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 기념교회(http://tong.nate.com/travel)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빌립보의 광장의 서쪽면에 있는바울이 기도하고자 모인 여인을 만난 전통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Krenides강과, 현재 만들어 놓은 세례처이다.
바울이 세례주던 곳(루디아의 기도처)
루디아 기념교회 내부
기념교회안의 세례대
교회안 돔에 그려져있는 모자이크 그림
기념교회안의 바울
바울과 루디아
기념교회안의 루디아 성화
루디아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과 빌립보 전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 이 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비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
현재 빌립보에는 바실리카 회당, 루 디아의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 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루디아 기념교회
이은주 연구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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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북쪽으로 2㎞떨어진 곳에 루디아 기념교회가 있다. 루디아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빌립보에서 처음 입교한 자주장사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곳의 특징은 빌립보의 옛 이름이 왜 샘이라는 뜻의 “크레미데스”였는지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누구라도 알만큼 물이 많은 지역이다. 간기테스(Gangites) 강가인 것도 그 이유에 속할 것이다.
루디아 기념교회는 1972년도 새워졌고, 물이 많아서인지 루디아 기념교회에 20~30m 조금 떨어진 곳에 강물이라고 말하기에는 협소하지만, 한겨울에도 물이 흐르는 개울 한 중앙에 침례터가 있다. 이 침례터를 루디아 당시의 빨래터라고들 하지만 근거 자료는 없다.
이 곳에 관한 자료는 빌립보시 밖에 위치한 아치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이 시에 승인되지 않은 종교를 갖고 들어오는 것을 금지함”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이 빌립보에 발을 딛고 빌립보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기도처를 찾았다. 그런데 그 기도처가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사도행전 16장 13절).
빌립보에 유대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회당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문에 적힌대로 종교적 제약이 있어기에, 이곳의 유대인들은 간기테스(Gangites)강가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회는 흐르는 물이 있는 야회에서 갖는 것이 통례였다 (김경진,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성서주석-사도행전,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343~355). 따라서 바울이 찾은 기도회와 기도처는 바로 도시밖 강가인 이곳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루디아의 고향은 두아디라 (사도행전 16장 14절)이며, 루디아라는 이름은 두아디라의 리디아(Lydia)에서 비롯되어진다 (한상인, 신약고고학과 배경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177).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충청도 출신의 부인이 새로 이주해오면 이름보다는 충청댁이라고 불렷던 것처럼, 루디아도 이렇게 불렸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유물인 편지가 1972년에 빌립보에서 발굴 되었다. 그 내용에는 두아디 태생의 자주색 염색업자 안티오쿠스에게 빌립보 시의 후원자라는 명예를 준다( E. M. Yamauchi, 53, C. C . Vermeule, Roman Imperial Art in Greecr and Asia Mainor, Cambridge: Harvard Universtity Press, 1968, p2370)는 것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안티오쿠스가 루디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 루디아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유물이라 여겨진다.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도 바울과 빌립보 지역의 기독형제들에게 자신의 집까지 개방(사도행전 16장 40절)할 정도의 헌신적인 루디아의 생활 태도와, 그보다 더 그녀의 가정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1972년도에 세워진 루디아 기념교회당 내부 정면에는 간결하게 사도 바울과 루디아가 스테인 글라스로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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