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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은 헬몬산 기슭의 작은 마을에 거대도시를 신설하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 명명했다.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붙은 도시가 여럿 있었지만, 아무 도시에나 로마 황제의 이름 혹은 칭호를 붙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은 대규모 도시여야 했고, 도시의 가장 주요 지점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다. 명목상의 신이 아니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헤롯 빌립이 신설도시에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뜻했다. 한마디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황제의 도시였다.
그림=김회룡 기자 | |
바꾸어 말해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로고스를 따르겠다는 고백이었다. 경쟁자를 가차 없이 짓밟고 최고 최대를 지향하는 거대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 제일주의,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늠하는 마모니즘(mammonism)으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예수님께서 진리 안에서 보여주신 자기 비움의 영원한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었다. 한마디로 자기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버림을 통해 열어 주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길을 좇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황제의 길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좇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논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오히려 황제의 길을 거슬러 예수의 길을 자발적으로 걷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등진다는 말이 아니다. 황제의 논리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예수의 길을 좇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일 수 있는 것은 본래 교회의 구성원들이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황폐화시키는 황제의 길을 배격하고,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주는 예수의 길을 좇는 예수쟁이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거대하고 화려한 황제의 도시에서 걸인 같은 행색의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지 2000년이 지났다. 거대했던 로마제국도, 스스로 신으로 군림하며 인간의 경배를 받던 로마 황제도,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제압하던 황제의 도시도 지금은 모두 폐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탈리아에서 동유럽과 터키를 거치고 중동을 돌아 북아프리카를 관통한 뒤 스페인으로 올라가 다시 오른쪽으로 서유럽 대륙을 지나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기까지 그 옛날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과 로마황제의 흔적치고 폐허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2000년 전 황제의 도시에서 걸인 같은 행색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받았던 예수는 지금도 인류의 구세주로 경배받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이 옳았던 것이다.
2000년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교회가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는 언제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교회가 황제의 길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길을 좇지 않고, 예수를 이용해 황제의 길을 도모한 것이다. 황제의 길을 도모하는 교회는 설령 황제와 같은 힘을 지닌다 한들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워진 참되고도 영원한 교회일 수는 없다. 황제의 길의 종착역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폐허일 뿐인 까닭이다. 하지만 비록 소수일망정 진정으로 예수의 길을 좇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아무리 황제의 논리가 판을 쳐도 이 세상은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 황제와 예수의 승부는 이미 역사 속에서 예수의 승리로 결판났기 때문이다.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그림=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