고레스 대왕의 청사진이 아니었던가 싶다.


                                              출처 http://www.theorich.com/  한국창조사학회

                                                                                                       [출처:창조사학회]

 

 

 

 

               [페르시아 기행]

                          1. 제국 건설한 고레스 왕의 무덤

 

 

이란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던 고고학 발굴을 금지시켰고 

특히 서양학자들의 방문을 극히 제한하고 있다

7세기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화는 

극복돼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쐐기문자 등 고대 근동어(近東語)를 전공한 철현(38) 박사는 

한국 창조사학회와 함께 이란 당국의 특별허가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유적지를 탐사했다

고대언어학자 배박사가 돌아본 '동서양 문명의 다리' 페르시아 기행을 시리즈로 싣는다

 

중동의 허리 자그로스 산맥에 자리잡은 이란은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다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 페르시아(BC 559~333)로부터 시작되는 장구한 역사동안 이란의 영토에는 

동서양의 비바람이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다. 

동양으로 뻗어 가려는 유럽의 야망과 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아시아의 염원이 

이란의 옛 땅인 페르시아에서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악수하였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동양의 문명은 

이곳 페르시아를 거쳐 지중해 너머의 그리스로 전달됐고

그곳을 중심으로 뒤늦게 꽃 피운 서양문명의 밑거름이 됐다. 

페르시아는 동서 문명의 다리였던 셈이다

이란의 곳곳에 널려있는 유적들이 그런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는 파사르가데. 이란의 남쪽 사막 한가운데에 그 흔적이 있다

테헤란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라즈에 도착한 뒤 

버스로 다시 사막에 뚫린 비포장도로를 87㎞ 정도 달렸다

이란의 7월은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 더위다

터덜거리며 두 시간쯤 달려 몸이 거의 녹초가 될 무렵

파사르가데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나타났다

파사르가데는 시조(始祖) 고레스(Cyrus)가 

페르시아를 세계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수도다.

 

고레스는 BC 576년에 당시 메대국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봉신이었던 캄비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BC 559년 반란을 일으켜 메대 왕국을 전복시켰다

당시 메대 왕국의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카바도기아.파르티아.드랑가니아.아리아.코라스미아.박트리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레스의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유화정책이다

당시 바빌론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레스는 

전쟁에 승리하자마자 칙령을 발표, 이들을 해방시켰다.


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는 그를 '야훼의 목자' '메시아' (이사야 44 28절과 45 1)로 불렀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헌도 

그를 '온 세상의 왕, 지구 네 축의 왕' 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고레스의 무덤은 파사르가데의 남쪽 끝, 동서양을 잇는 '왕의 대로' 선상에 있다

외형은 거의 완벽하게 보전돼 있었다

무덤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밑바닥 높이가 5.5m인 모두 6개의 사각 계단형으로 이뤄져 있고

그 위에 높이 5.5m인 석실이 있다.


이란 관리인의 허락을 얻어 무덤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 석실에는 창문이 달린 이중문이 안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그 안에 

고레스의 금빛 관과 그의 시신이 있었을 것이다

BC 325년 세계 제패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찾아와 

무덤이 도굴된 것을 보곤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그리스 역사학자 아리안이 쓴 '아나바시스' 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이미 도굴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무덤 근처에 있던 고레스의 궁궐에서 6t의 금괴를 가져갈 수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레스는 이런 도굴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무덤 안에 적었다고 전한다.


"인간들아! 나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캄비세스의 아들 고레스다

 나는 아시아의 주인이다

 나와 내 기념 건물들에 원한을 품지 말아라."

 

고레스의 무덤은 크기나 장식 등에서는 세계제국 창건자라는 위엄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수했다

그러나 건축양식에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잘 반죽된 듯 조화를 이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돌이 귀하기 때문에 일찍이 진흙벽돌로 건물을 지었다

벽돌을 굽듯이 진흙을 다져 견고성과 내구성을 높였고

역청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구라트' 라 부른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돌이 비교적 많은데도 불구

그때까지 3천년간 내려온 메소포타미아 신전 건축 양식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6개의 계단으로 주초를 이루는 지구라트는 

근처의 유적지 '초가 잠빌' 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방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고레스 무덤은 그것들의 축소판인 셈이다.

 

밑받침이 동양의 건축양식이라면, 석회암 석실은 서양의 건축양식이다

BC 547년 리디아와 이오니아 정벌후, 이곳들로부터 석공들을 데려왔다

그들을 통해 석실이 만들어졌다.

 

BC 1100년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는 

그리스로부터 온 이오니아 사람들을 중심해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 사람, 아시리아 사람, 페니키아 사람, 이집트 사람들의 문화와 접촉하여, 새로운 문명인 이오니아 문명을 태동시킨다

위대한 철학자 탈레스와 역사학자인 아낙시맨, 아낙시메네스를 배출해내고 

과학적인 관찰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건축 양식을 이루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식이다

이런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에베소에 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전 양식이 

바로 고레스의 무덤의 석실에 축약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수천년동안 나름대로 키워온 이질의 문화가, 

기원전 6세기 고레스 무덤에서 만난 것이다

양쪽의 문화가 절제된 형태 속에, 이토록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사실에서, 

당시 페르시아 제국에선 동서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들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문화로 꽃피운 것이다.

제국의 웅지와 함께, 그들이 지향했던 평화와 조화의 정신도 읽을 수 있다.
한 가운데 근엄하게 앉아있는 다리우스 대왕은, 

오른손에는 통치권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평화를 뜻하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고대 근동지방에서 왕권 또는 신권을 상징했던 발판 위에 그의 발이 놓여 있다.


다리우스 대왕 뒤편에 세자인 크세르크세스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경의를 표시하면서, 

왼손에는 연꽃을 든 채 서 있다

그 밖에 헌작(獻爵) 대신과 무기 감독관이 크세르크세스 뒤쪽으로 서 있다

다리우스 왕좌 앞에는 두 개의 향로가 놓여 있다

향로는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의식에 쓰이던 것이다.

 

다리우스대왕과 크세르크세스왕은 그들의 민족.종교.언어를 대표하는 말로, 페르시아 대신 아리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자신들이 '아리야 종족' 이며, 언어는 '아리야어' ,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행(正行)이 기본 교리인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 아후라 마즈다를 '아리야인들의 신' 이라고 기록했다. 이란의 가장 오래된 문서이며, 아후라 마즈다 종교의 경전 '아베스타' (BC 12세기경)에서 '아리야' '조화로운.숭고한' 의 의미로 쓰였다. 아베스타에 나오는 '아이리야만' ()은 평화의 신이며, 동시에 혼인을 관장하는 신이다. 부조물 중앙에 있는 두 향로와 다리우스 부자가 들고 있는 연꽃은, 바로 아리야의 정신세계 '평화와 조화' 를 상징하는 것이다.


1940년대 들어와, 히틀러를 중심으로 나찌는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개념인 아리야를 인종개념으로 변질시켰다. 고대 인도의 고도로 발달된 문명은, BC 15세기경 그곳을 침입한 아리야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곧 유럽인들의 문명이라는 억지 주장을 폈다. 히틀러는 게르만계 아리야가 지상의 유일한 창조적인 집단이며, 인류의 위대함과 진보의 유리한 자원이라 해석하기에 이른다. 독일제국이 아리야의 정점이며, 아리야를 보존 시키는것이 독일, 게르만족의 생존뿐만 아니라 인류 생존에 절대 필요하다는 거짓 신화가 만들어진다. 최우수 종족 독일인의 순수한 피를 유지해야한다는 허상의 결과가, 20세기 최대의 죄악으로 꼽히는 유대인 대학살이다
.

정복한 국가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다언어주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펼쳤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아리야 정신이, 히틀러에 의해 '전쟁과 파괴' 의 상징으로 전락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배철현<미 하버드대 문헌학 박사>

 

 

 

 

                                                             출처 블로그 > 주님과 함께
                                                                                                         원본 http://blog.naver.com/psalmluv/30004673654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14)]

 

           고레스의 칙령이 발견된 악메다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에게 해방령을 내린 고레스 왕의 칙령이 발견된 악메다(Achmetha,에6:1∼2)는, 메대제국 수도로, 헬라어 명칭은 ‘엑바타나’(에크바타나)이다.

 

 

  후에 페르시아 제국파르티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은 현재 이란의
테헤란 남서쪽 약 337㎞ 지점인 하마단(hamadan)으로, 알반드(Alvand) 산의 북동쪽 기슭 근처에 있는 평야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이곳까지는 국내선 비행기가 있으나, 일정상 비행기편이 맞지 않아 버스로 일행과 함께 출발했다.

테헤란에서 337㎞나 되는 이곳을 하루에 왕복하기 위해 아침 식사는 중간에 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국도를 따라 2시간여쯤 달리자 그때서야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잠시 휴게소에 들러 준비해온 음식을 간단히 먹었다.

이 날이 1월29일 한겨울이지만 우리나라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2시간 이상을 달려 성경에 악메다로 나오는 하마단에 도착했다. 


하마단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성경에 나오는 악메다 궁터였다.

궁터에 도착하자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고, 궁터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악메다(엑바타나)는 BC 678년 메대 사람인 데이오세스(Deioces)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BC 550년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에게 점령당했으며,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BC 33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다리오(다리우스) 3세로부터, 다리오가 예루살렘 재건을 허용한다는 고레스의 칙령을 빼앗았다.

 

이어 차를 몰아 악메다 시내에서 서쪽으로 5㎞ 지점의 압바스 아바드(Abbas Abad) 계곡에 있는 아하수에로왕과 다리오왕의 돌비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눈이 내리고 50cm는 족히 쌓인 눈길에 빠지며 비문에 이르렀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 터라 우산을 쓰고 비문을 사진에 담은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바위에 새겨진 비문 내용의 영어 번역은 이런 것이었다.


“위대한 하나님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 모든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하시며, 이 땅과 하늘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 그분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셨고, 그분은 쎌서스(아하수에로)왕을 세우셨다.

많은 왕들 중에서 뛰어난 왕, 많은 통치자들 중에서 뛰어난 통치자, 나는 위대한 왕 쎌서스, 왕중의 왕이며 수많은 거민들이 있는 땅의 왕, 끝이 없는 경계를 가진 거대한 왕국의 왕 아케메니안의 군주 다리오의 아들이니라”

 

이 비문 하나를 사진기에 담기 위해 어렵게 찾은 것은, 바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아하수에로왕의 비문이요,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나와 다시 악메다 시내에 있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 이 무덤이 사산 왕조의 애즈데기르드(Yazdegird,399∼420년)왕의 부인의 묘인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어쨌든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더불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하만의 흉계로부터 구원한 유대인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순례지이기도 하다.

나 역시 눈내리는 복잡한 하마단 거리에서,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 있는 곳을 보자, ‘죽으면 죽으리라’(에4:16)는 그의 각오가, 성지를 찾은 내 마음을 새롭게 감동시키고 있었다.

 
에스라 6:1∼2에 의하면 다리오왕 때, 이 악메다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한다는 고레스의 칙령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이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조서)이 발견됨으로써, 스룹바벨 성전으로 지칭되는 제2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수월해질 수 있었다.

이후 악메다는 파르티아 왕들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으나, 사산(Sassan) 왕조 하에서 쇠망하였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된 후 하마단이란 도시가 들어섰다. 오늘날 이곳 하마단은 옛터 위에 세워져 있어,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마단(악메다)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과, 1923년 다리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금과 은으로 된 2개의 받침 쟁반과, 크세르크세스(쎌써스,아하수에로) 2세의 기둥 뿌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두 왕이 악메다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악메다 궁터에서는 돌사자 또는 상 쉬르(Sang Shir)라고 부르는 사자상이 발굴되었다. 이 돌사자상은 길이 2.5m, 폭 1.5m, 높이 1.2m의 매우 큰 것으로, 마게도냐에서 전사한 헤파에스티온(Hephaestion) 장군을 기리리 위해
알렉산드리아
의 석공들이 조각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 사자상은 이곳의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발굴된 석사자상이 있는 가자 공원 역시 눈이 내려, 사자상은 그 옛날 영광을 생각하듯 녹는 눈에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photobib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